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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적 꿈은 세 가지였다.
우선 갈망한 건 버스 차장. 해방 1년 전 태어나 경남 밀양의 촌에서 자란 이력을 주목해야 이해가 빠를 터. 그에게, 버스는 원하는 곳 어디든 데려다 줄 것 같은 마법의 양탄자였다.
초등학생이 되고선 서커스 단원이 동경의 대상. 문화시설 하나 없이 궁벽했던 고향에서 일 년에 한두 번 들어오는 서커스는 그야말로 환상이었다. 줄 타고 노래하는 무대는 바라만봐도 가슴이 벌렁거렸다.
좀 더 자라서 소망한 건 ‘현모양처’. 어머니의 인생이 ‘반면교사’였다. 그 시대 누군들 안 그랬을까 마는, 어머니의 삶은 한이 많았다. 객지로만 떠돌았던 아버지로 인한 상처였다. 어머니 같은 세상을 반복할 순 없었다. ‘현모양처’로만 살아갈 수 있는 가정을 절실히 소망했다.
손숙(66) 씨의 꿈이 그랬다.
평생을 배우로 살았으니…. 세 가지 꿈 중의 하나는 이뤘다 할 수 있겠다.
초등학교 6학년 때 고향을 떠났다. “어머니의 의지였어요. 어떻게든 교육시켜 자식들은 나 같은 삶을 살지 않도록 해야겠다는 것이었죠. 이 세상 모든 어머니와 다를 바 없었어요.” 야간열차에서 내린 새벽, 서울역은 무척 추웠다. 그때 “인생이 만만한 게 아니구나” 생각했단다.
고향을 벗어나고 싶어 갈망했던 버스 차장을 더는 꿈꾸지 않아도 됐다.
‘현모양처’의 꿈은 나이 마흔에 포기했다.
“남편이 사업을 했어요. 한창 잘 나갈 때 나는 집에서 살림만 했죠. 제 손으로 돈을 벌어본 적이 없어요. 가끔 연극 무대에 서긴 했어도 집안일이 우선이었구요. 연극도 남편이 그만두라고 하면 언제든 포기할 마음을 갖고 있었죠.” 그야말로 현모양처였다.
어느 날 청천벽력 같은 일이 벌어졌다. “남편의 사업이 망한거죠. 사업할 때 제 도장도 가져갔는데. 결국 제가 모든 빚을 떠안게 됐어요.”
부채는 가늠도 안 되는 어마어마한 규모. 온 집안이 ‘풍비박산’ 났다.
“더는 집안에 앉아 현모양처인 양 할 수 없었어요. 집 밖으로 나가 돈을 벌어야만 했죠.” 마흔 살이 넘어서였다. 그래도 운이 따랐다. “MBC 여성시대 방송 진행자로 섭외된 거예요.” 당시 1년에 한두 편 정도 연극을 하고 있던 그를 기억한 방송사가 기회를 준 셈이다.
“(방송이) 인생에 눈을 뜨게 된 계기가 됐어요. 나만 불행한 게 아니더라구요.” 방송에 투고된 수많은 사연들. 어느 것 하나 절절하지 않은 게 없었다. “방송하면서 거의 매일 울었죠. 별명이 ‘눈물샘’이었어요.”
나보다 더 힘든 이들의 사연을 듣고, 위로하면서 나의 상처는 치유되기 시작했다. 세상에도 눈을 떠 갔다. 여성, 인권, 환경 문제 등에 직접 뛰어들기 시작한 것. 그렇게 시작한 ‘여성시대’ 진행이 10여 년 동안 이어졌다. “봉두완 선생님부터 정한용, 김승현, 변웅전 씨까지…. 남자 진행자들은 숱하게 바뀌었죠.”
김대중 전 대통령과의 인연도 그 무렵 시작됐다. 당시 DJ는 야당 정치인. “문화 예술 분야에 굉장히 관심이 많고, 해박하셨어요. 제가 무대에 서는 공연을 몇 차례 관람하셨거든요.”
손 씨가 신문에 기고한 칼럼 등에도 김 전 대통령은 애정을 표시했다. “신문 칼럼 잘 읽었노라고 전화가 오곤했죠. 때로 사실과 다른 내용이 있으면 이를 지적해주기도 했구요.”
