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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말했다.
자유게시판 > 상세보기 | 2010-10-07 20:4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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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수   722

제목

[칼럼]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말했다.

글쓴이

박두호 [가입일자 : 2003-12-10]
내용
p.s 저는 외롭고 고독합니다. 그래서 말보로 레드 한 까치를 입에 물고 불을 부칩니다. 이윽고 에스프레소 한 잔을 마십니다. 이재호 선배님은 안녕하신지요? 이재호 선배님과 황보석 아저씨의 안녕을 빌며 이 글을 시작하겠습니다. 제 아이콘은 마음에 드시는지요? 세상의 오서독스한 양식은 모두가 만족스러운 것이지요. 제 자신이 오늘은 참으로 오서독스하다고 느낍니다. 언제나 저에게 논박을 퍼부어주고 싶다면 양주 홀리스커피를 방문해주세요. 아니, 제가 만나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안 그래도 저는 너무나 외로운 존재거든요. 뒤에 중딩 여학생이 있는데 어디 한 번 말 걸어볼까요? 그녀는 너무 아리땁게 생겼습니다. 그럼 여러분 모두 즐거운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나는 여러 지식인들의 전위예술에 관한 것의 중구난방을 제압해 보려했다. 그러나 그것은 상당히 힘든 문제였다. 결국 나의 사념은 혼비백산하여 조각조각 흩어졌고, 그것을 다시 한가운데로 그러모으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뜻이 이합집산하는 것은 개인적인 의지로는 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니 그저 그것을 지켜보는 게 나의 일이었다. 객관적으로 어떤 실체를 잡아놓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이를 다시 풀어주기는 어려운 일이다. 악마는 자기 맘대로 인류에 침입하지만, 그가 다시나가라면 많은 노력이 필요한 법이다.



천지개벽하는 신의 뜻을 보라! 하늘이 우라지게 세상을 향해 하는 경고를 무시하지 마라!어중이떠중이들은 그것을 인지하지 않으려 하지만 필자는 그것을 간과하려 하지 않는다. 의기투합하여 우리는 우리를 사로잡는 실체에 관해 논해보자. 어떤 일에 대해 왈가왈부하기 전에 그것의 근간을 이루는 전체적인 특성을 놓치지 않고, 분석하고 진실 되 게 그것이 생성되고 파멸하는 힘을 지켜보자. 뇌성벽력하는 하늘은 결코 어떤 의미가 있어 그리하는 게 아니다. 거기에는 모종의 힘이 숨어들어 있다. 그것은 우리네 생에 있어서도 매한가지이다. 뜻이 하늘을 이루고, 힘이 대지를 이룬다는 진리를 우리가 새겨들을 때, 그때에 비로소 우리는 자신의 자유의지를 표방하며, 진리의 대안을 이루는 하나의 표상에 대해 자신의 입지를 바로 할 수 있는 것이다. 왁자지껄 떠들지 말 지어다! 심사숙고하여 세상을 그리는 원들의 의미소들을 파악하라. 참으로 많은 노력이 있었다. 여기에 바로 실체의 문제들이며 세상의 근거를 이루는 총체적인 의의가 있는 것이리라. 생사고락을 함께 한 젊은이들의 목숨을 함부로 다루지 않는 게 당신의 신변에도 좋을 것이다. 그들의 생명은 세상의 근거의 일가를 이루고 있다. 그들이 생명을 잃으면서 우리의 네이션(국가)은 꽃피워질 수 있었던 것이다.



