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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자신을 살아라.
자유게시판 > 상세보기 | 2010-09-20 13:38:17
추천수 0
조회수   974

제목

[칼럼] 자신을 살아라.

글쓴이

박두호 [가입일자 : 2003-12-10]
내용
 

p.s 청량리 정신병원에서 또 3개월을 지내고 퇴원했네요. 사람은 아무리 가난해도 시설에서는 살지 말아야 합니다. 시설이야말로 우리를 파괴합니다. 돌이켜보니 정신병원에서 총합 1년을 보냈습니다. 더 이상 과오로 인해 저를 시설에 들여보내고 싶진 않습니다.



 

이른 아침이다. 눈을 게슴츠레 뜨고 시계가 가리키는 시간을 본다. AM 8:30, 얼른 가방에 준비물을 챙겨서 학교를 향해 거리를 걷는다. 그러나 사뭇 내 마음 속은 일말의 두려움에 잠겨 걸어갈 힘도 없는데 어떻게 든 걷는다. 음침한 학교에 당도하니 몇몇 아이들이 내 책상 주변을 어슬렁 거린다. 그렇다. 그들은 또다시 날 괴롭히기 위해, 속된 말로 이지메하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하면서, 마치 내 불행을 예견한 듯 나를 좌시하고 비웃는다. 그래도 난 우회하지 않고 용감하게 선회의 길을 택한다. 이는 그들의 비뚤어진 도덕률에 착목하여, 그들이 집단이 아니면 행동하지 못하는 혼자만의 단독성이 결여된 결정(結晶)들의 군집체에 불과하다는 걸 난 명실공히 비웃고 싶어서였다. 매일매일 나는 그들의 몰도덕성을 심판하고 싶었고, 그런 연유로 내 앞에서 기독교의 [정죄]라는 관념은 우스갯거리에 지나지 않았다.



죄란 행동의 잘못에서 저질러지는 게 아니라, 강한 자가 약한 자에게, 가진 자가 못 가진 자에게, 자신의 이익을 벌충하고자 저열하게 월권을 행사하는, 공인된 폭력적 행위의 굴레이며, 난 그런 굴레에 구토를 느낀다. 하물며 그들이 나를 둘러쌓아서 구타를 하더라도, 나는 이를 진정한 괄시로 유념하지 않거니와, 내가 옳고 너는 틀리다는 비뚤어진 덕의 논리에 입각하여 예에 대비한, 거침없는 언어들의 조합으로 말미암아, 그들을 어법으로나마 이기고자 비폭력적이지만 날카로운 독설을 내뱉는다.



그들이 나를 놀려대고 경멸감을 주어도, 직접적으로 날 해치려 할 때도 나의 입은 끊임없이 내가 하루 전날 궁리해온 말을 뱉어내는데, 비속어는 쓰지 않지만 선생님들조차도 아연실색할 정도로 거침없는 층위, 그러니까 마치 어떤 작품에 대한 화려한 비평의 소나기처럼, 모자란 그 핏덩어리들에게, 마냥 수준 낮은 행태를 보이는 유치한 놈들을 향해, 나는 너희들과는 차원이 다른 수준 높은 놈이다, 라는 인텔리적 본능을 재현하고자 하고 언사를 흩뿌린다.



학교라는 썩을 대로 썩어버린, 일제교육의 잔재를 본받는(예를 들면 학생들의 국기 게양식 같은 것들)그 부적절한 곳에 넌덜머리가 나서, 결국엔 하교시간에 파김치가 되어 집으로 돌아온다. 그래도 나는 어린나이에 얼마나 꿋꿋이 이지메를 이겨왔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상황조차 모르시는 아버지께선, 술을 한껏 드시고 술주정을 하며 거실에서 그릇을 깨 부시며 행패를 부리곤 했다. 그리고 어머니께서는 너무나 울어 항상 눈가가 부어있었다. 만약 그때로 돌아간다면 난 아버지를 식칼로 도려낼지도 모른다. 그 작자는 주식을 미수로까지 사들여 내게 남겨질 유산들을 축소하고 또 축소했다(이미 퇴직금까지 전부 날려먹었다). 그 작자의 술주정을 견딜 자는 천하를 뒤져도 아무도 없을 것이다. 미상불 아직까지도 아버지께서는 주식 투자에 여념이 없으시다. 그렇다. 우리 아버지는 술을 먹고 또 밥까지 먹고 다시 코-잠이 든다. 그야말로 완전무결한 얼간이인 것이다. 하기야 정신 멀쩡한 아버지가 이 말세에 누가 있겠는가?



