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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정소설] 기이한 연구-상[완결본]
자유게시판 > 상세보기 | 2011-01-10 17:47:39
추천수 3
조회수   557

제목

[탐정소설] 기이한 연구-상[완결본]

글쓴이

박두호 [가입일자 : 2003-12-10]
내용


- 이로써 기이한 연구를 더 완성된 형태로 변용시키고 보완한 ‘상’편이 끝났습니다. ‘중’편과 ‘하’편을 기점으로 소설은 완결을 맺게 됩니다. 되도록 코난 도일이 주창한 탐정소설의 전통을 따름과 동시에 순문학의 경지를 도입하려고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이 소설을 5천 만원짜리 문학 동네 소설 상에 기고할 예정입니다. 아마 그 가운데서도 이렇게 재밌는 소설은 없을 겁니다. 이 소설을 ‘실용오디오’의 오디오 애호가 어르신 분들께 바칩니다. 그나저나 담배 값이 많이 드는군요. 오르면 정말 큰일 나겠습니다. 어제 흑인친구를 만나 커피숍에서 희희낙락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많이 웃었고 또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그 흑인 친구는 제게 있어 가장 소중한 친구입니다. 남을 배려할 줄도 알고 매우 친절하고 사려 깊습니다. 그는 학교 원어민 선생님입니다. 캐나다에서 왔으며 나이는 29살입니다. 다음에는 그에 관한 르포를 쓰고 싶습니다.

제 소설을 재미있게 읽고 댓글을 달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소설을 시작하면서…

안녕하세요? 20번 째 크리스마스를 맞이하여 애인 없이 홀로 고독을 음미하고 있는 박준수 입니다. 오늘은 크리스마스네요. 제가 애인이 없는 이유는 제 못생긴 얼굴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무엇보다 친구가 없는 편이고 대학을 다니지 않고 독학을 선비가 정진하는 태도라 생각하여 아무 사회관계도 맺지 않으니 애인은커녕 친구조차 전무한 게 작금의 현실입니다. 많이 숙고해 보았습니다. 아무래도 ‘착란과 정신편력’은 그냥 사유의 단상 정도로 치부하고 원고는 찢어 버릴 생각입니다. 그리고 셜록 홈즈 전집을 읽은 것을 기념하여 새로운 탐정소설을 하나 착상 중에 있습니다. 실용오디오 분들과 크리스탈오디오 전속작가로서의 의무를 수행하고자 ‘순문문학으로서의 추리미스터리 탐정의 하나의 서사를 기획할 예정입니다. 코난 도일이나 에거사 크리스티가 별 건가요? 이번 작품은 상을 겨냥한 작품이 아니라 제 역량을 가늠해 보기 위함과 더불어 오디오를 하시는 중년 분들을 위한 재밌는 이야기라고 상정하면, 그것만으로도 전 만족스럽습니다. 제 나이 21살이지만 무려 9년 간의 오디오생활을 하면서 당신들과 동거 동락한지도 9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와싸다에서 제명당해서 그러는데 제 탐정소설이 완성되면 이것을 와싸다에 올려주실 분이 있을 거라고 방만히 생각하며 뜨거운 학문과 예술에 대한 열정으로 탐정소설의 순문학을 완성하려고 합니다. 예전 코난 도일의 ’셜록 홈즈 시리즈‘나 에거사 크리스티의 ‘탐정 70권 전집’ 그리고 뒤팽 시리즈 같은 경우는 순수문학만이 가지고 있는 인간에 대한 구명을 좌시하는 경향이 많았습니다. 그러니까 과거의 유구한 탐정소설들은 단지 흥미위주의 대중소설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에 귀착되는 것이었죠. 그러나 이번에 제 소설은 다릅니다. 이번에 탈고하게 될 제 단편 소설은 정확히 순문학이 어떻게 탐정소설과 합방하여 새로운 차원의 ‘문학’을 직조할 수 있는가 아닌가 하는 가능성의 지평을 열어나가는 데 그 도정의 의미론적인 혜학이 있습니다. 이리하여 저는 카프카의 금언처럼 ‘문학은 독자로 하여금 뒷통수를 망치로 얻어맞는 것과 같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 기대해주십시오. 최고의 작품으로 여러분을 찾아가겠습니다. 그리고 ‘문학동네작가상’에 도전하겠다는 결심은 뒤로 밀어놓았습니다. 왜냐하면 아직 전 그럴 자격이 안 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니, 솔직히 말해 그럴 능력이 결여되어 있다는 말이 더 지당하겠지요. 좌우지간 제 탐정 소설을 읽으시는 분들은 정말 혁명적인 전위예술의 정수를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이 소설을 쓰기 위해 먹고 있던 정신분열증 약까지도 끊었습니다. 제 나이 21살, 그리고 이번 크리스마스가 끝나고 새해가 되면 22살이 됩니다. 이제는 전격적으로 위대한 야망으로서의 계획을 세우고 그것을 수립해나가는 과정 즉 생의 도상에서 일파만파 퍼지는 저만이 소유하고 있는 광휘를 명약관화하게 스스로 말미암아 마치 거울을 들여다보는 사람처럼 직시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그럼 무엇에 대한, 무엇을 위한 직시? 21살의 청년기 벽두에 쏜살같이 돌진할 수 있는 용맹함과 제갈량보다 더 뛰어난 지략으로 30살 이내에 그 누구도 넘보지 못할 한국학계의 전설이 된다는 결심 그것을 위한 것, 그래서 전 그것을 직시하고 또 직시합니다. 최소 30살 이내 일가를 이뤄 한국한계의 최대의 문학가이자 철학사상가로 일신하고 40살에 노벨문학상을 수상, 그리고 50살에 영국학술왕림원의 회원이 되는 것이지요.



저는 여자는 없지만 젋습니다. 저의 사회적 성공으로 인하여 여자들이 따라 붙기를 기원합니다. 그렇다고 제가 사회적 성공을 목적으로 문학과 철학사상을 하는 건 아닙니다. 저는 예술을 위한 예술 즉 예술지상주의를 엄격히 지향합니다. 제가 너무 젋어 여자 없는 걸 너무 힘들게 생각하지만 그래도 제 광활한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모든 난관을 일도양단에 베어버릴 것입니다. 저의 앞길을 사소한 난관이 아니라 신조차 가로막는다면, 그 역시 베어버릴 것입니다. 그러니 신도, 우주도, 당신들도 저의 폭풍과도 같은 학문과 예술에 관한 열정을 막을 수는 없는 겁니다. 21살, 모든 걸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나이. 그리고 제게는 랭보보다도 조숙하고 뛰어난 재능이 있습니다. 말보로 레드, 스틸녹스, 프로작, 독한 커피, 독한 양주, 심지어 마약까지도 다 좋습니다. 위대한 작품을 쓰려면 작가는 정신병자가 되어 미친 듯이 자신의 작품세계를 완성해나가야 하는 내적 필연성의 당위적인 테제조건을 부여받고 혁혁히 그 원지적인 힘을 몰고 나가 자신의 작품에 투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 인간 박준수, 지금부터 시작입니다, 새로운 탐정 단편 소설을 기대해 주십시오!













=탐정소설 ‘기이한 연구’=







1장 프롤로그.

고통 속에서 어떤 희락을 찾는 일은 분명 어려운 일이다. 희락을 좀 더 엄밀히 분류하자면 그것은 모종의 우수요, 섬세한 향기이다. 나는 분명 사랑을 원하는 것일까? 지고로 달콤하고 영원한 사랑의 베일. 나의 정신은 그것을 원하고 있다. 자신을 둘러싼 모든 배경이 순식간에 봄의 지순함과 아득함으로 온통 적셔지는 느낌이다.

과거는 움직이지 않아 슬픈 것이다. 지금껏 마치 하나의 수채화처럼 멈춰있는, 마치 모든 생동감으로 충만한 동시성의 한순간의 집약적 고찰로써 멈춰있는 또 다른 세계처럼 과거는 여태껏 움직인 적이 없었다.

과거는 그 속에서 헤매면 헤맬수록 수렁에 빠지는 명멸하는 구렁텅이이며, 소리치면 소리칠수록 꺼져가는 불꽃과 같이 더 이상 찾아오지 않는 아름다움의 실질적 이마주로 나에게 다가왔다. 나에게 삶은 이미 삶이 아니듯, 과거를 따라, 그 영원한 극점을 따라 움직였던 정신의 여행은 일련의 객기였다. 나는 로맨티스트가 아니라 단지 위선자였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 한 소년에서 이미 움직일 수 없는 모든 걸 소진한 청년으로 변모해 있었다.

자기기만, 말하자면 선연한 패배스러운 로망이 청춘의 끝자락을 타고 점멸해가고 있었는데, 나는 가만히 눈을 감고 그 마지막을 지켜볼 뿐이었다. 아무 것도 변화 시킬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나의 방향의식은 언제나 정신적 내몰림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나의 진보적 성향과 그에 대한 반향으로서의 보수적인 기질, 하나의 특질은 모두 내가 양립적으로 내포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을 관통한 나의 좌표의 자기장적 성향은 '사랑과 미를 향한 열정'이었다. 나는 예컨대 시인이었다. 그의 섬세함은 요컨대 모든 진정성에의 미학을 추구하는 성격에서 뻗어 나오는 일련의 힘이었다. 나는 자기에게서 벗어나고 싶어 했다. 나는 모두에게서 벗어나고자 '모두'가 되고 싶어 했다. 나는 주인공이기보다는 배경으로 남고 싶어 했으며, 그 배경은 아주 현란하고 수려한 비경이어야 했다. 그 성립이 나를 나답게 묘사하는 것이었다. 나는 잊지 못할 아름다움만을 사모하는 걸 좌시하지 못하는 한명의 기인이요, 현자였다. 여기서의 현자는 말하자면 미친 사람을 뜻한다. 현자는 따뜻하고 깊이를 측정할 수 없는 아득한 정서를 소유하고 있는 교양가를 뜻한다. 예의 교양은 모든 분야를 아우른다. 아주 강렬하게 메타적이고 혁혁한, 한줄기 맥락의 '전체'라고 부름 직하다. 나는 그런 교양가였다. 미를 적시하는 적요함과 요원함이 뒤섞인 심약한 투사였다. 그런 내가 사망하지 않고 생존해 있다면, 아니 실존해 있다면 당신은 그걸 인정하겠는가?

