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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 깊은 나무는 백성, 내가 뿌나에 고마와하는 이유
자유게시판 > 상세보기 | 2011-11-19 13:57:37
추천수 0
조회수   1,539

제목

뿌리 깊은 나무는 백성, 내가 뿌나에 고마와하는 이유

글쓴이

김영진 [가입일자 : 2004-11-29]
내용
뿌나에 대하여 글을 적으려고 하는데 아래에 글이 올라오더군요. 그래도 그냥



대한민국을 5천년 단일민족 국가라고 하는데에는 그 근본적인 이유로 중국과 다른 언어를 들고 있고 그것이 가장 큰 차이입니다. 하지만 사실은 세종이 한글을 창제 반포하기 전까지 그리고 그 후로도 계속적으로 중국의 변방 혹은 스스로 소중화라고 하면서 집권층에서 중국의 일부로 주장을 합니다.



하지만 대한민국이 일제의 식민통치에 버티어 내고 현재의 모습으로 된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한글 때문입니다. 집권층에서 만들어낸 문화적 소산을 보면 중국의 역사적 부속물과 같은 역사와 문화적 모습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한민족의 정체성이 만들어 진 것도 역시 한글이 가장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지난 14회의 뿌리깊은 나무에서의 대사 중에 가장 감동적인 부분은 강채윤과 세종이 벌이는 논쟁입니다. 채윤의 태평성대라는 말을 받아서 세종이 내밷는 "임금이 태평한 태평성대를 보았느냐. 내 마음은 지옥이기에 그나마 세상이 평온한 것이다"고 답입니다. 그리고는 자신이 하는 일에 참여해 줄 것을 부탁하고, 거절하는 강채윤에게 계속해서 싸우자고 세종은 부르짓습니다.



저는 이 대사 보다 도 더 이 드라마의 핵심은 13회에서 강채윤과 재회 후 궁으로 돌아가는 소이의 말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직 내가 할 일이 남았다”고 말하는 소이의 대사입니다. 그리고 세종을 만나는 소이의 이야기를 보면 한글 창제는 마치 소이의 일인 것인 양 이야기합니다.



여기서 작가가 가지고 있는 역사관과 정치관이 들어난다고 생각이 됩니다. 정치 체계란 그 시대의 민중들의 이해와 요구를 반영하고 그들의 필요에 답해주는 것이라는 민본주의 사상이죠. 김영현 작가의 뿌리 깊은 나무에는 민중을 대변하는 사람들이 한글의 창제에 직접 참여합니다. 그 시대의 가장 아픈 상처를 간직한 백성들….



뿌리 깊은 나무에서 말하는 정치관이 신권 위주 또는 사대부 위주의 정치 체계에 관한 부분은 드라마의 한 갈등의 축이기는 하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아닙니다.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누구를 위한 정치를 할 것인가를 되물어보고 그것을 어떻게 풀어갈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김작가가 고마운 것은 백성이 역사의 주체가 아닌 적은 단 한 순간도 없었습니다. 우리 민족이 있게 한 한글의 창제과정을 나름대로 풀어서 드라마를 썻다는 것 보다는 그 드라마 속에서 힌글을 창제하는데 근본이 된 백성이 있고, 백성이 참여하여 한글을 창제하였다고 드라마를 적는데 있습니다.



왕은 단지 백성의 이해와 요구를 수용하는 창구였고, 한글의 창제는 백성의 요구가 있었고 그에 순응하여 임금이 따른 것이니까요.



그것이 승리의 역사이고 창조의 역사가 되는 진정한 길이기도 하고요.



현대로 돌아와서 우리는 발전된 정치체계를 가지고 있고, 피를 흘리며 민주주의를 지켜낸 역사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번의 실수로 재벌과 1%를 위한 정권을 만들고 지난 훌륭한 역사를 되돌리는 우를 범하였습니다. 다행히 박원순 시장을 시민들이 세우므로서 잘못된 역사를 바로 잡을 수 있는 교두보를 마련하기는 하였습니다.



