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페이지로 시작페이지로
즐겨찾기추가 즐겨찾기추가
로그인 회원가입 | 아이디찾기 | 비밀번호찾기 | 장바구니 모바일모드
홈으로 와싸다닷컴 일반 상세보기

트위터로 보내기 미투데이로 보내기 요즘으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수필] 이 글을 크리스탈오디오 김창섭 사장님께 바칩니다.
자유게시판 > 상세보기 | 2010-09-25 21:45:23
추천수 0
조회수   1,161

제목

[수필] 이 글을 크리스탈오디오 김창섭 사장님께 바칩니다.

글쓴이

박두호 [가입일자 : 2003-12-10]
내용
-이 글을 크리스탈 오디오 김창섭 사장님께 바칩니다. 회사 번영하셔서 꼭 한국 최고의 오디오 회사로 변모시키세요!







p.s 인생이라는 총체적인 관점의 어떤 부분에서, 부단히 순환되는 순서의 도상에서 어떻게 전회해야 만족할 수 있는 걸까요. 그러나 이 비의가, 이 비만족성이 정신분열증이나 우울증 때문에 오는 것은 아닙니다. 소위 매너리즘과 결부된 건 절대 아닙니다.

저는 최근에 이르러 현시적인 목표가 생겼습니다. 대학 가려고 수능공부를 하루에 4시간 정도 하고 있습니다. 특히 제 수학공부이론은 이렇습니다. 이를테면 암기식 적 문제 풀이보다 어떤 문제의 원리와 개념을 선이해(Preunderstanding)라는 준거적 도구를 사용하여, 다양한 명제 아래서 경험하고 판단하는 것, 그러니까 논리파악의 색안경으로 분석하고, 그러다 보면 직관적으로 메타적인 피안에의 수학능력이 설계될 거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학문을 목표로 하는 수학공부이지만 거기다가 순발력을 갖춰서 수능에 대비하는 진짜배기, 기술적 지반의 공부이지요.





영어는 3등급 나왔고(보통 수준인거죠. 그래도 옛날에 학원 다니면서 문법·단어 노가다 한 게 큰 도움이 됐습니다. 국어는 1등급 맞았습니다.(자랑 아닙니다. ^^) 근데 수학은 맨 나중 등급, 그러니까 거의 전국 수준에서 최하위가 나왔습니다. 이건 개인 과외도 했는데 왜 그런지 모르겠네요. 제가 수학에 많이 약합니다. 횡설수설하자면, 서울대 철학과를 총 평균 3등급에 지원해서 붙은 사례가 최근에 몇몇 있더군요. 그러나 그 사람은 분명 수시지원일거고, 아마 특기생이겠죠? 저는 고등학교 자퇴 후 검정고시 본 거라 무조건 정시로 가야 합니다. 아마 올1등급 나와야겠죠? 4년 재수할 생각입니다. 거기 제가 가르침 받고자 하는 교수님(EBS 철학 강의에 제일 자주 나오시는 분입니다)때문에, 그 사람 제자가 될 생각으로 꼭 그 대학에 가려 합니다.







-그 교수님의 전공분야인 J.P사르트르를 이어받아 전공하고 싶습니다. 사르트르는 딱 제 롤 모델입니다. 아이를 안 낳고 살았고, 인생에서 우리가 신경써야 하는 시나브로의 흐름에 국한하지 않음으로써 자아실현을 이룩했고, 계약결혼으로 말미암아 핵가족을 초월한 혁명적인 제도를 제시함으로써, 진부한 결혼제도에 반하여 새로운 역설적 의식 지평을 열었고, 사회주의적 이상에 따라 노벨상도 거부했으며(신념에 따라 사는 인간이죠. 신념 하나만으로 최고의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철학적으로는 자기세대와 동류의 철학자인 메를로-퐁티보다 못하지만, 사실 퐁티보다 문장력에서는 비견할 수 없을 정도로 앞선 사람이고(문학이란 문학인가? 저서를 보시면 알겠지만, 프랑스 지성의 최고봉이라는 수사가 부족하지 않는 사르트르의 문장력은 가히 역대 최고였습니다. 대부분의 철학자들이 문장력에 문학성이 떨어지는 데 비하여, 철학책에 문학성을 중요시하는 프랑스 철학의 거목인 그는, 명백히 저의 취향에 맞아떨어지는 <문학적 철학>을 개진해왔습니다) 문학적인 면에선 그의 연인 보부와르보다 떨어졌지만, 총체적인 ‘학문 일반’에서 그를 대적할 자는 앞으로도 없을 것입니다.









그는, 60세 이후에 <변증법적 이성 비판>이라는 2500페이지의 대 철학서를 남겼거니와, 문학과 철학과 이론서와 비평과 문예잡지를 아울러 다면적이고 인문학의 완성을 이룩한 하나의 표상적인 인물입니다. 그리고 각종 사회투쟁에 광적으로 참여함으로써(운동가들의 기준에서 보면 당연한 것이겠지만, 저는 사회투쟁에 참여하고 싶지는 않네요.) 행동하는 지성임을 과시했습니다.





아울러 마지막에는 휴머니즘에 경도되어 자기 눈알을 눈먼 장님소년에게 기증하려고 한 사례들은 정말 제가 걸어야 할 길의 전범을 보여줍니다.





저도 80세까지 학문하면서 기념비적인 철학서(특히 양적으로 3000페이지 이상의-그를 뛰어 넘고 싶습니다.)를 그 어떤 철학자보다 내고 싶습니다.





알아보니 서울대 철학과 컷은 무지 높다고 하네요.(보통 다른 대학 철학과는 경영학과랑 큰 차이가 나는데 비해) 그래서 제가 이 대학의 철학과를 선택하려는 것입니다. 학구적 전통에 있어서 매우 유구한 일종의 클럽이기 때문입니다. 아마 도쿄대 이상으로 전문적일 겁니다.





