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lated Link: http://blog.ohmynews.com/kimsamwoong/368596
근현대사 인물평전을 연재하고 있는 김삼웅선생님의 [송건호 평전] 88회의 내용입니다.
위 링크 블로그를 방문하면 안중근, 장준하, 조봉암, 김대중, 리영희, 김상덕, 이회영 등의 평전을 볼 수 있습니다.
=============================================
송건호는 1982년 늦은 가을 오랜만에 대학신문에서 원고청탁을 받았다.
시사문제가 아닌 '한국 민족주의의 이해' 라는 제목이었다. 반가웠다. 비록 시론은 아니지만 늘 관심사였던 민족주의 문제를 대학생들에게 들려 줄 수 있는 기회였기 때문이다.
송건호는 5공 초기 살얼음판 같은 시기에 쓴 이글에서 민족주의를 3단계로 구분한다.
제 1단계의 민족주의는 19세기 이전 주로 서구에서 근대국가가 형성되고 발전할 당시 이데올로기로서 성립, 서민층이 담당세력이 되어 나라의 통일ㆍ독립ㆍ발전을 추진하는 이데올로기가 되었다고 분석한다. 송건호의 민족주의 관련 많은 논설 중에서 이 글은 고난의 시기에 써서인지 특별한 의미가 깃들여진다.
제2단계는 자본주의 발전의 불균형에서 생긴 서구 국가간의 갈등이 빚은 ‘군사’ 민족주의로서 일반적으로 파시즘운동이다. 2차대전 전 독일ㆍ이탈리아ㆍ일본에서 발생한 이데올로기로서 그들보다 앞선 자본주의국가들과 식민지 쟁탈에서 뒤져 그것이 불만으로 변해 ‘군사형’ 민족주의 운동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제3단계는 2차대전 뒤 식민지에서 해방된 신생국가의 민족주의는 ‘제3세계형’으로서 ‘민중형’으로 규정한다. 이 경우 안으로는 새로운 힘과 낡은 세력간의 대립이었고, 밖으로는 자주하려는 힘과 사대주의 세력 간의 대립으로 성립된다고 설명한다. 이와 같은 전제 아래 한국민족주의의 과제를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한국의 민족주의를 논의하는데 있어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할 점은 민족주의의 역사적 담당세력이 누구인가, 그들은 어떻게 형성되었는가라는 점이고 둘째는 우리 민족주의의 당면과제는 무엇인가라는 점이다.
우리의 민족사상 근대적 민족주의의 분수령은 3ㆍ1운동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구한말의 동학농민전쟁이나 독립협회운동이나 애국계몽운동이 근대사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민중운동임에는 틀림없으나 엄격히 말해 이들은 전근대에서 근대로 전환하는 일종의 과도적 의미를 지닌 운동이었다.
이념면에서 민족주의와 자유와 평화와 국제적 사조를 뚜렷이 인식하고 표방한 민족운동은 3ㆍ1운동에서 비로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이전의 다른 모든 운동과는 달리 3ㆍ1운동은 그것이 어느 한두 계층에 의해 벌어진 운동이 아니고 전민족이 총궐기한 항일운동이었다는 점에서 3ㆍ1운동이 우리 민족의 근대민족운동사상 하나의 시발점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주석 18)
학계에서는 근대의 기점을 3ㆍ1운동으로 삼는 것이 일반적 통설이다.
송건호도 3ㆍ1운동을 우리 근대 민족주의운동의 시발점으로 인식한다. 송건호는 해방 뒤 민족주의운동의 담당세력이 미국에 의해 무시되어왔다고 주장한다.
“우리 민족사상 최초라 할 수 있는 근대적 민족주의 지도세력은 국내외를 막론하고 미국정부에 의해 무시되어 8ㆍ15 후의 한국민족주의는 자주적 세력이 아니라 한때 일제에 친밀한 타협세력, 다분히 사대사상을 갖고 있는 사이비 민족주의 세력에 의해 민족주의가 담당되어 왔다.” (주석 19)
송건호는 민족주의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국민주의와의 구분을 요구한다.
“민족주의에 있어서는 민족문제는 한반도 전체를 통해서 보는 입장이고, 국민주의에 있어서는 분단상황 속에 파묻혀 민족을 생각한다는 점이 다르다” (주석 20)는 것이다. 이 부문에서 송건호의 탁월한 민족주의 이해의 관점을 살피게 된다.
지금까지 우리는 민족문제를 국민주의적 입장에서 고찰하는 버릇을 가지고 민족주의적 입장에서 민족을 생각한다는 경향이 적었다. 최근 이러한 타성에 대한 반성이 일부에서 일고 있는 것은 하여간 다행한 일이다.
민족문제를 생각하는 데 있어 먼저 알고 있어야 할 점은 통일이 안된 민족은 즉 분단상황의 민족은 아직 민족주의가 실현되지 않고 있는 민족이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한국민족주의를 말할 때 통일문제를 제외하고는 논의 그 자체가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
바꾸어 말해 우리는 한국민족주의를 분단이 아닌 통일을 내용으로 하는 민족적 과제로서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승만적 민족주의가 아니라 김구적 민족주의로서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사람으로서 민족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고 민족을 생각할 때 통일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 또한 없을 것이나 광복 38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통일이 안 됐다면 그 이유는 민족을 생각함에 앞서 국민을 생각한 때문이 아닌지 모르겠다. 민족에 앞서 국민을 생각한다는 것은 통일을 냉전주의적 사고로 생각한다는 것이고, 통일 속에서 보다 분단 상황 속에서 자신의 이익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고와 상통하는 것이다. 이론적으로 볼 때 통일 속에서보다 분단 속에서 이익이 있다고 생각하게 되면 민족보다 국민을 강조하게 되고 통일보다 분단에 미련을 갖게 될 것이다. (주석 21)
송건호의 이 부문에서 일제식민지배 체제에서 인적ㆍ물적 기반을 구축해온 친일세력을 구심으로 하는 한국의 수구보수 세력이 왜 그토록 김구의 민족주의보다 이승만의 국민주의를 선호하는지, 역사적 배경을 찾게 된다. 결국 분단 상황 속에서 자신들의 이익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통일된 정의로운 사회에서는 친일ㆍ독재ㆍ부패로 얻은 기득권이 침해될 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