당시 나는 음악에는 완전한 문외한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Queen 의 We are the champion을 듣게 되었다. 그 충격은 나에겐 거의 전대미문의, 미증유의 미학을 발견한 것이었다. 나는 그 순간 눈치 채고 말았다. 예술의 최고봉은 음악이라는 것, 오직 그것뿐이라는 것을! 그 후로 여러 가지 빌보드 차트의 팝송들을 알아가면서 나는 음악에 맛 들리게 되었다. 만일 내가 음악에 소양이 더욱 풍부했으면(사실 풍부하긴 했다. 단지 부모님이 너무나 한국의 제도권 교육이 야기하는 비인간성이며 육체적 노동과 꼭 같은 무식한 일회성이, 말하건대 일그러진 우리들의 교육을 강렬한 햇빛의 직사라는 걸 지식인의 입장에서 알아채기만 했어도…), 만약 그렇다면 지금쯤 나는 작곡가가 되었을 것이다.



꼰대들의 난점은 언제나 제도권 교육을 제시해놓고, 그 교육이 가져오는 정신적 참사를 도외시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나름의 본질을 살아야 할 언명 같은 것을 지니고 있다. 본질은 언제나 영원한 별처럼 우리들 안에 내재해있다.



다른 애들이 저편에서 재잘거릴 때 나는 내가 좋아하는 곡들을 머릿속에서 재생하면서, 다시 재생됐던 음들을 또 다시 다른 방법으로 마음 속에 시현한다. 나는 소싯적부터 내 음악적 재능을 파악했지만 내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분야에, 심지어 부모가 재산이 소실되어 쫄딱 망하게 되더라도 당당히 음악인의 길을 걸어갈 것 이마고 다짐하기에는 너무 어린나이였다. 부모에게 모든 것을 위탁하고 의존하는 나이가 아닌가! 길은, 모든 성공의 길은 부모님이 안전하면서도 일반적인 제시의 선을 따라서 수렴되기 마련이었다.



내게 음악이란 과연 무엇인가? 그것은 내 생존 이유이자 근원적인 시초로서의 의미였다. 내가 철학자나 사상가의 도상에 위치하는 때라도, 나는 내 자신의 기투 자체의 편린을 인멸하지 않은 채 꾸준히 삶에 대한 의문과 번뇌, 고뇌를 음악과 함께 해소해 나갔으리라. 그리하여 요즘에 내가 서양철학과 문학에 접목하고자 하는 일련의 시도는. 누구도 범접 불가능한 이를테면 완곡어법이 각인된 불필요할 정도로 차가운 [실재를 추구하는 정통적인 정합성]에 다다르기를 원하고 있다. 즉, 이런저런 공적인 무대에 서서 나 자신의 교양이 부동의 원동자 즉 신의 덕과, 나의 정신이 자신을 초극하여 자기완성이라는 불멸의 위치에 점유된 모습 그 자체의 표징, 그러니까 거울에 비친 내 전체적인 그러나 내 본질 자체가 지향하는 숭고한 미덕의 반영, 폭발적이면서도 지적으로 영광적인 순간에 있는, 하나의 잔상을 지켜보기를 원한다. 이는 그 동안 음악을 사랑하는 마음에 의해 가려져 있었지만, 이제는 천천히 수면 위로 떠오르는 글쓰기의 예술에 대한 욕망을 알 것 같기도 하다.

 

지고로 심미로운 내 영혼의 선험적 원천이 자신의 나신을 드러내 보이면서, 그 배후에 존명하는 메타적 상승 즉 저 너머의 영원과 만나는 고색창연한 빛의 세계와 인생 최초의 해후를 가지려고 한다면, 거시적인 사상적 변환의 준거는 당연하게도 선악의 피안에 머무른 와중에 도저하게 흐르는 약자의 연약성이리라. 그 자체가 바로 이론을 세울 때마다 필수적으로 결부되는 핵심질료이거니와, 자기동일성을 주조하는 영적 근거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신(神)적 분유의 과정은, 정신적으로 가장 복잡다기하면서도 정교한 과정, 이른바 글쓰기를 위한 심층적인 사유의 과정은, 서로 상보적이거나 동일한 것 즉 이심전심으로 서로를 접속하거나 포섭하며, 내가 23살까지 산전수전 겪어왔던 불행의 연대기를 잊어버리고 누구도 접근하지 못한 기술적 접근의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해준다. 그것은 분명 타자들이 경험해보지 못한 나만의 영지주의의 닦달음일 것이다.