저는 혼자서 철학을 독학하기가 너무 난해하여, 저를 이끌어줄 교수님을 만나기 위해, 제 정신적 지주가 될 사람 즉 스승을 찾기 위한 목적 하나만으로 대학을 가려고 합니다. 지금까지 그릇된 인생을 살았지만, 이제는 제가 가야 할 길을 열정적으로 걸어갈 타당한 대의명분이 생겼습니다. 정말 학문을 평생 한 사람에게 가르침을 얻고 싶습니다. 제 스승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2년 전에 하루 4시간 씩 부용산이라는 뒷산에서 등산을 한 적 있습니다. 등산로를 따라서 간 게 아니라 길 없는 곳만 다녔습니다. 그 과정에서 빨간색 뱀도 2차례 봤고 노루새끼도 한 마리 봤습니다. 산이라는 거 초기에만 힘들지 중독되면 거기서 빠져나오지 못합니다. 깨달음을 얻으려면 산으로(길 없는 곳으로) 가시길 권합니다. 산을 타는 과정에서(운동으로 인해 뇌혈류가 급격하게 확장된 건지 아니면 발의 혈관이 Spark up해서 전전두엽과 전두엽이 자극받아서 그런 건지 끊임없이 깨달음이 얻어지더라구요. 산 정상에서 맛보는 태양의 정열성은 정말 장관입니다.







저는 운 좋게도 아포스테리오리한 철학 관념들, 예를 들면 내안에 ‘신’이 있다라던가 초월론적 의미에서의 ‘신’같은 개념, 그리고 자기동일성의 원리와 극복, 헤겔의 변증법 같은 건 모두 독자적으로 깨달았습니다. 이게 후설이 말하는 본질직관일까요? 헤겔 책을 읽지 않고 헤겔의 변증법의 논리를 깨달은 게 저는 신기하기만 합니다. 사실 헤겔의 변증법은 복잡한 건 아닙니다. 다른 원리는 산을 타면서 깨달았고, 변증법은 제 사유로 완성된 게 아니라 철학적 글쓰기(하이데거식의)로 몇몇 단어의 연결성을 계산하다가 변증법적 도식이 완성되더군요.







그럼 다시 서두의 해명으로 돌아가 봅시다. 제가 제도권 공부를 하는 이유는 수학 하나 때문입니다. 데카르트나 버트런트 러셀처럼 수학을 철학에 절대적으로 도입시키고 싶습니다. 저는 비록 논리학의 측면에서는 덜떨어진 사람이지만 정말 학문을 사랑합니다. 제 글을 읽어보시면 알겠지만 아귀가 안 맞고 중심적 문제의식이 동분서주하는 걸 발견할 것입니다. 앞으로는 글마다 경어체를 쓰겠습니다. 그동안 어르신들에게 실례 많았습니다. 제 아버지뻘 되는 분들께 너무 경솔하게 굴었습니다. 다만 제 고뇌를 풀어쓴 글이 그나마 어르신들에게 눈요기 감이라도 된다면, 만약 그렇다면, 정말 사죄를 드릴 수 있겠죠.









- Part 1



근래에 들어 인터파크 독서코너에서 구입한 많은 학술서 들을, 집중이 안 돼 읽지도 못하고 쟁겨두고 있다. 나의 어머니는 소싯적 문학에 있어서는 독서광이었는데, 당시 번역에 오류가 많고 제대로 된 번역본이 안 나와 있는 상태에서 읽은지라 내가 읽은 문학과는 많은 상반된 면을 보인다. 그러니까 어머니가 읽어본 문학들(예를 들면 소세키의 마음이라 던지, 앙드레지드의 좁은 문이라 던지, 사르트르의 구토라 던지,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게츠비와 같이)과, 수없는 개정을 거쳐 내가 읽은 최신 번역본은, 그 내용이나 그 길이와 정보량에서 많은 차이가 있을 것이다. 당시 우리 학계가 발달하지 않았을 때는 책이 굉장히 비쌌고, 그 가격에 비해 번역은 지극히 형편없었다. 기술적인 접근에서 턱없이 부족한 글들, 유학파들은 전무했고 오로지 골방에서만 일본원서를 대반 베낀 모방 번역들, 이른바 중요한 핵심을 잘라먹은 글(예를 들어 현재 들뢰즈의 초기서적 중 몇 가지가 무려 절반을 잘라 먹었다, 문학서적 중 메이저 회사라 인정받는 곳들도 번역의 문제에 있어 상당한 시차를 보이고 있다)들이 많다. 정품 원전를 번역하면 현재 나온 책들이 두 배는 굵어져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번역은 곧 반역이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현재 요즘 학계의 규모를 볼 때 더 이상 글을 잘라먹고 왜곡하는 경우는 극히 없을 것이다. 내 생각에 옛날 서적들은 안 읽는 편이 낫다. 모두에게 최신 원전 번역본만 사서 골라 읽으라고 권면하고 싶다.





삶이 너무 고통스럽다. 죽고 싶은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그러나 곧 차도를 보이리라고 생기며 희망을 응시하고 있다. 월요일부터 다시 대학병원에서 치료받는다. 아마도 지금보다는 엄청 좋아지리라 생각한다.