저기 훨훨 나는 하얀색 나비를 바라보며 나는 생각한다. 나는 골똘히 생각에 잠겨 한때 교학상장했던 젊은이들의 하얀 꿈을 희구하고 있다. 기승전결했던 그들의 삶을 점철했던 아름다운 혁신들을 느끼며, 나의 오관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삶의 전락을 맛보았던 그 순간들을 고요히 점친다. 아아―― 이다지도 붉게 타오르는 내 마음 깊은 곳의 미묘한 진실을 바라보며 내가 느낄 수 있는 감각의 한계를 뛰어넘어 세계의 끝에 발을 디디고 서 있는 걸 느낀다. 그래, 현실은 중요한 것이지. 현실 만큼 우리를 삼라만상에서 부각시킬 수 있는 것은 없지. 이 답답한 소우주에서 한 개인을 돋보이게 할 수 있는 건 오직 신이 부여한 유일한 어떤 자각의 힘이지! 그 힘은 우리를 관통하는 세계의 빛에 대해 숭고한 생각의 여유를 잠입하게 해 준다. 하늘하늘 거리는 일월성신하는 것들을 바라보며 나는 조잡한 사고(思考)들에서 빠져나와, 즉 이 소우주의 고뇌에서 빠져나와 점차 현대의 이기라고 할 수 있는 정신을 맛본다! 하늘의 세계여! 대지의 세계여! 내 발 밑에 와서 무릎을 꿇고 평상거입하거라! 이미 일찍이 지나치게 세상의 여러 요소들을 두루두루 맛보았던 너희들! 내가 너희들의 오묘한 마성적 힘을 파헤치리라! 그리하여 세계에 다가가고자 하는 너희의 의지의 이성을 관통하면서 그것들이 연계되어 있는 계열들의 심오한 지(知)에 대해 일언반구 하고자 함이라. 어디서나 플라톤적인 실체들이 요소요소마다 정연하게 녹아있는 걸 볼 수 있어서, 관찰자는 단연 그러한 힘들에서 다가오는 방향성의 예정된 힘을 분석할 수 있는 것이거니와 철학자들이 거듭 강조했던 사변이성의 원동력의 지반을 깔끔스럽게 맛 볼 수 있는 것이리라. 각기 하나의 지식은 각기 하나의 이성에 편입되어 있다. 그 정묘한 연역적 구조를 전면에 도식으로 그려보고자 함이 바로 내가 바라는 바요, 그것의 조악성과 지리멸렬한 지연성을 꿰뚫어보고자 하는 게 바로 내가 계략 하는 바라. 어디서나 매콤한 맥주와 독한 담배와 멋들어진 아가씨들을 만나볼 수 있고, 어디서나 아가씨들의 털 난 조개와 털 난 겨드랑이의 냄새를 마셔볼 수 있는 게 바로 이 지상의 지향성이리라. 하여, 나는 여러분에게 종합적인 진리의 체계의 지향성에 대해 설명하고자 한다. 이리하여 지향성의 끝자락에 전개되고 있는 형이상학적인 논설이 곧 여러분이 탐구하고 모색해 볼 수 있는 주제요, 세계의 근원이며 이러저러한 만한 곳의 핵심의 준거이리라.



