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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칼럼] 철학과 언어, 정치의 변증법적 논설[대폭수정완역본]
자유게시판 > 상세보기 | 2011-01-06 16:44:51
추천수 5
조회수   1,204

제목

[학술칼럼] 철학과 언어, 정치의 변증법적 논설[대폭수정완역본]

글쓴이

박두호 [가입일자 : 2003-12-10]
내용
p.s 10회의 정신병원 입원 횟수와 총 1년 2개월 간의 입원 기간은 제게 많은 시련을 주었고 새롭게 거듭날 수 있는 힘을 주었습니다. 누구보다 불행한 삶을 살았기에 더 값진 글을 쓸 수 있었고 한 개인의 사유가 어떻게 사회를 바꿀 수 있는지,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감관이 느끼는 패러다임을 어떻게 재구성해서 개략해야 하는지 대략적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통상적으로 삶은 지루합니다. 그런데 우린 거기서 ‘재미’를 원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우리는 거기서 ‘의미’를 구해야 합니다. 그래서 한 구도자로서 자신의 ‘과정으로서의 삶의 도정’을 마치 기억을 걷는 시간처럼 천천히 걸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앞으로 많이 기대해 주십시오.













- 서론



잘못 살아왔다. 나는 언제나 패배주의에 빠져 사물과 현상, 사회의 명확하고 올바른 실체를 보지 못했다. 그랬다. 나는 염세주의에 빠진 한 명의 가련한 어린 우울증 환자였던 것이다. 나에게 삶은 정말 역겨웠고, 나는 내가 아름다움, 그 중에서도 여자의 아름다움에 다가설 자격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흐느끼는 밤을 지새운 걸 이제는 손꼽아 셀 수도 없을 정도이다. 그렇다. 내가 고백한 모든 여자애들이 나를 모욕하고 좌시했다. 나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아무도 나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 누구도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 20대 벽두의 나는 오로지 죽음만을 기다리며 과거를 회고하고 더욱더 슬픔과 자기연민에 빠져 질식해가는 가련한 동물이고, 인생에 있어서 한 번의 로맨스도 꿈꾸기 어려운 의기소침한 못생긴 남자였다. 그래서 난 결심했다. 나의 범상/범용한 능력, 나만의 탁월하고 마치 하나의 신의 계시처럼 나의 정신을 관통하고 있는 이 모종의 아우라를 계승하고 미칠 듯한 글쓰기의 예술로서 마치 랭보의 시時심과 칸트의 사유능력, 촘스키의 언어변증법적 기술, 토마스만의 위대하고 고결한 방대한 산문정신, 이 모두를 종합하여 나는 어떠한 총체적인 사상의 획으로서의 체계를 하나의 입체로서 완성하고자 했고, 거기에다가 마르크시즘과 구조주의, 실존주의를 밀어 넣어 나의 스승이자 현대 실존주의의 창시자 사르트르와 마르크시즘의 유일한 계승자이자 유일하게 스탈린식 공산주의의 가치를 믿었던 레닌 그리고 구조주의의 창시자 레비 스트로스까지 이루어내지 못했던 신기원을 재정립하여 거기에 존재론적 의미의 혜학을 부여하고 역사생산의 주체의 몫은 영웅이 아니라 개개인에게 달림과 동시에 의미생산의 주체 역시 시민들이 할당받을 지당한 자격이 있다는 것을 설파할 것이다.



나는 언제나 고독했다. 못생긴 나의 얼굴이 한몫 했을 지도 모르겠지만 내 성격도 보탬이 됐으리라. 그러나 자신의 역사는 자신이 주체가 되어 써내려가는 것이므로, 미상불 우리는 그 의미론적 불가입성의 공격을 항상 좌시할 수 없을 것이므로, 왜냐하면 이는 모두가 소위 덜떨어진 남녀에게서 공통적으로 오는 오늘날의 비극이 아닐련가? 그래, 과거는 그거면 됐어. 문제는 지금이야. 나는 늙은이와 같이 항시 붙들 수 없는 추억의 조각을 붙들려고 하고 오늘도 과거의 수레바퀴에 매달려 사는 행태에 동참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문제의 핵심은 당연지사 창연하며 밑도 끝도 없는 희망이나 미래도 아니며 오로지 ‘현재’라는 범주 하나에 귀속된 범신론적인 스피노자적 신의 실체인 것이다. 따라서 나는 발빠르게 현재에 대응하는 현대인으로써 당당하고 슬기롭게 새로운 역사를 써 나갈 것이다.



나는 언제나 나를 사랑해줄 애인이 있기를 원했다. 그러나 20살의 벽두에도 내개 애인은커녕 소싯적 친구들조차 떠나버린 게 현실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새 결심을 선취하였다. 이러한 현실을 파기하고 내가 직접 나의 주체가 되어 여자를 차지하는 것이다. 나는 여자의 아름다움이 유미주의의 메타적 범주인 ‘진선미’라 생각하므로, 따라서 그것의 보은은 바로 여자인 것이다. 이리하여 여자는 무엇보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존재의 하나이여서, 나는 지적 방기나 젊은 날의 패기에 빠져 아름다운 여자를 놓치는 과오를 범하지 않음과 더불어 무릇 가장 아름다운 여자를 쟁취하여 사랑에 빠져 한 폭의 로맨스를 담담한 필치로 소묘해나가는 것이 급선무인 것이리라. 나는 아직 젋음으로 어떤 일이든 시도할 수 있으나, 무엇보다 내가 선택해야 할 방향의식과 목적의식은 내 정신을 일신하여 문학과 철학사상의 거장의 세계로 편입해나가는 일이다. 독서삼매경에 빠져 나만의 철학체계를 순일하게 상정하고 흩어져 있는 지知의 편린들을 귀일한 방향으로 압축하여 혁신적인 집약체를 추출하는 것이다. 헤겔이 말했던 절대지로 가는 도정의 순간순간 즉 사유의 도상에서 내가 결정적으로 입적해야 할 여러 가지 추상적인 관념들의 단상들을 지극히 정치하게 조립하여 그 누구도 넘보지 못할 철학이론의 진수를 표명하는 것이다.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과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 그리고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와 같이 세상을 뒤바꿔놓은 역사적인 미증유의 이론을 발표하여 그들이 걸어왔던 길을 전회함과 동시에 즉 능가하면서 모든 학의 분야를 두루 섭렵하면서 최종적인 지점에 이르러 백과전서적인 폭죽을 터뜨리는 것이다. 이른바 세계 학계의 거두가 되는 것이다. 타임지 표지에 내 얼굴을 장식하고, 40살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며, 50살에 영국의 학술왕림원에 들어가고, 60살에 스웨덴한림원의 노벨문학상 심사위원 자리를 꿰차는 것이다. 마르크스->사르트르->촘스키->지젝이 뛰어왔던 지성의 이어달리기에서 내가 바톤을 받고 새로운 학술의 역사를 다시 쓰는 것이다.





필경 중요한 건 언어를 깊이 있고 심원하게 바라보는 관점일 것이다. 내가 언어를 분석하고 해명하는 것은 언어만이 인간의 미래이고 철학의 중심이자 근원이거니와 우리의 모든 방면의 패러다임을 재론하고 구성하는 하나의 질료에 다름없기 때문이다. 또한 인간의 사상의 범위의 크기를 구체적으로 현성하는 언어의 유한성은 실로 인간사상의 유한성과 반대로 그 무한성을 상징하기도 한다. 한 개인의 철학사상의 테두리의 폭은 그 사람의 언어기술에 달려 있는 것이다. 이리하여 언어는 인류의 꽃이거니와 미래를 상정하고 구분 짓고 미분화시키는 일종의 형이상학적인 ‘시뮬라크르’이다. 따라서 이 글은 언어의 심오함과 복잡함에 대해서 철두철미하게 담론할 것이다. 그리고 다가오는 날들에 언어가 어떠한 고매한 아우라로 우리 곁에 다가올 수 있는지에 대해 조명할 것이며 한갓 의사소통의 도구로서가 아니라 본질로서의 ‘언어’ 이를테면 ‘랑그’와 ‘파롤’을 이분법적으로 분화시켜 그 수중에서 ‘랑그’의 속성을 직시하고 철저하고 적나라하게 묘사할 것이다. 언어는 곧 미래이다.



진리체계는 언어로 인해 주조된다. 그러나 우리가 사변이성에만 의탁한 ‘언어적 사유’는 ‘진리의 다의성’을 포착하지 못한 나머지 단지 선형적이고 지엽적인 문장의 연속의 횡행만을 넘보고 있을 뿐이다. 반면, 충만한 직관은, 모든 분야를 총체적으로 아울러서 전지(全知)를 가능케 하는 모종의 ‘도구’가 된다. 그럼으로 사변이성과 대비되는 이 직관적 사유는 우리가 소위 “깨달음”으로 불렀던 것이었는데, 이 깨달음이야말로 한 인간의 정신이 우주 전체와 덩치를 겨루며, 우주보다 더 멀리 이르고자 하며, 그 구축의 규모와 정교함은 카오스와 코스모스로 대표되는 우주의 그것을 족히 넘본다. 따라서 우리는 빛나는 직관적 사유를 소중히 여겨야 할 것이다. 이야말로 인간 정신의 정수이니!



이제나 저제나 삶을, 온통 각성하여 세상을 한가운데서 통괄할 수 있는 엄청난 열정의 삶을 기대해왔다. 행여 그런 삶이 올까봐 마음 졸이며 미간을 찌푸리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런 삶의 행복에서 오는 기쁨에도 목적이 있지만, 학자로서 명망을 얻는 것도 기쁨으로 향하는 지름길이라는 것을 억측이라 할 수는 없으리라. 어떤 추상적인 골격을 설정해 구체적으로 진척해 나감으로서 하나의 명제를 완성하고, 그 가설을 따라 사상의 맥락의 구축에 일조하는 것이 진정으로 융통성 있는 삶의 합법칙적 파노라마일 것이다. 물론 사고의 집적이 불가항력적인 사상의 결절점을 도출시키는 과정은, 모종의 객관적 실재에서 ‘정신 일반’을 유리(遊離)함으로써 새로운 표상으로 가는 존재기반을 닦아놓는 것이리라. 여하튼 원초 단계에서부터, 맹아적인 단초에서부터 사고를 다이아몬드와도 같이 세공하여 그 결과물을 성원에게 고창하는 것은, 부득이 현세의 생활방식으로부터 의거한 일련의 자기기투와도 같을 것이다. 마르크스주적 유물론자들은 철학이 생활과 현실로부터 파생되었다고 주장한다. 과연 진보적인 철학이 우위적인 것일까 관념론적인 철학이 우위적인 것일까. 철학이라는 거대한 사상체계의 축조는 비단 무위도식하는 철학자들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닐 터이다. 그러나 각각의 사물과 현상을 뚜렷하게 구분시켜주는 방생(方生)성은 오로지 깊이, 심원하게 숙고하는 자에게만 달린 것이리라. 그리고 목하 필자는 생각의 증보 즉 정립으로써 원질을 상정하고자 한다. 무릇 비분화하는 미립자들의 군집은 원자를 생성케 하는 원인이거니와, 이를 정신의 형태로 치환시킨다손 치더라도 틀린 것은 아닐 것이다. 또한 원자의 분열은 하나의 원을 그리며 인과응보적으로 윤회를 구현함으로, 그 지축을 바로 인간정신의 감관성에 할당해야 할 것이다. 어쨌거나 우리의 정신이 흥기하는 것은 지극히 본질적인 것이며, 그것이 외부의 삼라만상에 조응하는 것은 바로 정신의 생동성과 융통성을 자인하는 것이리라. 하기야 정신은 고금을 걸쳐 절멸하지 않고 대대손손 이어져 온 사회적 의식의 한 형태이다. 정신의 다종다양함은 항시 감각이 외계로부터 접촉하여 육성되는 특수자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이것이 일반화되어 일반자로 절도 있게 굳어지는 것이며 그리하여 정점에 이르러서는 법탈의 경지로 전화되는 것이리라.



나는 여느 때고 전일적인 자기동일성의 확립을 위해, 미시적인 편과 가시적인 편의 피아적 관철을 위해, 따라서 나의 사고와 지성이 모종의 아포리아로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해 어떤 경우 선배 철학자의 사상을 개악하기도 하였고, 그로 인해 여러 모순에 빠질 리스크의 수반을 배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목적인에는 단일한 이데올로그의 연쇄가 항존한다. 이 목적인을 이루고 있는 이데올로그의 동질소는 어느 모로 보나 진보·선진적인 마르크시즘일 것이다. 내가 누구보다 마르크스주의자라는 건 과거의 글에 언표 딱히 명시하지 않아도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필자가 관념론을 지향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필자는 정신본질의 굴신성을 깊이 찬양하는바 플라톤, 칸트, 헤겔, 후설 등에 경외하는 바이다. 그들의 철학 구조의 정상 혹은 배후에 위치하는 최고류 즉 이데아는 진리를 구명하고자 하여 외부에 존재하는 박리상의 자초지종을 거침없이 표현하고 있다. 그렇다면 진리의 시동인은 개개 사물의 기개라고 부를 수 있는가? 그들 관념학파의 슬로건이 무엇이든 나는 결코 배중적인 판단을 수립하지는 않겠다. 비록 무조건적으로 학문의 종국원인을 자기본위의 우월의 증대로 칭하더라도, 나를 비롯한 세계의 유기계와 무기계가 생성하는 현실태를 시나브로 관찰하여 추론하고 상정할 것이다. 미상불 나의 감관지각은 그런 복잡한 우주의 메커니즘을 꿰찰 수 있는 원동력을 제공해 줄 것이다. 나는 나와 타자가 동일하게 지니고 있는 공통감능의 힘을 믿는다. 그 힘은 기필코 우리의 마음, 감성 즉 파토스에서 일정하게 창출되는 비근한 하나의 체제일 것이다. 이야기가 그렇다면, 만일 파토스가 로고스와 등가적인 역학관계를 이룬다면, 그 두 기체(基體)의 대립은 분명 고대철학사에 제일보의 위치를 차지한다고 볼 수 있으리라.