나의 어머니는 세상 그 누구보다 훌륭하고 속이 깊은 사람이다. 30대까지 공무원으로 일하시다가 결혼 하고나서 전업주부로 탈바꿈했다. 그러나 집안에 마가 껴서, 아니 순전히 아버지의 도박 중독에 기인하겠지만. 내 아버지는 지하철운전사인데 당시 노조 때문에 데모에 가담했다가 짤릴 번했다. 나의 아버지는 솔직히 말해 소인배다. 나의 어머니와 비교해서는 정말 형편없는 사람이다. 허황에 가득 차 있고 평생 주식에 헤어나지 못하다가 할머니의 노후자금이자 전 재산인 6천만원을 날려먹었고 곧이어 퇴직금인 1억 2천을, 40대 말에 날려버렸다, 현재 그리고 빚이 거반 있다) 승진도 못하고 집에서 막걸리(다만 와인이나 양주를 안 마셔서 다행이다)만 마시다가 자기 인생이 억울하면 담배 재떨이도 던지고 유리창도 깨부신다. 주위 사람들은 아버지의 직장이 현재의 부정적일 만치 유동적인 사회에서는 엘리트들도 못 들어가는 직장이라면서 치켜세우곤 한다. 그러나 이 반공무원생활은 지독한 매너리즘을 선사하는가 보다. 내가 생각하기에 직장동료들과 진정한 우정을 맺기란 어려울 듯 싶다. 직장을 다녀보지 못해 자세한 개인적 사항은 모르지만, 최소한 내가 듣기로 직장동료는 겨우 술친구에 불과할 뿐이다. 한 개인이 술친구를 만드는 과정은 곧 인간 퇴조를 향한 지름길이라고 생각한다.





하여튼 난 나의 아버지의 존재를 부정하고 싶다. 아버지가 만든 빚을 갚느라 어머니께서는 54살에 마트에서 힘겹게 하루 종일 일하신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건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이다. 난 정신병 때문에 군대도 전면 면제되었다. 아마 이 때문에 나중에 직장에 들어가는 데 큰 차질을 빚으리라. 솔직히 말해서 직장 잡는 건 포기했다. 나 같은 군 면제자는 중소기업에서도 절대 받지 않으리라. 게다가 정신과 병력도 조사하면 다 나올 것이리라.





솔직히 말해서 난 돈 욕심도 여자 욕심도 없다. 지금 대학생 나이인 내가 섹스도 한 번 해보지 않았다. 몇 안 되는(학교에서도 교우관계가 거의 없었다) 내 친구들은 마사지방에서, 여자친구와 함께 해봤단다. 그러나 꼭 종족을 번식시킬 필요가 있겠는가? 섹스는 분명 좋은 것일 테지만 난 평생 안 해도 괘념치 않을 것이다. 몸이 아파서 성욕이 없는 것일까? 근데 어떤 학자의 말에 의하면, 원초적인 쾌감을 이용하지 않으면 더 높은 차원의 사고(思考)가 가능하다고 한다. 뇌의 본능적 영역을 쓰지 않고 전두엽을 사용하면 더 강한 뇌혈류 증가를 맞볼 수 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도 학생적에 사랑해보지 않은 건 아니다. 짝사랑을 한번 한 적이 있었는데 소극적이어서 고백도 못하고, 결국 정말 괴로운 시간들이 흘러 잊혀지게 되었다.





나는 정말 글을 쓰는 인생을 살고 싶고, 추상적인 관념에 빠져 새로운 법칙을 발견하는 일이 행복하다 못해 그 두뇌의 스피디하면서 정교해지는 쾌락, 모종의 카타르시스를 멈추고 싶지 않다.





대부분의 작가들은 소주 한 병 마시고 싶은 것도 못 마신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작가를 한다는 것은 길거리 돌아다니는 노숙자가 되겠다고 선언하는 것과도 같다. 물론 미국도 다를 바는 없다. 그들에겐 선생으로 입사하여 시간 나는 틈틈이 글을 쓰는 게 문학인으로서는 여유있고 평탄한 삶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책 내는 것만으로는 생계가 어렵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내게 말했다. “작가나 철학자는 정말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만큼 유명해질 가능성이 없고, 대부분의 작가들은 사비를 털어 책을 낸단다. 그 길이 얼마나 고독하고 뼛속 깊은 곳에서부터 지독한 생활고를 경험하는 지는 작가가 돼 바야 비로소 깨닫는 단다.”





까고 말해서 ‘작가=평생 불행하고 누추한 인생, 결혼도 못하고 홀로 살아가야 하는 인생, 평범한 사람에서 탈피해서 특수한 사람이 느끼는 불완전한 인생“이 동의어라고 난 생각한다. 심지어 여러 크고 작은 문학상을 종횡무진하며 휩쓸은 한 여류작가가 내 외가쪽 친척인데, 그녀조차 생활고로 굉장히 시달린다고 한다.





글 쓰는 사람들은 대다수가 어릴 적 부모님의 사망이나 왕따를 경험해봤다가 한다. 거기에 더해, 명문대 국문학과를 졸업하여 박사과정까지 수료한 한국의 문학가들도 자기 책이 너무 안 팔려 번역으로 간신히 연명조차 하는 게 대다수란다.

















- Part 2





여기서부터 경어체로 쓰겠습니다.