인정이란 자고로 힘겨운 결정의 한 요소이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인정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당신에게 다가오는 모든 놀라움은 결국 혁신적인 쾌락으로 변모할 것이다. 환원될 것이다. 그것이 내가 그를 오랫동안 관찰해 오면서 도출한 결론은 당신조차 수긍케 하는 일원론적인 마치 직사하는 빛처럼 그런 종류의 환상, 분수령이다. 내가 술회함으로써 당신은 모종의 관철에 이를 것이다. 아주 천천히, 그러나 반대로 빠르게. 그, 고독한 시인인 나와 관련된 술회가 당신에게 감동의 서막을 제시할 것임에 틀림없다고 나는 각한다. 예의 그것은 아주 구조적인 부분에서 파란만장한 비애의 서사이다. 나는 이제부터 그것에 대해 언급하겠다. 그것은 나의 이야기이다.

현시적인 슬픔을 이해하는 데는 많은 감상이 들어간다. 그러나 아름다움을 직접 체현해보고자 하는 시도에는 마르지 않는 우물의 물처럼 딱 그 정도의 감상이 필요하다. 전적으로 어떤 일을 책임지는 역할, 그 역할이 자기를 근본으로 창원한 슬픔에서 발발되었다면 이는 불가피한 일종의 숙명인 것이다.

어린 시절, 나는 나약하면서도 이상하게 삶의 곳곳에 잠재되어 있는 아이러니를 포착할 수 있는 능력이 비정상적으로 발달해 있었다. 그것은 어쩌면 한 개인에게 주어진 불행의 시초이자 진정한 의미에서 도출될 수 있는 '정신분열'의 명백한 개념이라고 할 수 있었다. 또한 나는 기구하게도 여러 가지로 비굴해질 수밖에 없는 사악한 인물들에 엮여져서 말할 수 없이 힘든 삶을 살아왔다. 이 인생의 수레바퀴는 어느 모로 보나 재수 없고, 비정상적이고, 신경증적이었다. 나 자신이 이런 부끄러움을 마다할 정도로 도덕적이라거나 훌륭한 군자도 아니거니와 그런 연유로 나는 내 삶을 자신 있게 어디 내놓을 그런 정당한 삶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정당하지 못한 삶, 그것은 비극도 희극도 아닌, 의미 없는 쓸모없는 삶이었다. 나는 과거에 집착하는 행위를 그것이 미학적인 범주에 드는 한 요소라면, 또한 아름다움에 대한 뿌리 깊은 관조라면 거기에 대해 '지극히 예술적인 행위'라고 명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과거를 산다는 것, 그것은 무너져 내린 영광을 뒤로한 채 슬픔에 집착하는 예술가들의 도식이다. 나의 어렸을 적 페르소나의 내면에선 확실히 이러한 내재적 울림을 느낄 수 있었다. 수채화를 보고 거기서 얻을 수 있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은은하고 내양적인 위안 또는 안식. 나의 예술성은 커가면서 점차 그 빛을 잃은 영혼처럼 잃어갔지만 그 불꽃은 꺼져가면서도 다시금 살아나 나의 본질의 최고의 가치를 전개할 수 있게 해 주었다. 그것이 곧 나였고 세상에 존재하는 '소중함'이었다. 다만 나는 현실의 더러운 면, 일상이 불러일으키는 속물성의 요소들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예술적인 삶을 살아가려면 항시 동전의 앞면과 뒷면을 보게 된다. 동전의 앞면은 항상 진실이 뭔지 내게 가르치고 거기에 존속하게 하려 하지만, 그것은 영속적이지 않고 결국 뒷면으로 넘어간다. 예술의 영원함은 유쾌함의 모습으로 찾아올 수도 있고 휴머니즘적인 열광 혹은 예에서 말한 대로 형용하기 어려운 슬픔의 양태로도 찾아올 수도 있지만, 속물성은 일소적으로 찾아와 내게 부추긴다. "너의 미래에 넌 뭐가 될 것이냐" 이렇게 끊임없이 내게 걱정거리를 안겨준다. 단순히 인생을 즐기려는 관점과 현실성이 대치되면서 여기서도 새로운 아이러니가 창조된다. 지금 내가 글을 쓰는 행위도 거기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 왜냐하면 내 글의 말하고자 하는 바와 기교는 항상 대립함으로써 하나의 글이 도출되기 때문이다. 나이가 든다는 건, 이를테면 유년기에서 청년기로 넘어간다든지, 청년기에서 장년기로 넘어간다든지 단순히 나이의 횟수가 올라갈수록 영혼의 질은 수축한다고, 예컨대 진실성의 질은 내려간다고 난 믿는다. 나는 결코 다시는 유년기의 여리면서도 도도한 향취는 느낄 수 없으며 그저 힘만 잔재한 청년기를 살아가야 한다. 물론 유년기에는 표현의 능력이 청년기에 비해 부족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현재와 같이 이렇게 글을 쓰진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아름다음에 관한 고취, 자족적인 아름다움에의 관조는 그 어떤 시절에도 비할 바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재능이 아니다. 재능은 외피에 불과하다. 중요한 인생의 사실은 비평할 수 있는 능력, 즉 만질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내양적인 현현의 움직임의 가치가 중요하다 생각한다.



나의 유년시절은 슬프면서도 장구했다. 나는 왜 거기에 계속 집착하는가? 왜 거기에 있는 본질을 청년시절에 에두르면서 끌어내리려 하는가? 왜냐하면 유년시절이야말로 환상의 본질을 감싸 안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연을 자연 자체로 즐기지 앞으로 닥쳐올 천 가지 만 가지 생각을 하지 않는다. 모든 제대로 된 문필가들은 유년시절을 모태로 글을 쓴다. 그들이야말로 예술가이다.



1890년대의 런던은 세계 산업의 중심지이자 흉악한 범죄들이 집결하는 장소였다. 런던에서 벌어지는 극악무도하며 인간의 본을 버리고 잔인하게 살인과 강도, 방화와 계획적인 살인으로 재산을 차지하려는 일이 늘어가면서 런던에 이미 인간성과 도덕률은 상실되었고, 자본주의의 황제로 군림하는 영국의 중심지인 런던은 돈이 최고라는 슬로건 아래 인간으로서는 결코 할 수 없는 금단의 짓까지도 서슴없이 하는 비도덕적인 인텔리들과 흉악한 갱단의 횡포는 날로 갈수록 심화되었다. 나는 런던의 부패를 보면서 더 이상 이곳에 머물면 미래란 없다는 명제를 나의 인생 모토로 결정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그러한 나의 우울감을 한 순간에 날려 버릴 만남이 생기게 된 것은, 운명이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생에 다시 찾아오지 않을 유일한 나의 운명이 아닌 가 지레 짐작하게 된다. 음울하게 안개 낀 거리에서 홀로 마차를 타면서 나는 하숙집을 구하고 있었다. 마차길 양쪽으로 드문드문 너도밤나무가 빼곡히 숲을 이루고 있었다. 나는 퇴역한 군인이자 의대생으로서 아무 생각 없이 긁어모은 몇 푼 안 되는 돈으로 집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퇴락한 옹기종기 모여 있는 여러 집들을 보면서 나는 극히 실망하여 다시 나의 의대 숙소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숙소에 도착하여 정장과 폭이 긴 신사용 모자를 벗던 중 나의 동료이자 친구인 제러드가 전보 하나를 가져왔다. 전보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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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애하는 스웨덴 지미 군에게.



자네가 하숙집을 구하고 있다고 들었네. 그렇다면 굳이 돈 들일 필요 없이 내 저택에 장기로 머무는 건 어떻게 생각하는가? 돈 같은 건 필요 없네. 오로지 자네의 용맹함만이 자네가 여기 있을 수 있다는 자격을 보증하고도 남을 테니. 듣자하니 퇴역군인이라고 들었네. 집안 출신도 귀족의 피가 흐른다는 건 익히 들어 알고 있네. 자네의 어머니 미스 사라가 나에게 해 주었던 그 깊은 보은을 생각하면 난 잠시도 자네를 길거리에서 방황하게 내비 두지는 못할 것 같거든. 자 그러면 언제든 나의 집을 방문해 주게. 자네의 방은 따로 꾸며놓았다네. 마음에 들 거야. 그럼 안녕히 계시게나.



자네를 존중하는 리틀 홀더스 경 씀. 1894월 7월 20일에, 벽난로 곁에 앉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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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전보를 읽고 나서 마부를 불러 대기시켜 놓고는 차림을 훌륭하게 했다. 모자는 쓰지 않을 생각이었는데, 왜냐하면 나를 초대하는 어느 백만장자 지주가 나보다 연륜이 있어 보였기 때문에 예의에 어긋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게 준비되었고 나는 마차에 올라탄 채 창문에서 흘러들어오는 밤안개를 지그시 응시하며 눈을 감고 묵상 엄밀히 말해 과거를 회상하려 했다. 이제는 잊혀진 기억들. 그러나 시간을 계속 흘러가 인간을 과거에 얽매이게 하지 않는 법이다. 나의 아름다웠던 과거의 편린들… 나는 이제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하는가? 마차가 천천히 비규칙적으로 단속적으로 웨섹스지방의 음울한 안개를 가르며 굴러가고 있었다.





2장 나의 회고 - 베티와의 만남.