필자는 에피쿠로스학파의 삼라만상에 관한 영원한 유동성과 비소멸성의 테마를 지지하는 바이다. 무릇 인간이 죽더라도 그 영적인 것이 원소로 분해되어 우주에 녹아들기 마련이다. 그로 말미암아 존재는 곧 무이며, 무에서도 존재가 꽃피워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사후세계라 있을 수 없는 유토피아의 원형이며, 우리는 단지 사회의 쌍무적인 계약 기간이 끝나 우주 저편으로 사라지면 더 이상의 현존재는 당위적인 것이 될 수 없는 마멸의 상태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삶에서의 유공성은, 불가입성과 더불어 엄격히 병존한다. 따라서 타자나 외부의 현상, 사물이 거기에 개입하거나 퇴출당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유위변전한 삶의 도상에서 어떤 유의 철학적 범주에 그 뜻을 둬야 하는가? 답은 명약관화하다. 그것은 바로 ‘인간 실존’이다. 나의 스승 사르트르가 창시한 실존주의를 더욱 깊이 있게 연구하고 심화시킴으로써 보다 심층적으로 접근하여 결과를 도출해내는 것이다. 존재는 어떻게 현존재일 수 있는가? 어렴풋이 실존하는 개인이 세계역사에서 어떤 일련의 영향을 끼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역사란 개인 각각이 더불어 생활하면서 기술되어지는 이야기이다. 여태껏 역사에서 유명한 지도자나 사상가만이 주체로서 그 영향을 주고받을 수 있었다. 한데,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어렴풋한 이질감과 배타성은 우리에게 단지 고리타분하고 거창한 목적의식만을 심어줄 뿐이었다. 그런 역사는 배척되어야 마땅하다. 비단 고명한 지도자와 사상가만이 하나의 삶을 영유하는 것만은 아니다. 우리 무명의 개인 역시 고색창연하고 고귀하며 소중한 삶을 누릴 자격이 있다. 과거에는 노예계급이 존재했고 따라서 노예들은 정치나 경제에 참여할 수 없었거니와 한 개인으로서의 당위성도 심히 결여되어 있었다. 우리가 견지해야할 역사의 맹아의 원류는 그리스 문명이 아니라 고대 이집트와 바빌로니아 문명이다. 우리는 단연코 우리의 선대를 자명하고 명료하게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서유럽 중심의 역사는 고대 그리스를 문명의 최초의 전범이자 시조로 상정하고, 백인우월주의와 아시아·아프리카인의 복속을 당연시하는 제국주의적 특질을 당연시해왔다. 그러나 보라! 이제 중국은 세계의 중심이 되었고 한국은 세계경제순위 9위에 랭크되어있다. 일본 역시 제 2의 경제대국으로서 그 힘을 분출하지 못해 방황하고 있다. 바야흐로 아시아의 시대가 재도래한 것이다. 오늘날의 역사는 새로 쓰여 져야 한다.











-본론



1. 통시적으로 언어의 변증법적 제요소를 탐구•분석해야 할 항구적인 외적 필연성

우리 생활에 언어는 널리 퍼져 그 세력이 이미 실재를 넘어섰지만, 그러나 언어를 진정으로 변증법적인 관점에서 확대•팽창하려는 시도는 별로 일어나지 않았다고 할 수 있고, 언어를 변형•변용시켜 변증법적으로 개연성을 부여하여 교묘하게 비틀어서 새로운 차원으로 확대시키려는 언어학자들과 문인들의 일련의 시도들은 무산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므로, 도리어 90년대 까지 불은 구조주의란 문예•철학사조는, 사르트르와 메를로-퐁티가 건설한 현대 실존주의의 냉철한 흐름에 구조적 인류학의 관점을 밀어 넣었다고 할 수 있지만 대부분의 저능한 철학사상가들과 예술가들은, 의미론적인 시점에서 볼 경우 언어의 집중적인 통찰보다는 휴머니즘에 경도되어 잘못된 아류•궤변술적 사상을 아집으로 곡해로 유도시켜 변용된 도출물을 인민들에게 호도했으며, 편파적/일률적으로 사변적 시대정신의 모순을 상기시켜 패러다임의 올바른 영원회귀성의 사이클을 파괴시켰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여러 명의 지성인보다는 단 한 명의 위대한 천재가 더 가치가 있다는 것을 방증한다.

좌우지간 이런 흐름을 볼 때 대부분의 지적 조류는 생성•지향의 사이클을 회전하므로, 그 가운데 오로지 구조주의의 창시자 레비-스트로스만이 보다 인본주의의 의식지평의 형성을 유미롭게 묘사할 수 있는 특권을 가산하였다. 이러한 레비-스트로스 식의 방법론의 창도가 결연하게 인간의 존엄성과 그의 의미생산/역사형성능력을 묘묘하게 대두하고 복잡다기하기보다는 실천적으로 따라서 행위자의 입장에 서서 용공적으로 사적 유물론의 경향에 참여하는 게 하나의 정치적 태도를 수미 일관하게 묘사•표명하고 자신의 견해를 정정하는 것, 이른바 통시적인 체제의 사적 흐름에 개인의 정신의 정치한 항구성을 교교히 밀어 넣는 기술적 접근의 기법이 오늘날의 현대인의 정치권리의 당위성에서 요구되는 바이다.

일견 언어학자들의 선험적인 가상을 구현하고자 하는 시도는 들뢰즈가 상정한 개념인 ‘시뮬라크르’와 크게 다르지 않아 이므로, 그런 제요소에는 비정합적인 특성들이 속출하므로, 여기서 그 문제에 중요성을 크게 두지 않을 것이므로 삼가 하겠다.

필자는 아주 정신을 차갑게 하여, 즉 사변이성에 본을 두어 냉철하고 센티멘탈리즘을 완전 배격한 채 지적 방기의 우유부단함을 완전 배척한 가운데 아주 냉엄한 철학사상의 이론적/가상적 글쓰기의 변증법적 언어의 생산을 창조해나가고자 이 글에서 부단히 노력했고, 따라서 이 글의 주제는 무엇보다 언어에 변증법적인 시도를 투사하면 어떤 식으로, 변질과 전형적인 가언적 가설의 전건과 후건을 섞어 그 누구도 알아보지 못하게 전무후무한 변증법적 철학적 글쓰기의 전범을 여기서 표현하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이 결단코 안빈낙도하지 않은 고군분투가 여하한 결과를 가져올지는 한 치의 앞도 내다보이지 않는 일종의 ‘관념의 모험’에 가까웠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더욱더 온갖 사상과 잡학과 지식을 병합하고 추려내어 즉 합치와 선취의 과정을 무한 반복하여 유구한 새로운 차원으로서의 미래, 소위 말하는 새로운 학술의 역사를 새로 쓰기만을 고대해 온 것이라고 평가해 준다고 무릇 학자로서 명민한 감사의 뜻을 표할 것이다. 그러니 독자들은 내 글에 어떠한 질정을 하더라도 미상불 나는 겸허히 그 질정을 수렴하여 재코드화할 것이며, 내게 주어진 글쟁이로서의 소명은 비록 소천하고 무지하더라도 아주 간결하고 간명하게 명철한 사회주의적 기호를 지양하는 한 명의 사상가로서 내가 집필한 모든 글과 행간에 두서 없지 않은 아주 뚜렷한 의미를 부여하게 될 것이리라.

따라서 종합적으로 이 글을 결산하면, 우리가 추론할 수 있는 부분은 변증법적으로 언어를 구명해야 할 지속적인 외재적 필연성이 기필코 수락되어야 한다는 것이며, 이리하여 일단 무제약적으로 즉 비구속적으로 언어를 분석하면 우리는 거기서 전에는 보지 못한 이율배반을 형성하고 있는 두 명제가 오롯이 양쪽에서 마치 수면 위로 떠오르는 해빙처럼 잔잔하지만 서로 두 태양이 한 하늘 아래 병존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의 뇌에 병기시킨다는 걸 우리는 환기한다. 그 병존의 각개란 엄존의 양립이라는 이율배반의 특징을 합리적으로 드러낸다. 그러니 우리가 파악해야 할 특질은 언어의 기호화에 따른 이율배반성의 심층적인 면이며, 그 표층적인 면은 완전 배제해야 할 것을 천명하는 바이다.





2. 언어는 사회적인 측면에서는 ‘소통’기능이 우선시 되지만 ‘서술’적 기능은 그에 앞선다.

언어를 통찰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기능적인 구분의 특징은 ‘서술’의 기능으로의 특화이다. 한 언어가, 한 국가에서, 한 사회, 특히 서구의 사회에서는 후안무치하게 분석적이고 객관적인 의미로서 나열되지만 동양에서는 우의와 비유의 기법으로 전도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우리가 서구 사회가 지향하는 언어의 냉엄성과 엄밀한 학의 의미로서 노정되고 있다는 사실의 진보성의 공로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더 뒤쳐진 유추가 아닐까 싶다. 일단 언어를 한 수법적 기능으로 상정하고 나면, 우리는 언어의 이러한 실사구시함을 공인해야 할 터이다. 문장을 구성하는 속성에는 인간의 본능적이고 관능적인 측면도 톡톡히 한 몫 하지만, 변증법적인 제요소가, 그러니까 좀더 추상적이고 선택적인 병합과 논증의 성질이 담겨있다는 걸 우리는 조금만 사려 깊게 생각하면 깨우칠 수 있다. 예를 들어 가와바타 야스라니의 순문학인 ‘설국’에서는 언어의 농밀한 응축성과 생략의 미학이 담겨 있지만, 거기에서 언어의 변증법적 도식을 읽어내려고 하면 아무것도 찾을 수 없는 게 바로 동양의 산문이 ‘변증법의 논리’를 도외시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J.P 사르트르의 소설 ‘구토’에는 그야말로 변증법의 철두철미한 논리의 정수가 글자 그대로 강력하게 집약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굳이 문학에 변증법적 논리를 애써서 부여하려 하거나 하나의 장구한 나열로서의 순문학을 도제할 필요를 요구할 이유는 없다. 왜냐하면 문학이란 본디 이야기의 산문을 시적으로 구축하는 게 관건적인 방안사항이므로, 여하한 번민과 회한, 고뇌와 패배적 기질의 서사시를 모두 말한 다는 건 조금 얼간이적인 짓일 것이다.

필자는 글을 쓰기 전에 여러 산문들에서 질료를 모으는데, ‘질료’의 집적은 하나의 ‘형상’을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질료는 일정하고 일률적으로 냉엄히 선별/변별하여 조직적으로 제기되어야 할 필연성을 당위적으로 갖추게 되는 것이고, 우리는 좀더 글을 작성함에 있어 진중해지고 냉정해져야 할 책임과 의무를 지게 되는 것이리라. 좌우지간 글이란, 산문이란 일련의 하나의 연역적인 접근으로서의 일종의 ‘학’이 되어야 할 것이며, 우리는 이런 식으로 학문이 가야 할 길을 조심스럽게 예감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우리는 개인적으로도 학문을 존엄하게 되는 것이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자. 소통과 서술은 어떻게 다른가. 전자는 유기적이면서도 편파적이고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고 한 개인이 모두가 학문에 끝에 도달한 채 용감하게 학술/학구적인 용어를 사용한다고 볼 수 없으므로, 그리고 사회적인 차원에서 용어는 한없이 저질을 지향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래서 소통은 서술에 비해 그 깊이와 심원성이 떨어진다고밖에 추론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후자는 다르다. 후자에는 어떠한 제약도, 통속적인 규범도 주어지지 않는다. 오직 전통성과 실험성만이 살아 숨쉬어 작가에게 열정적인 ‘뮤즈’를 선사할 뿐이리라. 서술은 이렇듯 파괴를 기점으로 생성의 측면을 부과함으로써 보다 고차원적으로 사고하고 마음을 그려볼 수 있는 혁혁한 가능성을 내포하는 것이다. 따라서 무릇 문예정신과 사유정신이란 하나같이 ‘서술’적 기능의 혁명적인 개연성에 그 뜻을 두고 있는 것이다.

하기야 원시를 벗어나 인간이 그럴듯한 문명의 모습을 갖췄다고 할 수 있는 역사는 기껏해야 오천 년 정도이지만, 그리고 서술이 인쇄기술로 널리 보급된 것은 육백 년도 안 됐지만 그 짧은 기간 이래 인간이 쌓아 올린 서술의 업적은 가히 어마어마하다. 그 양뿐만 아니라 질의 측면에서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 된 것이다. 필자는 불행하게도 언어학자는 아니므로 언어의 최신의 변증법적 흐름의 내용을 이러쿵저러쿵 내밀하고 정교하게 여러분께 설명할 능력은 안 된다. 그러나 한 명의 철학사상가이자 문인으로서 대충 떠보아 지금까지 겪어본 학문적 실재를 토대로 연역적으로 기초적인 설명이 가능하기는 하다. 그리고 필자가 언어를 중심주제로 지목하여 이 글을 쓴 만큼 냉정하지만 열정적으로 언어의 가능성에 대해 포부를 담아 적절하게 설명하기는 할 것이다.

우리는 주어와 술어를 합병한 형식으로 하나의 문장을 도출해낸다. 그리고 이것이 전통이자 정통적인 방법으로써 우리가 기술적으로 제기할 수 있는 형태가 되었고, 형태는 한 철학자의 말처럼 기능을 따른다. 그리고 그 기능은 주어+술어를 기본 형식으로 유유히 우리가 목도할 수 있는 것이므로, 우리는 무엇보다 문장을 명제로 만들고, 명제를 항진명제로 만드는 언어변증법을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언어의 ‘서술’적 기능은 미래의 과제의 중심으로 곧추설 것이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 여러 철학사상가, 논리학자, 문인, 언어기호학자들이 자리매김할 것이다.





3. 배부른 돼지보다는 배고픈 인간이 낫다.