황보석 아저씨, 그리고 여러분, 제가 작가가 되면 무슨 이상문학상까지는 안 바라고 그저 부모님 용돈 줄 거랑 책 살돈 조금만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결혼까지는 안 바라고 그저 까페에서 커피 하나 시킬 돈만 벌었으면 좋겠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나 해리포터 쓴 작가처럼 부담스러운 성공은 오히려 작가로서의 자멸이라는 걸 전 압니다. 까고 말해서 하루키는 글을 더 어렵고 비대중적으로, 장황하고 학술적으로 쓰는 소위 <예술가정신>을 포기했습니다. 그는 정말 노벨문학상에 선정될 만큼 쓸 수 있는 기량과 재기를 갖춘 작가지만(그의 소설들을 읽어보시면 알겠지만 외설적으로 글이 벋어 나가면서 거기 담긴 의미는 전무합니다. 솔직히 말해서 소설 전체가 저열한 에로티시즘으로 꽉 찼습니다. 중간 중간에 피츠제럴드적 센티멘털리즘이 짙게 묘사되지만 역시 스토리라인 자체는 너무 대중적이고 저질입니다. 유치하고요. 모순적인 부분이 수두룩합니다. 쉽게 말해서 문장 하나하나의 연결성이 마치 헤밍웨이 사후 직전의 쓰인 단편들처럼 엉성합니다. 물론 저 같이 맞춤법도 틀리는 엉터리 writer가 비판할 만한 자격을 갖추지도 못했지만, 그의 소설 전부를 사서 정독한 독서가로서는 그의 소설이 너무 진부하고, 리얼리즘성이 엉뚱하게 비현실적-가공적이고 지극히 대중적입니다. 하루키로 문학을 찾고 싶으신 분들, 예를 들어 일본문학을 사랑하시는 분들에겐 하루키의 소설들이 악서라 생각합니다) 돈을 위해서 자기 신념을 걷어찬 사람입니다. 근본적으로,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돈도 아니고 종교도 아니고 법도 아니고 친구들도 아닙니다. 벤츠도 아니고 B&O 오디오 시스템도 아니고 55평짜리 서울의 아파트도 아니고 미인인 여자 친구도 아닙니다. 다만, 자기가 내세우는 인생관이 자기동일성에 결부되어, 그 결과물이 기필코 ‘정합적’이어야 하며, 동시에 외재적으로 해명 가능한 자기만의 방, 즉 지적 가치를 지닌 외곬적 사상체계여야 합니다. 곧 선험적이면서 어떤 배면과 층위에서도 으뜸으로 치켜세울 수 있는 자기 ‘이념’으로서의 제1학입니다. 이것을 간단히 한 마디로 축약하면 ‘인간으로서의 양심’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나와서 다시 저승으로 돌아갈 때까지 단 한 번의 인생의 재현을 맛봅니다. 그것은 일시적이고 또한, 순간적인이면서도 각기 개별자들의 차이성을 구분 짓는, 유적 차이와 종적 차이의 틀에 걸린 본질적 근원의 패러다임의 내용입니다. 우리는 지구라는 시공에서 남들과 계열적으로 연결 되어 네트워크를 구축되지만, 반면에 영혼의 절대성을 찾는 과정으로써의 생이 자기 안에 심재된, 깊은 곳에서부터 ‘위대한 개인성’의 결여를 뼈저리게 느낍니다. 그 결과로써 우리는 자기를 둘러싼 사람들 한가운데서도 외로움을 느끼는 겁니다.







한 번 지나간 시간은 일회적이고 더 이상 재시현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삶의 결과는 죽음에 불과하고, 따라서, 무에서 머물다가 유(有)가 되다가 다시 무가 됩니다. 이 사실을 모르는 이는 없습니다. 그러나 죽으면 끝이라는 생각이 대부분의 사람들의 과학적인 생각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그건 그야말로 일반적인 생각이겠지요. 그러나 인간 유전자는 멈추지 않습니다. 마치 수컷치타가 새로운 암 치타와 사랑을 나누면서 가장 먼저 하는 첫 번째 행위가 그 암치타의 자식들의 목을 전부 끊어버려서 모두 죽이는 일입니다. 그게 바로 동물의 개별적 유전자 지향의 세계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유추할 수 있는 논지는 이렇습니다. 전체적인 유전자 종류는 반드시 자기와 동류의 유전자만을 돕고 사는 건 아닙니다. 유전자에 일련의 미분화적인 과정에 또 개별적 경쟁이 있습니다.







그러면 좀 더 강밀하게 이 금기시되는 문제에 대해 말하겠습니다. 치타와 우리가 원초적인 면에서 다를까요? 아니,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역시 자기 유전자 전달을 위해 법적인 강간은 금지되어 있어서 서로 계약을 맺고 섹스를 하고 아이를 낳습니다. 최소한 루소처럼 자기 아이를 고아원에 쳐 넣는 정신병자 빼고는 자기 목숨만큼 자식을 위하지요. 자신의 아이가 출생하자마자 수컷남자는 그 얘기를 대신해 죽을 각오를 하는 법입니다. 이미 유전자 지속의 성공과정을 성립했으니까요. 따라서, 양아버지와 양어머니의 사랑은 친아버지와 친어머니의 사랑과 급격히 다릅니다. 유전자 코드의 배다른 인식의 세계는 실로 냉정하고 첨예합니다. 그들에게는 불행한 말이 되겠지만, 양부모의 사랑을 너무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어차피 인간이란 비공리적인 동물이고, 족히 이기적인 동물에 불과합니다. 같은 포유류인 쥐도 자기 자식을 잡아먹는 판에 말입니다.







