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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변증법적 논설-이 논문을 다은양에게 바칩니다.
자유게시판 > 상세보기 | 2011-01-17 13: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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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수   1,004

제목

[논문] 변증법적 논설-이 논문을 다은양에게 바칩니다.

글쓴이

박두호 [가입일자 : 2003-12-10]
내용
- 철학사상가 ‘박준수’ 소개



어렴풋한 의식을 가진 사물에 생기를 불어넣으려고 한다. 그 불침투(不侵透)적이고 영속적이며 외면적인 물체는 물론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것에 배어 있는 유비무환적 색채는, 즉 준비 중인 대자적인 색채는 캔버스 상에서 묘묘히 그려진다. 나는 바로 그것을 말하려 한다. 내 존재의 현성은 비록 모든 색채와 음조의 대조적인 유비관계를 나의 사변이성의 구별 기준과 변별력에 따라, 섬세하게 교교하게 그 내적인 발로에서 시작하고 있다. 나는 이를테면 예술의 동류성이 논구하는, 함의하고 있는 지고의 순수한 감수성의 미를 정립하고자 한다. 그러니까 우리가 출발하는 지점에서, 이미 출발된 지점에서 더 나아가 정합적인 모종의 이구동성에 의하여 또는 이에 의거하여/입각하여 닦달음하는 '종합적인 사태'에 대한 관조의 파노라마에 대해 작가로서의 책임감을 통하여 모든 것에 말하고자 한다. 나를 둘러싼, 또는 나를 둘러싸고 있는 인물들과 사건들, 법과 규칙, 그리고 도처에 자행되는 부패를 조명하고 해명하는 것은 모두가 바로 내 현존의 개연성에 달려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철학적인 글쓰기, 최종적인 '글쓰기의 예술'로 말미암아 새롭고 변질적인 '하나의 변수'를 두고자 하는 것이다. 그 변수는 이른바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기로에 서 있는 여러 가지 이분적인 것, 요컨대 물질과 정신이다. '물질'과 '정신', '외재적인 것'과 '내재적인 것'의 선택 기로에 서서 나는 후자를 선택하고 만다. 그것이 바로 인간실존의 원동력이자 나와 세상을 이어주는 가교로써 역설적인 진면목을 보여주는 내 이면의 적나라함인 것이다.

나는 평생을 고독하게 살아왔다. 그리고 현재도 고독하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고독함'이 조악한 무엇이 아닌 공교로운 '자기 증명의 논리'로 다가올 때, 그것이 '자기정립'적으로 채택될 때 바로 거기서 한 개인의 역사가 쓰여 지는 것이다.

진실된 지성은 함부로 어떤 사태에 대해 언급하기를 꺼린다. 좀 더 정확히 말해서, 한 명의 지성은 다른 지성에 관해 논하고자 할 때 그의 사생활적인 면에 대해서는 절대적으로 회피한다. 이는 우회적인 방법으로 '정교한 고전 문학에로'미끄러짐이다. 왜 고전 문학에로 미끄러짐인 것인가? 왜냐하면 사생활의 저편에 있는 것은 모두가 Classic이기 때문이다. 이미 과거가 지난 것이고 현재는 현재로써 존재한다. 그것은 존재당위적인 것이다. 오늘에 내일이 있고 과거는 모두 박탈된다. 그것이 바로 극소수 지식인의 자화상이다. 나는 극소수 지식인 무리 중의 '부분집합'으로서 여기, 바로 이 지점에 서 있는 것이다. 내가 없으면 세상은 어떤 식으로 전회될 것인가? 물론이거니와 세상의 변화는 없을 것이다. 반대로 세상의 변화가 없음이 바로 내 존재의 불멸을 보증하는 것이리라.

그리하여 나는 누구도 아닌, 바로 22살의 남자 '박준수'인 것이리라.





글을 시작하기 전에 가볍게 시 한 수 지어 올립니다.



내가 사랑하는 다은간호사.



외로웠어. 학문을 좋아했지만 너에게 다가가기 위해 더 열심히 정진했어. 너라는 마치 베아트리체와 같은 심미로운 표상은 내게 다가갈 수 없는 아련한 슬픔으로 남아있지. 근데 그거 알아? 너는 간호사 일에 열심했지만 나는 줄곧 너를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 네가 다른 남자들과 얘기하는 가운데에서도 나는 묵묵히 그 얘기를 들어주고 있었다는 것.

성공해서 너를 데려갈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어. 너와 계약결혼을 맺고 평생을 함께하는 친구같은 삶을 염원하고 있어. 물론 내 학창시절은 지나간 한순간의 과오와도 같지만 지금 나는 예전의 그 어떤 시절보다도 행복해. 내 일에 열심이고, 모든 생에 대한 열정이 너를 향해 있으니. 술도 입에 대지 않아. 사랑하는 너를 위해서라면 난 모든지 할 수 있어. 단지 여위어 가는 가로수처럼 네가 으스러 진다해도 나는 널 언제까지나 사랑할거야. 이 설레는 애틋한 마음, 이 사랑에 대한 열정! 조금만 기다려. 내가 너의 곁으로 갈게.

한폭의 수채화처럼 오손도손 거기서 너와 살아갈 수 있다면 나는 아무려면 좋아. 이제는 모든 걸 일소에 부칠 순간이 도래하고 있는 것만 같아. 가끔씩 다른 여자들이 끌리기도 해. 그러나 나도 남자야. 내 욕구불만을 채우려면 한도 끝도 없지. 그러나 난 순결한 몸으로 너의 순결한 몸을 취할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어. 영원히, 언제까지나.





시작하면서……

VOL ONE

학생시절부터 외로웠다. 삶이 너무 고요했고, 오직 산과 책만이 내 동무가 되어, 아니 그들이 내 삶의 허상 즉 시뮬라크르로서 기능을 하며 오로지 나만의 방에 갇힌 어린 소년의 영혼으로 남게 되는 것이었다. 사실 14살 때부터 이성친구가 있길 원했다. 그러나 나는 추근 거릴 용기가 없었고, 그렇게 22살이 된 지금, 그러니까 8년이 흐름 지금에도 나는 솔로다.

매일 밤 꿈을 꾼다. 깨어보니 어젯밤 꿨던 꿈의 연장이었다. 마치 영화 ‘인셉션’처럼 잠을 잔 시간이 15분이더라도 꿈의 기간은 무려 3일이나 됨직하다. 그래서 더 슬퍼지고, 내가 나의 서사시의 한가운데 있다는 모종의 비련함이 나의 과거를 반추시키면서 즉 나의 학창시절을 회고하게 하면서 더 큰 슬픔으로 나를 감싸 안는다. 22살에 아직도 지독한 우울증에 시달려 나는 갈 길을 잃은 길거리의 검은 고양이처럼 다만 달을 올려다보며 외로움을 달랜다. 슬픔과 고독, 그리고 애수와 상실감의 타성은 줄곧 내 삶과 뗄래야 뗄 수 없는 하나의 파노라마로 남아 나를 괴롭히고 추궁하고 현실에서의 촉구를 기원한다. 그러나 내가 어찌 할 수 있을까? 나는 아무 능력도 없고, 사실 모든 가능성의 전무의 한가운데서 오로지 글쓰기의 예술과 지식의 섭렵만을 본과 권으로 삼은 한 명의 학인이자 예술가로서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거기에 대한 해답은 없다. 단지 여위어 가는 저 가로수 한 그루 밖에는 아무 것도.

불면증과 반대로 기면증의 나날이 흘러간다. 심한 우울 속에서 나는 무기력하게 나 자신을 응시한다. 글과 글이 섞이고 생각과 생각이 섞이며 나는 새로운 생경한 풍경을 창조한다. 그 풍경에는 내가 있고, 그리고 바로 나의 짝인 한 소녀가 있다. 그렇지만 지금의 나는 무기력의 절정에 달해 있다. 그런데 포기하라고? 그럴 수는 없다. 헤밍웨이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남자란, 청년이란 포기하지 않는 존재라고 강연했다. 결코 포기할 수는 없는 것이다. 나는 헤밍웨이를 존경하는 바 그의 소설들을 읽어보았고, 하드보일드라는 장르를 주류로 만든 그 위대한 소설들의 정수를 흡수할 수 있었다. 헤밍웨이는 비록 산탄총 자살로 생을 마감했지만, 그런 그가 거기서 포기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는 자신의 지성이 무너져 가는 걸 좌시할 수 없어 그런 것, 그런즉슨 살아보려고 죽은 것이다. 그러니까 삶을 포기한 게 아니라 새로운 삶을 갈구하고자 위험한 행동을 자초한 것이다. 그가 천국에서 우리를 내려다보기를 염원한다. 하여, 나는 이렇게 나에 대해 솔직담백하게 쓰는 글이 너무 시원스럽고 정아롭게 느껴진다. 나의 소소한 생활의 기행을 여러분께 풀어놓으면 모든 쳇바퀴 돌듯 끊임없는 방황을 종식시켜주는 어떤 긍정적인 힘을 내 정신에 각인시키는 혁혁한 영지주의의 세례를 받는 느낌이다. 이따금 생각나는 강렬한 욕구의 만족을 위해 요즘 나는 인터넷과 미군부대 양키시장에 가서 마약 루트를 찾고 있다. 마약에 손을 대려고 한 것이다. 그만큼 삶이 퍽석퍽석하고 힘이 든다. 내 한계가 여기까지인가 푸념을 늘어놓고 더 이상 행복해지려면 약물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커피가 슬쩍 질려 간다. 이제 커피에 손도 안 된다. 아무래도 내게 커피는 너무 약한 약물과도 같은 것이다. 내겐 좀더 강한 무엇이 필요하다. 매우 강력한 각성제와 같은 그런 ‘마약’이 필요한 것이다. 이제 내겐 시간이 없다. 나는 한국문단의 정점에 서기 위해 피가 나는 노력이 뒤따른다는 걸 알고 있다. 그러나 내게는 젊음도 있다. 젊음을 포기하고 학인이 된 이상 빠른 성공이 와야 젊음의 방탕을 향유할 수 있는데, 다시 말해 나는 양 사이드를 다 잡으려는 야심찬 계획이 있는 것이다. 문학동네와 컨트렉해 봐야겠지만 내 글이 어느 정도의 수준까지 올라 있나 절실한 전문가의 평가가 필요하다.

내일은 양키시장에 가서 파이프를 사는 날이다. 담배도 이제는 파이프로 피련다. 나의 스승 사르트르도 담배를 항시 파이프로 피우며 사유의 극점에 도달했고 최고의 천재 아인슈타인도 마찬가지였다. 파이프 담배는 돈이 많이 들어가는 취미이지만 정말 괜찮은 취미가 아닐 수 없다. 궐련은 이제 질렸다. 그 인스턴트의 맛에 신물이 난다. 좀더 고급 담배를 피우고 싶다. 그런즉슨, 아직 우리 집은 넉넉히 사는 편이다. 왜냐하면 부모님 둘이 밥벌이를 하고 아버지는 지하철 공무원으로써 누구에게도 꿀리지 않는 편이니까. 물론 우리 집은 부채가 많은 편이다. 그 부채를 언제쯤 갚을지 상상도 할 수 없다. 부채라. 내 책이 폭발적으로 팔리는 날 다 갚을 것이리라.

삶은 권태의 연속이다. 이 권태를 타파할 수 있는 유일한 방책이란 자신의 원대한 목적에 정진하는 것, 하나이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 단기적인 욕망에 치우쳐 거시적인 이익을 간과하기가 싶다. 그래도 한국 사회는 거시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게 없지 않아 있다. 오히려 ‘거시 지향’적 사회에 가깝달까. 지금 나는 스틸녹스와 담배에 취해 글을 쓰고 있다. 약물이 없는 삶은 내게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 난 정신과 약과 수면제, 담배, 커피 등으로 더 세련되고 장중웅려한 글을 쓰며 동시에 대오의 세계에 당면한다. 요는 이런 것이다. 20세기가 전쟁의 세기였다면 21세기는 약물의 세기이다. 아마 내 말에 이의를 달 혹자도 있을 테지만 나는 내 생각의 정당성을 굳이 수정하거나 보완할 필요성을 느낄 수 없다.

일단 모든 돈을 학술서와 문학서에 투자하자. 옛 동양 현인이 말했듯이 보물을 소중히 여기기보다는 책을 사서 배움을 하는 것이 엄청 중요하다. 나는 몇 푼 안 되는 오디오도 싹 정리했다. 아름다운 소리를 멀리하고 문자에 더 집중하기 위해서이다. 내 방법이 틀렸든 옳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핵심은 무조건적으로 학문을 숭배하는 것이다. 내가 18살에 학문을 시작하지 않았다면 지금의 이 글처럼 유려한 글은 쓰지 못했을 터이다.

양주시 덕계동 푸르지오에 산지 어연 4년이 다 돼간다. 따라서 내 나이도 또한 22살에 육박하고 있는데도 나는 지금껏 여자가 없었으나, 고백을 한 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비참했고 나는 홀로 떠돌아야 했다. 지금 내 나이는 리비도가 절정에 다다르는 나이인 만큼 길거리를 지나가는 여자만 봐도 성기가 우뚝 선다. 그러나 나를 좋아해줄 여자는 없고 나는 점점 외곬으로 빠져 지금의 지점에 이르게 된다. 그러므로 나는 어떤 방책을 강구해야 할 내적 필연성을 골자로 하여 지엽적이고 즉흥적인 하나의 계획을 짜야한다. 어떻게 하면 대학에 다니지 않는 내가 여자를 낚을 수 있을 것인가. 내용은 단순하다. 다시 말해 큰 문학상 하나를 수상하여 내 명예를 대대적으로 세상에 알리는 것이다. 그러니까 신문에 내 얼굴이 큼지막하게 실리고 공인으로서 발돋움하여 내가, 내가 될 자격이 있도록 행실과 언행을 분명이 하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내가 사랑하는 여자와 나의 스승 사르트르와 마찬가지로 계약 결혼을 맺을 것이다. 우리 사이에는 억겁의 시간 동안 아이가 없을 터이므로 나는 계속하여 열심히 이 대우주에 착실히 기투행위를 하며 학문적 성취에 이르는 자기완성의 결과를 뚜렷이 발견하게 될 것이리라.글을 쓰는 행위는 나의 전부이다. 예전에는 카페에서 글을 집필했는데,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되어 집에서 글을 쓴다. 왜냐하면 카페는 저속한 층들이 모이는 방탕하고 퇴폐한 곳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커피 한잔에 무려 육천 원 가까이 되는 돈을 쓴다. 그들의 골은 비었다. 남자들은 단지 여성을 낚으려고 가는 것이며, 여성들의 생식기는 하도 사용한 나머지 갈색으로 변색돼 있다. 그러므로 나는 그들과 같은 부류가 아니다. 나는 고3 때 학교를 자퇴했다. 왜냐고? 제도권 교육에 심히 반대하여 한 명의 운동가로서의 자질을 공고히 하려는 결심에 의해서였다. 나는 나의 철학사상의 이론에 의거하여 행위하는 한 명의 진실된 행위자이다. 따라서 나의 행위는 언제나 나의 정치한 이론에 바탕을 깔고 있으며, 자퇴의 행위는 그 초석의 단초로써 기능하는 것이었다.

그래, 하기야 굳이 지금 여자가 급히 필요한 것도 아니다. 지금은 오로지 학문에 정진할 때이므로 주위 상황에 신경 쓰지 않을 적절한 당위성을 확보해야 한다. 문명의 이기를 배제한 채 오직 원대한 야망의 선을 따라 복잡미묘한 인간과 우주의 문법적 논리의 구명에만 철두철미하게 명약관화한 사실만을 기술해야 한다. 시나브로 나는 정신적으로 성숙해가고 있다. 그러나 내가 본디 성숙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 나는 랭보보다도 더 조숙한 아이였다. 나는 14살에 이미 중국철학의 전반을, 그 심원한 일단을 심도하게 이해했으므로 가히 철학의 귀재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여자들은 복잡한 학술적 논쟁과 담론을 싫어한다. 여자가 머리가 나쁜 이유는 너무 섬세해서이다. 작은 것만 보고 큰 것을 보지 못하는 여성 두뇌의 구조가 그녀들을 열등성의 표본으로 천명하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남성만이 사회 상류계층을 지배할 권리가 마땅하다고 본다. 여성은 안 된다. 그러나 대부분 백치나 정신장애를 가지고 있는 건 남성이 더 많으므로, 따라서 소수의 남성 인텔리만이 사회를 쥐락펴락할 오롯한 자격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내가 속한다해도 과히 틀린 것은 아닐 테다.

나는 학교 재학 당시 성적이 전교에서 놀 정도였다.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내가 원하는 대학을 다닐 수 있었으나, 난 거부했다. 왜냐하면 난 제도권을 증오하는 아나키스트의 원형이므로 이리하여 그 누구도 내게 국가적 의무를 지을 촉구를 한다면 그것은 기만과 위선의 파노라마에 불과할 터이다. 좀더 어렵게 말해 나는 민족주의에서 배태된 국가라는 하나의 거대한 착취기구를 경멸하고 배척/배격하려는 정치적 태도를 위시한다. 그렇다고 국가에서 학계에 돈을 투자하는 걸 기만하려는 몸짓을 선보이려는 건 아니다. 거대기업 대우가 학술재단에 투자한 그 어마어마한 돈에 감사하며, 민족적인 특성이라기보다는 한 나라로써 표준어에 입각한 학계라면 난 인정한다. 왜냐하면 학계는 그 민족적 특질의 피상적인 측면을 결코 간과하지 않음과 동시에 오히려 자명이 자기들의 색채를 고색창연하게 드러내는 법이니까. 다시 말해 한국의 학계를 짊어질 인문학도들은 현재 위기에 처해 있지만, 왜냐하면 직장에서는 인문학과 관련된 학과, 이를테면 철학과, 국문학과, 문예창작과, 사회과학과 등을 배격하는 걸 지향하는 못된 버릇이 있어서 이들이, 그리고 내가 갈 길이 험난하기만 하다. 우리는 기필코 회사 돈으로 벌어먹고 살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책을 출판하여 한국 학계를 명실공이 세계 최대의 학술적 시장, 이른바 온갖 천재들의 맹아가 되는, 따라서 시간을 절체절명처럼 아끼며 안빈낙도하는 학술의 하나의 장을 설계하고 공고히 구축할 것이다. 또한 여성이라고 꼭 학계에 발을 들이지 못하는 그런 시대착오적인 발상을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멍청한 다수의 남성·여성은 저쪽에 밀어 넣은즉슨 소수의 인텔리 남성·여성들, 그 혁명적인 극소수의 지식인들만이 우리 한국의 학계를 짊어질 새파란 젊은이들인 것이다. 당연지사 거기에 나도 포함될 것이다. 왜냐하면 겨우 3~4년 독학으로 내 동급생들과 비교하여 이 정도 수준의 세련되고 유려한 산문을 쓰는 대학생이 몇 있단 말인가. 지금 내가 대학을 1년 재수했다 치면 대학 2년생이라는 건데, 이렇듯 대학 2년생이 A4용지 140페이지에 달하는 논문 수준의 철학사상 관련 담론을 창조할 수 있는 획기적인 능력을 가진 자가 내 나이 또래에 잔존한다 말인가? 그들은 단순히 ‘잔존’조차 못하지만, 현성하는 혁명적인 천재적 능력을 내재하고 있는 ‘인간실존’의 포괄적인 형태를 갖춘 나는 언제나 영원히, 세계적으로 내놓아도 손색없는 우리 한국 학계의 미래의 거두가 될 ‘내’가 아직은 한 명의 여자조차도 내 곁에 없지만, 훗날에는 당신들도 “sign좀 해주세요!”라고 말하며 카페에서 글을 미친 듯이 써내려가는 나를 귀찮게 할 터이다.

조만간 ‘엑스터시’라는 마약을 미군부대 인근에서 구해서 복용해볼 참이다. 내 능력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시험해보고 싶다. 이미 40만원은 학술서를 사는데 다 솟아 부었으나, 뭐 돈이야 때쓰면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던가? 그러니까 나는 25살 때까지만 부모님에게 위탁할 것이며 그 이후로는 독립해 여자를 구하고 집 하나 장만하여 오손도손 행복하게 살 것이다. 물론 아내와 나 사이에 섹스란 없다. 왜냐하면 나는 오로지 지적이고 추상적인 변증법적 도해나 도식에만 골몰하여 육체적 관계 즉 성관계에 진을 뺄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또한 이는 계약결혼인 만큼 웬만한 가정사와는 달리 부부 역시 동질감을 느껴 사랑하기보다는 각자 자기본위를 공고히 하여 원만하고 평안한 삶을 누리면 그걸로 족하지 않을까? 여기에 사족으로 나는 내 연애담에 대해 솔직히 털어 놓겠다.



3년 전이었다. 나는 성모대학병원 정신과에 입원해 있었고 학생간호사로 4명의 경복대학교 대학생이 와서 우리를 도와주었다. 어떤 방면에서? 정신적/육체적으로 말이다. 전자는 우리와 많이 놀아주고 상담해주고 이해해주고 웃어주는 그런 일이었고, 육체적인 것은 우리의 몸을 학생간호사의 몸으로 말미암아 풀어주는 것이었다(농담이다). 그 가운데 다은이라는 여학생간호사가 한 명 있었는데 나는 불같은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우리는 급속도로 친해졌고, 내가 병원에서 빈둥빈둥하는 일이라곤 그녀와 시시콜콜한 상담을 하는 것이었다. 내가 그녀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손 치더라도 그녀에 대한 나의 애틋한 마음은 진심이었다. 그녀 앞에서 난 언제나 설레었고, 처음에는 말을 하는 것만으로도 만족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난 그녀의 몸을 탐하고 싶어졌다. 그러나 우리는 인연이 아니었는지, 좀더 확실히 말해 그녀가 날 싫어하는 이유 때문인지 내가 그녀에게 마지막으로 전화번호를 알려달라고 애원했을 때 그녀는 단박에 거절했다. “안 돼요”라고. 그러나 그런 그녀가, 지금 내가 혼자서 내 골방 같은 서재에 눌러앉아 신들린 채 변증법적인 언어의 혜학을 구명한다는 사실을 안다면, 그럼으로써 학계의 미래 거두로 등극하여 세계 ‘학문의 패러다임’을 다시금 정초해서 발아시키고 배태시켜 즉 기다란 정신편력의 도정에서, 그 도상의 연쇄에서 인간존재가 가능할 수 있는 ‘자기기투’의 극단을 내가 선취할 수 있다면, 그녀 입에서 그렇게 쉽사리 거절의 매시지가 나올 수 있을까? 그녀 또한 다시 생각해 볼 안건이리라.

자, 그럼 소소한 필자의 생활 이야기란 원점으로 돌아 가보자.

필자는 한 달 40만원을 투자하여 양질의 순문학, 사회과학, 철학사상, 문화에 관련된 많은 양의 교양서를 구입한다. 대부분의 책들이 양장본으로 매우 값비싸고 두껍다. 그러나 필자는 돈이 아깝지 않은데 그 이유는 필자의 한 달 용돈 40만원이 책에 전부 들어가는 구입행위야말로 실로 만족스러운 일종의 ‘기의’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책 한권이야말로 필자의 미래를 점철하고 재구성해나가는 유일한 보루이며, 독서행위는 일련의 도면에 수를 놓는 기하학적으로 완벽한 그럼으로써 기하급수적으로 지식이 집적되어 그 모든 지식의 문법이 변증법적으로 완결되어가 내게 새로운 패러다임을 선사케 해주는 동기가 되어준다. 이렇듯 가장 중요한 핵심적 인과관계는 읽고 쓰는 행위의 무한반복인 것이다. 마치 칸트가 자기 철학의 일단을 무한반복으로 상정했던 것처럼. 그러니 나 또한 대선배 칸트와 마찬가지로 마약을 복용해서라도 신의 영역, 인간존재의 피안, 메타적·선험적인 범주의 객관적/종합적인 내재성에 인종하고,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는 영역을 보는 것, 총체적으로는 미지의 ‘형이상학’의 세계에 당도하는 것이다. 나는 조만간 엑스터시 수 알을 구할 것이다. 그런데도 혹자는 마약이 위험하다한다. 그러나 엑스터시는 중독성이 약한 편이며, 합성약물임에도 불구하고 안전한 편이다. 세로토닌·도파민 수치를 급격히 올려 황홀감과 언어수행능력을 진일보시키고 열정에 가득 차 정신없이 마치 천재와 같은 산문을 써내려갈 수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미군부대에서 친구 좀 사귀어서 좀 얻어 볼 생각이다. 한국에서 가장 마약을 손쉽게 구할 수 있는 곳이 미군부대 아니던가!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다은이와 가까워질 수 있다면 난 뭐든 해도 좋다. 물론 난 학문을 사랑하는 군자이지 여자를 밝히는 색마는 아니다. 그러나 나는 다은이를 진심으로 사랑한다. 그녀의 영혼과 그녀의 더러운 생식기와 항문까지도. 그러나 불행히도 현재 내가 정신과 약을 너무 많이 먹어서 성적으로 불감증이 있어 그녀와 열정적인 섹스는 못할 것이다. 하기사 김칫국부터 마시지 않는 게 좋을 테다. 나는 학문을 사랑하는 사람이지 육욕을 지향하는 난봉꾼은 아니니. 그래도 그녀와 알콩달콩 가정을 꾸리고 살림을 차려 생활하고 싶다. 그녀의 생식기를 내 손으로 직접 부드럽게 닦아주고 싶다. 그녀의 항문에서 나는 채취를 비누향기로 하여금 없애주고 싶다. 그다지도 나는 그녀를 사랑한다. 그녀는 나의 전부다.



VOL TWO

이른 아침이다. 눈을 게슴츠레 뜨고 시계가 가리키는 시간을 본다. AM 8:30, 얼른 가방에 준비물을 챙겨서 학교를 향해 거리를 걷는다. 그러나 사뭇 내 마음 속은 일말의 두려움에 잠겨 걸어갈 힘도 없는데 어떻게 든 걷는다. 음침한 학교에 당도하니 몇몇 아이들이 내 책상 주변을 어슬렁거린다. 그렇다. 그들은 또다시 날 괴롭히기 위해, 속된 말로 이지메하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하면서, 마치 내 불행을 예견한 듯 나를 좌시하고 비웃는다. 그래도 난 우회하지 않고 용감하게 선회의 길을 택한다. 이는 그들의 비뚤어진 도덕률에 착목하여, 그들이 집단이 아니면 행동하지 못하는 혼자만의 단독성이 결여된 결정(結晶)들의 군집체에 불과하다는 걸 난 명실공이 비웃고 싶어서였다. 매일매일 나는 그들의 몰도덕성을 심판하고 싶었고, 그런 연유로 내 앞에서 기독교의 [정죄]라는 관념은 우스갯거리에 지나지 않았다.

죄란 행동의 잘못에서 저질러지는 게 아니라, 강한 자가 약한 자에게, 가진 자가 못 가진 자에게, 자신의 이익을 벌충하고자 저열하게 월권을 행사하는, 공인된 폭력적 행위의 굴레이며, 난 그런 굴레에 구토를 느낀다. 하물며 그들이 나를 둘러쌓아서 구타를 하더라도, 나는 이를 진정한 괄시로 유념하지 않거니와, 내가 옳고 너는 틀리다는 비뚤어진 덕의 논리에 입각하여 예에 대비한, 거침없는 언어들의 조합으로 말미암아, 그들을 어법으로나마 이기고자 비폭력적이지만 날카로운 독설을 내뱉는다.

그들이 나를 놀려대고 경멸감을 주어도, 직접적으로 날 해치려 할 때도 나의 입은 끊임없이 내가 하루 전날 궁리해온 말을 뱉어내는데, 비속어는 쓰지 않지만 선생님들조차도 아연실색할 정도로 거침없는 층위, 그러니까 마치 어떤 작품에 대한 화려한 비평의 소나기처럼, 모자란 그 핏덩어리들에게, 마냥 수준 낮은 행태를 보이는 유치한 놈들을 향해, 나는 너희들과는 차원이 다른 수준 높은 놈이다, 라는 인텔리적 본능을 재현하고자 하고 언사를 흩뿌린다. 왜냐하면 학교라는 썩을 대로 썩어버린, 일제교육의 잔재를 본받는(예를 들면 학생들의 국기 게양식 같은 것들)그 부적절한 곳에 넌덜머리가 나서, 결국엔 하교시간에 파김치가 되어 집으로 돌아온다. 그래도 나는 어린나이에 얼마나 꿋꿋이 이지메를 이겨왔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상황조차 모르시는 아버지께선, 술을 한껏 드시고 술주정을 하며 거실에서 그릇을 깨 부시며 행패를 부리곤 했다. 그리고 어머니께서는 너무나 울어 항상 눈가가 부어있었다. 만약 그때로 돌아간다면 난 아버지를 식칼로 도려낼지도 모른다. 그 작자는 주식을 미수로까지 사들여 내게 남겨질 유산들을 축소하고 또 축소했다(이미 퇴직금까지 전부 날려먹었다). 그 작자의 술주정을 견딜 자는 천하를 뒤져도 아무도 없을 것이다. 미상불 아직까지도 아버지께서는 주식 투자에 여념이 없으시다. 그렇다. 우리 아버지는 술을 먹고 또 밥까지 먹고 다시 코-잠이 든다. 그야말로 완전무결한 얼간이인 것이다. 하기야 정신 멀쩡한 아버지가 이 말세에 누가 있겠는가?

당시 나는 음악에는 완전한 문외한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Queen 의 We are the champion을 듣게 되었다. 그 충격은 나에겐 거의 전대미문의, 미증유의 미학을 발견한 것이었다. 나는 그 순간 눈치 채고 말았다. 예술의 최고봉은 음악이라는 것, 오직 그것뿐이라는 것을! 그 후로 여러 가지 빌보드 차트의 팝송들을 알아가면서 나는 음악에 맛 들리게 되었다. 만일 내가 음악에 소양이 더욱 풍부했으면(사실 풍부하긴 했다. 단지 부모님이 너무나 한국의 제도권 교육이 야기하는 비인간성이며 육체적 노동과 꼭 같은 무식한 일회성이, 말하건대 일그러진 우리들의 교육을 강렬한 햇빛의 직사라는 걸 지식인의 입장에서 알아채기만 했어도…), 만약 그렇다면 지금쯤 나는 작곡가가 되었을 것이다.

꼰대들의 난점은 언제나 제도권 교육을 제시해놓고, 그 교육이 가져오는 정신적 참사를 도외시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나름의 본질을 살아야 할 언명 같은 것을 지니고 있다. 본질은 언제나 영원한 별처럼 우리들 안에 내재해있다.

다른 애들이 저편에서 재잘거릴 때 나는 내가 좋아하는 곡들을 머릿속에서 재생하면서, 다시 재생됐던 음들을 또 다시 다른 방법으로 마음속에 시현한다. 나는 소싯적부터 내 음악적 재능을 파악했지만 내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분야에, 심지어 부모가 재산이 소실되어 쫄딱 망하게 되더라도 당당히 음악인의 길을 걸어갈 것 이마고 다짐하기에는 너무 어린나이였다. 부모에게 모든 것을 위탁하고 의존하는 나이가 아닌가! 길은, 모든 성공의 길은 부모님이 안전하면서도 일반적인 제시의 선을 따라서 수렴되기 마련이었다.

내게 음악이란 과연 무엇인가? 그것은 내 생존 이유이자 근원적인 시초로서의 의미였다. 내가 철학자나 사상가의 도상에 위치하는 때라도, 나는 내 자신의 기투 자체의 편린을 인멸하지 않은 채 꾸준히 삶에 대한 의문과 번뇌, 고뇌를 음악과 함께 해소해 나갔으리라. 그리하여 요즘에 내가 서양철학과 문학에 접목하고자 하는 일련의 시도는. 누구도 범접 불가능한 이를테면 완곡어법이 각인된 불필요할 정도로 차가운 [실재를 추구하는 정통적인 정합성]에 다다르기를 원하고 있다. 즉, 이런저런 공적인 무대에 서서 나 자신의 교양이 부동의 원동자 즉 신의 덕과, 나의 정신이 자신을 초극하여 자기완성이라는 불멸의 위치에 점유된 모습 그 자체의 표징, 그러니까 거울에 비친 내 전체적인 그러나 내 본질 자체가 지향하는 숭고한 미덕의 반영, 폭발적이면서도 지적으로 영광적인 순간에 있는, 하나의 잔상을 지켜보기를 원한다. 이는 그 동안 음악을 사랑하는 마음에 의해 가려져 있었지만, 이제는 천천히 수면 위로 떠오르는 글쓰기의 예술에 대한 욕망을 알 것 같기도 하다.

지고로 심미로운 내 영혼의 선험적 원천이 자신의 나신을 드러내 보이면서, 그 배후에 존명하는 메타적 상승 즉 저 너머의 영원과 만나는 고색창연한 빛의 세계와 인생 최초의 해후를 가지려고 한다면, 거시적인 사상적 변환의 준거는 당연하게도 선악의 피안에 머무른 와중에 도저하게 흐르는 약자의 연약성이리라. 그 자체가 바로 이론을 세울 때마다 필수적으로 결부되는 핵심질료이거니와, 자기동일성을 주조하는 영적 근거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신(神)적 분유의 과정은, 정신적으로 가장 복잡다기하면서도 정교한 과정, 이른바 글쓰기를 위한 심층적인 사유의 과정은, 서로 상보적이거나 동일한 것 즉 이심전심으로 서로를 접속하거나 포섭하며, 내가 23살까지 산전수전 겪어왔던 불행의 연대기를 잊어버리고 누구도 접근하지 못한 기술적 접근의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해준다. 그것은 분명 타자들이 경험해보지 못한 나만의 영지주의의 닦달음일 것이다.

그러면 좀 더 현실적으로 논해보자. 지식인에게 있어 글쓰기란 무엇인가? 언어라는 것이 비단 인간정신의 자유주의적 승리에 불과한 것일까. 아니면 인간 실존의 기술의 근저를 이루는, 소위 사르트르적인 말로써 [휴머니즘]에 대한 내적 합목적성의 하나일까? 내가 이룩하고자 하는 정신의 저변에 현전하는 글쓰기는, 내가 사회에 요구하는 숭고한 지적 진취성의 획득, 그 혁신적인 정신들을 피상적으로 들어내고자 하는 고통스러운 과정이다. 따라서 나의 철학적 글쓰기가 요구하는 방식은, 현대사상의 대부 하이데거가 행해온 도식의 성립과정, 이른바 하나의 화두를 정하여 그것만 철두철미하게 분석하는(하이데거가 존재의 탐구에 할애한 시간은 그의 인생 평생에 이른다) 고지식한 형이상학의 열정이 아니라, 사르트르·화이트헤드·들뢰즈가 행해온 모든 학문 전반을 관통하여 총체적인 모든 지식들이 동반돼 세상 그 자체의 논리를 정연하게 설명함과 동시에 세밀한 것도 분석하는 과정의 결산물이다. 쉽게 말해서, 미분화된 모든 지식 일반에서 핵심적인 요해의 조각들을 모아 그것을 큰 그림으로 직조해나가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내가 걸어가고자 하는 [형식의 문제]이다.

다시 한 번 예의 과정을 다른 방식으로 생각해보자. 당신이 지금 당면한 방향의식의 모태를 정제함과 더불어, 일희일비하는 거대한 시대정신의 조류에서, 득의만만하고 치기어린 청춘의 한가운데서, 일반적인 골빈 시민들과는 다르게 비로소 진정성 있는, 경험에 의거한 판단을 내린다면, 아마도 우리가 습득한 모든 지(知)의 총체적인 투명한 감수성의 소용돌이가 우리를 잡아먹을 것이다. 하지만 글의 논지가 약간 옆으로 전화된 듯한데 이제는 새롭게 음악과 철학의 중심에서 딜레마에 교착된 필자의 문제로 회귀해 보자.

