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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가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자유게시판 > 상세보기 | 2011-07-31 17:46:54
추천수 2
조회수   671

제목

애국가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글쓴이

최태한 [가입일자 : 2005-08-07]
내용
Related Link: http://blog.daum.net/leesangbun/15859983

'안익태의 애국가'는 국가(國歌)일 수 없다

[인천in 칼럼] 서규환 교수 (인하대 / 사회과학부)



"독일 시기 안익태의 비밀스러운 과거는 봉인되어 꼭꼭 숨겨져 있었다. 일독회의 존재도, 일본인 에하라의 역할이나 <에텐라쿠>, <만주국 축전곡>의 존재도 철저하게 침묵되어야 했다. 그 대신 슈트라우스와의 오랜 친분관계는 필요 이상으로 강조되어야 했고, <코리아 판타지>와 <강천성악>의 존재가 더욱 부각되어야 했으리라. 별로 중요하지 않은 악보와 프로그램은 보존되었지만, 최고 음악적 캐리어를 증명하는 독일 시기 음악회 프로그램이나 홍보용 팸플릿, 특히 이 시기 <교쿠토>나 <만주국 축전곡>과 밀접한 관련이 있어 보이는 자작곡 <코리아 판타지>의 악보 등이 사라진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안익태의 자필 정보를 항상 그대로 믿을 수 없는 혼란스러움은 전쟁 후 일본제국과 관련된 흔적이 드러나지 않도록 사실들을 부분적으로 왜곡하고 비역사화한 것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이 시기는 그의 생애에서 잊혀지고 숨겨져야 하는 잃어버린 시간이었다."



이 진술은 안익태에 관한 사료들을 발굴하여 그동안 알려져 있던 내용과는 어떻게 다른지를 밝힌 이경분 박사의 획기적인 사회사연구서 <잃어버린 시간 1938~1944>(2007년)에 있는 말이다. 이 저술이 그의 생애와 음악사상에 대해서 밝히고 있는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안익태는 이른바 1939~1944년 사이의 독일 시기 동안, <코리아 판타지>를 지휘하지 않았으며, 그의 대표작도 아니었다. 대표작은 <에텐라쿠>[Etenraku]였다. 그는 1942년 홍보용 팸플릿에서도 자작곡 <에텐라쿠>, <교쿠토> 및 일본 황국 기원 2600년 기념 위촉곡인 이탈리아, 헝거리, 독일 작곡가의 일본 작품을 레퍼토리로 내세웠다. 일본 음악가로서의 이미지를 높이려 했던 것이다.



둘째, 안익태가 독일에서 지휘활동을 지원했던 주체는 그의 전기에서 늘 강조되었던 슈트라우스가 아니었다. 안익태에게는 빈 연주회, 베를린 연주회가 중요했는데, 그 기획자는 일독회(日獨會, Deutsch-Japanische Gesellschaft)였고, 이 일독회를 통해서 그는 슈트라우스와 가까워지는 계기를 얻었다.



셋째, 안익태는 12년간 슈트라우스의 제자였다(‘1938년 제자설’)고 주장했으나, 신빙성이 떨어진다. 그리고 1942년 안익태 홍보용 팸플릿에도 ‘슈트라우스의 제자’라는 문구가 없었는데, 1943년 2월 빈 연주회 프로그램에 등장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는 만주국 고위 관료 에하라 고이치가 큰 역할을 했다. 안익태의 <만주국 축전곡>은 슈트라우스가 베를린의 에하라 집에 체류했을 때 이 대가의 조언을 받았던 작품이며 ‘슈트라우스의 제자’라는 문구를 공식적으로 사용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넷째, 슈트라우스는 사정이 생겨 자신이 갈 수 없는 연주회에 안익태를 대신 보냈다고 알려져 있으나, 슈트라우스가 아니라 동경음악학교 스승인 고노에일 가능성이 크다. 고노에는 <에텐라쿠>를 비롯하여 비슷한 레퍼토리를 가지고 있었고, 지휘 스타일도 비슷한 안익태를 대타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 후 그는 고노에의 경쟁자로 부상하는 인정을 받게 된다. 안익태는 1943년 베를린 필하모니 여름 연주회에 고노에를 대신하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다섯째, 안익태는 이렇게 성공하는 과정에서 적극적으로 독일 나치와 일본 관료들에게 협력하고 연주회를 제안했다. 그는 1943년 2월 빈에서 <만주국 축전곡>을 다시 지휘할 수 있도록 직접 일본 대사관 관료에게 부탁하거나, 1943년 4월 함부르크 연주회를 위해서 일독회 총무에게 자발적으로 제안하고 감사의 편지를 쓰는 등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다.



여섯째, <코리아 판타지>를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에서 지휘했다고 하는 1954년 버전의 자필 정보는 신빙성이 없고, <강천성악>은 <에텐라쿠>와 같은 주제 선율을 가지고 있으며, 세종조의 멜로디를 주 선율로 했다는 1960년 런던 필하모니 연주회 프로그램의 정보도 오류이다........................펌













한국 환상곡과 에텐라꾸중에 안익태 본인이 생각했던 자신의 대표작은 둘중에 무었이었을까요.. 배국과 표절논쟁에서 자유롭다면 저는 당연히 "한국환상곡"이기를 바라는 안타까운 심정 입니다



음악듣기를 취미로 하면서도 예전부터 참으로 혼란스러운 것이 음악계에서 꼭 숨어있는듯한 분위기의 한국 환상곡과 또 이와 반대로 금메달 소식과 함께 시상식장면의 감동을 더하는 애국가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입니다

대안이 없으니 그냥 쉬쉬하고 덮어두고 있는것이 과연 상책일까요..



요즘 이승만에대한 이슈도 있다보니 문득 생각이나서 의견을 들어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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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우룡 2011-07-31 18:59:29
답글

짚고 넘어갈 부분이 있다면 그리 해야지요....<br />
<br />
그런데 포스팅에 글쓴이로 나온 사람이 누군지 몰라서...헤헤... ㅜ,.ㅠ^

최태한 2011-07-31 20:11:54
답글

http://www.cyworld.com/questions02/10721184 이곳에서 목차만 보셔도 참고가 되실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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