그러면 좀 더 현실적으로 논해보자. 지식인에게 있어 글쓰기란 무엇인가? 언어라는 것이 비단 인간정신의 자유주의적 승리에 불과한 것일까. 아니면 인간 실존의 기술의 근저를 이루는, 소위 사르트르적인 말로써 [휴머니즘]에 대한 내적 합목적성의 하나일까? 내가 이룩하고자 하는 정신의 저변에 현전하는 글쓰기는, 내가 사회에 요구하는 숭고한 지적 진취성의 획득, 그 혁신적인 정신들을 피상적으로 들어내고자 하는 고통스러운 과정이다. 따라서 나의 철학적 글쓰기가 요구하는 방식은, 현대사상의 대부 하이데거가 행해온 도식의 성립과정, 이른바 하나의 화두를 정하여 그것만 철두철미하게 분석하는(하이데거가 존재의 탐구에 할애한 시간은 그의 인생 평생에 이른다) 고지식한 형이상학의 열정이 아니라, 사르트르·화이트헤드·들뢰즈가 행해온 모든 학문 전반을 관통하여 총체적인 모든 지식들이 동반돼 세상 그 자체의 논리를 정연하게 설명함과 동시에 세밀한 것도 분석하는 과정의 결산물이다. 쉽게 말해서, 미분화된 모든 지식 일반에서 핵심적인 요해의 조각들을 모아 그것을 큰 그림으로 직조해나가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내가 걸어가고자 하는 [형식의 문제]이다.



다시 한번 예의 과정을 다른 방식으로 생각해보자. 당신이 지금 당면한 방향의식의 모태를 정제함과 더불어, 일희일비하는 거대한 시대정신의 조류에서, 득의만만하고 치기어린 청춘의 한가운데서, 일반적인 골빈 시민들과는 다르게 비로소 진정성 있는, 경험에 의거한 판단을 내린다면, 아마도 우리가 습득한 모든 지(知)의 총체적인 투명한 감수성의 소용돌이가 우리를 잡아먹을 것이다.



글의 논지가 약간 옆으로 전화되었는데, 이제는 새롭게 음악과 철학의 중심에서 딜레마에 교착된 필자의 문제로 회귀해 보자.



결국 아웃사이더로 점철된 내 인생에 있어 음악이란 존재는, 존재론(존재자와 존재의 차이)의 정신현상학적 산출물인가 아니면 종차(種差)라는 세상 근저에 자리 잡은 논리에 대한 환상적인 폭동인가? 쉽게 풀어쓰자면 이렇다. 내가 언제나 음악이라는 가장 자극적인 예술의 근원을 갈구해 왔다. 그렇다. 필경 음악은 나의 모든 것이었다. 내가 힘들 때고 지칠 때고 물론, 세상살이에서 구토가 나올 때면 난 음악의 순수한 벽에 기대곤 했다. 음악은 언제나 자신의 어깨를 내 영혼에게 빌려주었다. 음악은 내 존립의 근거요, 나를 기조로 하는 밑도 끝도 없는 이미지의 피상성이며 불투명적 소치의 으뜸이요, 또한 내 삶의 전개방식을 관류하는 빛 중의 빛이요, 아직 타오르지 못한 불꽃에 불을 지피는 촉매제였다. 그러나 나이 가 들어가면서 여러 가지 세상의 수없는 패러다임에 교착하면서 내가 느낀 것은, 음악은 진실 그 자체이나 그것이 합리적으로/논리적으로 진실과 원리 사이에서 모종의 상충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이다. 허나 우선 음악은 종교보다 더 강한 아우라를 온몸에 두르고 있다. 그것은 곧이어 생성될 인간 실존의 주관적 전범을, 그 로켓을, 저 멀리 하늘 위의 머무르고 있는 영원한 별과 마찬가지로 내 앞에, 항구적인 너무나 항구적인 자리를 제공했다. 그에 비하면 외재적 파노라마, 즉 철학·사상이 가리키는 상이한 가르침의 명제는 바로 “음악은 음악 이상의 광채를 인간 정신의 차안에서 피안으로 이행할 움직임은 갖고 있되, 전적인 [본질직관]의 응축된 힘의 야망에서 소생하는 혁혁한 메타적 기능의 미분화된 선택에서,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우주의 논리를 반(反)공무(空無)화하는 개인의 움직임에서, 그러니까 인류라는 유기체가 생동하는 정치한 사고방식의 탐미주의성을 해명하고 나서야, 비로소 개인 내실의 지독히 이기적인 도착적 상정들의 결과물들을 받아들이고 해소하는 인간 실존의 문제에 달렸다”이다.