그러니까 결국 아웃사이더로 점철된 내 인생에 있어 음악이란 존재는, 존재론(존재자와 존재의 차이)의 정신현상학적 산출물인가 아니면 종차(種差)라는 세상 근저에 자리 잡은 논리에 대한 환상적인 폭동인가? 쉽게 풀어쓰자면 이렇다. 내가 언제나 음악이라는 가장 자극적인 예술의 근원을 갈구해 왔다. 그렇다. 필경 음악은 나의 모든 것이었다. 내가 힘들 때고 지칠 때고 물론, 세상살이에서 구토가 나올 때면 난 음악의 순수한 벽에 기대곤 했다. 음악은 언제나 자신의 어깨를 내 영혼에게 빌려주었다. 음악은 내 존립의 근거요, 나를 기조로 하는 밑도 끝도 없는 이미지의 피상성이며 불투명적 소치의 으뜸이요, 또한 내 삶의 전개방식을 관류하는 빛 중의 빛이요, 아직 타오르지 못한 불꽃에 불을 지피는 촉매제였다. 그러나 나이 가 들어가면서 여러 가지 세상의 수없는 패러다임에 교착하면서 내가 느낀 것은, 음악은 진실 그 자체이나 그것이 합리적으로/논리적으로 진실과 원리 사이에서 모종의 상충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이다. 허나 우선 음악은 종교보다 더 강한 아우라를 온몸에 두르고 있다. 그것은 곧이어 생성될 인간 실존의 주관적 전범을, 그 로켓을, 저 멀리 하늘 위의 머무르고 있는 영원한 별과 마찬가지로 내 앞에, 항구적인 너무나 항구적인 자리를 제공했다. 그에 비하면 외재적 파노라마, 즉 철학·사상이 가리키는 상이한 가르침의 명제는 바로 “음악은 음악 이상의 광채를 인간 정신의 차안에서 피안으로 이행할 움직임은 갖고 있되, 전적인 [본질직관]의 응축된 힘의 야망에서 소생하는 혁혁한 메타적 기능의 미분화된 선택에서,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우주의 논리를 반(反)공무(空無)화하는 개인의 움직임에서, 그러니까 인류라는 유기체가 생동하는 정치한 사고방식의 탐미주의성을 해명하고 나서야, 비로소 개인 내실의 지독히 이기적인 도착적 상정들의 결과물들을 받아들이고 해소하는 인간 실존의 문제에 달렸다”이다.

바로 이 충돌하는 음악과 철학의 첨예한 대립에서 세상이란 문법의 문제의 쟁점은, 음악은 주관적이고 내재적이지만, 철학은 객관적이고 외재적이라는 것이다. 또한 음악과 철학은 서로 전혀 다른 방식에서 자신을 해명하고자 하는데, 음악은 곧 자연이요, 철학은 곧 가공된 어떤 실체이다. 따라서 음악은 내게 그런 종류의 것이었다. 난 나의 스승 장 폴 사르트르처럼 무신론자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스피노자처럼 밀어붙이는 범신론자도 아니다. 나는 중간에 서서 그저 지켜보는 한명의 예술가에 지나지 않는다. 난 돈을 증오한다. 돈은 사람에게서, 그리고 그것이 중매되는 관계 사이에서 영혼의 형상을 가로채가 버리기 때문이다. 하기야 우리가 정직하게 자기 삶을 살아왔고 경찰서 한 번 들락날락 한 적도 없다면, 명증이 그 사람은 법률의 노예다. 누구에게나 투쟁과 데모가 필요하며, 거기에는 언제나 순수한 자유의지가 수반되어야 한다. 한 나라는 우리의 국제적인 이면을 퇴조시하려는 거대권력에 다름없다. 나라 하나, 하나가 피 묻은 죄악의 물결에 휩싸여 있는데, 현대사회에는 이것이 기하급수적으로 높은 단계에 이르러 도저히 셀 수도 없는 지경이다. 블러드 다이아몬드, 아니, 블러드 네이션!

내 본질에 관여하는 철학과 음악의 대비는 여기서 끝내기로 하자. 앞으로 더 내 에세이적 사건들을 진행하겠다.

난 솔직히 게으름뱅이이며 세일즈맨이 될 자신이 없어 글을 쓰는 건지도 모른다. 나는 사회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기에는 지나치게 여성적이며, 증오에 가득 찬 질정을 두려워하며, 그러나 화려한 찬사 역시 두려워하는 소극적인 패배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음악을 신의 가장 소중한 선물이라고 본다. 확실히 삶은 정태적인 양상을 뛰는 게 아니라, 아니나 다를까 모든 행위 하나 하나가, 실천 하나 하나가 동태적이다. 그러면 삶은 도대체 나에게 무엇일까? 나는 단지 부모님의 노후자금을 갉아먹는 치명적인 독충인가? 부모님께 더 이상 실례를 끼치고 싶진 않다. 더 이상 욕심과 허영에 들떠 철없는 짓은 하지 않으리라.

그러면 본격적으로 엉뚱한 두 번째 논쟁으로 들어가 보자. 왜 우리는 자연스럽게 유전자를 다음 세대로 전해주는 걸 업으로 삼는 번식기계가 되는 것일까? 생명의 보존 본능보다 더 강한 게 바로 번식본능인 걸 난 잘 안다. 그러나 난 확실히 에고이스트다. 나는 평생 독신으로 살며 음악평론과 서구 문학/철학 연구에만 주력하리라.

나는 줄곧 사람들이, 생활을 중요시하며 예술적/지적인 것을 등한시하는 교양 없고 무지한 무뢰배라고 여겨왔다. 그들은 포유류에 불과하며 예술과 지성이 선사하는 도저한 아름다움을 도외시하는 불쌍한 밥벌레라고 여겼다. 그들은 평생 매너리즘의 환멸성에 갇혀 자기 자신의 군상을 답답한 이 현대 사회에서 찾아나갈 것이라고. 물론 나도 그렇게 살아 왔다. 무릇 유치원을 다니고 학교를 다니고 대학갈 준비를 하고 회사에 입사하는 인생은 얼마나 야망 없는 삶인가! 그러나 난 다르다. 나는 Fucking 스페셜하다. 난 다르다. 남과는 전혀 다르다. 이것 역시 미국적 사고방식의 한 일면이련지! 모두가 달라야 한다. 똑같해지는 것은 우리가 인간의 보편성, 일면적인 것을 완전한 동류성으로 전환하는 것에 다름없을 것이다. 비단 한국사회만 동류적이고 몰개성적인 것만은 아니다. 이제는 글로벌화/국제화 되어 인류 전체가 진정으로 유비적 단일성에의 상생에 만족하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권한다. 다시 오지 않을 일회적인 이 중요한 생에서 한 번쯤은 후회없을 자기 자신을 살아보는 건 어떨지! 물론 쉽지 않은 결정이다. 배고파질 수도 있고 고독해 질수도 있는 길이다. 단지 인문학과 예술만을 말하는 게 아니라 공학적/기술적 면도 포함하여 우리는 혁명적으로 진화해야 한다. 혁명, 혁명만이 인류에게 부여하는 진정한 인간 본질의 근거이다. 따라서 동일성을 배제하고 차별성에 귀착하고자 하는 도도한 움직임은 첫걸음만 떼기 어렵지 걸어가다 보면 지극히 순수한 도정에 자신이 참여하고 있다는 바를 깨달을 수 있다. 하여, 아웃사이더로 살아왔다. 매순간 죽음과 삶을 가로지르는 경험에 근거한 판단에 의해서 나는 실로 평생 고독했다. 누가 내 난관, 아니 딜레마를, 이 무지막지한 인간으로서의 지엽적인/국지적인 일생의 궤적을 그려내야만 하는 소시민 사이에서 출생한 한명의 핏덩어리를 구원해낼 수 있는가? 내가 사랑한 여자들은 내 얼굴이, 바로 내 얼굴이 유전학적으로 떨어지는 것을 보고 퇴짜를 놓거나 무시하곤 했다. 나는 소심하게 짝사랑이나 하는 슬픔어린 사춘기 소년에 불과했다. 나는 헤르만 헤세의 후계자였는데, 그가 써내려가는 산문의 내면적 체계는 바로 나를 대변해주는 것이라고 본다. 그는 말했다. “나는 평생 고독했다”. 그리고 “나는 나를 살아보려고 했다. 그것이 그렇게 어려웠을까”. 모두가 나를 가리키는 이야기였다. 나는 내 본질을 살아보려고 발버둥 치며 사회에 엿을 먹일 결심을 하였고, 그 진일보의 시뮬라크르가 바로 <독서와 글쓰기>에 이른 것이다. 그의 소설 ‘수레바퀴 아래서’는 모든 고등학생이 참고해야 할 필독서 중에 하나다. 그에 비해 ‘데미안’은 지극히 몽상적이고 추상적이어서 대학 때 읽어봐도 늦지는 않다. 실제적으로 데미안보다 수레바퀴 아래서가 훨씬 쉽게 읽힌다.

나는 무엇 때문에 여자의 영혼을 갖고 태어났을까? 여자와 여자와의 성교는 나를 짜릿하게 한다. 레즈비언에는 어떤 숙명적인 기하학적 귀결성이 심재 돼 있다. 당신들도 잘 알겠지만 기필코 이 글은 나의 소개에 대한 재탕이 아니다. 난 단지 예술가로서, 철학자로서, 사상가로서 이 세계에 만연한 패배의식을 종식시키고 그 쓰디쓴 부작용까지 타진하려는 계획을 정치하게 소묘하길 원한다. 헤밍웨이는 절대 자기 후의 세대인 청년들에게 자살하지 말라는 경고를 했음에도 자기가 앞장서서 산탄총을 입 속에 겨누었다. 더군다나 랭보는 어린 나이에 붓을 꺾고 세계유랑을 시도했다. 그에 비해 칸트는 자신의 골방에서 평생을 집필활동에 몰두했다. 지금 나는 불꽃같이 타오르는 22세의 청춘을 누리고 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여자와의 섹스에는 큰 관심이 없다. 아직 난 여자를 모르지만 그렇다고 구지 여자의 몸에 대해 파헤치고 싶은 원시적인 욕망도 없다. 단테의 <신곡>에서 등장하는 단테의 베아트리체에 대한 열정처럼 나는 여자의 신비함과 환상만을 간직하고 싶다. 짝사랑도 사랑 아니겠는가? 나는 무엇이든 내 철학이론과 부합하는 게 있으면 항시 실천하는 지성으로 정치에 참여할 의사도 있다. 나는 앞으로 다시는 그 누구의 편에 서서 편향하지 않으리라. 바로 그 점이 사상가들의 결점이자 즉자(정), 대자(반)에만 골돌히 잠겨 즉자대자(합)를 완성하지 못하는 물리적인 실체적 패배인 셈이다. 변증법적 비판은 우선 선행돼야 할, 교설의 기저의 올바름에 그 뜻이 있는 것이다. 과거 소피스트들의 논박에는 수사적인 접근에 있어서는 군계일학이었지만 그들의 기교는 항상 보드리야르적 내파(Implosion)라는 장치적인 기술이 자기 논지의 깊은 근거를 지키지 못하고 연쇄폭발하기 마련이었다. 시뮬라크르가 아니라 이데아를 변별하는 자기 영혼의 눈을 우리 모두를 길러야 할 것이다.

나는 무릇 무엇보다 학문을 위한 나의 열정이 멈추지 않고 직전의 파노라마로, 비록 화려하지 않지만 끊임없이 타오르는 불꽃처럼 동분서주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내게 펼쳐진 순간적인 것, 그러나 거기에 절대성을 두는 열의·자기신뢰·사고의 반(反)종말론적 정지·그리 고 인간적인 전체성 곧 휴머니즘의 승리, 모든 걸 축약해 말하자면 순간적인 것 속에 절대성을 부여하는 모습을 나는 내 자신의 전범으로 삼고 싶다.

비단 22살의 나만 결코 세상의 부차적인 속성에 의의를 두지 않으면서도 자아를 배제한 새로운 형태의 면모를 일신하려는 게 아니다. 나 이전의 수많은 학자들이며 문학가들이 여기에 골똘히 괘념해왔다. 순간적으로 깨달음을 얻는 것은 동양철학의 근저를 이루었고 그것은 곧 지혜였다. 그러나 사변성을 중시하는 서구철학의 근저는 사가(史家)들의 논리학적 역사를 지반으로 이성적으로 처리해나가는 정합적인 즉 무모순적인 학문, 곧 지식이었다. 동양의 고승들은 글귀에 신경 쓰기보다는 순간적인 깨달음과 무신론에 목을 매었고, 반면 서양의 철학자들은 마치 학자처럼 지식의 방대한 양으로 말미암아 언어와 기하학 등을 이용하여 신통방통한 지식의 총체를 쌓아왔고 항시 다른 학자들과의 논리적 대립을 꾀했다. 물론 동양철학과 서구철학 중 어느 것이 더 우세한 것은 아니다. 지혜도 중요하고 지식도 중요한 법이니까. 그리하여 지금까지 즉한 내 모든 생각들을 차치하면서 나는 마지막으로 이 글의 결론을 여러분께 제시할 셈이다. 그것은 간단하다. 사람은 자기 입맛대로 살다 죽으면 그만이다. 그게 바로 자신의 불멸을 보존하는 길이다. 사회를 비판하고 자신을 치켜세워라. 모든 보편성에 엿을 먹이고 실험주의가 되라! 쾌락을 추구하고 오늘을 즐겨라! 색다름과 자기 자신만의 차별성에 의거하라! 그렇다면 전혀 새로운 세계를,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한 어떤 것을 볼 수 있으리라.









- 서론

잘못 살아왔다. 나는 언제나 패배주의에 빠져 사물과 현상, 사회의 명확하고 올바른 실체를 보지 못했다. 그랬다. 나는 염세주의에 빠진 한 명의 가련한 어린 우울증 환자였던 것이다. 나에게 삶은 정말 역겨웠고, 나는 내가 아름다움, 그 중에서도 여자의 아름다움에 다가설 자격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흐느끼는 밤을 지새운 걸 이제는 손꼽아 셀 수도 없을 정도이다. 그렇다. 내가 고백한 모든 여자애들이 나를 모욕하고 좌시했다. 나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아무도 나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 누구도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 20대 벽두의 나는 오로지 죽음만을 기다리며 과거를 회고하고 더욱더 슬픔과 자기연민에 빠져 질식해가는 가련한 동물이고, 인생에 있어서 한 번의 로맨스도 꿈꾸기 어려운 의기소침한 못생긴 남자였다. 그래서 난 결심했다. 나의 범상/범용한 능력, 나만의 탁월하고 마치 하나의 신의 계시처럼 나의 정신을 관통하고 있는 이 모종의 아우라를 계승하고 미칠 듯한 글쓰기의 예술로서 마치 랭보의 시時심과 칸트의 사유능력, 촘스키의 언어변증법적 기술, 토마스만의 위대하고 고결한 방대한 산문정신, 이 모두를 종합하여 나는 어떠한 총체적인 사상의 획으로서의 체계를 하나의 입체로서 완성하고자 했고, 거기에다가 마르크시즘과 구조주의, 실존주의를 밀어 넣어 나의 스승이자 현대 실존주의의 창시자 사르트르와 마르크시즘의 유일한 계승자이자 유일하게 스탈린식 공산주의의 가치를 믿었던 레닌 그리고 구조주의의 창시자 레비-스트로스까지 이루어내지 못했던 신기원을 재정립하여 거기에 존재론적 의미의 혜학을 부여하고 역사생산의 주체의 몫은 영웅이 아니라 개개인에게 달림과 동시에 의미생산의 주체 역시 시민들이 할당받을 지당한 자격이 있다는 것을 설파할 것이다.

나는 언제나 고독했다. 못생긴 나의 얼굴이 한몫 했을 지도 모르겠지만 내 성격도 보탬이 됐으리라. 그러나 자신의 역사는 자신이 주체가 되어 써내려가는 것이므로, 미상불 우리는 그 의미론적 불가입성의 공격을 항상 좌시할 수 없을 것이므로, 왜냐하면 이는 모두가 소위 덜떨어진 남녀에게서 공통적으로 오는 오늘날의 비극이 아닐련가? 그래, 과거는 그거면 됐어. 문제는 지금이야. 나는 늙은이와 같이 항시 붙들 수 없는 추억의 조각을 붙들려고 하고 오늘도 과거의 수레바퀴에 매달려 사는 행태에 동참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문제의 핵심은 당연지사 창연하며 밑도 끝도 없는 희망이나 미래도 아니며 오로지 ‘현재’라는 범주 하나에 귀속된 범신론적인 스피노자적 신의 실체인 것이다. 따라서 나는 발 빠르게 현재에 대응하는 현대인으로써 당당하고 슬기롭게 새로운 역사를 써 나갈 것이다.

나는 언제나 나를 사랑해줄 애인이 있기를 원했다. 그러나 20살의 벽두에도 내개 애인은커녕 소싯적 친구들조차 떠나버린 게 현실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새 결심을 선취하였다. 이러한 현실을 파기하고 내가 직접 나의 주체가 되어 여자를 차지하는 것이다. 나는 여자의 아름다움이 유미주의의 메타적 범주인 ‘진선미’라 생각하므로, 따라서 그것의 보은은 바로 여자인 것이다. 이리하여 여자는 무엇보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존재의 하나이여서, 나는 지적 방기나 젊은 날의 패기에 빠져 아름다운 여자를 놓치는 과오를 범하지 않음과 더불어 무릇 가장 아름다운 여자를 쟁취하여 사랑에 빠져 한 폭의 로맨스를 담담한 필치로 소묘해나가는 것이 급선무인 것이리라. 나는 아직 젋음으로 어떤 일이든 시도할 수 있으나, 무엇보다 내가 선택해야 할 방향의식과 목적의식은 내 정신을 일신하여 문학과 철학사상의 거장의 세계로 편입해나가는 일이다. 독서삼매경에 빠져 나만의 철학체계를 순일하게 상정하고 흩어져 있는 지知의 편린들을 귀일한 방향으로 압축하여 혁신적인 집약체를 추출하는 것이다. 헤겔이 말했던 절대지로 가는 도정의 순간순간 즉 사유의 도상에서 내가 결정적으로 입적해야 할 여러 가지 추상적인 관념들의 단상들을 지극히 정치하게 조립하여 그 누구도 넘보지 못할 철학이론의 진수를 표명하는 것이다.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과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 그리고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와 같이 세상을 뒤바꿔놓은 역사적인 미증유의 이론을 발표하여 그들이 걸어왔던 길을 전회함과 동시에 즉 능가하면서 모든 학의 분야를 두루 섭렵하면서 최종적인 지점에 이르러 백과전서적인 폭죽을 터뜨리는 것이다. 이른바 세계 학계의 거두가 되는 것이다. 타임지 표지에 내 얼굴을 장식하고, 40살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며, 50살에 영국의 학술왕림원에 들어가고, 60살에 스웨덴한림원의 노벨문학상 심사위원 자리를 꿰차는 것이다. 마르크스->사르트르->촘스키->지젝이 뛰어왔던 지성의 이어달리기에서 내가 바톤을 받고 새로운 학술의 역사를 다시 쓰는 것이다.

좀더 심층적으로 살펴보자면, 필경 중요한 건 언어를 깊이 있고 심원하게 바라보는 관점일 것이다. 내가 언어를 분석하고 해명하는 것은 언어만이 인간의 미래이고 철학의 중심이자 근원이거니와 우리의 모든 방면의 패러다임을 재론하고 구성하는 하나의 질료에 다름없기 때문이다. 또한 인간의 사상의 범위의 크기를 구체적으로 현성하는 언어의 유한성은 실로 인간사상의 유한성과 반대로 그 무한성을 상징하기도 한다. 한 개인의 철학사상의 테두리의 폭은 그 사람의 언어기술에 달려 있는 것이다. 이리하여 언어는 인류의 꽃이거니와 미래를 상정하고 구분 짓고 미분화시키는 일종의 형이상학적인 ‘시뮬라크르’이다. 따라서 이 글은 언어의 심오함과 복잡함에 대해서 철두철미하게 담론할 것이다. 그리고 다가오는 날들에 언어가 어떠한 고매한 아우라로 우리 곁에 다가올 수 있는지에 대해 조명할 것이며 한갓 의사소통의 도구로서가 아니라 본질로서의 ‘언어’ 이를테면 ‘랑그’와 ‘파롤’을 이분법적으로 분화시켜 그 수중에서 ‘랑그’의 속성을 직시하고 철저하고 적나라하게 묘사할 것이다. 언어는 곧 미래이다. 이리하여 진리체계는 언어로 인해 주조된다. 그러나 우리가 사변이성에만 의탁한 ‘언어적 사유’는 ‘진리의 다의성’을 포착하지 못한 나머지 단지 선형적이고 지엽적인 문장의 연속의 횡행만을 넘보고 있을 뿐이다. 반면, 충만한 직관은, 모든 분야를 총체적으로 아울러서 전지(全知)를 가능케 하는 모종의 ‘도구’가 된다. 그럼으로 사변이성과 대비되는 이 직관적 사유는 우리가 소위 “깨달음”으로 불렀던 것이었는데, 이 깨달음이야말로 한 인간의 정신이 우주 전체와 덩치를 겨루며, 우주보다 더 멀리 이르고자 하며, 그 구축의 규모와 정교함은 카오스와 코스모스로 대표되는 우주의 그것을 족히 넘본다. 따라서 우리는 빛나는 직관적 사유를 소중히 여겨야 할 것이다. 이야말로 인간 정신의 정수이니!



이제나 저제나 삶을, 온통 각성하여 세상을 한가운데서 통괄할 수 있는 엄청난 열정의 삶을 기대해왔다. 행여 그런 삶이 올까봐 마음 졸이며 미간을 찌푸리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런 삶의 행복에서 오는 기쁨에도 목적이 있지만, 학자로서 명망을 얻는 것도 기쁨으로 향하는 지름길이라는 것을 억측이라 할 수는 없으리라. 어떤 추상적인 골격을 설정해 구체적으로 진척해 나감으로서 하나의 명제를 완성하고, 그 가설을 따라 사상의 맥락의 구축에 일조하는 것이 진정으로 융통성 있는 삶의 합법칙적 파노라마일 것이다. 물론 사고의 집적이 불가항력적인 사상의 결절점을 도출시키는 과정은, 모종의 객관적 실재에서 ‘정신 일반’을 유리(遊離)함으로써 새로운 표상으로 가는 존재기반을 닦아놓는 것이리라. 여하튼 원초 단계에서부터, 맹아적인 단초에서부터 사고를 다이아몬드와도 같이 세공하여 그 결과물을 성원에게 고창하는 것은, 부득이 현세의 생활방식으로부터 의거한 일련의 자기기투와도 같을 것이다. 마르크스주적 유물론자들은 철학이 생활과 현실로부터 파생되었다고 주장한다. 과연 진보적인 철학이 우위적인 것일까 관념론적인 철학이 우위적인 것일까. 철학이라는 거대한 사상체계의 축조는 비단 무위도식하는 철학자들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닐 터이다. 그러나 각각의 사물과 현상을 뚜렷하게 구분시켜주는 방생(方生)성은 오로지 깊이, 심원하게 숙고하는 자에게만 달린 것이리라. 그리고 목하 필자는 생각의 증보 즉 정립으로써 원질을 상정하고자 한다. 무릇 비분화하는 미립자들의 군집은 원자를 생성케 하는 원인이거니와, 이를 정신의 형태로 치환시킨다손 치더라도 틀린 것은 아닐 것이다. 또한 원자의 분열은 하나의 원을 그리며 인과응보적으로 윤회를 구현함으로, 그 지축을 바로 인간정신의 감관성에 할당해야 할 것이다. 어쨌거나 우리의 정신이 흥기하는 것은 지극히 본질적인 것이며, 그것이 외부의 삼라만상에 조응하는 것은 바로 정신의 생동성과 융통성을 자인하는 것이리라. 하기야 정신은 고금을 걸쳐 절멸하지 않고 대대손손 이어져 온 사회적 의식의 한 형태이다. 정신의 다종다양함은 항시 감각이 외계로부터 접촉하여 육성되는 특수자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이것이 일반화되어 일반자로 절도 있게 굳어지는 것이며 그리하여 정점에 이르러서는 법탈의 경지로 전화되는 것이리라.

나는 여느 때고 전일적인 자기동일성의 확립을 위해, 미시적인 편과 가시적인 편의 피아적 관철을 위해, 따라서 나의 사고와 지성이 모종의 아포리아로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해 어떤 경우 선배 철학자의 사상을 개악하기도 하였고, 그로 인해 여러 모순에 빠질 리스크의 수반을 배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목적인에는 단일한 이데올로그의 연쇄가 항존한다. 이 목적인을 이루고 있는 이데올로그의 동질소는 어느 모로 보나 진보·선진적인 마르크시즘일 것이다. 내가 누구보다 마르크스주의자라는 건 과거의 글에 언표 딱히 명시하지 않아도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필자가 관념론을 지향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필자는 정신본질의 굴신성을 깊이 찬양하는바 플라톤, 칸트, 헤겔, 후설 등에 경외하는 바이다. 그들의 철학 구조의 정상 혹은 배후에 위치하는 최고류 즉 이데아는 진리를 구명하고자 하여 외부에 존재하는 박리상의 자초지종을 거침없이 표현하고 있다. 그렇다면 진리의 시동인은 개개 사물의 기개라고 부를 수 있는가? 그들 관념학파의 슬로건이 무엇이든 나는 결코 배중적인 판단을 수립하지는 않겠다. 비록 무조건적으로 학문의 종국원인을 자기본위의 우월의 증대로 칭하더라도, 나를 비롯한 세계의 유기계와 무기계가 생성하는 현실태를 시나브로 관찰하여 추론하고 상정할 것이다. 미상불 나의 감관지각은 그런 복잡한 우주의 메커니즘을 꿰찰 수 있는 원동력을 제공해 줄 것이다. 나는 나와 타자가 동일하게 지니고 있는 공통감능의 힘을 믿는다. 그 힘은 기필코 우리의 마음, 감성 즉 파토스에서 일정하게 창출되는 비근한 하나의 체제일 것이다. 이야기가 그렇다면, 만일 파토스가 로고스와 등가적인 역학관계를 이룬다면, 그 두 기체(基體)의 대립은 분명 고대철학사에 제일보의 위치를 차지한다고 볼 수 있으리라.

필자는 에피쿠로스학파의 삼라만상에 관한 영원한 유동성과 비소멸성의 테마를 지지하는 바이다. 무릇 인간이 죽더라도 그 영적인 것이 원소로 분해되어 우주에 녹아들기 마련이다. 그로 말미암아 존재는 곧 무이며, 무에서도 존재가 꽃피워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사후세계라 있을 수 없는 유토피아의 원형이며, 우리는 단지 사회의 쌍무적인 계약 기간이 끝나 우주 저편으로 사라지면 더 이상의 현존재는 당위적인 것이 될 수 없는 마멸의 상태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삶에서의 유공성은, 불가입성과 더불어 엄격히 병존한다. 따라서 타자나 외부의 현상, 사물이 거기에 개입하거나 퇴출당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유위변전한 삶의 도상에서 어떤 유의 철학적 범주에 그 뜻을 둬야 하는가? 답은 명약관화하다. 그것은 바로 ‘인간 실존’이다. 나의 스승 사르트르가 창시한 실존주의를 더욱 깊이 있게 연구하고 심화시킴으로써 보다 심층적으로 접근하여 결과를 도출해내는 것이다. 존재는 어떻게 현존재일 수 있는가? 어렴풋이 실존하는 개인이 세계역사에서 어떤 일련의 영향을 끼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역사란 개인 각각이 더불어 생활하면서 기술되어지는 이야기이다. 여태껏 역사에서 유명한 지도자나 사상가만이 주체로서 그 영향을 주고받을 수 있었다. 한데,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어렴풋한 이질감과 배타성은 우리에게 단지 고리타분하고 거창한 목적의식만을 심어줄 뿐이었다. 그런 역사는 배척되어야 마땅하다. 비단 고명한 지도자와 사상가만이 하나의 삶을 영유하는 것만은 아니다. 우리 무명의 개인 역시 고색창연하고 고귀하며 소중한 삶을 누릴 자격이 있다. 과거에는 노예계급이 존재했고 따라서 노예들은 정치나 경제에 참여할 수 없었거니와 한 개인으로서의 당위성도 심히 결여되어 있었다. 우리가 견지해야할 역사의 맹아의 원류는 그리스 문명이 아니라 고대 이집트와 바빌로니아 문명이다. 우리는 단연코 우리의 선대를 자명하고 명료하게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서유럽 중심의 역사는 고대 그리스를 문명의 최초의 전범이자 시조로 상정하고, 백인우월주의와 아시아·아프리카인의 복속을 당연시하는 제국주의적 특질을 당연시해왔다. 그러나 보라! 이제 중국은 세계의 중심이 되었고 한국은 세계경제순위 9위에 랭크되어있다. 일본 역시 제 2의 경제대국으로서 그 힘을 분출하지 못해 방황하고 있다. 바야흐로 아시아의 시대가 재도래한 것이다. 오늘날의 역사는 새로 쓰여 져야 한다.



-본론

1. 통시적으로 언어의 변증법적 제요소를 탐구•분석해야 할 항구적인 외적 필연성

우리 생활에 언어는 널리 퍼져 그 세력이 이미 실재를 넘어섰지만, 그러나 언어를 진정으로 변증법적인 관점에서 확대•팽창하려는 시도는 별로 일어나지 않았다고 할 수 있고, 언어를 변형•변용시켜 변증법적으로 개연성을 부여하여 교묘하게 비틀어서 새로운 차원으로 확대시키려는 언어학자들과 문인들의 일련의 시도들은 무산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므로, 도리어 90년대 까지 불은 구조주의란 문예•철학사조는, 사르트르와 메를로-퐁티가 건설한 현대 실존주의의 냉철한 흐름에 구조적 인류학의 관점을 밀어 넣었다고 할 수 있지만 대부분의 저능한 철학사상가들과 예술가들은, 의미론적인 시점에서 볼 경우 언어의 집중적인 통찰보다는 휴머니즘에 경도되어 잘못된 아류•궤변술적 사상을 아집으로 곡해로 유도시켜 변용된 도출물을 인민들에게 호도했으며, 편파적/일률적으로 사변적 시대정신의 모순을 상기시켜 패러다임의 올바른 영원회귀성의 사이클을 파괴시켰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여러 명의 지성인보다는 단 한 명의 위대한 천재가 더 가치가 있다는 것을 방증한다.

좌우지간 이런 흐름을 볼 때 대부분의 지적 조류는 생성•지향의 사이클을 회전하므로, 그 가운데 오로지 구조주의의 창시자 레비-스트로스만이 보다 인본주의의 의식지평의 형성을 유미롭게 묘사할 수 있는 특권을 가산하였다. 이러한 레비-스트로스 식의 방법론의 창도가 결연하게 인간의 존엄성과 그의 의미생산/역사형성능력을 묘묘하게 대두하고 복잡다기하기보다는 실천적으로 따라서 행위자의 입장에 서서 용공적으로 사적 유물론의 경향에 참여하는 게 하나의 정치적 태도를 수미 일관하게 묘사•표명하고 자신의 견해를 정정하는 것, 이른바 통시적인 체제의 사적 흐름에 개인의 정신의 정치한 항구성을 교교히 밀어 넣는 기술적 접근의 기법이 오늘날의 현대인의 정치권리의 당위성에서 요구되는 바이다.

일견 언어학자들의 선험적인 가상을 구현하고자 하는 시도는 들뢰즈가 상정한 개념인 ‘시뮬라크르’와 크게 다르지 않아 이므로, 그런 제요소에는 비정합적인 특성들이 속출하므로, 여기서 그 문제에 중요성을 크게 두지 않을 것이므로 삼가 하겠다.

이를 따라, 필자는 아주 정신을 차갑게 하여, 즉 사변이성에 본을 두어 냉철하고 센티멘탈리즘을 완전 배격한 채 지적 방기의 우유부단함을 완전 배척한 가운데 아주 냉엄한 철학사상의 이론적/가상적 글쓰기의 변증법적 언어의 생산을 창조해나가고자 이 글에서 부단히 노력했고, 따라서 이 글의 주제는 무엇보다 언어에 변증법적인 시도를 투사하면 어떤 식으로, 변질과 전형적인 가언적 가설의 전건과 후건을 섞어 그 누구도 알아보지 못하게 전무후무한 변증법적 철학적 글쓰기의 전범을 여기서 표현하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이 결단코 안빈낙도하지 않은 고군분투가 여하한 결과를 가져올지는 한 치의 앞도 내다보이지 않는 일종의 ‘관념의 모험’에 가까웠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더욱더 온갖 사상과 잡학과 지식을 병합하고 추려내어 즉 합치와 선취의 과정을 무한 반복하여 유구한 새로운 차원으로서의 미래, 소위 말하는 새로운 학술의 역사를 새로 쓰기만을 고대해 온 것이라고 평가해 준다고 무릇 학자로서 명민한 감사의 뜻을 표할 것이다. 그러니 독자들은 내 글에 어떠한 질정을 하더라도 미상불 나는 겸허히 그 질정을 수렴하여 재코드화할 것이며, 내게 주어진 글쟁이로서의 소명은 비록 소천하고 무지하더라도 아주 간결하고 간명하게 명철한 사회주의적 기호를 지양하는 한 명의 사상가로서 내가 집필한 모든 글과 행간에 두서 없지 않은 아주 뚜렷한 의미를 부여하게 될 것이리라. 따라서 종합적으로 이 글을 결산하면, 우리가 추론할 수 있는 부분은 변증법적으로 언어를 구명해야 할 지속적인 외재적 필연성이 기필코 수락되어야 한다는 것이며, 이리하여 일단 무제약적으로 즉 비구속적으로 언어를 분석하면 우리는 거기서 전에는 보지 못한 이율배반을 형성하고 있는 두 명제가 오롯이 양쪽에서 마치 수면 위로 떠오르는 해빙처럼 잔잔하지만 서로 두 태양이 한 하늘 아래 병존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의 뇌에 병기시킨다는 걸 우리는 환기한다. 그 병존의 각개란 엄존의 양립이라는 이율배반의 특징을 합리적으로 드러낸다. 그러니 우리가 파악해야 할 특질은 언어의 기호화에 따른 이율배반성의 심층적인 면이며, 그 표층적인 면은 완전 배제해야 할 것을 천명하는 바이다.



2. 언어는 사회적인 측면에서는 ‘소통’기능이 우선시 되지만 ‘서술’적 기능은 그에 앞선다.

언어를 통찰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기능적인 구분의 특징은 ‘서술’의 기능으로의 특화이다. 한 언어가, 한 국가에서, 한 사회, 특히 서구의 사회에서는 후안무치하게 분석적이고 객관적인 의미로서 나열되지만 동양에서는 우의와 비유의 기법으로 전도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우리가 서구 사회가 지향하는 언어의 냉엄성과 엄밀한 학의 의미로서 노정되고 있다는 사실의 진보성의 공로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더 뒤쳐진 유추가 아닐까 싶다. 일단 언어를 한 수법적 기능으로 상정하고 나면, 우리는 언어의 이러한 실사구시함을 공인해야 할 터이다. 문장을 구성하는 속성에는 인간의 본능적이고 관능적인 측면도 톡톡히 한 몫 하지만, 변증법적인 제요소가, 그러니까 좀더 추상적이고 선택적인 병합과 논증의 성질이 담겨있다는 걸 우리는 조금만 사려 깊게 생각하면 깨우칠 수 있다. 예를 들어 가와바타 야스라니의 순문학인 ‘설국’에서는 언어의 농밀한 응축성과 생략의 미학이 담겨 있지만, 거기에서 언어의 변증법적 도식을 읽어내려고 하면 아무것도 찾을 수 없는 게 바로 동양의 산문이 ‘변증법의 논리’를 도외시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J.P 사르트르의 소설 ‘구토’에는 그야말로 변증법의 철두철미한 논리의 정수가 글자 그대로 강력하게 집약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굳이 문학에 변증법적 논리를 애써서 부여하려 하거나 하나의 장구한 나열로서의 순문학을 도제할 필요를 요구할 이유는 없다. 왜냐하면 문학이란 본디 이야기의 산문을 시적으로 구축하는 게 관건적인 방안사항이므로, 여하한 번민과 회한, 고뇌와 패배적 기질의 서사시를 모두 말한 다는 건 조금 얼간이적인 짓일 것이다.

필자는 글을 쓰기 전에 여러 산문들에서 질료를 모으는데, ‘질료’의 집적은 하나의 ‘형상’을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질료는 일정하고 일률적으로 냉엄히 선별/변별하여 조직적으로 제기되어야 할 필연성을 당위적으로 갖추게 되는 것이고, 우리는 좀더 글을 작성함에 있어 진중해지고 냉정해져야 할 책임과 의무를 지게 되는 것이리라. 좌우지간 글이란, 산문이란 일련의 하나의 연역적인 접근으로서의 일종의 ‘학’이 되어야 할 것이며, 우리는 이런 식으로 학문이 가야 할 길을 조심스럽게 예감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우리는 개인적으로도 학문을 존엄하게 되는 것이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자. 소통과 서술은 어떻게 다른가. 전자는 유기적이면서도 편파적이고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고 한 개인이 모두가 학문에 끝에 도달한 채 용감하게 학술/학구적인 용어를 사용한다고 볼 수 없으므로, 그리고 사회적인 차원에서 용어는 한없이 저질을 지향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래서 소통은 서술에 비해 그 깊이와 심원성이 떨어진다고밖에 추론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후자는 다르다. 후자에는 어떠한 제약도, 통속적인 규범도 주어지지 않는다. 오직 전통성과 실험성만이 살아 숨쉬어 작가에게 열정적인 ‘뮤즈’를 선사할 뿐이리라. 서술은 이렇듯 파괴를 기점으로 생성의 측면을 부과함으로써 보다 고차원적으로 사고하고 마음을 그려볼 수 있는 혁혁한 가능성을 내포하는 것이다. 따라서 무릇 문예정신과 사유정신이란 하나같이 ‘서술’적 기능의 혁명적인 개연성에 그 뜻을 두고 있는 것이다.