그러나 좀 더 선험적인 방법으로 자기의 존재의 불멸을 보장하고자 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이야말로 진짜 이기적인 존재들입니다. 그들이 연명하는 무엇은, 죽음으로 인해 자기 존재는 소멸하지만, 자신이 빚은 예술작품이 담고 있는 알레고리와 생활철학, 일련의 사상들, 그리고 자기를 대변함과 동시에 자기 대신 영원히 삶을 살아갈 작중의 인물들과, 이야기의 시놉시스적 색채 즉 스토리의 총아적 깨달음 그 자체가 바로 자식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이 섹스에 굶주려 있습니다. 인간은 아무리 원초적 본능을 등한시/도외시 하려 하더라손 결단코 그것에 배제될 수 없는 포유류입니다. 아프리카가 왜 인구가 그렇게 많은 지 아십니까? 콜라를 마시는 것보다, 담배를 피는 것보다, 섹스가 가장 간편하고 돈이 안 드는 작업이라서 그렇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모든 것에 의문을 제기 합니다. 왜 우리 종은 번식을 목적으로 생을 살아가는 섹스기계가 되고자 하는 것일까요. 좀 더 교양있고 몰짐승적인 삶을 추구할 수도 있는데요. 왜 남성과 여성이 분열되어 서로를 사랑하고 미워하고 배척하거나 심지어 소중히 여기는 것일까요? 또한 남성우월주의자들은 도대체 무슨 근거로 자기들의 두뇌와 결단력이 여성보다 훨씬 우월하다고 주장하는 것일까요? 여성은 과연 전문직에는 남성보다 기량이 딸리고, 차별대우 받는 애 낳는 기계에 불과할까요? 그러나 엄청나게 위대하여 감히 범접할 수도 없는 천재 중의 천재인 버지니아 울프가 있고, 또 나의 어머니는 나의 아버지보다 백배는 위대합니다. 사람을 남성과 여성으로 구별하는 고리타분한 방식은 이제는 이 인생의 게임에서 제외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왜 인간은 서로의 재산 경쟁에, 심지어 친형제끼리라도 서로를 죽이거나 감옥이나 정신병원에(한국의 정신병원 법률 제도는 보호자가 환자의 입원을 기도할 시에는 환자(?)라고 지목당한 친족을 911을 불러 무력으로 입원시킬 수 있습니다. 아내가 정신병이 없는 멀쩡한 남편을 정신병원에 쳐 넣고 재산을 몽땅 차지하는 경우도 빈번합니다) 쳐 넣으면서도, 사랑하는 사람들끼리는 서로의 겨드랑이나 항문도 빨면서 사랑을 나누는 것일까요?





냉정히 핵가족제도에 대해 일회일비하지 말고 따져 봅시다. 전혀 모르는 남자와 여자가 결혼하면 재산을 하나로 합쳐 맞벌이를 합니다. 그리고 자식의 탄생과 더불어 끈끈한 유대관계를 유지합니다. 그들은 곧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고 또 그 자식들이 또 자식을 낳고 그렇게 친족관계와 외족관계가 성립합니다. 친척이라는 하나의 그룹이 결혼이라는 수단으로 말미암아 새롭게 생성됩니다. (두 명의 성(性)적 개별자→남+녀=가족)이 되기까지는 수많은 감수성의 변천 과정이 함께 합니다. 가족과 남, 또 새로운 가족과 남, 우리는 참 과감하게도 스펙만 보고 가족이라는 그룹을 생산합니다. 이 모든 과정을 ‘계열화’→‘그로 인한 산출물’이라고 상정할 수 있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남과 남이 가족이 되거나 반대로 서로에게 증오를 품고 살인의 유혹에 흔들릴 수도 있습니다. 인간은 결코 완벽한 동물이 아닙니다. 남자는 같은 성(性)을 지닌 남자에게 별 뜻을 품고 있지 않지만 다른 성인 여자에게는 극도로 친절하고 자신의 남성적으로 우수한 면을 뽐내는 것과 같이 우리는 아직도 <인간의 짐승성>의 범주에 존속되고 있습니다.







이 최첨단 시대에 바야흐로, 우리는 결코 다른 사람을 남이라 여기며 무관심해서는 안 됩니다. 미국에서는 남과 나 사이에 결코 사소한 관심도 세련치 못한 행동이라고 지탄받습니다.



(물론 미국인들은 타인끼리 처음만난 사이라도 쉽게 친해집니다. 그러나 그걸 진짜 우정이라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브루클린의 빈민가의 주민들은 서로의 일에 관여하려는 경향이 강합니다. 그러나 시카고의 중산층 일대만 돌아다녀도 무관심이 미덕이 되는 일변도를 경험하게 될 겁니다, 따라서 우리는 부유해질수록 더 개인적이 되고 서로에게 배타적이 됩니다)







저는 단지 한 가지를 주장하고 싶습니다. 유전적으로 단지 한 뿌리에서 시작한 몽골로이드인 우리가 서로에게 배려를 하고 관심을 투자하고 인간적인 의미에서 사랑을 한다고 칩시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가 한 뿌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느 때고 우리는 가족이 될 수 있습니다. 증오하던 사람을 사랑할 수도 있고 이제는 남성간의 섹스로 인해 남성끼리 결혼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쉽게 <계열화>의 층위의 저변으로 흐르게 되는 법입니다. 우리는 남녀노소불문하고 서로를 지극히 사랑해야 합니다. 단지 종교적 의미에서가 아니라 이 경쟁사회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의 편린, 즉 <사태 그 자체>에서 영지주의적 사랑을 해야합니다.







근데 여기서 몇 가지 의문이 생기게 됩니다. ‘돈’이라는 화폐적 개념이 우리의 끈끈한 <번식의식>과 <보편적 사랑>에 하나의 철조망을 두릅니다. 넉넉한 재산을 지향하는 독신들이 늘어났고, 이혼하여 재산을 반으로 가르는 일은 어제오늘 일이 아닙니다. 또한 가족이라는 관념 자체도 흔들리게 되었습니다. 형제가 부모의 재산을 노려 다른 형제의 신변을 마비시킨 다음에 재산 전체를 가로채는 경우가 이것입니다. 또한 가난하게 살면서 애를 낳고 비닐봉지에 싸서 버리는(심지어 낙태비용도 없어서) 여자들도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돈은 인간보존을 위시한 ‘가공물’입니다. 그러나 섹스는 인간번식을 위한 ‘자연물’입니다. 이 두 가지 시차적 관점이 공존하는 게 바로 우리네 삶입니다. 그렇다면 자본주의가 공산주의에 승리를 선언한 지금엔 더 이상의 사상투쟁은 종결된 거나 다름없을까요?.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서는, 예전 마르크시즘이 유명할 시절에 갖춰져 있는 사상조차도 종이쪼가리에 불과합니다. 공산주의는 이미 도처에서 영락을 맞이했고 모두가 자본주의적 글로벌화· 유교적 자본주의의 물결에 휩쓸려 있습니다. 심지어 미국과 사상적·경제적으로 평생을 싸워온 쿠바와 쿠바의 왕인 피델 카스트로도 어둠의 시장으로 먹고 사는 지경이니 더 이상 말할 필요가 뭐가 있겠습니까. 인간과 돈은 결코 뗄 수 없는 불가분한 관계이고 돈은 인간에게 있어 유일한 희망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돈에서 모든 게 나고, 돈에서 모든 사건이 연루됩니다. 돈이 사랑을 타진하고, 돈이 영혼을 부정합니다. 돈이 정치의 구조적·방향적 체계를 움직이며 심지어 문단까지 자기 입맛대로 다스립니다. 여기서 한 가지 부정을 폭로하려고 하는데, 그것은 바로 <민음사>라는 출판기업이 책에 쓰이는 종이를 두껍게 하고 본드작업으로 책을 두껍게 해서(페이지는 얇고 촘촘히 페이지가 붙여진 비교적 비영리 회사들과 상반됩니다) 뭘 모르는 독자들을 현혹시키고 있습니다. 모든 가격도 담합하여 일제히 가격을 올렸습니다 . 그에 비해 <동서문화사>는 천페이지의 책을 만 5천원 이상 받질 않습니다. 책 살 떄 페이지수 잘 체크해서 사길 바립니다.