뿌리 깊은 나무는 집중을 해서 보아야하는 드라마이고, 극을 구성하는 배우, 감독, 작가들이 모두 훌륭한 것은 사실입니다. 드라마의 내용이 대한민국 사람이면 누구나 자랑스러워 하는 '한글'의 창제 과정이 들어있습니다. 하지만 이 드라마가 더 소중한 것은 그 드라마의 한글의 창제 과정에 핍박받던 백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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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두호 2011-11-19 14:05:42
답글

" 사실은 세종이 한글을 창제 반포하기 전까지 그리고 그 후로도 계속적으로 중국의 변방 혹은 스스로 소중화라고 하면서 집권층에서 중국의 일부로 주장을 합니다. "<br />
<br />
이 말씀만 살짝 빼고 백만프로 동감합니다.. <br />
<br />
<br />
<br />

김영진 2011-11-19 14:12:37
답글

역사적으로 소중화라는 부분이 조선에서 부정된 적은 없습니다. 임진왜란때에도 영향을 주었고, 중국에서 청나라가 들어서는 광해군 시절에 약간의 독립적인 모습을 보이다가 병자호란 이후에는 그것도 흐지부지되었죠. <br />
<br />
소중화사상은 조선의 근간이었습니다. 조선 후기에 청의 쇄퇴가 오면서 약간씩 퇴색하였지만, 그 후로 친일, 침미가 그 자리를 대체했을 뿐입니다.<br />

windouz@korea.com 2011-11-19 14:18:02
답글

영진님 말씀이 옳습니다.<br />
전 사실 이놈의 공자 왈 맹자 왈 유교 문화도 맘에 안들고<br />
한문이 한글보다 우선시 되던 시대도 맘에 안들고<br />
<br />
하여간 중국은 맘에 안듭니다 ^^;;;

남두호 2011-11-19 14:32:24
답글

소중화로 인식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br />
권력욕에 눈먼 어줍짢은 관료들의 이해 타산과 <br />
중국 중심의 질서를 무시 할 수 없었던 현실의 접점이었다고 봅니다.<br />
<br />
진정한 소중화론은 중국 사대가 아닌 한족에 대한 사대에서 비롯합니다..<br />
그런데 조선 5백년의 역사는 한족의 나라보다는 <br />
만주족의 나라인 청나라와 오래 유지 되었습니다..<br />
(물론 청나라도 한족의 문화에 동화

이병철 2011-11-19 14:48:52
답글

소중화론은 명의 멸망이후 즉 세종이후 한 참 지나서 광해군 지나서 인종때 효종때 일입니다. <br />
한족의 정통정권인 명이 멸망하고 청이 등장하자 우리가 문명국인 명의 뒤를 이었다는 문화적 자부심의 소산이지 <br />
이걸 다 존화주의의 산물이라고는 볼수가 없습니다. <br />
그외 고려시대에도 친원세력 집권기말고는 독자국가라는 의식이 강했습니다. 그외 조선 초기에는 더욱더 민족 자주성이 부각되었습니다.

김영진 2011-11-19 15:10:37
답글

소중화론을 보는 관점의 차이로 생각합니다. 소중화론을 청 멸망 이후 조선이 작은 중화라 보는 관점이지요. 하지만 동시에 이와같은 관점의 뿌리는 사대주의입니다. 사대주의를 강하고 큰나라을 섬겨서 지신의 독립을 유지하려고 하는 생각이라고 한다면 우리나라에서 그 뿌리는 정말로 깊고도 오래되었습니다. <br />
<br />
고려, 조선이라는 계급사회에서의 집권층이란 그 시대 다수의 사상을 대변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역사적으로 그런 길을 걸어

남두호 2011-11-19 15:18:57
답글

"조선의 독립성을 유지하였다면 누구를 위한 독립성이였는가가 판단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br />
정말 중요한 말씀이라 생각합니다..<br />
요아래 "뿌리 깊은 나무" 진성기 님의 글에 댓글로도 달았지만<br />
조산의 독립성은 바로 민의(민본)에 근거한 조선 성리학과<br />
그것을 지키고자 했던 군왕과 선비들의 힘이었다고 생각합니다..<br />
민중의 자생적 저항도 있기는 했지만 고려 시대에 비하면 민란은 훨

이승태 2011-11-19 15:29:06
답글

고려 마지막 왕이었던 공양왕이 이성계에게 권력을 넘겨준 해가 1392년이고, 명나라로부터 조선이라는 국호를 인정받은 해가 1393년 인데, 이성계는 명나라로부터 정식 국왕으로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에 고려권지국사(중국의 천자를 대신해서 고려라는 나라를 맡아 다스리는 관직)로 지칭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왕은 왕인데 정식 왕 노릇을 하지는 못했다는 것이지요. 명나라는 1401년에야 태종을 조선국왕으로 책봉한다는 공식 문서를 내줍니다.<br />
<

이승태 2011-11-19 16:09:24
답글

또 역사를 보는 관점은 가능한 객관적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민본주의 혹은 인본주의야 지금의 우리들에게는 공기만큼이나 상식적이고 보편적인 가치관이지만 당시 조선의 지배층이었던 국왕과 사대부들의 일반적인 관심은 아니었을 겁니다. <br />
<br />
즉, 세종과 같이 문화적 소양을 갖춘 뛰어난 군주나 몇 몇 어진 재상과 학자들의 마음 속에 백성들의 고초와 노고를 생각하고 돌보려는 마음이 있었을지는 모르겠지만 여전히 지배층들의

조영석 2011-11-19 17:27:31
답글

승태님 의견에 지극히 동감합니다.

chdufwldhr@naver.com 2011-11-19 17:43:57
답글

세종은 터미네이터 프로토타입입니다.

