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s 모레면 용돈을 탑니다. 하이파이 시스템을 업그레이드 할 기회가 생겼네요. 아버지 월급날인 15일이 제겐 달 내내 핵심이죠.
병의 진전이 없다. 내 인생의 낙마처럼 얽인 실타래를 어찌 풀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하며, 이를 해결한다면 어디로 가야 하는가. 나의 롤모델은 ‘사르트르’지만, 과연 그를 따라서 나의 철학을 개진할 정도로 내가 박식하고 선험적으로 천재인 능력들을, 두루 갖추고 있는가, 나는 나 자신을 범인 그러니까 속된 사람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치는 성자와 같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제나저제나 수심에 잠기고, 백팔 개의 번민의 염주알이 나의 내면 저변을 후려치고, 나는 그만 흐느끼고 만다. 아직 때가 아니란 말인가? 점쟁이의 말로는 이번 해에 내가 치료된다고 한다는데, 그 말이 정녕 사실이길 바란다.
바흐와 베토벤을 무손실 음원으로 듣는다. 사실 한 달 용돈 40만원으로 오디오 업그레이드에도 벅찬데 음반까지 사며 돈을 뿌릴 수는 없다. 음반은 아무 가치가 없다는 건 인정하기 싫어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제 거치형 시디플레이어의 시대는 끝났고, 공시디도 발전후의 이슬로 사라졌다. 다행히 돈이 없는 몇몇 오디오파일에게는 신나는 일이 되었다. 인터넷이 발전하고 우리는 모든 걸 공유한다. 그중에서도 웨이브파일로 된 음원은 ‘진짜배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테다. 지금 내 시스템은 중고가로 60만 원선이다. 내일 모레면 용돈을 탄다. 그럼 자랑스럽게도 100만원 시스템이 완성하는 것이다. 참고로 나는 헤드폰 파이 유저다. 최첨단 기술로 이루어진 헤드폰은 고가의 메이커 스피커도 능가한다는 건 이미 해외에서도 정설이다. 또한 최대볼륨으로 맘껏 들을 수 있고, 밤에도 편안하게 자기만의 밤을 보낼 수 있다. 헤드폰을 쓰고 눈을 감으면, 당신들 앞에는 콘서트홀이 펼쳐질 것이다.
정치와 역사의 시대가 끝났다고 한다. ‘엘빈 토플러’ 말대로 ‘부’가 선봉에 서서 모든 제분야를 닦달음한다. 부는 이제 정치와 역사를 뛰어넘는 최고의 선善이 되었고, 우리는 이것의 뒤편에 음영처럼 드리워있는 ‘악마성’을 직시해야 한다. 바야흐로 에고이즘이 부와 짝을 이루어, 마치 커피와 우유가 짝을 이루듯 환상적인 콤비를 이룬다. 이것이 바로 사유재산이다. 이제는 계급에나 계층 같은 건 애초에 없다. 오로지 한 개인의 사유재산의 양으로 그 사람이 얼마나 잘 나가는지를 가늠하는 척도가 된다. 돈, 돈처럼 좋은 건 세상에 없다.
우리집안은 몰락한 집안이다. 아버지는 지하철운전사에 다니면서 한 달 300은 건지지만 우리에게 던져주는 건 생활비 단돈 120만원뿐이다. 나머지는 자기 유흥과 주식투자에 쓴다. 이 120만원과 어머니께서 마트에서 뼈 빠지게 일해서 벌어온 120만 도합 240만원이 전부다. 그중에서 어머니께서 내게 오디오에 투자하라고[내 어머니는 오디오가 훌륭한 제테크라고, 은행 대신 이용하라고 권고할 정도다.] 매달 40만원을 주신다. 그래서 즐겨 피우던 담배도 끊고, 커피숍가서 천문학적으로 거품이 낀 ‘금’커피도 마시지 않고, 오디오에 ‘올인’하는 것이다.
나는 가난하고 젊다. 그렇지만 정신병에 걸려 열정과 성욕도, 패기와 삶에 대한 의지도 ‘전무’다. 히틀러는 ‘전부’가 아니면 ‘전무’를 선택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런즉슨 사느냐 죽느냐, 하는 문제와 같은 맥락을 이루는 것이다.
우울증과 사회공포증, 범불안장애에 갖혀 골방에서 기생하는 폐인이 되었다.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에 나오는 주인공이 지금의 나라고 해도, 나는 이를 부정하지 않으리라.
좀더 각성이 필요하다. 대오가 필요한 것이다. 학문을 지향한다는 것은 ‘의식 일반’에 사변적인 가설들을 세우고, 연구하고, 결론을 내리는 그러한 과정을 이른다. 귀납법이든 연역법이든 심지어 변증법이든 중요한 건 방법론이나 논리법이 아니라, 그 문맥 전체를 골자로 하고 있는 ‘테마의 정립에 대한 학자의 자세’가 중요하다, 학문을 소중히 엄정하게, 또는 아기자기하게 다루는 많은 학자며 문인들은 그들의 사고방식을 연결고리에 걸어 이를 연쇄적으로 반복한 후에 테제가 탄생하는 것이며, 그것은 일종의 ‘아우라’이자 표상으로 우리 앞에 다가온다.