그리고 또한 문학동네는 일본작가인 무라카미하루키에게 독자적 인쇄권리를 무려 1억을 주고 얻어냈습니다. 다행히 책이 밀리언셀러가 되어 본전은 둘째 치고 엄청난 순수익을 올렸는데, 한번 봅시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일본문학 열풍이 불고 있습니다. 그런데 직접 그 책들(특히 도쿄타워와 냉정과 열정사이,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을 정독해 보십시오. 완전히 대중소설보다 더 심하게 대중적이고 문학성에서는 밑바닥을 헤메고 있습니다. 한국 문학이 왜 그 수준에 비해 세계에서 인정 못 받는 지 아십니까? 바로 한국사람이 한국문학을 사서 읽지 않기 떄문입니다. 한국사람은 특히 유별나게 서구사대주의 일변도인데 특히 문학과 차(Car)와 오디오에서는 그 정도가 심합니다. 어디 한번 <관촌수필>을 읽어 보십시요. 이걸 장편소설로까지 확장시키면 당연히 노벨상을 타도 부족하지 않는 작품입니다. 물론 스웨덴한림원도 문제가 있습니다. 일본문학이 아니면 아시아 문학을 인정하지 않으려 합니다. 가와바타 야스라니의 노벨문학상 문학 <설국>을 한번 읽어 보십시오. 내용도 없고 문장이 그렇게 유미적인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결말에서 뒷통수를 치는 것도 아니고, 문장의 감각성이 단순하고 세련되지 못하게 미학에 있어 퇴폐적입니다. 재미 없는 건 둘째치고 순문학으로서의 완성도도 별로입니다. 물론 다른 일본 문학책들과 비교하면 우수한 편이지만 그렇다고 노벨문학상을 타기에는 부족합니다.