오늘날 전위예술은 고도로 발전하여 이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것이 되었다. 전위예술이 뜻하는 바는 매우 불가해하여 일반인은 그것의 일면조차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되었다. 우리가 삼위일체에서 자각할 수 있는 뜻은, 성부․성자․성령이라는 세 위격이다. 하나의 위격은 하나를 상보하고, 또 하나의 위격은 다른 위격을 상보한다. 그러한 독보적인 삼위일체의 특성은 우리에게 범신적인 신앙을 창조하게 하였고, 이리하여 이 교의는 세계를 한 바뀌 휘돌아 여러 독창적이고 첨단적인 경향을 에둘러 우리의 앞에 군림하게 된 것이다. 하기야 얼마나 많은 학자들이 과거 신학에 대해 연구하고 그 초자연적이고 초이성적인 힘에 관해 논쟁하고 설파하였는가! 성자들은 자신들이 진실의 중심이자 세계의 총아라고 떠들고 다녔고, 도리어 시민들은 그들이 거짓말쟁이이며 사기꾼이라 폄하하고 그들 중 여자들을 마녀라 칭하면서 십자가에 묶어 불태워 화형시켰다. 이러한 그들의 구별 기준이 현재에 이르러서도 낯설지 않은 개념으로 자리 잡고 있다. 그러한 그들의 빗나간 이탈리안 식 열정에 종점을 찍은 것이 바로 추상예술이다. 피카소는 펜대를 잡고 장대한 예술의 내재성의 장을 펼쳤다. 그것이야말로 명실공히 내적 필연성의 귀착이라 볼 수 있겠다. 피카소는 펜으로 그린 ‘게르니카’에 나오는 구겨진 얼굴의 황소는 이런 모습을 절실히 나타낸다. 피카소가 무슨 의도로 이런 그림을 그렸는 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논란의 여지가 많지만 그가 그린 게르니카에서 무참히 살해된 사람들의 모습은 당시 사회의 불문율을 깨고 전세계의 스페인의 단체적인 슬픔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하기야 피카소는 천재이고 그의 펜은 불멸의 것임이 분명하지만 그의 그림이 반드시 ‘천재적’으로 귀결되는 것은 아닐 테다. 또한 피카소는 왕성한 여성사냥꾼이어서, 그의 페니스에 의해 파멸된 음부들이, 그리고 그 음부에서 떨어진 원숭이들이 얼마나 많을 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 없이 논란 거리가 되고 있다. 인생이라는 장장하고 거시적인 길에 있어서 우리는 많은 질문을 하곤 한다. 거기선 가시적이거나 미시적인 현상들이 일어나며, 그것을 예단하기에 앞서 우리는 많은 난해한 문제에 봉착하곤 한다. 이러한 많은 불가분의 관계에서 우리가 나아가야 하는 걸음은 사뭇 무겁고, 그런 일단은 예상 이외로 복잡할 거외다. 예컨대 사람의 생은 영화처럼 그닥 간단하지도 않거니와 도리어 소설처럼 복잡하지도 않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의 생을 유지하고 걸어가기 위해서는 많은 얼굴을 가진 페르소나가 필요하기도 하고, 그 페르소나를 도구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감수성을 전복시킨 여러 가지 전전의 결과물이 필요하다. 사르트르가 파리의 까페들을 전전했던 것처럼, 마치 우리는 역마살이 붙은 것 같이 여러 좁다란 길을 전전하고 방황한다. 방황하는 많은 무리들은 그들의 생각대로 길을 가는 게 아니라, 여전히 그들의 길을 정립하는 신의 생각에 달려 있다. 신은 우리에게 앙드레 지드가 말했던 ‘좁은 문’을 선사한다. 그 문은 아무나 들어가는 게 아니다. 진정한 신앙심과 희망을 소유하고 있는 자만이, 진정으로 별들을 바라보고 햇빛을 자신의 신성으로 여길 수 있는 자만이 입적할 수 있는 중대하고 영적인 문인 것이다. 그들의 기도는 신에게 전달된다. 그리하여, 그들의 소망도 신들의 왕림에 의하여 이루어지고 정해지고, 완결되어 하나의 성체(聖體)로 재완성된다. 이를테면 사르트르의 작품 ‘구토’를 보라. 거기에는 모종의 슬픔이 결여되어 있다. 그 소설의 주인공 로캉탱은 방황과 여행을 동반하면서 종횡무진 여러 지역을 횡단한다. 그러나 그는 조약돌로 ‘수제비뜨기’를 하다 이내 구토를 느끼게 되고, 그의 이러한 행동은 필연적인 것으로 변용된다. 하기야 로캉탱과 같은 인텔리들은 자신의 노동력으로 하여금 돈을 벌 일이 없다. 그들이 쓰는 돈은 나라나 주변 사람들한테 나오는 법이어서, 그들은 단지 무위도식하며 읽고 싶은 책을 읽으며, 영화를 보며, 글을 쓰며 살면 그만이다. 이러한 로캉탱의 구도(求道)의 피력을 신이 눈치 챘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로캉탱은 삶의 의미를 깨닫고 자신의 애인과 비가 내리는 길을 걷게 된다. 물론 이것은 정말 잘 된 일이다. 로캉탱은 얼마나 외롭게 초라하게 비치는 달을 바라보며 고독한 밤을 지세웠는가? 이리하여, 로캉탱의 정치한 사상은 온 누리에 아울러 퍼지게 되고, 그는 신의 형상과 중첩되어 신의 모습을 띠고 신의 색채로 변모한다. 정령들이 온통 그토록 그의 주위를 둘러싸고 그에게 모종의 권력을 실어준다. 그는 이내 환상과 착란의 세계에 입도하게 되고 이러한 영지를 경험한 그는 환락의 글을 써내려간다.



글의 기묘한 현상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글쓰기의 예술에는 정갈하고 간명한 뜻이 담겨 있다. 그 뜻을 바로 알고 포착하는 젊은이야 말로 그 글에 대해 정확하게 파악한 사람이라 할 만하다. 여간해서 뜻을 드러내지 않는 산문, 산문의 그러한 부정확성이야말로 우리시대에 읽어내야만 할 조악한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다. 우리는 어쨌거나 거대 담론에 대해서 논해봐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바로 시작해보자! 담론에는 어떤 숨은 의미가 담겨 있는지.



플라톤은 자신이 정치에 뜻을 두지 않고 대의를 세웠다고 자부한다. 그는 철학자야말로 국가를 이끌어나가고 사람들을 영도해야 할 유일한 모범 체계라고 확신한다. 그에게는 한 나라의 구조를 세우고 명분을 획득할 사람, 즉 정치가는 오로지 철학자 한 명 뿐이라고 명명하면서 이러한 이론을 밑에 깐다. 한 이야기를 예로 들어보자.



