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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규조토+니트로글리세린
자유게시판 > 상세보기 | 2010-10-05 21:2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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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수   1,055

제목

[칼럼] 규조토+니트로글리세린

글쓴이

박두호 [가입일자 : 2003-12-10]
내용


p.s 이번 칼럼은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좌우지간 열심히 정독해주세요. 그나저나 인터넷으로 책을 구입하려 하는데 아버지 어머니가 자꾸 방해하네요. 정말 미치겠습니다. 제겐 엄청난 양의 책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부모님이 못 사게 하네요. 아 군면제자라서 취직도 못하고. 지나가는 중딩들 삥이나 뜯기도 참 그렇고.



현재 말보로레드 하루 2갑 피고 있습니다. 파이프담배로 전환하려 합니다. 파이프담배 같이 피실 분 계십니까?

























내가 산문이라는 기술의 담론을 써내려가기에 앞서, 불편부당(不偏不黨)한 사실의 견지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바로 우리 ‘인식의 한계’가 불러일으키는 지당성이다. 우리가 어떤 사물이나 관념을 사고할 때, 우리는 곧 머릿속에 그것을 떠올리곤, 말의 보편성을 잊고 만다. 하기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사건의 내용만을 간직하고는, 거기에 참여한 언어의 본질적인 내용을 잊고 마는가? 그러나 그래서는 안 된다. 누구나 일의 사태는 기억하지만, 일이 일어난 계기, 그것이 기도하는 목적, 그것이 선택하는 인간조건의 정합성을 계시하는 언어는 잊고 만다. 어떤 필연적인 목적이 이입하고자 하는 사건의 근원은 필시 연역적인 요소로 점철되어 있다. 우리는 그러한 점철성을 배제해야 하며, 무엇보다 사건이 고려하고 있는 정직한 내적 요소들을 따져봐야 한다. 필자가 거듭거듭 외치는 말이지만, 우리는 사실보다는 사실 뒤에 숨겨진 어둠의 핵심을 따라잡아야 한다. 사실 그것은 어렵다. 정말 난해한 문제이다. 그 문제의 배후에 숨어있는 역설적인 비의와 비애, 규칙적이고 이따금 흐느끼는 지리멸렬한 관조를 사로잡으려면, 우리는 과거의 엿 같은 난제들에 봉착하고, 실패자만의 웃음을 띠고 결국 눈을 감는다. 그러나 보라! 필자의 갸날픈 소견으로는, 이러한 문제들의 근저에 자리 잡고 있는 초개인적인 문제들이며 결핍된 사상들의 비약을 막을 도리가 없다. 하기야 무수한 사상가들이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완벽하게 무궁무진한 사상의 항변은 없다. 사상들이 개진하는 사고(思考)의 조화와 정치한 문장들은 그 자체로선 아무 것도 될 수 없다. 그것이 드러내고 있는 문제의식이, 그리고 ‘다시 나타남’으로써 얼마나 혁신적인 물질적 사물의 상호작용의 상보성의 조합이 성찰되고 있는 지에 대해, 일용지간 이토록 커다란 과오를 품고 있는 지에 대해 논설해보는 것이 하나의 숙제가 되리라. 그리고 나서, 대한민국의 다양하고 열정 있는 젊은이들이 산문을 쓰는 행위에 관해 우리는 이러한 질문을 던질 수 있으리라. “당신은 산문에는 참여했지만 시에는 참여하지 않았소. 당신은 왜 그러한 정열을 가지면서 우리네 삶을 진솔하고 담백하게 언어로써 풀어쓰지 않는 것이오. 차라리 그럴 바에는 공산당에 입당하시오. 그것이 내가 당신에게 할 수 있는 마지막 말이오.”





