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팬이라면, 토니 스콧 감독의 역작 Spy Game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로버트 래드포드와 브래드 피트라는 노장과 톱스타의 열연
냉전시대 동서독, 베트남전, 중동의 분쟁현장, 중국까지 섬세히 재현한 광대한 스케일, 치밀한 이야기 전개... 공전의 흥행과 대중의 지지를 얻어낸 대작이지요.
그 감독이, 얼마 전 철도액션물 Unstoppable을 내놓았습니다. 감독에 대한 기대, Spy Game에 대한 추억, 개인적인 철도분야에 대한 약간의 관심에 힘입어, 지난 밤 청해 보게 되었습니다.
주연은, 덴젤 워싱턴과 크리스 파인이 함께하고 있습니다.
영화를 보며, 내내 떨칠 수 없었던 생각은, 덴젤 워싱턴이 참 많이 늙었다는 것이었습니다. 90년대 영화에서 혁혁한 액션과 활약을 보여주었던 그 모습은 이제 과거의 모습이 되었나 봅니다.
영화의 배경은, 미국 철도산업의 중심지인 펜슬베이니아 주의 스탠튼이라는 곳에서 시작합니다. 제 생각엔, 스탠튼이라는 곳은 아마 가상의 지역 설정인 듯 합니다.
30여년 경력의 고참 기관사인 덴젤 워싱턴은, 새내기 차장 (conductor)인 크리스 파인과 함께 화물열차를 운전하는 임무를 받게 됩니다.
* 분기기의 사진입니다.
근데, 인근 지역에서, 유독성 화학약품을 포함한 수십여량의 화물열차가, 기관사의 실수로 혼자서 폭주하게 되는 일이 벌어집니다.
- 조차장 (다양한 열차가 대기하며 차량 재편성, 간단한 정비등을 하는 곳) 에서, 기관사가 분기기 (두 개의 선로가 만나는 점에서 열차의 진로를 정해주는 장치) 가 원격으로 조정되지 않는 것을 깨닫고, 기관차에서 잠시 내려 수동으로 분기기를 조작하고 다시 기차에 타려 합니다. 기관사가 내려서 분기기 스위치로 달려가는 사이, 텅 빈 기관실에서는 갑자기 가감기 (엔진의 출력을 조절하는 레버, 악셀페달과 동일)이 만땅으로 당겨지고, 기관사는 헐레벌떡 열차를 따라가보지만, 유독물질을 가득 담은 열차는 혼자서 저 멀리 사라지고 맙니다.
* 기관사가 잠시 내린 사이, 기차가 혼자서 최대 출력으로 출발한다...잠시 제가 호러 영화를 보는 것인가? 라는 착각이 들었습니다. 영화가 액션물인지 SF영화인지 정체성을 잃어버리게 한 가장 큰 오점이라 할 수 있는 장면이 아닐까 합니다.
* 자기 혼자서, 가감기 (쓰로틀) 이 최대 출력으로 당겨져서 폭주하는 열차는 대체 어느나라 열차란 말인가요??
영화는 내내 지루하게 전개됩니다. 어떠한 반전이나 흥미가 있는 것도 아니고, 소풍을 떠난 아이들이 탄 전세열차가 폭주열차에 근접한다던지, 철도건널목에 멈춰선 차량이 폭주열차에 받혀서 부숴진다던지 하는 시시한 장면들이 이어지며, 덴젤과 크리스가 극적으로 폭주열차를 멈추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이 납니다.
총평을 내리자면, 진정 이 것이 스파이 게임을 낳은 감독의 영화인지 의문이 듭니다. 영화의 스케일은 펜슬베이니아의 한 작은 마을에 국한되어있으며, 관객의 흥미를 유도하는 장치는 그저 기차가 폭주한다는, 그것도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호러영화에나 나올 법한 설정으로, 것 하나 뿐입니다.또한 영화 전반에, 전문적인 철도용어들이 너무 많이 나옵니다. 그러면서도, 그 어려운 개념들을 관객에게 이해시키는 기능을 하는 영화적 장치는 단 하나도 없습니다. 영화 볼려면, 철도관련 기술사전이나 업무편람등을 하나 펴놓고 봐야 할 지경입니다. 영화 자체의 카메라 촬영 전개등은 상당히 빠른 스피드로 진행되지만, 차라리 내셔널지오그래픽 철도 관련 다큐멘터리가 더욱 흥미진진할 듯 싶습니다.
이 영화를 보며, 예전 스티븐 시걸이 주연한 영화 Under Siege 2 : Dark Territory 가 불현듯 떠올랐습니다. 영화는, 철도를 전면에 내세운 영화는 아닙니다만, 콜로라도에서 로스엔젤레스 유니언 스테이션 (LAX) 역으로 향하는 대규모 편성의 여객열차를 배경으로 벌어지는, 테러리스트들의 열차 탈취 시도와, 지축을 흔들어 대규모 지진을 유도한다는 미국의 첨단 인공위성 무기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테러리스트와 미국 정부의 치열한 대결을 세심히 그려냈습니다. 또한, 콜로라도에서 캘리포니아까지 이동하는 동안, 열차의 동선을 충실히 따라가며, 미국의 거대한 자연과 버려진 도시 등을 흥미있게 다루어내었습니다. 참으로 진부한 소재와 스토리이지만, 적어도 재미는 있었습니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동안, 언더시즈 2와 같은 B급 영화조차도, 철도와 액션을 조합하여 하나의 괜찮은 흥행물로 자리하는데 성공하였는데, 훨씬 유명한 배우와 감독들이 엄청난 예산을 투입하여 만들어낸 영화가 왜 이것밖에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만이 머릿속에 맴돌았습니다.
오늘은, 다시 한 번, 감독의 역작 스파이 게임을 청해 보며, 왜 그가 이런 실패작을 만들어냈는지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지려 합니다. 아직 언스토퍼블을 보지 않으신 분께서는, 가급적이면 시청하시지 않는 쪽을 자신있게? 권해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