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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현재
자유게시판 > 상세보기 | 2010-10-01 16: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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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수   495

제목

[칼럼] 현재

글쓴이

박두호 [가입일자 : 2003-12-10]
내용
p.s 들뢰즈의 저서와 그 분석서들(한국사람이 집필한 것)을 정독했지만 너무 난해하고 어려워 그만뒀습니다. 역시 현대철학은 너무 어렵습니다. 아직 많이 소천한 글입니다. 저에게 필요한 건 독서입니다. 독서를 하고 한달 후에 뵙겠습니다. 한계를 타파하기 위해선 소강상태가 필요합니다. 그럼 모두 즐거운 하루 되세요.





















우리의 사회는 하나의 다양체이다. 아니, 우리가 거기에 빨려 들어가고 다양화된다고 해야 할까? 각기 개인은 일종의 개인성을 갖추고 있고, 그 개인성의 기저(System)에는 ‘기원’과 ‘독창성’이 있다. 만약 내가 언어학자 소쉬르의 책[일반언어학 강의]를 원용하고자 한다면 과연 이 글의 논지의 흐름의 당위성에 어떤 객관적인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까? 소쉬르는 생을 살면서 단 한권의 책만을 저술했다. 아니, 그가 저술한 토막, 토막을 그의 후학들이 하나로 모아 선형적인 집합체를 완성했다고 봐야겠다. 소쉬르 교수는, 그의 강의가 끝나자 마자 자신이 써내려간 강의에 관한 고귀한 내용을 갈기갈기 찢었다고 한다. 그의 이 유일한 저서의 첨점의 주요 핵심은, “기표들의 ‘가치’는 어떤 지시체에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기표들과의 관계에 의해, 다른 기표들과의 차이에 의해 결정된다”이다. 여기서 논하는 지시체는 ‘기의’를 말하는 것이며, 이러한 그의 명제는 결과적으로 우리 삶에서 벌어질 수 있는 여러 사건에 관여하는 의사소통에 대해 불화가 생길 수 있다는 걸 제창하고 있다. 하기야 우리네 삶에서 얼마나 다른 이들과 말로써 전쟁을 벌이는가? 그게 우리 인생이란 게임의 전부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말을 하는 데 엄청난 시간을 소요한다. 가령 부부끼리 집안에 오순도순 앉아 대화를 한다 하자. 그들은 같이 TV를 보지만 사실 TV의 내용을 보는 게 아니라 대화로써 발화되는 ‘표현’의 기교에 더 신경을 쓴다. 여기에 바로 소쉬르가 지목하는 문제의식이 현존한다. 아니, 소쉬르의 말은 신경 쓰지 말자. 그는 이미 간(Gone) 사람이다. 우리가 의식적으로 상정해야 할 것은 소쉬르의 명제의 되풀이가 아니라, 바로 인생에 있어서 선형적 통일성 즉 자기동일성이 파괴되는 과정이다. 이런 자기 동일성은 보통 책-기계로 인해 깨지기 싶다. 혹자는 영화로 인해 깨질지도 모르고 혹자는 게임에 의해 깨질지도 모른다. 선험적인 음악을 듣고 깨어질 수도 있다. 고정관념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어쩌면 자기 동일성은 고정관념이란 총체적인 집합체일지도 모른다. 자기 동일성은 순수하게 내재성의 연쇄로 이어져 있다. 그것은 하나의 선(Line)이다. 자기 동일성은 우리가 살면서 수시로 변화하는 일종의 ‘인생의 연속체의 집합적 표징’이다. 그러하다면, 우리의 자기 동일성은 어느 때 바뀌게 되는 것일까? 그것은 어느 순간 변환/변이되는 개념일까? 내가 설파하고자 하는 내용은, 자기 동일성이란 자기의 정신적 얼굴이며, 그것은 곧 현재요, 그것은 곧 오늘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미래 혹은 더 나아가 인간 개인의 결론, 즉 죽음의 지점까지 이를 수 있다. 그러나 혹자는 죽음이 자기 동일성이 아니라고 반발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자기 존재를 비방하는 것이거니와 자기 실존은 언제나 생명과 함께 해 왔다고 역설하려 들 것이다. 그는 달려들어 나의 면상을 한 대 칠 것이다. 그럼에도 그의 마음 속엔 허무주의가 깃들 것이다. 하기야 그의 삶은 정당하게도 그리고 당위적이게도 리좀에 귀착된다. 그는 촘스키의 ‘나무’ 도식에 바로 자기근거가 있으며 그것이 자기 상(狀)이라고 논파할 것이다. 그의 논지는 한결 선명하고 명정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논박당할 것이다. 나는 말한다. “당신의 기호는 지시대상과 무관해. 당신 몸이 그리는 랑그는 거짓된 몸짓에 불과해. 당신은 허구야. 당신이 살아왔던 삶은 픽션이야. 그러므로 당신이란 기호들의 규칙은 한마디로 우스워. 당신은 여태껏 살아오면서 물질성만을 보증하려 했어. 그것은 크나큰 과오야. 당신 앞에 서 있는 건 생이 아니라 지옥문이야. 그것만은 알아뒀으면 해.” 그리고 나서 그는 곧 정신을 잃을 것이다.