하기야 원시를 벗어나 인간이 그럴듯한 문명의 모습을 갖췄다고 할 수 있는 역사는 기껏해야 오천 년 정도이지만, 그리고 서술이 인쇄기술로 널리 보급된 것은 육백 년도 안 됐지만 그 짧은 기간 이래 인간이 쌓아 올린 서술의 업적은 가히 어마어마하다. 그 양뿐만 아니라 질의 측면에서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 된 것이다. 필자는 불행하게도 언어학자는 아니므로 언어의 최신의 변증법적 흐름의 내용을 이러쿵저러쿵 내밀하고 정교하게 여러분께 설명할 능력은 안 된다. 그러나 한 명의 철학사상가이자 문인으로서 대충 떠보아 지금까지 겪어본 학문적 실재를 토대로 연역적으로 기초적인 설명이 가능하기는 하다. 그리고 필자가 언어를 중심주제로 지목하여 이 글을 쓴 만큼 냉정하지만 열정적으로 언어의 가능성에 대해 포부를 담아 적절하게 설명하기는 할 것이다.

우리는 주어와 술어를 합병한 형식으로 하나의 문장을 도출해낸다. 그리고 이것이 전통이자 정통적인 방법으로써 우리가 기술적으로 제기할 수 있는 형태가 되었고, 형태는 한 철학자의 말처럼 기능을 따른다. 그리고 그 기능은 주어+술어를 기본 형식으로 유유히 우리가 목도할 수 있는 것이므로, 우리는 무엇보다 문장을 명제로 만들고, 명제를 항진명제로 만드는 언어변증법을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언어의 ‘서술’적 기능은 미래의 과제의 중심으로 곧추설 것이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 여러 철학사상가, 논리학자, 문인, 언어기호학자들이 자리매김할 것이다.



3. 배부른 돼지보다는 배고픈 인간이 낫다.

필자는 글을 정교하게 잘 쓰기 위해서는 사르트르가 복용했던 코라드린이나 코카인 주사도 맞을 수 있다. 감각에 착란을 일으켜 남이 보지 못한 세계를 본다면, 그럼으로 인해 완전무결한 글을 쓰는 게 가능하다면, 이 한 몸 바쳐 그 뜻을 이루어 내리라. 필자는 글을 쓰는 데 몇 가지 조건을 두고 한다. 그 중 핵을 이루는 것은 바로 일주일 내지 열흘 간 책을 내리 읽고서 그것을 지금과 같이 토해내는 것이다. 글을 쓰기 시작한 지 어연 5년이 다 되간다. 처음에는 문법도 맞지 않고 어휘의 배열도 틀렸거니와 알지 못하는 단어를 생각나는 대로 끄적여 많은 시행착오를 거쳐 의미 없는 글을 썼을 뿐이었다. 그러나 지금, 온갖 지식과 경험이 집적·집약된 지금에 이르러서는 오로지 현재를 살며 사유하고 철학적 글쓰기를 시도할 뿐 결코 과거로 돌아갈 생각은 없다. 지금의 나야말로 완성된 자아의 표본이며, 유년 시절의 미완성적인 영혼으로 회귀하길 원하지 않는다. 현재의 나, 오늘의 나는 한 달 용돈 30만원으로 전부 학술서와 양서를 구입한다. 그걸 한 달 내내 읽어도 다 읽지는 못하지만 어쨌든 서재에 비축해 놓으면 마음이 한결 차분해지는 것은 막을 도리가 없다. 좌우지간 펜으로 벌어먹으려고 뜻을 두고 일어선 ‘나’이므로, 이 배수진의 한가운데서 돌아갈 길은 없을 것이다. 음… 나는 단지 돈을 벌기 위해, 돈 생산의 기계가 되려고 저널리스트를 하기는 싫다. 필경 저널리스트란 천박한 직장임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진짜 글을 쓰고 싶다면, 정말 자신의 펜으로써 순문학과 영원불멸의 사상을 집필하고 싶다면, 마음을 깨끗이 마치 백지와도 같이 비우고 정진하여 조심스레 펜을 드는 게 지당하리라. 물론 일반인들이 블로그에 끄적여 놓은 조잡하고 짧은 글과 내가 정신없이 써대는 정통산문을 비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나와 같이 순문학을 읽고 철학사상서를 읽는 젊은이는 오늘날 정보화시대에 있어서는 아주 극소수에 불과하다. 신문지상에는 가끔 어린 나이에 소설을 써서 천재라는 소리를 듣는 아이들이 나오곤 하는데, 그 애들의 글을 읽어보면 도리어 한숨만 나올 뿐이다. 어떤 방식으로 삶을 살 건 그건 여러분의 몫이다. 그러나 그 존귀한 삶의 풍경에 질 좋은 정신의 집합체인 양서가 곁들여지지 않는다면 아주 삭막하고 기계적인 것이 될 터이다. 이렇게 마치 신이 된 입장에서 서술하고 있지만 필자 역시 아주 후회스런 삶을 산 인간의 전형 중 하나이다. 필자의 삶을 나열하자면 밑도 끝도 없겠지만, 그것은 공개하기조차 부끄럽고 두려운 하나의 파노라마이다. 필자 나이 방년 21살이건만, 아직 이루지 못한 것 많고 한 많은 과거 또한 지천이다. 21살이 되기까지 과연 무엇을 해왔는가, 나는 현재 어디에 서 있는가, 나는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들은 이미 해결된 숙제임에 틀림없지만 그래도 정신 차려야 할 여지는 남아 있는 게 분명할 것이리라. 그래, 나는 철학자가 되기로 했다. 세상의 진리와 법도를 펜으로 말미암아 구현하고, 하나의 단일한 완전한 체계를 세워 그 체계의 언어로 하여금 세상을 분석하고 꿰차는 일이다. 사람들은 말한다. 철학은 밥 굶기에 딱 좋은 일이라고. 그러나 선비가 돈 걱정 하는 것 보았는가? 돈이라는 시류를 따르지 않음으로서 당당하고 자유롭게 학문의 강에 강고히 발을 담그는 것, 그것이야말로 현대인이 지향해야할 유일한 정숙함/도도함이 아닐지.

필자는 평생 고독하고 외로웠다. 그 고독을 달래기 위해서는 베토벤과 마찬가지로 자기 일에 힘쓰는 게 최고였다. 그래서 학문을 파고 교교히 수양하며 학구의 전통에 흠뻑 빠져들게 되었다. 책이란 무릇 정신의 양식이다. 우리의 몸이 음식을 섭취하듯 정신 역시 추상적인 무언가를 섭취하지 않고는 배겨나지 않는다. 필자는 육신과 정신의 이원론을 여기서 따분하게 설명하고자 하는 건 아니다. 그런 건 이미 고대철학자들이 해결했다. 필자가 지적하고자 하는 건, 그 요는 자신의 지성을 방기하지 말라는 것이다. 곧 지적인 방기의 유지를 가늠케 하지 말라는 것이다. 몸이 굶주릴지언정 마음만은 배부르게 해야 한다. 이렇듯 “배부른 돼지보다는 배고픈 인간이 되자”라는 소크라테스의 구호를 잊지 말아야 한다.

문장을 써내려가는 건 인생을 직조해나가는 것과도 같다. 글쓰기의 예술은 자식과 다르게 영원한 법이어서, 작가들이 소위 ‘사후의 영예’를 바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리고 글쓰기의 예술은 작가가 늙을수록 더욱 더 심오하고 원숙해지는 것이어서, 운동선수나 음악가들이 늙어서 회의감과 환멸감을 느끼는 것과 달리 작가는 나이가 들어감에 있어 한층 큰 환희를 경험한다. 이렇듯 작가라는 직업은 항구적인 특성을 갖고 있어서인지, 나이가 들어서 직업을 작가로 전회하는 많은 유의 사람들을 보게 된다. 여하튼 작가라는 건 굉장히 실존을 요구하는 직업이라서, 거기에는 한 개인 그 외에 다른 것은 있어서는 결코 안 된다. 왜냐하면 사르트르 말마따나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기에, 그리고 역시 휴머니즘이란 극도의 자기본위의 삶이기 때문이다. 영혼은 시나브로 잠식되어 간다. 그 와중에서도 영혼의 방향의식은 자신의 위대성에 침잠해 들어간다. 영혼이란 그런 것이기에.

이와 반대되는 무리들, 소위 부르주아들의 전횡을 필자는 보고 있을 수만은 없다. 엄밀히 말해 필경 자본주의 세계의 썩은 보고(寶庫)는 서유럽의 교권주의로부터 시작된다는 게 정설로서 굳어져 있다. 따라서 내가 독자 여러분을 책동하고자 헛헛한 예봉의 기치를 내세우는 게 아니다. 당신들에게 인종(忍從)을 구하고자 현대사회의 동란에 눈감아주고 반동적·보수적 필설을 완성하려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나는 자신을 정명(正名)하게 하고 남부끄럽지 않게 당당히 삶을 누리고자 무수한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며, 앞으로도 나는 노력에 의해 이루어지고 이룩해나갈 것이다.

오늘날의 매판적인 소비자의 기호는, 이 차안의 세계에서 너무나도 진지한 세속성을 보여준다. 자본주의는 미상불 마야가 되었으며, 이제는 위대한 현자나 도인의 법열은 현상세계에서는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무릇 자신을 넘어서 신과 합일되어 느끼는 강렬한 도취감 이른바 ‘엑스타시스’는 아무래도 여자의 질에서 나오는 분비액을 가리키는 신종마약 엑스터시의 준말이 아닌가 싶다. 여하튼 필자의 삶에서도 엑스타시스를 경험한 순간이 손에 꼽으라면 매우 적지만 있긴 있었다. 그 때 느꼈던 희열과 도취 그리고 환희는 이 엄정한 물리의 세계를 넘어 인간 조건을 뛰어넘은 피안의 세계의 입도라 불려도 부족함이 없었다. 그것은 하나의 신의 계시에 가까웠다. 나의 감관과 이성은 한순간에 우주 전체를 볼 수 있었고, 우주 전체 너머의 소위 메타적인 범위도 꿰뚫어 볼 수 있었다. 이는 하나의 영지주의에 다름 아니었다. 비록 철학자들이 자신들의 논거를 바탕으로 지식의 집적으로 우주와 존재를 연구한다고는 하나, 어디까지나 그것은 인간의 한계에 종속될 뿐, 신의 경지에 도달하여 그 관점에서 미시의, 기하학적인 세계를 문법적으로 표현할 수는 없는 것이리라. 그래서 한 명의 지성보다도 한 명의 정신병자가 더 깊이 있고 심도 있게 세계를 관찰할 수 있는 것이며, 그들의 착란과 괴기한 이목이 정신현상학의 비전통적인 정초를 수립할 수 있는 것이리라.



4. 철학과 진보정치

글을 써서 출판하거나 발표의 형식을 취하면, 무릇 정적들이 생기는 법이다. 가령 들뢰즈와 같은 성현조차도 그를 둘러싼 수많은 적들을 양산하였다. 그렇다고 그 비판자들이 그런 위대한 철학자와 동렬이라는 건 아니다. 따라서 들뢰즈의 죽음을 둘러싼 일종의 가사(可死)성은 하나의 만화경으로서 지금까지도 소중히 온존하여 있다. 그러나 이러한 위대한 학자의 죽음에서 덮쳐오는 파고는, 정설로 굳어져 철학적 사조로 대두되는 일련의 유행의 잠식과 불가분리성을 가진다. 그 연고가 다원적이든 일원적이든 간에 철학사조란 어떤 하등의 이유 없이 압살당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물론 오히려 그 철학사조의 창시자인 학계에 한 획을 그은 철학자가 죽음으로써 그것이 더 비등해질 수는 있으나, 그 학설이 내포하는 알레고리의 진실성은 시대가 흘러감에 있어 그 모순과 합법칙성의 오류가 수면 위로 드러나는 것이다. 하기야 중세의 유명론과 실재론 사이의 담론적 논쟁이 아직까지도 명증이 결론 시 되지 않듯이 우리는 단지 오랜 세월이 흐른 후 책의 주관적 운명에 관해 통찰해 볼 것만이 아니라 목하 철학의 진리의 진실성의 어용적 부분과 사변적 부분을 분리하여 정확히 자혜롭지 않게 식별해야 할 것이다. 이는 하나의 강령과도 같은 우리만의 숙제이다. 하기야 고전고대의 정전을 스스로에게 운위하려면 감각의 일익을 담당하는 부분을 구축(驅逐)해야 하며, 오직 사변이성으로서만 판단하고 검증해나가야 한다. 그리하여 인간의 선천적인 인륜의 정신을 복권시켜 일신을 시종 교육적으로 도야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무지의 학정과 압제에서 벗어나는 길은 오로지 학문과 야합하여 자신의 지성을 비호하는 길 밖에는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철학사상의 창도(唱導)란 비단 이를 행한 개인에게만 국한되는 게 아니라 사회 전체에 이바지하는 모종의 특성을 갖고 있다. 한데, 철학사상의 철권적인 수립은 미상불 사회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기 마련이다. 그것이 사상적인 것이 아니라 형이상학적·선험적인 관념론이라 하더라도 그 얄궂은 노도의 파고는 아닌게아니라 불역한 사회에 새로운 규법체계의 예기를 가져오게 마련이다. 가령 자본주의자들과 사회주의는 불구대천의 관계라고 볼 수 있고, 가난한 인민과 형이상학 역시 그러하다. 하기야 하릴없는 현대사유의 차축운동 속에서 온갖 난수표가 범람하므로, 이러한 교의들이 후진국의 인신희생을 막을 수 있는 것도 아니거니와 신자유주의로 관념된 그릇된 통념의 채산을 갈파할 수 있는 것도 아니리라. 그렇지만 우리 도덕의무의 준칙이 타당하도록 행위하는 것을 백안시한다면, 우리의 행복은 와전되고 자타는 비난할 것이다. 요는 삶을 살면서 자신의 정언명령에 면피하지 않고 따르는 것 곧 자치를 일련의 형이상학적 표상으로 체화해야 할 것이다. 약술하자면 자신의 지성을 태업/방만시키지 말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지성이야말로 한 개인의 비원자화된 소여성의 방증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본주의의 먹구름이 드리운 병리적 시대에 항거하려면 그것에 대척점을 이루는 간지의 시니피앙을 계발하고 제시해야 할 것이다. 이리하여 지성과 반동에 대항하는 급진적 인문학적 좌파주의는 하나의 짝패를 이룬다. 사람들의 말마따나 진보정치는 서민의 전유물이라지만 여태껏 그것이 서민들의 복지와 실질적인 생활의 경제적 안정에 도움이 된 적이 있었는가? 오히려 그것이 오늘날에 사회영합주의라는 탈을 쓴 ‘포퓰리즘’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때 우리는 그것을 완강히 거부해야 할 필연적인 시민의 윤리적 정치성을 함의하고 있어야 한다. 현 MB정부의 지도 하에 건립되는 현대 한국의 자화상은 엄격한 법치국가를 넘어 이제는 새로운 글로벌적 경제도약의 신기원으로서 국제사회에 명약관화하게 일류경제제국으로 일신하고 있다. 하기야 민주주의의 퇴보로써 MB정부의 독재주의를 타파할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되레 우리는 신문지상의 이러쿵저러쿵하는 감언이설에 속아 넘어가 정치의 제도적 장치의 이입이 가져오는 효과의 이면에 있는 배후를 들여다보지 못한다. 난잡한 정치판에서 간지를 외삽하고 있는 여러 국회의원과 소위 엘리트들의 교만과 지략을 우리는 우리의 개인적 이익뿐만이 아니라 공공의 이익까지 포함한 관점에서 분석하고 정치에 참여해야 할 것이다. 국가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으며, 그 힘은 국민에게 나온다는 헌법 제 1조를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5. 철학은 명백히 미래의 근원이다.

사르트르는 머리로 사유하지 않았다. 그는 글, 곧 언어로 이러쿵저러쿵 갈겨쓰고 재정리함으로써 하나의 구조를 설계하고, 입체적으로 조망해 새로운 이론으로 뻗어나가는 신기원을 이룩할 수 있었다. 코난도일의 소설에 나오는 셜록홈즈도 물론 사방팔방 증거를 찾거나 하는 동태적인 수사법을 갖지 않은 채, 외부에서 들어오는 정보들을 골방에서 간추리고 분석하여 종합함으로써 연역적으로 접근하여, 사건의 실마리를 하나의 총체로 구성하여 사건의 심층적인 전체적 구조도를 도식화하는 기법을 사용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칸트 역시 고향 쾨니히스베르크(오늘날 러시아 칼리닌그라드)에서 150킬로미터 이상 바깥으로 벗어난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57세라는 늙은 나이에 철학을 시작하여 독자적이고 체계적인 관념의 사유를 통해 철학 사상 가장 중요한 인물에 등극하기에 이른다. 이렇듯 장소와 시간, 나이와 편견에 구애받지 않고 골방에서 사고(思考)와 사유를 거듭하는 것은 일견 미네르바를 떠오르게 한다. 미네르바는 인터넷으로 서적들을 시키고, 음식은 배달로 하여 골방에서 사유의 정점에 올라 정부를 뒤흔들어 우리의 어안을 벙벙하게 만들었던 골방사상가이다. 요근래 조기유학을 위시하여 자녀를 해외의 선진문화를 학습하게 하는 방법을 택하는 부모들이 많은데, 사실상 ‘문명의 충돌’을 경험한 자녀들이 세상의 패러다임을 읽는 능력이 발달한다는 점에 있어서는 필자도 같은 입장을 보인다. 그러나 그 돈으로 고급 양서들을 구입하여 어릴 적부터 학문적인 조숙함을 자녀에게 각인시킨다면 그보다 더할 가치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리라. 하기야 공감각적 경험의 패러다임의 개선과, 학문에의 사변이성관의 성숙의 절충 이른바 정체성의 양대산맥의 교집합적 종합이 더 바람직한 보편타당의 지성을 확립시킨다는 데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가령 뼈없는 이론가는, 실재적인 실천의 측면에서 여행인이나 경험자가 체험하는 교묘하고 정치한 측면의 다각도적인 순간적 직관의 깨우침을 결코 알지 못한다. 그래서 아무리 좋은 곳에서 사업적 자문을 받아도, 직접 사업에 뛰어들어보면 그 형태와 질적인 차이가 전혀 진배없음을 알아채는 것이리라. 그러므로, 어중이떠중이들이 자신의 이론적인 선입견을 앞세워 진술한 책들이 가져오는 편견보다는, 행동이 공인의 인증을 받고 설파한 책들이 산출한 실천적인 생활관을 지향하고 거기에 방향성을 두어 숙고해야 할 것이다. 무릇 언행일치야말로 지식인의 보배라고 할 수 있다면, 행동하지 않는 사상가들의 언론을 통한 감언이설적인 간접적 정치참여는, 마땅히 배척되고 피고인으로서 심판대에 설 그런 중요한 안건이라고 생각한다.

나의 스승 사르트르는 말했다. “타인은 지옥이다”라고. 우리는 우리의 앞에 살았던 이 예술가의 말마따나 지극히 개인적이고 이른바 자기본위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바야흐로 범신론과 무신론이 이항대립을 이루는 시대이다. 유신론과 이신론은 이미 과거의 문헌이 돼버렸다. 요컨대 범신론과 무신론의 대두 혹은 득세는 현대철학을 논하면서 단연코 빠뜨릴 수 없는 화두의 근원이 되었으며, 만약 범신론과 무신론을 이어주는 가교가 하나 존재한다면, 그것은 바로 인식론에 대한 우리의 성찰의 내용에 있을 것이리라. 예의 관건은, 세상을 과학의 패러다임으로서 인간사회를 비롯한 삼라만상 즉 전우주를 철두철미하게 하나의 총체로 규정지어, 메타적인 세계 즉 인간조건의 피안에 위치하는 세계를, 우주 너머의 혹은 우주 자체에 내재되어 있는 미시적이면서도 복잡다단하고 불가해한 신의 저편을, 보기를 거부한 채 지적방기를 자행하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뼈저린 후회를 심어줄 그런 ‘거시적인 패턴으로서의 관조’이다. 가령 현대과학의 색안경은 주조된 지 2세기가 채 안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현대 과학을 규정하는 자들을 비롯하여 이 시대 모든 얼빠진 자들은 자신들의 자구책을 도구로 하여 교조적으로 세상을 보는 일이, 그로 인해 변질된 사물들이 마치 진실인양 받아들이고 있다. 이것은 분명 시대적인 오류이다. 한시적으로 어떤 사실을 파악하는 것은 마치 하나의 조각이나 연결고리만으로 세상을 이해하려는 몰지각한 방법이다. 우리는 거기서 좀더 큰 그림을 관찰해야 할 필연적인 철학의 열정을 자각한다. 세상이라는 큰 그림의 거대한 총체를 직시하기 위해서는, 한시적인 패턴을 쫓아가기보다는 보다 원시적이고 고전의 기법을 체득하는 것이 낫다. 그런 연유로 우리는 과학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철학을 선택하는 것이며, 철학만이 전우주와 거기에 내재하는 미시세계라는 엄청난 전대미문의 숙제를 풀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며, 저주받은 인간존재가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출구가 될 것이다. 비단 시대정신이나 시대사조에 입각한 철학만이 유행을 누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고대철학인 플라톤이 신플라톤주의로 변용되어 득세하는 것을 관찰한다면 고대철학에 본을 두고도 현대철학과 백중지간으로 어깨를 겨룰 수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철학에 본을 두어야 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철학은 명백히 미래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혹자는 공론에 가까운 관념적인 사유가 현대사회를 어떻게 발전시키는가에 대해 의아해할 것이다. 요컨대 기술적·물리적 진보가 아니면 결코 현대사회의 상승이 아니라는 틀에 박힌 고정관념과 선입관을 갖춘 많은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를테면 필자는 변양 혹은 진일보한 세계에 대해 논급하는 것이 아니다. 미상불 글의 서두에서 이성에 대한 중요성을 논한 이유는 로고스 즉 이성이야말로 철학의 중심핵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성이 무엇인가를 이성적으로 사유할 때만 알 수 있다. 사유의 과정이 바로 이성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이성은 이미 주어져 있는 것으로서 현실에 적용만 하면 되는 것으로 착각한다. 이성이 하나의 틀과 체계로 굳어지면, 그것은 이미 살아 있는 이성이 아니다. 현실을 떠나 체계화된 이성은 개념의 납골당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이성은 우리가 당대를 사상 속에 포착하고자 하는 시도를 통해 비로소 그 모습을 드러낸다. 우리의 시대에는 현대를 반성적으로 가로지르는 포스트모더니즘의 기호가 각인되어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이성이 우리에게 단순이 주어져 있다고 전제한 전통 형이상학의 전제에 강한 물음표를 붙이면서, 이성이 자신과 대립하는 타자를 끊임없이 생산함으로써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있다. 만약 이성이 권력, 욕망, 무의식과 불가분의 짝을 이루고 있다면, 이성비판은 그 갈림길에 세워져 있는 길 안내판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만약 이성 스스로가 이성과 반이성, 합리주의와 비합리주의, 서양 중심주의와 문화상대주의를 산출한다면, 이 대립을 가로지르는 길이 바로 보편적 이성을 통해 세계주의를 확립하는 것이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이성은 공통적인 것을 발견하고자 하는 비판적 대결을 통해 살아 있는 이성이 되기 때문이다. 이성의 결함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은 철저한 이성의 탐구뿐이다. 이성 자체가 하나의 길과 과정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이성과 대치되어 하나의 이항을 이루고 있는 중요한 철학의 핵심요소는 무엇일까? 그것은 존재이다. 그러니 우리는 존재에 대한 사유를 무엇보다 우선시할 필요가 있다. 존재사유, 즉 존재에 대한 생각은 인간이 자연을 바라보는 데서부터 비롯된다. 우리 주변에 존재하는 것들을 어떤 시각에서 바라보는가에 따라서 그 존재에 대한 생각은 매우 다양하게 개진될 수 있다. 고대 소아시아 지역에서 체계적으로 자리 잡기 시작한 철학적 사유는 이러한 존재사유에 다름 아니다. 사람들은 자연이 부단하게 변화하는 것이라고 여기기도 하였고, 언제나 동일한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최초의 철학자들이 제기하였던 생각들은 한 개인의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인류의 보편적인 세계관적 사유로까지 발전되었다. 자연을 어떻게 바라보고 해석해야 하는가의 문제는 오랫동안 철학의 중심 주제로 여겨져 왔다. 이를테면 과거에는 과학과 철학의 분립이 뚜렷이 나타나지 않았다. 그런 연유로 철학은 시민들에게 있어 자명이 과학적인 학문이었고, 모두가 이를 의심하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은 자연철학으로 불릴 정도로, 자연 그 자체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자연 존재에 대한 철학적 물음을 처음으로 제기하고 체계적으로 사유하였던 사람들이다. 그들은 대체로 자연을 물질론적인 것으로 파악하였으나 정신이나 신적인 것 역시 간과하지 않았다. 앞에서 필자가 지적하였듯이 현대인들은 이를 망각하기 십상이다. 탈레스가 상정한 ‘신적인 것’이나 아낙사고라스의 ‘누스’는 물질적인 것과 단절되지 않는다. 기독교가 세계종교로 발전하면서 서양의 중세는 신 중심적 사고로 물들었다. 중세의 철학은 자연 존재의 궁극적 원인에 대한 관심이 주도하였으며, 모든 것을 바로 그것으로서 존재하게 하는 존재의 제1원인에 대한 탐색이 주류를 이루었다. 보편 존재에 대한 존재론적 사유는 신학의 중심 주제이기도 하다. 그러나 중세의 신학자들은 자연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들을 선성(善性)이나 신성이 결여된 것으로 파악하여 부정적으로 평가하였으며, 이와 같은 자연존재의 결함을 신에게 전가시키지 않기 위하여 변신론적 논리의 개발에 주력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랍 철학자들을 중심으로 하는 물질론자들은 우주의 근본원리가 물질성에 있다는 것을 포기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 글의 서두를 장식한 골방철학자 칸트는 근대의 경험론적 사유와 이성론적 사유의 의미를 수용하는 동시에 그 한계를 극복하기 위하여 고심하지만, 두 사상 체계에서의 문제들을 자기 자신의 철학 체계 속에 해결하지 못한 채로 남겨두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물론 칸트 직전의 철학자들, 특히 영국의 경험론자들과 프랑스의 이성론자들은 경험과 이성이라는 인식 수단을 내세우면서 보편적 존재의 존재 여부 및 인식 가능성에 대하여 부정하거나 확신하는 입장을 각각 개진하였다. 그러나 칸트는 이러한 모든 시도를 넘어서서 보편 존재에 대한 이론적 논의의 가능성을 유보하는 조처를 취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칸트가 형이상학의 가능성을 부정한 것은 아니다. 그에게 신은 누구보다도 위대하고 불가해한 존재였으며, 불가지론에 의거하여 신은 우리 인식 피안에 자리잡고 있는 보편적인 존재이며 그런 연유로 우리는 어떻게든 그를 인식하려고 하지만 거기에 다가설 수는 없는 상태에 있다. 칸트는 신이라는 형이상학의 가장 우위의 핵심에 자리잡은 존재가 인간의 하찮은 이론에 이리저리 논파되는 걸 꺼려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적어도 두 가지 차원에서의 형이상학, 즉 자연형이상학과 도덕형이상학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제안한 선험철학, 특히 경험의 가능성 조건들에 대한 인식논리적 탐구들은 사실상 물자체의 문제와 이성 요청의 문제를 그대로 방치하고 있다. 이론적인 지식과 실천적인 지식을 구분하는 척도가 되는 경험적 장치들 속에서도 여전히 해결되지 못한 형이상학적 전제들이 무비판적으로 방치되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그것은 칸트가 노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세계를 유랑하지 못한 무경험의 한계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일 테다. 이런 한계성을 극복하려면 무엇보다 경험과 사변이성의 종합이 필요하다. 그래서 필자가 서두에서 말했듯이 ‘공감각적 경험의 패러다임의 개선과, 학문에의 사변이성관의 성숙의 병존’이 앞으로의 학술계의 후학들에게 제1이념으로서 다가와야 할 것이다.



6. 인문학은 진정 죽었는가?

불현듯 이런 생각에 잠긴다. ‘인문학은 죽었다. 과학기술의 진보에만 매달린 골이 빈 사람들은 혹은 배부른 돼지들은 인간을 탐구하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셜록홈즈처럼 식물성알칼로이드를 조사하기 위해 코카인과 모르핀을 자기 혈액에 주사하는 그러한 실천적인 탐구정신을 가진 사람이 몇 되는가? 오늘날에는 문학이 단지 소설이라는 이름으로 폄하된다. 그리하여 진정한 문인들은 자신의 이웃에게 자신이 다만 소설가일 뿐 그 어떠한 책무도 맡고 있지 않다고 주장한다. 더군다나 한국인들은 철학자를 마치 점술가나 역술가 보듯이 취급하여 불쾌하기 짝이 없다. 오늘날의 인문학은 진정 죽었는가?’. 오늘날의 지식인들은 인문학의 죽음을 아무렇지도 않게 구시렁대고 다닌다. 과연 인문학은 역사상 최악의 위기를 맞은 듯싶다. 그러나 이러한 인문학의 위기가 다수의 지식인이 아닌 극소수의 지식인에게는 오히려 만인에 대한 분노와 그에 따른 반동으로서 힘을 실어주며, 요컨대 이런 역설적인 증상은 도리어 난세에 영웅이 생기듯 새로운 대가(大家)를 창출하기 마련이다. 대가의 신출현은 새로운 국면을 빚어내며 난세를 타개하고 새로운 주의(主意)를 생성한다. 가령 2차 대전 후의 프랑스의 실존주의나, 이것의 열풍이 사그라들 때 쯤 다가온 구조주의를 예로 들 수 있다. 좌우지간 이러한 패턴변화는 항시 영웅의 의해 좌지우지되는 법이리라. 그렇다면 우리 현대인들의 철학적·사상적 영웅은 누구인가? 21세기를 대표하는 신지성은 누구인가? 바로 지젝이다. 글쓰는 속도가 생각하는 속도보다 빠르다는 학계의 농담을 계급장처럼 달고 다니는 그는 실로 동유럽의 기적으로 불릴 정도로 금세기 전유럽을 통틀어 최고의 두뇌를 가지고 있다. 지젝의 철학과 사상에 대한 남다른 열정은 그 누구와도 비견할 바가 못 되어서, 6개월을 멀다하고 새로운 저서를 발표하고 있는 중이다. 인종청소가 자행되던 유고내전을 뒤로하고 쏟아내는 그의 저서들이 어느덧 의미 없는 반복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실천적이지도, 그렇게 이론적이지도 않은 그의 말들은 마르크스주의자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가벼웠고 영화이론가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무거웠으며 정신분석가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이론적이었고 정통 철학자라 하기에는 지나치게 임상적이었다. 그런 그를 우리는 어떤 식으로 판단할 수 있는 걸까? 단지 일시적인 유행, 수사의 외양이 화려한 유행철학자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무리일까? 그리고 그러한 판단이 한계 많은 우리의 전형적인 실수였음을 간주하게 된다면 그의 위대한 저서, 지젝을 이 시대의 가장 실천적인 철학자 중 한 명으로 간주하게 만든 책, 그를 존경하게 된 책, ‘시차적 관점’을 읽어봐야 할 것이다. 하여튼 지젝이 논거를 이용하고 풀어내는 방식은 여타 철학자와는 달리 다방면에서 다재다능하며, 이런 특유의 그만의 방식은 21세기 철학이 걸어가야 할 길의 표본을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다. 많은 세계의 학생들이 책을 경원시하고 스크린과 인터넷에 빠진 게 근래의 현실이지만, 오히려 인문학 하나에 몰두하고, 현재 자본시장에 적은 돈만 내면 구입할 수 있는 방대하고 질 좋은 그럼에도 저렴한 저서들을 구입하여 독학하고 있는 인재들의 유비무환은 곧 닥칠 ‘인문학의 새로운 출현’을 예고하고 있다.



7. 인문학의 중심, ‘철학’.

으레 그렇듯 인문학의 으뜸, 제 1학은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철학은 모든 학문 중에 제일 유서 깊은 학문이어서, 철학적인 의제를 탐구하는데서 문화에 대한 고찰을 염두해 두지 않고서는 그 진면목을 발견하기 어려울 것이다. 지금껏 철학이 연구를 주력하는 대상은 뭐니뭐니해도 ‘인간’이었다. 한 인간을 철저히 탐색하고서는, 그 연구결과를 우주의 한 연결고리로 파악하고서는 그 고리로 말미암아 우주 전체를 통괄하는 역사적인 지혜를 얻는 것이다. 그리하여 철학은 문명의 아주 기초적인 제반의 핵심 이른바 인프라라고 할 수 있으며 우리가 이것을 좌시하지 않는 한 인간의 미래는 기필코 어둡지 않을 것이다. 하기야 어설프게 자신의 미래를 암중모색하는 수많은 청년과 처녀들이 상존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항시 그들의 자아와, 그에 대립하는 불가해한 난제들의 연쇄로 점철된 미래의 형상은 마치 창가에 비추어지는 풍경처럼 필수불가결하게 엮여지기 마련이어서, 우리는 그러한 오롯하게 상보적인 병존의 관계를 이항이라는 뚜렷한 이분법으로 구분할 게 아니라, 좀 더 항구적이고 거시적인 관점에서 이런 양분의 귀결을 하나의 변용하는 패러다임으로 결정화시켜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삼라만상의 엄존함에서, 무엇보다 그것이 있어야하는 근거를 파헤치는 데 주력을 가해야 한다손 치면, 그것이야말로 ‘철학함’이 강구해야하는 문제의식의 근원이므로, 우리는 요컨대 사유라는 도정의 결과가 임박하기 전의 일련의 도상의 연쇄가, 그 과정 중의 일희일비하는 관찰자의 관념의 유추 즉 연결고리로 온갖 번뇌와 사고를 순환시키는 과정에서, 과정으로서의 의미와 가치를 생산하고 역사적 현실로써 하나의 입체를 완성시키는 것이리라. 이로써 우리는 철학이란 무엇인가, 하는 의미론적인 요소에 대해서 상정해보았다. 우리가 철학을 우리의 중심에 두고 즉 밑바탕에 하고 세상과의 전투에 임할 때 우리는 두려움과 공포에 떨지 않고 우리의 이념에 마땅한 과감하고 결단력 있는 행동을 보여줄 것이다. 그리고 나서 앞으로 인류가 나아가야 할 규범과 가치판단에 이바지할 수 있는 학문으로서의 철학은 영원불멸한 인간존재의 표식이 될 것이리라.



8. 민족주의라는 ‘대의’의 미명 아래 저질러지는 당위적인 살인.

국가권력은 전쟁을 유발하며, 그 전쟁 중의 살인을 민족주의라는 이름으로 정당화시킨다. 그러나 살인은 어떠한 경우라도 정당화 될 수 없으며, 그런 연유로 필자는 국가의 이런 살상 가능성을 고발하려고 한다. 민족주의라는 대의를 바탕으로 살인을 공고히 한다면, 인류는 앞으로도 살인을 밥 먹듯이 저지를 것이리라. 민간의 살인을 심판대에 올려놓고 단죄하려는 무수한 법률가들의 기만과 위선, 그리고 가식은 이제 ‘세계의 법’이라는 미명 아래 국제적인 규모의 법으로서 ‘전쟁 기계’들의 살인조차도 진정 ‘일급 살인’으로 규정하고 거기에 단연코 당위성을 부여하지 않거니와 그러한 살인 행위를 엄격히 처벌하며 그로 인하여 모든 국가들은 예비 하에 무장해체를 전제하여 더 이상 살인이 만연한 세계를 일소에 부쳐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전에 앞서 우리는 한국사회에 만연한 분열의 형태를 진단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9. 철학은 이러한 시대적 분열에 어떤 식으로 관여할 수 있는가.

