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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에서 무단 재배포는 금지한다고 하는 데 독자니깐 이해해 주시리라 생각하며 좋아하는 선배의 글을 올려드립니다. 한편은 진중권 선생을 위함이고, 한편은 꼼수다만을 이야기 하는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은 글이어요^^
글로벌 이슈를 가르치는 과목에서 학생들에게 학기를 마무리하며 마이클 무어가 만든 <자본주의 러브스토리>를 보여주었다. 약간 길고 메시지가 강한 영화라서 걱정을 했었는데 의외로 학생들은 지루해하지 않았다. 진지하게 영화를 보고 자신들의 앞날에 대한 걱정을 풀어놓는 학생들을 보며 위기의 시대라는 것을 절감할 수 있었다.
이 영화가 우리에게 잘 다가갈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는 마이클 무어가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에 있다. 그의 영화는 고통을 만들어내는 기득권과 사회에 대해서는 신랄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무어는 배제되고 고통 받는 사람들의 위치에서 체제와 제도를 바라본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를 인터뷰하고 공장에서 쫓겨난 사람들, 집을 잃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끝까지 듣는다. 체제 자체를 분석하기보다는 그 체제가 어떤 고통을 만들어내고 사람들이 그 고통을 어떻게 겪고 있는지를 경청하며 공감을 이끌어낸다.마이클 무어의 영화에는 진보의 항상심이 있다. 진보의 항상심이란 고통 받는 사람의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변화를 도모하는 것이다. 이 항상심을 유지할 때 주변의 고통과 슬픔에 대해 민감해지고 공감하는 시간을 가지게 된다. 그동안 보이지 않던 유령과 같은 사람들의 고통과 슬픔을 느끼게 되고 그것이 나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의 공통의 운명을 발견하게 된다.
무어의 영화를 보면서 우리 사회의 진보는 어떠한가를 생각해봤다. 이 정권이 들어서고 난 다음 지난 4년간 진보세력의 감정상태는 ‘오늘의 교육’ 편집위원인 이계삼 선생이 지적하였듯이 한마디로 조울증이었다.
압도적 표차로 이명박 대통령이 당선되자 급격한 ‘울증’ 상태에 빠졌다. 많은 진보인사들이 최소한 10여년은 보수의 시대가 될 것이라며 절망에 빠졌다. 그러자 예상하지도 못하게 광우병에서 비롯된 시민들의 항쟁이 시작되었다. 다시 희망을 이야기하였다. ‘조증’ 상태였다. 그러다 한순간에 다시 싸늘해지고 다시 ‘울증’ 상태로 돌아섰다. 그 이후 우리는 롤러코스터를 탄 것처럼 ‘조증’과 ‘울증’을 미친 듯이 왔다 갔다 했다. 그리고 다시 조증의 시간이 돌아왔다. 보수를 향한 파상적인 공세와 조롱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우울증에도 그 나름의 가치가 있다. 우울한 감정일 때 우리는 훨씬 더 근본적인 성찰을 하게 된다. 정권을 바꾸는 것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삶의 문제들을 생각하며 보다 더 근원적인 전환이 어디서 어떻게 일어나야 하는지에 대해 반성하게 된다. 돌이켜보면 지난 4년만큼 우리가 생태,소수자, 인권, 비정규직, 실업과 같은 삶의 고통에 대해 근본적으로 생각해본 적도 없을 것이다. 우울증이 문제인 것은 이것들이 해결될 가능성이 희박하다보니 자기연민에 빠져 허우적거리게 된다는 점이다.
반대로 울증이 조증으로 바뀌면 우리는 순식간에 이 질문들을 잊어버린다. 조증은 울증 상태에서 우리가 성찰하고 반성한 것을 한순간에 망각해 버리는 유혹에 쉽사리 넘어간다. 고통에 공감하기보다는 정권을 교체하기 위해 무엇이 가장 효율적인 전략인지만을 생각하게 된다. 고통과 슬픔에 대한 경청과 공감은 사라진다. ‘선택과 집중’이라는 이름으로 고통을 서열화하게 된다. 어떤 고통은 부차적인 것으로 밀려나게 된다. 조증은 망각의 감정이다.
사실 증권 시장만 보더라도 성장 위주의 자본주의가 우리를 항상적인 조울증 상태로 만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위기와 불안정이 만성화되는 금융자본주의에서는 더욱 그렇다. 따라서 우리를 끊임없이 조울증 상태로 만드는 체제와 단호히 단절하고 진보의 항상심으로 돌아가야 한다. 여전히 우리 사회는 현재의 권력에 대한 조롱으로 무마되지 않는 고통으로 가득 차 있다. 그 고통과 슬픔의 소리를 듣고 알리고 함께하는 것이 그들을 조롱하는 것보다 더욱 필요하다.
<엄기호 | 연세대 원주캠퍼스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