내용과 표현의 층위에서는 언제나 분열이 잇따른다. 현대인은 다만 허허로운 내용을 갖추고 살면서 표현에 자신의 모든 것을 삽입하려든다. 자신이 별 볼일 없는 존재이며 따라서 자기 존재성을 과시하기 위해 예의 방법을 선택한다. 그러한 그는, 비록 변별력과 말을 발화하는 능력은 갖췄지만, 그의 망실된 영혼은 이미 거기에 없다. 그의 군상의 배치에는 여러 복합적인 요소들이 결합되어 있다. 무릇 그가 의미하는 바는 보잘 것 없지만, 그가 한 명의 행위자로서 행동하고자 하는 열정은 무시될 바가 못 된다. 그를 이루고 있는 ‘배치’의 요소들은 자기기만․허식․거짓․독선․자기아집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니까 그라는 배치물의 근간에는 표현만을 중시하는 현대주의의 독선이 있다. 독선이란 인간이라는 지층을 이루고 있는 존립 평면(고른판)이다. 그가 다른 사람과 연결접속 되었을 때 비로소 ‘환상’을 경험하며, 자기를 기만함으로써 ‘주체’성을 확보하며, 허식으로 인해 사람들 사이에서 일종의 내밀한 시뮬라크르를 구축한다. 한 개인의 시뮬라크르엔 개별적 고유 밀도가 있다. 그것은 곧 강도이다. 고유밀도와 강도로 말미암은 이율배반엔 나름대로 지당한 뜻이 있다. 모든 사람이 생각하듯 자기는 자기의 로고스가 가장 넓은 의식지평을 가지고 있고, 가장 광활하고 심대한 정밀성과 교교한 정합성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관통하고 있는 일정한 발견의 논리에 근거한 면면한 유기적 통일성을 갖추고 있다고 여긴다. 허나, 그와 함께 다가오는 의문에 당착하면서 그는 이율배반의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예를 들어, 음운론과 의미론의 교착에서 기호들의 규칙 즉 언어체계 ‘랑그’라는 개념이 다른 명제와 당착하여 분절의 선을 이루고 있다고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교묘하고 공교로운 ‘이율배반’인 셈이다. 언어철학의 지층 즉 그 제반에 우뚝 서 있는 랑그들의 또 다른 명제와 이항을 이룸으로써, 대립이 정당한 당위성을 제반으로 하여, 랑그의 자의성은 불행히도 탈지층화에 빠진다. 그 양가적 부유(浮游)현상은 어떤 의미로도 그것을 정당화하는 일회적 이중성을 숨길 수 없다. 또 다른 예를 들어 보자. 우리 모두는 남성과 여성이라는 페르소나를 덮어 쓰고 있다. 남성은 페니스를, 여성은 음부를 소유하고 있다. 페니스가 음부에 연결접속 될 때 남녀 각각은 섹스기계로 변신한다. 그러나 남성은 어렸을 때 정자가 결여되어 있다. 반면 여성은 4살이 되면 난자를 갖추게 된다. 그래서 어린 소녀는 늙은 남성들에게 그다지도 성욕의 대상이 되는 것이며, 반면 늙은 여성은 어린 소년을 노리지 않게 된다. 왜냐하면 여성은 50살이 넘어가면서 ‘폐경’이 오게 되거니와 남성은 70살 까지 정자를 갖추고 있어 왕성한 성욕을 평생 유지하게 되기 때문이다. 앞에서 필설한 어린아이들의 성과 뒤에서 설명한 어른들의 성, 이 둘이 양립하여 이율배반의 일가를 이루게 되며, 이것은 칸트적 ‘이율배반’의 개념이라기 보다는 아리스토텔레스적 ‘이율배반’이다. 그러나 위의 랑그와 아래의 페르소나의 실례가 모두 이율배반에 귀속하게 된다면, 우리는 여기서 각각의 지층이 탈지층화 되는 과정을 조망하면서 이 두 가지 배치에 여러 가지 속성적 명제을 부여할 수 있다. 첫째, 수많은 ‘대상’이 배치물이라는 이름의 큰 그림 속에 들어있으며, 주체가 되는 대상은 그 모든 것이다. 거기에는 주연도 없고 엑스트라도 없다. 하물며 배경조차도 연속적인 연쇄를 보증하는 하나의 ‘대상’이다. 둘째, 큰 그림은 하나의 ‘장(場)’이 아니다. 그것은 이른바 산이다. 이를테면 큰 그림은 외재성과 내재성을 동시에 보유하고 있다. 그러나 외재성과 내재성은 공시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터이다. 큰 그림의 외재성은 그것이 종이와 물감으로 중첩된 음운론적인 것이며, 내재성은 의미론적인 것이다. 근데 왜 하필 이 두 가지가 동시에 공존할 수 없는 소위 ‘공시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는 걸까? 이는 바로 인간이 그림을 순수하게 바라보지 않기 때문이다. 큰 그림의 즉 한 회화의 객관적 운명에 그 그림을 소묘한 화가는 아무런 영향을 미칠 수 없다. 여기서 ‘객관적 운명’이란 바로 그 그림의 즉물적 가치를 말하는 것이다. 그것이 경매로 넘어가서 어떤 가격에 팔릴지, 그리고 그것이 어느 유명 건물에 전시될 지는 아무도 갑자기 판단 내릴 수 없는 복잡 미묘한 것이며 예언 불가한 것이며 예측 불가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이중의 운명을 겪는 큰 그림이 시간의 흐름 속에서 계속 움직이면서 어떤 ‘가치’를 부여받게 될지(주관적 운명)는 숙고해볼 수 있을 것이다.