필자는 글을 정교하게 잘 쓰기 위해서는 사르트르가 복용했던 코라드린이나 코카인 주사도 맞을 수 있다. 감각에 착란을 일으켜 남이 보지 못한 세계를 본다면, 그럼으로 인해 완전무결한 글을 쓰는 게 가능하다면, 이 한 몸 바쳐 그 뜻을 이루어 내리라. 필자는 글을 쓰는 데 몇 가지 조건을 두고 한다. 그 중 핵을 이루는 것은 바로 일주일 내지 열흘 간 책을 내리 읽고서 그것을 지금과 같이 토해내는 것이다. 글을 쓰기 시작한 지 어연 5년이 다 되간다. 처음에는 문법도 맞지 않고 어휘의 배열도 틀렸거니와 알지 못하는 단어를 생각나는 대로 끄적여 많은 시행착오를 거쳐 의미 없는 글을 썼을 뿐이었다. 그러나 지금, 온갖 지식과 경험이 집적·집약된 지금에 이르러서는 오로지 현재를 살며 사유하고 철학적 글쓰기를 시도할 뿐 결코 과거로 돌아갈 생각은 없다. 지금의 나야말로 완성된 자아의 표본이며, 유년 시절의 미완성적인 영혼으로 회귀하길 원하지 않는다. 현재의 나, 오늘의 나는 한 달 용돈 30만원으로 전부 학술서와 양서를 구입한다. 그걸 한 달 내내 읽어도 다 읽지는 못하지만 어쨌든 서재에 비축해 놓으면 마음이 한결 차분해지는 것은 막을 도리가 없다. 좌우지간 펜으로 벌어먹으려고 뜻을 두고 일어선 ‘나’이므로, 이 배수진의 한가운데서 돌아갈 길은 없을 것이다. 음… 나는 단지 돈을 벌기 위해, 돈 생산의 기계가 되려고 저널리스트를 하기는 싫다. 필경 저널리스트란 천박한 직장임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진짜 글을 쓰고 싶다면, 정말 자신의 펜으로써 순문학과 영원불멸의 사상을 집필하고 싶다면, 마음을 깨끗이 마치 백지와도 같이 비우고 정진하여 조심스레 펜을 드는 게 지당하리라. 물론 일반인들이 블로그에 끄적여 놓은 조잡하고 짧은 글과 내가 정신없이 써대는 정통산문을 비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나와 같이 순문학을 읽고 철학사상서를 읽는 젊은이는 오늘날 정보화시대에 있어서는 아주 극소수에 불과하다. 신문지상에는 가끔 어린 나이에 소설을 써서 천재라는 소리를 듣는 아이들이 나오곤 하는데, 그 애들의 글을 읽어보면 도리어 한숨만 나올 뿐이다. 어떤 방식으로 삶을 살 건 그건 여러분의 몫이다. 그러나 그 존귀한 삶의 풍경에 질 좋은 정신의 집합체인 양서가 곁들여지지 않는다면 아주 삭막하고 기계적인 것이 될 터이다. 이렇게 마치 신이 된 입장에서 서술하고 있지만 필자 역시 아주 후회스런 삶을 산 인간의 전형 중 하나이다. 필자의 삶을 나열하자면 밑도 끝도 없겠지만, 그것은 공개하기조차 부끄럽고 두려운 하나의 파노라마이다. 필자 나이 방년 21살이건만, 아직 이루지 못한 것 많고 한 많은 과거 또한 지천이다. 21살이 되기까지 과연 무엇을 해왔는가, 나는 현재 어디에 서 있는가, 나는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들은 이미 해결된 숙제임에 틀림없지만 그래도 정신 차려야 할 여지는 남아 있는 게 분명할 것이리라. 그래, 나는 철학자가 되기로 했다. 세상의 진리와 법도를 펜으로 말미암아 구현하고, 하나의 단일한 완전한 체계를 세워 그 체계의 언어로 하여금 세상을 분석하고 꿰차는 일이다. 사람들은 말한다. 철학은 밥 굶기에 딱 좋은 일이라고. 그러나 선비가 돈 걱정 하는 것 보았는가? 돈이라는 시류를 따르지 않음으로서 당당하고 자유롭게 학문의 강에 강고히 발을 담그는 것, 그것이야말로 현대인이 지향해야할 유일한 정숙함/도도함이 아닐지.



필자는 평생 고독하고 외로웠다. 그 고독을 달래기 위해서는 베토벤과 마찬가지로 자기 일에 힘쓰는 게 최고였다. 그래서 학문을 파고 교교히 수양하며 학구의 전통에 흠뻑 빠져들게 되었다. 책이란 무릇 정신의 양식이다. 우리의 몸이 음식을 섭취하듯 정신 역시 추상적인 무언가를 섭취하지 않고는 배겨나지 않는다. 필자는 육신과 정신의 이원론을 여기서 따분하게 설명하고자 하는 건 아니다. 그런 건 이미 고대철학자들이 해결했다. 필자가 지적하고자 하는 건, 그 요는 자신의 지성을 방기하지 말라는 것이다. 곧 지적인 방기의 유지를 가늠케 하지 말라는 것이다. 몸이 굶주릴지언정 마음만은 배부르게 해야 한다. 이렇듯 “배부른 돼지보다는 배고픈 인간이 되자”라는 소크라테스의 구호를 잊지 말아야 한다.



문장을 써내려가는 건 인생을 직조해나가는 것과도 같다. 글쓰기의 예술은 자식과 다르게 영원한 법이어서, 작가들이 소위 ‘사후의 영예’를 바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리고 글쓰기의 예술은 작가가 늙을수록 더욱 더 심오하고 원숙해지는 것이어서, 운동선수나 음악가들이 늙어서 회의감과 환멸감을 느끼는 것과 달리 작가는 나이가 들어감에 있어 한층 큰 환희를 경험한다. 이렇듯 작가라는 직업은 항구적인 특성을 갖고 있어서인지, 나이가 들어서 직업을 작가로 전회하는 많은 유의 사람들을 보게 된다. 여하튼 작가라는 건 굉장히 실존을 요구하는 직업이라서, 거기에는 한 개인 그 외에 다른 것은 있어서는 결코 안 된다. 왜냐하면 사르트르 말마따나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기에, 그리고 역시 휴머니즘이란 극도의 자기본위의 삶이기 때문이다. 영혼은 시나브로 잠식되어 간다. 그 와중에서도 영혼의 방향의식은 자신의 위대성에 침잠해 들어간다. 영혼이란 그런 것이기에.



필자는 부르주아들의 전횡을 보고 있을 수만은 없다. 필경 자본주의 세계의 썩은 보고(寶庫)는 서유럽의 교권주의로부터 시작된다는 게 정설로서 굳어져 있다. 내가 독자 여러분을 책동하고자 헛헛한 예봉의 기치를 내세우는 게 아니다. 당신들에게 인종(忍從)을 구하고자 현대사회의 동란에 눈감아주고 반동적·보수적 필설을 완성하려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나는 자신을 정명(正名)하게 하고 남부끄럽지 않게 당당히 삶을 누리고자 무수한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며, 앞으로도 나는 노력에 의해 이루어지고 이룩해나갈 것이다.



오늘날의 매판적인 소비자의 기호는, 이 차안의 세계에서 너무나도 진지한 세속성을 보여준다. 자본주의는 미상불 마야가 되었으며, 이제는 위대한 현자나 도인의 법열은 현상세계에서는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무릇 자신을 넘어서 신과 합일되어 느끼는 강렬한 도취감 이른바 ‘엑스타시스’는 아무래도 여자의 질에서 나오는 분비액을 가리키는 신종마약 엑스터시의 준말이 아닌가 싶다. 여하튼 필자의 삶에서도 엑스타시스를 경험한 순간이 손에 꼽으라면 매우 적지만 있긴 있었다. 그 때 느꼈던 희열과 도취 그리고 환희는 이 엄정한 물리의 세계를 넘어 인간 조건을 뛰어넘은 피안의 세계의 입도라 불려도 부족함이 없었다. 그것은 하나의 신의 계시에 가까웠다. 나의 감관과 이성은 한순간에 우주 전체를 볼 수 있었고, 우주 전체 너머의 소위 메타적인 범위도 꿰뚫어 볼 수 있었다. 이는 하나의 영지주의에 다름 아니었다. 비록 철학자들이 자신들의 논거를 바탕으로 지식의 집적으로 우주와 존재를 연구한다고는 하나, 어디까지나 그것은 인간의 한계에 종속될 뿐, 신의 경지에 도달하여 그 관점에서 미시의, 기하학적인 세계를 문법적으로 표현할 수는 없는 것이리라. 그래서 한 명의 지성보다도 한 명의 정신병자가 더 깊이 있고 심도 있게 세계를 관찰할 수 있는 것이며, 그들의 착란과 괴기한 이목이 정신현상학의 비전통적인 정초를 수립할 수 있는 것이리라.



4. 철학과 진보정치

글을 써서 출판하거나 발표의 형식을 취하면, 무릇 정적들이 생기는 법이다. 가령 들뢰즈와 같은 성현조차도 그를 둘러싼 수많은 적들을 양산하였다. 그렇다고 그 비판자들이 그런 위대한 철학자와 동렬이라는 건 아니다. 따라서 들뢰즈의 죽음을 둘러싼 일종의 가사(可死)성은 하나의 만화경으로서 지금까지도 소중히 온존하여 있다. 그러나 이러한 위대한 학자의 죽음에서 덮쳐오는 파고는, 정설로 굳어져 철학적 사조로 대두되는 일련의 유행의 잠식과 불가분리성을 가진다. 그 연고가 다원적이든 일원적이든 간에 철학사조란 어떤 하등의 이유 없이 압살당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물론 오히려 그 철학사조의 창시자인 학계에 한 획을 그은 철학자가 죽음으로써 그것이 더 비등해질 수는 있으나, 그 학설이 내포하는 알레고리의 진실성은 시대가 흘러감에 있어 그 모순과 합법칙성의 오류가 수면 위로 드러나는 것이다. 하기야 중세의 유명론과 실재론 사이의 담론적 논쟁이 아직까지도 명증이 결론 시 되지 않듯이 우리는 단지 오랜 세월이 흐른 후 책의 주관적 운명에 관해 통찰해 볼 것만이 아니라 목하 철학의 진리의 진실성의 어용적 부분과 사변적 부분을 분리하여 정확히 자혜롭지 않게 식별해야 할 것이다. 이는 하나의 강령과도 같은 우리만의 숙제이다. 하기야 고전고대의 정전을 스스로에게 운위하려면 감각의 일익을 담당하는 부분을 구축(驅逐)해야 하며, 오직 사변이성으로서만 판단하고 검증해나가야 한다. 그리하여 인간의 선천적인 인륜의 정신을 복권시켜 일신을 시종 교육적으로 도야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무지의 학정과 압제에서 벗어나는 길은 오로지 학문과 야합하여 자신의 지성을 비호하는 길 밖에는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철학사상의 창도(唱導)란 비단 이를 행한 개인에게만 국한되는 게 아니라 사회 전체에 이바지하는 모종의 특성을 갖고 있다. 한데, 철학사상의 철권적인 수립은 미상불 사회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기 마련이다. 그것이 사상적인 것이 아니라 형이상학적·선험적인 관념론이라 하더라도 그 얄궂은 노도의 파고는 아닌게아니라 불역한 사회에 새로운 규법체계의 예기를 가져오게 마련이다. 가령 자본주의자들과 사회주의는 불구대천의 관계라고 볼 수 있고, 가난한 인민과 형이상학 역시 그러하다. 하기야 하릴없는 현대사유의 차축운동 속에서 온갖 난수표가 범람하므로, 이러한 교의들이 후진국의 인신희생을 막을 수 있는 것도 아니거니와 신자유주의로 관념된 그릇된 통념의 채산을 갈파할 수 있는 것도 아니리라. 그렇지만 우리 도덕의무의 준칙이 타당하도록 행위하는 것을 백안시한다면, 우리의 행복은 와전되고 자타는 비난할 것이다. 요는 삶을 살면서 자신의 정언명령에 면피하지 않고 따르는 것 곧 자치를 일련의 형이상학적 표상으로 체화해야 할 것이다. 약술하자면 자신의 지성을 태업/방만시키지 말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지성이야말로 한 개인의 비원자화된 소여성의 방증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본주의의 먹구름이 드리운 병리적 시대에 항거하려면 그것에 대척점을 이루는 간지의 시니피앙을 계발하고 제시해야 할 것이다. 이리하여 지성과 반동에 대항하는 급진적 인문학적 좌파주의는 하나의 짝패를 이룬다. 사람들의 말마따나 진보정치는 서민의 전유물이라지만 여태껏 그것이 서민들의 복지와 실질적인 생활의 경제적 안정에 도움이 된 적이 있었는가? 오히려 그것이 오늘날에 사회영합주의라는 탈을 쓴 ‘포퓰리즘’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때 우리는 그것을 완강히 거부해야 할 필연적인 시민의 윤리적 정치성을 함의하고 있어야 한다. 현 MB정부의 지도 하에 건립되는 현대 한국의 자화상은 엄격한 법치국가를 넘어 이제는 새로운 글로벌적 경제도약의 신기원으로서 국제사회에 명약관화하게 일류경제제국으로 일신하고 있다. 하기야 민주주의의 퇴보로써 MB정부의 독재주의를 타파할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되레 우리는 신문지상의 이러쿵저러쿵하는 감언이설에 속아 넘어가 정치의 제도적 장치의 이입이 가져오는 효과의 이면에 있는 배후를 들여다보지 못한다. 난잡한 정치판에서 간지를 외삽하고 있는 여러 국회의원과 소위 엘리트들의 교만과 지략을 우리는 우리의 개인적 이익뿐만이 아니라 공공의 이익까지 포함한 관점에서 분석하고 정치에 참여해야 할 것이다. 국가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으며, 그 힘은 국민에게 나온다는 헌법 제 1조를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5. 철학은 명백히 미래의 근원이다.

사르트르는 머리로 사유하지 않았다. 그는 글, 곧 언어로 이러쿵저러쿵 갈겨쓰고 재정리함으로써 하나의 구조를 설계하고, 입체적으로 조망해 새로운 이론으로 뻗어나가는 신기원을 이룩할 수 있었다. 코난도일의 소설에 나오는 셜록홈즈도 물론 사방팔방 증거를 찾거나 하는 동태적인 수사법을 갖지 않은 채, 외부에서 들어오는 정보들을 골방에서 간추리고 분석하여 종합함으로써 연역적으로 접근하여, 사건의 실마리를 하나의 총체로 구성하여 사건의 심층적인 전체적 구조도를 도식화하는 기법을 사용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칸트 역시 고향 쾨니히스베르크(오늘날 러시아 칼리닌그라드)에서 150킬로미터 이상 바깥으로 벗어난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57세라는 늙은 나이에 철학을 시작하여 독자적이고 체계적인 관념의 사유를 통해 철학 사상 가장 중요한 인물에 등극하기에 이른다. 이렇듯 장소와 시간, 나이와 편견에 구애받지 않고 골방에서 사고(思考)와 사유를 거듭하는 것은 일견 미네르바를 떠오르게 한다. 미네르바는 인터넷으로 서적들을 시키고, 음식은 배달로 하여 골방에서 사유의 정점에 올라 정부를 뒤흔들어 우리의 어안을 벙벙하게 만들었던 골방사상가이다. 요근래 조기유학을 위시하여 자녀를 해외의 선진문화를 학습하게 하는 방법을 택하는 부모들이 많은데, 사실상 ‘문명의 충돌’을 경험한 자녀들이 세상의 패러다임을 읽는 능력이 발달한다는 점에 있어서는 필자도 같은 입장을 보인다. 그러나 그 돈으로 고급 양서들을 구입하여 어릴 적부터 학문적인 조숙함을 자녀에게 각인시킨다면 그보다 더할 가치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리라. 하기야 공감각적 경험의 패러다임의 개선과, 학문에의 사변이성관의 성숙의 절충 이른바 정체성의 양대산맥의 교집합적 종합이 더 바람직한 보편타당의 지성을 확립시킨다는 데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가령 뼈없는 이론가는, 실재적인 실천의 측면에서 여행인이나 경험자가 체험하는 교묘하고 정치한 측면의 다각도적인 순간적 직관의 깨우침을 결코 알지 못한다. 그래서 아무리 좋은 곳에서 사업적 자문을 받아도, 직접 사업에 뛰어들어보면 그 형태와 질적인 차이가 전혀 진배없음을 알아채는 것이리라. 그러므로, 어중이떠중이들이 자신의 이론적인 선입견을 앞세워 진술한 책들이 가져오는 편견보다는, 행동이 공인의 인증을 받고 설파한 책들이 산출한 실천적인 생활관을 지향하고 거기에 방향성을 두어 숙고해야 할 것이다. 무릇 언행일치야말로 지식인의 보배라고 할 수 있다면, 행동하지 않는 사상가들의 언론을 통한 감언이설적인 간접적 정치참여는, 마땅히 배척되고 피고인으로서 심판대에 설 그런 중요한 안건이라고 생각한다.