근래 들어 철학에 대한 관심은 다른 어떤 분야 못지않게 높은 것 같다. 철학에 대한 목마름이 예사롭지 않은 탓이다. 그 뿌리는 여러 갈래를 통해 알아볼 수 있을 것이지만, 크게 보아 다음의 몇가지로 나누어 생각해볼 수 있다. 첫째, 한국사회를 둘러싸고 있는 분열이다. 일찍이 헤겔은 철학에 대한 욕구의 근원을 ‘시대의 분열’이라는 한마디로 웅변한 바 있지만, 한국사회를 옭죄고 있는 그 분열은 깊고도 넓고 또 오래되기도 했다. 어떻든 그 분열의 골을 메우고 그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삶에 대해 조금이라도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은 자연히 철학자가 되지 않을 수 없는 실정이다. 그들은 그 분열의 현상을 보다 과학적으로 따져보고 보다 깊이 그 뿌리를 헤아려보기도 하며 또한 그것을 치유하기 위한 실천적 모색을 시도하면서 적지 않은 가슴앓이를 경험했다. 이 과정에서 극명하게 드러난 것은 철학이 현실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한편으로 현실에 대한 무관심을 철학의 위안으로 삼고 있었던 종래의 강단 철학에게는 커다란 충격이자 정체성의 위기를 가져다주기도 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철학과 현실의 지나친 밀착은 새로운 문제점을 남겼다. 철학이 현실변혁의 강령적 수준으로 이해되어 이데올로기로 교조화된 것은 분명 철학이 갖고 있는 고유한 비판기능의 많은 부분을 상실케 했다. 이러한 경험은 철학과 현실에 대한 보다 풍부한 이해가 필요함을 절감케 하는 계기가 되었다. 철학이 한낱 구름잡는 개념의 유희가 아니며 또한 철학이 반성해야 할 현실이라는 것의 외양도 그리 호락호락 하지만은 않다는 것이다. 둘째는 첫번째 문제와도 연관된 것인데, 한국사회의 변화속도와 그것을 진단하기 위한 갖가지 정보의 홍수이다. 예를 들어 누군가는 지난 80년대를 백가쟁명의 이데올로기가 난무한 사회과학의 시대라고도 말한다. 갖가지 언설들이 횡행하면서 홍수처럼 쏟아져 나온 사회과학서적들을 매도할 수는 없다. 어떻든 그 책들은 사회에 대한 우리의 인식의 많은 부분을 구체화시켰다. 사회를 이해함에 있어 과학적 방법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이제는 제멋대로의 허튼소리가 예전처럼 쉽게 먹혀들어 가지는 않는다. 이른바 과학적 연구의 전반적 수준을 매개하거나 그 그물에 걸러지지 않은 거친 언어들은 설 땅이 없게 되었다. 하지만 과학은 그 자체로 비판의 화살을 넘어서 있는가? 그렇지는 않다. 지난 경험으로 보아 과학이라는 것이 한마디로 싸잡을 수 있을 만큼 단순하거나 일의적인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과학의 언설이 다양할수록 그것들 각각은 고립된 모나드처럼 자기주장에만 골몰하는 새로운 아집에 빠질 수 있다. 따라서 그것들을 전체적 관점에서 교통정리하거나 혹은 그 근본뿌리에서 반성하고 비판하는 일이 필요하다. 이러한 일은 역사적으로 볼 때 언제나 철학의 몫이었고 또 철학만이 할 수 있었다. 셋째로, 동서냉전의 해체와 동구권의 몰락은 철학에 대한 관심을 새롭게 환기시키고 있다. 인간해방이라는 거창한 명제가 퇴색한 반면 보다 구체적으로 인간이 살아가고 있는 생활세계, 환경세계에 대한 관심이 크게 일고 있다. 쇠그물처럼 단단하게 짜여져서 돌아가는 사회의 톱니바퀴, 도처의 치열한 경쟁만이 삶을 보장하는 숨막히는 일상, 엄청난 정보의 홍수 속에서도 교통의 벽을 느끼는 원자화된 개인의 고독. 그런 현대사회의 비인간화와 소외문제는 이제 철학의 가장 중요한 문제 중의 하나가 되었다. 나아가서 생태계의 파괴, 심각한 공해문제는 인간의 보다 근본적인 생존 자체를 위협하는 수준에까지 이르렀다. 이것은 전통적인 인간-자연의 관계에 대한 총체적인 반성을 요구한다. 현대의 기술문명이라는 것은 많은 부분 자연과 우주에서의 인간의 자기중심적 역할을 강조하는 데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극단적으로 그것을 인간의 주관성의 산물로 매도하면서 주관성을 넘어서 자연으로 회귀하는 것이야말로 현대의 무든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관건인 양 말한다. 그 방법도 어려운 것이지만 인간주체의 자기반성이 포기되어야 할 대상인지는 의문이 따른다. 어떻든 한국사회도 근대화의 과정에서 제기된 문제를 이제는 문명비판의 차원에서 검토하는 단계에 이르렀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현대의 ‘철학함’이 이러한 한국사회의 시대적 분열에 어떤 식으로 관여할 수 있는 지에 대해 짚고 넘어가야 한다. 우리의 현대사유로서 한국사회의 분열을 구체적 방법으로 타진케 하는 실천적 방안을 모색할 수 있는가? 우리 정신의 ‘관여’로 하여금 단지 이론적인 측면에서가 아니라 실천적 측면으로서의 이러한 시대적 ‘교착’상태를 어떤 고안책으로 말미암아 벗어날 수 있겠는가? 방법은 많다. 또한 해결책도 가없이 널려있다. 다만 우리가 이것으로부터 도피함으로써 얻어질 수 있는 ‘무구한 사회질서의 파괴’는 필자가, 그리고 여러분이 목도할 바람직하지 않은 앞으로 다가올 한국사회의 새로운 패러다임, 바로 그것이다. 하기야 대부분의 학도들은 사회의 무모순성 즉 정합성을 ‘사회의 순탄성’으로 생각할 게 아니라 ‘사회에 응집해있는 교착’으로 이해할 것이리라. 이는 아직도 청년 실업률이 극에 달해 있어 미래를 예비하는 학도들에게 모종의 암울한 현실로 다가오는 강밀한 사회의 공시(共時)적 정지 상태이리라. 우리는 하나의 해결책을 제시함에 앞서 우리의 내부에서부터 정신적인 갱생 즉 개혁의 실마리를 풀어나가고 단지 일시적인 혁신에만 매달릴 것이 아니라 확실하게, 명석하게 한걸음 진일보할 수 있는 ‘정신의 구조적인 전환’을 단행해야 할 것이다. 무릇 단적인 사태의 전회는 거기에 계열화되어 있는 다른 사태들 그리고 이것을 총망라한 ‘사건’이라는 구조적인 개념을 일거에 전회할 수 없다. 그러나 다방면에서 명약관화하게 거대한 획을 그음으로써 정신 곧 사건에 판명하고 충전적인 혁명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면 말할 필요 없이 우리는 일신(一新)에 다가서는 것이리라. 그리하여 우리가 내부로부터 이 딜레마를 극복하고 사회를 분열시키는 핵심을 사로잡을 때 우리의 철학함이 진정으로 사회에 ‘관여’하게 되는 것이다. 이로써 이 문제는 일망타진되었다. 다음으로 우리는 범세계적으로 비단 국지적인 측면에서, 그러니까 지엽적인 관점으로서 한 국가-대한민국만을 점검할 것이 아니라 차라리 범세계적인 지정학적, 정보통신적 측면도 함께 고려해야 할 것이다. 이리하여 우리는 다음 장, 국제적 윤리의 차원으로 넘어가본다.



10. 전쟁 곧 대량살인의 부재를 목도한 전세계에서 ‘인간 윤리의 괄목적 성취’는 어떤 이름으로 규정지을 수 있을 것인가.

살인은 복수살인을 부른다. 여기에서 복수는 復讐나 復讎를 의미한다. 쉽게 말해 살인은 또 하나의 살인을 부르며, 그럼으로써 점차 누적된다는 것이다. 뜻이 어떻든 살인은 반향을 즉 반작용을 부른다. 위의 명제를 보면 알 수 있겠지만, 필자가 이 단락에서 이루고자 하는 것은 ‘살인의 부재’에 당면한 인류와 그 동시에 윤리의 괄목적인 진보이다. 대의가 어떻든 명분은 휴머니즘을 바탕으로 해야 할 것이다. 필자는 인류애로 가득 찬 유토피아적 사회 창건의 정의를 광정하고자 하는 게 아니다. ‘휴머니즘’을 전제로 한 사회를 이룩하려면, 우선은 ‘휴머니즘’의 정확한 뜻을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휴머니즘’이라고 하면 흔히 ‘인간주의’ 혹은 ‘인간애’라고 옮기는데, 원래는 그런 뜻이 아니고 ‘휴머니즘’은 ‘휴먼인 것’을 강조하는 말이다. 휴먼은 라틴 어로 '후마누스(humanus)'이며 ‘후마누스’는 물질인 물이나 동물인 개와는 달리 인간에게 고유한 것, 즉 ‘인간적’이라는 뜻이다. ‘인간적’이라는 형용사는 일본에서는 다르게 쓰이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면 필자가 친구와 술을 마시고 취해서 “아, 내일은 학교 가기 싫다”라고 말하면 “너도 꽤 인간적이네”라고 말한다. 평소 학교에 결근 한번 않할 만큼 근면성실한 필자인데 알고 보니 꽤 인간적인 사람이라고 칭찬을 했을 테지만, 술에 취하는 것은 전혀 인간적인 일이 아니며 오히려 동물이 된 경우이다. 원숭이도 술에 취하기 마련이다. ‘인간적’이라는 말은 동물과 구별되는 인간만의 특징을 나타낼 떄 사용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바로 ‘언어를 이해하고, 언어를 사용하고, 언어로써 살아간다’는 것이다. 인간 이외의 다른 동물에게도 언어가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지만, 동물에게는 음성기호가 있을 뿐이며 엄밀한 의미의 언어는 없다. 분명 동물들도 명확한 의미를 가진 음성기호를 사용해 커뮤니케이션을 한다. 인간도 그 동물의 음성기호를 알면 이를 이용해 동물과 어느 정도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있다. 또한 동물에게는 듣기 능력이 있어서 인간의 단순한 명령을 음성적으로 듣고 음성기호로 파악해 그대로 행동한다. 개나 고양이를 길러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일 것이다. 원숭이는 선천적으로 음성기호를 내재한 채 태어나는 데 반해 인간의 언어는 일생 동안 배우고 터득해 가는 것이다. 사전이 없는 인간의 일생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다. 또한 사색이 깊어지면 사전에는 없는 새로운 술어를 만들기도 한다. 우리는 평생에 걸쳐 언어를 습득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언어적’이라는 것이 가장 인간적인 것이다. 따라서 ‘휴머니즘’의 첫 번째 의미는 다름 아닌 ‘인문주의’ 즉 인문학의 정진인 것이다. 따라서 휴머니즘의 효시는 당연지사 ‘언어적 계발·인문학적 진보’ 즉 인간 정신의 상승이며, 그러므로 우리는 전적으로 휴머니즘을 제반으로서 윤리적 최고선(最高善)을 지향해야 할 것이다. 만일 그게 가능하다면 또 하나의 인간존재가 경원시 하지 말아야 할 게 있다. 이윤추구에 대한 모럴해저드에의 반발의식 그것이다. 오늘날에는 국제적 대기업이 재화와 서비스의 상위부문부터 하위부문까지 온통 점령하고 있는 상태라, 이렇게 가다간 중소기업과 영새상인들은 쑥대밭이 되고 이른바 부자는 더 부자가 되고 가난한 자는 더 가난해 질 것이 자명하다. 이러한 ‘이윤추구에 대한 모럴해저드’를 사전에 예방하려면, 국가가 시장 방임주의에 그 방향성을 의탁할 것이 아니라 시장에 대한 적극적인 개입을 지향해야 할 것이리라. 그리하여 빈부격차를 대폭 줄이고 빈민을 위한 무상교육을 지원하여 동시에 교육격차도 줄여 모든 시민이 휴머니즘에 경도될 수 있도록 적극 조치를 취해야 할 것이다.





바야흐로 전쟁의 세기였던 20세기가 막을 내렸다. 이제는 더 이상 상대방의 머리에 총구를 겨누지 않는다. 미상불 ‘대량살인의 부재’를 맞닥뜨리게 된 것이다. 우리는 더 이상 오늘날 생명의 위협을 받지 않는다. 최소한 21세기 이전까지 인류는 처음에는 잔인한 자연에, 나중에는 가공적인 인위의 힘에 의해 불안에 떨며 살아왔다. 그러나 이제는 보편적인 안전의 윤리가 자리 잡았고 더 이상 인간은 무서워할 것이 없게 되었다. 이제 ‘인류 일반’이 봉착한 숙제는 다름 아닌 ‘윤리’의 문제이다. 근래 들어 윤리에 관한 정치적 저서가 유명세를 타는 기이한 현상을 목격할 수 있는데, 이는 다름이 아니라 돈의 시대에 무엇보다 윤리가 더 중요한 삶의 요소가 되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우리가 더욱 더 도덕적인 인간으로서 도전적으로 정진하는 자세에 몰입하려면 무엇보다 휴머니즘의 유위변전함을 태양의 직사보다도 더 명약관화하게 직시해야 한다. 해서 사르트르가 말했듯 인간은 철저하게 ‘의미생산’과 ‘역사형성’의 주체이다. 실천적 유기체의 자격으로 자신의 물질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주위의 물질세계와 끝없는 긴장관계를 맺는 한편, 그 과정에서 역사형성에 기여하기도 하는 주체인 인간이, 우연히 그 물질세계에서 같이 살게 된 다른 인간들과 더불어 또 다른 역사형성의 주체인 집단을 어떻게 형성하게 되는가를 어떤 시대의 ‘개인’보다도 더 강경하고 심층적인 입장에서 경험하여 도출된 결론을, 정밀하고 논리정연한 연역적 접근에 의거해 판단해야 할 것이리라. 따라서 평면적 인간관계로부터 하나의 구조를 갖는 입체를 구축하고, 이 입체를 역사적 운동 속으로 밀어 넣어 그 동적 관계, 즉 역사적 인간학을 확립하는 게 우리 실존의 ‘관건’인 것이다. 이러한 사르트르적 현대사유 즉 역사정 도정을 향해 ‘윤리의 법칙’ 하에 전진하는 것, 거기에서 ‘현대윤리의 괄목할 만한 성취’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이 장의 판명한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는 것이다.



11. 20세기 변천사에서 이끌어낼 수 있는 ‘21세기적 의미와 가치’의 규범.

20세기는 급격한 세계의 정치변혁의 한가운데 서 있는 ‘사르트르’의 세기였다는 건 재론의 여지가 없는 자명한 사실이다. 파시즘도, 스탈린식 공산주의도 심지어 마르크시즘과 레닌이즘도 모두가 사르트르의 손아귀에 있었다. 이렇게 한 개인이 모든 분야와 부문을 총체적으로 고려하고 관조하고 있다는 유례없는 사실은 확실히 전대미문의 것이었다. 우리는 이런 사르트르의 실천 이른바 20세기의 역사로부터 어떤 결론을 도출해낼 수 있는가? 20세기가 ‘정치’로 완전하게 규정지어 진 시기였다면, 21세기는 ‘자본’으로 완전하게 규정된 세기이다. 이 ‘정치’와 ‘자본’ 사이에는 어떠한 역학적 상관관계가 작용하고 있는가? 최첨단을 달리는 기술과 정보통신의 사회에서, 심지어 스마트폰에 세계 지정(地釘) 전체가 3D영상으로 나타나고 있는 이 확고부동한 과학이라는 규범으로 결정지어지는 이 시대에서도 ‘철학과 사상’의 결핍은 그 어느 때보다 눈에 띈다. 하기야 방만한 MB가 글로벌적 소통의 편만성의 중요성을 새삼스럽게 강조하며 영어 일변도의 제도권 교육이란 카드를 제시했고, 그로 인해 인문학의 ‘변증술’의 위세 소위 ‘한글을 표상으로 하는 사유기법’의 위축은 불 보듯 뻔한 사태였고, 결과적으로 한국인의 정신적 깊이는 점점 엷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로써 ‘사물과 현상’에 대한 단편적인 기술적 접근은 진보한 반면, 도리어 다방면에서 결산한 결론을 대조하여 꼼꼼 분석하여 총체를 걸러내는 능력은 후퇴하게 되었다. 인간은 행동하지만 거기에는 어떤 의미와 가치도 부여할 수 없는 요컨대 인간성의 포커페이스 시대가 도래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주장한다. 우리는 누구보다 사학자적인 관점에서 과거를 거울로 삼음으로써 미래를 그려나가야 된다고. 과거를 변증법적 로고스로서 교묘하고 정치하게 분석하여, 미래에 대한 의미와 가치를 반영하는 거울로 사용해야 한다고. 요컨대 과거와 미래 사이의 동질성을 철두철미하게 파악함으로 인해 생성하는 그 교점, 즉 ‘철학’이란 표상으로써의 세계를 발견해야 한다고. 이리하여 우리는 철학을 모든 분야를 통괄한 핵심규범으로 소용하고 그것을 눈금으로 하여 ‘21세기적 의미와 가치’의 규범을 점진적으로 계량해볼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철학이란 무엇인가? 어떤 사람들은 철학을 사고(思考)가 태어나고 사라지는 곳, 체계들이 세워지고 무너지는 동질성의 장소로 생각한다. 다른 사람들은 철학을 우리가 항상 자유롭게 취할 수 있는 모종의 태도라고 생각한다. 또 다른 사람들은 철학을 문화의 한정된 한 분야로 여기기도 한다. 우리가 보기에 그런 철학은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형태로 생각하든, 과학의 한 그림자 혹은 인류의 배후세력 등으로 표현되는 그런 철학은 실체화된 추상에 불과할 따름이다. 실제로 여러 철학들이 있다. 혹은 그보다는 오히려 한정된 한 상황에서 그 사회의 전반적 움직임을 표현해주는 하나의 철학이―왜냐하면 하나 이상의 철학이 동시에 살아남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있을 따름이다. 그래서 그 철학이 살아 있는 한, 그것은 동시대인들의 문화적 배경으로 소용된다. 철학이라는 이 당혹스런 대상은 서로 분명히 구별되는 여러 양상 하에 나타남과 동시에 그 양상들을 끊임없이 통합시킨다. 이리하여 이런 식으로 통합된 양상은 하나의 규칙을 생산하게 되며, 이는 곧 규범, 즉 21세기의 ‘철학함’의 방정식을 공고히 다져준다. 이로써 이 장도 아스라이 막을 내린다.



12. 이 시대에 철학사상은 과연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아인슈타인은 하나의 물체가 하나의 시간에 하나의 공간에만 존속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했다. 이는 다른 차원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방증한다. 아인슈타인의 이러한 논증은 무엇보다 우리의 인생은 단 한 번의 시공의 재현의 연쇄에 불과하다는 걸 증명하고 있으므로 우리는 우리의 삶에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삶은 그러므로 고귀한 것이다. 단 한 번뿐인 생, 그 생에 목도하여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가장 보편타당하고 합리적인 방법은 돈을 배격하고 자신의 본질을 사는 것이다. 자신의 성격, 특성, 특질을 지향하며 자신의 삶에 대한 열정에서 솟아나오는 근원을 포착하고 해부하여 재조립하는 것이다. 들뢰즈의 표현을 빌리자면, 코드화해서 재코드화에 들어가는 것이다. 들뢰즈야 위대한 대철학자라 할 수 있지만 그는 스스로 삶을 포기했다. 그 자살사건이 자신의 사상이 패배했다는 데서 나오는 좌절에서 비롯된 것인지, 아니면 자기 철학의 정점에 도달하여 모든 걸 깨닫고 자살한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어쩌면 들뢰즈는 자신이 현대철학의 거두로서 너무나 영향력이 커졌기 때문에 자신의 모든 것을 후학에게 물려주려는 임무적 발로가 심층적 원인인지도 모른다. 좌우지간 나도 언젠가는 자살로써 생을 마칠 것이다. 왜냐하면 쇼펜하우어가 그랬듯 인간이 동물과 상이한 점은 오로지 자신의 삶의 종말을 자유의지로써 선택할 권리를 갖추고 있다는 점이라 천명했으니, 그가 비록 위대한 철학자는 아니었지만 그의 그러한 자유의지적 선택설은 훌륭한 것이었다. 물론 실험적인 형태는 아니었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나 또한 단독적인 사유로 말미암아 그러한 결론에 도달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쇼펜하우어를 위대한 철학자라고 찬양하는 짓은 정말 별 볼일 없는 학자인 체 하는 얼간이들의 짓에 다름 아니다. 오히려 내가 독보적으로 존경하는 철학자는 각성제 코리드란을 과량복용하면서 제정신이 아닌 정신적 과열의 상태에서 미칠 듯이 자신의 대저서, 즉 세계철학사에서 가장 위대한 ‘변증법적 이성비판’을 집필한 사르트르이다. 사르트르는 최고의 철학을 수립/설계하기 위해서 착란에 빠져, 한 명의 광인이 되면서까지 자신의 대사상을 완성했다. 그에게 진리를 구하는 길 즉 지적 도정의 끝자락에 도달하는 길 외에, 그 가외에 것들은 아무 것도 소용없는 것이었다. 오로지 철학사상, 추상적인 개념과 관념, 급진적 사회주의만이 그를 경도시킬 수 있는 목적론적 알레고리였다. 그는 철학을 함으로써 시대를 뛰어넘으려고 했고 현상 저 너머의 세계 이른바 인간조건 피안에 서서 우리가 보지 못한 어떤 것을 잡으려고 자신의 육체와 정신을 다 바쳐 비공시적으로 모든 지식을 무불통달하여 일침을 놓은 것이다. 그에게 철학이란 자신의 삶의 이유였고, 삶을 산다는 것 즉 철학한다는 것은 모든 시민들 위에 서서 위대한 자신의 이데아를 구축하려는 일련의 시도였다. 그러한 정태적인 동화작용이 어떠한 결과물을 도출해냈는지는 일단 넘어가기로 하고, 필경 그의 사상체계의 원류가 되었던 시발점을 우리는 분해하여 분석해볼 필요가 있다. 그는 극도의 이기주의자였다. 이것은 에고이즘 지향성의 위대한 표본이다. 이기주의란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게 아니라 당당하게 자기 권리를 주장하며 남에게 자신을 적절하게 알리는 것이다. 그러니까 자신의 본질을 사는 것이 바로 에고이즘이 창도하는 가장 중요한 핵심주제이다. 여하튼 사르트르는 차가운 지성을 중요시했다. 차가운 지성이야말로 냉정/냉엄하게 감정을 배제한 채 인간이 아닌 신의 눈으로 인류를 내려다보며 원지적으로 분석·해명하는 일이다. 하기야 신의 그릇된 투사가 인간의 운명을 조작할 수는 있겠지만 사르트르가 원한 건 조작이 아닌 조정이었다. 어렴풋한 시의적절한 조정이었다. 이는 운명을 방기하지 않은 채 자기 삶을 주체적이고 동태적으로 살아가려는 한 개인의 생철학의 참여에 대한 파노라마를 우의적으로 표현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 철학을 위한 철학을, 회의를 위한 회의를 변증법의 지양의 태도가 제1학으로서 선행되어야 할 것을, 따라서 존재론적 차이(존재자와 존재의 차이)가 필멸하는 사상의 구도문의求道文意로써 점층적, 시나브로 지양의 움직임에 찬동하는 걸 스스로 금 자행해야 할 것이다. 어떠한 문제의식이든 방향의식이든 철학사상의 영역에서는 귀일한 쪽으로, 크게 보아 삼라만상과 전우주의 변용은 진리, 진리란 오직 하나밖에 없는 법이어서 단지 하나의 진리로써 테제되는 것이다. 요즘과 같이 물리와 사적 유물론이 판치고 있는 과학의 시대에 관념이란 현실과 동떨어진 무소불위의 철학론으로 치부하기 십상일 게다. 그러나 철학은 시대가 흘러도 진일보에 진일보를 거듭해 찬란하게 무수한 진보의 연쇄의 일가를 이루므로 만년이 흐른다 해도 철학은 모든 학문의 황제이자 최고의 1학으로서의 위상을 꿰찰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철학을 생각하는 태도이다. 유태인이 어떻게 세계 최고의 집단으로 각광 받으며 온세계의 부와 권력을 손에 넣은 줄 아는가? 그들은 인간을 연구했기 때문이다. 즉 인간에 대한 구명에 대한 심원한 열정 때문이다. 유태인은 결코 인간의 탐구에 대한 문제를 좌시하지 않았거니와 무엇보다 진리를 찾아나서는 데 힘을 아끼지 않았다. 그게 바로 유태인의 승리 비결이며 그들이 기필코 패배하지 않는 이유의 근본이기도 하다. 그러나 첨단을 달리는 21세기에 인문학은 버려졌으며 그것의 왕이라 할 수 있는 철학은 내팽개쳤다. 이제 기술을 연구하는 데 정력을 소비한 나머지 사유를 원하는 인간은 찾아볼 수 없는 오늘에 이르렀다. 이런 시대에 철학의 존속은 과연 그 의미가 있는 것일까? 온누리에 이미 기술에 대한 찬양이 과유불급이라는 금언을 파괴하고 광기에 사로잡힌 채 날뛰고 있는 이 시점에서 철학사상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우리는 기술이 우리를 곧 지배하게 될 날을 기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게 현실이다. 기술이 우리를 지배하고 우리는 스펙경쟁에 시달리면서 기술적인 인간, 포스트 모더니즘적 표현을 빌리자면 인간-기계가 되어 영혼도, 정신도 남지 않은 동물보다 못한 존재가 될 것이다. 기술은 이미 충분히 성장하고 성숙했는데도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어서 과학은 점차 팽창해나가고 인류는 부유함에만 정신이 팔려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과연 이 시대에 역사를 진지하게 연구하는 사가가 있을까? 주식상장이 폭발적으로 코스닥에 이루어지고 있는 현대에 한국이 나아갈 방향은 무엇일까? 한국의 시대적 분열은 어디에서 비롯됐으며 그 시발점의 맹아는 어디에서 제창되었는가? 그리고 신자유주의시대에 아직도 고색한 마르크시즘과 레닌즘이 병존해야할 의미에 재론의 여지를 두어야 할 합당한 근거의 착상이 지난하게 존속되어야 할 화두의 한 궤라 할 수 있겠는가? 하기야 문필가들과 철학사상가들은 아직도 사회주의의 시도가 성공해야 할 합법칙적 근거가 있다고 자부하곤 한다. 그러나 그러한 자부심이 어쩌면 해가 될지도 모른다는 어두운 사실, 즉 그 화려한 이론의 배후에 엄존하는 사실들을 나는 어찌됐건 밀고해야겠다. 그들은 사상이 굶어죽는 아이보다 먼저라고 생각하는 족속들이다. 요컨대 촘스키가 그러하다. 촘스키는 사회주의의 승리를 기원하면서 리무진을 타고 고급 에스프레소에 와인을 들이킨다. 그는 대표적인 부르주아지식인으로써 자신의 사회주의로 대중을 선동하여 인기를 한 몸에 얻고 있는 변절자이자 위선자이다. 그러한 위선자의 무분별한 언동의 자행을 그저 수수방관하고 있어야 할 필연적으로 당위적인 이유의 내용이 사회 성원들에게 선이해(Pre-understainding)돼야 한다면 이것보다 이 시대정신의 비극을 나타내는 넌센스한 사유방식에 엿을 먹이고 싶다. 예전의 글에서 필자가 공리주의에 엿을 먹였듯이 이러한 몰염치한 사고방식에는 남자의 성기가 우뚝 서서 엿을 먹이는 게 지당한 전제조건일 터이다. 모름지기 지성인이란 개인 한 명 한 명의 인간 실존을 지향해야 하며, 그런 이유로 사르트르의 실존주의가 엄청난 유행을 누린 원인일 것이거니와 사르트르의 대저서 '변증법적 이성비판’이 헤겔을 뛰어넘어 마르크시즘과 실존주의를 결합하려는 시도는 역사의 유례가 없는 대시도이자 인류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한 지식의 전범이며 왜 인간이 철학을 해야 하는 정합적인 증거를 제시한 현대철학의 위대한 표본이라고 예찬될 수 있는 것이다. 필자가 철학을 하는 이유는 가언적인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건 정언적인 기법의 기저에 근접한 엄격한 일종의 형식적 기조이다. 이리하여 이 형식은 어떤 감언이설에도 넘어가지 않는 지식인의 자존심과 배타성의 배격행위의 당위적인 지향성을 아울러 세계의 한 가운데서 모든 걸 통괄하여 우주의 실체를 논리적인 문법으로써 해명하고 철두철미하게 그 무모순적 개연성을 근거 짓는데 모든 공교로운 결단코 지리멸렬하지 않은 핵심을 정석하는 데 가까운 기술적인 접근의 한 원형일 것이다.

철학은 날로 날로 성장하는 학문이다. 최초의 철학자 탈레스로부터 현대 최고의 철학사상가 지젝에 이르기까지 철학의 역사는 아주 유구하고 국가보안법보다 치밀하고 첨단기술보다도 정교하다. 철학은 경험으로부터 발견해내는 귀납법적 접근 기법과, 하나의 명제로부터 도출해낸 사실을 증명하는 연역법적 접근 기법으로 나뉜다. 미상불 목하 철학의 화두는 사변이성을 도구로 하여 도출해내는 연역법적 시도가 주류를 이룬다. 그래서 포스트모더니즘은 책상에 앉아서, 마치 셜록홈즈가 책상에서 모든 걸 추리해내고 범죄자를 체포하듯이 들뢰즈가 책상에서 철학의 전단계부터 폐막에 이르기까지 부정변증법으로써 수미일관하게 총체적인 철학사상이론을 내놓을 수 있는 것이다. 과거 그리스·동방 철학은 주어진 지식의 기록이 없어서 불행하게도 귀납적 접근을 시도할 수밖에 없었고 사변이성의 적절한 활용도 전무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온갖 다방면의 지식이 날뛰는 시대이니만큼 우리는 사방팔방을 종횡무진하면서 명약관화하게 총체적인 이론의 겸양과 오묘한 지혜의 정수의 달콤함을 라캉의 어법으로 말해서 ‘향유’할 수 있는 것이다. 전반적으로 삶의 지혜를 추출하려면 무릇 제반 지식이란 질료가 있어야 하는 법이며 그로 말미암아 우리는 총체적 진리라는 명증한 형상을 여하든 명정이 우리의 선험적인 영혼의 시공의식의 층위에 아로새길 수 있는 것이리라.

그러나 문학은 죽었다, 사상은 죽었다, 고 혹자들은 무분별하게 오류를 범하는 유언비어를 유포할 수도 있을 것이며, 필자는 그런 덜떨어진 사고방식을 일자로 통일시키고 괴멸시킬 자신이 있다. 비단 철학만이 우리에게 미래를 제시하는 건 아닐지 몰라도 철학은 우리에게 과거의 과오를 후회하게 함과 동시에 현재를 즐겁고 가치 있게 살 수 있는 일련의 방법을 제시하거니와 미래의 전형 소위 유토피아의 패러다임을 교교하게 정설로 굳힐 수 있는 이러쿵저러쿵한 진실의 도식을 철저하게 그려낸다. 하기야 오늘의 사회는 썩고 부패할 대로 부패했다. 학벌과 재산의 세습과 상속이 전례 없이 과감하고 다다하게 자행되고 있고 우리는 이 현실 그러니까 비참한 망실의 광경을 뚫어지게 응시하면서 그 어떠한 사회투쟁도 불사하지 못하고 유보한 채 회환에 가득 차 노동-기계로서 인간이라 할 수 없는 개 같은 생을 산다. 그런데 필자가 나서서 철학을 하라 말라 헛소리를 늘어놓는다면 그것은 당신들에게 소귀에 경 읽기에 다름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이런 다급한 상황일수록 우리에게 철학사상은 그 여하한 보배보다도 소중하고 감사한 것이리라. 병이 걸린 걸 알면 반은 나섰다고 보는 의학계의 말처럼 우리 또한 현재 사태를 진찰하고 그 병을 알아채면 즉 우리가 프롤레타리아로서 착취당하고 보수 없이 부르주아에게 봉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하는 것만으로도 반은 승리의 계열에 동참한 것이다. 그러니까 새로운 등위에서 복잡다기한 상황을 해쳐나가며 이 미분화되는 사회의 만화경 같은 불가해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부르주아들의 전횡만큼 사악하고 저속하며 저열한 건 없다. 그들은 우리에게 매스컴이라는 회중시계를 흔들며 우리를 마멸시키려고 작당중이다. 매스컴의 범죄 사건들에 정신이 팔려 우리는 정치에 일어나는 여러 중요 현상들의 실체를 두루 포착하지 못한 채 그 배후에서 일어나는 여러 파렴치한 부패와 음모를 지나치기 십상이다. 여러분은 그러한 양태의 노예가 되었는지 몰라도 나는 아니다. 나는 이미 과거의 내가 아니다. 나는 한 번 죽었던 몸이다. 나는 과거의 염세주의자이자 패배주의자가 아닌 투쟁하고 항거하는 한 명의 선진적이고 과격한 급진적 사회주의자이거니와 영원한 좌파이다. 나에게는 55살 먹은 나이든 어머니가 한 명 있고 같은 연배의 아버지가 한 명 있다. 그들은 직장의 착취 다시 말해 부르주아의 착취에 시달린다. 왜 나의 부모님이 그렇게 당해야 하는가? 그들에겐 힘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없던 힘까지 만들어내는 기적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건 바로 우리가 한 떼로 뭉쳐서 명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른바 신사회주의 혁명 말이다. 과거 프랑스 혁명, 나치 혁명이 그래왔듯 우리 역시 대대적으로 뭉쳐 부르주아의 횡포를 무마시킬 희망을 품어볼 수도 있는 것이다. 역설적인 상황의 도래에서도 그는 결코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희망의 소거야말로 모든 것의 결여를 입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는 사회주의에 매달릴 필연적인 근거를 이미 내재하고 있는 것이리라. 우리를 이끌어줄 유일한 원동력은 오로지 ‘철학사상’ 하나뿐이다.



13. 나의 삶에서 철학이란.

고독했다. 그러나 그 무엇도 나를 구원해줄 수 없었다. 나를 구원해줄 수 있는 건 생각의 흐름을 하나의 결정체로 도약시켜 결정화하는 것이었다. 고독했기 때문에 삶을 사랑했다. 고독함이야말로 나의 존재이유였다. 지적 도정에 매달리는 거야말로 내가 유일하게 이 삶을 사랑할 수 있는 의미론적 혜학이었다. 여러 상황 속에서 일희일비하면서도 나는 정연한 철학사상의 입방체를 구상하여 마침내 개설하는 것이었다. 나는 철학적 글쓰기에 모든 걸 걸었다. 철학은 나의 아버지였으므로 나는 그를 신봉하고 그에게 종속당하기를 염원했다. 나는 사유의 여러 단상들과 편린들을 마치 양탄자처럼 직조하여 하나의 체제를 교묘하게 설립하기를 원했다. 철학자에게 있어 삶이란 그런 것이다. 철학이 곧 삶의 얼개인 것이다. 구조주의적인 관점에서 삶을 관찰하자면 철학만이 삶의 존재론적 당위성을 보장해줄 수 있는 유일한 학문이라고 깨우칠 수 있을 터이다. 비록 사회에서 성원들이 직설화법이 아닌 우회하여 완곡어법으로 대응한다손 치더라도 우리의 사회에선 홉스의 말대로 만인은 만인에 대해 늑대이여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만이 유일한 사회의 진실인 것이다. 그렇다. 삶은 더럽고 지저분하다. 그런 더러운 삶에서 오로지 아름다움을 응시하는 일만이 현자가 걸어야 할 진리의 정석이라 논파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담론은 항상 무익한 것이다. 왜냐하면 더러움을 더러움으로 물리치려는 무의미한 공空적 시도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복수에 대한 복수는 또 하나의 복수를 낳으므로 전쟁은 끊이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헤겔의 변증법이 탁상공론에 불과한 것일까? 하기야 헤겔은 아프리오리하다. 그 점이 그의 매력인 것이다. 아프리오리하다는 건 그만큼 연역법적인 기술적 접근의 저변에 가까운 것이므로 우리는 헤겔이 세상 전부와 요소 하나하나를 논리적으로 분석하려고 했다는 사실에 실소를 금치 못할 수도 있을 것이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겔은 위대하다. 그의 철학은 사변이성과 사변철학을 일대 약진시켰으며 온갖 교조적인 광신과 종교, 신앙을 한방에 종식시켰다. 그러므로 그는 합리적인 관념론자이다. 그는 독일 관념론의 중심에 위치한다. 독일 관념론은 역사상 최대의 지적 조류였고 그 정점에 위치한 그를 나는 사르트르를 제외한 그 누구보다 존경하는 바이다. 그는 글과 사고의 유위변전을 양화시키는 방법론적 체계를 명명백백히 소유한 관념론자였고, 그 누구도 그만큼 정치하게 사물과 현상 그리고 관념에 대해 연구하지는 못했다. 그는 그야말로 철학자의 전형이거니와 학자라면 분명히 따라야할 도를 제시한 위대한 철학자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그가 나폴레옹을 찬양한 것은 정치적 태도의 오판이었을 테지만 그렇다고 20세기의 아리스토텔레스 하이데거처럼 나치즘에 경도되어 소위 파시스트가 된 건 아니지 않은가? 나도 한 명의 철학하는 사람으로서 철학사상이 우리에게 쥐어주는 보배를 존중하고 그것이 일파만파 퍼지기를 원한다. 그래서 나에게 철학사상이란 진정으로 신비하고 고매한 것이며 소중하다. 나는 평생 철학사상을 할 예정이다. 죽기 직전까지 나는 사유의 흐름의 단속을 중단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의 영혼은 영겁하니까.