한 개인의 삶에 있어서 그는 정신없는 수많은 도덕적 이행을 경험할 것이다. 그러나 그 이행이 바로 진실되다고 느낄 때, 그는 거기에서 어찌할 수 없는 모순과 일련의 사고(思考)의 분열증을 경험할 것이다. 왜 우리가 다수의 ‘사건’과 ‘사태’에 당도하면서 이러한 미스터리한 희화적 해후를 맞이하는 것일까? 거기에는 여러 가지 복합 미묘한 이유가 있다. 그 해후 속에는 시의적절한 생성과 파괴의 순차적인 과정의 논리가 숨겨져 있다. 이 논리란 무엇인가. 이 논리의 구조를 귀납적으로 관찰하자면 우리는 여기서 여러 가지 해답을 모색해 낼 수 있으리라 본다. 이 논리의 근저에는 바로 사람과 사람이 교류하고 소통하면서 일구어내는 역사적인 형태 즉 양식이 있다. 이를테면 몇몇 사람들은 집에 거대한 서재를 갖추고 있으면서도 굳이 까페에 나와서 글을 쓴다. 왜 그가 그러한 엉뚱한 짓을 할까? 바로 나와 같은 경우다. 나는 책을 무조건 사서 본다. 그리고 영악하게도 교보문고에서 책이 때가 탈 때까지 둘러본 후 인터파크에서 적립금이랑 쿠폰을 이용하여 각종 할인된 양서들을 사서 본다. 그러하나, 나는 다독가라고 할 수 없다. 오히려 나는 책을 읽기를 좋아하기보다는 책을 소유하는 것을 값지게 여기는 사람이다. 내 서재에는 셀 수 없을 정도로 철학서와 사상서․문학서들이 밀집되어 있다. 거기서 내가 읽은 것은 100권 채 안 된다. 지금의 필력이 받쳐주는 이유는 내가 고등학생 때 수업을 도외시하고 혼자서 독학으로 글을 수없이 써내려갔기 때문이다. 독자적이고 자의적인 철학적 글쓰기는 내게 천문학적인 도움을 주었다. 이것은 명실 공히 들뢰즈적 ‘리좀’의 결과이다. ‘나무’와 달리 중심뿌리가 없는 이러한 정신적 천착/착안들은 복합적이고 계산 불가한, 도를 지나친 해석을 개입시켜서 외려 일을 망칠 번한 전과를 가지고 있는 내가 도구적으로 사용해도 가히 인간의 한계를 예고하는 그러한 묵시록적인 건투가 된 것이다. 그렇다고 리좀이 무조건 인간의 한계를 만천하에 드러내어 우리를 신의 저켠의 배후에 밀어넣는 것은 아니다. ‘신의 저켠의 배후’란 소위 신의 어둠성을 나타낸다. 신은 우리를 죽음의 편에 밀어 넣으려고 하고 자신은 영생을 가졌다. 그는 역설적인 거짓말쟁이에 사탄보다 더 조악한 악마이다. 인간이 한계에 봉착할 때마다 그러한 어둠의 세계의 현현을 경험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리좀은 과연 조악한 것일까? 들뢰즈는 6층 자기 집에서 투신자살함으로써 리좀을 역사상 가장 의미심장한 구조물이 되게 했다. 그의 비보를 들은 모두가 그의 죽음을 슬퍼했다. 그리고 리좀이라는 철학적 관념에 대해 배우고자 노력했는데, 그의 저서들이 무슨 말인지도 잘 모르겠는데 알아볼 방도마저 여의치 않거니와 ‘불친절한 대목들과=압축한 대목들과’ 난해함에 기가 질려 결국에는 포기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의 후학들이 살아남아 그것을 명백히 포스트모더니즘의 효시로 세계 철학사에 점철하였다.