김영진 2011-11-19 21:18:30
답글

객관적인 관점이란 일견 중립적일 수 있다고 생각이 됩니다.<br />
하지만 문자를 특정 계급이 독점하던 시대, 기록을 특정 계급이 독점하던 시대에는 다른 계급에 관한 역사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조선시대를 보더라도 왕과 양반의 기록은 있지만 양민과 천민의 기록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일제시대를 보면 친일파의 기록은 있어도 독립운동가의 기록은 많이 남아있지 않습니다.<br />
<br />
지금 우리나라를 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양민과 노비출

이승태 2011-11-19 22:16:56
답글

왜 피지배계급의 역사가 없다고 생각하시는지요? 학문적 고증을 통하여 당시 사람들의 삶을 훌륭하게 재현해내는 역사 드라마나 영화들이 있습니다. 물론 기록의 양은 상대적으로 제한적이겠지만 전혀 없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br />
<br />
또한 피지배자들 스스로 기록한 역사가 없더라도 지배자들의 기록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드러나기도 하고요. <br />
예를 들어, 로마에 항거한 유대인들의 독립 운동이었던 마사다 언덕의 이야기는 당시

김영진 2011-11-19 22:58:37
답글

오해의 소지가 있게 제가 적은 것 같습니다. 없다는 것이 아니고 적다는 것이 맞습니다.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더 많은 연구를 통하여 당시의 민중들의 역사를 알아야 한다는 의도로 적은 말입니다. 우리가 왕이나 양반들이 무엇을 입고 음식은 무엇을 먹었는지 아는 것과 같이 동일하게 그시대를 산 백성들의 삶도 알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늘 보고나 들은 것은 왕, 양반, 군인들의 이야기 뿐이니까요. <br />
<br />
한글의 창제에 관한 부분은 생

이승태 2011-11-19 23:24:16
답글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한 것은 분명히 민본주의에 근거한 행위이고 우리 역사상 세종대왕보다 더 민본주의적 정신을 발휘한 군주도 없을 것입니다. 다만 조선 시대의 사정을 살펴볼 때, 한글의 창제의 과정을 아래로부터의 요구를 반영한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의 결정에 의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더 상식적이라는 것이죠.

김영진 2011-11-20 01:23:52
답글

요구란 필요성입니다. 백성이 만들어 달라고 해서 왕이 만들었다고 하는 것은 무리가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런 의미로 적은 이야기도 아니구요.역으로 생각하면 왕이 아무도 요구하지 않는데 자기가 필요해서 만들었다고 하는 것도 의미없는 이야기입니다. 아무도 사용하지 않을 것이란 것을 누구나 알테니까요. '나랏말쌈이 &#51585;국과 달라 백성이 어쩌구 저쩌구' 하는 훈민정음의 첫구절을 보면 계몽적인 의미가 더 강한 것도 같습니다. 하지만 그시대 백

이승태 2011-11-20 02:13:36
답글

김영진님은 본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지요. <br />
---------------------------------------------------------------------------------------- <br />
.... 그 드라마 속에서 한글을 창제하는데 근본이 된 백성이 있고, 백성이 참여하여 한글을 창제하였다고 드라마를 적는데 있습니다. 왕은 단지 백성의 이해와 요구를 수용하는 창구였고, 한글의 창제는 백성의 요구가

김영진 2011-11-20 10:01:24
답글

어제 밤에 아라비아의 로렌스 보면서 쓴 것인데 그 이후에 답글을 달으셨네요.<br />
<br />
예 저렇게 말을 돌리는 이유는 일단 왕을 중심으로 쓰는 역사가 저는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흔히 하는 말로 영웅주의 사관으로 대표적인 것이 우리나라의 세종과 이순신이니까요. 그것을 보완하는 것이 위에서 장황하게 적어 놓은 말들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료는 없으니 증거로 제시할 것은 없고 썰이 길어질 수 밖에 없었지요.<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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