‘당시에 예언가로 알려져 있던 에우티프론과 소크라테스가 종교 행사나 신들에 대한 불경 또는 살인 사건 등을 다루는 관청에서 만나, 서로가 거기에 나타난 까닭을 확인하게 된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옛날의 신들을 믿지 않고 새로운 신들을 만들어 냄으로써 젊은이들을 타락시킨다는 이유로 멜라토스라는 사람이 소송을 한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에 에우티프론이 그건 소크라테스가 자신에게 영적인 것이 때때로 인다고 말하기 때문이라며, 종교와 관련된 혁신을 꾀한다고 해서 하는 그런 소송의 경우에는 다중을 상대로 하는 거짓 진술이 잘 먹혀 들어간다는 것을 멜라토스가 알고서 하는 짓임을 일러 주고서는, 자신이 그곳에 온 것은 친부를 살인 사건으로 고발했기 때문이라고 하며 그 연유를 밝힌다.’



그렇다. 플라톤의 스승 소크라테스는 젊은이들을 거짓된 신들의 세계로 이끌며 그들을 타락으로 빠지게 했다. 그러나 그것은 소크라테스의 원죄가 아니었다. 소크라테스는 새로운 우상을 세움으로써 젊은이들에게 어떠한 혁명을 요구했던 것이다. 그것은 종교적인 것도, 문학적인 것도 아닌 정치적인 것이었다. 그렇다. 소크라테스는 바로 철학자라는 ‘신’ 만이 정치를 선도할 수 있다면서 그들에게 새로운 신을 권면했던 것이리라. 이러한 논지로 말미암아 소크라테스가 얼마나 자기의 열정을 내걸고 젊은이들에게 입지전적인 사상을 심어줬던 가를 파악할 수 있다. 또한 에우티프론은 아버지를 살인마로 고발했는데, 그러한 적개심의 저변에는 그의 당당한 정의심이 불타오르고 있다. 에우티프론은 얼마나 정직하고 정의로운가! 소크라테스는 순간 그의 초이성적인 힘의 아우라를 간파했다. 그리하여 그는 그를 매도하지 않으며 그의 행동을 치켜세운다. 그는 거기서 그의 도의적인 영성을 파악했던 것이리라. 그러면 이어서 예의 이야기를 더 들어보자.



‘자기 집 머슴 하나가 술에 취한 상태에서 다른 가복 한 사람한테 화가 나서는 그의 목을 쳐 죽이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자신의 아버지가 이 머슴의 손발을 묶은 다음 도랑에 내동댕이쳐 놓고서는 아테네로 사람을 보내 그의 처분에 대한 조언을 얻어오게 한다. 그러나 그동안 이 머슴에 대해서는 살인자라 해서 죽든 말든 마음쓰지 않은 탓에, 심부름 간 사람이 돌아오기 전에, 그는 굶주림과 추위 그리고 결박 때문에 죽게 된다. 그런 살인범이 죽게 되었는데 직접 살해하지도 않은 친부를 살인죄로 고발했다고 해서 아버지와 가족들이 자기에 대해 역정을 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식이 아버지를 살인죄로 고발하는 것은 불경한 짓이라 말하고들 있다고 한다.’



에우티프론의 아버지는 사람을 죽였다. 그 대상은 바로 그의 머슴이었다. 그러나 머슴 또한 살인마였다. 그런 살인마를 죽인 사람 또한 살인마가 된다는 게 성립될 수 있는 일일까? 고대 아테네에서는 사람을 죽인 사람이면 누구를 불문하고 ‘살인자’로 기소되었다. 그러니 그의 아버지도 분명 살인마의 자격이 있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우리의 양심에 대고 손을 얹자. 에우티프론의 아버지는 지당하게도 그러한 ‘살인마’의 탈을 쓴 인간이라 할 수 있을까? 답은 ‘아니다.’다. 그가 사람을 결박해서 죽였다 할 지 언정 그의 육체에 도도히 흐르는 역동적인 힘은 기필코 거부할 수 없는 것이리라. 그가 사람을 죽인 죄인이라 할 지라도 만일 죄인 위에 죄인 있다한들 천하 동서고금을 통틀어 주인>머슴일 진대 누가 여기에 대고 반박할진저! 노비는 노비일 뿐 이다. 노비의 낙인을 영원히 가슴에 새기고 살아가야 할 팔자이다. 팔자는 항구적으로 팔자로 상존하는 법, 그 누가 주인에게 살인죄를 묻고 그를 고발하려 든다면, 먼저 그에게 죄가 있는가 물어야 할 것이다. 예수께서 그러셨다. “죄가 없는 사람이 먼저 이 여인을 돌로 치라!” 그리고 아무도 그 여인을 돌로 치지 못했다. 그들은 모두가 대동소이한 죄목을 하나 씩 갖고 있을 테니. 아내 폭행죄, 자식 폭행 죄, 절도, 강간, 살인, 이 모든 것들. 그러니 주인에게 한 번 기회를 줌이 마땅할 것이리라. 우리 모두는 형제이자 죄인이다. 그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되며 우리는 우리의 오류를 서로 보듬어주고 살펴줌이 마땅하다. 이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럼 다음 장으로 넘어가자.