삶은 정말로 더럽다. 나는 누구보다 열심히, 근면성실하게 살아왔지만 신의 은총은 나에게 눈을 돌렸다. 나에게도 사랑하는 연인이 있었다. 지금 내 나이가 28이니 대략 8년 전 쯤일 것이다. 그때 동인도회사가 용솟음을 치며 인도를 점령하고 있었을 왕성한 시기에 나는 한 까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엄청난 양의 원두를 사용해서 내려내서 우유와 설탕을 섞은 아주 풍미가 강하고 스모키한 방향(芳香)이 온통 마시는 이를 감명시켜주는 그러한 시원한 냉커피였다. 런던에서는 당시 이러하게 핸드드립으로 많은 양의 원두를 사용하여 내린 다음 우유와 설탕을 배합하는 스트롱한 커피 기법이 유행이었다. 사람들은 남녀노소 구분 없이 이 아이스라떼를 미친 듯이 마셔댔다. 나도 역시 이러한 기법의 커피를 좋아하여 날마다 ‘까페 느와르’에 와서 브뤼에르 파이프에 해군용의 검은 담배잎을 재운 다음에 느긋하게 아침을 시작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 당시 나는 여자를 몰랐고, 당연히 여자의 성기가 어떻게 생긴 지도 몰랐다. 나와 같이 어린 남학생들은 여자의 항문이 남자의 항문과는 달리 분홍색이며, 여자의 성기는 털이 하나 없이 갓난아기의 그것과 똑같다고 하는 낭설을 유포하고 또 받아들이고 있었던 시기였다. 20살의 나는 지적으로 그 누구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미 철학을 무불통달하여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칸트, 헤겔, 쇼펜하우어, 키에르키고르를 꿰뚫고 있었다. 당시에는 그 어떤 철학자보다 쇼펜하우어의 염세론이 득세하고 있었는데, 뭐 나는 쇼펜하우어가 철학자의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는 붓다를 끌어들여 동양을 모방해 소위 모방철학을 완성한 사기꾼에 불과할 뿐이었다. 좌우지간 20살의 젊은 남아에게 삶이란 지루하고 권태로운 것이어서 언제나 일탈을 꿈꾸기 마련이었다. 당시 마약 시장에는 아편 같이 뇌를 마비시키면서 쾌락을 불러오는 이완제의 유행의 열풍이 사라지고 중추신경자극제의 일종인 코카인의 파고가 순식간에 덮쳐오는 그런 기세였다. 나는 그 당시 의학도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의학계에 일신을 바칠 생각이었으므로 의학지식이 풍부했고, 그런 이유로 순도 5%의 코카인 용액을 주사에 주입하여 팔뚝의 정맥에 주사해 보았다. 그리고 그 당시의 기분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실로 엄청난 쾌감이 온몸을 전율에 떨게 했는데, 커피나 술, 담배는 이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쾌락의 정점에 도달한 듯 나는 그만 오줌을 지릴 번했으나 간신히 참고 코카인이 가져다주는 안정감과 일종의 마취상태를 향유하고 있었다. 역사상 유례가 없는 최고의 행복감이 나의 영혼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전우주를 한 가운데서 통괄한 듯 나는 우주 전체를 동시에 볼 수 있었고 몸은 그곳을 부유하며 동시에 미칠 듯한 짜릿함과 이름 모를 자극에 눈물까지 흘릴 정도였다. 그런데 나는 공부를 좀 잘 해보려고 코카인을 주사한 것이었는데 공부 따위는 잊어버리고 오로지 쾌락의 타성에 젖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그것으로 족했다. 이런 신비한 경험이 인간의 인생에 있어 매우 드문 것이 아닌가? 그러나 코카인은 영묘한 약이라서 나의 코카인 주입은 습관이 되어버렸으나, 까페에 매일 아침에 나오는 관행은 지키고 있었다. 그렇게 피폐하고 무질서하게 즉 퇴폐적으로 살던 도중 그녀가 나에게 왔다. 어느 날 내가 ‘페 느와르’에서 커피를 마시다가 내 옆 자리에 누가 앉는 걸 느꼈다. 고개를 돌려 쳐다보니 매우 아름다운 소녀였다. 나보다 4살가량 어린 듯 했고 그러므로 16살 정도 되어보였다. 얼굴이 너무 사려 깊고 청순가련하며 순수하게 생긴 지라 나는 말을 걸어 속을 떠볼 심상으로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커피 맛 어때요?” 그녀는 나의 말에 깜짝 놀란 듯 했다. 그러나 역시 내 예상대로 대답했다. “맛있어요.” 해가 거의 보이지 않는 쌀쌀한 날씨였음에도 불구하고 까페 안에는 사람들의 생에 대한 열정으로 따뜻해져 있었다. “그런데 이름이 어떻게 되십니까?” 나는 말을 걸었다. “베티에요.” 나는 그녀의 이름이 얼굴에 맞게 귀엽고 깜찍하다고 생각했다. “저기 베티 양, 베티 양이 아름다운 건 아버지 때문인가요? 어머니 때문인가요?” 베티는 얼굴을 붉히더니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 했다. “어머니 때문일 거예요” “아 그렇군요” 나는 알겠다는 듯이 말했다. “그나저나 오늘은 참 좋은 날이네요. 하늘은 파랗지 않지만 왠지 모르게 좋은 일이 일어날 것 같은 예감이 들어요. 베티 양도 그렇게 생각하시나요?”“저도 그렇게 생각돼요. 이런 게 이심전심일지도 모르겠어요.” 이심전심이라? 베티 양은 나를 이미 친숙하게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방심해서는 안 된다. 여자란 생각을 알 수 없는 존재기 때문이다. 게다가 베티 양은 어리다. 나는 못생긴 편이지만 키가 훤칠했고 무엇보다 여자를 질식시킬 유머와 지성이 있으니 베티 양이 나에게 넘어오는 건 시간문제이리라. 담배를 파는 아주머니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고, 생각 없는 젊은이들과 까페에서만 글을 쓰는 작가들이 떼를 지어 까페에 출입하고 있었다. 참 좋은 날이라 생각된다. 오늘은. 어쩌면 그 어떤 날도 오늘보다 좋은 날은 없을지 모르겠다.





3장 첫 사건.

리틀 홀더스 경의 저택은 대학도시인 옥스퍼드에 위치한 부유한 마을에 위치한 조지4세 왕조풍의 그 마을에서 가장 큰 저택이었다. 대저택이라는 수사가 어울릴 만큼 거대했고 무엇보다 고품위한 건물의 장엄함과 고대의 귀족적 느낌은 그가 귀족 중의 귀족이라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었다. 그의 건물에 들어서기에 앞서 나는 마차에서 내렸고, 나무로 설계된 큰 대문이 열리면서 나는 그의 영지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저택은 참으로 웅장했다. 말끔하게 정리된 초록색 정원이 넓디넓게 위용을 뿜어내고 있었는데, 정원수를 손질해서 만든 여러 동물과 인간 조각들이 참으로 아름답게 나를 바라보고 있는 황홀한 느낌을 받았다. 정문을 들어서자 곧 엄격하나 모종의 너그러움이 깃든 풍모를 지닌 늙은 집사가 나와 나를 마중했고, 나는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뒤 그를 따라 본관으로 안내되었다. 본관에는 여러 그림들이 걸려 있었는데, 그 그림들이 진품이라면 실로 천문학적인 액수였을 것이다. 그리고 여러 조각상들과 인도산 최고급 양탄자를 보면서 나는 그가 엄청난 부자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내딛으며 나는 그의 침실로 안내되고 있었다. 어둠침침한 배경 때문이지 뭔지 모를 음습함이 나를 둘러싼 화려함에도 불구하고 그 고개를 번쩍 들었다. 왠지 모를 으스스함이 내 주위를 회전하고 있었고 집사는 이윽고 그의 침실을 두 번 조심스레 두들겼다.

문이 열리면서 휘황찬란한 벽난로가 눈 앞에 들어왔다. 벽난로 주변의 침대용으로 쓰는 듯한 화려한 소파에서 그는 누워서 커다란 사기 파이프를 여유 있게 피우고 있었다. 뒤태를 보아하니 중년쯤 되어 보이는 것 같았고 그의 엄격하고 차가운 지성의 아우라가 그의 뒤태에서 철두철미하게 표현되고 있었다. 집사는 그에게 내가 왔음을 알렸다. 그는 고개를 들어 천천히 나를 보았다.

“남미에서 군 생활을 했나 보군. 보아하니 지금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 같은데 의대에서 화학연구는 잘 되가나? 내가 자네를 부른 이유는 나의 열렬한 개인적 취미에 대해 자세히 기록할 비서가 한 명 필요해서이네. 아, 참. 내 취미에 대해 언급을 안 했지. 내 그 소소한 취미란 바로 탐정일이라네. 그것도 무보수로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 일하는 거지.” 그가 말을 하는 도중에 집사가 황급히 들어와서 그레이튼 경감이 도착했다고 알렸다. 나는 이 와중에도 호기심과 궁금증이 도져 한 가지 질문을 할 수밖에 없었다. “제가 남미에서 군 생활을 한 건 어찌 아셨습니까? 그건 부모님도 모르는 사실일 텐데.” 리틀 홀더스 경은 짤막하게 내 질문에 대답했다. “자네 나이가 28이니 자네가 병역임무를 했을 당시에는 22살이었을 테고 그 때는 남미 쪽 영국령에서 흑인폭동이 일어났을 것이니 아무래도 지미군은 남미에서 일했을 테지.” 나는 결과는 의미심장하여 마치 영매가 말한 것 같지만 설명을 들어보니 매우 간단하고 과학적인 추리라는 것을 알 수 있어서 뭔가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리틀 홀더스 경에게 모종의 존경심이 일어나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런데 그가 또 운을 떼었다.

“지미군, 자네 무모증 환자이지?” 나는 놀라서 대답했다. “그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그러자 리틀 홀더스 경은 그 문제에 대해 논리적인 어조로 대답하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턱수염을 깎은 자리가 있지만 너무 규칙적이야. 그것은 곧 턱수염 깍은 것을 티내기 위해 뭔가를 턱에 부착했다는 것이지. 이는 자네가 털이 없는 남자에 관해 콤플렉스가 있다는 것을 방증하지. 그래서 자네는 일부러 턱수염 티내는 부착물을 고의로 달았을 것이야. 보통 정상적으로 수염이 나는 사람은 그렇게 턱수염 깍은 자리가 고르지 않아.” 또 한 번 뒤통수를 맞은 것이다. 그는 정말 뛰어난 관찰력을 겸비하고 추리와 논증에 타고난 사람 같았다. 그의 날카로운 눈빛과 찢어진 눈 그리고 독수리 같은 코와 얇은 입술은 그가 매우 용의주도하고 치밀한 인물이라는 걸 증명하고 있었다. 그 때 딱딱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문이 열리면서 마치 얼굴이 불독과 같이 생긴 사람이 들어왔다. 눈매는 가히 사자와 같았으며 매우 뚱뚱한 편이었고 키 역시 작았다. 나는 얼떨결에 그에게 고개를 갸웃하며 눈인사를 하였다. 그도 거기에 대응하여 내게 앉으라는 표시를 했다. 리틀 홀더스 경이 일어서지도 앉고 그에게 신호를 보냈다. 아무래도 둘은 매우 막역한 사이인 것 같았다.

