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현 작가의 드라마는 늘 정치적이었다. 김작가의 드라마에서 나오는 인물들은 늘 우리가 일상을 살면서 언젠가 스쳐 지나가며 회자되었던 장삼이사이다. 그 사람들 속에서 누군가는 힘을 얻고 누군가는 삶의 동력을 발견하기도 하고, 또 누군가는 미치도록 증오하고 싶던 인물들이다.
인간의 관계란 그런 것이다. 내가 강철과 같은 사람이 되지는 못하지만 나와의 관계 또는 사회와의 관계를 통하여 ‘강철로 단련되는 인간’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그것이 내가 아닐 뿐 우리가 내가 속한 사회에서 강철과 같은 인간은 수없이 단련되고 있고, 단련을 시킨 인간에 의해 그들이 속한 사회를 위해 쓰임을 받는 것입니다.
현재 안철수, 박원순, 문재인 같은 사람들이 사람들에 의해 단련되고 쓰임을 받기 위해 대기하고 있는 것과 같이, 고 노무현이 말했던 구시대의 막내로 신시대로 유산을 넘기고 싶었으나, 이명박이라는 구시대의 표본을 통하여 ‘구악의 정체’가 자본에 의한 인간의 “착취” 인간에 의한 “인간성의 말살”이라는 것을 확인해 보이고서야 새로운 시대는 그 서막을 알리고 있습니다.
고려에서 벗어나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던 조선의 초기는 고려라는 구악과의 싸움과 조선의 새로운 주류가 형성되는 과정이었다. 이 과정에서 역성혁명의 이념적 정당성을 제공하던 정도전과 성리학은 새로운 성씨의 군주와는 우호적일 수가 없는 입장이었다.
왕권 강화를 위하여 자신의 자식까지도 죽이는 살육의 정치를 일삼던 태종에게 그의 정치이념이란 백성을 죽이는 정치이고 그저 “지랄”일뿐이라고 간파하는 작가의 혜안은 시대가 바뀌어 살육대신 돈을 훔쳐내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이시대 또한 지랄 맞은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시청률은 10%가 되지 않는 뿌리깊은나무라는 드라마에 환호하는 현상이란 대본, 연출 연기가 잘 맞물리는(사실 잘 맞물린다는 표현 보다는 정교하게 맞물린다는 표현이 더 정확한 듯) 웰메이드 드라마가 나왔다는 기대감과 함께 구시대를 정리해야 해서 앞으로 나가야 하는 현시대와 너무나도 닳아있어서가 아닐까 생각을 해봅니다.
자신의 아비 앞에서 떨림 조차도 보여주어서는 안 되는 아들과 자식을 구하려다 반푼이가 되어 버린 아비와 아비를 보호하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자식…
군왕의 못된 부자관계는 애뜻한 석삼과 똘복 부자를 역사의 소용돌이로 집어넣어 죽음으로 이끌어 가고, 아비를 죽인 복수를 다짐하는 똘복의 결기는 세상의 모든 분노를 삼키고도 남을 듯이 보입니다. 바람이 있다면 똘복이 세종에 동화되기 보다 세종 이후의 세상을 여는데 씨앗이 되는 사람으로 성장하기를 바래봅니다.
붉은 카펫위의 한진 중공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