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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DKOREA
Requiem fur ein Fischerdorf
Christian Schmidt-Hauer berichtet heute aus Sudkorea
ⓒ Lee Jae Won / Reuters
Ein Raketensystem auf der koreanischen Insel Jeju
Die Insel Jeju ist ein okologisches Paradies knapp 100 Kilometer sudlich von Koreas Festland. Bei der Fußball-WM 2002 fand die deutsche Mannschaft hier ein traumhaftes Quartier. Hatten die Spieler genug Zeit gehabt, die nahere Umgebung mit ihren Mandarinenhainen, fruchtbaren Ackern, buddhistischen Tempeln und Korallenbanken im Meer zu erkunden – dann ware ihnen das bluhende Fischerdorf Gangjeong kaum entgang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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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략......... 원문은 링크를...
강정마을의 해군기지가 미군을 위한 전초기지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만 빼고 다 알고 있다..... 뭐 대충 이런 의미가...ㅜ,ㅜ;
번역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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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번역: “Sudkorea: "Requiem fur ein Fischerdorf"]
“한 어촌 마을을 위한 레퀴엠”
“제주 섬은 한국의 본토로부터 남쪽으로 100km 조금 못 미치는 곳에 위치한 생태의 낙원이다. 2002년 세계월드컵 경기에 참여한 독일 축구팀은 이곳을 꿈의 낙원(환상적인 구역)으로 여겼다. 그 당시 만약 독일의 선수들이 제주 인근의 감귤농장과 비옥한 들과 밭, 또한 불교사원들과 바다 밑의 산호초를 둘러 볼 충분한 시간적인 여유가 있었더라면, 그들은 이 번성하는 어촌마을 ‘강정’을 그냥 지나치지 않았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2000 여명이 살고 있는 강정마을을 자유롭게 관광하기에는 그 시기가 너무 늦어 버렸다. 이제 유네스코로부터 천연자연보호구역으로 지정된 그들의 삶의 공간은 파괴된다. 서울에 있는 중앙정부는 그곳에 20 척의 전함을 수용할 수 있는, 그리고 나중에 25,000명의 해군병사가 상주하게 될 해군기지를 건설한다. 미국은 이곳에 에기스(Aegis)로켓 조기경보장치와 그 발사장치를 설치할 예정이다. 이 해군기지는 대만을 둘러 싼 분쟁에서 미국과 중국이 충돌할 수도 있는 동지나해(중국의 동쪽 바다)에 접해 있고, 따라서 [이곳] 환상의 섬 제주도로부터[제주도를 기점으로] 미국의 교두보는 부상하고 있는 해군대국, 중국을 봉쇄하게 될 것이다.
강정마을은 4년 동안 모든 수단과 방법을 다하여 해군기지건설에 반대해 왔다. 목사들과 제주도의 가톨릭 주교는 이 해군기지를 <인간과 자연에 대한 죄악>으로 판단하였고 또 어부들과 농부들은 그들의 잃어버린 경작지 위에 임시 천막을 설치하였다. 마을 주민들은 시멘트 수송차량의 출입을 막아 섰고 그리고 또 부상 당했다. 9월 초에는 경찰의 강경진압으로 시위대를 해산시키는 과정에서 30명의 시민이 체포되었고, 거기에는 3명의 신부와 목사가 포함되어 있었다. 여기에서[이 작전에서] 700명의 제주도 경찰병력에 더하여 육지로부터 500명의 경찰병력이 추가로 투입되었다.
이곳 제주에서 역사의 반복은 계속되고 있다. 비록 그 역사가 일찍이 제주 섬에 대한 미군정의 감독하에 군경이 동원되었던 것과 같은 그런 어처구니 없는 비극은 아니라고 해도 말이다. 일찍이 제주 섬에는 1948년 화염으로 그 종말을 맞이했던 하나의 역사적 선례가 있었다. 400개의 마을 중 270개의 마을이 화염 속에 사라졌다. 당시 30만 명의 섬주민들 중에서 1년이 채 안 되는 기간 중에 10명 중 1명 꼴로 대량학살로 희생 되었다. 대학살 이후 어떻게 시민에 대한 첫 번째 국가적 집단학살이 일어나게 되었는가? 제주의 주민들은 전후 일본 식민통치의 족쇄에서 해방된 이후 대부분의 한국인들을 하나로 단결하게 했던 그 어떤 꿈을 가지고 있었다. 즉시 구성된 인민위원회는 결국 해방된 한국을 통치해야만 했었다. 그러나 워싱턴과 모스코바는 이미 한국의 영토를 그들의 세력권으로 분할하였다. 1948년 초, 제주도의 30,000 명의 시민들은 한반도의 남쪽 지역에 대한 미국 주도의 분할선거에 반대하였다. 섬주민들과 그들의 인민위원회는 방금 이루어낸 그들의 독립성을 다시 상실하게 될까 봐 두려워하였다. 경찰은 시위대에 총격을 가하여 6명의 시위대가 사살되었다.
이로써 제주는 봉기의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약 500 명이 주도한 봉기에 3,000 명의 농부와 어부가 그 뒤를 따랐다. 그들은 북쪽에 있는 공산주의자들과 그 어떤 관계를 맺고 있지 않았다. 농민봉기대는 몇 자루의 구식 카라반 소총 이외에 단지 죽창과 건초용 쇠스랑을 소유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미군정은 한국의 군•경찰병력과 형사적 처벌을 집행하기 위한 준군사 테러조직인 서북청년회(서청)를 제주에 파견하였다. 평화적 협상은 거부되었다. 나이든 사람들은 죽도록 폭행당했으며 아이들은 강제집행되었고 부녀자들은 성폭행 당하였고, 몇 명은 산채로 매장되었다. 미국 고문관이 봉기자들의 처형에 옵서버(참관인)로 참석하였다. 이후의 남한의 독재자들은 이 비극에 대한 그 어떤 언급도 금지하였다. 이 비극적인 사건은 역사교과서에 수록되지 못하였고, 그 이후 나중에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게 되는 김대중이 1988년에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을 때, 비로소 그 침묵으로 지낸 50년의 막을 내리게 되었다.
지금 그 주변 지역이 제주 섬의 군사기지화[정책]에 의해 희생되고 있는 강정마을을 위해서는 단지 하나의 장송곡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주민들에게 남게 될 경험은 세계열강이 그들이 자행한 범죄에도 불구하고 계속적인 군사무장을 서두르고 있다는 사실일 뿐이다. 이것은 강정마을과 그 주민들에게 가혹한 부담인 것이다.”
강정마을 위치는 적색 화살표가 있는 곳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를 위한 해군기지 치고는 너무 크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