14. 철학사상의 아포리아

비단 전문 철학자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철학이 있다. 저기 청소부 아줌마에게도 철학이 있고, 저기 공사장 작부에게도 철학이 있다. 그러나 그러한 쾌락을 추구하는 일반인들에게 철학이란 단지 겉멋 내는 유희 내지는 개똥철학의 편린에 지나지 않는다. 필자와 같이 철학과 사상을 두루 표명하는 전문 철학사상가에게 철학이란 삶보다 더 중요한 추상적•관념적인 일련의 박학다식한 체계이며 이 체계 하나를 설명하는 데 마치 사르트르가 그리했듯 3600페이지를 소모할 수도 있는 것이다. 철학자란 이렇듯 위대하고 아스라하다. 필자는 단순히 학문뿐 아니라 미디어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영화를 통해서 근래의 철학사상가들이 시도하는 철학사상과 영화의 결합과 그로 인한 교착상태의 당면과 그 교착이라는 이름의 아포리아를 한 획을 긋는 대오로써 빠져나가는 그런 모종의 우주에 항거하는 자기 기투로서의 이생의 지상의 양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누구나 아포리아에 당착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런 아포리아에서 벗어나려면 층위의 전환 가령 폭풍처럼 격렬한 지적 전회가 필요한 법이어서, 단순히 우리가 무연하게 늘어놓는 수사적 양식의 연쇄가 아니라 폭발적인 지성의 편린들을 총체적인 이론으로, 무수한 부분집합들의 합집합이라 할 수 있는 하나의 큰 그림으로서의 철학을 개설하고 거기에 3차원적인 입체를 구축하여 실존주의와 마르크시즘을 밀어 넣음으로써 그 동안 우리가 극복하지 못했던 마르크시즘의 무노동성과 실존주의의 이기성을 동시에 극복하는 신의 계시와 같은 계기가 여기서 직조되는 것이리라. 무릇 삶이란 매우 힘들고 불가해함과 동시에 빠져나가려면 더욱 옥죄어오는 구렁텅이와도 같이 우리의 정신을 하나 같이 족쇄처럼 그러잡고 있다. 모름지기 철학사상가란 우주의 삼라만상의 상이성의 특성/특질의 일장일단을 교묘하게 추려내어 장점만을 합방하여 사르트르의 ‘변증법적 이성비판’의 시도처럼 신 철학이라는 미명 아래 저질러지는 당위적인 계획적 총체로서의 이론을 명백히/명증이 증명하는 게 우리의 도리이자 본을 두어야 할 위치인 것이다. 하기야 사르트르는 하이데거와 후설이 별로라고 하여 결국 헤겔과 한 판 붙었고, 그와의 사투에서 패배했지만 세계철학사에 빛나는 꽃으로 혁혁하게 아로새겨질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되었다. 혹자는 필자가 너무 사르트르 얘기만 한다 하여 비방할 수 있는 감정을 품을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필자는 이 글의 주제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 기저에서 글의 저변을 철두철미하게 실사구시의 방법론에 입각하여 구성해 나갈 것을 모두에게 맹세하는 바이다. 따라서 타인은 지옥이다. 왜냐하면 글이란 타자가 없이는 존재할 수 없으며 글의 ‘지옥성’을 보여주려면 피치 못하게 타자의 존재를 공인해야 한다. 그래서 명실공히 타자는 지옥이 되는 항진명제가 적절히 성립되는 것이며, 당신이 상정한 과거 여러 명제들과 전제조건들을 일률적으로 창도하려면 단지 소천한 당신들의 사유방식으로서는 무분별한 동태적 파고에 불가능할 것이므로 웬만해서 지식의 연장으로서의 길고 긴 사투 끝의 집적의 적출 외에는 그 어떠한 철학적 글쓰기 방식도 무관하다고 해명해야 할 터이다. 그러므로 관념의, 철학사상의 아포리아에서 빠져 나오려면 일단 ‘전이의 음모론’을 위시하는 게 합당하다. 우리 생에서 전이란 대부분이 우리 삶의 중심인 성을 기반으로 하여 이루어지는데 우리가 어떤 전이를 일으키면 사람의 성욕은 거기 만족하지 못하고 또 다른 성욕의 향유를 위해 ‘전이’이 과정을 두루 거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의 계략, 지략, 음모를 꾸며야 하는데, 바로 성욕을 비정상적으로 팽창시켜 자의식을 과잉 시키면서 일종의 착란에 빠져 미친 듯이 마치 사르트르가 마약성 각성제 코리드란을 입에 다량 쑤셔 넣고 글을 써내려 가듯이 당신도 어떤 것에 취해 가령 보들레르처럼 술, 덕, 시 이 3요소 중 하나에 취해 자신의 진정하고 영지적인 사상을 적출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철학적 글쓰기가 생각보다 그리 어렵다고 유추할 어떤 근거도 떠오르지 않는다고 이 자리에서, 이 지점에서 당당히 논증할 수 있다. 철학에는 정진 외에 다른 가외의 수양 방법은 배제된다. 왜냐하면 정진만이, 교수의 강의를 듣지 않는 독학자의 독학만이 그의 사적 변증법적 유물론의 형태를 유구하고 학구적으로 완성해나가는 논리 정연한 방법이며, 지식을 제반으로 하여 삶이란 미스터리하고 오로지 냉정한 지성으로서의 추리가 요구되는 이 만화경 같은 세상에서 우리는 무엇을 의구할 수 있겠는가. 필자도 지금 이 글을 써감에 있어 저번에 기필코 쓰지 않았던 단어들과 명사들, 수사들을 조심스레, 아주 학술적인 용어들로만 골라서 적절히 선취해내고 입력하고 있다. 어쨌든 이것이 바로 일부러 난해한 글을 주로 쓰는 필자만의 방법론이다. 그리고 많은 독서를 하지 않고 단지 변증법적으로 언어를 연구하여 글의 수준과 예술성과 선험적 가치성을 끌어올리는 이른바 ‘층위의 절대반복과 상승’이 필자만이 가진 교교한 기술력의 보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좌우지간 삶이란 당연지사 개 같고 온갖 비의와 역설 그리고 무의미와 무가치함, 전례 없는 고통의 연속에 의거해 바뀌고 변화/변용한다. 이러한 가벼운 삶을 무겁게 하려면 교양을 쌓는 일이 우선시 된다. 교양이란 제도권 교육과는 엄밀히 다른 진정한 의미로서의 학문이며, 이러한 매력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거기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 당신이 당면한, 내가 당면한 아포리아에서 빠져 나오는 방법은? 간단하다. 책을 읽으면서 대오의 체험을 정신에 구현하는 것이다. 그 순간 당신은 한 명의 도인으로 등극하며, 당신의 정신은 영원불멸을 뛰어넘어 메타적 세계에까지 뻗어나게 되는 것이리라. 감히 남이 범접하지 못한 하나의 전설로 입적하여 들뢰즈의 말마따나 새로운 계열에 동참하는 계기를 창출하는 것이므로 우리가 감히 하지 못할 일이 어디 있단 말인가? 아포리아는 이렇듯 간단하게 해결되는 것이리라.



15. 프롤레타리아를 지지한다.

필자는 본인의 이론 전개를 노정시킴으로써 좀 더 자유분방하고 보편타당한 본질적인 특성에의 귀납적 추론에 입각하여 담담한 필치를 구사하여, 거기에서 말미암아 단일한 의미 규정 형식을 확보할 것을 독자 여러분께 약속드린다. 필자의 펜 끝에 5000만 한국 프롤레타리아의 미래가 걸려 있는 만큼, 극도로 조심스럽게 개론할 것임을 천명하는 바이다. 필자는 극빈층의 무리 이른바 게토의 현실을 직접 겪어 무불통달한 바, 거칠 것 없이 그들의 입장에 서서 그들을 위해 다만 추상적인 감언이설로써 그들이 처한 현실을 해명하려는 뼈 없는 이론가가 되려고 하는 게 아니거니와, 직접 전면에 나서서 부르주아의 행패에 맞서 싸우는 행위자의 자격으로서 그들이 프롤레타리아에게 투사하는 농락의 정수를 포착하고, 사로잡아 그 원죄를 인간 로고스라는 심판대에 세운 후, 그 죄의 불투명성에 이끌리지 아니하여 즉 그 어둠의 배후에 있는 실제적인 죄악을 ‘단죄’할 것이리라. 그리하여 필자는 만무일실함 없이, 인간현실이라는 ‘난제’에서 일희일비하는 5000만 프롤레타리아들에게 더 나아가 ‘다각도로 유추하여 개진한 논리 정연한 삶과 사회에서 보다 정확히 올바르게, 훌륭하게 처세하는 완벽한 방법’을 직설할 것이다. 요컨대 우리 인간 개별자는 제각기 다른 삶의 구도와 궤적을 그리며 제각기 다른 형태로서의 삶을 살아간다. 요컨대 그들 각각은 가지각색의 직업, 취미, 사유재산, 친구관계, 애정관계, 친족관계를 형성하여 단지 개인으로서 한 사회에 자신의 지분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협력적인 인과관계를 생성함으로써 하나의 일가를 이루는 것이다. 그러니 한 명의 개별자의 ‘판단과 행위’가 보통은 사회에 있어 작은 물결을 출렁이게 할 수 있지만 좀 더 드문 경우 큰 파장을 생성함으로써 사회를 뒤흔들어 놓을 수도 있는 것이다. 가령 어린 아이의 사소하고 무분별한 결정은 한 가정 안에서 끝나게 될 시놉시스일 것이다. 그러나 한 치자 이를테면 국회의원의 의사 결정은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원대한 파생실재로서 우리 사회의 진면목을 차지할 것이리라. 한데, 그렇다고 한들 예의 어린아이와 국회의원, 즉 전자가 후자보다 생명의 가치의 심원성이 부족하다고 치부할 수는 없는 일일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한 명의 프롤레타리아의 의견이 한 명의 국회의원의 의견보다 무가치하고 무상한 것이라고 자신의 ‘강자 지향’적인 선입관에 의거하여 약자가 제기한 여러 의혹들의 편린을 말살하려든다면, 필자 이 일신 바쳐서 그들의 선입견을 깰 독창적이고 획기적인 이론을 계발해 낼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이론이 지금 바로 여러분 앞에 당도한 것이니, 여러분들은 지금 대한민국 6000만명의 희노애락을 일자(一者)로 일신(一新)할 절체절명의 이론세계를 목전에 두고 있는 것이다. 말하건대, 아주 정교하고 박학하게 짜여진 이론세계에 제현이 동조하기만을 바라마지 않는다. 하기야 효율성과 실용성의 원리가 모든 것을 압도하는 시대에 철학은 과연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벌거벗은 힘의 논리가 난무하는 현실 속에서 철학은 어느 자리 위에 서 있는가? 학자들이 현란한 언사로써 읊조리는 개념과 이론이 우리의 생활세계와 이어지지 않을 때 그것은 빈말이 된다. 고전이나 고전가들에 대한 해설이 이론적 실천을 대치하거나, 보편성의 미명 아래 학문이 일상적 삶의 지평으로부터 유리될 때 철학은 박제화된다. 현실에 대해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고, 이론과 실천 사이의 창조적 긴장을 껴안을 때 화석화된 철학은 비로소 되살아날 수 있다. 요컨대 필자는 앞에서 말했듯 이론에서 현성하여 실천을 시행하는 타고난 이론실천가이다. 필자는 이론가이기 전에 운동가이며, 사상가이기 전에 한국의 주권을 지닌 ‘시민’인 것이다.

세계를 이성의 그릇 안에 담아내려는 이론적 시도들이 언제나 현실에 의해 추월당했음은 과거의 여러 역사적 사실들을 들여다봄으로써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상은 역동하는 세계를 묘파할 수 있는 개념의 형성에 집착해왔다. 왜냐하면 그것이 운명적으로 사상의 존재 이유이기 때문이다. 이론과 실천은 변증법적 교호 관계 속에서 터를 잡는 법. 필자의 언행일치는 두말 할 나위 없이 사상가의 전범을 보여줌과 동시에 헤아릴 수 없는 지혜의 샘의 원천을 다른 궤변론자들을 에둘러 여러분들께 바치는 바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현재 학계지망생에 불과하다. 그러나 현재 도올 김용옥이라든지 이문열 선생의 치세를 보아하니 그닥 오래 갈 것 같지 않아, 한국 학계를 바로잡고자 하는 열망을 품은 채 필자는 오늘도 독학 삼매경에 빠져있다. 필자에게는 본인을 이끌어줄 스승이 필요 없다. 필자의 정치하고 명석한 머리로 그 어떠한 불멸의 난공불락적 이론도 꿰뚫을 수 있을 테니. 하여, 필자는 주장한다. 사내는 태어나서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죽는 법이다. 나는 훗날 나의 존재를, 나의 현존재를 알아줄 이 넓은 전세계를 위해 죽을 준비를 하는 중이다. 아직은 필자가 학계에 저명한 인사로서 등극하지는 못했지만, 곧 이 한국 학계의 일면에는 필자가 그린 현학적이고 학구적으로 열정적이면서 무모순성을 지향하는 필자의 궤적이 각인될 것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도올 김용옥과 이문열을 뛰어 넘어 ‘한국 지성의 최고봉’이라 불리는 날을 기다릴 것이다. 솔직히 말해 필자의 기세의 면적과 밀도를 계량하건대, 그 치세의 깊이의 심도성은, 이미 이 좁은 한국 학계에서만 놀 팔자가 아니라는 걸 여러분은 알 것이리라. 그러니까 앞으로 대성하게 될 필자의 사상적 체계는 기하급수적으로 진보하고 진일보할 것이다. 괄목상대라 하여, ‘선비가 헤어진 지 사흘이 지나면 눈을 비비고 다시 대해야 할 정도로 달라져 있어야 하는 법’이라 하였다. 한국에서 공부하였으며 누구나 ‘선비’라는 칭호를 부여받을 권리를 갖춘다. 이런 권리 신장은 비단 학인에게만 주어지는 게 아니다. 지금 저질적인 임금을 받으며 저열하게 노동을 하는 아르바이트생들에게도 해당될 수 있는 사안이리라. 하기야 부르주아의 행패는 19세기 초 영국의 증기선으로부터 발발하였다. 그것이 수백 년까지 이어져 바로 이 유교적 자본주의가 만연해있는 한국에서도 이런 작태를 발견할 수 있다. 그렇다면 필자가 이런 사실을 묵과하고 부르주아에게 기생하여 그들에게 녹봉을 받아서 악마에게 영혼을 파는 조악한 짓을 행할까보냐! 여기서 파생되는 문제의식은 우리가 이러한 사태를 간과하지 않음과 동시에 지금이 절체절명의 사태라는 걸 직시하고는 그들의 영업장으로 가서 직접 구두로 그들을 고발하라는 것이다. 이리하여 필자는 프롤레타리아의 가난의 저주를 묵시록적으로 풀어써서 그들의 희생을 찬양하고 축복하고 감개무량한 마냥 노동계급의 위대성에 대해 감언이설 아닌 감언이설을 늘어놓을 것이리라. 한데, 이 항목은 ‘무엇에 대하여’에 해당하는 것이다. 지금 이 상황에서 필자가 지적하는 사회의 한 부문은 아닌게아니라 ‘영업장’의 실태이다. 대다수의 학생들이 학자금과 책을 구입하는 돈이 쪼달려 자기 본위의 여유롭고 유유자적한 생활에서 접석이행하여 자리를 구한다. 그러나 밤을 지새워 행한 노동도 그들에게는 충분한 여유를 가져오지 못한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그 제도 자체를 구조적으로 뜯어 고쳐야 한다는 것이다. 이른바 ‘구조조정’을 단행해야 한다는 말이다. 필자가 너무 앞서갔나 보다. 이 글의 일단에서 우리가 유추해볼 수 있는 현실적인 것은 한국사회 저변에 흐르는 3D업종에 대한 적극적이며 자발적인 ‘모멸’이 그들을 더 힘들게 한다는 것이다. 다른게아니라 그들이 자기 몸으로 직접 일해서 돈을 버는 행위조차 사람들이 괄시하고 비난화한다면, 이는 분명 한국사회의 발전에 이바지하기는커녕 오히려 해가 되는 일이리라. 당신이 진정으로 올바른 시민의식을 갖추고 있다면, 이들을 모욕하기는커녕 이들을 존경하고 하나의 직업인으로서 존중해야 할 따름이리라. 그리고 더 나아가 그들을 위시하여 그들의 인권 신장을 위해 마땅히 힘써야 할 것이다. 요컨대 그들이 처한 난제를 우리가 나서서 해결해주고, 그들의 생활고와 삶의 모순을 하나 하나 도와주어야 할 것이다. 필자의 주장이 세간의 비난을 살지도 모르고, 하류계층에게는 일용지간 비근한 느낌으로 다가올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문학에 기대어 독자적인 사유를 전개해 나가야 할까? 필자가 소개시켜주고 싶은 문학은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이다. 율리시스에서는 빈곤과 악덕에 시달리는 소외계층 즉 프롤레타리아들의 생활이 마치 햇빛의 직사와도 같이 적나라하게 표현되어 있다. 이 언어적 주술의 아수라장은 가히 기적적이다. 율리시스로써 제임스 조이스는 프롤레타리아의 입장에 서서 하나의 불멸의 기념비를 세웠으며 그 기념비는 하나의 대자보로써 우리 일상의 고통을 대변해주고 있다. 조이스의 작품은 끊임없는 해석의 다면성을 내포하고 있거니와, 돌아서면 또 다른 생각이 들게 하는 작품이다. 의미의 다의성과 모호성, 다양한 문체의 동원과 적용, 끊임없는 언어유희는 이 작품을 읽음으로써 우리가 해결해야할 영원한 과제요, 수수께끼가 아닐 수 없다. 조이스의 ‘율리시스’는 마치 완미(完美)와도 같은 존재이며, 이를 완전히 이해하기란 너무나 벅찬 것이어서, 아무리 고군분투한다손 치더라도 수없는 난제에 봉착할 것이리라. 주지하다시피, 모더니즘 문학은 그 형식, 즉 문체, 기법, 언어를 최대의 활력으로 삼는다. 예를 들면, 모더니즘의 증언이라 할 ‘율리시스’의 여러 서술 기법과 문체 중 하나로, 시와 산문의 경계를 붕괴시킨 다다이즘 시의 원칙이 있다. 이러한 장르적 경계의 붕괴는 시산문 또는 산문시를 낳고, 또한 여기에는 해석의 다양성, 암시성, 모호성(그 자체가 작품의 본질이기도 하거니와)이 뒤따른다. 조이스의 작품은 산문이자 시 자체이기 떄문에, 간혹 그 소설성이 의심받기까지 한다. 조이스는 ‘무엇을’ 묘사하느냐에 앞서 ‘어떻게’ 묘사하느냐를 중요시한 작가다. 그는 이러한 미학적 장치를 강조하고 몸소 실험하면서, 현대의 작가는 바다의 항해사처럼 ‘배의 침몰’과 같은 위험을 각오해야 한다고 했다. 이는 바로 모더니즘의 모험적 정신이요, 그의 아일랜드적 기개 중 하나다. 오늘날 수많은 포스트모더니즘 작가들, 비평가들, 학자들이 그의 작품에 천착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다시 말하면, 조이스에게는 구체적인 어떤 형상을 작품에 담는 것보다는 어떻게 그 형상을 구현하느냐가 더 중요했다. 조이스의 다양한 상상력을 건드리려면 다양한 형식을, 그리하여 형식 뒤에 숨겨진 인간 심리와 새로운 조망, 비전과 현현을 탐구해내야 한다. 고금의 세계 문학은 호메로스 이래 동서의 주제들, 관념의 탐구, 사회 및 인류를 향한 비판, 역사에 대한 예언과 비전 제시, 인간의 삶과 죽음, 결혼, 가족, 성의 좌절 등 거의 공통된 주제들을 추구해왔다. 조이스 문학, 특히 ‘율리시스’ 역시 이런 주제들로 일관하고 있으며 그 범주 또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이러한 주제들을 구성하는 어휘들이나 어구들의 의미는 오늘날 대부분 널리 소통되어 있는 상태다. 그러나 작가는 이 소재들을 ‘어떻게’ 묘사하느냐에 더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여기에 그의 매력이 있다.

‘율리시스’를 표현하느라 주제의식에서 좀 벗어난 흔적이 없지 않아 있다. 그러나 필자가 강조하고 싶은 건 ‘문학’도 ‘현실’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점이다. 사실이지 우리는 문학을 통해서 사유하고 사고(思考)의 가치를 평가하고 각 층위마다 위계질서를 바로잡는다. 하기야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문학읽기를 마치 소에 경 읽기와 마찬가지로 도외시해왔고, 이게 도리어 인문학의 위기를 가져왔으며, 이로 인해 우리는 인문학의 진수를 보여주는 유대인에게 밀릴 수밖에 없었다. 국제적인 관점에서 한국은 아주 협소한 나라다. 그러나 조선의 위대한 선비정신으로 말미암아 조선의 위세는 일본에 절대 뒤지지 않았다. 그러한 선조의 각고의 학문에의 열정을 우리는 잊지 말고 깊이 새겨야 할 것이리라. 이리하여 필자는 언어에 의 일반성에 대해, ‘율리시스’라는 내 글에서 주장하는 주제의식의 표징을 좀더 자세하게 피력하고자 한다. 그럼 계속해보자.

언어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며, 인간 사상의 가변성처럼 언어 역시 유동적이다. 한때 성행하던 유행어도 쓰지 않으면 사어, 희어, 폐어, 고어가 되고, 반면에 새로 탄생하는 언어는 신조어가 된다. 조이스는 그의 작품들 속에서 이들 과거어들을 환생시켜 역사를 고증하고, 나아가 새로운 사상을 경작하기 위해 수많은 언어적 변혁과 신조어를 창조한다. 그러나 그의 작품들에 담긴 ‘언어의 혁명’은 엄격한 의미에서 순수한 발명이 아니라 기존 언어의 개발이요 재발견이다. 조이스는 언어적 난해주의자도 아니요, 파괴자 또는 창조자도 아니다. 그 자신은 중립자이며 그의 언어유희는 언어적 현상의 감수일 뿐이다. ‘율리시스’의 언어유희 가운데서는 소위 응축어가 태반인데, 이들은 마치 페넬로페의 베틀처럼 시공간을 초월하여 인간의 종교, 역사, 신학, 과학, 문학, 민속, 전설 등의 실올을 짜고 또 짜간다. 특히 ‘율리시스’는 언어가 난마처럼 얽혀있다. 이리하여 작가의 언어유희의 희화성 뒤에 숨은 그의 정당성, 고전성, 자질성을 우리는 마치 향수의 냄새와도 같이 감각적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율리시스’의 독서를 ‘성서’를 읽는 듯한 경험으로 읽어야 한다. 이러한 실천은 소설의 반복적 독서를 요구한다. 당신은 읽어나가면서 지나치게 어려운 어구나 해석의 추상성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 흔히들 작품을 전체성의 조화 및 통합된 총체로서 읽도록 권장하곤 한다. 작품의 모든 부분은 총체를 위해 조화를 이루고 있는데, 결국 모든 개개는 전체의 일부이기 떄문이다. 작품 속의 그 많은 일람표의 다혈성, 거의 연결되지 않은 세목들, 부대적 상황, 사이비 단서들, 언어적 유희들은 각각의 요소들만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그리하여 독자는 모든 세목을 보다 큰 총체적 패턴 속에 읽게 된다. 이러한 실현은 생각보다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며, 원문의 문학적 예술성이나 이에 표현되는 현혁적 상징성을 애써 찾으려 할 필요도 없다. ‘율리시스’는 수많은 낭만과 서정, 쉬운 사랑의 구절들로 넘친다.

필자가 이렇게 고전 중의 고전이라고 일컫는 율리시스에 대해 요목조목 자세하고 세밀하게 설명할 수 있는 바는 아무래도 율리시스를 필독하느라 그 복잡다기한 정점까지 사용한 필자의 지성에 공을 치하해야 할 터이리라. 필자는 실로 ‘율리시스’의 광기어린 팬 중의 하나이다. 율리시스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베게로 사용해서 베고 잤을 정도이니. 필자가 율리시스 한 권을 완독한 시간은 족히 6개월이 넘는다. 6개월 동안 필자는 사경을 헤매면서, 연옥을 헤메면서, 지옥의 밑바닥 끝자락을 목도하면서까지 필자의 지적편력을 바탕으로 하여 장구한 지(知)의 도정을 완수해나갈 수 있었다. 그런 고로 여태껏 필자는 마치 마음 밑바닥이 무거운 쇠사슬로 묶인 듯 허우적거리며 생을 살아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러함에도 핀에 꽂힌 벌레마냥, 이를 빠져들지 않을 수 없는 혼을 심는 노업, 혹은 일상의 고전 미학으로 삼아 생을 갈무리하고자 무던히 애써왔다. 그런데도, 이 책을 완전히 독파했는데도, 이 불멸의 고전이 담긴 불탕진의 찌꺼기는 영원히 미해결로 남아 있다. 이 작품, 율리시스에 담긴 무궁한 문학성, 지력, 익살과 유머, 맛과 향기, 언어, 독자를 빨아들이는 마력, 그리고 뭐니뭐니 해도 그 엄청난 즐거움을 당신으로 하여금 감득하게 된다면, 필자는 두말 할 나위 없이 행복한 자족감에 빠져들 것이리라. 그러니, 필자의 학설을 따라가기에 앞서 ‘율리시스’를 완독해놓음은 말할 필요 없는 선이해(Preunderstanding)과제이리라.

자, 그럼 원점으로 다시 돌아와 보자. 필자는 ‘무엇에 대해’ 말할 것인지를 이 세목의 주제로 두었다. 필자가 지적하는 것은 바로 부르주아들의 만행이다. 사실인즉 부르주아들에게 착취당하는 프롤레티아라의 현실이라는 수채화다. 필자는 이 하나의 그림을 다르게 그리고 싶다. 이 세목을 이렇게 질질 끌 필요는 없었다고 혹자는 날 비난할지도 모르나, 필자는 누구보다 당신들의 생각을 억압의 역사의 앞으로까지 전회시켜서 새롭게, 가지각색의 시련을 겪고 산전수전한 당신에게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보자고 권면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필자의 이러한 본의 아닌 시도는, 의도는 당신들이 부르주아의 ‘만행’을 포착하고 쉽사리 제거할 수 있는 원동력으로 다가오길 필자는 기도하는 바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 글의 서두, 즉 시작점에서부터 출발하여 일희일비하지 않고 선회하여 ‘부르주아의 행태를 이 사회에 부각시키고, 우리의 이성이라는 심판대에 세워 단죄하고, 그런 우리 자신을 대두시키는 게 이 글의 본래 소임, 목적이다. 그리고 이윽고 우리는 이 글의 끝 무렵에서 어떤 자명한 해결책의 강구를 손쉽게 채택하리라. 그런 고로, 우리의 진정한 민주주의의 시현은 마땅히 앞당겨지리라. 요컨대 나는 어떠한 형상·종(種)·유(類)·구조에 따라 그것을 분유하면서 미분화된 도출 요소들 요컨대 질료·원소·단자 들을 구분해 낼 것인가? 내가 여기서 철학적인 세밀화 과정을 촉구하는 것은 그러니까 바로 이 분유의 과정에서 모종의 추진력을 얻어 부득불 방향성의 의식됨을 정초하려하기 때문이리라. 요컨대 지피지기 백전불태라 하였으니, 소아(자아)를 알아야 대아(우주)를 논파할 것이 아니랴? 기초부터 바로잡고 투지를 불태우려는 즉 정초에서 하나의 지향성을 구하려는 필자의 사유형태를 마땅히 선이해하고 넘어갔으면 한다. 그렇다면 그 대상 즉 객체는 누구인가. 당연하게도 주체는 필자, 프롤레타리아의 일원 한 명이다. 내가 겨냥하는 대상은 바로 여러분 즉 프롤레타리아 ‘전체’이다. 그러니까 무엇을 위한 고군분투, 도정인가 하면 바로 우리 ‘전체’를 위한 것일 테다. 하여, 필자가 대상을 이렇듯 간단히 상정하고 주제의식에 침투하여 원론적인 방안을 강구해나가는 게 필자의 마땅한 도리가 아닌 듯 싶다. 이렇듯 첫 번째 정초작업부터, 그 발로부터 시작해나가는 게 옳을 듯 싶다. 일단 짚고 넘어가야 하는 건 ‘인간존재’에 대한 개념이다. 인류는 이미 동물과의, 넓게 보면 자연과의 싸움을 끝냈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라는 홉스의 개념처럼,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겨냥하며 이 지리멸렬한 전쟁터에서 그 총구의 끝을 청소하는 현실에 처해있다. 비로소 지구는 인간존재 즉 인류에게 점령되었으며, 오로지 개별적인 인간이 다른 개별적인 인간을 이길 때에만 그 영예와 영광이 주어진다. 이른바 21세기의 시대정신 ‘상대적인 개별자 간의 총성 없는 경제 전쟁’이 막을 올린다. 그러니 우리 자신도 개인의 ‘스펙 관리’만 신경 쓸 뿐 즉 총알을 장전하는 행위에만 중독됐을 뿐 그 어떠한 ‘인문학적인 자기성찰’을 해보려는 낌새도 없음이 이미 자명하게 만천하에 드러났다. 인문학은 이미 위기를 맞고 있다. 하기야 과거의 이데올로기의 전쟁은 이미 막을 내렸고, 사상은 이제껏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단일한 물질주의’로서 획일화되었으며, 기술은 진보에 진보를 거듭하여 기술과 과학의 시대 소위 이공계 시대가 인간 사회에 대두하여 이제는 좌시할 수 없는 핵심적 문제로 떠오른 게 엊그제 일이다. 따라서 우리의 선험적인 인문학은 패배의 경종을 울릴 수밖에 없었으니 이토록 인간정신을 간과한 시대가 21세기 말고 또 있었는가? 인문학 즉 인간 정신과 문명의 학이 무너지는 작금의 세태에 필자는 곧 ‘이데올로기의 종식’이라는 대자보를 몸에 걸고 펜을 들어 이 글을 쓰는 중이다. 그렇다. 이데올로기의 시대는 일소에 부쳐졌다. 그러나 그것, 철학과 사상이 대사상가 헤겔의 웅변처럼 ‘시대의 분열’로 수면 위로 다시금 떠오르고 있다. 왜냐하면 정말로 시대가 분열되었기 때문이다. 요컨대 필자는 이미 물질주의의 망각 속에 묻혀 버린 인민들을 애도하는 것이다. 비록 우리의 시대가 “철학과 사상”을 다시 긍정한 것을 자신의 공에 의한 진일보로 치고는 있지만 말이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새롭게 불을 당겨야 할 ‘돈을 둘러싼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싸움’의 재개에서는 자신들이 면제되어 있는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물음은 분명히 어떤 하나의 임의의 물음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당신이 목도하고 있는 엄연한 현실, 당신이 접하고 있는 도처의 ‘사태’들과 그것들이 상호 간에 이어져, 쉽게 말해 계열화되어 생성되는 ‘사건’과 사태와 사건을 총망라하여 포섭하는 ‘계열선(系列線)’그 자체에 있다. 그러니까 사태, 사건, 계열선 이 세 가지가 이른바 당신이 처한 현실을 미분화하여 도식화한 ‘요소’들이리라. 이 세 가지가 바로 우리가 당면한 임의의 물음들인 것이다. 요컨대 어떤 사태에 직면해있나, 어떤 사건이 발생해있나, 어떤 계열선이 어떠한 획을 그리고 있는가 하는 것들이 우리가 중점적으로 짚고 넘어가야 할 핵심적인 요소인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직면한 사태란? 이를 말하려면 우선 근래 들어 철학에 대한 관심이 다른 어떤 분야 못지않게 높다는 걸 파악해야 한다. 그러한 현상은 철학에 대한 목마름이 예사롭지 않기 때문일 터. 무릇 충전적이고 명석한 즉 판명한 직관이 ‘순수 직관’이라는 건 재론의 여지 없는 사실이리라. 따라서 우리는 ‘순수 직관’을 수단으로 선입관을 주조함으로써 ‘돈을 둘러싼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의 싸움’에 그를 참여시켜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내가 제시하는 ‘참여 이론’이다. 20세기 지성의 최고봉인 사르트르, 그는 나의 스승이자 ‘참여 이론’의 원조이다. 내가 그의 후학으로서, 그의 사도로서 다시금 ‘참여 이론’에 불을 지피려고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이 전쟁에 참여할 마땅한 권리가 있는 주체이다. 그리고 부르주아들의 사유재산은 우리가 사냥해 전취할 수확물인 것이다. 그러니 모든 이 시대의 인민, 프롤레타리아들이여! 나는 무엇을 위하여 글을 쓰는가. 누구를 위하여? 바로 당신들, 프롤레타리아의 해방을 위해서다!

지금까지 ‘인민해방’에 관한 주제로 담론을 했다. 과연 우리의 무너져버린 잿빛 꿈은 어디에 엄존하고 있는가? 우리 외부에, 그러니까 사회 피상적인 측면에, 시(視)차적 관점에서 하나의 거대사회에 대한 패러다임의 전회에 우리의 행복과 영과, 꿈, 풍족함 등이 있겠는가? 틀렸다. 우리가 아무리 부르주아들을 배척하려고, 그리고 사회의 고위 정치가들의 부패와 혈세갈취를 뿌리부터 뜯어고치려고 해도 그것은 한 세기가 지나야 바꿔 질 거대한 ‘구조’에 관한 문제일 것이다. 그리고 필자가 본인의 펜으로 말미암아 ‘구조조정’을 단행한다하여도 바뀌는 건 아무 것도 없으리라. 요컨대 프랑스가 1789년 프랑스 혁명을 통해서 유럽이 나아갈 길을 보여주었던 것처럼, 대철학자 하이데거는 1933년의 나치혁명이야말로 독일 민족이 기술 문명의 위기에 직면한 유럽에게 새로운 길을 제시할 수 있는 천재일우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이 사건들을 조망하면서 우리는 정녕 한 세기를 더 기다려 이 부르주아·고위관료 일변도의 더러운 세상이 전환되는 것을 지켜볼 것인가? 아니, 그럴 순 없다. 필자는 주장한다. 프랑스 혁명, 나치 혁명, 그리고 또 이 대한민국에서 우뚝 일어나 발발하여 유교자본주의에 질식하고 있는 아시아 전체를 바꿀 또 하나의 거대한 혁명 ‘한국혁명’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는 이제 혁명을 예고하고 있는 시대에 사는 것이다. 필자, ‘박준수’의 사상을 모토로 하여 아시아를 뒤집자는 원대한 포부를 당신들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전국에 있는 프롤레타리아들에게 고한다! 지금이 우리가 일어설 때 다! 더 이상 지체하지 말고 혁명의 전초를 밝히자! 우리의 의식은 잠이 들어서는 안 된다. 누구 한 명은 반드시 깨어있어야 한다. 내가 바로 여기 깨어있다. 내가 바로 여기 ‘존재’하는 것이리라.



16. 사후세계에 주목하라.