‘그러니 그는 이를 경건함 및 불경함과 관련된 종교적인 문제에 대해 모두가 잘못 알고 있는 탓으로 돌린다.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그가 친부로 하여금 재판을 받도록 함으로써 자신이 불경한 짓을 저지르게 되지 않을까 하여 두려워하는 일도 전혀 없을 정도로 종교적인 문제, 즉 경건한 일들과 불경한 일들에 대해서 ’정확히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지를 묻는다. 이에 그는 만일에 자신이 그런 문제들에 대해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면, 자신은 쓸모없는 사람일 뿐만 아니라 자신이 많은 사람과 다른 점이 없게 될 것이라고 대답한다.’



에우티프론은 자신과 남과 차별성과 상이성이 없다는 것에 두려움을 느낀다. 그 두려움은 불경한 일들에 배후에 있는 심연에서 오는 것이다. 모두가 저만의 자기동일성에 입각하여 자신의 관점을 정립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지층화와 탈지층화, 코드화와 재코드화, 변이와 성립의 과정이 변천되는 것이리라. 에우티프론은 자신이 직면한 윤리적인 관점이 잘못됐다고 크게 느끼고는 소크라테스에게 진정한 피안에로의 윤리적 관점의 올바름에 대해 질의한다. 소크라테스는 그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경건한 것과 불경한 것은 동전의 앞면과 뒷면이라고. 경건함은 불경함으로 순식간에 치환될 수도 있으며 불경함과 대치관계에 있다고. 또한 불경함은 경건함으로 치환되며 이러한 배치 관계야말로 도덕이라는 이름의 동전이 나타내는 비극적인 사실이라고. 그러나 이것은 단지 내 추측일 뿐이다. 소크라테스가 어떻게 그것에 대해 설명했는지는 나도 모른다. 소크라테스는 유럽 사상의 창시자이자 자신이 정점으로 나서고 모든 이를 자신의 후계자 즉 후학으로 만들어버렸다. 이러한 사실이 여러분에게 도움이 될 수도 있고 해가 될 수도 있으리라. 허나, 우리는 소크라테스의 진실성에 관계되어 우리 자신이 직면한 딜레마를 헤쳐 나가야 하며, 소크라테스로 말미암아 세계가 주창하고 있는 삼위일체의 유일신 사상에 방아쇠를 당기고 쏴야 할 것이다. 나는 역겨운 무신론자이다. 모두가 내 이론 앞에서 맥없이 무너진다. 나의 이론이 전지전능한, 그러니까 신보다 더 거시적이고 긴밀하고 연마됐으며 실사구시에 의거하여 총알과 같이 성자들을 쏘아죽이니까 말이다. 나의 이론은 논증되었으며 누구와도 대적할 자가 없다. 당신들도 나와 같이 강한 논리를 가진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범접할 수 없는 신의 세계를 구축하고, 계발하여 한 명의 대가와도 같은 이론을 제기해야 할 터이다. 그것은 바로 전설이다. 하나의 전설이 되라. 그것이 내가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전언이다.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그런 문제에 대해서 그토록 확신을 갖고 있는 에우티프론의 제자가 됨으로써 멜레토스를 상대로 기소 전에 화해를 보도록 할 수 있게 되었으면 하는데, 그럴 수 있도록 먼저 경건함이 도대체 무엇인지를 말해 주기를 청한다. 그래서 자신이 그게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면, 경건함에 대한 무지로 인하여 종교 문제와 관련해서 다시는 무분별한 언행을 하거나 혁신을 꾀하는 일이 없게 될 것임을 그에게 밝히어 보여 줄 수 있을 것이라 해서다.’