말이 조금 샜는데(나의 선배 들뢰즈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하다가) 내가 까페에서 무거운 양서들을 가방에 넣어서 자전거를 타고, 집에서 10분 거리의 까페까지 가는 이유는 이렇다. 첫째는 내가 외롭기 때문이요, 둘째는 글쓰기와 독서의 지(知)적성을 과시해 여자를 꼬시기 위함이다. 나의 스승 사르트르도 프랑스의 여러 까페를 전전하며 철학의 글쓰기를 성취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글을 쓰는 이유가 이른바 여자를 꼬시기 위함이라고 에둘러댔다. 그렇다면 그 에두른 지점에서 더 멀리 나아가 그는 어떤 전위적인 목적을, 자신의 글쓰기방식에 도입하여 그 지독한, 자명한 논리학으로 말미암아 또 다른 방법론을 전개하기에 이르렀는가! 사르트르, 그의 백미는 무엇보다 오르가논한 글쓰기에 있다. 그의 글에는 수미일관하게 영지주의적 오르가논이 면면히 흐른다. 그것은 집에서는 발명돼지가 않는다. 그것은 바로 까페에서만 발정나는 것이다. 그러니까 ‘까페에서 글쓰려는 일련의 시도’가 앞에서 설명한 ‘해후의 논리’의 실체이다. 생성과 논리의 단자가 이합집산하는 것은, 즉 우리가 도덕적 이행을 실천하는 것은 이르자면, 우리 자신이 바로 하나 되는 둘이기 때문이다. 자세히 말해, <이합집산=하나 되는 둘>이다. 이것은 한 개가 둘로 나뉘는 이중분절 즉 새로운 생성의 논리이다. 들뢰즈는 어떻게 생각할 지 모르지만 쉽게 말해서 한 인간이 거울을 들여다보면 거울의 나와, 거울에 반영되는 내가 있다. 그것은 ‘하나 되는 둘’이다. 도덕적 이행의 과정을 거침으로써 하나의 실체는 둘이 된다. 반면 파괴의 측면에서 보자면 이 역시 합당하다고 봐야 한다. 하나가 둘로 갈라짐으로써 그는 양가적으로 쪼개지기 때문에 그것 역시 ‘파괴’이기 때문이다.