유수한 인텔리들의 지식을 받아먹었다. 이제는 거침없이 나만의 사상으로 받아들여, 또 나만의 사상으로 개조하여 새로운 이론을 창안하여 내뱉을 때다. 문학사에 걸쳐서, 세계 문학사에 걸쳐서 무라카미 하루키 같은 자본주의자가 돈을 탐하여 책을 쓰는 일은 부지기수가 되었다. 그것은 문학사 전반에 이바지하지 못하는 실없는 과오이며, 현재와 미래를 잇는 가교로써 현대사상이 이룩한 ‘철학 일반’의 문제점은, 시대착오적인 착상을 회피하고, 겉만 번지르르하고 속 빈 강정들을 도외시한 채 세계사의 격동적인 주안점들을 포착하여 그들의 계시를 무결점적인 사태의 내용으로 직시하여 불편부당한 사실들을 빈틈없는 이론으로 순화시켜 받아들이고 해석하는 데 있다. 현대철학은 과거에 요동하던 이원론을 현상의 일원론으로 획일화 즉 일관화 시켰으며, 이제는 더 이상 신의 존속이 문제시되지 않을 터이리라. 내가 한 달 40만원을 들여 비싼 양장서들을 사는 이유는 그 책들이 두껍거나 무거워서가 아니라 그 책에 들은 정보량의 적확성이며 요지부동함을 노리고 사는 것이리라. 독자가 책을 사는 것은 곧 현대문화사에 참여하겠다는 뜻이다. 이미 일본문학의 겉멋에 이륙당한 한국의 현대문학계는 그 힘을 잃어 저 바다 밑바닥에 깔려 있는 자갈과도 마찬가지인 존재가 되었다. 일본문학의 세련됨이며 순정성, 단아한 문체며 조화로운 예지는 이미 한국문학이 맞설 수 없는 새롭고도 단단한 어떤 지반으로 굳혀져 있는 상태이다. 그러나 한국문학이 조금만 더 힘을 낸다면, 젊은 작가들이 머리 싸매고 자신의 내적 모순성을 스스로부터 극복하고 모종의 필연성을 시신(時神) 뮤즈로부터 부여받고 한낱 이상 문학상이나 타서 상금으로 놀아볼까 하는 생각만 버린다면, 그는 분명 다채롭고도 이상적인 불변불멸의 사상을 건설하고 자기만의 방을 구축하여, 문학시장에 크나큰 주춧돌이자 포석으로서 기능할 것이리라. 하기야 많은 젊은 작가들이 절망에 휩싸여 자신의 생계만을 걱정하여, 상금만으로 이리 해볼까 저리 해볼까 생각하기도 하며, 고료로 인해 죽었다 살았다 하는 돈에 의한 일희일비한 인생을 사는 게 이미 유구한 역사로 굳어져 있을 터이다. 그러나 필자는 그들에게 조금만 더 힘을 내라고 권면하고 싶다. 인생이라 하나의 기나긴 도정과도 같다. 뿌리에 걸려 넘어질 수도 있거니와 당신이 그 뿌리를 큰 맘 먹고 갈아 마신다면, 당신은 하이데거보다도 멀리 이를 수도 있고 니체보다도 더 광란적으로 열정에의 철학적 글쓰기를 시도해 볼 수도 있으리라. 인생이란 길은 밑도 끝도 없는 자기 영혼의 정화에의 길이라서, 그가 지뢰를 밟지 않고 가려고 친다 하더라도 한갓 인간으로서 그 필연적인 공포의 핵심을 우회하긴 쉽지 않으리라. 그리하여, 당신에게 주어진 여분의 길의 밀도를 당신이 계산에 넣고 모종의 계략을 짜려고 한들, 그 계략과 필설에 넘어갈 얼간이를 찾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한데, 당신이 선택한 혹은 전공한 여러 작가들의 필체를 당신이 배껴 보고, 그들의 위대한 학설을 당신이 모방해보고 모사해본들, 어디서 이익이 남고 어디서 실력의 상승이 오겠는가? 하기야 부르주아의 탈선은 예나 지금이나 빈번한 우리시대의 장구한 역사이리라. 그의 행동 하나하나가 이 시대의 모범이나 전형으로써 청소년들에게 다가올 수도 있을 것이고, 도리어 오늘날의 악폐와 악덕으로써 다가올 수도 있으리라. 하나, 그들이 시행하는 선행하는 선립행위란 일종의 지폐의 초상화와도 같은 것이어서, 그들이 전제해놓은 명제도, 그들이 정확히 지정해놓은 행동도 그들을 대변해줄 수 없거니와 그들의 행위를 보편타당한 역치로까지 끌어올릴 수 없으리라. 그러한 그들의 행위를 후천적인 도덕의 최고선(善)의 가능성으로까지 점철시킬 수 있는 사회의 ‘인간 조건’이란, 그들을 사회의 기능으로서가 아니라 사회를 움직이고 사건을 조장하는 배후로서의 존립타당성을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그들이 선심을 쓰고 사회에 기부를 하고 속칭 부르주아로서 인심을 쓰는 이유는 후일에 그들에게 더 큰 이익이 선사되기 때문이다. 그들이 우리에게 주는 양식은 훗날 그들에게 더 큰 보상으로써 그들의 잉여생산물로 지정될 것이거니와, 그들이 조정하는 언론과 매스컴이라는 꼭두각시들은 그들의 미소대로 행동할 것이다. 가령 신문의 아동 강간사건을 보고 어떤 중년 남성이 놀랐다고 하자. 그로 말미암아 타블로 조작사건은 뒤로 물러나는 것이리라. 이렇듯 도처에서 불법이 자행되는 시점에서 우리는 어떤 태도를 보여야만 하는가? 우리가 신문을 보면서 반향을 흘리어 ‘반항’을 선포한다면, 이것이 거대세력에게도 먹히는 시도가 될 것인가? 우리는 우리가 가진 신문을 버리고 뉴스를 꺼 버려야 한다. 단지 우리는 뉴욕 타임즈와 영국의 더 타임즈를 읽어야 한다. 진정한 뉴욕커이거나 파리지앵이라면, 그는 언론을 주목하지 않은 채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묵묵히 수행할 뿐이리라. 필시 글을 쓰는 글쟁이라면 글에, 기사를 쓰는 저널리스트라면 저널리즘에, 영화인이라면 영화촬영에 붙어먹고 살 것이다. 돌연 중단되는 작업으로 인하여 부과되는 시간의 연장성은 그들 예술가에는 견디기 어려운 의식의 지난함일 터이다. 무릇 사물이란 인간의 성찰과 견지의 인식이 작용함으로써 눈앞에 드러나는 실체일 테고, 관념이란 목적론적 목가적 지향성이 우리의 의식을 떠돌다가 한순간에 멈춰 서서 드러내는 견각심의 일종이리라. 그러니까 우리는 개념들의 종합으로 이따금 관념이라는 총체적 상황을 사로잡을 뿐일 테고, 그것이 우리에게 도래하는 것은 바로 우리가 의식의 발로에서 지핀 불씨 하나가 발화되는 지점에서부터이리라. 하기야 대부분의 엘리트(인텔리)들이 지향하는 유럽적인 문화는 우리가 서구근대문화를 받아들임으로써 우리 사회에 작용하는 거대한관념의 총합이자 실체적 사실일 터이다. 한데, 혹자는 근대문명의 시작은 영국의 증기선으로부터 나왔다고 주장할 것이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우리사회는 단지 ‘영국적인’문화만을 섭취하는 게 아니다. 우리가 본격적으로 섭취해야할 미국-유럽주도의 근대문명은 응당 우리에게 호화로운 도취과 자아성취감을 맛보게 해주며, 우리로 하여금 문명이라는 거울에 자기모습을 반영하고자 하는 자유의지를 깨달을 수도 있으리라. 그리하여 영국의 증기선만이 우리에게 번영의 제국을 선사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개혁과 개화의 움직임과 물질적인 혁명이며 계몽주의적인 측면들이 근대라는 유보적인, 반(反)영국적인 그러니까 낡은 것에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것을 모색하는 송구영신의 자세를 취하는 급진적인 입장을 선호할 수 있으리라. 하여, 우리는 현재 20세기를 마감하고 있는 시점에 와 있다. 20세기는 우리 한국인에게 뿐만 아니라 전인류에게 유례가 없는 격동의 한 세기였다. 1983년, 라이트 형제가 인류역사상 최초로 동력을 단 비행기를 타고, 새처럼 창공을 날고자 했던 인간의 꿈을 실현시킨 것이 20세기 벽두의 일이었다. 그후 인류는 눈부신 발전을 거듭하여 드디어 1969년에는 영원한 신비의 상징이었던 달에 감격의 첫발을 내디디게 되었다. 그로부터 30년이 채 안 된 지금 우리는 안방에서 화성 탐사선 패스파인더호가 지구에서의 원격조정에 의해서 화성 표면을 탐색하며 생생한 화면과 자료를 지구로 전송해오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 기술과 과학이 지난 한 세기 안에 이룩해놓은 믿기 어려운 업적이다. 기술과 과학은 인류를 하나로 묶어놓았고 드디어 ‘하나의’세계의 구현을 목전에 두게 만들었다. 그런가 하면 서로가 신봉하는 이념이 다름으로 해서 인류는 두 차례나 이편저편으로 갈라져서 전면전을 벌였고, 표면상으로 전쟁이 끝난 뒤에도 제1세계, 제2세계, 제3세계가 갈라져서 도저히 ‘이성적’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는 만행을 지구상 곳곳에서 인류와 역사를 위한다는 구실 아래 자행해왔다. 엄청난 기술과 과학의 발달에도 불구하고 지금처럼 지구상에 굶어죽는 사람이 많았던 때는 일찍이 없었다. 하기야 이념대립의 구도에 있는 무수한 인민들이 순수한 물질에의 기호를 버리지 못해 구걸하고, 강도하고, 끊임없는 첨예한 예각적 대립의 선을 그리는 가운데 그들에게 그 누가 신의 가호를 선사할 수 있을 것인가. 하물며 그들의 굶주림과 불행을 등 뒤의 문제로 도외시함과 더불어 그들의 분노며 한을 풀어줄 한 명의 은자가 왕림함을 우리는 어느 각도로 받아들여야 마땅히 성립할 문제의 주안점으로써 상정될 것인가 그러한 시대정신의 미학의 역설을 도도히 그리고 교교히 받아들여야 하는 그 시점에서 우리의 문제의 제정이 조립되는 것이리라. 그러니까 우리가 비정립적인 의식을 들여다보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가운데 단지 정립적인 것 즉 테제를 의당 인식론적으로 수긍하는 관점을 유지하는 것이 필시 우리의 역사가 선행해야 할 선이해(Preunderstanding)일 것이다. 하기야 고고하다고 정평이 난 사상가들이 우리에게 들이부었던 사상들은 그 행위로써의 가치성이 여실히 결핍되어 있는 것이었다. 이는 여하하게 우리를 주조하는 사상의 근원이 세계의 미시적이면서도 거시적인 소우주의 피안 그러니까 대우주의 세계 즉 신의 편에 존립평면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리라. 그래서 필자는 감히 말하건대 우리는 우리가 지향하는 메타적인 관점을 버리고, 좀 더 시공의 제약성과 한계성을 절감하고 지금 이 사태에 더불어 당신이 서 있는 자리를 느끼라고 언질하고 싶다. 그리하여, 우리가 사는 시대에 우리의 시대정신이 구조주의나 실존주의에 입각하고 있다는 장엄한 생각을 떨쳐 버리고, 좀 더 현실적인 접근 즉 우리가 이 단단한 지반으로 하여금 발 디디고 서 있을 수 있다는 현실주의적 색채를 당신 자존심이라는 그림에 덧칠하라고 말하고 싶다. 하기야 대다수의 문호들이 자기의 존엄성과 보편성을 무기로 위시하여 정체(政體)에 관해서만 논하고 인민의 현실적인 생활은 도외시한 채 위만 바라보는 그러한 행태를 즉각 멈춰야 할 것이다. 인민의 노동력이 궁정을 먹여 살리는 법이거니와, 그들의 땀과 각고의 노력이 곧 왕이 먹는 빵의 위력이며, 귀족들이 섭취하는 포도주는 예수그리스도의 피가 아니라 바로 인민들의 피인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노동계급 즉 프롤레타리아의 고군분투하는 희생을 기필코 잊지 말아야 할 것이며 그들의 힘이야말로 한 나라를 통체로 바꿀 수 있는 것이라는 걸 직시해야 할 것이다. 하기야 화가들은 고아한 자연을 그리기도 했지만 불쌍한 인민들의 모습을 그리기도 하였다. 가령 반고흐의 ‘감자를 먹는 사람들’을 보라. 그들의 슬픔과 인간 보편성에서 오는 지고의 미가 얼마나 뚜렷이 점층적으로 담겨 있는지를. 우리는 우리가 에스프레소를 마시고 독한 담배를 피는 것을 자랑으로 여긴다. 또한 오늘날에 여자들(Girl)들은 크림치즈를 바른 베이글을 씹고 고품격 티라미스 케익을 먹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는 것이 사실이리라. 그러나 그들의 위장에 들어가는 그러한 음식들을 과연 누가 만들었을까? 그것이 노동계층의 피와 땀과 살이라는 걸 그들은 마치 태양의 눈부신 직사와도 같이 뚜렷이 알고 있는 어떤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그들의 의식은 마치 술에 취한 혼령처럼 잠들어 있는 것은 아닐지. 필자는 외로움에 견디지 못하고 말보로 레드 한 까치를 입에 물고 불을 부친다. 그것은 광명을 받은 채 영광스러운 광휘로 하여금 시나브로 타오른다. 그것은 곧 영지주의다! 신의 가호가 나의 담배에 깃들어 있기를. 그러나 보라. 거기에는 단지 나와 담배 한 까치만이 잔존할 뿐이다. 앞에서 소개했듯이 전설적인 프랑스 시인 랭보의 시를 예를 들어 살펴보도록 하자.



여름날 푸른 석양녁에 나는 오솔길을 걸어가리라.

밀 이삭에 찔리며 여린 풀 밟으며,

꿈꾸듯 내딛은 발걸음. 나는 산뜻한 풀잎들을 발에 느끼며,

들바람이 나의 맨머리를 씻게 하리라.

아무 말도 하지 않으리, 아무생각도 하지 않으리,

그러나 맘속에 솟아오르는 끝없는 사랑

나는 가리라, 멀리 더 멀리 마치 보헤미안처럼

자연속을 여인과 함께 가듯 행복에 젖어.



- <감각> 랭보.



그의 시구에서 빛나는 광휘와 아우라는 얼마나 우리에게 절실하게 다가오는지!

그의 여여하고 고색창연하며 기품 있는 시세계의 절정을 경험하고 그 세계에 착안함으로써 우리가 얻는 모종의 시원은 일찍이 경험한 적이 없는 것이었다. 특히 이 표현은 얼마나 재기 넘치는지! ‘나는 가리라, 멀리 더 멀리 마치 보헤미안처럼’



우리가 랭보를 조감하면서 얻는 착란적 광증은 여태껏 실현되지 않은 미래에 대한 투기와도 같은 것이다. 이러한 그의 사물과 배경에 관한 투사는 당신이 경험해보지 못한 미증유의 기투하는 실체와도 같은 것이다. 대자적인 의식은 무엇을 항시 지향하지만, 그 지향성은 이내 심연의 베일에 가려지고, 실재적인 의식의 선험적인 지각은 모종의 고뇌에 갇혀 저항 한 번 해보지 못하고 사라지는 것이다. 그런즉슨 우리가 투지를 불태우고 어떤 작업에 뛰어들었다 하더라도 그 작업이 시행착오를 거쳐 자기완성에 이르기 까지는 각고의 의기투합하는 대상의 방향의식 이외에는 어떠한 도움의 이행의 전전도 지향되지 않으리라. 그러한 방향성이 대면하는 세상을 구성하는 패러다임적 요소들은 정말이지 우리의 인식의 한계를 촉구케 한다. 그러니까 의식은 항상 자기완성의 도정을 역설하게 되며, 그로 말미암아 우리의 인식은 끝없이 사회로 하여금 닦달음하게 되는 것이리라. 그리하여 세계에 참여한 우리 영혼은 가시적인 성과만을 요구하게 되고, 이런 성찰의 끝자락에는 항시 윤리적인 의지가 자리잡게 되는 것이다. 하기야 우리가 단적으로 세상을 관찰할 때, 세상이 우리에게 증여하는 것은 정말 별 거 없다. 단지 필자는 한 명의 여자 친구만을 필요로 하게 될 뿐이며, 그 외에 그 어떤 인물의 참여도 달갑지 않으리라. 그러한 필자의 시점을 혹자는 이기적이라고 비판할 지도 모른다. 당신만의 방을 구축하고 정갈하게 갈고 닦고자 인민의 희생을 갈구하는 저능아라고 필시 비난할 터이다. 그러나 보라! 우리가 사회라는 간교한 시스템을 관통하여 세계를 한가운데서 통괄하며 삼라만상을 동시에 사로잡으려고 할 때에, 그의 그러한 욕심은 너무나 거대하여 인간의 힘으로서는 결코 이룰 수 없는 것이리라. 하여, 필자는 말한다. 세상의 한계성을 체감하고 당신의 아이덴티티를 재구성하라. 세계의 도상에 서서 발걸음을 재촉하지 말고 한걸음 물러서서 양보하고 유려한 유보적인 입장을 취하라. 그리하면 당신은 상대방에게 오히려 호감을 얻게 되고 도리어 상대방의 호의에 힘입어 새로운 세계의 일면을 취할 수 있으리라. 그러니까 ‘시도’를 지양하기보다는 일시적인 쾌락에 젖어 유독 유미적인 것만을 택해 고려하고, 소강상태라는 타성에 젖어 언어적인 것의 삼고초려의 조망을 시행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불현듯 떠오르는 이성적인 생각을 제외하고 당신이 얻을 수 있는 이득은 거의 없다. 모든 것은 인간의 이성에 그 뿌리를 두고 생성하는 지(知)의 선구가 되는 것이다. 인간의 이성은 동물과 식물을 통틀어 ‘인간’이 인간됨을 보증하는 수표와 마찬가지인 것이고, 그 수표를 지불함으로써 인간은 전우주를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이다. 태양계는 이미 인간이 지배했다. 이제 앞으로 인간이 손에 넣어야 할 것은 다른 우주의 세계인 것이다. 그것은 인간이 이따금 느끼는 기시감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우리는 때때로 데자뷰 현상을 경험하는데 그 현상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보지 못한 것을 보는 것이리라. 당신이 이제껏 체험해보지 못한 세계가 당신에게 계시되므로 당신은 거기서 어떤 유추로 하여금 그것을 재현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생은 단지 단 한 번의 재현에 불과할 뿐이므로, 당신의 삶에서 시간은 단순히 일회적인 것이다. 이 일회성을 소강하려고 발버둥치지만, 그리하여 남들과 차별적이고 이질적이며 상이한 삶의 궤적을 그리려 하지만, 그러면서도 당신은 시간이 가지고 있는 일회성을 영속성으로 승화시킬 무상적인 노력을 행할 따름일 것이리라. 하여, 당신은 일시적인 것 속에 절대성을 두자고 다짐할 것인즉, 당신 삶의 한 번 뿐인 재현은 절대적인 것으로 변용되고 이 절대성이 당신이 보유하고 있는 생동성을 유지시켜 줄 것이다. 당신은 이른바 절대적이며 불변적인 존재이다. 그러나 종국에 당신은 나이가 들고 쭈글쭈글 해져서 병들어 죽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인간이 반드시 경험해야 할 필연적인 것이다. 그렇다면 앞에서 얘기한 절대성이란 무엇일까? 만일 당신이 삶에 장대한 연장성을 두고 싶다면, 그것을 그 내부에서부터 극복하고 싶다면, 당신이 선택해야 하는 것은 유(有)가 아닌 무(無)이다. 무는 언제나 영원하며, 시작도 끝도 없는 우주의 밀도를 구성하고 있다. 그러니까 당신은 사후세계에 당신 영혼의 전부를 걸어야 하는 것이다. 쉽게 말해, 스스로 죽음 이후의 세계를 준비하고 신의 은총을 간직한 채 자기 삶의 기투를 재개해야 할 것이다. 그러니 사후세계의 입면을 준비하고 있는 사후세계지망생들이여! 지금 내가 하는 말을 잘 생각해보아라. 당신들의 빈자리는 타자가 채워주는 게 아니다. 그 빈자리는, 당신의 무덤은, 훗날 당신 자손들이 미래를 기약함으로써 장미꽃 한 송이 꽂아줄 그런 처지는 되야 할 터이다. 당신은 비록 무덤 속에, 혹은 화장함으로써 뼛가루가 되어 있지만 그러면서도 당신 영혼이 마치 검은 하늘의 별들과 신(神)들과 같은 영원한 존속성을 내포한 채 이 지상의 계속 머무르고자 한다면 반드시 선행되야 할 조건이 있다. 그것은 끝없는 선(善)을 행하라는 것이다. 그 선행만이 자손 대대로 이어져오는 망각에의 영원회귀일 것이리라. 존재는 항상 원을 돌다 이내 사그러진다. 당신의 사소한 선행이 당신의 거시적인 미래를 책임질 것을 미리 멀리 내다보는 안목을 통해 알아둬라. 죽음은 필멸적인 것이며, 당신은 언젠간 죽는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필연적인 당신의 미래이며 당신 삶의 해답일 것이다.



17. 운문의 대표적 귀재 ‘랭보’.

어떤 문학적 근거를 이루는 외삽과 내삽은 모두 어떤 외양적인 요소에 의하여 직립 보행하는 존재이다. 이들이 걸어가는 길은 아주 윤기 나고 우아하며, 고아하며 정아한 길인데, 이 길을 조성하는 오매불망한 인물은 바로 J.P 사르트르이다. 사르트르는 이 길을 오로지 불멸의 불변적인 외부의 표상으로 돌렸고, 이 길의 외재적인 피상적 표면을 온통 구가하는 고색창연한 어떤 틀의 부조리가 이를 상징하고 있다. 이렇듯 선과 악을 둘러싼 그의 쟁점적인 논쟁의 일면을 이루고 있는 선립조건은 그가 바로 혁명적인 천재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뚜렷이 선과 악을 이분하는 하나의 선(線)을 또라지게 쳐다보았고, 이 선의 변절을 경험한 그는 결국에 배교자가 되기에 이른다. 배교자란, 선을 멸시하고 악을 숭배하는 이교도 집단을 이른다. “선을 배척하고 악을 섬겨라!” 이것이 일종의 선립조건으로서 그가 전제하고 있는 명제이다. 이 명제를 도출하기 앞서 그는 자신의 대저 ‘변증법적 이성비판’을 세상의 정상에 위치한 사상서의 차원으로 옮기고 싶어 했다. 그것이 그의 작은 소망이요, 어찌 보면 그의 사상의 정확성과 명정성에 하나의 일방성을 기하기 위한 일의적인 선택 조건이었을지 모른다. 하기야 그의 ‘변증법적 이성비판’은 일대에 커다란 파장을 몰고 왔을 것이다. 지금까지 그의 사상의 근간을 이뤘던 ‘문학이란 무엇인가?’, ‘존재의 무’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의 이 대저는 프랑스·독일 일변도 철학에 확고부동한 파장을 가져왔으며, 그의 이러한 초월성의 예지는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어떤 이라도 사르트르를 목도하고는 거대한 지성을 만났다고 자부한다. 사르트르의 지성은 신을 뛰어넘어 세계를 하나로 통괄하는 힘을 가졌으며 인간과 자연, 대우주와 소우주를 포괄하고 기존 헤겔의 진리체계를 부식시키고 일종의 예술의 아우라를 창안하여 세계에 아프리오리한 사상을 선물로 선사했다. 하기야 어디서나 자신이 너무나 많은 질곡을 경험하여 자신이 시현하고자 하는 철학의 원점은 세상의 파노라마를 하나로 그러모은 진정한 진수이자 정수라고 자부하는 철학자를 본다. 그러나 그들의 머리는 비어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가 정말로 진실한 사상을 여러분께 제공한다면, 여러분은 나에게 어떠한 이의도 제기하지 않을 것이리라. 하기야 정말 혁명적인 천재들은 대중 앞에 자신의 베일을 벗기려 하지 않는다. 도리어 그들은 자신의 배후에 있는 정말 높은 존재들을 명명하고 정묘하게 해명하며 그들의 사상을 칭찬하려 한다. 정평이 난 철학자란 남들에게 자신의 모습의 실체를 함부로 들어 내지 않는다. 정교한 무늬는 자신에 대해서 일체 일언반구도 하지 않거니와, 혁혁한 이념은 자신을 스스로 분해하지 않는다. 이는 뛰어난 자일수록 소리를 내지 않으며, 빈 수레가 요란하다는 법칙을 나타내고 있다. 하기야 대부분의 사상가들이 자신의 학설을 연설하려 할 때 그들은 자기 내용의 핵심적인 내용은 뒤로 뺀 채 비핵심적이고 단조로운 내용만을 풍경에 드러낸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의 학설을 진심으로 소중히 하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자기를 아끼는 사람은 결코 남들에게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소녀는 자신의 풍만한 젖가슴과 약간의 털이 난 자신의 음부를 남자들에게 노출되지 않으려 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노출될 때 자신의 모든 것이 드러난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반면 남자들은 소녀의 중심, 즉 소녀의 그다지도 소극적이고 아련하면서도 오줌 냄새나는 음부의 수줍은 표면이 피상적으로 자기 눈앞에 펼쳐지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그들은 소녀의 음부가 반으로 갈라져 그 핵심엔 분홍색 구멍이 자리 잡고 있기를 알기 때문이리라. 이리하여 문학이란 무엇인가를 묻기보단 글을 왜 쓰는가, 누구를 위해 글을 쓰는가, 어떤 주제를 갖고 어떤 정념을 갖고 글을 쓰는가에 대해 묻는 게 더 적확할 것이다. 어떤 작가는 소녀의 음부를 수줍고 장난기 어리게 묘사할 수도 있으며, 어떤 작가는 소녀의 젖가슴을 윤택하고 먹음직스럽게 소묘할 수도 있는 것이리라. 하기야 언론에 자신이 진리를 구했다고 호도하는 작가들치고 그들이 구도했기는커녕 진리의 목적과 근거 사이에서 생성되는 표리부동한 실체의 해답조차도 얻지 못했다고 치자. 그렇다면 그들은 자기만의 방에서 서재를 이리 들치고 저리 들치면서 먼지 나게 한 판 할 것이다. 그리하여 모종의 생성의 힘을 부여받곤 조용히 침묵에 잠길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말할 것이다. “유레카, 유레카!” 그러나 진리에 목적론적인 일관적인 통일성이 상정된다고 한들 거기에 정연하게 입성되는 논리란 현존하지 않는 미래의 것이리라. 진정으로 그게 현재의 논리가 되려면 거기에 입각한 유미적인 경치며 자연의 조화와 임의적인 게 아니라 인위적인 가공적인 연역물이 필요한즉슨 그러한 대답의 첨점은 개방된 게 아니라 오히려 패쇄된 그러한 실체에서 근거한 것이리라. 그러니까 실체는 일방적으로 다가오는 어떤 귀납적인 것이 아니라, 연역적이고 증명적인 논리의 일종이라 필자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리에 대한 해답을 작가에게 촉구한다 친다손 그 해답이 분명하게 여기에 이렇게 도식으로 말미암아 그려지는 게 아니다. 그러니 우리가 조잡한 방식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보다는 도리어 그 그림의 실사구시한 측면을 부각시키고 그것을 초탈하고 초극하여 합리적인 문장의 힘으로 불현듯 어떠한 직관의 도입에 관심을 갖는 게 더 좋을 것이다. 한갓 문학이라는 이름으로 나를 단죄한다 친다손 그것이 반드시 해답의 착상으로 다가오는 것도 아닐 것이고, 그러한 곳에서 빚어지는 해답의 내면이 반면에 내적 필연성으로 우리 가슴에 아로새겨지는 것도 아니리라. 따라서 우리는 분명히 세계의 정답에 대해서 작가에게 유발시킬 도구를 손에 넣을 내적 모티프를 발동해야 할 정밀한 판명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우리가 세계에 대한 반향으로서 세계를 직시하고 그에 대한 그림을 담담한 필치로 그려나갈 때, 바로 그 순간에 우주의 하여한 내적 동기가 성립되는 것이리라. 요컨대, 내가 사람은 80살까지 너끈히 살아간다고 상정해보자. 그 노인네는 분명 80세까지 도도하게 세계의 지도를 방황하고 종합적으로 시대정신의 이면을 파헤치고 연명하면서 고적하게 살다가 붓다의 세계에 입면할 것이리라. 그 노인네의 장장한 살림살이는 단적으로 말해 간단하지 않을 수 있다. 그 누구의 사람의 살림살이도 모종의 불가해성으로 우리 앞에 다가선다. 그러나 우리가 그 불가해성을 파악하여 분해하고 다시 재조립할 시점에, 그 순간만큼은 우리는 삶의 고고한 색채를 흠뻑 들이 마시고 이내 침묵에 잠기게 된다. 그러한 적요한 인생의 실체는 비단 인간만이 겪는 비애는 아닐 것이리라. 이는 인간이 반드시 외로운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하기야 각각의 원은 각각의 주어진 길을 돈다. 이 길은 무릇 그 원에겐 부적합하지 않은 궤적이요, 이 원이 필사적으로 필연적으로 걸어야 할 길이다. 가령, 한 사람이 원이란 이름의 모형을 발견한다 치자. 이내 그는 이것이 구의 일종이라는 걸 알아차릴 것이며, 그러한 연유로 그는 그것을 만지작만지작 하다가 두 손에 그것을 그러잡고 위로 치켜들을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말할 것이다. “보시오, 여기 바로 지구가 있소. 이 지구의 합목적성은 세계가 바로 그자체로 지향한다는 것이요, 따라서 이 구는 우리들의 군상이자 세계의 평화달성을 위한 하나의 표징이 될 것이요.”라고. 하여, 내가 말하는 철학자란 존재는 그닥 행복한 존재가 아니다. 그는 실존하며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를 몸소 받들어 세계라는 다른 차원의 행복을 구현하려 한다. 그러나 그의 그러한 시도는 모든 계열적인 것의 내적 파장에 관한 일종의 서사시이다. 내가 이러하게 말하는 의도는 독자들도 반드시 의아스럽지 않게 받아들여야 할 하나의 자연의 도열이다. 이 도열은 그 자체로 고매한 정신 즉 ‘우주의 지향적인 개연성의 구조’이다. 이 구조가 전체적으로 모든 삼라만상의 실체를 교조주의적인 관점에서 개연성을 띈 채 파괴를 시도하려고한들 그가 정말로 그럴 자신이, 용기가 있어 그러겠는가? 마찬가지로 사르트르 또한 이러한 실험적인 시도의 한 획을 그리지는 못하고 죽었다. 그에게 있어서 칸트의 교조주의란 극히 개인적이며 내밀한 것이었다. 그러나 어쨌거나 그의 위상은 시대의 요구에 있어서 결코 꿀리지 않는다. 그가 주창한 ‘실존주의’ 사상은 온 누리를 휩쓸고 국제적인 표상으로 자리 잡았으며, ‘실존은 본질에 선행한다’는 언표는 이미 시대정신의 기류가 되었다. 하여, 내가 설명하고자 하는 구체적인 방법론은 이것이다. 사람이 우주에 있어서의 위치는 그가 생각하기에 달렸다는 것, 바로 그것이다. 그가 얼마나 사물들의 상호관계와 중첩과 연계작용에 신경 쓰는 지는 곧 그의 사고방식의 어떤 선택성에서 기인하는, 그럼으로써 시대적 촉구를 앞세워 의문을 제기하고 결정적인 이론을 내세우는 이타적인 모든 인식론적 계기가 된다. 사람은 자기의 인식의 한계를 뛰어넘어 그 배후에 있는 심연의 저변을 표류하고자 한다. 이러한 요구에 발맞추어 인간의 한계 너머에 있는 전설적인 신의 행보는 심히 계산적이고 치밀하며, 계략적이고 조악하다. 이렇듯, 신의 사고를 따라잡으려면 신의 발끝이라도 따라가야 한다. 허나, 신의 전략적인 전술이 성공이 아니라 실패로 돌아갈 때, 도리어 인간은 환희를 느끼고 쾌락의 극치를 맞보게 된다. 같은 맥락으로써, 인간은 신과 같은 형상이 되길 원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신의 질료 즉 특성과 요소를 손에 넣음으로써, 비로소 신의 대열에 올라서게 되고, 산봉우리 즉 정상에서 신의 인식을 통괄하는 전체적인 힘을 손에 넣게 되는 것이리라. 하여, 신의 특질을 가진 인간은 그 전지전능한 힘을 이리저리 흔들곤 이윽고 침침한 심연 속에 횃불을 밝히듯 휘젓는데, 이런 인간의 특성은 실로 원숭이적인 특성이라 할 만하다. 따라서 인간이란 단지 권력에 미친 침팬지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이 신의 원소를 자신의 중심에 끼워 놓고 그와 동등한 힘을 손에 넣다손 치더라도, 그의 그러한 파워는 항시 신의 고명한 힘과 동일할 수는 없으리라. 그러므로, 신의 이러한 가호와 축복과 은총을 받는 우리는 신을 섬기는 신앙으로 하여금 진정한 피안의 대열에 서게 될 거외다. 그러니까 우리가 신에게 부여받은 객체 즉 육체를 난잡하게 사용하면서 즉 여성들의 음부를 휘젓고 다니면서 자신의 존재를 증명 받고, 그렇게 증명 받은 존재의 시원을 신에게 증여하려는 인간의 욕망에서, 바로 거기서 인간의 실존이 성립된다. 하기야 유수한 사상가들이 자신의 육체를 핍박하고 고군분투하면서 신과 정령의 도열에 들어서려고 한다. 사상가들은 주장한다. “우리는 우리의 고뇌를 선행하려고 했다. 우리의 고뇌는 실로 격렬하고, 그것은 실로 파생실재라 할만했다. 그러니까 우리는 최고선(最高善)을 시행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체현하려고 했다. 단지 그 뿐이다.” 오늘날의 젊은이들은 자기 골이 비어있지 않느냐고 반문하면서 이러한 사상에 반박하곤 한다. 그는 말한다. “나는 오래전부터 당신의 사상을 흠모해왔소. 그러나 당신의 사상의 지반은 불안정하오. 당신은 세계의 재산분식에 대해 말하면서 검은색 재규어를 타고 다니오. 그것이 바로 당신의 모순이오.” 하기야 사상가들의 일련의 편린들이란 참으로 우습다. 그러한 편린을 일실하고 새로운 면모를 일신하여 다각도의 차원을 도입하여 새로운 세계에 등극하는 것, 그것이 바로 이 시대의 사상가들이 풀어나가야 할 숙제이다. 그러니 우리는 원인을 구명하고 재차 그것을 분석하고 규명해야 할 것이다. 하기야 어떤 류의 인간은 자신에게 하나의 과오가 자신의 모토로부터 분리되어있다고 느낀다. 그의 모토는 요컨대 이런 것이다. “오늘을 살아라.” 그래, 오늘을 살아서 안 될 것은 없으리라. 그러나 오늘을 산다고 해서 무조건 행복의 전승이 왕림하는 건 아니리라. 하기야 우수어린 영혼이 자신의 삶을 관조한다손 친다면 그 누가 그러한 현상에 대해 거부반응을 일으키겠는가? 요컨대 우리의 보잘 것 없는 뇌리에 시신(時神) 뮤즈가 재림한다면 우리는 순간 영감을 받아 미친듯이 종이에 펜을 갈겨써서 잉크 한 방울 안 남게 할 것이리라. 그리하여, 우리의 신 뮤즈는 우리에게 하나의 카발라를 새겨넣는다. 이러한 신비주의적 시도가 우리로 말미암아 모종의 접점을 이루게 된다. 이 접점이 가리키는 것은 이단과 찬양의 양극단이다. 우리는 우리로 하여금 일련의 시도를 시행하게 되고, 신은 이 기도를 듣고 우리에게 환상적인 양가적 실천의식을 내포한 채 우리의 자유의지에 이러한 바탕을 심어준다. 그의 양의성은, 그러니까 ‘실천’과 ‘자유’라는 두 가지 임의적인 실행형태를 제기하며, 이는 우리가 작가가 풀어 쓴 글의 신묘함을 기반으로 작가보다 먼저 분별력과 사리능력을 갖추고 산문의 행태와 전문(全文)적인 근거를 ‘시간의식’이라는 후설의 기준에 의거하여 ‘논리의 비약’을 실행해 보는 것이다. 하여, 단지 의식 상태에서 이지러진 달을 응시하는 게 아니라 도리어 의식의 한가운데서 달을 오롯이 점묘해보는 것이다. 달을 가진 주체자가 ‘뮤즈’이든 객체자가 ‘우리’이든 그 제약에서 진일보하여 점층적으로 교교한 달 그자체를 응시해보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달을 소유하든, 달이 우리를 소유했든, 그 예속(복속)상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지점에서 더 나아가서 우리의 어법이 말하는 ‘진리의 분규’를 좋은 말로 마치 실처럼 풀어나가고, 더 이상 우리가 아닌 지점까지 도달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미래를 속단해서는 안 된다. 더군다나 그것을 예단해서도 안 된다. 내일은 언제나 내일의 태양이 떠오르는 법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후설이 주장했던 ‘시간’의 중요성을 간파해야 하며, 시간이 우리에게 언질하는 ‘의식 일반’의 중요성을 새삼스레 인정할레야 하지 않을 수 없을 터이다. 따라서, 우리가 격하게 닦달음하는 시간의 궤적은 필시 우리의 만면에 준비된 하나의 도정에 지나지 않을 것이리라. ‘조삼모사’라고 했다. 눈앞에 보이는 차이만 알고 결과가 같은 것을 모르는 어리석음을 우리가 범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가. 우리는 서로 다름을 안다. 이러한 차별성(상이성)은 우리에게 자기동일성을 부과한다. 자기동일성이 중심이 되어 미래를 생성하는 우리는, 우리가 남들과 다른 생을 살고 다른 일을 하며 다른 길을 가고 있다고 인지하며, 자기는 다른 미래에 귀결할 것이라 착각한다. 그러나 그는 궁극적으로 이 삶이나 저 삶이나, 이 편이나, 저 편이나 마침내 하나의 길로 모아질 거라는 걸 간과하고 있음을 알아채지 못한다. 하기야 삶이 그런 것이다. 우리는 남들과 이질적인 삶을 살고 있다고 자랑하지만, 결국에는 남들과 다를 바가 없는 삶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나가는 거지를 결코 비난해서는 아니 되며 결코 다리 잘린 불쌍한 사람들과 고아와 협잡배들을 비난해서는 안 된다. 그들의 노동이 바로 우리를 먹여살리는 지반이며, 그들의 눈물이며 그들의 땀과 수고로움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에스프레소를 마시고 독한 담배를 피울 자격요건을 갖추게 되는 것이리라. 당신의 어머니가 그 만큼 고생해서 당신은 그렇게 편하게 글을 쓸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함부로 그 입을 놀리지 마시기를. 우리는 저마다 고귀한 존재이며 인간 실존의 다리를 건널 자격이 있거니와, 완고하게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보편타당적으로 정립하는 ‘내실’의 기본 규칙을 지킬 합리적인 지향성이 있는 것이다. 우리의 실존성은 사르트르가 말하는 ‘실존주의’의 규칙을 정확히 부정한다. 왜냐하면 실존주의는 결코 휴머니즘이 아니기 때문이다. 실존주의의 근저에 계합하는 인간정신의 승리를 예고하는 파란만장한 힘은 바로 인간의 영혼에 있다. 가언적 명령으로써 인간의 내적 필연성을 들여다보려고 해도, 그것은 여간 쉬운 일이 아니다. 정말로 인간의 장구한 가관한 사상을 엿보려면, 당신은 한 권의 문학을 읽을 필요가 있을 것이다. 괴테가 평생을 거쳐 쓴 대작 ‘파우스트’는 바로 사상의 주요 핵심을 논쟁적으로 해부하고 있다. 파우스트의 애인 그레트헨은 감옥에 갇혀 인간들에게 심판받게 되지만 종국에는 신의 구원을 얻고 하늘로 승천한다. 그리고 악마에게 자신의 지(知)를 팔고 젊음을 산 파우스트는, 악마 메피스토에게 영혼을 빼앗길 번하지만, 여인 그레트헨의 필사적인 도움으로 그것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 괴테의 유려한 대서사시는 인간에게 진정한 사랑이 과연 무엇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해 깊은 심사숙고를 마련케 해준다. 과연 인간이란 영악한 존재이다. 그러나 인간이 자신의 영악함을 떨쳐버리고 진정으로 신심에 가득 차, 역학적인 신의 세계에 입적하고자 할 때, 바로 그때에 인간의 영혼은 요원한 행복을 얻음과 더불어 진실된 구원을 얻는 것이리라. 하기야 랭보가 세계 여러 국가를 횡단(방황)하면서 자신의 시세계에 강렬한 생기를 불어넣었던 건 단순히 그만의 비결은 아니었을 게다. 그 생기는 마치 어머니가 아기의 얼굴에 호―불어 주는 것과도 같은 것이어서, 거기에는 모종의 심원한 사랑이 담겨있다. 그러니, 우리는 단지 랭보의 기행과 지적편력만 바라다보면 될 것이리라. 랭보는 이렇게 말했다. “시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이 첫째로 배워야 하는 것은 자기의 인식입니다. 그것도 완전한, 그는 자기의 영혼을 구하고 검토하고 시편에 부딪치게 하여 영혼을 알게 됩니다. 어떤 두뇌 속에서도 자연스런 발달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많은 에고이스트들이 자기야말로 창작가라고 말하고 있으며, 다른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지적 진보를 능력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괴물적인 영혼을 만들어 내는 데 있습니다. 콩프라치코스를 멋도 모르고 모방했다고나 할까. 얼굴에 사마귀를 심어놓고 그것을 소중하게 기르는 사람을 상상해 보시라. 저는 말합니다. 견자여야 한다. 견자가 되어야 한다고. ‘시인’은 모든 감각 기관에 걸친 광대무변하면서도 이치에 맞는 착란에 의해 견자가 됩니다. 사랑, 괴로움, 광기의 모든 형태, 그는 모든 독소를 스스로 찾아 자기 속에 흡수하여 그 정수만을 보려합니다. 모든 신앙, 모든 초인적인 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무서운 고문, 그것에 의해 시인은 대환자, 대죄인, 위대한 저주받은 사람, 그리고 지고의 ‘학자’가 되는 것입니다! 미지에 도달했으므로,! 이미 다른 무엇보다도 비옥한 그의 영혼을 연마했으므로! 그가 상실하고 말 때에, 그때 그는 그 환각들을 보기는 본 것이다! 이름을 붙일 수도 없으며 전대미문의 사실에 깜짝 놀란 채 그는 나뒹굴어지기를! 가공할 다른 노동자들이 대신 올 것입니다. 견자가 쓰러진 그 지평에서부터 그들은 일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랭보가 쓴 <견자의 편지> 중에서.