소크라테스의 무지는 전적으로 종교 문제의 한 부문, 경건함과 불경함 사이의 모종의 확신에서 기인한다. 이는 모든 인간 윤리의 태동의 발로가 ‘진실을 말함’과 ‘거짓말을 함’ 사이에 있다는 걸 뜻한다. 필자는 거짓말을 입에 달고 사는데 이는 자랑이 아니다. 필자는 누구보다 소설가적인 삶을 살기를 원했다. 그래서 다른 사람 앞에서 다른 이가 되고자 하였다. 필자는 나 자신이 되기보다는 모든 이가 되기를 원했고, 그래서 미래의 근원이 되기를 원했으며, 천재가 되리라고 결심했다. 필자가 다른 이 앞에서 진실을 말하기란 매우 빈번하지 않은 일인데 반해 거짓을 말하기란 껌을 씹기보다도 더 쉽다. 그들은 쉽게 속아 넘어가는 천지 같은 얼간이들이며, 필자의 혀 놀림에 끔뻑 죽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그만 논하기로 하고, 소크라테스의 상황으로 넘어가자. ‘진실을 말함’이란 자신이 겪은 사태에 대해서 하나도 빠짐없이 그 사실만을 언급하는 걸 뜻한다. 그러나 그러기란 쉽지 않다. 예를 들어 고양이가 자신에게 꼬리를 치고 지나갔다고 하자. 그럼 당신은 당신의 애인에게 가서 “나는 고양이를 보았는데, 그 고양이는…저기 그러니까…”라고 할 것이다. 왜냐하면 고양이가 꼬리친 경우를 말하면 당신의 애인이 정색을 하면서 당신의 귀싸대기를 올려 붙일 것이기 때문이리라. 그렇다면 ‘거짓을 말함’이란 어떤 예에 대해 사실을 숨기고 만들어내는 사실 즉 픽션을 말한다는 것이다. 이는 상당히 경멸하고 질시하고 질정해야만 하는 경우이다. 외국인 거짓말쟁이들을 상대도 안 하려 한다. 왜냐하면 그들의 서구문화의 유일신은 결코 ‘거짓말을 함’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여기서 논지를 마치고 소크라테스가 질문한 ‘경건함에 대함’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 ‘경건함’이란 숭고하고 미시적이고 피안적인 것이며, 정적인 것이고 부드럽고 달콤하고 보이지 않는 배후에 가까우며 거칠지 않고 신묘하며 세련되고 무위적인 것이다. 경건함은 조용한 음악이요, 아리따운 아가씨이다. 소크라테스는 경건함을 알고자 했다. 그에게 경건함은 일종의 ‘빛’이었다. 그렇다면 소크라테스라는 선(線)을 따라서 우리는 여행을 해보자. 그 선의 변이의 과정과 발전 과정도 알아보고, 그 선의 조직과 분자구조며 다루는 방법 또한 알아보도록 하자. 소크라테스는 다시는 무분별한 행동이나 혁신을 꾀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모두가 경건함에 대한 무지에 의거한다는 규준을 지킨 채 행위 하는 것들이다. 소크라테스는 진정한 영지주의적인 ‘빛’이 뭔지 알고자 했고, 그러한 앎이 자신에게 무엇을 가져다주는 지도 깨닫고 싶어했다. 그럼 다음 장으로 넘어가자.



‘이에 에우티프론은 바로 자신이 지금 하고 있는 것이, 즉 살인이나 신전 절도 행위 등과 같은 옳지 못한 짓을 저지르는 자를, 그가 부모이건 또는 그 밖의 누구이건, 고소하는 것이 경건함이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불경함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는 신들 중에서 가장 훌륭하고 가장 올바른 제우스가 그의 아버지인 크로노스에 대해서 한 짓을 들어 예증까지 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그런 신화를 위시해서 그 밖에도 신들 사이에 숱한 적대 행위와 싸움이 있었던 것으로 시인들이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런 것들을 그가 정말로 믿는지를 물은 다음, 자신이 ’경건함이 도대체 무엇인지‘를 물었을 때 가르침을 받고자 했던 것은 그런 한두 가지의 개별적인 사례가 아니라, “그것에 의해서 모든 경건한 것이 경건한 것일 수 있는 그 본질적 특성(에이도스)자체”, 즉 불경한 것들이 불경하고 경건한 것들이 경건한 것일 수 있게 하는 그 ’한 가지 특성‘에 대한 것이었음을 거듭 말한다. “그걸 보면서 또한 그걸 본으로 삼고서, 당신이나 다른 누가 행하는 것이 그것과 같은 것이면, 이를 경건한 것이라 말하되, 그것과 같은 것이 아니면, 이는 경건한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게끔”그걸 가르쳐 달라고 거듭 청한다.