바로 이 충돌하는 음악과 철학의 첨예한 대립에서 세상이란 문법의 문제의 쟁점은, 음악은 주관적이고 내재적이지만, 철학은 객관적이고 외재적이라는 것이다. 또한 음악과 철학은 서로 전혀 다른 방식에서 자신을 해명하고자 하는데, 음악은 곧 자연이요, 철학은 곧 가공된 어떤 실체이다.



음악은 내게 그런 종류의 것이었다. 난 나의 스승 장 폴 사르트르처럼 무신론자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스피노자처럼 밀어붙이는 범신론자도 아니다. 나는 중간에 서서 그저 지켜보는 한명의 예술가에 지나지 않는다. 난 돈을 증오한다. 돈은 사람에게서, 그리고 그것이 중매되는 관계 사이에서 영혼의 형상을 가로채가 버리기 때문이다. 하기야 우리가 정직하게 자기 삶을 살아왔고 경찰서 한 번 들락날락 한 적도 없다면, 명증이 그 사람은 법률의 노예다. 누구에게나 투쟁과 데모가 필요하며, 거기에는 언제나 순수한 자유의지가 수반되어야 한다. 한 나라는 우리의 국제적인 이면을 퇴조시 하려는 거대권력에 다름없다. 나라 하나, 하나가 피 묻은 죄악의 물결에 휩쌓여 있는데, 현대사회에는 이것이 기하급수적으로 높은 단계에 이르러 도저히 셀 수도 없는 지경이다. 블러드 다이아몬드, 아니, 블러드 네이션!



내 본질에 관여하는 철학과 음악의 대비는 여기서 끝내기로 하자. 앞으로 더 내 에세이적 사건들을 진행하겠다.



난 솔직히 게으름뱅이이며 세일즈맨이 될 자신이 없어 글을 쓰는 건지도 모른다. 나는 사회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기에는 지나치게 여성적이며, 증오에 가득 찬 질정을 두려워하며, 그러나 화려한 찬사 역시 두려워하는 소극적인 패배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음악을 신의 가장 소중한 선물이라고 본다. 확실히 삶은 정태적인 양상을 뛰는 게 아니라, 아니나 다를까 모든 행위 하나 하나가, 실천 하나 하나가 동태적이다. 그러면 삶은 도대체 나에게 무엇일까? 나는 단지 부모님의 노후자금을 갉아먹는 치명적인 독충인가? 부모님께 더 이상 실례를 끼치고 싶진 않다. 더 이상 욕심과 허영에 들떠 철없는 짓은 하지 않으리라.



그러면 본격적으로 엉뚱한 두 번째 논쟁으로 들어가 보자. 왜 우리는 자연스럽게 유전자를 다음 세대로 전해주는 걸 업으로 삼는 번식기계가 되는 것일까? 생명의 보존 본능보다 더 강한 게 바로 번식본능인 걸 난 잘 안다. 그러나 난 확실히 에고이스트다. 나는 평생 독신으로 살며 음악평론과 서구 문학/철학 연구에만 주력하리라.