나의 스승 사르트르는 말했다. “타인은 지옥이다”라고. 우리는 우리의 앞에 살았던 이 예술가의 말마따나 지극히 개인적이고 이른바 자기본위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바야흐로 범신론과 무신론이 이항대립을 이루는 시대이다. 유신론과 이신론은 이미 과거의 문헌이 돼버렸다. 요컨대 범신론과 무신론의 대두 혹은 득세는 현대철학을 논하면서 단연코 빠뜨릴 수 없는 화두의 근원이 되었으며, 만약 범신론과 무신론을 이어주는 가교가 하나 존재한다면, 그것은 바로 인식론에 대한 우리의 성찰의 내용에 있을 것이리라. 예의 관건은, 세상을 과학의 패러다임으로서 인간사회를 비롯한 삼라만상 즉 전우주를 철두철미하게 하나의 총체로 규정지어, 메타적인 세계 즉 인간조건의 피안에 위치하는 세계를, 우주 너머의 혹은 우주 자체에 내재되어 있는 미시적이면서도 복잡다단하고 불가해한 신의 저편을, 보기를 거부한 채 지적방기를 자행하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뼈저린 후회를 심어줄 그런 ‘거시적인 패턴으로서의 관조’이다. 가령 현대과학의 색안경은 주조된 지 2세기가 채 안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현대 과학을 규정하는 자들을 비롯하여 이 시대 모든 얼빠진 자들은 자신들의 자구책을 도구로 하여 교조적으로 세상을 보는 일이, 그로 인해 변질된 사물들이 마치 진실인양 받아들이고 있다. 이것은 분명 시대적인 오류이다. 한시적으로 어떤 사실을 파악하는 것은 마치 하나의 조각이나 연결고리만으로 세상을 이해하려는 몰지각한 방법이다. 우리는 거기서 좀더 큰 그림을 관찰해야 할 필연적인 철학의 열정을 자각한다. 세상이라는 큰 그림의 거대한 총체를 직시하기 위해서는, 한시적인 패턴을 쫓아가기보다는 보다 원시적이고 고전의 기법을 체득하는 것이 낫다. 그런 연유로 우리는 과학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철학을 선택하는 것이며, 철학만이 전우주와 거기에 내재하는 미시세계라는 엄청난 전대미문의 숙제를 풀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며, 저주받은 인간존재가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출구가 될 것이다. 비단 시대정신이나 시대사조에 입각한 철학만이 유행을 누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고대철학인 플라톤이 신플라톤주의로 변용되어 득세하는 것을 관찰한다면 고대철학에 본을 두고도 현대철학과 백중지간으로 어깨를 겨룰 수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철학에 본을 두어야 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철학은 명백히 미래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혹자는 공론에 가까운 관념적인 사유가 현대사회를 어떻게 발전시키는가에 대해 의아해할 것이다. 요컨대 기술적·물리적 진보가 아니면 결코 현대사회의 상승이 아니라는 틀에 박힌 고정관념과 선입관을 갖춘 많은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를테면 필자는 변양 혹은 진일보한 세계에 대해 논급하는 것이 아니다. 미상불 글의 서두에서 이성에 대한 중요성을 논한 이유는 로고스 즉 이성이야말로 철학의 중심핵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성이 무엇인가를 이성적으로 사유할 때만 알 수 있다. 사유의 과정이 바로 이성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이성은 이미 주어져 있는 것으로서 현실에 적용만 하면 되는 것으로 착각한다. 이성이 하나의 틀과 체계로 굳어지면, 그것은 이미 살아 있는 이성이 아니다. 현실을 떠나 체계화된 이성은 개념의 납골당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이성은 우리가 당대를 사상 속에 포착하고자 하는 시도를 통해 비로소 그 모습을 드러낸다. 우리의 시대에는 현대를 반성적으로 가로지르는 포스트모더니즘의 기호가 각인되어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이성이 우리에게 단순이 주어져 있다고 전제한 전통 형이상학의 전제에 강한 물음표를 붙이면서, 이성이 자신과 대립하는 타자를 끊임없이 생산함으로써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있다. 만약 이성이 권력, 욕망, 무의식과 불가분의 짝을 이루고 있다면, 이성비판은 그 갈림길에 세워져 있는 길 안내판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만약 이성 스스로가 이성과 반이성, 합리주의와 비합리주의, 서양 중심주의와 문화상대주의를 산출한다면, 이 대립을 가로지르는 길이 바로 보편적 이성을 통해 세계주의를 확립하는 것이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이성은 공통적인 것을 발견하고자 하는 비판적 대결을 통해 살아 있는 이성이 되기 때문이다. 이성의 결함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은 철저한 이성의 탐구뿐이다. 이성 자체가 하나의 길과 과정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이성과 대치되어 하나의 이항을 이루고 있는 중요한 철학의 핵심요소는 무엇일까? 그것은 존재이다. 그러니 우리는 존재에 대한 사유를 무엇보다 우선시할 필요가 있다. 존재사유, 즉 존재에 대한 생각은 인간이 자연을 바라보는 데서부터 비롯된다. 우리 주변에 존재하는 것들을 어떤 시각에서 바라보는가에 따라서 그 존재에 대한 생각은 매우 다양하게 개진될 수 있다. 고대 소아시아 지역에서 체계적으로 자리 잡기 시작한 철학적 사유는 이러한 존재사유에 다름 아니다. 사람들은 자연이 부단하게 변화하는 것이라고 여기기도 하였고, 언제나 동일한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최초의 철학자들이 제기하였던 생각들은 한 개인의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인류의 보편적인 세계관적 사유로까지 발전되었다. 자연을 어떻게 바라보고 해석해야 하는가의 문제는 오랫동안 철학의 중심 주제로 여겨져 왔다. 이를테면 과거에는 과학과 철학의 분립이 뚜렷이 나타나지 않았다. 그런 연유로 철학은 시민들에게 있어 자명이 과학적인 학문이었고, 모두가 이를 의심하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은 자연철학으로 불릴 정도로, 자연 그 자체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자연 존재에 대한 철학적 물음을 처음으로 제기하고 체계적으로 사유하였던 사람들이다. 그들은 대체로 자연을 물질론적인 것으로 파악하였으나 정신이나 신적인 것 역시 간과하지 않았다. 앞에서 필자가 지적하였듯이 현대인들은 이를 망각하기 십상이다. 탈레스가 상정한 ‘신적인 것’이나 아낙사고라스의 ‘누스’는 물질적인 것과 단절되지 않는다. 기독교가 세계종교로 발전하면서 서양의 중세는 신 중심적 사고로 물들었다. 중세의 철학은 자연 존재의 궁극적 원인에 대한 관심이 주도하였으며, 모든 것을 바로 그것으로서 존재하게 하는 존재의 제1원인에 대한 탐색이 주류를 이루었다. 보편 존재에 대한 존재론적 사유는 신학의 중심 주제이기도 하다. 그러나 중세의 신학자들은 자연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들을 선성(善性)이나 신성이 결여된 것으로 파악하여 부정적으로 평가하였으며, 이와 같은 자연존재의 결함을 신에게 전가시키지 않기 위하여 변신론적 논리의 개발에 주력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랍 철학자들을 중심으로 하는 물질론자들은 우주의 근본원리가 물질성에 있다는 것을 포기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 글의 서두를 장식한 골방철학자 칸트는 근대의 경험론적 사유와 이성론적 사유의 의미를 수용하는 동시에 그 한계를 극복하기 위하여 고심하지만, 두 사상 체계에서의 문제들을 자기 자신의 철학 체계 속에 해결하지 못한 채로 남겨두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물론 칸트 직전의 철학자들, 특히 영국의 경험론자들과 프랑스의 이성론자들은 경험과 이성이라는 인식 수단을 내세우면서 보편적 존재의 존재 여부 및 인식 가능성에 대하여 부정하거나 확신하는 입장을 각각 개진하였다. 그러나 칸트는 이러한 모든 시도를 넘어서서 보편 존재에 대한 이론적 논의의 가능성을 유보하는 조처를 취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칸트가 형이상학의 가능성을 부정한 것은 아니다. 그에게 신은 누구보다도 위대하고 불가해한 존재였으며, 불가지론에 의거하여 신은 우리 인식 피안에 자리잡고 있는 보편적인 존재이며 그런 연유로 우리는 어떻게든 그를 인식하려고 하지만 거기에 다가설 수는 없는 상태에 있다. 칸트는 신이라는 형이상학의 가장 우위의 핵심에 자리잡은 존재가 인간의 하찮은 이론에 이리저리 논파되는 걸 꺼려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적어도 두 가지 차원에서의 형이상학, 즉 자연형이상학과 도덕형이상학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제안한 선험철학, 특히 경험의 가능성 조건들에 대한 인식논리적 탐구들은 사실상 물자체의 문제와 이성 요청의 문제를 그대로 방치하고 있다. 이론적인 지식과 실천적인 지식을 구분하는 척도가 되는 경험적 장치들 속에서도 여전히 해결되지 못한 형이상학적 전제들이 무비판적으로 방치되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그것은 칸트가 노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세계를 유랑하지 못한 무경험의 한계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일 테다. 이런 한계성을 극복하려면 무엇보다 경험과 사변이성의 종합이 필요하다. 그래서 필자가 서두에서 말했듯이 ‘공감각적 경험의 패러다임의 개선과, 학문에의 사변이성관의 성숙의 병존’이 앞으로의 학술계의 후학들에게 제1이념으로서 다가와야 할 것이다.



6. 인문학은 진정 죽었는가?

불현듯 이런 생각에 잠긴다. ‘인문학은 죽었다. 과학기술의 진보에만 매달린 골이 빈 사람들은 혹은 배부른 돼지들은 인간을 탐구하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셜록홈즈처럼 식물성알칼로이드를 조사하기 위해 코카인과 모르핀을 자기 혈액에 주사하는 그러한 실천적인 탐구정신을 가진 사람이 몇 되는가? 오늘날에는 문학이 단지 소설이라는 이름으로 폄하된다. 그리하여 진정한 문인들은 자신의 이웃에게 자신이 다만 소설가일 뿐 그 어떠한 책무도 맡고 있지 않다고 주장한다. 더군다나 한국인들은 철학자를 마치 점술가나 역술가 보듯이 취급하여 불쾌하기 짝이 없다. 오늘날의 인문학은 진정 죽었는가?’. 오늘날의 지식인들은 인문학의 죽음을 아무렇지도 않게 구시렁대고 다닌다. 과연 인문학은 역사상 최악의 위기를 맞은 듯싶다. 그러나 이러한 인문학의 위기가 다수의 지식인이 아닌 극소수의 지식인에게는 오히려 만인에 대한 분노와 그에 따른 반동으로서 힘을 실어주며, 요컨대 이런 역설적인 증상은 도리어 난세에 영웅이 생기듯 새로운 대가(大家)를 창출하기 마련이다. 대가의 신출현은 새로운 국면을 빚어내며 난세를 타개하고 새로운 주의(主意)를 생성한다. 가령 2차 대전 후의 프랑스의 실존주의나, 이것의 열풍이 사그라들 때 쯤 다가온 구조주의를 예로 들 수 있다. 좌우지간 이러한 패턴변화는 항시 영웅의 의해 좌지우지되는 법이리라. 그렇다면 우리 현대인들의 철학적·사상적 영웅은 누구인가? 21세기를 대표하는 신지성은 누구인가? 바로 지젝이다. 글쓰는 속도가 생각하는 속도보다 빠르다는 학계의 농담을 계급장처럼 달고 다니는 그는 실로 동유럽의 기적으로 불릴 정도로 금세기 전유럽을 통틀어 최고의 두뇌를 가지고 있다. 지젝의 철학과 사상에 대한 남다른 열정은 그 누구와도 비견할 바가 못 되어서, 6개월을 멀다하고 새로운 저서를 발표하고 있는 중이다. 인종청소가 자행되던 유고내전을 뒤로하고 쏟아내는 그의 저서들이 어느덧 의미 없는 반복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실천적이지도, 그렇게 이론적이지도 않은 그의 말들은 마르크스주의자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가벼웠고 영화이론가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무거웠으며 정신분석가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이론적이었고 정통 철학자라 하기에는 지나치게 임상적이었다. 그런 그를 우리는 어떤 식으로 판단할 수 있는 걸까? 단지 일시적인 유행, 수사의 외양이 화려한 유행철학자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무리일까? 그리고 그러한 판단이 한계 많은 우리의 전형적인 실수였음을 간주하게 된다면 그의 위대한 저서, 지젝을 이 시대의 가장 실천적인 철학자 중 한 명으로 간주하게 만든 책, 그를 존경하게 된 책, ‘시차적 관점’을 읽어봐야 할 것이다. 하여튼 지젝이 논거를 이용하고 풀어내는 방식은 여타 철학자와는 달리 다방면에서 다재다능하며, 이런 특유의 그만의 방식은 21세기 철학이 걸어가야 할 길의 표본을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다. 많은 세계의 학생들이 책을 경원시하고 스크린과 인터넷에 빠진 게 근래의 현실이지만, 오히려 인문학 하나에 몰두하고, 현재 자본시장에 적은 돈만 내면 구입할 수 있는 방대하고 질 좋은 그럼에도 저렴한 저서들을 구입하여 독학하고 있는 인재들의 유비무환은 곧 닥칠 ‘인문학의 새로운 출현’을 예고하고 있다.