바야흐로 산문의 시대이다. 시나브로 산문이 운문을 먹어 치워간다. 이러한 현대의 비극을 아는 전문가라면, 그는 함부로 운문을 규준하고 있는 고매하고 숭고한 ‘대상에 대한 지시자로서의 역할이 아니라 대상을 비치는 거울로서’ 행동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이러한 몰도덕성을 우리가 논구하기 앞서, 우리는 그의 행동에 대해 눈여겨봐야한다. 그가 얼마나 괴로웠으면 이런 선택을 했을까? 그가 얼마나 외로웠으면 그가 이러한 선택을 자행했을까. 그러나 그것은 그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바로 여러분의 문제이다. 사정이 이런 이상, 이제부터 여러분의 몰도덕성에 대해 조명해 보겠다. 이런 필자를 탓하지 마시기를!





규조토+니트로글리세린의 혼합을 여기에서 증명해보겠다. 양자는 폭약 즉 다이너마이트를 만드는 재료이다. 여러분은 이른바 폭약과도 같은 존재다. 한 번 입 뻥긋 한 것으로도 수많은 생명을 앗아갈 수 있다. 당신들에게 희생되는 것은 바로 작가이다. 생계가 어려워 고전하는 작가들의 목숨이 당신들의 입에 담보되어 있다. 그러니 입 조심들 하시기를! 얼마나 천문학적인 생명들이 당신들 입에 걸려 있는지 당신들은 모른다. 당신들의 입은 규조토이고 당신들의 혀는 니트로글리세린이다. 그 점을 잊지 마시기를.





자식은 부모를 잡아먹고 큰다. 자식들은 부모의 손과 발, 그들의 입과 귀를 물어뜯는다. 부모세대들은 우리를 위해서 뼈 빠지게 고생하고 그에 대한 응분의 보수도 받지 못한다. 왜냐하면 자식들이 그들의 뼈를 간추려서 땅에 묻기 때문이다. 그들의 눈물이야 말로 우리 시대의 크나큰 과오이며, 우리 시대의 위대한 재산, 우리 시대의 위대한 혁명이다. 우리는 우리 부모세대의 고생을 모르며 자랐다. 그것은 나와 당신들도 마찬가지다. 누가 아는가? 우리 아버지 어머니의 비애의 진수를. 그들이 현실이라는 땅에 발을 디딤으로써 우리는 그걸 양식으로 삼아 커갈 수 있는 인간조건이 형성되는 것이다. 우리 중 그 누가 현실에 땅을 디뎠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자연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이 책임져야 마땅한 부산물인 것이다. 우리는 커간다. 날로날로 말도 못하게 거대하게 커간다. 그럼으로 인해 부모세대가 책임져야 할 과제는 늘어만 간다. 그런 숙제를 풀어갈려면 교사가 필요하다. 총명하고 재기 넘치고 발랄하고 교묘하고 논리정연한 교사가 필요하다. 그것은 ‘혁신의 문제’이지 ‘과거의 문제’가 아니다. 이런 숙제들은 진짜배기이다. 결코 풀기 쉬운 오류들의 집합이 아니다. 이것을 해결하려면 많은 인력과 힘이 필요하다. 그리고 비로소 여러분이 그것을 부모세대 대신 풀기 시작할 때, 거기서, 바로 그 지점에서 새로운 혁신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것을 보라.





너희들 다시금 다가오는 구나, 아물대는 자태들아



일찍이 내 흐릿한 눈앞에 나타났던 너희들,



이번엔 어디 단단히 붙잡도록 해볼까?



내 마음 아직도 그 환상에 집착하고 있는 것일까?



너희들 마구 내달려오는구나! 그럼 좋다. 마음대로 하렴.



운무를 헤치고 나와 내 주위를 에워쌀 때,



너희 무리가 피워내는 마법의 입김으로 해서



나의 가슴, 젊음의 감동으로 떨린다.





너희와 더불어 기뻤던 날들의 영상이 되살아나니,



사랑스런 모습들 무수히 떠오르고,



반쯤 잊혀진 옛이야기 마냥



첫사랑과 우정의 기억이 새삼 새로워지는구나.



다시 아파오는 마음으로 탄식 속에서



미궁 같은 삶의 미로를 더듬으며,



행복을 바라며 아름다운 시절을 보내다가



나보다 먼저 사라져간, 저 선량한 이들을 불러본다.