“자네 오늘도 무슨 신랄한 사건 하나를 들고 왔나 보군?” 홀더스 경이 운을 떼었다.

“브리스톨에서 연쇄살인사건이 발생했네. 2명의 메이드와 주인이자 대귀족인 로더스 경이 피살된 채로 발견됐네. 없어진 물건이 없고 귀중품들도 그대로 있는 것 보아 아무래도 강도 사건은 아닌 듯하이. 중요한 것은 그의 목 뒷덜미에 뱃사람용 나이프가 꽂아져 있는 걸로 보아 뱃사람을 용의자 선상으로 좁혀 수사에 착수하고 있네. 자네 생각은 어떠한가?”

홀더스 경은 껄껄 웃더니 입을 열었다. “겉으로 보이는 게 다는 아니네. 살인마가 뱃사람인 척하고 역추적 당하려고 유혹할 수도 있는 것이지. 오히려 자네가 간과한 것은 그런 큼직큼직 한 게 아니라 사소한 점에 있다네. 진정한 탐정이란 사소한 것 하나 하나를 놓치지 않고 세심하게 살펴보는 게 도리지. 거기 남아 있는 물건 혹은 피살자들의 주머니에 남아 있는 물건이 정확히 뭐였는가?

경감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더니 이윽고 운을 떼었다. “메이드들의 옷은 당연히 주머니가 없는 복장이므로 아무 것도 없었고, 아차, 메이드 중 한 명이 무거운 둔기에 맞아서 두개골이 부서져 있었고 한 명은 마찬가지로 목덜미에 칼을 맞아 있다는 걸 자네에게 말을 안 했군. 그리고 로더스 경의 주머니에서는 해군담배 1온스와 싸구려 브뤼에르 파이프 한 개, 그리고 어떤 아가씨의 사진이 한 장 있었네. 그게 전부네.”

“뭐라고? 아가씨 사진? 지금 가져왔으면 어디 보여주게.”

경감은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여느 증거 자료가 그렇듯 비닐 봉투에 씌인 사진 한 장을 꺼내더니 홀더스 경에게 보여줬다.

홀더스 경은 눈을 가늘게 뜨더니, “치정 사건인가…”하고 말꼬리를 흘렸다.

“내가 곧 사건 현장으로 가지. 아, 참. 이 젊은이는 스웨덴 지미 군으로서 내 조카뻘 되는 청년이지. 이 친구가 내 사건 기록을 집필할 예정이네. 이 친구 앞에서는 어떤 사건의 기밀 내용을 발설하는 것도 허용되네. 앞으로 이 친구 잘 부탁하네.”

경감은 놀라듯이 내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니 이윽고 알겠다는 표정으로 싱긋 웃고는 천천히 형사 특유의 느긋함을 갖고 나가버렸다. 나는 홀더스 경과 이 참혹하고 음험한 사건에 참여한다는 생각으로 온 몸에 전율이 돋으며 짜릿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제부터 홀더스 경과 형사사건에 참여한다. 그것도 이번에는 연쇄살인 사건이다. 홀더스 경이 천재는 아니더라도 이 방면에서 어느 정도 대가인 것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의 침실에는 빼곡히 어떤 파일들이 가득 차 있었는데, 내가 홀더스 경의 허락을 받고 그것들을 뒤져 보니 모두가 일련의 기이하고 참혹한 사건들에 대한 단상들을 기록한 스크랩북이었다. 홀더스 경은 배태랑인 것이리라. 홀더스 경과 많은 인생얘기들을 담소하면서 이제 내 앞에 닥칠 모종의 악마적인 사건과 대면할 준비를 시나브로 하고 있었다. 바야흐로 대사건이 내 생애 최초로 들이닥친 것이었다.



밤은 점차 여위어 가고 있었고, 오직 노란 빛깔의 반달만이 유유자적히 대저택의 화려한 위용을 비추고 있었다.  







4장 나의 회고 - 베티의 음부.

그 만남 이후 베티와 나는 급속도로 친해졌다. 베티의 얼굴은 실로 아름다웠으며, 소녀들만이 지니고 있는 섬세함을 표정과 다정한 목소리로써 나타내곤 했다. 내가 그녀와 만날 때마다 꺼낸 주제는 쇼펜하우어의 자살론이었다. 쇼펜하우어는 자살이 인간만이 동물과 다르게 우월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죽음선택의 권리라고 인정하였고, 나 역시 쇼펜하우어처럼 늙어서 시설이나 기관에서 인간취급도 못 받고 천대 받으며 사느니 차라리 내 지성이 정점에 이르렀을 때 죽음을 택하는 게 천 번 만 번 더 탁월한 선택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베티는 말했다. "지미 오빠는 전공 즉 하시는 일이 뭐예요?" 나는 순간 당황했으나 또렷하게 오롯이 나의 입장표명을 나타냈다. "내가 가야할 길은 학문의 길, 그 중 학문 중의 학문이라 할 수 있는 철학이야. 철학만이 인간의 일회성/유한성의 한계를 뒤짚어 엎을 수 있는 유일한 궤의 합집합이지. 그러니까 철학의 항진명제는 이거야. "우리가 회의할 때에만 우리는 우리가 회의할 수 있다는 것을 회의할 수 없다."



"그거 데카르트가 말한 거 아니 예요?" 베티는 미소를 띠우며 말했다.



"오, 아가씨. 용모와 걸맞게 타고난 교양을 갖추고 계시네요. 실례지만 너희 집안도 귀족의 피가 흐르니?"



그 때 베티의 얼굴이 일그러져서 나는 말실수를 한 게 아닌가 하는 후회가 점차 밀려왔다.



"네. 몰락한 귀족 출신이죠. 그러면 오빠는요?" 나는 내가 한 때 영국총리를 지냈던 조셉 스미스 경 집안의 사촌이라고 말을 늘어놓았다. 베티는 부러운 듯 나를 바라보더니 이후 우리 둘이 귀족이라는 사실, 즉 그 눈부신 공통점이 양화되었다는 것을 깨닫고는 일련의 즐거움에 사로잡혀 이를 크게 드러내고 웃어보였다. 그런 그녀의 모습은 너무나도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나는 나도 모르게 베티의 단발머리를 쓰담고 있었다.





까페는 뜨거운 열로 덮여진 듯 질퍽한 느낌이 절정을 이루고 있었고, 왼쪽 플로어 상단에서는 바이올린 악단이 로맨틱한 곡을 연주했다. 아, 정말 모든 게 아름다웠다. 오로지 태양의 직사만이 까페 창을 투과해서 내부를 열정적으로 비추고 있었다. 어디선가 나긋한 트럼펫 소리가 들려 왔다. 데카르트의 선언이 그렇다면 인간이 행복하다는 사실을 느낄 때 인간은 행복하다는 것을 행복해할 수는 없는 것일까? 아니, 데카르트는 틀렸다. 인간의 정신은 너무나도 복잡다단하고 변증법적이어서 하나의 자기의식을, 자아를 또 다른 자기의식, 자아가 바라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언극, 즉 광대놀음에 참여한 하나의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는다. 운명의, 신의 꼭두각시. 베티는 내가 난생 처음으로 만난 여자이고 나의 있는 그대로를 사랑해주었다. 문득 나는 베티와 결혼하여 살림을 차리면 어떠할까 자구심이 들었다.





나는 갑작스레 요의가 밀려와서 화장실에 들어갔다. 오줌을 싸고 나가려는 순간 베티가 문 앞에 있었다. 아니, 여기는 여자 화장실이 아니지 않나! 그러나 베티의 얼굴은 심히 진중하고 뭔가 굳건한 결정을 한 것 같았다. 그리곤 변기의 문을 열어 들어오라는 듯 고개를 옆으로 잘래잘래 저었다. 베티가 이렇게 행동한다면 나도 더 이상 참을 수 없다. 나는 베티를 벽에 바싹 붙이고는 화장실 문을 걸어 잠갔다. 그녀는 짧은 치마를 입고 있었다. 당시 영국에서도 근대의 변화가 불어 닥쳐 치마가 매우 짧은 편이었다. 나는 조심스레 치마를 끌어올렸다. 베티의 뜨거운 입김이 나의 얼굴을 아스라히 적시고 있었다. 그리고는 나는 베티의 다리 사이에 손을 밀어 넣었다. 하얀색 팬티였다. 그런데 가운데 부분, 즉 성기의 중심 부분이 조금 젖어 있었다. 오줌을 쌀 리는 없고 그렇다면 아까 한 키스 때문에 젖은 것일까? "베티, 너."



나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래요. 나 그런 여자예요. 귀족의 피가 흐르지만 보기보다 음란한 여자라고요." 나는 격정적으로 달음박질치는 성적 욕망을 막을 수 없다. 그래서 팬티 안으로 손을 넣었다.





갈라진 미끈한 부분, 그런데 털이 없었다. 16살이면 털이 조금이라도 자랄 만한 데. 나는 흠짓 놀랐다. "베티 너도 무모증?, 나도 무모증이야." 베티는 금세 얼굴을 붉혔다. "그래요."



나는 베티와 눈을 마주치더니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팬티를 끌어내렸다.



그리고 미끈한 부끄러운 그곳에 가운데 손가락을 넣어보았다. 손가락은 복숭아 같은 그곳에 그냥 쏙 들어갔다. 갑자기 베티가 나직하게 뜨거운 신음소리를 뱉어냈다. 나는 여러 번 미끈미끈하고 세상 그 어떤 것보다 부드러운 그곳에 펌프질을 했다. 그때였다. 젊은 남자들의 소리가 들려오더니 오줌을 넣으려고 온 건지 화장실 내부가 시끌벅적했다.



나와 베티는 놀라 하고 있는 행동을 멈추었다. 나는 손가락을 빼 냄새를 맡아보았다. 약간의 오줌 냄새와 여자 질 특유의 오징어 냄새가 났다. 당시에는 온수샤워가 보급되지 않은 19세기 런던이니 여자의 중요한 부분에 동물의 냄새가 배기는 것도 놀랄 일이 아니었다. 나는 그러한 베티의 처녀지의 아름다움과 모순되게 그런 짐승 같은 냄새가 난다는 모순에 어떤 역설적인 진한 비의를 느꼈다. 좌우지간 베티와 나는 단숨에 행동을 중단했다. 남자들이 나간 후 나는 베티의 팬티를 손으로 끌어올려 다시 입혀주었다. 팬티는 물에 적셔진 것처럼 완전히 젖어 있었다. 나는 왠지 모를 미안한 마음이 속에서 일어났다. "미안해. 정숙한 너를 이렇게 범해서. 우리 좀 더 친해져서 애인이 된 다음에 이런 죄악을 시작하자. 아직은 때가 아니야." 베티는 고개를 숙이고는 들릴 듯 말 듯 대답을 했다.