7. 인문학의 중심, ‘철학’.

으레 그렇듯 인문학의 으뜸, 제 1학은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철학은 모든 학문 중에 제일 유서 깊은 학문이어서, 철학적인 의제를 탐구하는데서 문화에 대한 고찰을 염두해 두지 않고서는 그 진면목을 발견하기 어려울 것이다. 지금껏 철학이 연구를 주력하는 대상은 뭐니뭐니해도 ‘인간’이었다. 한 인간을 철저히 탐색하고서는, 그 연구결과를 우주의 한 연결고리로 파악하고서는 그 고리로 말미암아 우주 전체를 통괄하는 역사적인 지혜를 얻는 것이다. 그리하여 철학은 문명의 아주 기초적인 제반의 핵심 이른바 인프라라고 할 수 있으며 우리가 이것을 좌시하지 않는 한 인간의 미래는 기필코 어둡지 않을 것이다. 하기야 어설프게 자신의 미래를 암중모색하는 수많은 청년과 처녀들이 상존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항시 그들의 자아와, 그에 대립하는 불가해한 난제들의 연쇄로 점철된 미래의 형상은 마치 창가에 비추어지는 풍경처럼 필수불가결하게 엮여지기 마련이어서, 우리는 그러한 오롯하게 상보적인 병존의 관계를 이항이라는 뚜렷한 이분법으로 구분할 게 아니라, 좀 더 항구적이고 거시적인 관점에서 이런 양분의 귀결을 하나의 변용하는 패러다임으로 결정화시켜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삼라만상의 엄존함에서, 무엇보다 그것이 있어야하는 근거를 파헤치는 데 주력을 가해야 한다손 치면, 그것이야말로 ‘철학함’이 강구해야하는 문제의식의 근원이므로, 우리는 요컨대 사유라는 도정의 결과가 임박하기 전의 일련의 도상의 연쇄가, 그 과정 중의 일희일비하는 관찰자의 관념의 유추 즉 연결고리로 온갖 번뇌와 사고를 순환시키는 과정에서, 과정으로서의 의미와 가치를 생산하고 역사적 현실로써 하나의 입체를 완성시키는 것이리라. 이로써 우리는 철학이란 무엇인가, 하는 의미론적인 요소에 대해서 상정해보았다. 우리가 철학을 우리의 중심에 두고 즉 밑바탕에 하고 세상과의 전투에 임할 때 우리는 두려움과 공포에 떨지 않고 우리의 이념에 마땅한 과감하고 결단력 있는 행동을 보여줄 것이다. 그리고 나서 앞으로 인류가 나아가야 할 규범과 가치판단에 이바지할 수 있는 학문으로서의 철학은 영원불멸한 인간존재의 표식이 될 것이리라.



우리 삶 저변에 철학이 두루 깔려있다. 철학은 요컨대 시대에 관한 논쟁 즉 담론이라 할 수 있겠다. 철학은 우리가 무엇 때문에 사는가, 하는 의문점을 간파하게 해주며 우리가 살아야 할 이유를 분명히 제시해준다. 우리가 일벌레로서 고군분투하여 악착같이 사는 이유는 모두가 헤겔 말마따나 시대의 아들이기 때문이리라. 마땅히 아들로서 이 시대를 짊어져야 할, 봉양해야 할 하나의 이유가 있는 것이며, 아무리 이 시대가 썩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개선해나가지 않으면 안 되는 필연적인 근거를 우리의 마음 한가운데 내포하고 사는 것이다. 이제껏 우리 조상들이 살아온 장중웅려하고 심원한, 인간의 복잡미묘하면서도 의미심장한 삶을 관찰하면서 우리는, 우리를 돌보기 바쁜 그 한가운데서도 마치 세상이 전회하는 것 같은 대오의 순간을 경험하는 것이리라. 필자가 이 글에서 해명하고 싶은 안건은 바로 ‘철학은 명백히 미래의 근원’이라는 것이다. 철학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으며, 철학만이 우리 미래의 예상할 수 없는 사태에 처방을 내리고 해결할 수 있는 절체절명의 관건인 것이다. 우리는 철학의 거울로 시대를 파악하며, 과거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고 더 나아가 미래를 조망하여, 그리고 나서 과거·현재·미래를 합일하여 하나의 진리의 관념체계를 마치 하나의 기념비처럼 우뚝 세우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전우주가 이미 시간이라는 요소를 가로질러 공간도 갖지 않고 모종의 차원이나 부피나 강밀도도 갖지 않은, 즉 시작도 끝도 없는 하나의 형이상학적 체계의 총아임을 퍼뜩 깨달을 것이다.



8. 민족주의라는 ‘대의’의 미명 아래 저질러지는 당위적인 살인.

국가권력은 전쟁을 유발하며, 그 전쟁 중의 살인을 민족주의라는 이름으로 정당화시킨다. 그러나 살인은 어떠한 경우라도 정당화 될 수 없으며, 그런 연유로 필자는 국가의 이런 살상 가능성을 고발하려고 한다. 민족주의라는 대의를 바탕으로 살인을 공고히 한다면, 인류는 앞으로도 살인을 밥 먹듯이 저지를 것이리라. 민간의 살인을 심판대에 올려놓고 단죄하려는 무수한 법률가들의 기만과 위선, 그리고 가식은 이제 ‘세계의 법’이라는 미명 아래 국제적인 규모의 법으로서 ‘전쟁 기계’들의 살인조차도 진정 ‘일급 살인’으로 규정하고 거기에 단연코 당위성을 부여하지 않거니와 그러한 살인 행위를 엄격히 처벌하며 그로 인하여 모든 국가들은 예비 하에 무장해체를 전제하여 더 이상 살인이 만연한 세계를 일소에 부쳐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전에 앞서 우리는 한국사회에 만연한 분열의 형태를 진단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9. 철학은 이러한 시대적 분열에 어떤 식으로 관여할 수 있는가.

근래 들어 철학에 대한 관심은 다른 어떤 분야 못지않게 높은 것 같다. 철학에 대한 목마름이 예사롭지 않은 탓이다. 그 뿌리는 여러 갈래를 통해 알아볼 수 있을 것이지만, 크게 보아 다음의 몇가지로 나누어 생각해볼 수 있다. 첫째, 한국사회를 둘러싸고 있는 분열이다. 일찍이 헤겔은 철학에 대한 욕구의 근원을 ‘시대의 분열’이라는 한마디로 웅변한 바 있지만, 한국사회를 옭죄고 있는 그 분열은 깊고도 넓고 또 오래되기도 했다. 어떻든 그 분열의 골을 메우고 그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삶에 대해 조금이라도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은 자연히 철학자가 되지 않을 수 없는 실정이다. 그들은 그 분열의 현상을 보다 과학적으로 따져보고 보다 깊이 그 뿌리를 헤아려보기도 하며 또한 그것을 치유하기 위한 실천적 모색을 시도하면서 적지 않은 가슴앓이를 경험했다. 이 과정에서 극명하게 드러난 것은 철학이 현실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한편으로 현실에 대한 무관심을 철학의 위안으로 삼고 있었던 종래의 강단 철학에게는 커다란 충격이자 정체성의 위기를 가져다주기도 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철학과 현실의 지나친 밀착은 새로운 문제점을 남겼다. 철학이 현실변혁의 강령적 수준으로 이해되어 이데올로기로 교조화된 것은 분명 철학이 갖고 있는 고유한 비판기능의 많은 부분을 상실케 했다. 이러한 경험은 철학과 현실에 대한 보다 풍부한 이해가 필요함을 절감케 하는 계기가 되었다. 철학이 한낱 구름잡는 개념의 유희가 아니며 또한 철학이 반성해야 할 현실이라는 것의 외양도 그리 호락호락 하지만은 않다는 것이다. 둘째는 첫번째 문제와도 연관된 것인데, 한국사회의 변화속도와 그것을 진단하기 위한 갖가지 정보의 홍수이다. 예를 들어 누군가는 지난 80년대를 백가쟁명의 이데올로기가 난무한 사회과학의 시대라고도 말한다. 갖가지 언설들이 횡행하면서 홍수처럼 쏟아져나온 사회과학서적들을 매도할 수는 없다. 어떻든 그 책들은 사회에 대한 우리의 인식의 많은 부분을 구체화시켰다. 사회를 이해함에 있어 과학적 방법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이제는 제멋대로의 허튼소리가 예전처럼 쉽게 먹혀들어 가지는 않는다. 이른바 과학적 연구의 전반적 수준을 매개하거나 그 그물에 걸러지지 않은 거친 언어들은 설 땅이 없게 되었다. 하지만 과학은 그 자체로 비판의 화살을 넘어서 있는가? 그렇지는 않다. 지난 경험으로 보아 과학이라는 것이 한마디로 싸잡을 수 있을 만큼 단순하거나 일의적인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과학의 언설이 다양할수록 그것들 각각은 고립된 모나드처럼 자기주장에만 골몰하는 새로운 아집에 빠질 수 있다. 따라서 그것들을 전체적 관점에서 교통정리하거나 혹은 그 근본뿌리에서 반성하고 비판하는 일이 필요하다. 이러한 일은 역사적으로 볼 때 언제나 철학의 몫이었고 또 철학만이 할 수 있었다. 셋째로, 동서냉전의 해체와 동구권의 몰락은 철학에 대한 관심을 새롭게 환기시키고 있다. 인간해방이라는 거창한 명제가 퇴색한 반면 보다 구체적으로 인간이 살아가고 있는 생활세계, 환경세계에 대한 관심이 크게 일고 있다. 쇠그물처럼 단단하게 짜여져서 돌아가는 사회의 톱니바퀴, 도처의 치열한 경쟁만이 삶을 보장하는 숨막히는 일상, 엄청난 정보의 홍수 속에서도 교통의 벽을 느끼는 원자화된 개인의 고독. 그런 현대사회의 비인간화와 소외문제는 이제 철학의 가장 중요한 문제 중의 하나가 되었다. 나아가서 생태계의 파괴, 심각한 공해문제는 인간의 보다 근본적인 생존 자체를 위협하는 수준에까지 이르렀다. 이것은 전통적인 인간-자연의 관계에 대한 총체적인 반성을 요구한다. 현대의 기술문명이라는 것은 많은 부분 자연과 우주에서의 인간의 자기중심적 역할을 강조하는 데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극단적으로 그것을 인간의 주관성의 산물로 매도하면서 주관성을 넘어서 자연으로 회귀하는 것이야말로 현대의 무든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관건인 양 말한다. 그 방법도 어려운 것이지만 인간주체의 자기반성이 포기되어야 할 대상인지는 의문이 따른다. 어떻든 한국사회도 근대화의 과정에서 제기된 문제를 이제는 문명비판의 차원에서 검토하는 단계에 이르렀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현대의 ‘철학함’이 이러한 한국사회의 시대적 분열에 어떤 식으로 관여할 수 있는 지에 대해 짚고 넘어가야 한다. 우리의 현대사유로서 한국사회의 분열을 구체적 방법으로 타진케 하는 실천적 방안을 모색할 수 있는가? 우리 정신의 ‘관여’로 하여금 단지 이론적인 측면에서가 아니라 실천적 측면으로서의 이러한 시대적 ‘교착’상태를 어떤 고안책으로 말미암아 벗어날 수 있겠는가? 방법은 많다. 또한 해결책도 가없이 널려있다. 다만 우리가 이것으로부터 도피함으로써 얻어질 수 있는 ‘무구한 사회질서의 파괴’는 필자가, 그리고 여러분이 목도할 바람직하지 않은 앞으로 다가올 한국사회의 새로운 패러다임, 바로 그것이다. 하기야 대부분의 학도들은 사회의 무모순성 즉 정합성을 ‘사회의 순탄성’으로 생각할 게 아니라 ‘사회에 응집해있는 교착’으로 이해할 것이리라. 이는 아직도 청년 실업률이 극에 달해 있어 미래를 예비하는 학도들에게 모종의 암울한 현실로 다가오는 강밀한 사회의 공시(共時)적 정지 상태이리라. 우리는 하나의 해결책을 제시함에 앞서 우리의 내부에서부터 정신적인 갱생 즉 개혁의 실마리를 풀어나가고 단지 일시적인 혁신에만 매달릴 것이 아니라 확실하게, 명석하게 한걸음 진일보할 수 있는 ‘정신의 구조적인 전환’을 단행해야 할 것이다. 무릇 단적인 사태의 전회는 거기에 계열화되어 있는 다른 사태들 그리고 이것을 총망라한 ‘사건’이라는 구조적인 개념을 일거에 전회할 수 없다. 그러나 다방면에서 명약관화하게 거대한 획을 그음으로써 정신 곧 사건에 판명하고 충전적인 혁명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면 말할 필요 없이 우리는 일신(一新)에 다가서는 것이리라. 그리하여 우리가 내부로부터 이 딜레마를 극복하고 사회를 분열시키는 핵심을 사로잡을 때 우리의 철학함이 진정으로 사회에 ‘관여’하게 되는 것이다. 이로써 이 문제는 일망타진되었다. 다음으로 우리는 범세계적으로 비단 국지적인 측면에서, 그러니까 지엽적인 관점으로서 한 국가-대한민국만을 점검할 것이 아니라 차라리 범세계적인 지정학적, 정보통신적 측면도 함께 고려해야 할 것이다. 이리하여 우리는 세 번째 장, 국제적 윤리의 차원으로 넘어가본다.



10. 전쟁 곧 대량살인의 부재를 목도한 전세계에서 ‘인간 윤리의 괄목적 성취’는 어떤 이름으로 규정지을 수 있을 것인가.