-괴테, <파우스트>





얼마나 고귀하고 고색창연하고 정묘하며 지고의 기쁨과 사랑이 담긴 헌사시인가! 괴테는 삶을 마감하면서 이걸 썼다. 그의 산문의식은 아직까지 우리들 가슴 속에서 찬연히 빛나고 있다. 그러나 그는 누구를 대상으로 이것을 작성했을까? 그는 누구의 관점에서 이걸 작성했을까? 그것은 바로 그가 사랑하던 사람들, 잊혀져가는 상실의 아픔을 정아한 이야기로 하여금 도약함으로써 우리들 가슴에 호소하는 일종의 시(時)인 것이다. 여기에서는 누가 질문을 받는 것도 질문을 하는 것도 아니다. 시인은 그 자리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물음은 대답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다. 아니 차라리 물음이 그 자체의 대답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한편의 시를 봄으로써 우리는 시인과 함께 동화된다. 이러한 동화가 우리에게 가져오는 일희일비하는 요소들이며 규칙들은 우리가 눈치 채지 못하게 우리 가슴에 스며든다. 그러나 우리의 눈은 시에 고정된다. 시를 응시하는 우리의 눈은 그 누가 보지 못하게 새로움으로 말미암아 가늘게 떨린다. 그 눈의 떨림을 해명하고자 나는 이 자리에 있는 것이다. 비단 우리가 어떤 방향의식으로 전환할 때 그 방향의식에 문제점이 있는 게 아니라 그 방향의식을 인식하고 바라보는 한 인간에 대해 문제가 있는 것이다. 내가 글의 명확성을 기하면서 글을 쓸 때, 내 눈은 내가 쓰는 글에 집중된다. 그러나 글의 정갈한 시사성에 의해서 내 눈알은 흔들린다. 그 눈알은 검고 깊다. 그리고 바로 거기에 하나의 전환이 있는 것이다. 흔들림으로 인해 내 눈알은 대상을 바라본다. 대상이란 바로 글을 귀착하고 글에 얽매여있는 의미이다. 글이란 필시 ‘의미’와 ‘소리’로 나뉜다. 글의 의미를 파악하려면 아닌게아니라 글의 소리를 읽어내야 한다. 그러나 그 소리를 읽기는 여간해서 쉽지가 않다. 그렇다면 우리가 여기에 대해 알아내려면 무엇을 먼저 봐라봐야 하는 것일까? 괴테의 시문을 좀 더 심층적으로 읽어보자.





‘너희들 다시금 다가오는 구나 아물대는 자태들아’



괴테는 자신의 눈앞에서 ‘아물대는’ 어떤 상(像)을 본 것이다. 괴테가 본 ‘사태’는 자기 눈 안에 아로새겨지는 사물들의 부분집합인 것이다. 그것을 ‘자태’라는 시간 영역 안에서 파악되는 동작의 모습들을 일정한 언어형식으로 표시하는 동사의 문법범주로서 나타낸 것이다. 이는 필시 하이데거식 ‘사태’에 들어맞는다. 하이데거는 생동하는 ‘현재’를 봄으로써 결코 사라지지 않는 인간적 실재의 ‘세계내존재’의 구성인물들을 각색해냈다.





‘일찍이 내 흐릿한 눈앞에 나타났던 너희들,’



그의 눈앞은 왜 흐릿했을까. 그것은 그가 늙어 병마를 얻으면서 흐릿해진 시(視)각을, 여느 학자와는 다르게 보존 못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를 들어 그를 탓할 필요는 없으리라. 그의 필생의 대작 <파우스트>의 집필 기간이 60여 년에 걸친 만큼, 그 속에는 작가 괴테의 삶과 세계관, 즉 슈투름 운트 드랑기의 자유분방한 천재성과 그리스적 조화미를 추구한 고전주의 정신은 물론, 80여 년에 이르는 긴 생애의 온갖 체험과 예지가 깃들여 있다.





‘이번엔 어디 단단히 붙잡도록 해볼까?’