그렇다. 그는 확고부동한 의식지평의 수준에서 인식하는 ‘견자’가 되어 남들을 판별하려고 했다. 젊은 랭보는 스스로 보는 자가 되기 위하여 진지하고 피나는 노력을 했다. 알코올, 환각제의 사용, 동성애, 무의식 세계의 탐구, 자발적 환상 상태의 조작, 심지어 자기 자신의 육체와 정신을 파괴하면서까지 미지의 세계, 현실과 환상이 겹치는 새로운 세계를 붙잡으려 했다. 그의 말대로 큰 병자, 큰 죄인, 큰 저주 받은 자가 됨으로서 최고의 지자(智者)가 되어 우주와 절대세계를 붙잡으려 했다. 또한 랭보는 이렇게 자기가 보는 미지의 세계, 환상의 세계를 표현하기 위해 모든 감각에 통하는 시적 언어를 만들려고 하였다. ‘향기, 소리, 빛깔 등 모든 것을 요약하는’ 언어이다. 그가 언어의 연금술이라고 부른 이 시도는 일찍이 보들레르가 시도한 것이 였으며, 빛깔의 소리를 듣고 소리의 향내를 맡을 수 있는 감각적 언어를 창조하는 일이였다. 그가 이러한 시도에 성공했는지는 차치하더라도, 그가 미지의 새로운 세계에 도달하기 위한 결사적 노력, 그리고 새로운 감각을 나타내는 새로운 시적 언어를 창출하려고 한 정신적 노력은 시에 대한 새로운 사명과 방식을 제시하였다는 점에서 큰 가치가 있다.

랭보, 하나의 전설적인 인물, 방랑을 해서 그가 시인으로서 문학을 통해 진정으로 이루고자 했던 것은 그가 말하는 ‘보는 자’가 되어버린 미지의 세계, 진정한 삶, 절대적인 것을 찾으려고 한 것이다.

아르투르 랭보는 그의 광란적 방랑, 몇 편의 파격적인 시, 그리고 문학에 대한 그의 돌연한 단절이 너무나 기이하여 일종의 전설적인 인물이 되고 있다. 따라서 그의 인물이나 작품에 대해서도 참으로 다양한 추측과 평가가 내려지고 있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가 16세에서 20세 안팎까지 단지 3~4년 동안에 문학으로 이뤄냈고, 우연히 남게 된 몇 편의 작품은 너무나 새롭고 강렬하고 깊이가 있어서 가히 천재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랭보의 시세계는 실로 ‘참다운 계시’라 할 만하다. 그의 이러한 재능은 일찍이 그가 선언했던 “시인이란 모든 감각의 거대하면서도 오래된, 이론적인 뒤틀림에 의해 견자가 된다.”는 그가 쓴 편지의 한 구절 속에 명백하게 표현되어 있다. 그가 시인의 최고의 경지를 표현한 견자라는 단어는 그의 시에 대단한 영향을 미친다. 그는 일상적이고 상투적인 사물에 대한 접근에서 벗어나 모든 감각이 뒤틀렸을 때 보여지는 새롭고 놀라운 사물의 모습을 시적 이상으로 삼고, 그러한 상태를 표현하는 자만이 견자라고 생각한다. 그의 견자시론은 두 가지의 의미를 갖는다. 하나는 세련된 과장법을 음절 단위의 리듬을 통해 표현하는 것이 전통이 된 프랑스 시에 대한 대담한 반항으로서의 의미이며, 또 하나는 기독교 정신에 기반을 둔 유럽 문명자체에 대한 문학적 혹은 직관적 회의로서의 의미이다. 그 두 가지 의미가 하나의 운동으로 행동화된 형식이 초현실주의 문학이다. 프랑스 시는 랭보를 통해 놀람과 경악을 금치 못했으며, 문명과 그것을 지탱해 주는 중산층은 조롱당했다.

랭보라는 경지는 모든 시인들의 꿈이자 시인 의식지평의 최고도의 초월적인 지점이며 어떤 시인이나 그 지점에 오르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필자는 밤마다 교교한 랭보의 아름다운 얼굴을 상상하는데, 그러나 랭보는 분명 이누스적인 측면을 가진 인물이었다. 한편으로는 아름다운 얼굴을 가지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잔혹하고 그로테스크한 것을 간직하고 있었다. 랭보를 보는 많은 사람들이 반발심과 공포를 느꼈고, 그 누구도 랭보에게 응수를 하거나 반항하는 이 없었다고 한다. 그리보면 천재란 무조건적으로 좋은 것은 아닌 가 보다. 일단 사람이 행복한 것이 선결되는 게 첫 번째 문제 아닌가! 능력은 그에 따라 부차적으로 뒤에서 응수해오는 것이여야 한다. 인간의식이 즉자적인 것이 아니라 대자적인 이유는 바로 인간이 이성을 가진 존재여서 그렇다. 인간의 이성은 응당 인간의 선결 조건이 되는 것이다. 다음의 희한한 시구를 보라.

‘오, 계절이여, 오 성이여.

결함 없는 영혼이 어디 있으랴?

오 계절이여, 오 성이여.

아무것도 피할 수 없는

행복에 대한 무한한 연구를 추구했노라.

프랑스의 수탉이 울 때마다

오 그 행복은 태어난다.

그러나! 나는 이젠 행복이 부럽지 않으리라.

행복이 나의 일생을 맡아 버렸기에,

이 마력! 그것은 나의 영혼과 육체를 사로잡고

모든 노력을 흐트려 보였다.

내말을 듣고 무슨 뜻을 알 수 있으랴?

내말은 도망쳐 날아가 없어진다!

오 계절이여, 오 성이여!

결함 없는 영혼이 어디 있으랴?’



계절과 성(成)이 무슨 관계인 지 모르겠지만 랭보는 시종일관 계절과 성의 상관성에 관해 함구하고자 한다. 영혼은 모종의 결함을 지니고 있는 법이다. 그러나 결함 없는 영혼이 어디 있느냐고 묻는다는 것은 이러한 모순적인 언사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과연 무엇을 추구했기에 이다지도 비판적이고 신랄했던가? 아무것도 피할 수 없는 행복에 대한 무한한 연구란 과연 무엇일까? 왜 ‘아무것도 피할 수 없다’고 했을까. 행복에 대한 무한한 연구라면 그 ‘연장성’을 드러내는 일일 텐데 그로서는 얼마나 고되고 지난한 연구였을까. 랭보는 하나의 전설이었다. 그의 전설성은 전유럽을 감동의 물결로 침식시켰고, 유럽인들은 랭보의 죽음을 심히 애도했다. 그렇다면 문학이란 무엇일까? 우리가 문학이 무엇인가에 대해 진심으로 해명할 자격을 갖출 때, 바로 거기에서 ‘문학에의 패러독스’가 덮치는 것이리라. 당신이 진정 문학이 무엇인가를 물을 자격을 고루 갖춘 바로 그 지점에서 당신의 역사는 사가들에 의해 쓰여 지는 진짜배기 역사이리라. 당신의 과거·현재·미래를 전개하는 시간들의 규합을 서술하는 역사의식은 당신에게 준거하는 과거가 아니라 생동하는 현재도 아니라 현현하는 미래지향적인 생활양식을 제공할 것이다. 그리하여, 삶이 알파와 오메가의 국면으로 다가올 때, 그리고 머지 않아 재창조된 신국면이 당신의 영혼에 들이닥칠 때, 그때에 비로소 당신은 스스로에게 이렇게 질문할 것이다. “그래서는 안 돼, 너는 왜 그렇게 한숨을 쉬니?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니? 다신 회복할 수 없는, 어떤 특별한 불행이니? 우리는 정말 그것에서 회복될 수 없겠니? 정말 모든 것이 다 망쳐진 거니?”



18. 비판 받아 마땅한 사람.

“언어에 대한 사고에 선재(先在)”, "언어는 사유에 선행한다“, 라는 [도올 김용옥]의 언어 관념의 체계의 도구연관적 문제의식은, 전적으로 모든 학자들이 자신의 학적 권력을 장중웅려하게 주창하기 위한, 피상적인 측면을 도구로 하여 인민기만의, 공교로운 일종의 사변적 소치의 편견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그리스 문화에서 암암리에 파생한 의식개념의 구조적 패러다임의 ‘오류’에 지나지 않는다고, 나는 더없이 강력하게 주장한다. 왜 이 동양 철학자는 순차적인 의미에서 사고(思考)가 언어보다도 열등/하등하다고 여기는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본질직관’이라는 후설 철학의 관념의 일부와, 아인슈타인이 주창한 ‘상대성 이론’이 직관의 발로에서부터 창조되어 그것이, 언어로서 해명되기까지의 과정을 전적으로 부정 시 하는 테제가 성립된다. 더군다나 러셀·비트겐슈타인의 언어철학을 부단히 긍정하는 시도가 될 수도 있다. 하기야 이는, 근세이후의 대부분의 전통 있는 주류(Major)의 사상가·이론가·철학자·논리학자들이 걸어온 원형, 이른바 실례를 자기 관조의 절대적인 중심기조의 저변으로 설정한 채, 다국적 언어를 도구로 하여 자신의 논리를 확장시키고 연장(延長)해 가면서, 극도의 연역적 접근 혹은 삼단논법의 무리한 남용 사례들을 관류함과 동시에, 이를 지나친 소급행위의 연속에 구속하여 하나의 일의적 도식에 실천에 접목한 채, 자기 관념의 설정과 정립에 있어, 일련의 언어체계의 반복법의 시행을 진행한 정신의 도정으로 받아들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매우 로컬리티하고 일곡적인 관점만을 부당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예를 들어, 현상에 착안하여 실재적 관념을 해명하고자하는 방향의식은 모든 자연과학자들이 실천하는 방식이다. 이런 귀납적 기술적 접근에 침윤한 지식은, ‘개별성→보편성’으로, 제한성→ 메타성‘으로 치환될 수 있는 장점을 가진다. 반면, 철학자들이 자주 써먹는 연역적 기술적 접근은 ’보편성→개별성‘, 메타성→제한(구속)성’에 천착하는 전혀 다른 방식을 제시한다. 이 이(二)분법에는 일장일단이 있으며, 이 두 가지 기술적 접근에서 일희일비하는 결론이 나오는 건 실로 지당하다. 그리하여, 여기서 실증하고자 하는 예는 바로 후자의 방법이 로컬리티적인 결과에 당착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번 연역적 삼단논법의 도식을 펼쳐보자.



모든 ‘사람(A)’은 ‘자본주의자이자 똥 싸는 기계(B)'이다. A→B (대전제)

‘이명박(C)’은 ‘사람(A)'이다. C→A (소전제)

‘이명박(C)’은 ‘자본주의자이자 똥 싸는 기계(B)’이다. C→B(결론)



코다(Coda)는 정립되었다. 이명박은 악랄한 자본주의자이자, 한국의 하수구를 채우는 역할을 담당하는 똥 싸는 기계이다. 이 삼단논법의 결론은 매우 로컬리티하다. 실제적으로 이명박은 한국의 제정·안보·세금·치안·중대한 최종 결정·정계·문화의 방향성을 종횡무진하지만 연역적 추리의 장벽은 이를 가로막는다. 이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삼단논법의 한계이다. 그러면 이제부터 언어철학의 기저가 선사하는 비인간성에 대해 알아보자.

언어의 몰도덕적·반휴머니즘적인 이론과 대치하여, 행위자의 행위가 모순되는 철학자인 하이데거의 삶을 보자.

기술과 과학적 진보를 모욕하면서도 나치즘에 경도되어 자기 스승이자 아버지 같은 존재인, [에드문트 후설]을 탄압하고 그의 원고를 전부 불살라 지어, 자기철학을 독일 철학사에 독보적이고, 마치 태양의 직사의 작열함과 같이 강렬한 새로움을 우리에게 제기했던(하이데거의 철학의 씨앗은 모두 후설의 현상학에 입각한다)20세기 철학의 최고봉 하이데거.

그는 삶의 아름다운 방면을 부지불식간에 종식시키고, 일그러진 인텔리의 인간군상을 대표했다. 그러한 행위를 실행한 하이데거를 용서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거기에 의거하여 어찌 보면, 우리는 온갖 궤변과 거짓이며 비인간적인 즉 논리학의 논지들을, 보다 엄밀하게 말해서 헤겔식의 사변적 논리들을, 서구 일변도의 역사에 개입시키기에 지나치게 몰두한 것 같다. ‘도처에서 생성되는 자본주의의 원리=바로 그것은 프롤레타리아의 대표자 [칼 마르크스]가 그토록 혐오하고, 자기중심적 사상을 개진시키기 위해, 강밀하면서도 섬세하게 고군분투한 노력의 산출물이 배척하고자 한 패러다임’은 우리 입장에서 보자면 현재 우리를 지배하는 <현실 사태 그자체>가 교조적으로 계시하는 ‘유기적인 장’이다. 이것을 조망하면서, 우리는 그러므로 모든 학자가 자신의 지성을 구조적인 뿌리에 의거하여 개설된 마치 그들의 불멸적 권력의 지반을 보증하는 ‘서구역사’가 곧 대세임을 우리는 부정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고대문명의 말류에 들어서 본원적인 진실적 역사가 돼 버린 그리스 문명 중심의 ‘텍스트로써의 과거’는, 우리네 삶이 따르고자 하는 우리 생활의 모든 지향성의 가장 위에 위치하여 우리의 ‘지금부터 시작하는’ 인간역사의 전형을 쓰게 강요한다. 즉 우리 남한의 미국기초적인 역사는 ‘한미 FTA’를 건너 이제는 서구보다 강력한 유교주의적인 자본주의를 이룩하게 했다. 우리는 아마도 10년 안에 일본을 넘어서게 되고, 현재 국가GDP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수출산업은 폭발적이고 산발적으로 진보하여, 현재 종교의 근저를 담당하는 여러 가지 ‘케리그마’의 한계를 뛰어넘어, 우리에게 지성 일반의 일률적인/획일적인, 연역적 접근으로서의, 곧 우리 모두가 당연시하는 자본의 심볼리즘을 지향하게 할 것이다. 기실 무신론이 득세하고, 거짓된 유신론자들은 ‘기독교적 교회’ 즉 신교의 철두철미한 보편사상을 위시하여, 돈을 생성하는 자본이라는 밑바탕에서 더더욱 사람들을 홀리고 미혹시킬 것이다. 좀 더 종교의 모순성을 폭로하자면, 이들은 신(God)이라는 추상개념을, 마치 인간 앞에 흔드는 회중시계의 현상처럼, 다만 두 개의 이중적 선택을 제시함으로써, 우리 종말의 배후에 영생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무기로 하여 우리를 기만하고 엿 먹이는 중이다.

필자의 친할머니는 전형적인 조증 환자였는데, 그녀는 손의 열 손가락 모두에 다이아몬드 반지를 장착한 채 성남거리를 배회하는 게 취미였다. 그것이 현재 월세방을 살면서 벤츠를 타고 다니는 젊은이와 꼭 같이, 그녀에게는 자기 아이덴티티 자기를 후천적으로 증명하는 하나의 방법이었다. 솔직히 말해 필자의 할머니는 고리대금업자였다. 그녀의 직원들, 즉 동네양아치 몇 명은, 업자인 할머니의 교조성에 따라서 손님의 돈을 강제적인 무력행위로 뜯어왔다. 그로인해 그녀는 비교적 넉넉하게 살 수 있었고, 또한 말년에 그녀는 어떤 방식으로 관조하여 일련의 자기 도덕을 완성했는지는 몰라도, 수많은 자기 고객들의 각서를 찢어버렸다. 일견 그녀의 전체적인 방법론은 현재 [노암 촘스키]가 논박할 때 빈번하게 사용되는 개념인 <초자본주의>의 극치라 할 수 있겠지만, 인생의 끝부분에 있어서 자기동일성의 파괴에 봉착했는지, 아니면 자기가 앓아왔던 ‘조증의 발로’ 이전의 선천적으로 소녀시절의 그녀가 가지고 있던 문학적인 직관의 사유가 재등장했는지, 그녀의 ‘목적론적 체계’가 내파(Implosion)됨으로써, 마지막에 이르러… 성남의 그녀의 빌라에서 가스자살로 생을 마쳤다. 아니, 자살이 아니고 타율적으로 실수를 해서, 즉 가스 밸브를 켜두고, 가스관이 파열되어 가스들이 세어 나온 것일 수도 있다. 여기에 덧붙여, 나의 친할머니가 이러한 더러운 직업으로 더러운 돈을 만지면서 명백히 자기 정체성의 엄존성을 부여한, 그러니까 그녀를 움직인 잔인한 이념이 흔들리지 않게 된 계기가 하나있다. 그녀는 자기를 위해 쏟아 부은 돈이 많지 않았다. 이건 내가 들은 내용에 완전히 기인한 것인데(따라서 자살이 아니라 자연사일 수 있다) 여기에 덧붙여 나의 친 고모에 대해 언급하겠다.

나는 2003년에 미국에 3개월 거주하는 특권을 누렸다. 시공을 중심기준으로 잡고 ‘이것, 저것’을 즉물적으로 논하는 걸 차치하면서 이 새로운 논지를 완성시키겠다. 나의 친고모는 시카고에서 부호까지는 아니라도 중산층 계급으로선 꽤 잘 사는 편이었다. 나의 친고모는 심한 우울증을 앓고 계셨는데, 그녀는 “밤만 되면 심장이 멈춘 것 같다, 혹은 내 심장이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라는 말로 자기 남편을 채찍질했는데, 이 히스테리에 질린 남편(고모부!)은 고모를 정신병원에 몇 차례 가두고 나서 이 일조차 질렸는지 그냥 방치해놓곤 했다. 가정싸움이 쟁쟁하게 밤마다 우리의 저택에서 울렸는데, 나조차도 미칠 지경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것을 극복하고자, 집에 있는 조그만 T컵 개들 2명을 폭행했다. 다리도 분질렀고, 귀도 찢고 털도 강제로 밀어버렸다. 쓰레빠로 특히 폭행하기를 좋아했는데, 지금에 와서는 이 개들에게 속죄하고 싶다. 문제는 그게 아니라 이 준저택(완전 저택은 아니었음. 규모로 봐서는 준저택)에 산탄총이 있었던 것이다. 혜민이(나의 사촌형, 고모부의 벤츠를 키 훔쳐 몰래타고 다니다가 걸림)와 혜리(사촌누나, 미친 돼지임, 늑대의 유혹 같은 쓰레기 저서를 읽음)는 가끔씩 이 산탄총을 가지고 놀았다가 고모부에게 걸려서 엄청나게 혼나곤 했다. 이 산탄총이 어디 있는지는 나도 모른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고모가 감기가 걸렸다며 목에 천을 두루고 거실에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고모가 식탁에서 포도주스를 마시다가 일종의 히스테리를 일으켰는데, 거의 발작 수준이었다. 그리고 나서 “심장이 뛰지 않아!”라고 소리친 후 2층으로 올라갔다. 나는 무슨 일인가 했다. 화장실만 7개 딸린 거대한 집에서 개인들은 부딪칠 필요도 없고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그런데 당시 목소리가 집 안을 쩌렁쩌렁 울리게 했다. 119가 집 앞에 도착했는데, 요원들이 현관 앞에 들어서는 순간 ‘쾅’ 소리가 났다. 태어나서 그렇게 크고 별나면서 무자비한 소리는 처음 들어봤다. 순간 귀가 먼 줄 알았다. 119요원들이 2층으로 올라갔고, 문은 잠겨 있었다. 요원들이 쇠젓가락으로 문을 따고, 바닥에는 고모의 시체가 있었다. 머리는 반으로 갈라졌고 혈흔은 바닥을 피범벅으로 만들었다. 총을 맞아서 죽은 사람을 그때 처음 봤는데, 나는 너무나 놀라 마치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FBI요원들이 노란색 테이프로 집 바깥을 둘러쌓았고, 고모의 시체는 시체안치실에 안치되어 해부되었다. 혜민이 형과 혜리누나는 정신 줄을 놓아버린 듯 얼굴이 시커멓고 말이 없었다.

그렇게 친할머니와 친고모를 16살 이전에 잃어버리고 나는 방황했다. 인간적 실재가, 인간존재가 그렇게 허무하게 끝나버리고, 더군다나 부자였던 그들이, 넉넉하고 뭐 하나 부족할 것 없는 인간들의 실존이 그렇게 무로 치환될 지는 죽어도 알 수 없었다. 생명은 소중한 것이지만 더러 허무한 대로를 거니는 것일 수도 있다.

미국의 고급 레스토랑에 가봤는데, 거기 잔뜩 쌓여있는 랍스타와 티라미스 케익, 그리고 일본식 초밥을 보았다. 나의 친 고모는 특히 콜레스테롤 수치에 신경 써서 절대 계란노른자나 새우를 먹지 않았는데, 어찌 보면 콜레스테롤의 저하가 자살을 부르는 건지도 모른다. 에스컬레이터 리무진이 시카고 시내를 활보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렉서스와 BMW, 벤츠를 타고 다닌다. 시카고는 미국 제 2의 상업도시이다. 최고층 빌딩들이 구름을 넘어 시카고의 슈퍼 스트럭쳐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글의 모두(冒頭)에서 도올 김욕옥 선생님을 폄하했는데 이에 대해 사과드린다. 사실 모든 운동가들은 이중적인 삶을 살아간다. 그들은 이신론자이고 이론가들이여서, 결코 자기 신념을 버리지 않는다. 김욕옥 선생님은 분명 열심히 살았을 것이다. 그래, 나도 열심히 살았다. 진짜 열심히 살았다. 그러나 내가 겪었던 과거는 실로 ‘엿’같다. 할머니와 고모의 자살로 인한 쇼크로 7년을 정신과약과 함께했다. 아니, 그들의 DNA가 나로부터 유전되어 사춘기 시절에 시작된 게 주 원인이며 나 또한 자살로 생을 마감할지도 모른다. 나의 아버지도 자살을 시도했었는데 어머니가 붙잡아서 간신히 16층 창문에서 떨어지는 걸 막을 수 있었다. 나의 동생은 강박증이다. 나는 조울증, 나의 동생은 강박증, 나의 아버지는 도박중독, 나의 할머니는 조증, 나의 큰고모는 우울증….

다행히 이경욱 교수님이 지어준 약으로 말미암아 자살을 면하게 되었다. 난 정말 살고 싶다. 죽고 싶지 않다. 나는 내가 해야 할 일이 있다. 그런데 문득문득 스치는 자살충동에 내 존재는 겁에 질린다. 살고 싶다. 한번 주어진 인생을, 한번 주어진 재현의 순간을, 한번 주어진 표상적 의미로서의 생을, 한번 주어진 이 긴 대로의 도정을, 나는 구가하고 싶다. 이상 글을 마치겠다. 지금까지 소천한 글을 읽어주신 분께 감사의 말을 전한다.



19. 현재.

우리의 사회는 하나의 다양체이다. 아니, 우리가 거기에 빨려 들어가고 다양화된다고 해야 할까? 각기 개인은 일종의 개인성을 갖추고 있고, 그 개인성의 기저(System)에는 ‘기원’과 ‘독창성’이 있다. 만약 내가 언어학자 소쉬르의 책[일반언어학 강의]를 원용하고자 한다면 과연 이 글의 논지의 흐름의 당위성에 어떤 객관적인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까? 소쉬르는 생을 살면서 단 한권의 책만을 저술했다. 아니, 그가 저술한 토막, 토막을 그의 후학들이 하나로 모아 선형적인 집합체를 완성했다고 봐야겠다. 소쉬르 교수는, 그의 강의가 끝나자 마자 자신이 써내려간 강의에 관한 고귀한 내용을 갈기갈기 찢었다고 한다. 그의 이 유일한 저서의 첨점의 주요 핵심은, “기표들의 ‘가치’는 어떤 지시체에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기표들과의 관계에 의해, 다른 기표들과의 차이에 의해 결정된다”이다. 여기서 논하는 지시체는 ‘기의’를 말하는 것이며, 이러한 그의 명제는 결과적으로 우리 삶에서 벌어질 수 있는 여러 사건에 관여하는 의사소통에 대해 불화가 생길 수 있다는 걸 제창하고 있다. 하기야 우리네 삶에서 얼마나 다른 이들과 말로써 전쟁을 벌이는가? 그게 우리 인생이란 게임의 전부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말을 하는 데 엄청난 시간을 소요한다. 가령 부부끼리 집안에 오순도순 앉아 대화를 한다 하자. 그들은 같이 TV를 보지만 사실 TV의 내용을 보는 게 아니라 대화로써 발화되는 ‘표현’의 기교에 더 신경을 쓴다. 여기에 바로 소쉬르가 지목하는 문제의식이 현존한다. 아니, 소쉬르의 말은 신경 쓰지 말자. 그는 이미 간(Gone) 사람이다. 우리가 의식적으로 상정해야 할 것은 소쉬르의 명제의 되풀이가 아니라, 바로 인생에 있어서 선형적 통일성 즉 자기동일성이 파괴되는 과정이다. 이런 자기 동일성은 보통 책-기계로 인해 깨지기 싶다. 혹자는 영화로 인해 깨질지도 모르고 혹자는 게임에 의해 깨질지도 모른다. 선험적인 음악을 듣고 깨어질 수도 있다. 고정관념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어쩌면 자기 동일성은 고정관념이란 총체적인 집합체일지도 모른다. 자기 동일성은 순수하게 내재성의 연쇄로 이어져 있다. 그것은 하나의 선(Line)이다. 자기 동일성은 우리가 살면서 수시로 변화하는 일종의 ‘인생의 연속체의 집합적 표징’이다. 그러하다면, 우리의 자기 동일성은 어느 때 바뀌게 되는 것일까? 그것은 어느 순간 변환/변이되는 개념일까? 내가 설파하고자 하는 내용은, 자기 동일성이란 자기의 정신적 얼굴이며, 그것은 곧 현재요, 그것은 곧 오늘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미래 혹은 더 나아가 인간 개인의 결론, 즉 죽음의 지점까지 이를 수 있다. 그러나 혹자는 죽음이 자기 동일성이 아니라고 반발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자기 존재를 비방하는 것이거니와 자기 실존은 언제나 생명과 함께 해 왔다고 역설하려 들 것이다. 그는 달려들어 나의 면상을 한 대 칠 것이다. 그럼에도 그의 마음속엔 허무주의가 깃들 것이다. 하기야 그의 삶은 정당하게도 그리고 당위적이게도 리좀에 귀착된다. 그는 촘스키의 ‘나무’ 도식에 바로 자기근거가 있으며 그것이 자기 상(狀)이라고 논파할 것이다. 그의 논지는 한결 선명하고 명정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논박당할 것이다. 나는 말한다. “당신의 기호는 지시대상과 무관해. 당신 몸이 그리는 랑그는 거짓된 몸짓에 불과해. 당신은 허구야. 당신이 살아왔던 삶은 픽션이야. 그러므로 당신이란 기호들의 규칙은 한마디로 우스워. 당신은 여태껏 살아오면서 물질성만을 보증하려 했어. 그것은 크나큰 과오야. 당신 앞에 서 있는 건 생이 아니라 지옥문이야. 그것만은 알아뒀으면 해.” 그리고 나서 그는 곧 정신을 잃을 것이다.

내용과 표현의 층위에서는 언제나 분열이 잇따른다. 현대인은 다만 허허로운 내용을 갖추고 살면서 표현에 자신의 모든 것을 삽입하려든다. 자신이 별 볼일 없는 존재이며 따라서 자기 존재성을 과시하기 위해 예의 방법을 선택한다. 그러한 그는, 비록 변별력과 말을 발화하는 능력은 갖췄지만, 그의 망실된 영혼은 이미 거기에 없다. 그의 군상의 배치에는 여러 복합적인 요소들이 결합되어 있다. 무릇 그가 의미하는 바는 보잘 것 없지만, 그가 한 명의 행위자로서 행동하고자 하는 열정은 무시될 바가 못 된다. 그를 이루고 있는 ‘배치’의 요소들은 자기기만․허식․거짓․독선․자기아집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니까 그라는 배치물의 근간에는 표현만을 중시하는 현대주의의 독선이 있다. 독선이란 인간이라는 지층을 이루고 있는 존립 평면(고른판)이다. 그가 다른 사람과 연결접속 되었을 때 비로소 ‘환상’을 경험하며, 자기를 기만함으로써 ‘주체’성을 확보하며, 허식으로 인해 사람들 사이에서 일종의 내밀한 시뮬라크르를 구축한다. 한 개인의 시뮬라크르엔 개별적 고유 밀도가 있다. 그것은 곧 강도이다. 고유밀도와 강도로 말미암은 이율배반엔 나름대로 지당한 뜻이 있다. 모든 사람이 생각하듯 자기는 자기의 로고스가 가장 넓은 의식지평을 가지고 있고, 가장 광활하고 심대한 정밀성과 교교한 정합성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관통하고 있는 일정한 발견의 논리에 근거한 면면한 유기적 통일성을 갖추고 있다고 여긴다. 허나, 그와 함께 다가오는 의문에 당착하면서 그는 이율배반의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예를 들어, 음운론과 의미론의 교착에서 기호들의 규칙 즉 언어체계 ‘랑그’라는 개념이 다른 명제와 당착하여 분절의 선을 이루고 있다고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교묘하고 공교로운 ‘이율배반’인 셈이다. 언어철학의 지층 즉 그 제반에 우뚝 서 있는 랑그들의 또 다른 명제와 이항을 이룸으로써, 대립이 정당한 당위성을 제반으로 하여, 랑그의 자의성은 불행히도 탈지층화에 빠진다. 그 양가적 부유(浮游)현상은 어떤 의미로도 그것을 정당화하는 일회적 이중성을 숨길 수 없다. 또 다른 예를 들어 보자. 우리 모두는 남성과 여성이라는 페르소나를 덮어 쓰고 있다. 남성은 페니스를, 여성은 음부를 소유하고 있다. 페니스가 음부에 연결접속 될 때 남녀 각각은 섹스기계로 변신한다. 그러나 남성은 어렸을 때 정자가 결여되어 있다. 반면 여성은 4살이 되면 난자를 갖추게 된다. 그래서 어린 소녀는 늙은 남성들에게 그다지도 성욕의 대상이 되는 것이며, 반면 늙은 여성은 어린 소년을 노리지 않게 된다. 왜냐하면 여성은 50살이 넘어가면서 ‘폐경’이 오게 되거니와 남성은 70살 까지 정자를 갖추고 있어 왕성한 성욕을 평생 유지하게 되기 때문이다. 앞에서 필설한 어린아이들의 성과 뒤에서 설명한 어른들의 성, 이 둘이 양립하여 이율배반의 일가를 이루게 되며, 이것은 칸트적 ‘이율배반’의 개념이라기보다는 아리스토텔레스적 ‘이율배반’이다. 그러나 위의 랑그와 아래의 페르소나의 실례가 모두 이율배반에 귀속하게 된다면, 우리는 여기서 각각의 지층이 탈지층화 되는 과정을 조망하면서 이 두 가지 배치에 여러 가지 속성적 명제을 부여할 수 있다. 첫째, 수많은 ‘대상’이 배치물이라는 이름의 큰 그림 속에 들어있으며, 주체가 되는 대상은 그 모든 것이다. 거기에는 주연도 없고 엑스트라도 없다. 하물며 배경조차도 연속적인 연쇄를 보증하는 하나의 ‘대상’이다. 둘째, 큰 그림은 하나의 ‘장(場)’이 아니다. 그것은 이른바 산이다. 이를테면 큰 그림은 외재성과 내재성을 동시에 보유하고 있다. 그러나 외재성과 내재성은 공시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터이다. 큰 그림의 외재성은 그것이 종이와 물감으로 중첩된 음운론적인 것이며, 내재성은 의미론적인 것이다. 근데 왜 하필 이 두 가지가 동시에 공존할 수 없는 소위 ‘공시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는 걸까? 이는 바로 인간이 그림을 순수하게 바라보지 않기 때문이다. 큰 그림의 즉 한 회화의 객관적 운명에 그 그림을 소묘한 화가는 아무런 영향을 미칠 수 없다. 여기서 ‘객관적 운명’이란 바로 그 그림의 즉물적 가치를 말하는 것이다. 그것이 경매로 넘어가서 어떤 가격에 팔릴지, 그리고 그것이 어느 유명 건물에 전시될 지는 아무도 갑자기 판단 내릴 수 없는 복잡 미묘한 것이며 예언 불가한 것이며 예측 불가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이중의 운명을 겪는 큰 그림이 시간의 흐름 속에서 계속 움직이면서 어떤 ‘가치’를 부여받게 될지(주관적 운명)는 숙고해볼 수 있을 것이다.