살인은 복수살인을 부른다. 여기에서 복수는 復讐나 復讎를 의미한다. 쉽게 말해 살인은 또 하나의 살인을 부르며, 그럼으로써 점차 누적된다는 것이다. 뜻이 어떻든 살인은 반향을 즉 반작용을 부른다. 위의 명제를 보면 알 수 있겠지만, 필자가 이 단락에서 이루고자 하는 것은 ‘살인의 부재’에 당면한 인류와 그 동시에 윤리의 괄목적인 진보이다. 대의가 어떻든 명분은 휴머니즘을 바탕으로 해야 할 것이다. 필자는 인류애로 가득 찬 유토피아적 사회 창건의 정의를 광정하고자 하는 게 아니다. ‘휴머니즘’을 전제로 한 사회를 이룩하려면, 우선은 ‘휴머니즘’의 정확한 뜻을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휴머니즘’이라고 하면 흔히 ‘인간주의’ 혹은 ‘인간애’라고 옮기는데, 원래는 그런 뜻이 아니고 ‘휴머니즘’은 ‘휴먼인 것’을 강조하는 말이다. 휴먼은 라틴 어로 '후마누스(humanus)'이며 ‘후마누스’는 물질인 물이나 동물인 개와는 달리 인간에게 고유한 것, 즉 ‘인간적’이라는 뜻이다. ‘인간적’이라는 형용사는 일본에서는 다르게 쓰이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면 필자가 친구와 술을 마시고 취해서 “아, 내일은 학교 가기 싫다”라고 말하면 “너도 꽤 인간적이네”라고 말한다. 평소 학교에 결근 한번 않할 만큼 근면성실한 필자인데 알고 보니 꽤 인간적인 사람이라고 칭찬을 했을 테지만, 술에 취하는 것은 전혀 인간적인 일이 아니며 오히려 동물이 된 경우이다. 원숭이도 술에 취하기 마련이다. ‘인간적’이라는 말은 동물과 구별되는 인간만의 특징을 나타낼 떄 사용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바로 ‘언어를 이해하고, 언어를 사용하고, 언어로써 살아간다’는 것이다. 인간 이외의 다른 동물에게도 언어가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지만, 동물에게는 음성기호가 있을 뿐이며 엄밀한 의미의 언어는 없다. 분명 동물들도 명확한 의미를 가진 음성기호를 사용해 커뮤니케이션을 한다. 인간도 그 동물의 음성기호를 알면 이를 이용해 동물과 어느 정도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있다. 또한 동물에게는 듣기 능력이 있어서 인간의 단순한 명령을 음성적으로 듣고 음성기호로 파악해 그대로 행동한다. 개나 고양이를 길러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일 것이다. 원숭이는 선천적으로 음성기호를 내재한 채 태어나는 데 반해 인간의 언어는 일생 동안 배우고 터득해 가는 것이다. 사전이 없는 인간의 일생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다. 또한 사색이 깊어지면 사전에는 없는 새로운 술어를 만들기도 한다. 우리는 평생에 걸쳐 언어를 습득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언어적’이라는 것이 가장 인간적인 것이다. 따라서 ‘휴머니즘’의 첫 번째 의미는 다름 아닌 ‘인문주의’ 즉 인문학의 정진인 것이다. 따라서 휴머니즘의 효시는 당연지사 ‘언어적 계발·인문학적 진보’ 즉 인간 정신의 상승이며, 그러므로 우리는 전적으로 휴머니즘을 제반으로서 윤리적 최고선(最高善)을 지향해야 할 것이다. 만일 그게 가능하다면 또 하나의 인간존재가 경원시 하지 말아야 할 게 있다. 이윤추구에 대한 모럴해저드에의 반발의식 그것이다. 오늘날에는 국제적 대기업이 재화와 서비스의 상위부문부터 하위부문까지 온통 점령하고 있는 상태라, 이렇게 가다간 중소기업과 영새상인들은 쑥대밭이 되고 이른바 부자는 더 부자가 되고 가난한 자는 더 가난해 질 것이 자명하다. 이러한 ‘이윤추구에 대한 모럴해저드’를 사전에 예방하려면, 국가가 시장 방임주의에 그 방향성을 의탁할 것이 아니라 시장에 대한 적극적인 개입을 지향해야 할 것이리라. 그리하여 빈부격차를 대폭 줄이고 빈민을 위한 무상교육을 지원하여 동시에 교육격차도 줄여 모든 시민이 휴머니즘에 경도될 수 있도록 적극 조치를 취해야 할 것이다.

바야흐로 전쟁의 세기였던 20세기가 막을 내렸다. 이제는 더 이상 상대방의 머리에 총구를 겨누지 않는다. 미상불 ‘대량살인의 부재’를 맞닥뜨리게 된 것이다. 우리는 더 이상 오늘날 생명의 위협을 받지 않는다. 최소한 21세기 이전까지 인류는 처음에는 잔인한 자연에, 나중에는 가공적인 인위의 힘에 의해 불안에 떨며 살아왔다. 그러나 이제는 보편적인 안전의 윤리가 자리 잡았고 더 이상 인간은 무서워할 것이 없게 되었다. 이제 ‘인류 일반’이 봉착한 숙제는 다름 아닌 ‘윤리’의 문제이다. 근래 들어 윤리에 관한 정치적 저서가 유명세를 타는 기이한 현상을 목격할 수 있는데, 이는 다름이 아니라 돈의 시대에 무엇보다 윤리가 더 중요한 삶의 요소가 되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우리가 더욱 더 도덕적인 인간으로서 도전적으로 정진하는 자세에 몰입하려면 무엇보다 휴머니즘의 유위변전함을 태양의 직사보다도 더 명약관화하게 직시해야 한다. 해서 사르트르가 말했듯 인간은 철저하게 ‘의미생산’과 ‘역사형성’의 주체이다. 실천적 유기체의 자격으로 자신의 물질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주위의 물질세계와 끝없는 긴장관계를 맺는 한편, 그 과정에서 역사형성에 기여하기도 하는 주체인 인간이, 우연히 그 물질세계에서 같이 살게 된 다른 인간들과 더불어 또 다른 역사형성의 주체인 집단을 어떻게 형성하게 되는가를 어떤 시대의 ‘개인’보다도 더 강경하고 심층적인 입장에서 경험하여 도출된 결론을, 정밀하고 논리정연한 연역적 접근에 의거해 판단해야 할 것이리라. 따라서 평면적 인간관계로부터 하나의 구조를 갖는 입체를 구축하고, 이 입체를 역사적 운동 속으로 밀어 넣어 그 동적 관계, 즉 역사적 인간학을 확립하는 게 우리 실존의 ‘관건’인 것이다. 이러한 사르트르적 현대사유 즉 역사정 도정을 향해 ‘윤리의 법칙’ 하에 전진하는 것, 거기에서 ‘현대윤리의 괄목할 만한 성취’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이 장의 판명한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는 것이다.



11. 20세기 변천사에서 이끌어낼 수 있는 ‘21세기적 의미와 가치’의 규범.

20세기는 급격한 세계의 정치변혁의 한가운데 서 있는 ‘사르트르’의 세기였다는 건 재론의 여지가 없는 자명한 사실이다. 파시즘도, 스탈린식 공산주의도 심지어 마르크시즘과 레닌이즘도 모두가 사르트르의 손아귀에 있었다. 이렇게 한 개인이 모든 분야와 부문을 총체적으로 고려하고 관조하고 있다는 유례없는 사실은 확실히 전대미문의 것이었다. 우리는 이런 사르트르의 실천 이른바 20세기의 역사로부터 어떤 결론을 도출해낼 수 있는가? 20세기가 ‘정치’로 완전하게 규정지어 진 시기였다면, 21세기는 ‘자본’으로 완전하게 규정된 세기이다. 이 ‘정치’와 ‘자본’ 사이에는 어떠한 역학적 상관관계가 작용하고 있는가? 최첨단을 달리는 기술과 정보통신의 사회에서, 심지어 스마트폰에 세계 지정(地釘) 전체가 3D영상으로 나타나고 있는 이 확고부동한 과학이라는 규범으로 결정지어지는 이 시대에서도 ‘철학과 사상’의 결핍은 그 어느 때보다 눈에 띈다. 하기야 방만한 MB가 글로벌적 소통의 편만성의 중요성을 새삼스럽게 강조하며 영어 일변도의 제도권 교육이란 카드를 제시했고, 그로 인해 인문학의 ‘변증술’의 위세 소위 ‘한글을 표상으로 하는 사유기법’의 위축은 불 보듯 뻔한 사태였고, 결과적으로 한국인의 정신적 깊이는 점점 엷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로써 ‘사물과 현상’에 대한 단편적인 기술적 접근은 진보한 반면, 도리어 다방면에서 결산한 결론을 대조하여 꼼꼼 분석하여 총체를 걸러내는 능력은 후퇴하게 되었다. 인간은 행동하지만 거기에는 어떤 의미와 가치도 부여할 수 없는 요컨대 인간성의 포커페이스 시대가 도래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주장한다. 우리는 누구보다 사학자적인 관점에서 과거를 거울로 삼음으로써 미래를 그려나가야 된다고. 과거를 변증법적 로고스로서 교묘하고 정치하게 분석하여, 미래에 대한 의미와 가치를 반영하는 거울로 사용해야 한다고. 요컨대 과거와 미래 사이의 동질성을 철두철미하게 파악함으로 인해 생성하는 그 교점, 즉 ‘철학’이란 표상으로써의 세계를 발견해야 한다고. 이리하여 우리는 철학을 모든 분야를 통괄한 핵심규범으로 소용하고 그것을 눈금으로 하여 ‘21세기적 의미와 가치’의 규범을 점진적으로 계량해볼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철학이란 무엇인가? 어떤 사람들은 철학을 사고(思考)가 태어나고 사라지는 곳, 체계들이 세워지고 무너지는 동질성의 장소로 생각한다. 다른 사람들은 철학을 우리가 항상 자유롭게 취할 수 있는 모종의 태도라고 생각한다. 또 다른 사람들은 철학을 문화의 한정된 한 분야로 여기기도 한다. 우리가 보기에 그런 철학은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형태로 생각하든, 과학의 한 그림자 혹은 인류의 배후세력 등으로 표현되는 그런 철학은 실체화된 추상에 불과할 따름이다. 실제로 여러 철학들이 있다. 혹은 그보다는 오히려 한정된 한 상황에서 그 사회의 전반적 움직임을 표현해주는 하나의 철학이―왜냐하면 하나 이상의 철학이 동시에 살아남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있을 따름이다. 그래서 그 철학이 살아 있는 한, 그것은 동시대인들의 문화적 배경으로 소용된다. 철학이라는 이 당혹스런 대상은 서로 분명히 구별되는 여러 양상 하에 나타남과 동시에 그 양상들을 끊임없이 통합시킨다. 이리하여 이런 식으로 통합된 양상은 하나의 규칙을 생산하게 되며, 이는 곧 규범, 즉 21세기의 ‘철학함’의 방정식을 공고히 다져준다. 이로써 이 장도 아스라이 막을 내린다.