일본문학의 대표자 나쓰메소세키(그의 초상은 화폐로까지 쓰였습니다)도 솔직히 제가 보자면 3류소설가입니다. 특히 <마음>과 <도련님>은 문학 살롱에서 논해보더라도 너무나 당연하고 인위적이고, 수사적 기교는 중학생이 쓸 정도로 진부합니다. 스토리라인이 복잡미묘한 것도 아니고 그냥 이사람은 단순히 일본의 물 건너간 사소설 작가에 불과합니다. 필자는 나쓰메소세키 전집도 소장하고 있는데, 소세키가 읽기는 난해하지 않아 정독해서 다 읽어보고 어떤 인간적 의미를 찾아보려고 해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발견할 것도 없고 너무 읽기 지루하다는 점도 예로 꼽을 수 있씁니다. 왜 소세키 문학이 지루하나 하면 일본의 이해 못할 소극적인 인간관계와 사고·생활 방식을 풀어놓기 때문입니다. 그나마 소세키의 명작이라고 하나 간신히 뽑자면 <그 후>입니다. 소세키의 매력은 스토리라인에 있는 게 아니라 유미적 묘사에 있습니다. 너무 개인적인 의견을 표명해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전 일본문학의 보잘 것 없는 미학적 가치에 대해 폭로하고 싶었습니다. 속은 빈 강정, 감각적인 겉멋한 들어 번지르르한 일본소설은 사실상 세계 문학시장에서 사라져야 합니다. 3인칭 관점에 너무 매달려 문장조차 주어를 배제한 채 써진 문장들이 매혹적이고 동양적 아우라를 가진 건 분명하나, 일본문학은 세계에서 너무 과대평가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애써 지울 순 없네요. 일본어는 한국어에 비해 단어수가 적고(한문도 한글로 놓고 보자면) 어휘체계가 단순합니다. 분명 일본의 문학역사는 우리나라에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길고, 일본 문단과 출판업계 시장은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하고(물론 작가지망생도 넘쳐나고), 정치하게 순문학에 밑줄 그어가면서 읽는 일본 독자들의 수준도 한국과 비견할 바가 못 되지만, 일본인이 가지고 있지 않은 감수성을 분명 한국인들은 가지고 있습니다. 왜 우리는 중진국의 한계를 못 벗어나고 있는 걸까요? 그건 바로 인문학을 국가적인 차원에서 버렸기 때문입니다. MB대통령이 정치를 하면서 영어를 마치 표준어 부리듯 도입했고, 또한 제도권교육의 독일적 색채를 지우지 못해서 입니다. 까고 말합시다. 제도권 교육은 학문이 아닙니다. 완전히 암기와 순발력만을 요구하는, 공부라기보다는 정신적 노가다에 가깝습니다. 내용 자체가 그렇다는 게 아니라 ‘수학능력시험’ 이게 바로 문제의 씨앗입니다. 5개의 번호로 간명하게 답을 출제하고 시간제한을 둬서 내용도 읽어볼 시간도 없게 만든 것, 예를 들면 제가 수능에서 국어 과목의 문항을 읽는다 칩시다. 그 내용의 양은 거짓 3시간은 공히 들여야 정독하고 의미파악을 할 수 있는 건데, 국어조차 암기식으로 바뀌어서 한국문학 단편들의 시놉시스만 달달외우면 만점받기 쉽습니다. 암기능력과 일면적인 요소들로 진정한 두뇌들을 가려낸다는 건 기필고 넌센스입니다. 한국의 교육은 10년이 지나도 여전히 후진성을 유지할 겁니다. 무언가 혁신적인 변수를 둬야 합니다. 이대로 노가다 시장만 키워서는 한국의 미래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서 끝내겠습니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봅시다. 우리는 서두에서는 인간번식이라는 방향의식 앞에서 그 의미를 숙고했습니다. 인간은 왜 번식하는 걸까요? 왜 번식의 매커니즘의 근저에는 쾌락이 자리잡는 걸까요? 신은 우리가 서로 섹스를 하게 하고자, 섹스 시에 뇌의 원초적 부문이라고 일컫는, 송과체의 혈류를 놀랍도록 항진시키게 쾌락시스템을 창조했습니다. 왜 우리는 번식행위를 하는 도중에 행복을 느끼게 설계된 것일까요? 인간 이외에 어떤 영장류나 포유류도 교미를 하며 쾌감을 느끼는 종족은 없습니다. 그것은 특이한 인간 종(種)만의 타성일까요? 그러나 그 타성이 왜 있는가는 쉽게 풀어지지 않는 미스터리입니다. 더 크게 잡아 봅시다. 우리는 우주에 속해 있습니다. 우주는 빅뱅으로 인해(순간적인 폭발)생성되었습니다.(빅뱅이론은 현재 부정되고 있으나 더 훌륭한 이론이 나오지 않아 이것을 중심제반으로 설정하겠습니다) 우주는 유기체적으로 결합하고 소멸하고 꿈틀거리고 생성되고 파괴되고, 하나의 시뮬라르크를 구축하거나, 오히려 시뮬라크르가 이데아로 전환되어 실재적인 일들이 그 배후를 드러내곤 합니다. 우주의 이런 유동적인 생성 및 소멸, 그리고 재생성 그리고 합치, 그리고 그 기조를 제반으로 하는 시간관념과 공간관념 등은 도대체 왜 존재해야 하는 것일까요? 우리가 무가 되어도 우리가 가졌던 에너지는 우주로 환원됩니다. 에너지는 항시 관성의 법칙을 따릅니다. 그리하여 총합의 에너지는 질량과 100%로 일치합니다. 우주의 총량은 한명의 인구가 죽든 65억 인류가 핵으로 멸망하든 상관없습니다. 그러니까 무한한 우주에서 지구는 없어도 되고 있어도 되는 물건입니다. 거기 살아있는 벌레들이 소멸 되도 상관없는 것이겠지요. 좀 더 중추적인 의미를 견지해 봅시다. 우리는 각기 생명이란 에너지를 갖고 있습니다. 그것이 스스로 이행하여 ‘죽음’이라는 형식을 갖추게 된다 해도, 그러니까 한 개인이 살아있든 죽든 간에 한 영혼의 에너지는 제한되어 있습니다. 우리 인류 각기 영혼의 에너지를 전체화시킨다면 그 개수는 65억 개이거니와, 에너지 총량에서는 어마어마할 겁니다. 그러나 우주 전체에서 지구 하나만 견각할 때 이 무지무지한 에너지는 핵폭탄 여러개만도 못합니다. 엄밀히 말해, 에너지에는 의미가 없습니다. 에너지는 실재하는 것이지만 단지 그뿐입니다. ‘실재’는 또다른 실재를 가리키지만 어떤 모종의 의미를 도출하지는 않아요. 우리, 바로 그 누구보다 소중한 우리 전체는 그저 유기적 원자(Atom)의 흐름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진정한 모럴리스트는 우주라는 관념, 즉 현대과학을 적대시합니다. 하나의 조그만 에너지로 머물지 않고(그러니까 현대과학에 유념하지 않고) 인간 보편의 휴머니즘을 사랑하고 실천하는 자, 그들이 바로 인문학이라는 인간 조건의 엮어내는 자들입니다.







카프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의 단편작품 ‘밤에’의 클라이막스를 옮겨 쓰겠습니다.



[너는 왜 깨어 있는가? 한 사람은 깨어있어야 한다고 한다. 한 사람은 여기 있어야 한다.]

다분히 사르트르의 실존주의적 의의가 내포돼 있는 작품이죠. 전 이 문장을 읽고 제 생에 있어서 전대미문의, 훌륭한 예술적 음악으로도 느낄 수 없는 하나의 확신을 얻었습니다. 실존한다는 것, 유기체로써 지금 여기 존재한다는 것, 그러나 그 유기체는 잠을 자기도 하고 깨어있기도 하지만 저는 잠을 자지 않기로 결심한 의지의 파노라마처럼 제 자신의 사명을 느꼈습니다. 제가 여기 있어야 사회에서 언젠가는 인간 실존의 진짜 의의를 카프카에게 바톤을 받아서 이어써내려갈 수 있다는 것, 그러니까 글을 쓴다는 것, 그것이 바로 제 자신의 이유요, 선험적이며 유미적이며 실험적인 각성입니다.









