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만에 긴 글을 씁니다. 목욕탕에서 넘어지면서 갈빗대를 변기에 부딧쳐 본의 아니게 움직일 수 없는 상태가 되어서 글을 써 보았습니다. 글을 쓴 목적은 그냥 심심해서 이고 굳이 또 다른 목적을 찾자면 '나꼼수'가 현실 정치를 너무 희화화하는 면이 있어서 쫌 진지해 보고자 하는 의도도 있습니다.
정치란 인간들 사이에 나타나는 다양한 관계에서 만들어지는 세계입니다. 이러한 관계는 근본적으로 공동체에서 만들어 내는 재화를 어떻게 분배할 것인가에 관한 이야기로 귀결이 됩니다. 우리 모두가 생산해낸 재화들을 어떻게 분배할 것인가에 관하여 우리의 이익을 대변하는 집단에 투표를 함으로서 우리가 지키고자 하는 이익을 대리행사하는 사람들이 국회의원이고, 지방자치제의원이고 자치단체의 장들입니다.
이와 같은 현대의 민주주의는 권력을 획득하는 주체가 시민권력의 대리인으로서 정당이라는 것을 합법화시켰고, 정당의 권력 쟁취나 공권력의 행사의 기반이 시민들의 위임 권력이라는 것을 대한민국 헌법 1조에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고 명시해 놓았습니다. 시민들이 위임하여 나누어준 권력은 시민들이 정부의 폭력적 권력 행사를 합법화하는 것이 아니고, 시민의 이익이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합법적이고, 합리적이고, 시민사회의 동의 하에서 행사되어야만 그 정당성을 지니게 됩니다.
흔히 보수 언론에서 정치권을 이야기할 때 “대화와 타협”이 없이 매일 국회에서 싸움만 일삼는다고 비판을 합니다. 일견 맞는 이야기 같아 보이지만 사실은 잘못된 이야기인 것이 “대화와 타협”이란 시민사회의 이익을 관철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사용되는 것이고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기 때문에 때로는 폭력적인 수단을 이용하여 시민사회의 이익을 위한 위임된 권력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재화를 분배하는 방식으로서 민주공화정이란 제도를 채택하고 있고, 재화를 생산하는 방식으로 자본주의라는 제도를 이용하고 있습니다. 자본주의라는 제도에서는 대표적인 두 계급이 존재하는데 이는 자본가와 노동자입니다. 이것은 때로는 계급적 관점이 아닌 “부자와 가난한 자들”로 구분되기도 합니다. 부자든 가난뱅이든 자신들이 생산해낸 재화의 일부분을 세금이라는 이름으로 국가에게 제공하고 선출된 권력에게 합리적 사용을 위임하게 됩니다.
세금의 사용은 국가를 구성하는 구성원들의 인간으로서의 기본적 생활, 안전과 국가의 지속적인 발전을 위해서 우선적으로 사용이 됩니다. 이와 같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공화정과 자본주의 발전의 근간인 노동력의 유지와 발전이라는 곳에 우선적으로 사용되는 데 그것이 “교육과 의료”입니다. 이 두 가지는 인간의 생존 능력을 증진시키고, 노동력의 유지와 발전을 도모하는 근본적인 부분으로서 국가라면 우선적이고 보편적으로 돈이 사용되어야 하는 부분입니다. 사회보장이란 동정이 아니라 우리가 낸 세금을 기반으로 당연히 누려야 하는 시민의 권리와 같은 것입니다.
기륭전자의 노동자들, 홍익대의 청소노동자들, 한진의 노동자들, 쌍용의 노동자들이 주장하는 바는 늘 내가 살 수 있는 최저임금을 보장하라거나, 비정규직을 철폐하라거나 하는 주장들은 우리들이 만들어 놓은 재화를 이용하여 노동자들이 살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놓으라는 주권자들의 준엄한 명령입니다. 세금을 통하여 권력을 운용하는 주체들은 반드시 이와 같은 주권자들의 명령을 받아들여 가시적인 제도를 만들어 내어야 합니다.
과거 민주노동당에서 주장하던 다양한 형태의 사회보장제도들인 흔히 말하는 무상 시리즈들이 민주당에서 차용하게 되는대는 주권자들인 국민들이 처하여져 있는 사회적 현실이 반영된 결과입니다. 다소 과격해 보이던 민주노동당의 주장들이 제도권으로 들어오게 된 것은 신자유주의 노선하에서 중간계층들의 몰락으로 중산층의 붕괴, 자영업자의 몰락, 비정규직의 폭발적 증가등 사회구성원들의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반영된 것이다. 현 정부들어서 더욱 더 심화되고 있는 빈부격차의 심화, 기아 등이 젊은 층에서부터 노년층까지 공평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또한 이와 같은 사회현상 속에서 자본가들에게 대항할 수 있는 노동자들의 방법은 자신의 노동의 가치를 올리는 방법이 유일합니다. 노동의 가치를 높이는 것은 그간 성장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몫을 양보하였던 것을 그만하고 자신의 노동에 따른 가치를 그대로 받는 것으로 공정한 분배에 초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그럼 사회보장 제도로서 안정적인 생산을 보장하고 노동의 가치를 높일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 있다면 지속적인 투자를 통하여 사회전반의 가치를 높이는 방법으로 발전을 시킨다면 사회는 안정적인 성장과 노동의 가치를 제 값대로 제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의 가장 좋은 방법은 의무교육을 통한 고등 교육의 실현입니다. 의무적으로 국가의 구성원인 시민들이 고등교육을 통하여 노동의 가치를 증진시킬 수 있다면 이 보다 더 안정적이고 지속 발전 가능한 방법은 없습니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 의무교육은 계속적으로 그 질을 높여야 합니다.
시민사회가 보편적인 사회 보호의 최전선에 의무 교육을 놓고, 적어도 의무 교육을 받는 기간 동안에 아이들이 자본주의의 약육강식에 침탈 당하지 않고 자신들의 자아를 성숙시키고, 공동체가 제공하는 바른 먹거리를 통하여 공동체의 가치를 보존 및 체화시키는 과정은 교육의 질을 향상시킬 뿐만 아니라 수혜를 받는 아이들에게 새로운 미래를 기대할 수 있게 만들 수 있는 좋은 방법이라는 것은 불안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시민들의 경험으로 체화된 공동체 보존의 대응 전략입니다.
문제는 현재 오세훈이 하고 있는 정치놀음이 이와 같은 현 시대를 대표하는 시대 정신으로서 보편적 복지와 미래의 발전 동력으로 국민대중이 채택한 복지라는 이념에 얼마나 부합하느냐 여부입니다.
시민들의 고단한 삶 속에서도 희생을 통하여 올바른 제도로 만들어 가려는 국민 대중의 의지에 반하여 오직 자신의 정치적 무게를 더 하고자 하는데 만 관심을 가지고 있는 오세훈의 정치적 놀음은 어제도 이야기하였지만 수레바퀴 앞의 사마귀와 같습니다. 또한 부자 아이들에게 무상 급식을 주어야 하는냐 하는 문제는 자신들이 제기할 문제가 아니고, 세금으로 비용을 제공하는 국민 대중의 몫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그것이 공평한 것 인양 떠들고 있지만 이미 시민 사회에서 선택하였습니다. 그것이 싫다면 공동체를 떠나는 것을 고민하여야 하는 것이지 선택을 바꾸려고 획책하는 것은 또 한마리의 사마귀에 지나지 않는 것 일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