12. 이 시대에 철학사상은 과연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아인슈타인은 하나의 물체가 하나의 시간에 하나의 공간에만 존속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했다. 이는 다른 차원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방증한다. 아인슈타인의 이러한 논증은 무엇보다 우리의 인생은 단 한 번의 시공의 재현의 연쇄에 불과하다는 걸 증명하고 있으므로 우리는 우리의 삶에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삶은 그러므로 고귀한 것이다. 단 한 번뿐인 생, 그 생에 목도하여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가장 보편타당하고 합리적인 방법은 돈을 배격하고 자신의 본질을 사는 것이다. 자신의 성격, 특성, 특질을 지향하며 자신의 삶에 대한 열정에서 솟아나오는 근원을 포착하고 해부하여 재조립하는 것이다. 들뢰즈의 표현을 빌리자면, 코드화해서 재코드화에 들어가는 것이다. 들뢰즈야 위대한 대철학자라 할 수 있지만 그는 스스로 삶을 포기했다. 그 자살사건이 자신의 사상이 패배했다는 데서 나오는 좌절에서 비롯된 것인지, 아니면 자기 철학의 정점에 도달하여 모든 걸 깨닫고 자살한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어쩌면 들뢰즈는 자신이 현대철학의 거두로서 너무나 영향력이 커졌기 때문에 자신의 모든 것을 후학에게 물려주려는 임무적 발로가 심층적 원인인지도 모른다. 좌우지간 나도 언젠가는 자살로써 생을 마칠 것이다. 왜냐하면 쇼펜하우어가 그랬듯 인간이 동물과 상이한 점은 오로지 자신의 삶의 종말을 자유의지로써 선택할 권리를 갖추고 있다는 점이라 천명했으니, 그가 비록 위대한 철학자는 아니었지만 그의 그러한 자유의지적 선택설은 훌륭한 것이었다. 물론 실험적인 형태는 아니었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나 또한 단독적인 사유로 말미암아 그러한 결론에 도달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쇼펜하우어를 위대한 철학자라고 찬양하는 짓은 정말 별 볼일 없는 학자인 체 하는 얼간이들의 짓에 다름 아니다. 오히려 내가 독보적으로 존경하는 철학자는 각성제 코리드란을 과량복용하면서 제정신이 아닌 정신적 과열의 상태에서 미칠 듯이 자신의 대저서, 즉 세계철학사에서 가장 위대한 ‘변증법적 이성비판’을 집필한 사르트르이다. 사르트르는 최고의 철학을 수립/설계하기 위해서 착란에 빠져, 한 명의 광인이 되면서까지 자신의 대사상을 완성했다. 그에게 진리를 구하는 길 즉 지적 도정의 끝자락에 도달하는 길 외에, 그 가외에 것들은 아무 것도 소용없는 것이었다. 오로지 철학사상, 추상적인 개념과 관념, 급진적 사회주의만이 그를 경도시킬 수 있는 목적론적 알레고리였다. 그는 철학을 함으로써 시대를 뛰어넘으려고 했고 현상 저 너머의 세계 이른바 인간조건 피안에 서서 우리가 보지 못한 어떤 것을 잡으려고 자신의 육체와 정신을 다 바쳐 비공시적으로 모든 지식을 무불통달하여 일침을 놓은 것이다. 그에게 철학이란 자신의 삶의 이유였고, 삶을 산다는 것 즉 철학한다는 것은 모든 시민들 위에 서서 위대한 자신의 이데아를 구축하려는 일련의 시도였다. 그러한 정태적인 동화작용이 어떠한 결과물을 도출해냈는지는 일단 넘어가기로 하고, 필경 그의 사상체계의 원류가 되었던 시발점을 우리는 분해하여 분석해볼 필요가 있다. 그는 극도의 이기주의자였다. 이것은 에고이즘 지향성의 위대한 표본이다. 이기주의란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게 아니라 당당하게 자기 권리를 주장하며 남에게 자신을 적절하게 알리는 것이다. 그러니까 자신의 본질을 사는 것이 바로 에고이즘이 창도하는 가장 중요한 핵심주제이다. 여하튼 사르트르는 차가운 지성을 중요시했다. 차가운 지성이야말로 냉정/냉엄하게 감정을 배제한 채 인간이 아닌 신의 눈으로 인류를 내려다보며 원지적으로 분석·해명하는 일이다. 하기야 신의 그릇된 투사가 인간의 운명을 조작할 수는 있겠지만 사르트르가 원한 건 조작이 아닌 조정이었다. 어렴풋한 시의적절한 조정이었다. 이는 운명을 방기하지 않은 채 자기 삶을 주체적이고 동태적으로 살아가려는 한 개인의 생철학의 참여에 대한 파노라마를 우의적으로 표현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 철학을 위한 철학을, 회의를 위한 회의를 변증법의 지양의 태도가 제1학으로서 선행되어야 할 것을, 따라서 존재론적 차이(존재자와 존재의 차이)가 필멸하는 사상의 구도문의求道文意로써 점층적, 시나브로 지양의 움직임에 찬동하는 걸 스스로 금 자행해야 할 것이다. 어떠한 문제의식이든 방향의식이든 철학사상의 영역에서는 귀일한 쪽으로, 크게 보아 삼라만상과 전우주의 변용은 진리, 진리란 오직 하나밖에 없는 법이어서 단지 하나의 진리로써 테제되는 것이다. 요즘과 같이 물리와 사적 유물론이 판치고 있는 과학의 시대에 관념이란 현실과 동떨어진 무소불위의 철학론으로 치부하기 십상일 게다. 그러나 철학은 시대가 흘러도 진일보에 진일보를 거듭해 찬란하게 무수한 진보의 연쇄의 일가를 이루므로 만년이 흐른다 해도 철학은 모든 학문의 황제이자 최고의 1학으로서의 위상을 꿰찰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철학을 생각하는 태도이다. 유태인이 어떻게 세계 최고의 집단으로 각광 받으며 온세계의 부와 권력을 손에 넣은 줄 아는가? 그들은 인간을 연구했기 때문이다. 즉 인간에 대한 구명에 대한 심원한 열정 때문이다. 유태인은 결코 인간의 탐구에 대한 문제를 좌시하지 않았거니와 무엇보다 진리를 찾아나서는 데 힘을 아끼지 않았다. 그게 바로 유태인의 승리 비결이며 그들이 기필코 패배하지 않는 이유의 근본이기도 하다. 그러나 첨단을 달리는 21세기에 인문학은 버려졌으며 그것의 왕이라 할 수 있는 철학은 내팽개쳤다. 이제 기술을 연구하는 데 정력을 소비한 나머지 사유를 원하는 인간은 찾아볼 수 없는 오늘에 이르렀다. 이런 시대에 철학의 존속은 과연 그 의미가 있는 것일까? 온누리에 이미 기술에 대한 찬양이 과유불급이라는 금언을 파괴하고 광기에 사로잡힌 채 날뛰고 있는 이 시점에서 철학사상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우리는 기술이 우리를 곧 지배하게 될 날을 기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게 현실이다. 기술이 우리를 지배하고 우리는 스펙경쟁에 시달리면서 기술적인 인간, 포스트 모더니즘적 표현을 빌리자면 인간-기계가 되어 영혼도, 정신도 남지 않은 동물보다 못한 존재가 될 것이다. 기술은 이미 충분히 성장하고 성숙했는데도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어서 과학은 점차 팽창해나가고 인류는 부유함에만 정신이 팔려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과연 이 시대에 역사를 진지하게 연구하는 사가가 있을까? 주식상장이 폭발적으로 코스닥에 이루어지고 있는 현대에 한국이 나아갈 방향은 무엇일까? 한국의 시대적 분열은 어디에서 비롯됐으며 그 시발점의 맹아는 어디에서 제창되었는가? 그리고 신자유주의시대에 아직도 고색한 마르크시즘과 레닌즘이 병존해야할 의미에 재론의 여지를 두어야 할 합당한 근거의 착상이 지난하게 존속되어야 할 화두의 한 궤라 할 수 있겠는가? 하기야 문필가들과 철학사상가들은 아직도 사회주의의 시도가 성공해야 할 합법칙적 근거가 있다고 자부하곤 한다. 그러나 그러한 자부심이 어쩌면 해가 될지도 모른다는 어두운 사실, 즉 그 화려한 이론의 배후에 엄존하는 사실들을 나는 어찌됐건 밀고해야겠다. 그들은 사상이 굶어죽는 아이보다 먼저라고 생각하는 족속들이다. 요컨대 촘스키가 그러하다. 촘스키는 사회주의의 승리를 기원하면서 리무진을 타고 고급 에스프레소에 와인을 들이킨다. 그는 대표적인 부르주아지식인으로써 자신의 사회주의로 대중을 선동하여 인기를 한 몸에 얻고 있는 변절자이자 위선자이다. 그러한 위선자의 무분별한 언동의 자행을 그저 수수방관하고 있어야 할 필연적으로 당위적인 이유의 내용이 사회 성원들에게 선이해(Pre-understainding)돼야 한다면 이것보다 이 시대정신의 비극을 나타내는 넌센스한 사유방식에 엿을 먹이고 싶다. 예전의 글에서 필자가 공리주의에 엿을 먹였듯이 이러한 몰염치한 사고방식에는 남자의 성기가 우뚝 서서 엿을 먹이는 게 지당한 전제조건일 터이다. 모름지기 지성인이란 개인 한 명 한 명의 인간 실존을 지향해야 하며, 그런 이유로 사르트르의 실존주의가 엄청난 유행을 누린 원인일 것이거니와 사르트르의 대저서 '변증법적 이성비판’이 헤겔을 뛰어넘어 마르크시즘과 실존주의를 결합하려는 시도는 역사의 유례가 없는 대시도이자 인류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한 지식의 전범이며 왜 인간이 철학을 해야 하는 정합적인 증거를 제시한 현대철학의 위대한 표본이라고 예찬될 수 있는 것이다. 필자가 철학을 하는 이유는 가언적인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건 정언적인 기법의 기저에 근접한 엄격한 일종의 형식적 기조이다. 이리하여 이 형식은 어떤 감언이설에도 넘어가지 않는 지식인의 자존심과 배타성의 배격행위의 당위적인 지향성을 아울러 세계의 한 가운데서 모든 걸 통괄하여 우주의 실체를 논리적인 문법으로써 해명하고 철두철미하게 그 무모순적 개연성을 근거 짓는데 모든 공교로운 결단코 지리멸렬하지 않은 핵심을 정석하는 데 가까운 기술적인 접근의 한 원형일 것이다.



철학은 날로 날로 성장하는 학문이다. 최초의 철학자 탈레스로부터 현대 최고의 철학사상가 지젝에 이르기까지 철학의 역사는 아주 유구하고 국가보안법보다 치밀하고 첨단기술보다도 정교하다. 철학은 경험으로부터 발견해내는 귀납법적 접근 기법과, 하나의 명제로부터 도출해낸 사실을 증명하는 연역법적 접근 기법으로 나뉜다. 미상불 목하 철학의 화두는 사변이성을 도구로 하여 도출해내는 연역법적 시도가 주류를 이룬다. 그래서 포스트모더니즘은 책상에 앉아서, 마치 셜록홈즈가 책상에서 모든 걸 추리해내고 범죄자를 체포하듯이 들뢰즈가 책상에서 철학의 전단계부터 폐막에 이르기까지 부정변증법으로써 수미일관하게 총체적인 철학사상이론을 내놓을 수 있는 것이다. 과거 그리스·동방 철학은 주어진 지식의 기록이 없어서 불행하게도 귀납적 접근을 시도할 수밖에 없었고 사변이성의 적절한 활용도 전무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온갖 다방면의 지식이 날뛰는 시대이니만큼 우리는 사방팔방을 종횡무진하면서 명약관화하게 총체적인 이론의 겸양과 오묘한 지혜의 정수의 달콤함을 라캉의 어법으로 말해서 ‘향유’할 수 있는 것이다. 전반적으로 삶의 지혜를 추출하려면 무릇 제반 지식이란 질료가 있어야 하는 법이며 그로 말미암아 우리는 총체적 진리라는 명증한 형상을 여하든 명정이 우리의 선험적인 영혼의 시공의식의 층위에 아로새길 수 있는 것이리라.



문학은 죽었다, 사상은 죽었다, 고 혹자들은 무분별하게 오류를 범하는 유언비어를 유포할 수도 있을 것이며, 필자는 그런 덜떨어진 사고방식을 일자로 통일시키고 괴멸시킬 자신이 있다. 비단 철학만이 우리에게 미래를 제시하는 건 아닐지 몰라도 철학은 우리에게 과거의 과오를 후회하게 함과 동시에 현재를 즐겁고 가치 있게 살 수 있는 일련의 방법을 제시하거니와 미래의 전형 소위 유토피아의 패러다임을 교교하게 정설로 굳힐 수 있는 이러쿵저러쿵한 진실의 도식을 철저하게 그려낸다. 하기야 오늘의 사회는 썩고 부패할 대로 부패했다. 학벌과 재산의 세습과 상속이 전례 없이 과감하고 다다하게 자행되고 있고 우리는 이 현실 그러니까 비참한 망실의 광경을 뚫어지게 응시하면서 그 어떠한 사회투쟁도 불사하지 못하고 유보한 채 회환에 가득 차 노동-기계로서 인간이라 할 수 없는 개 같은 생을 산다. 그런데 필자가 나서서 철학을 하라 말라 헛소리를 늘어놓는다면 그것은 당신들에게 소귀에 경 읽기에 다름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이런 다급한 상황일수록 우리에게 철학사상은 그 여하한 보배보다도 소중하고 감사한 것이리라. 병이 걸린 걸 알면 반은 나섰다고 보는 의학계의 말처럼 우리 또한 현재 사태를 진찰하고 그 병을 알아채면 즉 우리가 프롤레타리아로서 착취당하고 보수 없이 부르주아에게 봉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하는 것만으로도 반은 승리의 계열에 동참한 것이다. 그러니까 새로운 등위에서 복잡다기한 상황을 해쳐나가며 이 미분화되는 사회의 만화경 같은 불가해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부르주아들의 전횡만큼 사악하고 저속하며 저열한 건 없다. 그들은 우리에게 매스컴이라는 회중시계를 흔들며 우리를 마멸시키려고 작당중이다. 매스컴의 범죄 사건들에 정신이 팔려 우리는 정치에 일어나는 여러 중요 현상들의 실체를 두루 포착하지 못한 채 그 배후에서 일어나는 여러 파렴치한 부패와 음모를 지나치기 십상이다. 여러분은 그러한 양태의 노예가 되었는지 몰라도 나는 아니다. 나는 이미 과거의 내가 아니다. 나는 한 번 죽었던 몸이다. 나는 과거의 염세주의자이자 패배주의자가 아닌 투쟁하고 항거하는 한 명의 선진적이고 과격한 급진적 사회주의자이거니와 영원한 좌파이다. 나에게는 55살 먹은 나이든 어머니가 한 명 있고 같은 연배의 아버지가 한 명 있다. 그들은 직장의 착취 다시 말해 부르주아의 착취에 시달린다. 왜 나의 부모님이 그렇게 당해야 하는가? 그들에겐 힘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없던 힘까지 만들어내는 기적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건 바로 우리가 한 떼로 뭉쳐서 명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른바 신사회주의 혁명 말이다. 과거 프랑스 혁명, 나치 혁명이 그래왔듯 우리 역시 대대적으로 뭉쳐 부르주아의 횡포를 무마시킬 희망을 품어볼 수도 있는 것이다. 역설적인 상황의 도래에서도 그는 결코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희망의 소거야말로 모든 것의 결여를 입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는 사회주의에 매달릴 필연적인 근거를 이미 내재하고 있는 것이리라. 우리를 이끌어줄 유일한 원동력은 오로지 ‘철학사상’ 하나뿐이다.



13. 나의 삶에서 철학이란.

고독했다. 그러나 그 무엇도 나를 구원해줄 수 없었다. 나를 구원해줄 수 있는 건 생각의 흐름을 하나의 결정체로 도약시켜 결정화하는 것이었다. 고독했기 때문에 삶을 사랑했다. 고독함이야말로 나의 존재이유였다. 지적 도정에 매달리는 거야말로 내가 유일하게 이 삶을 사랑할 수 있는 의미론적 혜학이었다. 여러 상황 속에서 일희일비하면서도 나는 정연한 철학사상의 입방체를 구상하여 마침내 개설하는 것이었다. 나는 철학적 글쓰기에 모든 걸 걸었다. 철학은 나의 아버지였으므로 나는 그를 신봉하고 그에게 종속당하기를 염원했다. 나는 사유의 여러 단상들과 편린들을 마치 양탄자처럼 직조하여 하나의 체제를 교묘하게 설립하기를 원했다. 철학자에게 있어 삶이란 그런 것이다. 철학이 곧 삶의 얼개인 것이다. 구조주의적인 관점에서 삶을 관찰하자면 철학만이 삶의 존재론적 당위성을 보장해줄 수 있는 유일한 학문이라고 깨우칠 수 있을 터이다. 비록 사회에서 성원들이 직설화법이 아닌 우회하여 완곡어법으로 대응한다손 치더라도 우리의 사회에선 홉스의 말대로 만인은 만인에 대해 늑대이여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만이 유일한 사회의 진실인 것이다. 그렇다. 삶은 더럽고 지저분하다. 그런 더러운 삶에서 오로지 아름다움을 응시하는 일만이 현자가 걸어야 할 진리의 정석이라 논파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담론은 항상 무익한 것이다. 왜냐하면 더러움을 더러움으로 물리치려는 무의미한 공空적 시도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복수에 대한 복수는 또 하나의 복수를 낳으므로 전쟁은 끊이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헤겔의 변증법이 탁상공론에 불과한 것일까? 하기야 헤겔은 아프리오리하다. 그 점이 그의 매력인 것이다. 아프리오리하다는 건 그만큼 연역법적인 기술적 접근의 저변에 가까운 것이므로 우리는 헤겔이 세상 전부와 요소 하나하나를 논리적으로 분석하려고 했다는 사실에 실소를 금치 못할 수도 있을 것이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겔은 위대하다. 그의 철학은 사변이성과 사변철학을 일대 약진시켰으며 온갖 교조적인 광신과 종교, 신앙을 한방에 종식시켰다. 그러므로 그는 합리적인 관념론자이다. 그는 독일 관념론의 중심에 위치한다. 독일 관념론은 역사상 최대의 지적 조류였고 그 정점에 위치한 그를 나는 사르트르를 제외한 그 누구보다 존경하는 바이다. 그는 글과 사고의 유위변전을 양화시키는 방법론적 체계를 명명백백히 소유한 관념론자였고, 그 누구도 그만큼 정치하게 사물과 현상 그리고 관념에 대해 연구하지는 못했다. 그는 그야말로 철학자의 전형이거니와 학자라면 분명히 따라야할 도를 제시한 위대한 철학자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그가 나폴레옹을 찬양한 것은 정치적 태도의 오판이었을 테지만 그렇다고 20세기의 아리스토텔레스 하이데거처럼 나치즘에 경도되어 소위 파시스트가 된 건 아니지 않은가? 나도 한 명의 철학하는 사람으로서 철학사상이 우리에게 쥐어주는 보배를 존중하고 그것이 일파만파 퍼지기를 원한다. 그래서 나에게 철학사상이란 진정으로 신비하고 고매한 것이며 소중하다. 나는 평생 철학사상을 할 예정이다. 죽기 직전까지 나는 사유의 흐름의 단속을 중단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의 영혼은 영겁하니까.