소크라테스는 경건한 것의 특질 그 자체에 대해 파악하고 해명하는 작업을 본으로 삼고 그것을 동태적이고 규율적으로 테제하기를 원했다. 그러한 그의 목적의식이 어디에 그 뜻을 교태스럽게 꼬리를 흔들며 그 훈을 두는지는 모르겠지만, 필자는 소크라테스의 그러한 학구적 열정에 심히 동감하는 바이다. 소크라테스는 물리학․자연과학․형이상학․존재철학 모두에 그 기반을 전거하여 자신에 의한, 스스로의 의식에만 제한하여 소우주며 대우주에 관한 모든 것을 해명하려했던 종합철학자이다. 그의 이런 종합적 의식은 부단히 우주 너머의 것, 즉 메타적인 철칙 의식의 도면을 도식으로 소묘하고자 하는 그의 정열을 그대로 보여줌과 동시에 그가 사로잡으려고 했던 시뮬라크르와 이데아의 맞물림의 세계를 나열함으로써 메타적인 원형의 전체적인 측면에 관한 총체성과 합리성․투명성에 대한 일종의 창조적인 사태에의 내달음을 완성하려고 했다. 소크라테스가 경건함의 개별적인 사례들을 묶은 전체적인 의미심한 ‘의의’에 대해 물었을 때, 그리고 ‘불경한 것’이 그것일 수 있게 하는 직설적인 합의성의 완성을 요구했을 때, 에우티프론은 과연 어떤 식으로 그에 대해 해명하였던가? 이제부터 그것에 대해 들어보도록 하자.



‘이에 에우티프론은 “신들한테 ’사랑을 받는 것‘(마음에 드는 것))은 경건하나, 사랑을 받지 못하는 것은 불경하다”고 말한다. 소크라테스는 이제야 자신이 구하던 형태의 대답을 얻었다며, 그를 칭찬한다, 하지만 그가 말한 것이 진실인지 아닌지는 아직 모르겠다며, 그가 말하는 것이 진실된 것임을 마저 설명해 줄 것으로 기대한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신의 사랑을 받는 것과 신의 사랑을 받는 사람은 경건하나, 신의 미움을 사는 것과 신의 미움을 사는 사람은 불경하다”. 이것들은, 경건함과 불경함이 그렇듯, 정반대의 것이다. 그러나 어떤가? “신들은 서로 다투며 의견이 맞지 않아서, 그들 사이에는 적대감까지 있다”고 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무엇에 대한 의견의 불일치가 적대감과 분노를 일으키는가?” 우리가 수와 관련해서 두 수 중에서 어느 쪽이 더 많은지에 대해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해 서로 화를 내고 적대감을 갖게 되었을 경우에는, 계산에 의지하면, 곧 해결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크고 작은 것과 관련된 분쟁에서는 재는 것에 의존하는 것이 해결책일 것이고, 무겁고 가벼운 것과 관련해서는 저울질로 해결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올바른 것과 올바르지 못한 것, 아름다운 것과 추한 것, 그리고 좋은 것과 나쁜 것, 이런 것들에 대해서는 서로 의견이 맞지 않고 충분한 합의도 볼 수 없어서, 우리는 서로 적이 되고 화를 낸다. 이것들과 관련해서는 신들도 그런다고 하지 않는가?’



에우티프론은 결국 자신의 밑천이 바닥을 드러냈다고 느끼고 소크라테스에게 궤변을 늘어놓는다. 그에게는 더 이상 해명할 지적이고 정합적인 계산이 없어서, 그는 궁지에 몰렸으나 나름대로의 계책을 늘어놓는다. 이른바 갑론을박인 것이다. 그는 그만의 논리정연한 감언이설로 소크라테스를 홀리고 그의 귀와 눈을 논박이라는 베일로 가린다. 소크라테스는 에우티프론을 칭찬하지만, 그의 답변의 밑바탕을 이루는 ‘구별 기준의 미분화’에 관해서는 여전히 의문을 가지고 있다. ‘올바른 것과 올바르지 못한 것’, ‘아름다운 것과 추한 것’, ‘좋은 것과 나쁜 것’의 구분의 심오함에 대해서 그는 몸을 떨고 그 이분화된 것의 대비의 순차성의 우선과 나중을 결정하는 심대하고 오묘한 결정에 대해서 에우티프론에게 답을 요구한다. 또 그는 신들을 메타포의 근거의 존립대상으로 결과지어서 그들은 또 어떤가에 대해 질문한다.