이런 움직임의 모습의 총체를 동작상(動作相)이라고도 한다. 넓은 의미로 개별 단어가 지니고 있는 동작의 모습도 상에 포함시키는 일이 있으나, 일반적으로는 동작류(動作類)라 하여 상과는 구별한다. 괴테는 이번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단단히 그들을 붙잡으려는 고군분투를 보여준다. 여기서 말하는 ‘괴테’란, 주인공인 ‘파우스트’를 뜻한다. 그는 세계에 대한 인식을 통해 신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는 자이다.





‘내 마음 아직도 그 환상에 집착하고 있는 것일까?’



환상(幻想)은, 환(幻)+상(想)이다. 여기서 환(幻)이란, 현실적인 기초나 가능성이 없는 헛된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상(想)이란, 시간과 관련된 문법범주라는 점에서 시제(時制)와 유사한 측면도 있다. 그러나 시제가 말하는 시점(時點)을 기준으로 파악되는 지시적(deictic)인 것임에 비하여 상은 외부의 시점과는 관련짓지 않고 동작의 내적 시간 구성을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에 비지시적이라는 차이가 있다.

상은 원래 러시아어 'vid'의 번역어로서, 여러 슬라브어에서 볼 수 있는 동사의 완료형식(perfective)과 비완료형식(imperfective)의 이항대립을 가리키는 말이다.

한국어에도 슬라브어에서와 같이 문법범주로서의 상이 존재하는가에 대해서는 문법학자들의 견해가 엇갈린다. 선어말어미 ‘-었-’에 대해 과거시제를 나타내는 문법 형태소로 보는 견해가 있는 반면 이것을 완료상의 형태소로 보는 견해도 있고, 또 한국어는 시제 범주와 상 범주가 미분화된 것으로 보고 시상(詩相) 범주를 세우는 견해도 있다.

학자에 따라서 한국어의 상은 연결어미와 보조동사의 결합에 의해 표시된다고 보기도 한다. 예를 들면 ‘의자에 앉아 있다’의 ‘-아 있다’는 완료상, ‘책을 읽고 있다’의 ‘-고 있다’는 진행상(progressive), 그리고 ‘좋은 집에 살게 되었다’의 ‘-게 되다’는 예정상(prospective)을 나타내는 언어 형식으로 보는 것이 그것이다. 그렇다면 파우스트가 자신의 마음 속에 아직도=현재적으로 그 환상에 집착하고 있는 것인지 아닌지, 여기서 이루어지는 뚜렷한 독백에 의하면, 다름이아니라 그는 굉장히 열정적으로 도착(倒錯)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여기서 의문문을 사용하여 질문을 하지만 그 질문의 실효는 뒤의 구절에 가서야 밝혀질 것 같다.







‘너희들 마구 내달려오는구나! 그럼 좋다. 마음대로 하렴.’



그는 정신없이 다가오는 그들에게 모종의 냉소를 흘렸다. 그리고 ‘좋다’라고 규정지었다. 또 ‘마음대로 하렴.’이라고 명령했다. 그는 <세계를 한가운데서 통괄하는 힘>을 알고자 했고, 그것을 위해 자연과 인간의 삶을 두루 섭렵한 행동인이다. 괴테는 그를 통해 신과 악마 사이의 쟁점이 한 인간을 통해 어떻게 전개되어 가는가를 보여준다. 그는 초월적 의지와 절망 사이, 삶에 대한 회의와 범신적인 신앙 사이를 오가며 빛과 어둠의 양극성을 모두 체험한다. 그리고 결국은 선을 지향하는 의지로 보다 높은 영역으로의 상승을 이뤄낸다.





‘운무를 헤치고 나와 내 주위를 에워쌀 때,’



구름과 안개를 뚫고 나와 파우스트의 주위를 에워싼 그들, 바로 그의 과거의 여자친구와 막역한 사이의 친구들. 바로 <그때>라는 시점으로 이 시행은 서술되고 있다.