나는 줄곧 사람들이, 생활을 중요시하며 예술적/지적인 것을 등한시하는 교양 없고 무지한 무뢰배라고 여겨왔다. 그들은 포유류에 불과하며 예술과 지성이 선사하는 도저한 아름다움을 도외시하는 불쌍한 밥벌레라고 여겼다. 그들은 평생 매너리즘의 환멸성에 갇혀 자기 자신의 군상을 답답한 이 현대 사회에서 찾아나갈 것이라고. 물론 나도 그렇게 살아 왔다. 무릇 유치원을 다니고 학교를 다니고 대학갈 준비를 하고 회사에 입사하는 인생은 얼마나 야망 없는 삶인가! 그러나 난 다르다. 나는 Fucking 스페셜하다. 난 다르다. 남과는 전혀 다르다. 이것 역시 미국적 사고방식의 한 일면이련지! 모두가 달라야 한다. 똑같해지는 것은 우리가 인간의 보편성, 일면적인 것을 완전한 동류성으로 전환하는 것에 다름없을 것이다. 비단 한국사회만 동류적이고 몰개성적인 것만은 아니다. 이제는 글로벌화/국제화 되어 인류 전체가 진정으로 유비적 단일성에의 상생에 만족하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권한다. 다시 오지 않을 일회적인 이 중요한 생에서 한 번쯤은 후회없을 자기 자신을 살아보는 건 어떨지! 물론 쉽지 않은 결정이다. 배고파질 수도 있고 고독해 질수도 있는 길이다. 단지 인문학과 예술만을 말하는 게 아니라 공학적/기술적 면도 포함하여 우리는 혁명적으로 진화해야 한다. 혁명, 혁명만이 인류에게 부여하는 진정한 인간 본질의 근거이다. 따라서 동일성을 배제하고 차별성에 귀착하고자 하는 도도한 움직임은 첫걸음만 떼기 어렵지 걸어가다 보면 지극히 순수한 도정에 자신이 참여하고 있다는 바를 깨달을 수 있다.



아웃사이더로 살아왔다. 매순간 죽음과 삶을 가로지르는 경험에 근거한 판단에 의해서 나는 실로 평생 고독했다. 누가 내 난관, 아니 딜레마를, 이 무지막지한 인간으로서의 지엽적인/국지적인 일생의 궤적을 그려내야만 하는 소시민 사이에서 출생한 한명의 핏덩어리를 구원해낼 수 있는가? 내가 사랑한 여자들은 내 얼굴이, 바로 내 얼굴이 유전학적으로 떨어지는 것을 보고 퇴짜를 놓거나 무시하곤 했다. 나는 소심하게 짝사랑이나 하는 슬픔어린 사춘기 소년에 불과했다. 난는 헤르만 헤세의 후계자였는데, 그가 써내려가는 산문의 내면적 체계는 바로 나를 대변해주는 것이라고 본다. 그는 말했다. “나는 평생 고독했다”. 그리고 “나는 나를 살아보려고 했다. 그것이 그렇게 어려웠을까”. 모두가 나를 가리키는 이야기였다. 나는 내 본질을 살아보려고 발버둥 치며 사회에 엿을 먹일 결심을 하였고, 그 진일보의 시뮬라크르가 바로 <독서와 글쓰기>에 이른 것이다. 그의 소설 ‘수레바퀴 아래서’는 모든 고등학생이 참고해야 할 필독서 중에 하나다. 그에 비해 ‘데미안’은 지극히 몽상적이고 추상적이어서 대학 때 읽어봐도 늦지는 않다. 실제적으로 데미안보다 수레바퀴 아래서가 훨씬 쉽게 읽힌다.



나는 무엇 때문에 여자의 영혼을 갖고 태어났을까? 여자와 여자와의 성교는 나를 짜릿하게 한다. 레즈비언에는 어떤 숙명적인 기하학적 귀결성이 심재 돼 있다. 당신들도 잘 알겠지만 기필코 이 글은 나의 소개에 대한 재탕이 아니다. 난 단지 예술가로서, 철학자로서, 사상가로서 이 세계에 만연한 패배의식을 종식시키고 그 쓰디쓴 부작용까지 타진하려는 계획을 정치하게 소묘하길 원한다. 헤밍웨이는 절대 자기 후의 세대인 청년들에게 자살하지 말라는 경고를 했음에도 자기가 앞장서서 산탄총을 입 속에 겨누었다. 더군다나 랭보는 어린 나이에 붓을 꺾고 세계유랑을 시도했다. 그에 비해 칸트는 자신의 골방에서 평생을 집필활동에 몰두했다.

지금 나는 불꽃같이 타오르는 23세의 청춘을 누리고 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여자와의 섹스에는 큰 관심이 없다. 아직 난 여자를 모르지만 그렇다고 구지 여자의 몸에 대해 파헤치고 싶은 원시적인 욕망도 없다. 단테의 <신곡>에서 등장하는 단테의 베아트리체에 대한 열정처럼 나는 여자의 신비함과 환상만을 간직하고 싶다. 짝사랑도 사랑 아니겠는가?