14. 철학사상의 아포리아

비단 전문 철학자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철학이 있다. 저기 청소부 아줌마에게도 철학이 있고, 저기 공사장 작부에게도 철학이 있다. 그러나 그러한 쾌락을 추구하는 일반인들에게 철학이란 단지 겉멋 내는 유희 내지는 개똥철학의 편린에 지나지 않는다. 필자와 같이 철학과 사상을 두루 표명하는 전문 철학사상가에게 철학이란 삶보다 더 중요한 추상적•관념적인 일련의 박학다식한 체계이며 이 체계 하나를 설명하는 데 마치 사르트르가 그리했듯 3600페이지를 소모할 수도 있는 것이다. 철학자란 이렇듯 위대하고 아스라하다. 필자는 단순히 학문뿐 아니라 미디어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영화를 통해서 근래의 철학사상가들이 시도하는 철학사상과 영화의 결합과 그로 인한 교착상태의 당면과 그 교착이라는 이름의 아포리아를 한 획을 긋는 대오로써 빠져나가는 그런 모종의 우주에 항거하는 자기 기투로서의 이 생의 지상의 양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누구나 아포리아에 당착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런 아포리아에서 벗어나려면 층위의 전환 가령 폭풍처럼 격렬한 지적 전회가 필요한 법이어서, 단순히 우리가 무연하게 늘어놓는 수사적 양식의 연쇄가 아니라 폭발적인 지성의 편린들을 총체적인 이론으로, 무수한 부분집합들의 합집합이라 할 수 있는 하나의 큰 그림으로서의 철학을 개설하고 거기에 3차원적인 입체를 구축하여 실존주의와 마르크시즘을 밀어 넣음으로써 그 동안 우리가 극복하지 못했던 마르크시즘의 무노동성과 실존주의의 이기성을 동시에 극복하는 신의 계시와 같은 계기가 여기서 직조되는 것이리라. 무릇 삶이란 매우 힘들고 불가해함과 동시에 빠져나가려면 더욱 옥죄어오는 구렁텅이와도 같이 우리의 정신을 하나 같이 족쇄처럼 그러잡고 있다. 모름지기 철학사상가란 우주의 삼라만상의 상이성의 특성/특질의 일장일단을 교묘하게 추려내어 장점만을 합방하여 사르트르의 ‘변증법적 이성비판’의 시도처럼 신 철학이라는 미명 아래 저질러지는 당위적인 계획적 총체로서의 이론을 명백히/명증이 증명하는 게 우리의 도리이자 본을 두어야 할 위치인 것이다. 하기야 사르트르는 하이데거와 후설이 별로라고 하여 결국 헤겔과 한 판 붙었고, 그와의 사투에서 패배했지만 세계철학사에 빛나는 꽃으로 혁혁하게 아로새겨질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되었다. 혹자는 필자가 너무 사르트르 얘기만 한다 하여 비방할 수 있는 감정을 품을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필자는 이 글의 주제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 기저에서 글의 저변을 철두철미하게 실사구시의 방법론에 입각하여 구성해 나갈 것을 모두에게 맹세하는 바이다. 따라서 타인은 지옥이다. 왜냐하면 글이란 타자가 없이는 존재할 수 없으며 글의 ‘지옥성’을 보여주려면 피치 못하게 타자의 존재를 공인해야 한다. 그래서 명실공히 타자는 지옥이 되는 항진명제가 적절히 성립되는 것이며, 당신이 상정한 과거 여러 명제들과 전제조건들을 일률적으로 창도하려면 단지 소천한 당신들의 사유방식으로서는 무분별한 동태적 파고에 불가능할 것이므로 왠만해서 지식의 연장으로서의 길고 긴 사투 끝의 집적의 적출 외에는 그 어떠한 철학적 글쓰기 방식도 무관하다고 해명해야 할 터이다. 그러므로 관념의, 철학사상의 아포리아에서 빠져 나오려면 일단 ‘전이의 음모론’을 위시하는 게 합당하다. 우리 생에서 전이란 대부분이 우리 삶의 중심인 성을 기반으로 하여 이루어지는데 우리가 어떤 전이를 일으키면 사람의 성욕은 거기 만족하지 못하고 또 다른 성욕의 향유를 위해 ‘전이’이 과정을 두루 거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의 계략, 지략, 음모를 꾸며야 하는데, 바로 성욕을 비정상적으로 팽창시켜 자의식을 과잉 시키면서 일종의 착란에 빠져 미친 듯이 마치 사르트르가 마약성 각성제 코리드란을 입에 다량 쑤셔 넣고 글을 써내려 가듯이 당신도 어떤 것에 취해 가령 보들레르처럼 술, 덕, 시 이 3요소 중 하나에 취해 자신의 진정하고 영지적인 사상을 적출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철학적 글쓰기가 생각보다 그리 어렵다고 유추할 어떤 근거도 떠오르지 않는다고 이 자리에서, 이 지점에서 당당히 논증할 수 있다. 철학에는 정진 외에 다른 가외의 수양 방법은 배제된다. 왜냐하면 정진만이, 교수의 강의를 듣지 않는 독학자의 독학만이 그의 사적 변증법적 유물론의 형태를 유구하고 학구적으로 완성해나가는 논리 정연한 방법이며, 지식을 제반으로 하여 삶이란 미스터리하고 오로지 냉정한 지성으로서의 추리가 요구되는 이 만화경 같은 세상에서 우리는 무엇을 의구할 수 있겠는가. 필자도 지금 이 글을 써감에 있어 저번에 기필코 쓰지 않았던 단어들과 명사들, 수사들을 조심스레, 아주 학술적인 용어들로만 골라서 적절히 선취해내고 입력하고 있다. 어쨌든 이것이 바로 일부러 난해한 글을 주로 쓰는 필자만의 방법론이다. 그리고 많은 독서를 하지 않고 단지 변증법적으로 언어를 연구하여 글의 수준과 예술성과 선험적 가치성을 끌어올리는 이른바 ‘층위의 절대반복과 상승’이 필자만이 가진 교교한 기술력의 보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좌우지간 삶이란 당연지사 개 같고 온갖 비의와 역설 그리고 무의미와 무가치함, 전례 없는 고통의 연속에 의거해 바뀌고 변화/변용한다. 이러한 가벼운 삶을 무겁게 하려면 교양을 쌓는 일이 우선시 된다. 교양이란 제도권 교육과는 엄밀히 다른 진정한 의미로서의 학문이며, 이러한 매력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거기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 당신이 당면한, 내가 당면한 아포리아에서 빠져 나오는 방법은? 간단하다. 책을 읽으면서 대오의 체험을 정신에 구현하는 것이다. 그 순간 당신은 한 명의 도인으로 등극하며, 당신의 정신은 영원불멸을 뛰어넘어 메타적 세계에까지 뻗어나게 되는 것이리라. 감히 남이 범접하지 못한 하나의 전설로 입적하여 들뢰즈의 말마따나 새로운 계열에 동참하는 계기를 창출하는 것이므로 우리가 감히 하지 못할 일이 어디 있단 말인가? 아포리아는 이렇듯 간단하게 해결되는 것이리라.









-결론

우리 삶 저변에 철학이 두루 깔려있다. 철학은 요컨대 시대에 관한 논쟁 즉 담론이라 할 수 있겠다. 철학은 우리가 무엇 때문에 사는가, 하는 의문점을 간파하게 해주며 우리가 살아야 할 이유를 분명히 제시해준다. 우리가 일벌레로서 고군분투하여 악착같이 사는 이유는 모두가 헤겔 말마따나 시대의 아들이기 때문이리라. 마땅히 아들로서 이 시대를 짊어져야 할, 봉양해야 할 하나의 이유가 있는 것이며, 아무리 이 시대가 썩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개선해나가지 않으면 안 되는 필연적인 근거를 우리의 마음 한가운데 내포하고 사는 것이다. 이제껏 우리 조상들이 살아온 장중웅려하고 심원한, 인간의 복잡미묘하면서도 의미심장한 삶을 관찰하면서 우리는, 우리를 돌보기 바쁜 그 한가운데서도 마치 세상이 전회하는 것 같은 대오의 순간을 경험하는 것이리라. 필자가 이 글에서 해명하고 싶은 안건은 바로 ‘철학은 명백히 미래의 근원’이라는 것이다. 철학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으며, 철학만이 우리 미래의 예상할 수 없는 사태에 처방을 내리고 해결할 수 있는 절체절명의 관건인 것이다. 우리는 철학의 거울로 시대를 파악하며, 과거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고 더 나아가 미래를 조망하여, 그리고 나서 과거·현재·미래를 합일하여 하나의 진리의 관념체계를 마치 하나의 기념비처럼 우뚝 세우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전우주가 이미 시간이라는 요소를 가로질러 공간도 갖지 않고 모종의 차원이나 부피나 강밀도도 갖지 않은, 즉 시작도 끝도 없는 하나의 형이상학적 체계의 총아임을 퍼뜩 깨달을 것이다.



당신들은 필자의 사유의 정신없는 육박함을 관찰하고, 이 선형적인 사고의 연쇄를 따라, 독자적으로 받아들이는 대동소이한 내용을 두루 섭렵함으로써, 거기에 드러나는 일장일단함을 독자적으로 적절히 취했을 것이리라. 이리하여 우리는 철학이야말로, 21세기에 봉착하는 난제들을 해결할 유일무이한 ‘해법’임을 깨달았으리라. 주지하다시피 철학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있는 분야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 현존재는, 크게 보아 세상의 법과 규칙, 사회라는 유기체의 집합이며, 이를 토대로 소우주가 대우주라는 커다란 틀에 위치함으로서, 우리 인간적 실재 즉 인간존재는 어떤 식으로 이 광대무변한 우주의 한가운데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나 그러한 비당위적인 실존적 사고(思考)의 고착에 당면하게 된다. 이제는 인간 서로 간의 야만은 종식되었고 크게 보아 우주와 인간 간의 대결이 무한히 존재사유의 뇌관에, 그 도정의 도식을 테제하는 것이리라. 이미 읽혀져 당착했다고 보는 20세기의 사유―그럼으로써 20세기는 이미 과거다―, 그리고 21세기 개인이 느끼는 불안과 고독, 소외와 부조리, 실존의 비의와 역설…… 그럼에도 우리는 조류를 거스르는 배처럼 끊임없이 과거로 떠밀려가면서도 앞으로 앞으로 계속 전진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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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ryheng2@naver.com 2011-01-06 16:5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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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oolgum@gmail.com 2011-01-06 17: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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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자게라지만 이런 글을 사람들이 읽을 거라고 생각하시는지요. 분위기 좀 보면서 글을 올렸으면 합니다.

moolgum@gmail.com 2011-01-06 17: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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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그 분"이 생각난다는. ㅡㅡ;

박두호 2011-01-06 17:1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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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현회/ 유치하고 저속하게 한예슬 얘기하는 것보다 좀더 범속하고 탁월하고 학구적으로 교양에 관해 담론하는 게 낫다고 생각합니다.

박두호 2011-01-06 17:2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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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이 있느냐 실종됐느냐는 조상의 핏줄과 관련이 있습니다. 예컨대 귀족들은 어릴 적부터 철저하게 교양을 터득합니다. 그러나 만약 자신의 가문의 등급이 저질이라면 어쩔 수 없는 거지요. 드러내지 마십시요.

moolgum@gmail.com 2011-01-06 17:2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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ㅋㅋㅋ.. 가문의 저질 어쩌고... 미친... 말을 말아야지. ㅉㅉㅉㅉ.

박두호 2011-01-06 17:2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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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현희 당신이 쓸 수 있는 말은 고작 욕이지. 언어와 지식 즉 머리에 든 거 없이 'ㅉㅉㅉ'라는 비표준어오 욕설을 써가면서. 그러니까 당신 집안은 그런거야.

김현수 2011-01-06 17:2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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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다닐때 언어학과 비평쪽에 명성이 있는 교수님이 두 분 계셨죠. <br />
언어학 교수님의 강의와 비평교수님의 강의는 극과 극이었습니다.<br />
제 아무리 많이 알고 있고, 교양이 있어도 제대로 전달을 못하면 허당이지요.<br />
좋은 주제이지만 대학원에서나 들을법만 문구와 내용이네요.<br />
좀 더 현실적으로 풀어쓰거나 예를 들었으면 좋았을 것 같습니다.<br />

moolgum@gmail.com 2011-01-06 17:3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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ㅋㅋㅋ. YOU WIN. 고귀한 가문 양반 자제분은 달라도 뭔가 다른 듯. 열심히 하삼. 난 딴거나 하러 이만.

권윤길 2011-01-06 17:3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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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쫌. 현회 할배, 걍 버로우 하고 그만 나와욧~!!

정기섭 2011-01-06 17:4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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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다가 말았습니다만.. 여자를 사귀고 싶어서 죽겠다. 하는 내용인가요??<br />
<br />
하도 어휘가 복잡하고 읽기 어려워서리...<br />
<br />
여자를 사귀는데는 외모도 중요하지만 어떤 매력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br />
<br />
여자 꼬시기는 남자들이 그 동안 이룬것을 걸고 벌이는 한판 승부죠.. 복잡하게 생각하실 것 없습니다.<br />
<br />
운동좀 해서 몸좀 만들면 옷좀 스타일 좋게 입고<br

최인규 2011-01-06 17:5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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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색신공 해 봤는데....gg 해야겠어요

이승규 2011-01-06 18: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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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은 일단 패스하고, 신년을 맞아 은근히 반갑네요..<br />
<br />
치료 잘 하시고,<br />
더욱 건강하신 모습으로 또 뵐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이정태 2011-01-06 18: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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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글은 그 사람을 나타내는 또 하나의 얼굴?이 맞는 것 같습니다.

남두호 2011-01-06 19:2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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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ook.interpark.com/blog/postArticleView.rdo?&blogName=fonysos&listType=L&listSize=15&contentLayoutNo=3&postSkinStyle=FFFFFF&categoryNo=&postNo=1788022<br />
여기 글을 옮긴 것 같네요..<br />

황준승 2011-01-06 23:2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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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분 옛날에 서울대 철학과 가려다 못갔다는 분 아닌가요? 느낌이 비슷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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