한 개인의 삶에 있어서 그는 정신없는 수많은 도덕적 이행을 경험할 것이다. 그러나 그 이행이 바로 진실되다고 느낄 때, 그는 거기에서 어찌할 수 없는 모순과 일련의 사고(思考)의 분열증을 경험할 것이다. 왜 우리가 다수의 ‘사건’과 ‘사태’에 당도하면서 이러한 미스터리한 희화적 해후를 맞이하는 것일까? 거기에는 여러 가지 복합 미묘한 이유가 있다. 그 해후 속에는 시의적절한 생성과 파괴의 순차적인 과정의 논리가 숨겨져 있다. 이 논리란 무엇인가. 이 논리의 구조를 귀납적으로 관찰하자면 우리는 여기서 여러 가지 해답을 모색해 낼 수 있으리라 본다. 이 논리의 근저에는 바로 사람과 사람이 교류하고 소통하면서 일구어내는 역사적인 형태 즉 양식이 있다. 이를테면 몇몇 사람들은 집에 거대한 서재를 갖추고 있으면서도 굳이 까페에 나와서 글을 쓴다. 왜 그가 그러한 엉뚱한 짓을 할까? 바로 나와 같은 경우다. 나는 책을 무조건 사서 본다. 그리고 영악하게도 교보문고에서 책이 때가 탈 때까지 둘러본 후 인터파크에서 적립금이랑 쿠폰을 이용하여 각종 할인된 양서들을 사서 본다. 그러하나, 나는 다독가라고 할 수 없다. 오히려 나는 책을 읽기를 좋아하기보다는 책을 소유하는 것을 값지게 여기는 사람이다. 내 서재에는 셀 수 없을 정도로 철학서와 사상서․문학서들이 밀집되어 있다. 거기서 내가 읽은 것은 100권 채 안 된다. 지금의 필력이 받쳐주는 이유는 내가 고등학생 때 수업을 도외시하고 혼자서 독학으로 글을 수없이 써내려갔기 때문이다. 독자적이고 자의적인 철학적 글쓰기는 내게 천문학적인 도움을 주었다. 이것은 명실 공히 들뢰즈적 ‘리좀’의 결과이다. ‘나무’와 달리 중심뿌리가 없는 이러한 정신적 천착/착안들은 복합적이고 계산 불가한, 도를 지나친 해석을 개입시켜서 외려 일을 망칠 번한 전과를 가지고 있는 내가 도구적으로 사용해도 가히 인간의 한계를 예고하는 그러한 묵시록적인 건투가 된 것이다. 그렇다고 리좀이 무조건 인간의 한계를 만천하에 드러내어 우리를 신의 저켠의 배후에 밀어넣는 것은 아니다. ‘신의 저켠의 배후’란 소위 신의 어둠성을 나타낸다. 신은 우리를 죽음의 편에 밀어 넣으려고 하고 자신은 영생을 가졌다. 그는 역설적인 거짓말쟁이에 사탄보다 더 조악한 악마이다. 인간이 한계에 봉착할 때마다 그러한 어둠의 세계의 현현을 경험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리좀은 과연 조악한 것일까? 들뢰즈는 6층 자기 집에서 투신자살함으로써 리좀을 역사상 가장 의미심장한 구조물이 되게 했다. 그의 비보를 들은 모두가 그의 죽음을 슬퍼했다. 그리고 리좀이라는 철학적 관념에 대해 배우고자 노력했는데, 그의 저서들이 무슨 말인지도 잘 모르겠는데 알아볼 방도마저 여의치 않거니와 ‘불친절한 대목들과=압축한 대목들과’ 난해함에 기가 질려 결국에는 포기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의 후학들이 살아남아 그것을 명백히 포스트모더니즘의 효시로 세계 철학사에 점철하였다.

말이 조금 샜는데(나의 선배 들뢰즈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하다가) 내가 까페에서 무거운 양서들을 가방에 넣어서 자전거를 타고, 집에서 10분 거리의 까페까지 가는 이유는 이렇다. 첫째는 내가 외롭기 때문이요, 둘째는 글쓰기와 독서의 지(知)적성을 과시해 여자를 꼬시기 위함이다. 나의 스승 사르트르도 프랑스의 여러 까페를 전전하며 철학의 글쓰기를 성취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글을 쓰는 이유가 이른바 여자를 꼬시기 위함이라고 에둘러댔다. 그렇다면 그 에두른 지점에서 더 멀리 나아가 그는 어떤 전위적인 목적을, 자신의 글쓰기방식에 도입하여 그 지독한, 자명한 논리학으로 말미암아 또 다른 방법론을 전개하기에 이르렀는가! 사르트르, 그의 백미는 무엇보다 오르가논한 글쓰기에 있다. 그의 글에는 수미일관하게 영지주의적 오르가논이 면면히 흐른다. 그것은 집에서는 발명돼지가 않는다. 그것은 바로 카페에서만 발정나는 것이다. 그러니까 ‘까페에서 글쓰려는 일련의 시도’가 앞에서 설명한 ‘해후의 논리’의 실체이다. 생성과 논리의 단자가 이합집산하는 것은, 즉 우리가 도덕적 이행을 실천하는 것은 이르자면, 우리 자신이 바로 하나 되는 둘이기 때문이다. 자세히 말해, <이합집산=하나 되는 둘>이다. 이것은 한 개가 둘로 나뉘는 이중분절 즉 새로운 생성의 논리이다. 들뢰즈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쉽게 말해서 한 인간이 거울을 들여다보면 거울의 나와, 거울에 반영되는 내가 있다. 그것은 ‘하나 되는 둘’이다. 도덕적 이행의 과정을 거침으로써 하나의 실체는 둘이 된다. 반면 파괴의 측면에서 보자면 이 역시 합당하다고 봐야 한다. 하나가 둘로 갈라짐으로써 그는 양가적으로 쪼개지기 때문에 그것 역시 ‘파괴’이기 때문이다.

각설하고, 우리 사회가 다양체이든 서구의 로고스가 세상에서 가장 이성적인 관념이든, 칸트라는 존재와 칸트가 재정립한 관념이 ‘이율배반’이 그렇게 눈부시든, 우리의 ‘도덕적 이행’이 ‘해후의 논리’와 얼마만큼 관여되어 있든 아니든, 그리고 우리가 마음에 맞는 남자친구나 여자친구를 만나든, 그렇게 해서 종래에 아이도 낳고 오순도순 잘 살아가든 아니든, 모든 걸 차치하고 우리는 마침내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우리는 자식을 위한 하나의 다리이다. 그리고 또 그 자식은 또 하나의 다리가 될 것이다. 다리, 다리, 다리, 다리 그리고 인류…. 인간실존의 실재는 바로 우리가 삶에서 어떤 관심을 가지고 어떤 방향의식으로 사유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우리는 한때는 움츠려 들지라도 결국에는 쾌활해지며 즐겁게 노래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죽음은 우리 앞에 포석처럼 놓여져 있다. 우리의 결과는 ‘죽음’이다. 모두가 죽는다. 아무리 부자라도, 아무리 아름다워도, 아무리 친구와 자식이 많아도! 죽음은 우리 모두가 귀착하는 결과인 것이다. 필자는 죽기 싫다. 나는 죽을 수 없다. 이래선 안 된다! 죽음을 방해하는 어떤 과학이 나와야 한다. 이미 많은 것이 나왔지만 영생을 보장하는 것은 여태껏 없었다. 우리는 영생을 누려야 한다.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다 모두들! 모두들 자지에서 방울소리 나게 튀어나와라! 자지가 바로 생명이니!

그래서 나는 아이를 만들기를 원하는 것이다. 인간은 생산해야 한다. 인류는 팽창되어야 한다. 죽음 앞에서 모두가 침묵을 지키지만 한 사람은 말해야 한다. 죽음이 얼마나 우리를 무위로 이끌고 죽음이 얼마나 우리를 무정과 공무(空無)화한 세계로 이끄는지! 너무나 고통스럽다. 도저히 죽음을 극복해낼 어떠한 방법론도 찾기 어렵다. 내가 영생을 유지하는 방법에 접근하여 전인류에 그것을 제시하고 싶다. 그것이 내 유일한 꿈이다. 어떻게 하면 인간불멸을 유지할 수 있을까? 여기저기 찾아보고 여기저기 둘러보아도 도저히 해답이 없다. 그리하여, 내가 목도하는 여러 신의 현현은 극히 애석한 것이다. 그렇거니와, 내가 모색하고 정밀하게 연역적으로 접근하여 생성한 증명의 논리도 모두 헛된 것이다. 어떻게 하면 진정한 사회를, 그 다양체를 승화시켜 우주라는 무한세계에 있어 명시시킬 수 있는 것일까?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도다. 그러나 난 안다. 인간의 지식이 인류를 순차적으로 거쳐 인류의 끝자락까지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을! 인간 삶에 있어서 지식만이, 예술만이 하늘의 별처럼 영원히 빛날 따름일 것이다. 그리고 나는 말하려 한다. 그는 말하려 한다. 그가 바로 여기 있음을. 그는 단지 현재를 살아가려 함이다. 현재! 현재! 현재!



20. 약물과 사유/예술

한 명의 철학사상가나 문인은 자신의 작품을 완성할 때 커피나 담배, 각성제나 환각제에 손을 대기도 한다. 그렇다면 아주 가벼운 약물인 커피에 대해 얘기해보자.

VOL 1 : 커피

로마교황은 말했다. “커피는 신의 축복이다.” 이제 커피가 없는 현대인의 삶은 찾아보기 힘들다. 커피의 교역량은 석유 다음으로 가장 많으며 식품 중에는 1위를 차지한다. 전세계 사람들이 신의 세례를 받는다고 할 수 있다. 프랑스의 대문호 발자크는 커피를 마실 때마다 상상력의 한계가 부서진다고 했고, 마르크스는 14잔의 커피를 냅다 마시며 역사를 바꿔 놓은 저서 ‘자본론’을 탈고했다. T.S엘리엇은 커피 알의 개수로 자신의 작품의 크기를 잰다고 했고, 베토벤은 매일 정확히 똑같은 개수의 커피 알로 하루를 시작했다. 칸트는 죽음의 문 앞에서까지 커피를 찾았고, 바흐는 커피가 자신을 신의 경지까지 끌어올린다고 고백했다. 필자는 신앙이 아닌 커피에서 신(神)을 찾을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다. 필자가 처음 커피를 접했을 때는 20살 때이다. 어느 커피 전문점에서 한 잔의 에스프레소를 마셨는데, 그때의 기분을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다. 소위 영지주의의 ‘카발라’가 필자의 영혼을 흠빡 적셔주었다. 나는 한 잔의 커피를 마심으로써 남들이 보지 못한 영역을 넘볼 수 있었고, 다시는 경험하지 못할 최고의 쾌락을 맛보았다. 나의 지식은 이미 평상시 체현할 수 없는 메타적 범주로까지 뻗어나가고 있었거니와 의지는 하늘을 뚫을 듯했고 삶에 대한 강렬하고 아름다운 열정이 탐미적으로 나의 마음의 눈을 번쩍 뜨게 해 주었다. 자의식은 과잉하고 있었고 그 짧은 순간 나는 세상을 누구보다 사랑했다. 한마디로 커피는 나의 삶을 바꿔놓았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커피가 나를 이 정도 경지로까지 끌어올릴 줄이야!’라고. 솔직히 말해 나는 커피의 지식에 관해서는 문외한이다. 그러나 누구보다 커피를 사랑하고 아끼는 한 사람으로써 여러분에게 커피에 관해 말해보려고 한다. 신이 우리에게 준 유일한 선물이 있다면 그것은 ‘커피’ 하나라고 여러분에게 거침없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커피는 축복이다.

그러므로 나는 커피를 좋아한다. 그래서 불면의 밤을 보내는 이래선 안 되겠다 생각하여 열흘 동안 커피를 끊었다가 머리가 아파 다시 마시게 되었다. 커피가 나를 이 정도까지 고양시킬 줄은 습관적으로 마실 때는 모르는 일이었는데, 지금 다시 마셔보니 마음이 깨끗해지면서 모종의 열정을 느낄 수 있었고, 담배가 나를 취하게 하고 멍청하게 만든다면 커피는 반대로 나를 자극시키고 삶이란 무료한 게 아니라 정말로 살 가치가 있는 어떤 것이라는 생각으로 귀결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당뇨도 예방하고, 혈압을 상승시켜 기분이 좋게 하고, 항암작용도 하고, 해열작용, 항산화작용에 두통치료 그리고 파킨슨병/알츠하이머 예방까지 갖출 건 다 갖춘 신의 음료수라고도 할 수 있다. 확실히 지식과 창조는 커피가 없이는 진보될 수 없는 동심원과도 같은 것이리라.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커피는 창조의 근원이자 남성주의의 표본이다. 커피는 공격하고 계획을 촘촘히 짜며, 개설하고 사람들을 하나로 끌어 모은다. 커피는 포옹하고 한 인간을 쓸모없는 사람에서 쓸모 있는 사람으로 끌어올리며, 온몸의 피를 뇌에 몰리게 하는 작용을 한다. 커피는 영지주의의 표상이거니와 현대의 시대정신인 ‘속도’에 걸맞은 식물성 알칼로이드인 카페인을 다량 함유하고 있다. 혈압을 적당히 올려 기분 좋게 해주고 근육의 지구력을 상승시켜 오랫동안 운동이 가능하게 해준다. 또한 몸의 글리코겐 대신 오로지 지방 부분만 태우므로 놀라운 다이어트 효과를 가능케 한다. 인슐린을 자극하여 당뇨를 예방하고 심장을 적당히 자극해 심장병을 방지한다. 또한 뇌줄중과 치매, 파킨스 병을 예방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커피의 매력은 중추신경계(CNS) 즉 뇌에 작용하는 효과일 것이다. 카페인이 부신의 아드레날린을 자극하므로 이렇게 생성된 아드레날린은 뇌로 이동하여 뇌에서는 그 방어기제인 노르아드레날린을 폭발적으로 생성한다. 노르아드레날린은 각성과 의식, 감정의 확대를 가져와 기분이 깨이면서 일시적으로 즐거워진다. 카페인은 뇌로 도달하기 직전 뇌 혈관장벽(Brain blood barrier)를 통과하여 뇌내 이데노신에 브레이크를 걸으므로, 그로 인해 Camp수가 확산되어 도파민 수치가 항진한다. 그러면서 황홀감을 느끼게 되며 지(知)의 폭발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이에 덧붙여 뇌를 점하고 있는 도파민은 산화되면서 노르아드레날린으로 변용된다. 따라서 커피는 아주 강력한 노르아드레날린 촉진 음료이다. 이외에도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않은 여러 가지 뇌에 미치는 영향들이 있지만 필자가 과학자도 아니므로 그 이상 함부로 말하지는 않겠다. 내가 철학적인 글을 위해 펜을 드는 것은 매우 오랜만인 것 같다. 사실상 커피를 끊었던 수일간 내가 지각할 수 있는 사실이라고는 나 자신이 매우 불필요한 사람이라는 것 하나였다. 그러나 지금은 내 사유와 언어능력의 집적의 용광로가 끓어오르고 있으며 그런 이유로 나는 오랜만에 나의 철학사상의 정수를 여기에 직접 내뱉으려고 한다. 하나님이 유일하게 우리에게 선사한 축복이 있다면 그것은 다름 아닌 ‘커피’ 하나뿐 일 것이다. 랭보가 말하지 않았는가? “시인은 모든 감각 기관에 걸친 광대무변하면서도 이치에 맞는 착란에 의해 견자가 됩니다.” 커피는 지식인의 최고의 보루이자 학구적 의식의 힘을 끌어올려준다. 그런고로 나는 커피 광이다. 커피는 확실히 지적능력의 상승을 가져와서 미친 듯이 글을 갈겨쓰게 만든다. 커피는 지식인에게는 크나큰 축복이다. 어쩌면 커피가 대대적으로 상용화되어 유럽 곳곳에 카페들이 들어선 이후의 시기부터 지식이 갑작스럽게 팽창했던 것은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

나는 무수한 개인커피숍을 편력했지만 나를 만족해줄만한 곳은 한 곳도 없었다. 결국 나는 직접 커피를 만들어보려고 작정했다. 전문가들이 말하다시피 최고의 커피는 에스프레소가 아니라 드립커피라고 했다. 에스프레소는 일률적으로 똑같은 맛을 뽑아낼 수는 있지만 인위적이고 무엇보다 혼이 담겨있지 않다. 자신의 자아를 담아 손수 한 잔의 커피를 내려 마시는 것이 내가 그렇게도 커피에서 신을 갈구하는 욕망을 만족시켜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드립커피에 입문한 지 2년이 흘렀다. 그렇게 나는 어떻게 하면 커피에 혼을 담을 수 있는 지에 대해 고찰하기 시작했고 드디어 성공했다고 생각되는 순간에 나의 결과물을 마시고서는 거기서 신을 찾았다고 여겨졌다. 혼이 담긴 커피를 주조하는 기법을 연구하느라고 엄청난 양의 원두를 소비했다. 나의 팔은 무리한 핸드밀의 사용으로 비정상적인 근육이 생기기 시작했지만 나는 그것을 노동의 결실이라 여겼다. 나는 진정한 사유의 힘이 책이 아닌 커피에서 나온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커피의 꽃인 ‘드립커피’야말로 인간의 영혼을 구원해줄 수 있는 유일한 방책이라고 여기는 사람이다. 드립커피는 무엇보다 노력만이 그 맛의 비결의 관건이라 할 수 있다. 일단 절대 자동 그라인더를 사용하여 원두를 갈아서는 안 된다. 그것은 땀 흘리는 아프리카 농부들을 모욕하는 일이다. 오로지 핸드밀로만 손수 자신의 팔 근육을 사용해서 커피를 갈아야 한다. 일단 일반 커피점에서는 비용을 아끼고자 드립커피에 원두를 매우 적게 사용한다. 필자가 말하건대 드립커피의 원두 소모량과 맛은 ‘정비례’한다. 그렇다고 무리하게 엄청난 양의 원두를 사용할 필요는 없다. 어느 선에서 절제할 줄 아는 게 중용의 도일 것이다. 물론 혹자는 드립커피를 에스프레소처럼 진하게 마시는 법이 어디 있냐고 반문할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흐린 커피를 보리차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남아는 자고로 진한 커피를 마셔야 중원을 평정할 수 있는 법이다. 나의 소소한 행복 중에 하나가 드립 커피를 내려서 가족과 함께 먹는 것이다. 드립 커피는 솔직히 에스프레소보다 더 맛있다. 먹어본 사람만이 그 진가를 안다. 에스프레소는 너무 인위적이고 향의 강도와 밀도가 드립커피보다 엷다. 제대로 내린 드립 커피는 에스프레소보다 진하고 스모키한 환상적 방향을 자랑한다. 나는 커피를 정말 사랑한다. 새해에 또 인스탄트 커피 값이 또 오른다고 한다. 이참에 드립커피로 갈아타면 정말 좋은 기회라 생각된다. 드립 커피는 음료라기보다는 하나의 예술에 가깝다. 드립커피에 혼을 불어 넣고 내리면 그 정신적 실체가 드립 커피에 묘묘히 배겨든다. 나는 오늘 드립커피를 내려 가족 성원, 가령 아버지, 어머니, 할머니, 동생과 나누어 먹었다. 10인용 고노 드립퍼로 대략 180g의 많은 양의 원두로 충분했다. 담배는 피지 않을 수 있지만 커피를 먹지 않는 내 삶은 상상하기 어렵다. 페이퍼 드립, 즉 손으로 내리는 커피에는 석가가 모든 사물에 신이 있다고 했듯 신에 섬세하게 스며들어 있다. 그럼 저번에 드립 커피 내리는 법을 자세히 설명 안 해서 이번에 확실히 말해두겠다. 가족과 커피를 나누어 먹는 것도 하나의 낭만이지 않을까? 나는 커피 없이 살 수 없다. 커피는 나의 삶을 변화시켜 주었고, 내 철학사상과 문학 다음으로 커피는 내게 중요한 것이다. 더군다나 여자 친구도 없으니 외로운 가운데서도 커피만이 내게 큰 위안을 준다. 대부분의 커피숍에서는 싸구려 아라비카 원두를 써서 그 맛이 덜떨어졌다고 볼 수 있지만, 집에서 내려 먹는 드립 커피에는 고급 원두를 써서 사실 커피숍과 양이나 질에서 비교할 바가 못 된다. 일본은 드립 커피가 전세계에서 최고로 발달한 나라이고, 우리나라도 곧 인스탄트 믹스 커피를 그만 먹고(담합과 가격 상승이 너무 심하다. 거품이 너무 끼고, 솔직히 너무 맛없다) 모두 드립 커피 한 잔 했으면 좋겠다. 드립 커피는 너무 좋은 취미이다. 사실 나는 오디오를 하는 사람이지만, 그래서 내겐 여러 취미가 있고 오디오도 물론 좋지만 드립 커피란 취미보다는 재미가 떨어진다. 커피는 항상 나와 함께할 것이다. 나는 내 커피를 다른 사람에게 대접하는 걸 좋아한다. 그리고 인정받는 걸 좋아한다. 아주 독한 드립 커피 한 잔은 나른한 몸을 깨워주고 사람을 아주 즐겁게 한다. 커피를 모르는 자는 현대문명의 이기를 알 수 없다고 생각한다. 커피가 너무 좋다.

Conclusion : 커피가 지적능력과 필력의 상승을 담보할 수 있는지는 불문에 부치기에는 너무 한 개인의 사변적 사유에 끼치는 영향이 강력하다. 커피는 언어능력의 폭발과 직결되어있다. 한국인은 한국어로 사유하고 사고방식의 선형적인 공간을 공전한다. 따라서 커피의 ‘카페인’은 확실히 저자로 하여금 탁월하고 열정적이며 철학사상적인 추상의 글쓰기의 예술을 보증하는 유일한 보루임에 다름 아닐 것이다. 커피의 양은 곧 사유의 양이다. 커피를 냅다 당신의 위장에 부어넣으라. 그리하면 당신은 역사에 길이 남을 지식인이 될지도 모를 테니.



VOL 2 : 담배

담배는 예술가와 철학사상가가 그린 역사의 궤적에 꼭 빠질 수 없는 기호식품이다. 파이프담배를 피우며 광적인 그림을 그린 고흐, 역사에 길이 남을 ‘일반상대성이론’을 파이프담배를 피우면서 천명한 천재물리학자 아인슈타인, 파이프담배를 피우며 영국 지성의 최고봉으로 올라선 버트런트 러셀, 시가를 줄담배로 피우며 정신분석학이라는 미증유의 학설을 창시한 프로이트, 파이프와 언제나 함께 있었던 프랑스 지성의 최고봉 사르트르. 따라서 이들을 보고 있노라면 담배가 얼만큼 그들의 지성에 확실한 영향력을 행사했는지를 추측할 수 있다. 아메리카에서 건너온 신비로운 약초 담배. 세계 최고의 지성인들과 내놓으라하는 예술가들이 즐겨 피웠던 담배의 유구한 역사는 우리에게 결코 낯설지만은 않다. 그렇다면 담배의 어떤 성분이 그들의 기분을 한층 고양시켰던 것일까? 문제는 이것이다. 니코틴이란 담배의 식물성 알칼로이드 성분이 뇌내 혈관장벽을 통과하여 도파민과 가바 수치를 올려 안정감과 도취감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또한 부신을 자극하여 아드레날린을 생산하면, 이것이 뇌내 혈관장벽을 타고 올라가 노르아드레날린을 유포시킴으로써 각성과 의식의 팽창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반대로 세로토닌수치를 낮춰 행복감을 떨어뜨린다. 이런 연유로 담배는 많은 지식·예술가들의 기호 식품으로서 자리 잡았으며, 어쩌면 담배 자체가 우리의 사유능력을 증감시키는 효과가 있는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담배의 해악성을 생각하면 우리가 담배가 신의 축복이라고 은근히 제시할 타당성의 여지가 남아 있는지는 필자도 감히 끄덕일 수 없다.

Conclusion : 담배가 도파민 수치를 강하게 올리면서 사유나 언어적 능력에 힘을 부여하는 건 과학적으로 증명된 사실이다. 담배라는 백해무익한 약물을 전국민이 피우는 작금에 우리 지식인들은 어떻게 대체해야 할까? 그러나 답은 간단하다. 그들과 차별성을 두어 싸구려 궐련을 피우는 대신 고급 파이프에 독일산 연초를 넣어 피우는 것이다. 지식인과 노동 잡부가 피우는 담배에는 하나의 상이성이 존재해야 한다. 어떻게 고귀한 엘리트와 공장노동자가 동류가 될 수 있겠는가? 나는 파이프를 평생 피우겠다.



VOL 3 : 술

예를 들어 랭보는 자신의 시時작을 역사 이례 가장 위대하고 천재작인 작품으로 선보이고자 압생트(예술가들이 주로 먹는 술, 알코올 도수가 50도가 넘어가며, 약간의 아편을 섞기도 한다)를 남용했고, 한국 문단의 최고봉이라 불리며 한 해도 빠짐없이 노벨 문학상 후보에 오르는 ‘시인 고은’역시 소주를 물 대용으로 마신다고 한다. 술과 시는 중국 시성 이태백 이후로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로 고착되었고, 고흐 역시 이 압셍트를 물처럼 마셨다고 한다. 그리고 헤밍웨이도 죽어가면서도 독한 위스키를 마시고 불후의 명작 ‘노인과 바다’를 썼다고 하니 술의 놀라운 위력을 새삼 실감하지 않을 수 없는 지경이다.

알콜이란, 식물성 알칼로이드는 뇌에 작용하여 세로토닌 수치를 60%늘리고 도파민 수치도 항진시킨다. 그리고 가바에도 영향을 미쳐 극도의 안정감에서 오는 쾌락을 느끼며, 심지어 운동하면서 생성되는 엔돌핀을 인위적/강제적으로 파생시켜 엄청난 쾌락을 가져온다. 비록 술을 철학사상가들이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퇴폐한 예술가들은 아주 강한 술을 즐겨 마시곤 했다. 알콜 농도가 40도가 넘어가는 술을 물처럼 마시면 환각 상태에 빠지게 되는데, 그럼으로써 그들의 예술에 초현실성을 더할 수 있는 것일까? 이리하여 감히 예측할 수 없지 만서도 술의 신비성과 영험성에 호기심이 가는 건 무리가 아닐 테다.

술, 그 위험한 유혹을 가진 묘약. 예술을 하려면 술을 반드시 마셔야 할까? 답은 마시는 자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Conclusion : 술은 신의 선물일지도 모른다. 그 알딸딸함, 그 만족감, 그 쾌락. 그러나 술을 단지 즐기는 용도로 즐기는 건 천박한 것이다. 앞서 담배의 결론에서 암시했듯 멍청한 술꾼과 예술가들 간에 마땅이 선행되어야 하는 당연한 상이성이 존재해야 한다. 어떻게 그들 얼간이 술꾼과 위대한 예술가가 한 땅에서 병존할 수 있겠는가. 따라서 얼간이 술꾼은 소주 나 막걸리 따위나 마시고, 우리 예술가들은 코냑이나 보드카, 압생트를 마셔야 할 것이다. 그리하면 술도 마땅히 예술을 위한 예술을 위시한 고급의 기호식품으로서 자리 잡는 것이다.



VOL 3 : 강한 마약

초현실주의의 대표적 작가 브로통은 암페타민을 줄기차게 복용하여 15일 만에 하나의 장편을 완성했다. 20세기 지성의 최고봉 사르트르는 코리드란을 무려 한 튜브를 복용하여 한나절 동안 정신적인 충혈상태에 빠져 미친 듯이 철학 사상 가장 방대한 저서인 ‘변증법적 이성비판’을 완성했고, 메스카린을 일부러 주사함으로써 환각 상태에 자신을 몰아넣기도 했다. 착란과 환각에 빠져 지적 본능에 입각하여 미친 듯이 글을 써내려 가야 한다. 비록 무분별한 마약의 과량복용으로 훗날 노인의 나이에 치매가 오더라도 자신의 천재적 능력을 최대한 끌어낼 수 있다면 마약은 예술가들에게 필수적인 품목이다. 하나의 거대한 기념비적 예술작품을 창출하고 마약의 반작용으로 인한 심한 치매성 우울증에 걸려 구질구질 살지 않고 자살할 수 있다면, 그것보다 큰 영광이 어디 있으랴? 작품은 당신의 불멸성을 보증할 것이거니와 당신은 당신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파악할 수 있는 좋은 계기를 얻게 되는 것이다. 필자는 어느 정도 지식을 축적한 후 네덜란드에 가서 새로운 대작품을 완성하려고 한다. 네덜란드는 마약이 어느 정도 합법화돼 있어 딴 생각 하지 않고 작품을 완성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마약을 즐기기 위해서 하는 게 아니라 단지 위대한 글을 써내려가기 위해서 그 고양과 고무의 상태에 빠지는 것이다. 아무래도 글을 쓰기 위해서는 뇌를 마비시킬 정도로 강력한 마약은 피해야 할 것이다. 그러니까 소프트한 마약, 즉 암페타민 정도면 충분할 것이리라. 필자는 암페타민을 복용한 바 없지만, 즉 마약의 ‘마’자도 모르지만, 이론적 지식은 상당할 정도로 알고 있다. 마약이 단순히 유희용이 아니라 작품창작에 큰 공로를 차지할 수 있다면 충분히 그 가치의 소용에 있어 정당하게 인정해야 할 것이다.

당신은 지知의 미칠 듯한 열정의 폭풍에 도취돼 본 적이 있는가? 생각의 속도가 점차 빨라지면서 진실과 진리를 이해하는 바의 연쇄가 폭발적으로 이루어지는 데서 오는 엄청난 쾌감을 느껴본 적이 있는가? 그렇다. 도취가 전부다. 글을 미친 속도로 단숨에 써내려 가고, 글을 집필함에 따라 하나의 체계가 직조되는 걸, 그러니까 하나의 시스템이 차근차근 완성되어 가는 그 파란만장한 유쾌함을, 그 흥분을 적나라하게 느껴야 하는 것이다. 당신이 자신의 혼을 바쳐 완성한 예술작품은 일종의 당신의 자식으로, 당신의 진짜 자식보다 더욱 당신의 불멸을 보증할 것이다. 진짜 자식 키워 바야 나중에 당신이 늙으면 요양원에 쳐 넣는 일밖에 더하겠는가? 그러나 작품은 생생히 살아서 당신을 지켜주고 기억해줄 것이다.

Conclusion : 솔직히 강한 마약들은 위험하지만 효과는 그만큼 크다. 진정으로 위대한 철학사상과 예술을 배출하고 싶다면 마약도 물론 복용할 가치가 있다. 그러나 중독까지는 가지 않아야 하며 단순히 학계와 예술계의 거두로 올라서기 위해, 이른바 위대한 철학사상가/예술가가 되기 위한 마약복용은 합법적으로 인정받아야 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각성해야 한다. 깨어있어야 한다. 다른 사람이 자도 누군가는 깨어있어야 한다.



-결론

우리 삶 저변에 철학이 두루 깔려있다. 철학은 요컨대 시대에 관한 논쟁 즉 담론이라 할 수 있겠다. 철학은 우리가 무엇 때문에 사는가, 하는 의문점을 간파하게 해주며 우리가 살아야 할 이유를 분명히 제시해준다. 우리가 일벌레로서 고군분투하여 악착같이 사는 이유는 모두가 헤겔 말마따나 시대의 아들이기 때문이리라. 마땅히 아들로서 이 시대를 짊어져야 할, 봉양해야 할 하나의 이유가 있는 것이며, 아무리 이 시대가 썩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개선해나가지 않으면 안 되는 필연적인 근거를 우리의 마음 한가운데 내포하고 사는 것이다. 이제껏 우리 조상들이 살아온 장중웅려하고 심원한, 인간의 복잡미묘하면서도 의미심장한 삶을 관찰하면서 우리는, 우리를 돌보기 바쁜 그 한가운데서도 마치 세상이 전회하는 것 같은 대오의 순간을 경험하는 것이리라. 필자가 이 글에서 해명하고 싶은 안건은 바로 ‘철학은 명백히 미래의 근원’이라는 것이다. 철학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으며, 철학만이 우리 미래의 예상할 수 없는 사태에 처방을 내리고 해결할 수 있는 절체절명의 관건인 것이다. 우리는 철학의 거울로 시대를 파악하며, 과거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고 더 나아가 미래를 조망하여, 그리고 나서 과거·현재·미래를 합일하여 하나의 진리의 관념체계를 마치 하나의 기념비처럼 우뚝 세우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전우주가 이미 시간이라는 요소를 가로질러 공간도 갖지 않고 모종의 차원이나 부피나 강밀도도 갖지 않은, 즉 시작도 끝도 없는 하나의 형이상학적 체계의 총아임을 퍼뜩 깨달을 것이다.



10회의 정신병원 입원 횟수와 총 1년 2개월 간의 입원 기간은 내게 많은 시련을 주었고 새롭게 거듭날 수 있는 힘을 주었다. 누구보다 불행한 삶을 살았기에 더 값진 글을 쓸 수 있었고 한 개인의 사유가 어떻게 사회를 바꿀 수 있는지,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감관이 느끼는 패러다임을 어떻게 재구성해서 개략해야 하는지 대략적으로 알게 되었다. 통상적으로 삶은 지루하다. 그런데 우린 거기서 ‘재미’를 원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우리는 거기서 ‘의미’를 구해야 한다. 그래서 한 구도자로서 자신의 ‘과정으로서의 삶의 도정’을 마치 기억을 걷는 시간처럼 천천히 걸어가야 하는 것이다.



당신들은 필자의 사유의 정신없는 육박함을 관찰하고, 이 선형적인 사고의 연쇄를 따라, 독자적으로 받아들이는 대동소이한 내용을 두루 섭렵함으로써, 거기에 드러나는 일장일단함을 독자적으로 적절히 취했을 것이리라. 이리하여 우리는 철학이야말로, 21세기에 봉착하는 난제들을 해결할 유일무이한 ‘해법’임을 깨달았으리라. 주지하다시피 철학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있는 분야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 현존재는, 크게 보아 세상의 법과 규칙, 사회라는 유기체의 집합이며, 이를 토대로 소우주가 대우주라는 커다란 틀에 위치함으로서, 우리 인간적 실재 즉 인간존재는 어떤 식으로 이 광대무변한 우주의 한가운데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나 그러한 비당위적인 실존적 사고(思考)의 고착에 당면하게 된다. 이제는 인간 서로 간의 야만은 종식되었고 크게 보아 우주와 인간 간의 대결이 무한히 존재사유의 뇌관에, 그 도정의 도식을 테제하는 것이리라. 이미 읽혀져 당착했다고 보는 20세기의 사유―그럼으로써 20세기는 이미 과거다―, 그리고 21세기 개인이 느끼는 불안과 고독, 소외와 부조리, 실존의 비의와 역설…… 그럼에도 우리는 조류를 거스르는 배처럼 끊임없이 과거로 떠밀려가면서도 앞으로 앞으로 계속 전진하는 것이다.





양주시 개인의 서재에서 담배를 피우며 도둔산을 바라보는 박두호/최산월(실명 박준수)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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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두호 2011-01-17 13:17:28
답글

저번에 여러 분께 심려를 끼쳐 죄송했습니다. 확실히 이런 류의 글을 게시판에 올리는 건 보기 좋지 않겠지요? 그러나 '자유'게시판으로서 누구의 글이나 존속할 수 있다는 당위성은 인정해야 하지 않을지요.

박두호 2011-01-17 13:18:57
답글

그리고 제가 부끄럽게도 22살까지 대학문턱을 못 밟아 논문같은 걸 낸 적이 없지만, 이 글은 양이나 질로 봐서도 논문이라 불러도 무방하다고 생각합니다. 총 A4형식으로 100페이지에 달하는데요.

신상진 2011-01-17 13:44:43
답글

진심으로 응원하고 있습니다. 항상 건강 하고 밝게 지내시길...<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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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때는 아닌 것 같이 보이기도 하지만...<br />
자세히 들여다보면, 세상은 정말로 아름다운 곳이랍니다. 화이팅!!<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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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 눈팅이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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