까페에 나왔을 때는 시원한 여름날의 아침이 시작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베티와 나 사이에 벌어질 잔인한 참상을 그때까지도 알아채지 못했다.





5장 홀더스 경의 고향땅에서의 회환.

강변의 푸른 돌들은 가지런히 정렬돼 있었다. 초록 나무, 연녹색 나무들이 듬성듬성 비규칙적으로 자라고 있었다. 풀들이, 자신들이 자라야 하는 키의 제한량을 잊은 양 정신없이 치솟아 있었다. 작은 숲의 숭고한 냄새가 강변의 물줄기와 결합해, 지속적으로 이어진 푸른 돌들의 방향[芳香]과 뒤섞였을 때에도 숲은 소자연만이 지닌 부드러운 주홍색 노스텔지어를 더욱 확고히 하는 것 같았다. 하늘은 우울하게 타들어가고 있었다. 아침이든 오후든 저녁이든 하늘에서 들려오는 미지의 은은한 피리소리는 냉엄할 정도로 담담한 하늘의 지평선처럼 이 지상에서의, 그리고 이 작은 숲에서의 조용한 일그러짐을, 대기마다 연결된 고립된 공기의 분자와 분자사이의 점멸을 부드럽게 유전[流轉]하고 있었다.



개미의 움직임. 검은색 개미는 돌과 함께 타들어가고 있었다. 소리 없이 떨어지는 물줄기에서 그 찰나에서 느껴지는 거나한 시간의 부재를, 보이지 않는 음영의 잔향을 관철하면서 이 틈새 저 틈새 할 거 없이 공허히 동물들의 곤충들의, 그러므로 숲의 시간은 무의미하게 이 모든 것을 완성해나가고 있었음이라.

해가 저물어, 빛의 기울기는 또 다른 방향의 저변으로 미끄러졌다. 어느 새 하늘은 붉어짐과 파래짐의 미세한 조화의 극을 아스라이 쫓아가고, 사실상 시간의 역순구조는 변화의 프롤로그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이미 그것은 시원을 거슬러가는 모종의 어떤 것, 서서히 창백해지는 햇살의 광대함 속에 숨겨진 쓸쓸함의 그리고 나약함의 관조적 형태였을 따름이었다. 마치 모든 물자체, 그중 특히나 조형물의 부질없음. 그런 연유로 어떤 나약함을 조명해 나가는 차원에서 어떤 암시성의 부재를 서서히 으스러뜨려가는 것, 죽기 전에는 결코 끝나지 않을 비애의 근원점을 침묵하는 하늘은 그리고 있었다. 일그러진 잿빛의 아스라한 색채도 마치 인간이 간직하고 있는 두려움 아닌 두려움과 열정 아닌 열정으로 그를 구심으로 하여 온갖 방황이며 향연의 이중나선 구조를 생성해가는 모순에의 궤적을 소진해 가는데도, 그것은 열렬히 무관심의 비원지성으로만 투사[投射] 하므로. 남은 소립은 끝없는 펼쳐짐만이.



검은 바다는 형형색색의 별들이 중간 중간 번쩍이는 보라 빛 하늘을 비추고 있었다. 부드러운 물의 잔향과 대기의 미적지근한 움직임은 항구의 저녁을 느긋한 속도로 움직이게 하였다. 가벼우면서도 순수한 어둠이 여기 몽블랑 시 전체를 데우고 있을 때, 사람들은 그 가운데서 낡은 고철의 전등이 희미하게 깜박이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노랗고 하얀 색깔의 퇴폐적 음울을 품어내는 배경에서 활발히 움직이고 있었다. 미세하게 불어대는 밤공기를 맞으며 한 노신사가 벤치에 앉아 있었다. 포플러 나무들이 가만이 서서 음산한, 차갑고 변색된 시류를 품기고 있었고, 앙상하지도 풍성하지도 않는 나무의 가지들이 나타내는 불안한 보편성은 그를 한아름 자극하였다.



고독에의 자괴감이랄까, 미묘한 여러 가지 통속적인 생의 자극들이며 그것들이 시간이라는 불안정하고 무미건조한 자조를 일으키는, 그럼으로써 필연적으로 영혼을 비애와 자조로 몰아넣는 원형의 관 앞에서 그는 생을 본 것일까.



사람들이 거리를 활달히 해쳐 나가고, 검은 고양이며 갈색 고양이들의 찢어지는 울음소리의 유희가 시작될 무렵이었다. 검은 길이 붉은 여로로 이어질 무렵이었고, 사람들과 강아지들은 서로간의 경의화합에 정신이 팔려 주위의 아무것도 제대로 관찰하지 못하는 때였다. 그들의 대화는 차가운 유럽의 성곽 안에서 냉정한 조정[調停]에 능란한 귀족들이 띄는 정신적 교배를 인상하고 있었는데, 그럼으로 육체적 교배를 준비하기 위한 합법적 거래의 과정이 무심히도 조장되어 간다고 노신사는 생각했다.



포플러 나무들은 한데 뒤엉켜 비열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나는 혼자다.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고요한 밤은 내게 두 가지 선택을 제시하는 것이다…’



신사의 흰 머리의 뒤편으로 메케한 여송연 연기가 한 번의 수축과 두 가지 파장을 흘리며 미적지근한 번들거림으로 서 있었다. 신사의 검지와 엄지 사이로 굵은 갈색 여송연이 타들어가고 있었다. 강물을 마주하고 있는 갈 색 나무벤치에는 밤 갈색 차가운 어둠이 흔들흔들 중심에서 불안정하게 서 있는 그것에 드리워졌다. 천천히, 또 천천히. "젊은 시절 난 무어였는가? 너는 너의 하나뿐인 시간에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보편과 명상의 흐릿한 조화의 행보를 단순히 가벼이 짓밟고, 오직 흐릿하거니와 이상과 사상으로 범벅된 술회의 거듭만을 지나오지 않았는가. 넌 단지 현실을 거부하는 잔챙이에 다름없어. 넌 정신병자야."



여송연을 쥔 노인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무한한 방종과 내일을 위한 기원은, 밤이 이차원의 세계 속에서 비사유하며 포퓰리즘의 위선적이며 원초적인 여타 것들에 빠져든, 얼간이들의 합의에 이루어진 거짓 사실들에 감화된 개인에게 선사하는 일종의 기회다. 나는 오로지 전자의 삶을 살아온……' 노인 내면에 썩어 들어가는 자학의 웅얼거림 속에서도, 항구와 거리의 지변은 일정했다. 또한 강물과 강물의 부딪침에서 파생되는 유순한 은빛 번뜩임도 노인의 가슴에 희망을 불어넣지는 못했다. 여송연을 내려놓으며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과연 그런 향유적 시널리즘이 의미가 있는가. 단순히 자신을 천천히 죽여 가는 개개인의 데카당적 행위는 서서히 어린 시절의 추억을 부수어 갈 따름이다. 모든 것은 여기서 파괴된다.





달의 붉은 음영이 노신사의 귓볼을 스치고 지나갔다. 귀는 빨갛게, 실로 잔인하게 물들었다. 검은 하늘이 모두를 조망하고 있을 때 거대한 무의식의 조묘, 온갖 엉성한 일들에 대한 응집된 분노 혹은 증오가 그의 가슴에서 싹트고 있었을 때, 아니나 다를까 그것은 그를 담담히 바라보기만 하였다. 여송연의 무연한 방향 때문이었을까. 저녁의 공기는 한창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그림자를 쫓아가자. 확실한 배경의 돌담에 그림자를 묻어두자. 보이는 건 아무것도 없다." 또한 그는 생각했다.



"나의 유년 시절, 밑에서 밑으로. 끝도 없는 과거로. 어떠한 방해도, 고통도 없는 시작의 과거로. 우선 나의 다짐이 있기에 앞서 난 자연 본위의 모습으로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싶어. 태초에 말씀이 있기 전에 그 빌어먹을 말들이 있기 전에 예의 사실을 주지할 수 있는, 또한 실지적으로 사실의 역사를 주조해 나가는 '내가' 태어났던 거다. 내가 있고, 나의 인식 범위 안에서의 세상이 창조되었어. 그리고 그것은 운명이라는 이름으로, 혹은 과학이라는 힘의 함의적 균형 속에서 내 영혼의 울림에 수많은 개입을 해왔지."



그가 앉아있는 벤치를 끝으로 하여, 점점이 공간의 검은 어둠은, 그자신이 생성하는 무자비한 어둠의 확장을 단순히 물의 표면에서 이따금 자연스럽게 그리고 은밀하게 발산되는 은빛 실랑이의 미묘한 번뜩임과, 외소한 중간에 나홀로 점유된 채 서 있는 외로운 포플러들의 불안감을 역동적으로 빨아들이고 있었다. 실로 어둠은 망쳐진 어떤 균일한 삶을 조각 조각내는 블랙홀의 붉은 심원함에 적조하였다, 고 보아도 무방했다.



"과거가 현재를 선행한다는 건 명백한 사실이다. 그런데 과거를 뜻 깊게 회상하지 않는다면 현재를 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는 의심을 떨쳐낼 수 없는 명명백백한 이유가 있다. 현재는 행복이고 과거는 의미이니까. 그런 사실이 올바른 미래를 준비하기 위한 고찰의 참된 최상의 방식 중 하나라는 것이 일정한 전제성을 명제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과거는 현재를 단순히 선행한다? 행복 역시 마찬가질까, 만약 그렇다면."



여송연의 크기는 3/1로 줄어들어 노인의 손에 어떤 열탕을 제시하고 있었을 때, 그는 또 생각했다. 에스프레소의 최고 강배전 단계라고 칭해지는 이탈리안 로스팅의 썩은 향과 완전한 교차를 보인다 하고 그는 생각했다.



