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미인의 아버지인 조한욱 교수에게 와싸다에도 칼럼을 연재하라고 압력을 넣어볼까요?
<역사에 비친 우리의 초상> 저자인 조한욱 교수는 지금도 한겨레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는데
그 칼럼을 한겨레에만 연재하지 말고 여기에도 연재해 회원들이 편히 읽게 하라고 말이지요.
저번에도 한 번 말씀드린 바 있지만 조한욱 교수는 역사학 교수이면서도 영독불은 물론
이탈리아어, 라틴어까지 능통해서 번역쟁이질로 먹고 사는 제 기를 팍팍 죽이는 괴물급 천재인데
특히 더 마음에 드는 것은 불의와는 절대로 타협하지 않는 똥고집쟁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중동이 날조와 왜곡으로 반민주적 반민족적 행태를 보인다는 것을 알게 된 뒤로는
조중동에서(원고료를 한겨레보다 다섯 배나 더 많이 주는) 그 어떤 원고 청탁이 들어와도
단칼에 거절해버리고 뉴라이트를 쓰레기들이라고 하는 이 시대의 양심, 행동하는 지성이지요.
저와는 세상을 보는 시각도 거의 같고 또 불의와 절대로 타협하지 않는다는 공통점도 있어서
죽이 딱 맞아 너나들이를 하는 막역한 사이인데 만나면 서로 꽈배기를 꼬고 투닥거리기는 해도
내심으로는 이처럼 대단한 천재에 훌륭한 학자가 제 절친한 친구인 것이 심히 자랑스럽습니다.
여러 의식 있는 회원분들께서 조한욱 교수의 칼럼을 연재하면 좋겠다는 의견이 많이 있으면
제가 조한욱 교수에게 "야, 하라면 해!"하면서 여기에도 칼럼을 연재하라고 압력을 넣겠습니다.
혹시 또 압니까? 조한욱 교수가 칼럼을 연재하는 중에 정말로 개념 있고 멋진 댓글에 반해서
아, 이 멋진 친구를 내 딸에게 소개시켜주고 싶구나... 하는 마음이 들게 될지도...^^
그런데 한 가지 주의할 점도 있습니다. 조한욱 교수 성질이 불 같아서 저하고 같이 술마시며
정치적인 얘기 하다 의견대립이 생기면 "야, 이 개새끼야!"하는 욕도 서슴지않는 휘발유거든요.
욕하고 나서는 바로 "아,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하고 사과하는 착한 면도 있기는 합니다만.^^
조한욱 교수의 칼럼을 맛뵈기로 한 편 올립니다.
오컴의 면도날
윌리엄 오컴은 중세 말기를 대표하는 신학자다. 13세기 토마스 아퀴나스가 확립시킨 스콜라 철학은 개인의 신앙보다 교단의 권위를 앞세웠다. 14세기에 오컴은 그에 반발해 개인의 신앙을 중시했다. 그는 “교황은 물론 평의회도 오류를 범한다. 그러나 어딘가 진정한 신앙을 지키는 개인이 있어 교회 전체는 오류를 범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것은 유명론이라는 철학적 견해와 관련된다. 유명론이란 장미를 장미라 부르는 것은 단지 우리가 그렇게 이름 했기 때문일 뿐이란 주장이다. 모든 장미를 장미답게 만드는 속성은 없다. 사물은 개체로 존재할 뿐이고, 편의를 위해 우리는 사물에 명칭을 붙인다. 이것은 ‘오컴의 면도날’이라는 잘 알려진 문구와 연결된다. 그것은 ‘논리의 경제성’이라고도 하는데, 어떤 사물을 설명할 때 개념 도구를 적게 사용할수록 더 좋은 설명이라는 것이다. 설명할 때 다른 가설을 제시하지 않아도 된다면 가설을 내세울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역사교과서 집필 규정에서 ‘민주주의’를 ‘자유민주주의’로 바꾸려는 계획이 실현되고 있다. ‘민주주의’라는 말로 충분히 이해가 가능한데, 그 앞에 ‘자유’라는 말을 넣은 것은 사실상 논리의 경제성을 떨어뜨려 개념을 모호하게 만들려는 수작이다. 사회민주주의, 민중민주주의 등과 혼동이 된다고? 그런데 우리의 사회에서 사회주의는 완전히 적으로 규정되는 개념일까? 그 근본 취지는 함께 나눠서 같이 잘 살자는 것인데, 거기에선 배울 게 조금도 없다는 말인가?
대통령부터 같이 잘 살자고 ‘공생발전’을 강조하는데, “자유민주주의를 부정하는 의원은 북한에 가라”고 말한 의원이나 “자유민주주의와 다른 것을 구별할 필요가 있다”는 뉴라이트 계 현대사학회는 대통령의 의중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 자유민주주의를 누가 부정했나? 거기에 같이 잘 살자는 개념을 포함시키려면 ‘민주주의’로 충분한 것을. 쓸데없는 논란은 오컴의 면도날로 베어버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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