인연은 입각으로 이어졌다. 1999년 그는 김대중 정부 환경부장관으로 내정됐다. 하지만 보수신문을 필두로 한 여론의 집중포화가 쏟아졌다.
러시아 공연 때 경제인단체로부터 2만 달러를 수수했다는 의혹이었다. “제가 받은 게 아니에요. 무대 위에서 경제인들이 모아 준 돈을 우리 극단이 전해준 거죠.”
그때 김대중 정부가 부패한 것처럼 공격했던 이들이 지금의 여당 인사들이다. “보수 신문과 한통속이 돼 말도 안 되는 걸 꼬투리 삼아 기어코 낙마시켰던 그들이, 지금은 위장전입, 병역기피, 온갖 비리에 휩싸인 인물들을 옹호하고 있으니….”
당시 김대중 대통령도 이런 공세를 막아내지 못한 걸 속상해 했다. “미친 바람이 분 것 같은데, 보호할 방법이 없는 것 같다. 그때 방송 잘하던 사람을 데려와서 못쓰게 하였다고 자책하셨어요.”
가정사나 공직에서 겪은 상처 탓에 세상에 대한 불신이 커갔다. 그러나 시간이 약이었다.
20여 년 동안 거의 4~5시간밖에 자지 않고 일한 대가로 막막했던 빚도 어느 정도 해결됐다. 세상을 돌아볼 여유가 생겼다.
“내가 받은 걸 감사할 수 있게 됐어요. 남을 위해 살아야겠다는 다짐도 커졌죠.”
그때 접한 게 아름다운 가게다. 이 땅에 아름다운가게가 등장한 2003년부터 그는 공동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물건 중에서 안 쓰는 것을 내놓는 것이죠. 이를 정비해서 팔고, 그 수익금으로 어려운 이웃을 돕구요. 그동안 내가 꿈꿔온 환경운동이 ‘바로 이것이구나!’ 싶더라구요.”
처음엔 어찌 의심이 없었겠는가. “내가 가진 게 없는데 어떻게 남을 도와?” 하지만 찬찬히 둘러보니 정말 많은 것을 갖고 있음을 깨달았다.
“장롱을 한 번 열어보세요. 그 많은 옷을 다 입는 건 아니잖아요. 찬장은 또 어때요? 안 쓰는 그릇이 더 많죠. 신발장엔 가족당 최소 3켤레 이상이 들어있을거구요. 책장엔 먼지만 내려앉은 책들이 수북하고, 냉장고에 수개월째 꽁꽁 얼어 있는 식품이 가득하잖아요.”
손 대표의 지론은 이렇다. “집에 물건이 가득 차 있으면 좋은 운이 들어오지 않는다.” 하여 이어지는 한마디가 과감하다.
“버리세요.” 아름다운가게에 기부해달라는 의미다.
“아름다운가게에 물건을 내놓으면 기부천사, 물건을 사도 큰 도움이 되죠. 바로 구매천사에요. 판매 등 자원봉사 역시 소중하죠. 활동천사입니다. 아름다운가게엔 이렇듯 드나드는 모든 사람이 천사에요. 어때요? 천사가 되보지 않으실래요.”
아름다운가게 공동대표인 그는 현재 나눔과 순환 운동에 적극적으로 앞장서고 있다. 지난 6일 광주에 온 것도 이런 활동의 일환이다. 광주시와 아름다운가게가 자원순환 협약을 체결했고, 손 씨가 대표로 서명했다. 이날 협약에 이어진 공무원 대상 강연에서 그는 `꿈’을 상기시켰다.
자신은 “아직도 꿈꾸고 있노라”고 했다. 그리곤 물었다. “여러분은 꿈이 있으세요?”
없다면? “지금 꿈을 가져보자”는 게 그의 제안.
“내일 나는 뭘 하지?” 이런 고민에서 출발하면 된다. 작은 실천거리 하나를 선정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면 일정 시간 이상 독서, 집 주변 공원 산책 등도 좋겠다. “실천거리가 정해지면 아무리 바빠도 `나를 위한 시간’으로 매일 30분 이상을 책정해야 한다”는 주문이다.
아름다운가게에 몸담은 그에겐 “내일 대청소 합시다”도 소중한 꿈이다. 집을 비운 만큼 아름다운가게가 풍성해지고, 그 가정엔 좋은 운이 들어올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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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비리가 30개가 더나와도 아무 문제없다고하니...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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