그에게 여송연과 에스프레소는 하나의 보루였음이라. 어렸을 적에 지켜온 지조와 수련은 헛된 것이었음이라, 그는 그의 망쳐진 유년시절을 회상하며. 자신을 망친 가족 로망스는 간과하고 온통 철학에 빠져 인생을 허비해왔음을 한탄하여. 사실 모든 게 끓어 넘치는 열정 또는 성욕에 삶이 이 전체, 모든 전체에 존속돼 왔음을 그가 깨달았을 때, 그의 생각은 한층 열렬함을 띄었다. 철학은 쓸모없다고.



"은은한 행복이란, 모든 추상된 언어로 기술된 철학의 긍정적인 방향에로의 탈태를 말한다. 철학자들은 아쉽게도 긍정의 기로든 부정의 기로든 구별하려하지 않아. 그들은 다만 객관적인 정방체를, 비일관적이고 장대하지만 극히 자연스러운 다면의 일직선적 구획체를 손에 넣으려고 하지. 말하자면, '진실'을 원할 뿐이야. 그러나 그것에 도달하려고 하면할수록 그것은 점차 그의 손에서 빠져나가! 왜냐하면 현실이 곧 진실이 때문이고, 그들의 현실은 우습게도 탈태와는 멀어지는 방향으로 전개되기 때문에 결국, 종말 없는, 지독히도 동일한 자조의 늪으로 빠져들고 마는 것이다. 그러니까 철학자들이 자신의 노예라는 유언비어는 틀린 게 아니야! 구체적으로 말해서 그들은 자신들의 무의식을 영원히 억압하고 괴롭힌 공포와 지독한 슬픔에 관해 리비도의 패배라는 말로만 고개를 숙여. 그건 아니야, 정말로. 일반적으로 노예란 행복한 존재가 아니야. 역사상 모든 노예들, 세계 모든 노예들은 심각한 고통에 맞서 폭발적인 자기애에 더욱 폭발적인 집중을 하지. 그들의 유정[有情]은 강자에게 맞선 약자의 유희에 진배없다. 할 말 없는 바보들의 흐느낌이며 찌그러진 우수이며 공상이다."



12시를 알리는 궤종 시계가 그의 작은 석조 집을 울리면, 그는 피아노 앞에 앉아 한 가지 일을 수행했다. 그가 혼자만의 산문을 읆어감에서 벗어나 시에 빠져드는 유일무이한 하나는 피아노였다. 노인이 치는 피아노는 너무도 낡아 찌그러지고, 부서지고, 깨져있었다. 자작나무로 만은 이 수제피아노는 징그럽게도 오래된 것이라, 형태의 구체적인 궤적이라곤 발견할 수 없고, 소리 없이 지나가는 시간의 환멸성 조차 잊을 만큼 고색창연한 역사의 순환 고리로 연결된 인간정열에 관련하여 종결의 파괴된 편린의 깨진 조각처럼 서 있을 뿐이었다.



"망쳐진 과거로 돌아간다고 한들 역시나 똑같은 상황에서 똑같은 태도로 일관하는 자신을 대면하게 될 터인데. 여전히 패배적이면서 여성스러우며 동시에 일관된, 심지어 획일성과 겹친 자괴성을 그래그래, 내 과거는 결코 돌아오지 않아. 아무리 후회하고 발버둥쳐도 보이는 것은 유일하게 현실 하나이다. 현실, 그것은 과거의 역동성과 과오를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소모적인 마법가루여서 어쩌면 어떤 이들에게는 비소모적인 사유의 전개과정으로 다가올 수도 있겠다."



이윽고 노인은 편안하게 잠들었다.



그리고 그가 잠에서 깨어났을 때,



그리고 어느 순간에, 새벽은 다가오고 있었다. 그 여명의 순간의 이전에 하늘은 짙은 시[視]의 전장으로 내달리고 있었다. 예상치 못하게 어둠이 자잘히 부서지고, 분해된 동결의 심연이 무수한 아름다움의 여백으로 남아, 하늘은 조용한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 갑자기 신선한 자연의 냄새, 아니 고귀하면서도 웅대한 산소 같은 것이 거기에 스며들었다. 무한하게



넓다랗게 펼쳐진 깨끗한 하늘. 상공의 여명은 이렇게 은하수가 아득히 걸려 있었다. 조그마한 늙은 짐승의 삶이 천천히 펼쳐지고 있었다.









6장 나의 회고 - 사별.

태양이 눈부신 하루였다. 베티의 아름다움이 그녀를 죽음으로 몰아넣을 듯한 느낌에 사로잡힌 지도 오래 지났다. 미인박명이라 했다. 아름다움은 오래 못 가는 법이다. 베티와의 사별은 어처구니없게 일어났다. 그날은 태양이 교교하고 쓸쓸하게 런던 시내를 비추는 하루였고 나는 그날 베티에게 청혼하기 위해 반지를 하나 샀다. 24k의 뱀 무늬가 새겨진 금 반지였다. 내게 다이아몬드는 과분했으므로 살 수가 없었지만 이것을 받아 든 베티의 즐거운 얼굴을 떠올리니 새삼스럽게 나 또한 기쁨에 사로잡혔다. 그날도 역시 까페 ‘느와르’에서 그녀와 만났다. 그녀는 반지를 받아 들고서는 감격에 젖은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나는 내가 정말로 베티를 사랑하고 있다는 걸 그 때 깨달을 수 있었다. 베티를 위해서는 죽을 수 있었다. 베티는 나의 생존의 이유였고 우리는 아름다운 가정을 꾸리고 살림을 차려 영원히 함께 늙어갈 수 있는 것이었다. 그날 밤 베티와 나는 밤거리를 걸었다. 베티가 내 뒤통수를 툭 치고 도망가기 시작했다. 나는 베티를 잡으려고 쫓아가려는 데 그 순간이었다. 달리는 마차가 베티와 강하게 충돌했다. 충돌 직전 베티의 눈망울이 왠지 슬픔과 삶에 대한 초연함으로 일그러진 것 같았다. 베티는 그때 내게 사별을 고하고 있었다. 그것으로 우리의 만남은 종말을 고했다. 나는 하나뿐인 소중한 약혼녀를 잃은 것이다. 나는 완전히 망연자실하여 런던 등지의 아편굴을 상습적으로 드나들었다. 거기서 거대한 대나무 파이프로 아편을 피우고 서는 꿈속에서라도 베티를 만날 수 있었다. 아편을 피우고 꿈에 잠기는 경우 꿈 안에서 수십 년의 세월을 보낼 수도 있었다. 베티와 나는 함께 늙어 갔고, 우리는 나의 무의식적 능력으로 생성된 아름다운 정원이 딸린 거대한 저택과 이 퇴폐의 도시 런던과 함께했다. 런던은 언제라도 우리와 떨어질 수 없는 존재였다. 물론 꿈의 런던에는 범죄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아편에서 깨어날 때면 나는 여느 때보다 심한 고통에 시달렸다. 두려움과 불안이 엄습했고 그 지옥 같은 순간을 견딜 수 없어서 나는 또 다시 아편의 세계로 빠져드는 것이었다. 그렇게 수개월이 흘렀고 꿈은 계속해서 연장되었지만, 어느 순간에 나는 아편을 피우는 행각을 중단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베티가 허구라는 걸 꿈의 마지막 순간에 깨우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리하여 이 모든 게 허구라는 사실을 자명하게 직시하고 나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 후로 나는 의대시험을 준비했고 2년의 재수 끝에 당당히 합격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이 글을 기록하면서 나는 의대에서 대학원생으로 화학 실험과 해부학 실험에 동참할 수 있는 것이었다. 아편이나 코카인 같은 마약은 끊었지만, 나는 줄담배를 끊을 수는 없었다. 식물성 알칼로이드인 니코틴이 내 혈관을 빠져 나가는 순간 나는 극도의 감정의 과잉을 느낌으로써, 베티와의 추억이 마치 회한처럼 떠오르는 걸 방지할 수 없었으므로, 나는 폐가 썩을 때까지 담배를 줄곧 피워댔다. 그 당시에 담배를 피지 않는 남자란 찾아볼 수 없었다. 정말 런던 전체가 담배연기에 중독되었다고 치부할 수 있었다. 담배는 만병통치약이자 모두의 기호품으로서 건강에 좋다는 구실 아래 심지어 아이들까지도 담배연기에 물들어 있었다. 그러나 중요한 건 담배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내 의대 생활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의대에서 나는 친구 한 명을 사귀었는데, 그의 이름은 ‘존슨’이다. 존슨은 화학을 전공했지만 누구보다 열광적인 철학자였는데, 나에게 항상 자신이 발견한 아포리즘을 설명하는 데 하루를 보냈다. 그는 영혼의 존재여부를 긍정하고 있었다. 그는 인본적인 모든 철학은 항시 긍정에서 생겨난다고 했다. 그리고 인간에게는 누구나 내적 필연성을 보유하고 있는데 이러한 것이 항상 그를 지켜준다고 말했다. 나에게도 물론 철학이 있었다. 그러나 존슨의 철학만큼 하나의 뚜렷한 체계를 갖추고 있지도 않았고, 좀더 불명료하고 부정확한 것이어서 꺼내기조차 부끄러운 것이었다. 사람들은 의대를 졸업한 것을 영광으로 여긴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의대가 엘리트 코스이든 아니든 간에 모든 분야는 거기에 맞게 독특한 의미가 있는 것이다. 나는 의대를 미래에 돈을 생산하기 위해 다닌 것이었다. 내게 의학이란 어떠한 의미도 없었다. 이렇게 내 과거는 막을 내린다. 내게 새로운 삶을 부여한 것은 리틀 홀더스 경과의 만남을 시작으로 해서였다. 리틀 홀더스 경은 내게 세상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일깨워 주었다. 그에 대한 사건기록은 실로 역사에 길이 남을 훌륭한 것이었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7장 사건의 실무.

