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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목요일 문학구장에 갔는데 전광판에 허웅이라는 이름이 있어서 뭐 저런 듣보잡이 있나 했더니 그 날이 프로야구 데뷔 10년만에 첫 선발출전이라고 하더군요. 그날 마지막 타석에서 안타(1타점)까지 치면서 눈도장을 찍더니 오늘은 SK주전포수라고해도 꿀리지 않은 실력을 보여주네요. 2루타도 치고, 수비도 잘하고...그래서 어떤 녀석인지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사연이 짠하네요. 이하 내용 펌입니다
허웅 “1군 오라”…10년만에 전화벨 울렸다
사직구장은 소년의 터전이었다. 그땐 그곳이 이토록 문턱이 높고 간절한 곳이 될지 몰랐다. 경기가 끝난 뒤, 아무도 없는 야구장 필드에서 혼자서 공놀이를 한 적도 있었으니까. 소년 허웅(28)에게 사직구장은 ‘유년기의 놀이터’로 기억된다.
어머니와 이모가 사직구장 7호 매장(1루측)에서 매점을 열었다. 유치원 때부터 익숙한 장소였다. 그렇게 야구와 친해진 허웅은 부산 연천초∼사직중을 거쳐 부산고에 입학해 프로야구 선수의 꿈을 키워갔다. 당시 부산고 1년 선배 추신수(클리블랜드)와 투타 배터리를 이뤄서 전국 무대를 제패했다. 지금 SK에서 같이 뛰고 있는 정근우, 전병두가 당시 황금시대 멤버다.
이때만 해도 시련이 이다지 길 줄 몰랐다. 2002년 당시 최강팀 현대가 2차 2순위(전체 18위)로 지명했다. 그러나 입단하니 현실은 이상과 달랐다. 1군 포수로 버티는 김동수, 박경완은 가히 난공불락이었다. 주전은 고사하고, 1군의 문조차 열리지 않았다. 단 한번도.
2006년 군대에 갔다. 다녀오면 어떤 계기가 만들어질 것이라는 기대를 담고서. 그러나 원하는 대로 투수의 공이 들어오지 않는 포수의 운명처럼 인생의 궤적은 결코 바라는 방향대로 흐르지 않았다. 상무에 가고 싶었으나 이마저도 밀렸다. 두 차례에 걸쳐 문을 두드렸으나 상무는 정상호(SK) 박노민(한화)을 선택했다.
결국 현역으로 가야 했다. 부산에서 신병교육대 조교를 했다. 전병두가 이등병으로 입소해서 만난 적도 있었다. 그렇게 군 생활을 하던 도중, 현대에서 방출 통보가 날아들었다. 오히려 주변에서 더 걱정해줬다. 군대에서는 마음을 다스리라고 특별휴가까지 보내줬다. 집에서도 이제는 야구를 접고, 다른 일을 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아버지는 김해에서 식당을 마련해줬다. 거기서 호프집을 열었고, 술안주 요리까지 만들었다. 그래도 야구를 놓을 수 없었다. 일방적으로 차이기만 했는데도 야구를 향한 구애를 끊을 수 없었다. 낮에는 부산고, 동의대에 가서 야구 연습을 하고, 밤에는 식당에서 일했다.
“사주를 보니 너는 너 하고 싶은 대로 살아야 행복하단다”라는 어머니(강인자 씨)의 말도 야구를 운명처럼 굳히게 만들었다. 결국 일본에 가기로 결심했다. 한국문화교류원과 연계된 오사카 인근 독립리그 야구팀에서 뛰기로 하고, 현해탄을 건넜다. 어디서든 야구를 계속할 수 있다면 관계없었다. 일본어도 배워두면 나중에 쓸모가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타국, 그것도 시골이나 다름없는 소읍 생활이 순조로울 리 없었다. 무엇보다 말부터 안 통했다. 투수와의 커뮤니케이션이 중요한 포수 포지션의 특성을 감안하면 치명적이었다. 8달 만에 일본 독립리그 생활은 그렇게 끝났다. 야구와의 질긴 인연도 정말 끝인 줄 알았다.
