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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서기 날조?
자유게시판 > 상세보기 | 2011-09-23 12:13:41
추천수 0
조회수   1,112

제목

일본서기 날조?

글쓴이

양준영 [가입일자 : ]
내용
Related Link: http://ko.wikipedia.org/wiki/%EC%9D%BC%EB%B3%B8%EC%84%9C%EA%B8%B0

신라왕 파사매금(波沙寐錦)[2]은 미질기지파진십기(微叱己知波珍十岐)를 인질로 하여 금, 은, 채색능라(彩色綾羅) 등을 80척의 배에 실어 관군을 따라가게 하였다. 그 대문에 신라왕은 항상 배 80척의 조공을 일본국에 바친다. 이것이 그 연유다. 이에 고구려, 백제 두 나라 왕은 신라가 지도와 호적을 거두어 일본국에 항복하였다는 것을 듣고 가만히 그 군세(軍勢)를 엿보게 하였다. 도저히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스스로 영외에 와서 머리를 땅에 대고 "이제부터 길이 서번(西蕃)이라 일컫고 조공을 그치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하였다.



고려 때 편찬한 삼국사기에는 왜국에 조공을 보낸 기록이 없음



백제 왕족은 일본에서 태어나기도 하였고 백제에서 태어났어도 일본 왜백제에 가서 생활하다가 다시 백제로 돌아와 왕이 되는데 그 이유가 왜 였을까요?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의 패먕의 위기에 일본은 3만의 구원병을 백제 보내고 전쟁에 패하자 수많은 배를 보내어 관료와 백성을 걷어 관직을 그대로 유지하였다고 하는데 그 시대 왜국이 백제의 신하국이였까요? 아님 동등한 위치였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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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pumege@empal.com 2011-09-23 12:23:03
답글

백제 왕족들이 대거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에 유력 귀족으로 세력을 떨쳤지요 ...<br />
그들 가운데 왕을 배출한 가문도 있고.. <br />
이런 이유로 벡제가 나당 연합군에 패하고 부흥운동이 벌어질 때 일본에서 대거 <br />
원군을 보냈는데.그 유명한 백강 전투가 일본원군과 나당연합군사이의 해전 ..

kipumege@empal.com 2011-09-23 12:25:49
답글

그당시 왜는 백제의 일종의 속국이었다고 봐야지요 .

yans@naver.com 2011-09-23 12:26:34
답글

하지만 일본은 형제국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br />
둘 중 하나는 죽어야할 숙명.

yans@naver.com 2011-09-23 12:29:29
답글

660년에 나ㆍ당 연합군의 공격으로 백제의 수도 사비성이 함락되고, 의자왕을 비롯한 여러 왕족과 대신들이 당으로 끌려가고 당병의 약탈로 많은 백제인들이 살륙당하는 와중에, 백제의 옛 장수였던 귀실복신ㆍ흑치상지 등을 중심으로 백제 부흥 운동이 일어났다. 부흥군 지도자였던 복신은 당시 왜에 체류중이던 백제의 왕자 부여풍을 옹립해 왕으로 추대하는 한편 왜에 원병을 요청했다. 사이메이 천황이 661년에 급서한 뒤에도 황태자였던 나카노오에는 즉위식도 미

yans@naver.com 2011-09-23 12:36:39
답글

고구려가 백제부흥에 원군을 보냈으면 역사는 많이 바꿨을텐데....

kipumege@empal.com 2011-09-23 12:39:58
답글

고구려가 백제에 원군을 보내기에는 두나라의 구원이 너무 깊었습니다...<br />
서로 용호쌍박의 패권을 겨루던 상대를 선뜻 도와주기가 쉽지 않지요 <br />
그리고 그당시 고구려도 사정이 그리 녹록치 않아서 원군을 보낼 여력도 <br />
그리 많지 않았다는 ..<br />

asahe@nate.com 2011-09-23 13:20:51
답글

일본 고대사는 복잡하기 짝이 없습니다. 가야, 백제, 신라, 고구려 계통의 유입이 있었고 누가 정권을 잡느냐에 따라 운명이 결정되었기 때문이지요..<br />
참고로 일본이 한국을 미워하고 싫어하는 근본적인 원인은 당시 나라를 떠나 일본으로 올 수 밖에 없었던 망국의 한을 담고 있기에 타국에서 안좋은 감정을 품고 남기다 보니 그렇게 된 겁니다.

조원식 2011-09-23 13:37:33
답글

일본서기가 소설수준인건 맞는데<br />
왜가 단순히 백제의 신하국이었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br />
신라가 왜에 왕자를 볼모로 보내고 경주가 왜군에 포위된 적도 여러번입니다.<br />
세개의 나라로 나뉘어 싸우던 삼국에 비하면 왜의 전력이 상당했다고 추정됩니다.<br />
임나일본부는 아니더라도 왜가 한반도에 상당한 영향력을 미친것은 사실로 보입니다.

조상용 2011-09-23 13:40:22
답글

백제와 연관이 있어서인지 몰라도 일제 식민지때 부여에 새로운 수도를 건설중이었다고 합니다. 그 터가 남가 있다네요. 완성되기전에 해방되었지요.<br />
부여에 사는 친척에게 들었습니다.

오희성 2011-09-23 13:46:13
답글

조원식님의 말씀중 왜는 바다건너의 왜 라고 하기에는 앞뒤가 안맞는점이 많다고 합니다.<br />
<br />
해서 반남고분의 주인을 두고 말도 많구요.

조원식 2011-09-23 13:53:12
답글

그래서 가야에 있던 임나일본부에서 온 것이라는 주장이 있는 것이고요.<br />
서기 600년 경이면 일본도 상당수준의 국가체제를 구축하고 있었고<br />
우리나라보다 땅도 넓어서 잉여 병력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조원식 2011-09-23 13:55:14
답글

참고로 백제가 멸망하고 한반도인들이 일본으로 많이 건너갔다고 아시는데<br />
3000년전 벼농사가 건너갈때 엄청난 한반도 남부사람들이 일본으로 건너갔답니다.<br />
당시 일본인구의 25%정도였다고 얼핏 기억이 나네요.

yans@naver.com 2011-09-23 15:28:34
답글

백제 부흥에 일본이 3만명의 군사를 소집할 수 있는 건 왕권 체제가 확립되었다고 할 수가 있죠.<br />
일본에 도토리현(鳥取 )이라고 있습니다. 조취라는 말은 새를 잡는다 말로 신라 조취군이 백제의 아스카 왕권(날아오르는 새)를 잡는다고 그 지역을 신라가 점령하였다고 합니다. 아스카 시대가 끝나고 한국말로 나라, 나라시대가 열렸다는군요.

황준승 2011-09-23 17:00:19
답글

일본 억양이 경상도 억양과 유사한 걸로 봐서는 신라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습니다.<br />
근데 도쿄과 오사카 사람들의 억양이 어떻게 다른지도 궁금하네요<br />
오사카 사람들의 억양이 코메디 소재로도 등장하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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