홀더스 경과 나는 길가에서 사륜마차를 잡아타고 사건 현장으로 향했다. 마차 안에서 나는 이미 세상을 등진 베티에 대해, 그리고 그녀의 성기에서 났던 그윽한 인간적 냄새를 떠올리고 있었다. 여자의 성기는 남자의 성기에 비해 비밀스럽고 은밀한 면이 있다. 가랑이 앞면으로부터 항문 쪽까지 일자로 갈라져 있는 미스터리한 형태는 여성의 신비스러움과 아름다움을 대변한다. 여성의 육체에서 가장 아름답거니와 귀엽고 가장 생동감 있게 꿈틀거리는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여자의 음부, 즉 ‘보지’일 것이다. 그리고 왜 여자의 성기가 남자의 성기보다 짐승적인 냄새가 심한가하면 이는 바로 밀폐돼 있기 때문이며, 오줌과 질 특유의 냄새, 그리고 여성호르몬이 가장 폭발적으로 거기에 밀집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여자의 아름다움을 반감시키는 중대한 요소가 있다면 그것은 음부가 털로 뒤덮이는 것이리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반으로 갈라진 조그만 살덩이가 검은 털에 가려 그 광휘를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다면, 이보다 더 큰 시대적 비극이 어디 있으랴. 그래서 당시 영국의 귀족의 부인들은 자신의 음모를 면도날로 미는 게 유행이었다. 그럼으로써 남편에게 하나의 완전한 선물을 선사할 수 있는 것이니까. 또한 여자의 항문은 남자의 항문에 비해 어떤 광채의 직사와도 같은 아우라가 스며들어 있다. 그 가장 부끄러운 부분에서는 결코 변이 나오지 않을 거 같으며, 사실 여성의 항문은 질보다 더 강하게 남성의 성기를 조이기 때문에 쉽게 사정하게 만든다. 그러나 당시에는 온수가 공급돼 있지 않아 귀족의 딸이나 공주라 하더라도 자신의 아름다운 항문의 냄새를 완전히 제거할 수 없었다. 그야말로 약간의 변 냄새가 나는 것이었다. 이렇게 내가 여자의 하반신의 특이한 측면을 생각하고 있을 때 반대로 홀더스 경은 내내 침묵을 지켰다. 모종의 명상에 빠진 것 같았다. 아마 이번 사건에 대해 현장에 도착해서 조사하기 전 이론적으로 변증법적인 접근을 시도하는 것 같았다.



피해자인 살해된 로더스 경의 저택은 어마어마했다. 동으로 구성된 울타리 너머 광대한 정원이 펼쳐져 있었고, 저택의 전면의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육중하고 두터운 금도금된 문짝이 양쪽으로 겹쳐져 있었는데, 거기에는 사자의 형상이 양쪽으로 그려져 있었다. 정원에는 드문드문 너도밤나무가 자라고 있었고, 호화로운 개인 호숫가가 자리 잡고 있었다. 사건 현장은 참혹했다. 1층 별관 복도에 메이드 두 명이 살해돼 있었는데, 경감의 살해 기법은 경감의 말 대로였다. 그리고 2층에 위치하는 대저택의 주인 로더스 경의 침실에는 로더스 경이 죽어있었고, 핏자국은 증거 자료로서 지우지 않고 그대로 남아있었다. 홀더스 경은 시체를 먼저 보지 않고 가구의 서랍을 뒤지고 벽들을 조사하다가 뭔가 피가 튀겨있는 자국을 발견했다.



“엇, 이게 뭐지!”



나도 자세히 벽의 그 부분을 들여다보았는데 거기에는 이렇게 조그맣게 피로 써 있었다.





Catch me if you can.





홀더스 경이 갑자기 미친 듯이 껄껄거리기 시작했다.



우리를 따라 들어왔던 경감(경감의 이름을 앞에서 설명하지 않았는데, 그의 성함은 ‘모티머’이다. 앞으로 사건들이 들이 닥칠 때마다 그가 자주 연계되어 등장할 것이다.)이 신들린 사람을 요상하게 보는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홀더스 경이 “내가 나를 자랑하는 건 아니지만 전세계는 아니더라도 영국에서 나의 두뇌를 따를 자가 없다는 건 명확한 사실이지. 나는 영국 최고의 두뇌지만 지금 이 가해자 즉 범인은 나를 놀릴 심상으로 이 매시지를 적었어. 나와 한 판 해보자는 거지. 경감, 그리고 지미 군. 이 사건은 생각보다 기이하거니와 악마적인 사악함이 도사려 있네. 어쩌면 그 배후에 나보다 더 기술적이고 영악한 거대한 범죄 조직의 수뇌부의 대장이 지금부터가 비극의 광시곡이라고 말하는 걸 수도 있겠구먼. 자, 그럼 시체를 조사해볼까.”



홀더스 경은 로더스 경과 메이드들의 시체를 두루 살폈지만 어떤 특이한 점은 밝혀낼 수 없었다. 경감의 말과 같은 수법으로 모두 살해돼 있었으며, 특별히 이상한 점은 그들에게 저항의 흔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가만, 로더스 경의 발목에 바지를 관통하여 못이 박혀 있잖아. 이는 기절했다는 것인데 멀쩡하고 건강한 젊은이가 갑자기 쓰러질 일은 없을 텐데.” 홀더스 경은 빠르게 말하고는 또 이어 나갔다.



“경감, 분명 마취제를 쓴 것 같아. 냄새로 보아하니 ‘클로로포름’이군. 손수건에 묻혀서 뒤에서 접근하여 순간적으로 피해자들의 코를 막은 게 눈에 훤하군. 시체 검시를 하지 않았으니 아무래도 내가 직접 혈액을 채취해서 자택에 가서 조사를 해야 할 것 같구만.”



그리고 홀더스 경은 조사를 착수하려고 집으로 돌아가려는 발걸음을 중간에 멈추고는 문득 생각이 나던지 경감에게 “특별히 외부에서 들어온 물건은 없던가?”라고 물었다.



경감은 잠시 생각하는 듯이 얼굴을 찌푸리더니 이윽고 “거의 다 피운 시가 한 까치가 로더스 경 침실 문 바로 앞에 떨어져 있더군. 증거물은 여기 보관해 두고 있네.”하더니 주머니에서 보호 비닐에 쌓여진 거의 다 피워 짧아진 시가를 홀더스 경에게 건네었다.



"음, 쿠바 산 연초로 쌓여진 다비도프사의 고급 시가이군. 이건 옥스퍼드에서만 한정 판매되는 제품인데 나는 시가와 파이프 연초에 관해서 논문을 쓴 적이 있지. 그래서 어떤 담배를 보든지 간에 어느 사 어느 제품인지 알아맞출 수 있어. 그는 분명 옥스퍼드를 경로해서 로더스 경의 저택에 침입했을 테고, 범인의 집과 범죄계획을 짠 거주지가 어쩌면 옥스퍼드의 한 여관이나 호텔일 수 있겠네. 모티머 경감, 옥스퍼드의 모든 숙박시설의 장부의 내용을 사람을 풀어 철저하게 조사하게.”



경감은 이 목격자가 한 명도 없는 사건에 한 가닥 실과 같은 실마리가 발견되어 좋아하는 눈치였다.



갑자기 홀더스 경이 운을 떼었다.



“그리고 내가 보관하고 있는 그 아가씨 사진은 아마 내게 큰 도움이 안 되는 것 같네. 경감이 그 사진을 복사하여 공개수배하게. 그러면 인맥관계가 뚜렷하게 확정될 거고, 수사망을 점차 좁힐 수 있을 걸세.”



“예, 알겠습니다. 신문에 광고도 내고 동네 방방곡곡에 수배지를 배포하겠네. 그러나 자네와 함께 수사하지는 않을 걸세. 그동안 너무 자네 도움만 얻었어. 이번에는 독보적으로 경관을 풀은 다음 발견한 것들을 종합하여 내 의지대로 결론을 내리겠네.”



“좋아, 좋아. 그렇게 함세. 자, 나는 지미 군과 자택으로 돌아가겠네. 나중에 보고 서로 새롭게 귀납적으로 발견한 게 있으면 각자 전보를 띄우도록 하세. 그 정도야 괜찮겠지.”



경감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한 번 휘젓더니 나가라는 듯 눈치를 주었다.



우리는 범죄현장을 감싸고 있는 노란색 테이프를 조심스럽게 건너 돌아가려는 채비를 하였다.



“지미 군. 이 사건은 보통 사건이 아닐세. 분명 대가의 솜씨야. 아주 미스터리하고 알레고리하군. 좀더 우회적으로 사건에 접근할 당위성이 필연적으로 요구되는군. 이제부터 우리가 할 일은 철두철미하게 증거물들을 토대로 추론하여 사건의 막을 내리는 일이네. 아직 종점은 멀었지만 그런 이유 때문에 이 사건이 진기하고 값진 것이지. 자, 가세.”



우리는 로더스 경의 대저택을 뒤로 하고 사륜마차에 탄 채 유유히 홀더스 경의 자택으로 향하였다.







8장 Drugs.

홀더스 경에게 집에서 쉬겠다고 얘기한 후, 집으로 돌아왔다. 집은 여전히 고요하고 적막했다. 나는 금단증상 때문에 오랫동안 약에 굶주려 왔다. 소파에 앉자마자 주사기를 꺼내서 예전에 맞았던 순도 5%의 코카인 용액을 7%로 늘리고 즉시 정맥 혈관에 찔러 넣었다.

몸이 불같이 뜨거워지는가 싶더니 어두운 터널을 지나는데 머리를 망치로 쌔게 연속적으로 맞은 느낌이 들더니 배경이 하얘졌다. 엄청난 쾌락이 대뇌에서 폭발하고 있었다. 이 짜릿함, 전율, 그리고 마비되는 느낌. 이윽고 안개가 눈앞에서 환각으로 나타나더니 악마의 형상이 그려졌다. 이 설레임, 고양감, 극도의 만족감, 극명한 쾌감. 세상이 온통 내 것이었다. 이래서는, 코카인 중독자가 돼서는 안 될 듯싶었지만 이 고무, 즉 쾌락을 평생 잊고 싶지 않았다. 나는 결국 폐인이 되는 건가? 코카인은 확실히 강력한 약물이다. 물론 마약의 황제는 헤로인이라지만, 그리고 코카인은 연속으로 3개월 이상 하지 않는 이상 중독이 안 된다지만 아무래도 내 몸에 코카인은 너무 민감한 듯싶다. 그리고 어젯밤 뒷골목에서 사온 마리화나를 도취의 가운데서도 종이에 말았다. 이윽고 완전히 말은 마리화나 한 까치를 입에 물고 성냥으로 불을 붙였다.

