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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독재의 효시인가? 고담시인가? - 대구 2.28 민주의거
자유게시판 > 상세보기 | 2011-05-19 12:09:29
추천수 0
조회수   673

제목

반독재의 효시인가? 고담시인가? - 대구 2.28 민주의거

글쓴이

이태봉 [가입일자 : 2004-10-30]
내용
대구는 고담시 대구가 아니라 반독재의 효시라는 자랑스러운 민주의거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2.28민주의거를 널리알리고 칭찬하는 것은 대구시민 그들의 가슴속에 자랑스러운 역사를 일깨우는 길입니다.

2.28 대구민주의거를 널리 알리고 칭찬합시다. 욕은 벽을 쌓고 칭찬은 벽을 허뭅니다.







[위키펌]



2·28 대구 학생의거는 이승만 정권 시절인 1960년 2월 28일 3.15 대선을 앞두고 자유당 독재에 항거, 대구에서 일어난 학생의거는 이후 마산의 3.15 부정선거 항의시위로 이어졌고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된 사건이다.



민주당 정.부통령 후보인 장면 박사의 유세일이자 일요일인 이날 당국이 학생들이 민주당 유세장에 못나가도록 등교 지시를 내린 것이 2·28 대구 학생의거의 발단이 되었다.





사건 개요

경북고는 일요일인 이날 등교지시를 내린다. 사유는 3월에 있을 중간고사를 앞당겨 친다는 사유였다. 대구시내 다른 국공립 고등학교 7개 역시 일요등교를 지시 한다. 사유는 토끼사냥, 영화관람과 같은 황당한 이유도 있었다. 1960년 2월 27일 오후 대구 동인동 이대우 경북고 학생부 위원장 집에 경북고, 대구고, 경북대부속고 학생 8명은 부당한 일요등교 지시에 항의를 하기 위해 시위를 조직했고, '백만 학도여 피가 있거든 우리의 신성한 권리를 위해 서슴지 말고 일어서라'는 결의문도 작성했다. 2월 28일 오후 1시 학생 800여 명이 대구 반월당을 거쳐 도청으로 가는 과정에서 다른 학교 학생들이 합류하며 시위대는 커졌고 도중에 유세장으로 가던 장면 박사를 만났을 땐 '만세'를 부르기도 했다.



당시 도지사는 학생들에게 "이놈들 전부 공산당"이라고 한 반면, 시민들은 구타당하는 학생을 경찰에게 달려들어 말리고 박수를 쳤고, 치맛자락에 모자를 감춰 학생을 숨겨주는 부인이 대부분이었다.



1200여명의 학생이 시위에 참여를 했고 그 중 120여명이 경찰에 체포된다. 하지만 경찰은 시위가 번질 것을 우려해 주동자 일부를 제외 하고 대부분 학생을 석방하게 된다.



결의문

"백만 학도여, 피가 있거든 우리의 신성한 권리를 위하여 서슴지 말고 일어서라. 학도들의 붉은 피가 지금 이 순간에도 뛰놀고 있으며, 정의에 배반되는 불의를 쳐부수기 위해 이 목숨 다할 때까지 투쟁하는 것이 우리의 기백이며, 정의감에 입각한 이성의 호소인 것이다." 1960년 2월 28일 낮 12시 55분, 경북고 학생부 위원장 이대우 등이 조회단에 올라 격앙된 목소리로 결의문을 읽자 흥분이 고조된 학생들은 함성을 지르고 박수를 쳤다. 반독재의 횃불은 이처럼 대구에서 처음 불타올랐다.



운동 주체

2.28 운동은 고교생들이 주체이고, 계획적 조직 시위의 민족운동 요건을 갖춘 학생운동이었다. 우리 역사상 6.10 만세 사건, 광주 학생운동에 이은 의거로 전후 학생운동의 효시가 되기도 했다. 특히 4·19 혁명의 도화선으로 독재 정권을 무너뜨리는 결정적인 계기를 만들었으며, 한일 수교 반대와 그 이후 민주화 운동에 큰 영향력을 미쳤다.





피에쑤.

이때 의거를 주도했던 이대우교수(부산대 사회학과)는 2009년 9월 13일 혈액암으로 타계하셨습니다. 언론운동 원로인 성유보선생님도 이때 함께 하셨던 분이시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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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진묵 2011-05-19 12:27:17
답글

분명히 1980년대 초까지만 해도 확실한 반 수구 진보쪽 성향이 강했었습니다.<br />
<br />
그런데 지금은 왜 이렇게 되어 버렸는지...ㅠㅠ

채진묵 2011-05-19 12:28:04
답글

아니지... 6.29 항복때 까지만 해도 이 지경은 아니었는데....

kipumege@empal.com 2011-05-19 12:36:25
답글

채사장님의 지적처럼 대구가 한때는 야도로 맹위를 떨쳤는데<br />
이상하게 80년대 이후에 맹목적인 보수로 급선회하면서 이제는 <br />
반개혁수구의 아성으로 맹위를 떨치네요 <br />
여러 요인이 있지만 그가운데 조선일보 흉내를 내고 있는 매일신문같은 언론들의 <br />
영향도 컸다고 봅니다<br />
<br />

고용일 2011-05-19 12:37:39
답글

해방후 좌익으로 몰려서 처형당한 사람들이 대구에 많았다더군요<br />
박정희 형도 그중 하나라고 하고요<br />
<br />
윤보선이가 근소하게 박정희한테 진게..<br />
박정희 좌익경력 얘기하다가 <br />
<br />
당시 영.호남에는 좌익 피해자들이 많았는데<br />
윤보선이가 되면 큰일나겠구나 하면서 박정희 많이 찍었다고..<br />
<br />
63년 선거..<br />
-------------------

kipumege@empal.com 2011-05-19 12:41:48
답글

한가지 예를 들자면 요즘도 연재되고 있는지 모르지만 매일신문의 "수암칼럼"란은 조선일보의 칼럼을 뛰어넘는 "명칼럼(?)으로 지역보수들의 사랑을 받앗지요 ...

정하엽 2011-05-19 15:33:27
답글

근데 명덕로타리 2.28 기념탑 지금도 있나요?<br />
<br />
80년대 선배들이 2월28일 밤에 기념식 하러갔다가 경찰서에 잡혀간 기억이 납니다.

손창우 2011-05-19 17:03:56
답글

<br />
2.28 기념탑은 명덕로타리가 4거리로 바뀌면서 두류공원으로 옮겨졌어요. <br />
<br />
제 생각에 대구가 여당도시화 된건 김영삼이 3당 합당할 때 부터 인것 같네요. 전두환시절만 해도 유승환 같은 분들이 반공이 국시가 아니고 통일이 국시라고 주장할만큼 야당세를 무시 못했는데... <br />
3당 합당시에 야당하던 사람들이 대부분 김영삼따라 민자당으로 들어간 후 야당의 맥이 끊어져서 지금은 찍어 줄래도 야당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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