정말 야구를 잊고 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또 야구인들 전화번호를 돌리는 자신을 발견했다. 현대 시절부터 자기를 좋게 봐줬던 금광옥 SK 원정기록원에게 부탁을 해봤다. 연습생이어도 좋으니 써달라고 했다. 그때가 2009년 7월 여름이었다.
금 전 코치는 물었다. “지금 네 몸이 몇%냐?” “70% 정도인 것 같습니다.” “그래선 안 된다. 네 몸이 100%여도 400%를 원하는 곳이 SK다.” “한달 안에 만들어 보겠습니다.”
그로부터 한 달 뒤인 8월 어느 날, 허웅은 문학구장 내야에 섰다. 김성근 감독이 직접 나와 있었다. 3루에서 1루까지 송구를 시켰다. 그 다음에 타격, 주루 이것저것 다 해봤다. 이상하게 마음먹은 것보다 더 잘되는 기분이었다. 그 자리에서 김 감독은 말했다. “2군 숙소로 가라.” 합격 판정이었다.
연봉 2400만원의 신고선수로서의 새 출발. 시키는 대로 마냥 열심히 했다. 그러나 1군까지의 길은 왜 이다지도 험한지. 딱 한번이면 되는데…. 박경완, 정상호는 언감생심이었다. 2군에서 호출이 내려올 때조차도 최경철, 김정훈이 먼저였다. 손가락까지 다쳤다. 그래서 2011년 봄 캠프는 일본 고지까지만 소화했고, 오키나와 최종캠프는 탈락했다. 다시 기약 없는 2군 생활. 포수가 아니었다면 예전에 끝났을 야구 인생이었다. 야구를 마치면 저녁에 수영장에서 어깨와 체력을 만들었다. 여기서 만나서 1년4개월을 사귄 여자친구(임두리새암 씨)가 힘이 되어줬다. “야구를 그만두고 나서요, 창피하고 싶지는 않았어요. 물론 그런 선수들 많지만 그래도 1군 경기는 뛰어본 선수로 기억되고 싶었어요.”
7월28일 여자친구와 운동을 하고 있을 때, 10년간 기다린 그 전화가 기적처럼 1군 매니저에게서 걸려왔다. “준비하고, 대전으로 합류해라.” 29일 부산에서 대전으로 올라온 1군 선수단과 합류했고, 30일 한화전 6회에 평생의 소원이던 1군 출장이 이뤄졌다. 2군에서 한솥밥을 먹던 박희수, 박종윤과 호흡을 맞췄다.
이미 승패가 물 건너간 상황에서의 교체 투입이었지만 허웅의 눈에 비치는 모든 것이 의욕적이었다. “가르시아가 타석에 들어왔을 때입니다. 1군 투수들의 연습 투구를 수없이 받아줘서 볼을 받으면 ‘나이스!’ ‘오케이!’라고 크게 외치는 버릇이 입에 뱄어요. 희수 공을 받았을 때, 나도 모르게 큰 소리로 그렇게 외쳤어요. 그러자 가르시아가 버럭 성질을 부리며 ‘셧업!’하더라고요. 아차, 싶었죠. 그래서 ‘쏘리, 마이너리그, 퍼스트 타임’이라고 살짝 말했어요. 알아들었는지 가르시아가 웃더라고요.”
1군 무대가 이렇게 사람을 힘이 나게 하는 줄 이제 알았다. 9회 생애 첫 프로 타석에서는 삼진을 당했다. 그러나 1군의 문이 열린 것처럼 언젠간 첫 안타, 첫 홈런, 첫 승리포수의 영광도 얻을 것이라 믿는다.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지금 허웅은 SK 1군포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