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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장이라 불가불 전문을 퍼왔습니다.
나는 나경원 후보를 지지한다.
그녀는 시대에 적합하고 시대가 부르며, 시대가 함께 하는 시장 후보감이기 때문이다. 이 시대가 무슨 시대인가. 바야흐로 이 시대는 ‘민주주의 카스트’ 사회이다. 성인들에게 1인 1표가 부여된다는 보통 민주주의를 채택하고 있다는 점에서 노예들에게는 투표권이 없던 고대 그리스 노예제와 다르고, 법률상으로 신분이 분리됐던 중세 봉건제에서 언뜻 벗어난 듯 하나, 계급간의 벽이 바벨탑보다도 높고 만리장성보다 길며, 어떤 계급에서 태어났는가가 평생의 운명을 결정하는 카스트제가 도래하고 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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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트 하면 언뜻 인도를 떠올린다. 일찍이 고타마 싯다르타도 그 불합리함에 항의했었으니 그 역사와 유래야 종이 몇 장에 적을 일이 아니요, 그것이 21세기에까지 이어지고 있음은 우리는 안다. 브라만부터 수드라, 그리고 카스트도 없는 불가촉천민에 이르기까지 수백 수천의 카스트가 촘촘히 10억 힌두 백성들의 삶을 규정하고 있음도 안다.
우리의 민주주의 카스트는 인도의 카스트보다 더욱 발전적이다. 인도의 카스트는 범연히 눈에 보이고 그에 따라 사람을 차별하지만, 우리의 카스트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되레 카스트 따위는 없고, 누구나 노력하면 브라만이 될 수 있다고 주장되며, 우리 이웃에 살아서는 안되는 불가촉천민 따위는 없다고 목청 높여 선언된다.
누군가의 하룻밤 술값 4백만 원의 등록금을 못 구해 목숨을 끊는 이들이 산재한 사회이지만 공식적으로 우리 사회에 카스트는 없다. 어느 변두리 학교에서 교과서 하나 붙잡고 공부해서 내신 1등급을 받은 아이가 다른 학교의 내신 8등급짜리에도 밀려나서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지 못해도, 그 대학은 “우수한 학생을 뽑을 자유”를 논하는 형국에도 브라만과 수드라는 절대로 없다.
사실 따지고 보면 자기도 바이샤나 수드라인 주제에 기득권의 조각이나마 쥐었답시고, 파리아(불가촉천민) 영구임대주택 아이들이랑 놀지 말라고 제 새끼들에게 다그치고, 집값 떨어진다고 장애인 시설은 오지도 말라고 악을 쓰는 사회이지만 파리아는 죽어도 없다. 브라만의 자식이 수드라한테 얻어맞았다고 아비 브라만이 가솔들과 함께 출동하여 조져 버려도 “사회에 끼친 공로를 생각하여” 사회 봉사 폼만 잡으면 늠연히 자기 계급을 지키는 사회이지만 카스트는 결단코, 무조건 없다.
이것이 민주주의 카스트 사회. 분명히 존재하나 그 존재를 부르지 못하는 홍길동의 사회, 황새와 뱁새가 경주를 벌여 가랑이 찢어진 뱁새들이 시산혈해를 이루어도 공정한 경쟁 끝에 결정된 승부이니(카스트가 아닌) 입 닥치고 따르는 것이 미덕이요 의무인 사회.
오호라 그래서 나는 나경원 후보를 지지한다. 진정한 서민의 대변자 따위여서가 아니다. 엄마 같은 마음으로 시정(市政)을 이끌 수 있어서가 아니다. 얼굴이 예쁜 여자는 마음도 착할 것 같아서가 아니다. 바야흐로 밝아오는 민주주의 카스트 사회에서 그녀만한 적임이 또 어디에 있단 말인가. 수드라 대학생들 등록금 정도 따위의 액수라면 한 번의 피부 관리에 너끈히 사용할 줄 아는 그 창대한 배포를 보라. 그래 놓고는 “시장이 되면 알아서 피부관리를 하겠다.”면서 무지하게 단순한 수드라들을 얼러 대는 포스를 느끼라. 수드라 학생들에게 등짐 지워서 학교 건물 올렸던 학교의 이사로 재직했으면서도 “서울 시장 후보는 나지 아버지를 왜 들먹이느냐?”고 고창하면서 그 학교의 직원이 감사 서류를 통째로 태워버린 것은 법적 테두리 안에 있는 일이었다고 얼버무리는 저 브라만의 자태를 직시하라.
바로 저것이 브라만이다. 한때 우리 사회를 지배했던 브라만의 일족인 ‘군바리’ 일족 출신으로서 열댓개가 넘는 학교를 거느린 교육 브라만의 딸로 태어나 평생을 아가씨와 영감님과 사모님과 의원님으로만 지내온 저 순결한 피도 피이거니와, 작은 아버지를 둔 6개월 방위를 부군으로 둔 처지에 시골 촌부의 13살 아들에게 병역 기피의 혐의를 뒤집어 씌우고, 수드라 도우미들 즐비한 술집에서 월세 꼬박꼬박 받아 챙기면서도 그 비슷한 월세 내는 사람에게 사치스럽다고 일갈하는 저 무치(無恥)의 풍모 (옛말에 “군주는 무치”라 하여 귀한 몸들은 미안하다는 말을 모른다 했다)를 두고 어찌 민주주의 카스트 제도의 시장 후보를 논하랴. 아 브라만이여. 브라만의 딸이여.
인도의 카스트 제도는 자신의 생에서는 그 카스트를 벗어날 수 없으나 열심히 덕을 닦고 제 본분을 다하면 다음 생에서는 더 나은 카스트로 태어날 수 있다고 가르친다. 그런데 한국의 자랑스런 민주주의 카스트에서는 수백만의 수드라 앞에서 개구멍을 보여 주면서 외친다. “여러분도 이 개구멍을 통과하면 브라만이 될 수 있다. 단 주어진 시간은 1분이다.” 바로 이때 필요한 것이 엄마 같은 브라만이 아닌가. “나는 엄마 같은 마음으로 여러분을 위해 일하겠습니다. 우리 힘을 합쳐 개구멍을 좀 넓혀 봅시다. 다같이 브라만이 되는 사회를 만들어야죠. 문을 만들자구요? 어머 그건 포퓰리즘이구요. 벽을 무너뜨리자구요? 어머 빨갱이! 안녕하세요. 여러분을 위한 일꾼 기호 ·1번이에요. 호호 안녕하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