나는 무엇이든 내 철학이론과 부합하는 게 있으면 항시 실천하는 지성으로 정치에 참여할 의사도 있다. 나는 앞으로 다시는 그 누구의 편에 서서 편향하지 않으리라. 바로 그 점이 사상가들의 결점이자 즉자(정), 대자(반)에만 골돌히 잠겨 즉자대자(합)를 완성하지 못하는 물리적인 실체적 패배인 셈이다. 변증법적 비판은 우선 선행돼야 할, 교설의 기저의 올바름에 그 뜻이 있는 것이다. 과거 소피스트들의 논박에는 수사적인 접근에 있어서는 군계일학이었지만 그들의 기교는 항상 보드리야르적 내파(Implosion)라는 장치적인 기술이 자기 논지의 깊은 근거를 지키지 못하고 연쇄폭발하기 마련이었다. 시뮬라크르가 아니라 이데아를 변별하는 자기 영혼의 눈을 우리 모두를 길러야 할 것이다.



나는 무릇 무엇보다 학문을 위한 나의 열정이 멈추지 않고 직전의 파노라마로, 비록 화려하지 않지만 끊임없이 타오르는 불꽃처럼 동분서주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내게 펼쳐진 순간적인 것, 그러나 거기에 절대성을 두는 열의·자기신뢰·사고의 반(反)종말론적 정지·그리 고 인간적인 전체성 곧 휴머니즘의 승리, 모든 걸 축약해 말하자면 순간적인 것 속에 절대성을 부여하는 모습을 나는 내 자신의 전범으로 삼고 싶다.



비단 23살의 나만 결코 세상의 부차적인 속성에 의의를 두지 않으면서도 자아를 배제한 새로운 형태의 면모를 일신하려는 게 아니다. 나 이전의 수많은 학자들이며 문학가들이 여기에 골똘히 괘념해왔다. 순간적으로 깨달음을 얻는 것은 동양철학의 근저를 이루었고 그것은 곧 지혜였다. 그러나 사변성을 중시하는 서구철학의 근저는 사가(史家)들의 논리학적 역사를 지반으로 이성적으로 처리해나가는 정합적인 즉 무모순적인 학문, 곧 지식이었다. 동양의 고승들은 글귀에 신경 쓰기보다는 순간적인 깨달음과 무신론에 목을 매었고, 반면 서양의 철학자들은 마치 학자처럼 지식의 방대한 양으로 말미암아 언어와 기하학 등을 이용하여 신통방통한 지식의 총체를 쌓아왔고 항시 다른 학자들과의 논리적 대립을 꾀했다. 물론 동양철학과 서구철학 중 어느 것이 더 우세한 것은 아니다. 지혜도 중요하고 지식도 중요한 법이니까.



지금까지의 내 모든 생각들을 차치하면서 나는 마지막으로 이 글의 결론을 여러분께 제시할 셈이다. 그것은 간단하다. 사람은 자기 입맛대로 살다 죽으면 그만이다. 그게 바로 자신의 불멸을 보존하는 길이다. 사회를 비판하고 자신을 치켜세워라. 모든 보편성에 엿을 먹이고 실험주의가 되라! 쾌락을 추구하고 오늘을 즐겨라! 색다름과 자기 자신만의 차별성에 의거하라! 그렇다면 전혀 새로운 세계를,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한 어떤 것을 볼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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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성 2010-09-20 13:48:49
답글

누가 쓴 글인가요? 궁금하네요.

정기섭 2010-09-20 14:03:32
답글

무슨 글이 이렇게 긴 것인가를 궁금해 하며 좀 읽어봤습니다..<br />
<br />
글속에 분노가 많네요. 심적 고통이 많으신 것 같습니다. <br />
<br />
대충 짐작이 갑니다. 어느 그룹에서도 만족감, 자존감을 느끼기 힘드실 것이라 판단됩니다.<br />
<br />
모든 것을 내려 놓고 본인다운 자연스러운 삶을 사시는 그날이 빨리 오길 바랍니다.<br />
<br />
그때는 한껏 미소지으며 선선한 바람에 행복해 하

김태훈 2010-09-20 14:08:49
답글

낙타, 사자, 어린이 중 사자가 되려고 하는 단계.

moondrop@empal.com 2010-09-20 14:27:10
답글

내 삶은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게 아니니까..<br />
남이 나를 알아주든 말든.. 남이 나를 어떻게 쳐다보든.. 무덤덤해야 합니다..<br />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말고.. 내가 뭘 하고 싶은가에 눈을 돌려야 합니다..<br />
조금씩 자신을 살찌우고 가꾸어나가시되.. 조급해 하지 마세요..<br />
<br />
그럼 음식 조심하시고.. 즐거운 추석 보내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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