‘그러니까. 신들 사이에도 한쪽이 아름답고 좋으며 올바른 것들이라 생각하는 것들은 좋아하되, 그 반대의 것들은 싫어할 것이고, 다른 쪽은 반대로 그럴 것이다. 같은 것들을 두고, 일부의 신들은 올바른 것들이라 믿으나, 다른 일부의 신들은 올바르지 못한 것들이라 믿은 나머지, 서로 다투다가 전쟁까지 치르는 것으로 신화는 전하고 있다. 그래서 같은 것들이 신들한테 사랑을 받기도 하고 미움을 사기도 하니, 신의 사랑을 받는 것과 신의 미움을 받는 것이 같은 것이기도 하다. 결국 이 주장에 의할진대, 동일한 것이 경건하기도 하고 불경하기도 하다. 어떤 한 행위를 두고 사람들도 신들도――만약에 신들이 과연 말다툼을 한다면――한쪽은 올바른 짓이라 할 것이나, 다른 한쪽은 올바르지 못한 짓이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앞에서 내린 경건함과 불경함에 대한 정의를 이제는 고쳐서, “모든 신이 싫어하는(미워하는) 것은 불경하나, 모든 신이 좋아하는(사랑하는) 것은 경건하다”고 규정하고서, 이것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검토해 보기로 한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경건한 것이 신들한테 사랑을 받기 때문에 경건한 것인지를 생각해 볼 것을 그에게 요구하게 되고, 경건하기 때문에 사랑을 받는다는 대답을 그에게서 결국 얻어낸다. 그렇게 되니, ‘신의 사랑을 받는 것’이 ‘경건한 것’도 아니거니와 ‘경건한 것’이 곧 ‘신의 사랑을 받는 것’도 아니다. 둘은 별개의 것이다. 경건한 것은 경건하기 때문에 신의 사랑을 받지, 신의 사랑을 받기 때문에 경건한 것이 아니다. 여기에서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경건함이 도대체 무엇인지를 물었는데, 에우티프론은 그것의 본질을 밝혀 주려고는 하지 않고, 그것과 관련된 어떤 속성, 즉 모든 신한테서 사랑을 받는 것이라는 식으로, 그것이 어떤 상태에 있는 것인지를 말하려 할 뿐이라고 나무라면서, 그것이 무엇인지를 열의를 갖고 말해 달라고 한다. 그러나 그는 제시되는 대답이 자꾸 맴돌 뿐이라며 안타까워한다.’



에우티프론이 틀렸다. 그의 이론이 딜레마에 봉착한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마침내 진실된 이론의 가치체계에 관해 해명하기에 이르렀으며, 에우티프론은 단단하게 논박 당하게 된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로고스와 파토스를 논하면서 그것들의 원동력의 첨점이 되고 있는 ‘열의’에 관해 말한다. 로고스(Logos)는 절대적이고 합리적인 것이라 어떤 경우에라도 반박당하기 어려우며, 도리어 파토스는 영속적이고 고매한 것이라 쉽사리 반박 당한다. 그러나 로고스와 파토스를 양립하여 이항대립 시킨다면, 그 누구도 침범할 수 없고 침투할 수도 없는 절체절명의 심원한 최고도의 동류적인 예술의 세계를 이루리라. 소크라테스의 이론은 참으로 강력하고 원초적이며, 내세우기 이전에 이미 이론이 서 있는 위치의 공무(空無)적인 공간에 혼령으로서 잠식하고 있었거니와, 예의 이론이 설립됨으로써 온갖 지식의 청정의 영역이 과부화되어 생기는 알레고리들의 상투적인 사용의 아수라장에 도달함으로써, 적절하게 이론의 전개를 인증하며, 각개의 사건에 대한 일면화적인 접근이 아니라 다의적인 접근을 시도함으로써 종합적인 지식의 선구자이자 고대지식의 위대한 전승자로서 21세기에 그의 이론은 실로 시의적절하고 모든 이가 문전성시할 정도로 기막힌 무엇이다.



자, 이상으로 필자의 이야기를 끝마치겠다. 정말 숨이 막힐 정도로 열정적인 관조의 순간의 연속이었다. 그럼 다음에 이어서 소크라테스와 에우티프론의 일화를 경험하도록 하고, 여기서 이 글을 마치겠다. 지금까지 읽어주신 독자들께 감사의 뜻을 표하면서 작별인사를 하고자 한다. BY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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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윤 2010-10-07 21:01:52
답글

과연 다 읽을 사람은!?

sutra76@hanmail.net 2010-10-07 21:17:12
답글

ㄴ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translator@hanafos.com 2010-10-08 00:09:04
답글

의미를 파악하며 정독하려니 시간에 &#51922;기는 탓으로 잘 되지 않는데<br />
몇 시간 뒤 일 쉴 때 꼼꼼이 읽어보고 평해줌세.<br />
<br />
그래도 지금까지 읽으면서 초월적 세계를 탐구하려는 열망을 알핏 보기는 했다네.

김태훈 2010-10-08 04:25:25
답글

젊은이들에게 커다란 사상을 심어주는 일은 전혀 나쁘지 않은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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