‘너희 무리가 피워내는 마법의 입김으로 해서’

그들의 무리가 마법의 입김을 피워낸다. 그 입김은 일명 Magic이다. 아래 구절을 보면 알겠지만, 그로 인해서 파우스트는 환희에 젖는다.





‘나의 가슴, 젊음의 감동으로 떨린다.’



파우스트의 가슴은 젊음의 감동으로 떨린다. 그의 마음은 아직도 과거에 머무르고 있으며, 그 과거라는 시제가 주는 감동은 그 무엇보다도 역사적이다. 이런 역사의 불투명성이 바로 그가 지적하고자 하는 삶의 근간을 이루는 핵심인 것이다.





‘너희와 더불어 기뻤던 날들의 영상이 되살아나니,‘



파우스트는, 그들과 더불어서 기뻤던 나날들을 비추는 영상(映像)이 직조됨을 느꼈고, 그 영상에 명증성을 기하며 응시한다. 빛의 굴절이나 반사 등에 의하여 이루어진 물체의 상(像)을 또라지게 바라보면서 그는 마침내 흐느낌의 경지까지 올라간다.





‘사랑스런 모습들 무수히 떠오르고,‘



그가 사랑했던 모든 사람들, 즉 이미 잊혀진 많은 사람들, 그리고 상실의 아픔들을 관조하면서, 그 잊혀진 아픔들과 사람들이 무수히 떠오르는 데에 크나큰 놀라움을 느낀다.





‘반쯤 잊혀진 옛이야기 마냥’



앞에서 말했듯이 이것은 잊혀진 모든 것이라고 했다. 그 모든 것은 바로 옛이야기다.

그러나 그것은 반쯤 잊혀졌다고 했다. 왜 그럴까? 왜 반만 잊혀지고 반은 살아 숨 쉬면서 파우스트의 가슴 속에 살아있는 걸까? 이것이 바로 선과 악의 이항대립인가? 그에게 살아 있는 건 선일까, 악일까? 필자는 지레 짐작하기에 앞서, 이것을 좀 더 조명해보려고 한다. 그러니까 성선설과 성악설에 입각하여, 선과 악을 가로지르며 선의 편에서 악을 보거나, 악의 편에서 선을 보는 것이다. 파우스트는 분명 선의 편에서 악을 본 것이리라. 그리하여 그의 눈은 언제나 또렷하고 야무지다. 그럴 것이다.





‘첫사랑과 우정의 기억이 새삼 새로워지는구나.’



그에게 첫사랑은 누구였을까? 그리고 그와 교우 관계를 맺었던 친구들은 모두가 학구적이고 섬세하며 사랑스럽고 진지한 인물들이었을까? 그들의 기억이 새삼 새로워진다면, 만약 그렇다면, 그들 이면을 관통하는 정통적인 사상은 무엇일까? 그것은 이런 게 아니었을까. ‘인생의 출발점에서 시작하는 모든 무리들이여! 우리는 모두가 형제로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형제같이 지내면서 의기투합하고 화합하는 시간을 가져보자,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방황을 거쳐 자기 실현에 이르는 인간성의 승리를 기쁜 마음으로 확인하게 될 것이야!’





‘다시 아파오는 마음으로 탄식 속에서’



그는 다시금 저려오는 마음으로 탄식 안에서 지금을 보낸다. 그의 비애는 지고인 것이거니와 참으로 실로 아련하고 진실되고 파란만장한 것이었다.





‘미궁 같은 삶의 미로를 더듬으며,’



그는 미궁 같은 삶의 미로를 더듬었다. 미궁이란, 밖으로 나가는 문을 찾을 수 없도록 길[通路]이 만들어진 건물로, 그리스의 전설에 나오는 ‘라비린토스’가 그 기원인데, 동물이나 인간의 학습능력을 실험하는 데 사용되고 있다.