각설하고, 우리 사회가 다양체이든 서구의 로고스가 세상에서 가장 이성적인 관념이든, 칸트라는 존재와 칸트가 재정립한 관념이 ‘이율배반’이 그렇게 눈부시든, 우리의 ‘도덕적 이행’이 ‘해후의 논리’와 얼만큼 관여되어 있든 아니든, 그리고 우리가 마음에 맞는 남자친구나 여자친구를 만나든, 그렇게 해서 종래에 아이도 낳고 오순도순 잘 살아가든 아니든, 모든 걸 차치하고 우리는 마침내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우리는 자식을 위한 하나의 다리이다. 그리고 또 그 자식은 또 하나의 다리가 될 것이다. 다리, 다리, 다리, 다리 그리고 인류…. 인간실존의 실재는 바로 우리가 삶에서 어떤 관심을 가지고 어떤 방향의식으로 사유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우리는 한때는 움츠려 들지라도 결국에는 쾌활해지며 즐겁게 노래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죽음은 우리 앞에 포석처럼 놓여져 있다. 우리의 결과는 ‘죽음’이다. 모두가 죽는다. 아무리 부자라도, 아무리 아름다워도, 아무리 친구와 자식이 많아도! 죽음은 우리 모두가 귀착하는 결과인 것이다. 필자는 죽기 싫다. 나는 죽을 수 없다. 이래선 안 된다! 죽음을 방해하는 어떤 과학이 나와야 한다. 이미 많은 것이 나왔지만 영생을 보장하는 것은 여태껏 없었다. 우리는 영생을 누려야 한다.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다 모두들! 모두들 자지에서 방울소리 나게 튀어나와라! 자지가 바로 생명이니!



그래서 나는 아이를 만들기를 원하는 것이다. 인간은 생산해야 한다. 인류는 팽창되어야 한다. 죽음 앞에서 모두가 침묵을 지키지만 한 사람은 말해야 한다. 죽음이 얼마나 우리를 무위로 이끌고 죽음이 얼마나 우리를 무정과 공무(空無)화한 세계로 이끄는지! 너무나 고통스럽다. 도저히 죽음을 극복해낼 어떠한 방법론도 찾기 어렵다. 내가 영생을 유지하는 방법에 접근하여 전인류에 그것을 제시하고 싶다. 그것이 내 유일한 꿈이다. 어떻게 하면 인간불멸을 유지할 수 있을까? 여기저기 찾아보고 여기저기 둘러보아도 도저히 해답이 없다. 그리하여, 내가 목도하는 여러 신의 현현은 극히 애석한 것이다. 그렇거니와, 내가 모색하고 정밀하게 연역적으로 접근하여 생성한 증명의 논리도 모두 헛된 것이다. 어떻게 하면 진정한 사회를, 그 다양체를 승화시켜 우주라는 무한세계에 있어 명시시킬 수 있는 것일까?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도다. 그러나 난 안다. 인간의 지식이 인류를 순차적으로 거쳐 인류의 끝자락까지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을! 인간 삶에 있어서 지식만이, 예술만이 하늘의 별처럼 영원히 빛날 따름일 것이다. 그리고 나는 말하려 한다. 그는 말하려 한다. 그가 바로 여기 있음을. 그는 단지 현재를 살아가려 함이다. 현재! 현재!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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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훈 2010-10-01 19: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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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res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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