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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5월 16일에 박정희가 쓴 일기 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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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16 09:14:5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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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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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5월 16일에 박정희가 쓴 일기 입니다. |
글쓴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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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규 [가입일자 : 2001-07-04] |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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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박정희 관련한 글이 하루 하나는 올라 오는 군요.
대선과 총선이 다가오니 또 다시 이슈가 되는데...
양쪽의 의견이 다 올라 올 수 있는 게시판이 되길 바라며 글을 올립니다.
아... 이 글은 기사를 그대로 옮겼으며 박정희 대통령 개인의 일기이니 사료라는 측면에서 받아 들이시면 좋을 듯 합니다. (마치 김대중 대통령의 자서전과 같은 수준의 자료가 아닐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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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 근대화 과업수행 도중에 나의 인생의 반려인 내자를 잃게 된 비운을 겪어야만 했다는 사실은 나로 하여금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손실이요 불행이었다.”
5월 16일은 대한민국 역사의 큰 획을 그은 '5.16' 50주년이 되는 날이다.
혁명 또는 쿠데타로 불리는 5.16을 맞으며 정작 박정희 전 대통령은 어떤 감회를 가지고 있었을까?
박 전 대통령은 1979년 5월 6일 일기에서 18번째 5.16을 맞는 감회를 정리했다. 박 전 대통령은 이 해 10월 26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저격으로 사망했다. 따라서 이 일기는 박 전 대통령의 쓴 마지막 5.16에 대한 소감이 된다.
박정희 대통령 인터넷기념관이 수록한 이 날 일기에서 박 전대통령은 “누란의 위기에 직면한 조국을 구하려, 아니 구하겠다는 생각보다는 가만히 좌시만을 할 수 없다는 우국의 일념으로 젊은 군인들이 궐기한 것이 5.16”이라고 정리했다.
그는 이어 “(거사에 나선 군인들이) 뚜렷한 경륜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며 “ 사회악과 부조리를 과감하게 척결하고 우리 사회에 새로운 신풍을 흡입하기 위해서도 5.16은 필수적이었다”고 썼다.
박 전 대통령은 “산적된 일들을 처리해 나가는 혁명정부에 국민들은 박수를 보내주기도 했으나 구 정치세력들의 반발과 저항도 만만치가 않았다”고 회상하고 “그들은 외세를 빌려서 혁명정부를 빨리 종식시키고 다시 자기들이 정권을 장악하겠다는 집념에 차 있었다”고 적었다. 이어 “과감한 개혁이 진행되는 과정에 혁명 주체세력 내부에도 다소의 내분이 없지 않아서 고민을 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털어놨다.
박 전 대통령은 “이제 우리 국민들도 이제 민족적이니 긍지와 자주정신, 그리고 우리도 하면 된다는 자신감들이 과거 어느 때 보다도 고조되어 있다”며 “스스로의 피땀으로 이룩한 성과에 대하여 보람과 자랑을 느끼고 있는 것”이라고 기쁨을 표시했다.
하지만 “우리의 작업이 열매를 맺으려면 더욱 분발하고 총화로써 정진하여야 할 것”이라며 “과업수행 도중에 나의 인생의 반려인 내자를 잃게 된 비운을 겪어야만 했다는 사실은 나로 하여금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손실이요 불행”이라고 인간적인 고뇌를 털어놓기도 했다.
다음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1979년 5월 6일 일기 전문이다.
1979년 5월 6일 5.16혁명 제 18회 기념일이다. 1961년 5월 16일 누란의 위기에 직면한 조국을 구하려, 아니 구하겠다는 생각보다는 가만히 좌시만을 할 수 없다는 우국의 일념으로 젊은 군인들이 궐기한 것이 5.16이다. 뚜렷한 경륜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난마와 같이 헝클어지고 부패부정 무질서 부조리 정체 무기력 이러한 단어들이 5.16 당시 우리 사회의 일면을 단적으로 표시한 표현들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모든 사회악과 부조리를 과감하게 척결하고 우리 사회에 새로운 신풍을 흡입하기 위해서도 5.16은 필수적이었다.
그러나 혁명을 단행하고 구 정치인들로부터 정권을 인수한 혁명정부는 너무나 막중한 과제들이 기다리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무능하고 부패한 민간정부를 전복하고, 구악에 물든 대표적인 인사들을 구속하며 쾌도처럼 산적된 일들을 처리해 나가는 혁명정부에 대하여 다수 국민들은 쾌재를 부르고 박수를 보내주기도 했으나 구 정치세력들의 반발과 저항도 만만치가 않았다.
그들은 외세를 빌려서 혁명정부를 빨리 종식시키고 다시 자기들이 정권을 장악하겠다는 집념에 차 있었다. 혁명정부의 과감한 개혁이 진행되는 과정에 혁명주체세력 내부에도 다소의 내분이 없지 않아서 고민을 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1963년 12월 17일 민정이양을 위한 선거로써 제 5 대 민선 대통령으로 당선된 나의 취임식이 중앙청 광장에서 거행되고 군정은 완전히 민정으로 이양되었다.
5.16혁명 18주년을 맞이하여 지나온 18년간을 회고하니 감회가 무량하다. 조국근대화 과업도 이제 결실기에 들어섰다. 1,2,3차 5개년 계획이 대체로 순조로이 진행되어 우리의 국력도 괄목하리만큼 크게 신장되었고 공업화도 착착 추진되어 5.16 당시와는 비교하기 어려우리 만큼 나라의 모습이 변모하였다. 남들은 한국의 기적이니 한강이 기적이니 하고 우리가 걸어온 도정과 결과에 대하여 찬사를 보내고 있다.
우리 국민들도 이제 민족적이니 긍지와 자주정신, 그리고 우리도 하면 된다는 자신감들이 과거 어느 때 보다도 고조되어 있다. 자신들의 스스로의 피땀으로 이룩한 성과에 대하여 보람과 자랑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1970년대 초에 시작된 새마을운동과 1972년 가을에 단행된 10월 유신은 우리의 과업을 촉진시키는 데 결정적으로 절대적인 영향력을 미치게 되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우리의 과거 작업이 열매를 맺으려면 아직도 요원하다. 더욱 분발하고 총화로써 정진하여야 할 것이다. 이 과업수행 도중에 나의 인생의 반려인 내자를 잃게 된 비운을 겪어야만 했다는 사실은 나로 하여금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손실이요 불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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