삶의 미로(迷路)란, 구불구불 구부러지거나 여러 갈래로 갈라진 샛길이 많아서, 한번 들어가면 쉽사리 나올 수 없게 되었다. 삶이란 게 무던히도 그런 것이다. 한번 들어가면 쉽사리 나올 수 없는 것, 그것이 바로 ‘삶’이다. 또 그것은 맨 안쪽까지 들어갈 수 없도록 만들어진 것인지라, 헷갈리고 복잡다기하게 구축되어져 있다. 종유동(鍾乳洞)과 같은 천연의 미로도 있거니와, 두더지와 같이 미로 모양의 보금자리를 만드는 동물도 있다. 그리스의 전설에 나오는 ‘라비린토스’가 미로의 기원으로, 전설에 의하면 크레타 왕(王) 미노스의 비(妃) 파시파에가 미노타우로스라고 하는 우두인신(牛頭人身)의 괴물을 낳았다. 왕은 신(神)의 계시에 따라 미노타우로스를 안에다 가두기 위해, 명공(名工) 다이달로스에게 통로를 온통 꼬불꼬불하게 만들어 한번 들어가면 나오는 문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는 라비린토스를 만들게 하였다. 그리고 미노스는 이 괴물의 먹이로 아테네로부터, 매년 7인의 소년과 소녀를 각각 보내도록 하였다. 세 번째로 보내진 소년 가운데 영웅 테세우스가 괴물퇴치를 위하여 자진해서 참가하여 미노스의 딸 아리아드네의 호의로 실패를 얻어서, 실 끝을 들어가는 문에다 매어 놓고 그 실을 풀면서 걸어가, 맨 안쪽에 있던 미노타우로스를 죽이고 실을 따라서 교묘하게 빠져 나왔다고 한다. 여기에서 라비린토스는 미궁 또는 미로를 의미하게 되었으며, 그후 유럽에서는 왕궁 등의 통로에 미로를 많이 응용하게 되었다. 영국의 튜더왕조(1485∼1603)에서 스튜어트왕조(1603∼1714)에 이르는 시기에 템스 강가의 사우스워크, 그리니치에 만들어진 것들이 유명하고, 특히 윌리엄 3세가 1690년 건축가 런던 ·바이스 등에게 만들도록 한 햄프턴 코트 궁전 정원에 있는 산울타리로 만들어진 미로는 지금도 그 이름이 알려져 있다. 그 후 미로는 민간에서도 모방하게 되었고, 또 일종의 구경거리로 흥행까지도 하게 되었다. 미로를 푸는 데는 출입문이 하나일 경우, 예를 들면 왼손으로 벽을 만지면서 걸어가면(갈림길에서는 언제든지 왼쪽으로 구부러지게 된다) 원위치에 돌아올 수 있다. 나무를 심어 울타리로 만든 수로(樹路)상의 미로에서는 모든 길을 왕복하게 되지만, 빙빙 돌게 된 길이 있거나 세 갈래 이상 나누어진 길에서는 거치지 않는 부분도 남게 된다. 후자와 같은 복잡한 미궁에서는, 일단 깊이 들어가서 헤매게 되면 앞에서 말한 ‘왼손의 규칙’을 사용해도 일부분을 돌게 될 뿐 나올 수 없게 되는 경우도 있다. 종이 위에 그려진 미로를 풀 때는 세 군데가 둘러싸인 부분을 지워가면 필요한 통로가 남게 된다. 그러나 커다란 미로에서 통로를 정확하게 풀기 위해서는 시행착오학습(試行錯誤學習)을 몇 번이고 거듭해서 기억하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 이런 의미에서 미로는 동물이나 인간의 학습능력을 실험하는 데 사용된다.





‘행복을 바라며 아름다운 시절을 보내다가’



파우스트는 행복을 바랐다. 그가 보낸 아름다운 시절은 극히 찬란하고 천연의 순결한 것이었다. 파우스트의 기행은,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놀라워도 그를 주재하는 신이 보기에는 실로 불결하고 따분한 것이었다. 그가 보낸 과거는 전체적이며 총체적인 하나의 집약체인 것이었는데, 일약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와 같은 것이었다.





‘나보다 먼저 사라져간, 저 선량한 이들을 불러본다.’



