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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는 친일반역, 군사반란, 민주.인권파괴, 변절, 살인 등 인간이 저질수 있는
모든 악행을 저질렀지만, 나라의 경제을 세웠다는 단 한가지 공로(?)로 추앙을 받고
있다. 그러나 그것도 엄청나게 과장되고 왜곡이 되어 있다.
제주대의 강기춘교수는 김영삼정권 2년까지의 경제평가에서 박정희를
전두환.토태우, 김영삼 다음으로 4위로 평가했다. 다음은....
◈ 숫자로 본 박정희시절의 경제 (랭킹 4위)
-다음의 글은 강준만의《현대사 산책》, 경상대 장상환교수, 제주대 강기춘교수,
최용식 21세기 경제연구소 소장, 박세길의《다시쓰는 한국현대사》등의
글을 참고 했습니다.
***숫자로 본 박정희시절의 경제***
[박정희시대의 소비자물가 상승률(cpi)]
박정희시절의 소비자 물가는 평균 년 16.5%의 상승률을 보였고
1974년 24.3%, 1975년 25.7%, 마지막해인 1979년에는 18.3%였다.
살인적인 물가상승이었다. (노무현정권: 2-3% 대이다)
[박정희시대의 은행대출금리]
-60년대 은행대출 금리가 년17.5%-26%였다. 70년대는 15.5%-24%였다.
1865년도에는 금리가 년 30%까지 치솟았다. 이 역시 살인적인 수치이다.
(노무현정권: 6%대이다)
[박정희시대의 수출현황]
박정희는 날이면 날마다 수출의 노래를 불렀다.
그러나 결과는 박정희 18년간 수출 638억불에, 수입 871억불, 무역적자 233억불
-박정희시절; 233억불의 무역적자
-전두환시절; 8억불 무역흑자 (전두환은 8억 흑자를 자랑으로 여긴다)
-노태우시절; 132억불의 무역적자,
-김영삼시절; 366억불의 무역적자,
-김대중시절; 846억불의 무역흑자,
-노무현시절; 년간 200억불 이상흑자로 5년간 총 1천억달라 이상의 흑자가 예상된다.
**이게 바로 박정희가 자랑하는 수출의 모습이다.
박정희가 노무현.김대중의 수출실적과 수출흑자를 보면 깜짝 깜짝 놀라야 한다.
(박정희정권은 언론과 합작으로 수출성과를 대대적으로 선전했으나
엄청난 적자의 이야기는 속 빠진 체였다)
[박정권시절, 농민들 약 50%가 농촌을 떠나다]
-박정희의 새마을 운동, 농촌이 잘사는 나라운운해도 사실은 그 반대다.
박정희시절은 년간 약 50만 명씩 이농을 했다.
박정희정권 전기간에 걸쳐 농촌인구의 거의 절반이 도시로 떠났다.
농촌이 잘 사면 왜 이농을 하는가?
-1960년 농업인구가 58.3%였는데 박정희의 저곡가.공업화정책과
미국에서 들여온 엄청난 잉여농산물로 살기가 어려워 그리고 농촌부채로
이농을 함으로 1975년에는 37.5%까지 줄었다. 1967-1976 년 사이에
670만명의 농촌인구가 도시를 떠났는데, 이는 한국전쟁동안의 인구이동보다
더 심대한 것이었다.
박정희시절은 수출을 위해선 저임금이 필요했고, 저임금을 유지하기 위해서
저곡가 정책이 강행했다. 저곡가정책으로 농촌은 몰락해갔다.
-충남대 박진도교수의 말
(박정희시절은) 저임금으로 수출을 했다. 저임금으로 수출을 하자면
농촌에서 사람을 뽑아 내야 합니다. 그렇게 노동력을 충당했다.
그런 면에서 농촌을 잘 살게 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박정희시절의 부동산]
63년 기준으로 하여 7년 후 강남의 부동산은 학동이 20배,
압구정동이 25배, 신사동이 50배로 올랐다. 충격적이지 않는가?
같은 기간 서울의 중구 신당동은 10배, 용산구 후암동은 7.5배 상승했고,
전체적으로 서울의 땅값은 이기간 동안 14배나 폭등하는 혁명적 상황이었다.
또한 박정희 전 기간 동안 땅값 상승은 년 평균 33%의 폭동을 기록했다.
(노무현정권 들어 땅값상승은 년 3%대이다)
[도시빈민. 판자촌. 광주폭동]
-박정희시절에 살기 어려워 농촌을 떠난 사람들이 도시빈민층을 형성했다.
그들은 산동네에 판자촌을 이루어 살았는데 서울의 경우 박정희 정권은
그들을 강제로 철거, 광주(성남)으로 이주를 시켰다.
도로도 없고, 물도 없고, 전기도 없는 지역에 사람만 추방을 했다.