앞에서 소개한 카프카의 글귀를 지향하는 개인 영혼 한 명이, 바로 인문학이라는 인간 조건을 엮어내는 자입니다. 그자는 번식하지도 않거니와 짐승적 타성에 젖어있지도 않습니다. 단지 그는 의식적으로 깨어있기를 원하고 그게 자기 존재와 남의 존재를 엮어주는 불멸의 이어짐을 담당하는 정신적 가교임을 그는 알고 있습니다.









인간번식이 관성이라는 이름의 타성의 도정에 있는 것까지 우리는 눈치 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하나하나가 우주의 벌레라고 칭하면 적절하겠지요. 우리의 움직임은 아마 원자의 순환과 엇비슷할 겁니다. 우주 밖의 우주가 있고 또 그 밖에 우주가 있습니다. 우주 역시 서로 교미를 가집니다(물론 이건 여기서 중요한 논점은 아닙니다).





문제의 핵심은 이겁니다. <시간>과 <공간>이 단지 위성 간의 거리를 잴 수단으로서의 도구에 불과하고, 사실 우리는 시공을 초월하여 내양적 삶을 살아가는 겁니다. 시간과 공간은 그자체로는 아무 힘도 없습니다. 말하자면 콩기름이나 버터를 그냥 먹으면 아무 맛도 없는 것과 같지요. 우리 <인간적 실재>와 시공이 결합하면서 비로소 유물론적 관점이 성립되는 겁니다. 또한 객관적인 시점은 정말로 ‘객관적≠실재적“입니다. 객관이란 인간이 계몽적(무신론!)이성을 잣대의 망원경으로 관찰하는 왜곡된 세계에 불과합니다. 진짜 우주적 ’실체‘를 찾고자 한다면 진정한 물자체(物自體), 즉 완전성 있고 미분화 가능하면서도 피상적인 외양, 그것이 곧 진정한 유물론입니다.





모든 걸 종합해 봅시다. 저는 여기서 아직도 ‘인간번식’의 이유에 대해 해명하지 못했습니다. 미상불 서두와 말미가 어지럽게 흩어져 있고, 일관성 떨어지는 수기를 작성했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인간이 죽음으로써 공무(空無)화 되는 우주와, 인간은 죽어 사라지지지만 유물론적으로 존재하는 우주 자체의 분화는 정립했지만 그 근원, 즉 본질, 곧 그 원리의 이유에 대해서는 밝혀내지 못했습니다. 제가 너무 부족해서 그런 겁니다.





우주의 ‘개연성’의 원리의 목적은 어디 있는 것일까요? 우주는 과연 합목적적인 걸까요? 우주는 수단일까요 결과일까요? 아니면 신의 존재에 대한 근거일까요? 아니면 신 따위는 없다고 허허실실하게 뚜렷이 각인시키는 하나의 ‘자연’일까요? 맞습니다. 우주는 인공물이 아니라 자연입니다. 자연은 잔인하고 또 거기에는 의미가 없습니다. 하기야 제가 만약 우주의 지향성에 대해 연구를 평생에 걸쳐 연구를 한 끝에 내리는 결론은 아마도 다의적일 것입니다. 일종의 양가적 관점에서 딜레마에 결합되어 단지 그 도정의 끝자락에서 ‘과정’만을 찾는 얼간이에 다름없을 것입니다. 우주의 불가해성에 관해서는 다만 이시대의 야망 있는 철학자들에게 맡깁시다. 인간번식의 지향성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요. 우리는 그저, 양분적인 두 산맥을 오르기만 하면 됩니다. 결혼을 안 하고 독신으로 살면서 자기 분야에서 매니아가 되어 그 산출물을 자식으로 여길지, 아니면 중소기업에라도 출근하면서 애를 낳고 자기 불멸성을 보장할 것인지.





요지는 이렇습니다. 우주라는 실재적 관념에 대해서는 차치하고 단지 지적이고 예술적인 산출물을 자식으로 둬 자기의미의 전체성을 포괄하여 자아실현을 최종적으로 시현할 것인지, 동물적인 본능에 기인하여 자식에게 모든 걸 투자할 것인지, 선택은 열정 있는 여러분들게 있습니다.









그리고 이걸 잊지 마십시오. 모든 건, 모든 분야의 혹은 부문의, 혹은 생명의 종래는 전지적으로 ‘일차적인 동류성’이라는 문법적 방기(방종)에 의지하고 있다고.





우리가 살아야 할(우리가 걸어가야 할) My Way는 모두가 같습니다. 좀 더 거시적으로 생각하십시오. 서로 다른 미증유의 양극화 된 인생 속에도 결과는 ‘죽음’하나만입니다.





먼저 가거나 늦게 가거나 항상 나약하고 모자란 우리가 여기에 귀착되리라는 확실한 운명을 잊지 마십시오. 그걸 잊지 않는 당신이야말로, 이 뜨거운 열정에 불타오르는 한번 살아볼 만한 생에 최선을 다할 수 있다고, 그러니까 오늘을 잊지 말라고, 저는 당부하고 싶습니다. 중요한 건 부자가 되느냐 잘 사느냐가 아니라, 남과 자기 사이에서 차별성을 발견하는 겁니다. 그리하여 한 개인으로의 에고이즘을 효과적으로 시현하고 죽음이 당도했을 때, 우리는 후회 없이 갈 수 있을 것입니다.







추천스크랩소스보기 목록
박태희 2010-09-25 22:17:21
답글

일본문학에 대한 비판 맘에 듭니다.

박두호 2010-09-25 22:29:01
답글

박태희님 꼼꼼이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김연수 2010-09-26 21:40:57
답글

아~ 긴글 읽느라 숨찼습니다.<br />
혹시 <연구공간 수유너머> 라는 학문공동체를 들어보셨나요<br />
그 곳에가면 박두호님과 이바구가 맞을 분들이 넘쳐납니다. 혼자하기 어려운 공부를 서로 가르쳐주며 함께 하는 곳이지요. 배움의 스승과 도반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 광고문의 결제관련문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