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시대 재야의 거목 고 강원용 목사님의 자서전 『빈들에서』를 보면,
강 목사님이 박정희의 좌익 편력에 대하여 집요하게 추적해 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요즘 틈틈이 읽고 있는데, 한 대목 옮겨 적어보지요.
(2권 269-270쪽)
내가 알고 있는 바로는 1967년까지도 박정희와 좌파 세력간의 관계는 계속 유지되고 있었던 것 같다. 그 대표적인 예가 내무장관으로서 1967년 양대 선거를 치루어낸 엄민영이라는 사람이다. 나는 그가 사상적으로 좌파 인사이며 부인도 이북에 있다는 정보를 갖고 있었다.
언제인지는 정확치 않아도 그가 내무부장관을 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김재국이라는 내 담당 형사가 자꾸 나를 따라다니기에 한번은 내가 그를 불러 이런 얘기를 한 일이 있다. 그는 어느 교회인가의 장로로 있던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
"김형사, 당신 정말로 공산주의를 마음 속에서부터 반대하고 있는 거요?"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당신 왜 진짜 공산주의자들은 조사하지 않고 엉뚱하게 나를 따라다니는 거요?"
"무슨 말씀이십니까?"
"당신네들의 장관을 한번 조사해 보시오. 그러면 거기서 뭐가 나올 거요."
그는 내 말에 너무 어이가 없는지 입을 딱 벌렸다. 그러나 내 말을 아주 무시할 수는 없었는지 그는 그 후 가까운 동료 몇 사람과 함께 엄 장관을 비밀리에 내사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그들은 정부 내의 좌파 세력들에 관해 조금씩 윤곽을 잡아가기 시작했는데, 그러다가 그만 그들의 내사 활동이 먼저 발각되어 김재국은 그 후 제주도로 좌천되고 말았다.
그런 일들을 접하면서 나는 박정희 정권의 색깔에 대해 더욱 의구심을 풀 수가 없었고 그런 만큼 그들과의 사이가 좋을 리 없었다. 내 느낌으로는 박정희 역시 내가 자기들을 깊은 뿌리에서부터 의심스럽게 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았고 그런 만큼 나를 경계하는 듯했다. 후일 내가 듣기로는 그 무렵 박정희가 제일 주목했던 인물이 나와 장준하였다고 한다.
앞서 말했듯 박정희가 좌파 세력과 손을 끊은 것은 삼선개헌을 앞두고 그를 위한 발판을 다지기 시작하던 무렵으로 보인다. 그는 혁명을 숨어서 지원해 온 좌파 세력들과도 재선으로 대통령직에 만족하고 그만 둘 것을 약속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는 집권 연장을 포기할 수 없었고, 그런 생각이 굳어지면서 노골적인 친미 성향을 보이기 시작한 것 같다. 그때 박정희 측근들과 함께 무교동 술집 등지에서 자주 어울렸던 내 친구 하나는 당시 그 측근들이 박정희의 대미 자세에 관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고 한다.
"그 양반이 미국놈 품에 웃통 벗고 안기는 것까지는 그래도 봐주겠는데, 요새는 아예 팬티까지 벗고 달려든단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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