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까지 밀린 일 하고 점심 이후에 집을 나서서(저는 집에서도 일하고 나가서 일해주고 오기도 합니다. 직장인 아님) 투표한 다음,
인사동에서 들어온 일하면서도 사실 불안하고 조마조마했습니다.
특히, 18시쯤 인터넷에 뜬 기사로, 투표율이 생각 이하로 낮은 편이라 비상이 걸렸다는 걸 알고는 이거 야단났다 싶었습니다.
게다가 강남 3구는 지난 지방선거, 6.2 분당(분당과 강남이 비슷한 성향이라 본다면) 때보다 더 높은 투표율로 똘똘 뭉쳤다 하니
이번 선거 및 향후 정국이 최악의 상황으로 가는 것 아닌가 하는 불길한 짐작도 들었습니다.
개표가 끝나야 확정되겠습다만, 다행히 여유있는 표 차이로 따돌린 것 같아 가슴을 쓸어내렸습니다.
주문 들어온 일 제게 주는 인사동 가게의 사장 형님이 FTA 문제를 얘기하시더군요.
일단 상임위에서 표결은 무산시켰지만, 큰일 아니냐, 이거 통과되면 이 나라는 식민지 되는 거라고 걱정하십디다.
내곡동 사건, 선거 얘기(그 형님은 아침에 투표 못한데다 주소지가 사는 곳과 달라 일찍 퇴근하고 투표하러 가셨습니다), 많이 했는데,
우리나라 경제 전체가 작살나는 것이겠습니다만, 특히, 법률 시장, 의료 시장 등,
한미 FTA 체제로 가면 강남 부자들도 결코 유리할 것 없지 않느냐,
법률 시장 다 거덜날테고, FTA에 겹쳐 영리 병원 허용, 의료보험 체제 와해로 가면 강남 사람들도 결코 좋을 것 없을텐데,
더 똘똘 뭉쳐 투표한다니 어이가 없다는 얘기도 나눴구요.
(강남 분들, 부자, 고급 직업을 가진 분들을 도매끔으로 싸잡아 비난하는 것 아닙니다.
자기 이익에 매몰되지 않고 양심과 합리성, 공동선을 지향하는 분들도 많으시리라 믿습니다)
참 이상한 것이, 저는 무릇 사람이라면 인간 보편의 양심, 도덕, 시비지심, 합리적 이성, 역사 의식을 상식적 수준 정도는 갖추고,
그에 따라 살지는 못하더라도 그게 기준이 되어 삶의 의무감, 불의를 행했을 때의 죄책감 등이 작동하는 게 당연하다고 믿는데,
우리나라는 사람들이 돈푼 쥐고 안정된 위치에 오르면 그런 가치들을 내팽개치는 경향이 강한 것 같습니다.
보수(?) 정당이 기득권 계급을 위한 정책을 펴고 사회를 그렇게 개조하고 최적화시키는 작업을 하는 게 당연하다 쳐도,
정의와 합리성에 준해 그리 해야 되는데,
비리와 범죄, 특혜와 부정, 합리적 검토를 묵살하는 밀어붙이기, 언론 탄압, 역사 왜곡 등으로 그렇게 하는 세력을
똘똘 뭉쳐 지지하는 저들의 천박함은 제 이해의 범위를 멀리 뛰어넘었습니다.
저들이 디자인하는 사회상이 과연 그 지지자들에게도 유리할까요? 상위 몇%에나 든다고?
박근혜가 나 후보에게 건넨 수첩의 메모 사진을 봤습니다.
수첩공주라고 조롱받는 그이긴 하지만, 메모하는 습관 자체는 저는 좋게 봅니다.
메모 참 꼼꼼히 잘 했더군요. 현장의 소리, 필요한 부분을 나름 잘 적은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박근혜는 그렇게 메모만 잘 하지, 그것을 놓고 고민하며 공부, 연구하고, 실천해서 내놓는 결과물이 전혀 없습니다.
더군다나, 그렇게 착실히 메모한들, 저들이 만들려는 세상이 어떤 세상인지 뻔한데,
어디 상인 세입자들 문제, 노후 시설 정비 문제 등을 꼼꼼히 적어서 뭐하냐 말이지요.
문제는 핵심 가치입니다. 박영선 의원이 민주당 예비후보로 당선된 직후,
한나라당의 시혜적 복지는 계급화를 고착시킬 것이라고 던진 일성이 정곡을 찌른 말이었습니다.
저들의 목표는 계급 고착이라는 게 지난 4년을 겪으면서 명백히 드러나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현장을 돌아보며 꼼꼼히 메모하고, 그것을 실천하는, 그런 자세로 서울 시정을 운영하고 국정을 운영한다면,
한나라당의 노선, 정책들은 거의 다 싹 바뀌어야 할 것입니다.
메모 잘 하는 박근혜가 집권한다고 한나라당이 그렇게 바뀔까요? 절대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게다가 그 메모는 선거철이라 간만에 '민정 시찰' 다니며 적은 것일 뿐, 결코 그의 일상적 메모거리는 아닐 것입니다)
사람이라면 마땅히 갖춰야 할(저는 그렇게 믿습니다) 양심과 도덕, 합리성이
자신의 물질적, 사회적 재산과 지위 앞에서 이렇게 무력해지는 사회 풍조가 참 무섭습니다.
강남 부자 동네의 좀 사는 집단에 속한다고 똘똘 뭉쳐 저들에게 표를 던지는 모습은, 저의 이해 범위를 벗어난 것입니다.
게다가, 저들이 획책하는 이 사회의 모습은 그 부자 동네 사람들 중 상당수에게도 결코 유리할 것 없어 보이는데 말입니다.
제가 보기에 우리 사회는 개발의 모순 가운데에서 한계점에 다다랐는데,
수구 집권 세력은 그 한계 상황을 극한까지 치닫게 만들어 완전히 뽕을 뽑아먹겠다는 큰 그림을 갖고 밀어붙이는 듯합니다.
결국 황폐해지고 살벌해진 세상에서, 더 발전하고 지속해갈 동력도 상실한 사회에서, 지금의 고만고만한 부자들이라고 유리할까,
저는 회의적입니다.
무슨 생각으로 똘똘 뭉쳐 저들을 지지하는지 저는 참 어이가 없습니다.
누가 돼도 똑같이 썩었다는 밑도끝도 없고 단순, 진부한 생각으로 외면하는 상당수 서민들에 대해서는 더 말문이 막히구요.
그나마, 이제 서민 대중들도 점차 깨어나는 듯해서 참으로 다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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