파우스트(괴테)는 자기보다 먼저 사라진 선량한 이들에게 심오한 자괴감을 갖고 있었다. 그런 자괴감을 극복하기 위해서, 그는 극구 주위 사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대자보를 갖고 가서 만인에게 펼쳐보였다. ‘보시오! 나보다 먼저 간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이 목록을 들여다보시오! 만약 그러하다면 당신이 언제 갈 것인지는 내가 정하는 게 아니라 신이 상정하는 게 선인이나 악인이나 피차일반이오!’

지금까지 괴테의 서정시를 둘러보았다. 당신이 느낀 점은? 그리고 내가 느낀 점은? 피차일반이다. 하기야 지금까지 논구한 것이 당신의 관점에서는 익히 냉철한 이야기로 들릴지도 모르겠다. 파우스트를 우리의 경지에서 어떻게 파악할 것인가? 만일 우리가 그보다 더 명석하고 판명하다면, 그러니까 우리 사변이성과 구별 기준이 그보다 선명하다면 우리는 여기에 대해 이러저러한 명제를 도출해 낼 수 있을 것이다. 첫째, “파우스트는 혁명적인 천재다.” 그는 신을 자기 내부에서 극복하려고 했고, 그가 당면한 신적인 문제들은 모두가 그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그는 자기의 딜레마를 숙청하고 이내 편안하게 이부자리를 깔은 것이다. 그러나 그의 천재성은 이러한 평상적이고 보수적인 면에 국한되지 않는다. 파우스트가 해명하려고 했던 삶의 문법은 바로 우리가 직면한 진보와 보수 사이의 피 튀기는 전쟁, 그리하여 더 말할 나위도 없이, 더 이상 재론의 여지없이 무너져 내린 38선처럼 견고히 우리 앞에 자리 잡을 어떤 자명성처럼, 우리는 여기에서 어떤 일련의 자가당착처럼 확고한 양가적인 이율배반을 경험할 수 있다. 따라서, 그 이율배반이란 “파우스트는 천재다.”라는 명제에 의거하여 우리가 바로잡을 수 있는 그의 사상과 이념의 축포에 따라 관념적으로 고착되는 우리네 생의 이면에 있다. 그 이면이란 고리타분하거나 시대착오적인 개념에 따라서는 상징화될 수 없는 모종의 정태적인 일퇴하여 양난(딜레마)한 영락한 정념이다. 이러한 정념에 일도양단하여 지극히 내적인 파노라마를 구축한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가 아니겠는가! “파우스트는 천재다.”라는 개념이 우리 이면의 앞면이라면, “그러나 파우스트는 신의 편에 도달하기 전에 영락했다.”라는 개념은 우리 이면의 뒷면이다. 이 동시적인 상승이 곧 이율배반의 원리이며, 우리가 조합하고자/엮고자 하는 낱말들의 총체이다. 둘째, “파우스트는 얼간이다.”라는 두 번째 명제. 이는 우리가 삶에 착안하면서 산출하는 어떤 아이러니컬한 진퇴양난의 결과물이다. 이 결과물은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다. 그것을 해결해나가기 위해선 모종의 아우라가 필요하다. 이 시대의 비극은 즉 이 아우라를 깨지 못하는 데 있다. 이 아우라를 소묘하자면 이렇다. 그것은 녹색 배경을 바탕으로 오른쪽에는 눈알이 있고, 왼쪽에는 숫자 삼을 가리키는 두터운 채색된 손가락들이 있으며 바로 그 아래 중심에 파란색의 발로점이 있다. 그리고 눈알의 아래에는 원들이 두발을 달고 날라다닌다. 여기서 우리가 도출해 낼 수 있는 귀결점은? 내가 소묘한 그림은 아닌게아니라 헤겔의 주저 <정신현상학>의 표지그림이다. 그렇다면 헤겔의 정신현상학이 뜻하는 바는? 다름아니라 헤겔은 ‘절대지’의 구현을 위해, 그 시현을 위해 자신의 모든 지성을 걸고 사투에 자기 한 몸을 바쳤다. 그렇게 탄생한 책이 이른바 그의 주저 <정신현상학>이다. 앞에서 아우라에 대해 말했는데, 나는 다름아니라 헤겔적 아우라를 묘사하고자 한다. 그런즉슨, ‘어떤 아이러니컬한 진퇴양난의 결과물’이 입체적으로 필요시하는 아우라는 무엇일까? 그것은 헤겔이 나타내는 ‘절대지’의 미래의 근원이다. 헤겔에게 철학사라는 것은, 마치 그에게 역사가 프로이센 국가로 귀착되었던 절대이성의 실현을 위해 만들어진 역사였듯이, 절대이성에 대한 인식으로서 헤겔 철학 자신이 탄생하기 위한 전사(前史)일 뿐이었다. 요컨대 헤겔이 말하는 역사철학적인 철학사란 어떤 하나의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며 그것을 준비해간 역사고, 그 과정에 등장하는 모든 사상이란 결국 최종 목적에 등장하게 될 어떤 철학-헤겔 자신의 철학-을 준비하고 예비해간 것으로서만 의미를 가질 뿐이다. 헤겔은 스스로를 종점에 위치시킴으로써 이전의 모든 철학자들을 자신의 출현을 준비한 사람들로 복속시켰다. 바로 말해, 헤겔적 아우라란, ‘절대이성’에 대한 열정과 정열인 것이리라.