그들은 천막을 치고 살았는데 무엇보다 일자리가 없어 굶주리다 못해
대대적으로 저항에 나선 거였다. 20만 명의 철거민들이 폭동을 일으켰다.
그게 소위 광주폭동이라는 거다.
(민노당 김혜경대표의 증언에 의하면 한 여자가 해산을 했으나
너무나 배가 고파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 자신의 아기를 삶았다고 한다)
[서민들이 삶]
1. 박정희시절은 노동자들의 노동시간이 세계에서 가장 길었다.
1. 임금은 미국노동자의 1/12 정도에 불과했고, 산업재해는 세계 최고였다.
1. 피고용인 가운데 1976년 74.9%, 1978년 76.7%가 근로소득 면세점 이하였다.
(태반의 근로자가 최저생계비조차 못 버는 상황이었다)
1. 60년대 초반 학교에서 점심을 굶은 아동수는 50%를 넘었다.
1. 1970년대 중반 서울인구의 1/3-1/5에 해당하는 100만-300만 명이
판자 촌에서 비참한 생활을 했다.
1. 근로자들은 노조를 결성하거나 노조에 가입했다는 이유만으로 쫒겨 나든가
빨갱이로 몰리기도 했다.
1. 서울 평화시장의 경우 17세 이하의 여성노동자 1만여 명이 하루 16시간 이상
1인당 1평도 안 되는 면적에서 최저임금의 1/5도 안 되는 돈을 받으며 혹사당했다.
[박정희시대의 경제성장률]
⊙ 단순 숫치상으로 전두환이 1위, 박정희 2위, 노태우 3위, 김대중 4위
역대 집권자들의 연평균실질성장률(이하 연평균성장률)은 전두환 9.3%,
박정희 8.5%, 노태우 7.0%, 김대중 6.8% 순으로 단순 수치상으로는 박정희가 2위이다.
⊙ 상대평가에서는 김대중 1위, 전두환 2위, 노태우 3위, 박정희 4위
박정희의 경제성장률은 주요국가 보다 3.3% 더 높았으나 대만보다 1.5% 낮았고,
전두환의 경제성장률은 주요국가 보다 5.7% 더 높았고 대만보다 0.8% 더 높고,
김대중의 경제성장률은 주요국가 보다 4.8% 더 높았고 대만보다 3.7% 더 높았다.
*대만을 포함한 주요국(8국:미,카,영,독,프,이,일,대)의 연평균성장률을 비교하면
김대중 1위, 전두환 2위, 노태우 3위, 박정희 4위다. 그리고 성장율은 대체로
선진국에 갈수록 작아진다는 것을 참조하면 김대중과 전두환의 경제는 박정희보다
훨씬 나은 것이다. 김대중의 경우 한국전쟁이후 가장 큰 국란이란 외환위기를
극복하고도 세계 최고수준의 성장을 이루었다.
*김대중은 또한 경제성장에서 세계 최고수준이었을 뿐만 아니라,
단 5년만에 대한민국을 IT강국, 전자제품강국, 생명공학의 강국으로 올려 놓았고,
수출 최대 그리고 흑자, 경상수지 흑자, 외환보유고 세계 4위로 올렸고,
한국의 영화산업을 세계 2위 수준으로 끌어 올렸고, 한류의 꽃을 피웠다.
(노무현 정권 들어 이 현상은 더욱 발전이 되고 있다)
"박정희 때문에 한국경제가 발전한 것이 아니라 박정희에도
불구하고 한국경제가 발전한 것이다"
-경제학자 최용식, 《경제역적들아 들어라》의 저자
“가시적인 실적 위주의 박정희 개발독재야말로 시장 경제를
병들게 한 암세포였다. 나아가 그것은 IMF 금융위기의 뿌리였다”
-고려대교수 이필상
"박정희정권의 경제성장은 외견상 화려해 보이나, 그 시기의 부동산 광란을
생각하면 그것은 미래의 성장을 미리 당겨 쓴 '거품경제의 온상'이었다"
-경북대학교 교수 이정우
**박정희시대는 물가상승, 집값 상승 등 정권에 불리한 내용은
언론에 내 보낼 수가 없었다. 물가상승도 물가조정이라는 말로 표현해야
하고 수출에 관해서도 적자의 이야기는 없고 수출이 늘었다는 내용만
언론에 크게 부각했다.
박정희시절처럼 물가가 오르고, 은행대출이자가 높고, 땅값이 천정부지로
뛰었다면 김대중. 노무현은 몇 번이나 쫓겨났을 것이다. 박정희경제에 대한
평가는 선전과 언론조작의 결과물일 뿐이다.
보다 상세한 자료입니다.
존 콜트레인과 지미 헨드릭스의 세계 - 박정희 경제 평가
이것이 박정희 신화의 허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