엄청난 안정감과 다행감이 심장에서부터 끓어오르고 있었다. 이 알딸딸한 기분과 코카인의 각성성이 나를 온통 휘감았다. 실로 마약은 좋은 것이었다. 엄청난 도취의 새벽을 맞은 지금, 나는 신들린 채 서정시를 써내려갔다. 내용은 주로 베티에 관한 것이었다. 베티의 영혼, 베티의 얼굴, 베티의 육체, 베티의 보지, 베티의 항문. 나는 그녀를 너무 사랑한 것이었다. 똑같은 사랑은 두 번 다시 오지 않는다. 나는 앞으로 결코 다른 여자를 사랑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도취 중에도 슬픔에 젖어 더 강한 마약을 갈구하였다. 저기 난롯가 위에 홀더스 경에게 받은 헤로인 용액 샘플이 있다. 헤로인은 손을 대면 즉시 인생이 마감된다고 할 정도로 세상에서 제일 강력한 약물이다. 죽기 전에 한 번 맞는다고 칠 정도로 의사들도 극도로 조심스럽게 쓰는 약물이다. 그러나 한 순간의 쾌락을 위해서라면 죽어도 좋다. 나는 헤로인 샘플의 용액을 수분 전해질에 10%라는 많은 양을 섞어 곧바로 정맥에 주사했다.

환상, 꿈결 같은 기분, 날아오르는 듯한 느낌, 아무 것도 하기 싫고 영원히 이 천국에 존속하고 싶은 기분, 열정적인 사랑을 하는 기분, 고취감, 따스함, 아름다움, 극도의 만족감, 배경이 흠뻑 하얘진다. 그렇다. 여긴 천국이다.

나는 한 번에 세 가지 마약을 동시에 주사한 것이다. 내 뇌는 완전히 균형을 잃고 비정상적인 쾌락에 자신의 모든 것을 맡겼다. 천국 같은 건 필요 없다. 마약이 존재하는 한 지상이 천국이라는 명제는 성립된다. 마약은 실로 신의 선물이다. 나는 죽을 때까지, 피골이 상접할 때까지 마약만 하리라. 홀더스 경과의 사건은 아무려면 좋다. 베티의 죽음도 내게는 무관한 것이다. 오직 이 쾌감만이, 이 도취만이 내 불멸성을 보증할 것이리라. 내 영혼을 악마에 팔아서라도 나는 마약을 지속적으로 할 것이다. 이 영지주의의 ‘카발라’를 전신으로 느껴보자! 삶이 이렇게도 만족스러울 수 있단 말인가.

그렇게 나는 도취에 몰두되어 깊은 잠에 빠졌다.



자명종 시계의 울림에 깨어 일어나보니 밤이었다. 무려 19시간 정도를 숙면한 것이다. 나는 어지러움과 깨질 듯한 두통을 바로 잡고 일어나 해군담배를 물었다. 불을 붙인 후 안도감을 느낀 후 핸드밀로 원두를 갈아 커피를 내렸다. 아주 강하게. 커피 원액은 너무나도 진해 흙탕물을 농축한 것 같았다. 그것을 크림과 반반씩 섞어 먹었다. 해군담배는 줄담배식으로 폈고 그런 이유로 나의 도파민 수치는 다시 정상을 찾고 있었다. 그때였다. 우체부가 오더니 전보를 건네는 것이었다. 내용은 이러했다.



지미 군에게.

화학실험 결과 역시 클로로포름이었네. 내 추론이 맞다면 범인은 중키에 중년 백인 남성으로 수염을 길게 잔뜩 길렀지. 왜냐하면 내가 사건 현장에서 털이 떨어진 걸 봤는데 그게 꽤 길었지. 그리고 털의 색깔이 노란색으로 보아 백인임을 알 수 있고, 털의 길이로 보아 중년이 아니라면 이렇게 길게 수염을 기를 수가 없네. 그리고 노인도 물론 수염을 이렇게 기를 수는 있겠지만 수염의 색깔이 하얗겠지. 아무튼 수사망은 좁혀졌네. 이제 이러한 제특징을 수배하여 영국 전역에 뿌리는 일만 남았네. 여러 가지 증거와 범인의 특징은 이미 우리가 범인을 반쯤은 잡았다고 봐도 무방할 걸세. 지미 군. 내 집으로 오게. 그리고 자네 어제 눈망울을 보니 마약에 반쯤 쩔어있더군. 그러다 인생 종칠 거네. 내 앞에서 마약은 절대 안 되네. 혼자서도 절대 마약에 손을 대지 말게. 더욱이 헤로인에는 결단코 손을 대지 말게. 헤로인만큼 무서운 약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네. 자, 그럼 파이프를 피우면서 기다리고 있겠네.

- 자네를 존중하는 리틀 홀더스 경 씀.



자, 이제 서막이 2장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이제 내가 홀더스 경에게 어느 정도 도움을 줄 차례였다. 그래! 힘내야지. 내가 이래봬도 명실공이 영국 최고의 지성의 비서가 아닌가. 이번 연쇄살인 사건의 범인, 그 범죄계의 대부를 꼭 손아귀에 넣고 말테다! 더군다나 첫 사건이니만큼 이를 해결 못한다면 앞으로 닥칠 사건들을 풀어나가기란 참으로 어려울 테다. 나는 홀더스 경에게 가고자 이륜마차를 잡고 마부에게 5실링의 팁을 준 후, 마차 안에서 눈을 조용히 감고 홀더스 경의 저택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 무렵 창가로 비춰지는 달은 보름달이었는데, 조용히 빛나는 게 그 음습함이 앞으로 닥칠 불길한 사건들을 암시하고 있는 것 같았다.









9장 베티의 꿈결 속에서-상.

낡아 빠진 목재건물을 향해 햇살은 비친다. 햇살의 여분이 자그마한 창가로 스며들고, 그 베일은 건물의 외관을 사뭇 구수하게 비춘다. 그러나 미상불 스며든 햇살은 공허하게 갈라져 모래와 같이 실내에 흩뿌려진다. 그녀는 커피를 마시며 고적한 바깥을 바라보지만, 햇살은 예외 없이 그녀의 영혼을 모종의 돌이킬 수 없어 창조된 상실감과 관조적인 형태의 우수가 섞인 노란색의 부드러운 빛줄기로 적신다. 커피 잔의 끝이 흰색의 강한 영광瑛光으로 빛나고 있다.



창가의 창문은 오랫동안 청소를 안 했는지 모래의 색깔과 같은 점 자국으로 덕지덕지 붙어있다. 오후 4시의 진한 자조감이 깃들어 있는 햇살이 마치 그녀의 심정을 대변하듯 점차 희미해져 가고 있다. 창밖은 단지 온통 하얀 산림으로 이루어져 있다. 일상적이면서 고요한 풍경, 그 외엔 아무것도 아닌…….



열어젖힌 창문을 통해 바라보는 하늘은 언제나 그렇듯 푸르고 소박하다. 그녀는 천천히 눈을 감고 점점이 떠오르는 회구의 한 자락에 감정을 맡긴 채 스쳐지나가는 소중한 장면들의 순간에서, 슬픔의 응어리를 기조로 삼아 고즈넉이 음미하고 있다. 스웨덴 지미군의 검은 고수머리 사이에 위치해 있는 쪽박 귀, 그리고 아름답고 용맹한 그의 눈, 그가 내 비밀스러운 곳을 만질 때 느낀 아득한 기분.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 있을까. 현실은 이미 그 기점을 지나 정신없이 흘렀건만 과거라는 이름의 쇠사슬은 그녀를 놓아주지 않는다. 그녀는 밖을 내다보며 창밖 풍경과 뒤섞인 영원함 그리고 지나가버린 아름다움을 생각하며 멈추어진 그 시간들을 쓸쓸히 바라볼 뿐이다. 아니, 그녀는 그 시간 아래 우뚝 서 있다. 커피 잔은 이제 비어 있다. 밖에서 불어대는 청신한 서풍이 그녀가 돌이키고 싶은 시간들을 아스라이 깍아 내리며.









10장 베티의 꿈결 속에서-하.

이루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운 환상, 꿈의 궁전이 21세기 빈민가 한구석에서 죽어가는 소녀의 들뜬 어린 시절의 미학 속에 숙연히 가라앉아 있다. 더러운 현실을 피해 달아남, 그녀는 두 눈을 감는다. 어느덧 초원, 쓸쓸함이 묻어 있는 초원 한가운데서 꿈의 궁전을 응시하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의미 없는 도트가 지워져가는 해변의 한 장면과도 흡사하게 초원의 초록색을 그린다. 미묘한 정취가 풀 곳곳, 나무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 시인들이 19세기 파리를 동경하듯 그녀는 광활히 펼쳐진 구름을, 구름의 순수함을 동경한다. 그 휜 빛과 푸른빛의 유려한 조화를. 환상의 늪에서 건져 올린 진선미의 푸른 보은. 그녀는 그 경계 속으로 빨리듯 들어간다. 침잠한다. 꿈결 같은 중세 유럽의 아늑한 풍격, 그 고풍스러움을 아득히 적시한다. 비길 데 없이 유연한 궁전의 고딕 양식. 유럽의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의, 미래의 근원으로부터 발촉된 시간의 흐름이 이 궁전 곳곳에, 이를테면 벽면 정교하면서 규칙적인 벽돌 선 하나하나에 끝없이 강렬히 녹아있다.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긴다, 그녀는. 수채화의 유미로운 진경이 지금 이 하나의 장면, 하나의 시각이라고 그녀는 생각한다. 가차 없는 미의 추상에 육박했으므로, 가차 없는 환각의 소묘 속에 입단했으므로, 그의 기다림이 오로지 그녀 영혼 하나만을 위한 것이라고 그녀는 깨달았으므로. 왕자의 초상은 하얗게 젖어 그녀의 촉촉한 눈을 구원의 파노라마 끝으로 데려갈 것이라고, 그녀에게 약조하고 있다. 거대한 시계가 성[城]의 탑 위족에서 은은히, 댕댕댕, 하고 더러운 21세기의 빈익빈 부익부 그리고 외모지상주의의 참상을 견조하고 있다. 절정에 오른 미지의 세계, 무형의 아련한 세계는 여느 때나 마찬가지로 그 환상의 원은 그녀의 인식의 피안을 꿰뚫고 있다. 시간이 끝난 것일까. 보이지 않는 눈물줄기가 그녀의 볼을 타고 흘러내린다.



-소설은 ‘중’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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