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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울하게 고통 속에 돌아가신 선조들의 명복을 빕니다.
자유게시판 > 상세보기 | 2011-04-15 11:17:24
추천수 0
조회수   491

제목

억울하게 고통 속에 돌아가신 선조들의 명복을 빕니다.

글쓴이

신동철 [가입일자 : 2001-09-25]
내용
Related Link: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

[어제의 오늘]1919년 제암리 학살사건



ㆍ일본군 화성 주민 감금 집단 학살



‘마침내 음력 3월16일 오후 1시경 일경들은 돌연 부락을 습격하여 청년 21명과 여인 2명, 도합 23명을 무기로 위협하여 예배당에 감금하고 출입문을 폐쇄한 뒤 석유를 뿌려 불을 질렀다. 불길은 두렁바위를 사를 듯 하늘에 뻗쳤고, 순국열사의 기막힌 통곡성은 아득히 구천으로 사라진 채 예배당은 한 줌의 재로 변해 버렸다.’(1959년 월탄 박종화가 쓴 ‘제암리 3·1운동 순국기념탑 비문’ 중에서)



1919년 4월15일, 일본군은 경기 화성시 제암리 제암리교회에서 지역주민들을 감금하고 집단 학살했다. 3·1운동 이후 전국적으로 만세운동의 불길이 번져나가던 시기였다.



제암리 주민들은 그해 3월30일 발안 장날을 이용해 장터에서 만세를 불렀다. 천도교 지도자들이 주도해 시작된 만세운동은 800여명의 군중을 끌어들였고 그 과정에서 일본군은 총칼을 들고 매질을 하는 등 무력으로 사태를 진압했다. 그러나 주민들은 이후에도 장날이면 만세를 외쳤고, 밤마다 뒷산에 올라 봉화를 올림으로써 독립운동을 계속해 나갔다.



4월15일, 당시 수원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 육군 ‘보병 79연대’ 소속 아리타 도시오 중위가 헌병과 함께 제암리에 나타났다. 이들은 “만세운동을 진압하며 너무 심한 매질을 한 것을 사과하려고 왔다”며 제암리 주민 가운데 15세 이상 남자들을 교회에 모이도록 유인했다. 무차별 학살의 시작이었다. 주민들이 교회에 모이자 헌병들은 밖에서 출입문을 봉쇄한 뒤 사격을 가했고, 이후에는 석유를 뿌리고 불을 질렀다. 헌병들은 마을의 모든 민가에 불을 지르고 숨어있거나 도망나온 주민도 살해했다.



일본 측은 사건 은폐를 노렸지만 한국에서 3·1운동을 돕고 있던 캐나다 선교사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에 의해 그 진실이 세상에 알려진다. 스코필드는 당시 참혹한 현장을 ‘떨리는 손’으로 촬영해 <제암리·수촌리에서의 잔학 행위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했고, 3·1운동 견문록 격인 <끌 수 없는 불꽃>을 발행해 일제의 만행을 세계에 알렸다. 스코필드의 한글 이름이 그 유명한 ‘석호필(石虎弼)’이다. 그는 ‘3·1운동의 제34인’으로 불리며 한국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2007년에는 당시 일제 조선군 사령관 우쓰노미야 다로 대장의 일기가 일본 아사히신문에 공개됐다. 그는 “사실을 사실로 처리하면 보다 간단하지만 학살·방화를 자인하게 돼 제국의 입장은 더욱 불이익”하기 때문에 “간부와 협의해서 저항해서 살육한 것으로 하고, 학살·방화 등은 인정하지 않는 것으로 결정하고 밤 12시에 회의를 끝냈다”고 적었다.



이윤주 기자 unyj@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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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찬석 2011-04-15 12:59:37
답글

평안히 쉬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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