우리는 헤겔적 아우라에 대해 알아보았다. 그것이 아이러니컬하며 모든 사상을 진퇴양난으로 밀고 가 종래에 딜레마에 빠지게 만든다는 것도 학습했다. 말이 그러하다면, 파우스트는 명백히 얼간이라 할 수 있는가? 그는 떠돌아다니며 그 어떤 곳에서도 신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한 그가, 마침내 발견한 것은 세계를 관통한 자신의 지(知)였다. 자신이 마련한 사변이성으로서의 철학이, 결국에는 역학적이며 유동적인 편파적 사상을 몰고 와, 그는 비로소 인간 존재의 끝자락에 서게 된다. 그러나 보아라! 우리가 역사에 대해 설파하듯 우리 또한 규조토+니트로글리세린의 화학작용을 피할 수 없다. 우리의 역사는 이미 폭파되었다. 노벨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이제 서야 명제 둘을 여러분에게 소개시킴으로써 얻었던 결실을 걷어가게 되었다. 필자도 물론 잠을 잘 시간을 필요로 한다. 그러니, 상황이 그렇게 되었으니 신도 물론 여기에 참여해야 할 것이다. 당신이 신의 편이든, 인간적 실재의 편이든, 그것은 당신 선택이다. 법전이라는 것이 있고 법은 성문화된 것이니까 아무도 법을 모른다고는 간주되지 않는다. 그러니 법을 어기는 것은 당신의 자유이지만, 어기면 어떤 대가를 치루게 될지 알고 있을 것이다. 이왕 이렇게 된 거(당신과 내가 친해진 것) 좀 더 진정한 교우관계를 나눠보자. 우리는 만인 앞에서 형제다. 우리 모두는 끈끈한 몽골로이드 정신을 가지고 있다. 참으로 애석하지 않은 일이라 할 수 있겠다. "Hey nigga!" 나는 그 흑인에게 외친다. 그러고 나서 그 흑인은 나에게 주먹을 댄다. 나도 주먹을 대고 친다. "Big L Rest In Peace!" 사교성 있는 사람이라면 흑인과도 어울릴 줄 알아야 한다. 그래서 나는 흑인 친구를 무려 두명이나 두고 있다. 그렇다. 이게 바로 삶이다. 이게 바로 우리네 삶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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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두호 2010-10-05 21:2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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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호선배님은 잘 지내시나요? 언제 한번 찾아뵙고 인사드리고 싶습니다. 선배님. 몸조리 잘 하십쇼.

박두호 2010-10-05 21:29:42
답글

황보석 아저씨는 잘 지내시죠? 그런데 댓글을 안 달아주셔서 조금 섭섭했습니다. 언제 한번 댓글 달아주세요. 사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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