건강을 잃으면 모두를 잃는다. 맞는 말이다. 나는 본채 신경이 약한 사람이라 자주 불면증을 앓고 불안에 잠기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럼에도 나는 내 열정의 시원에서 발생하는 ‘파생실재’를 그냥 어수룩하게 넘기는 게 아니라 시간의 공을 들이고 차차 시작의 점을 이어간다.
내 나이 24. 나는 ‘찌질이’임에도 노벨문학상을 노리고 있다. 본질을 이루려는 노력이 결실을 맺게 하기 위해서는 ADHD장애에 쓰이는 합법적인 각성제 ‘콘서타’도 최고 용량으로 먹을 것이다. 나는 모든 가식과 기만을 분쇄하기 위해 고군분투할 것이며, 나의 선배이자 스승인 ‘사르트르’가 보여주었던 ‘지의 냉엄함’을 결코 일소에 부치지 않을 것이거니와, 그가 20세기 정보세계를 차지했듯이 나는 21세기 정보세계를 움켜쥘 것이다.
과거와는 다르다. 인구가 늘었고, 그런 이유로 더 많은 천재들이 있고, 책들의 판매부수는 해마다 늘어가고 있는 실정에서, 21세기는 가히 인문지식의 격돌장이다. 누구나 밑천은 있겠지만, 그 개별에는 큰 차이는 없겠지만, 그걸 받아들이는 능력과, 또 다시 거기에 주석을 다는 일의 역치에서 분명 차이가 날 테니, 거기서 천재의 발굴이 시작되는 것이다.
지식인은 결코 패배해서는 안 된다. 지식은 더 큰 분노와 열정으로 뒤범벅되어, 도처에서 자행되는 ‘부패’와 권모술수로 인한 ‘인간멸종’과, 간지로 빚어진 ‘자기파멸’을, 지식의 첨단성중 하나인 비지정학성의 기술적 접근에 따라 비판할 수 있는 건 모조리 비판해야 할 것이다. 지식인이 질 수 없는 이유는 가난한 인민을 언제나 먹여 살려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부르주아들의 병적인 사치와 어마어마한 착취에 대항하여, 진보를 지향함과 동시에 공격적·선동적 언술로 그들을 일망타진해야할 것이다.
나는, 예전에는 좀 고민이 되었지만, 지금은 뚜렷한 섬광이 구체적으로 내게 다가오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그건 바로 내가 문필가이자 사상가가 되겠다는 다짐이다. 그러나 나는 서울대와 같은 일류대학을 나오지 못한다면 밥 굶기 딱 좋은 최악의 직업을 선택하는 꼴이다. 허나 나는 대입에서 내가 서울대에 갈 수 있는지 없는지 여부를 시험해보고 싶다. 그따위 것 통과 못하면 학자라고 부를 수도 없으리라.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다. 오직 의식이 명석에 가차 없이 육박해 있으면, 그걸로 족하다. 나는 대학병원에서 처방받은 정신과약을 15알정도 먹지만, 이제는 좀 줄일 때가 된 것 같다. 확실히 앞으로 도약하기 위해서라도. 각성제도 최고용량으로 추가하고 최고의 항우울제인 ‘이팩사’도 임상 최고의 용량인 375mg를 먹을 것이다. 나는 정신과약만이 나를 구원해주며, 따라서 학자로 만들어 준다고 생각한다. 약 없이 나는 서울대 문턱은커녕 명지대 같은 허접에 문 두드리고 있을 것이다. 중요한 건 대자적으로 살아간다는 거다. 이는 곧 자유요, 기필코 방종이 아닌 우주에서의 절대적인 부유浮游성이다. 그러나 우리는 자유의 대의 아래 결코 게을러져서는 안 된다. 나는 끊임없이 혁신하는 사람이며, 그래서 내 앞길에는 명백히 ‘성공’의 그림자가 드리운다는 걸 보장할 수 있다. 아니면 여러분이 보증해도 되지 않겠는가?
나 자신을 탁마하려면 독서밖에는 길이 없다. 그것도 단순한 독서가 아니라 엄청난 양의 독서 말이다. 그래서 그는 장서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항진명제’에 가깝다. 국립, 시립도서실은 왔다 갔다 하기 너무 불편하고, 밥값도 들고 사람들 시선과 나오는 방귀도 참으며 뚫어지게 책만을 봐야한다. 이렇게 타인을 의식하는 공부가 진정한 의미로서의 학문일 수 있겠는가? 그러니까 옛말에도 있듯이 보물에 눈이 멀지 말고, 틈틈이 시도 때도 없이 주야장천 학문의 수양, 더 나아가 참선의 정양을 이행해야 할 것이다.
지금은 단순히 학자만이 교양을 배워야 되는 시대가 아니다. 귀족이 가지고 있는 품격은 그의 옷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그의 말솜씨에서 나오는 것이다. 즉 ‘무피투 유기투’, 따라서 오직 영성만이 사후세계의 빛을 우리에게 가져다 줄 것이다. 귀족적이라는 것이 사후세계적 빛이라면, 사회라는 진창에서 구르면서 자신의 인생을 허비하는 몽매한 중생들은 어둠이다. 귀족이 되어라. 그리하여 어둠에 불을 밝혀라.
-덕계동 개인의 서재에서 ‘미석 박준석’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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