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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수에 관한 글들 좀 모아 봤습니다..^^
음반리뷰추천 > 상세보기 | 2003-08-20 11:20:00
추천수 3
조회수   2,473

제목

김두수에 관한 글들 좀 모아 봤습니다..^^

글쓴이

김영민 [가입일자 : 2002-05-22]
내용
많은 분들이 김두수라는 분을 아실 것입니다. 한때 김두수, 이성원, 곽성삼등과 80년대 언더그라운드 포크의 3인방이라고 불리워지기도 했었지요.. 제가 안지는 지인으로부터 4집 시디를 선물받으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불과 1여년정도 된 것 같습니다. 가수가 자기만의 음악세계를 가지고 자유와,평화라는 그리고 유토피아를 그려나간다는 것이... 노래한다는 것이..

아래는 김두수라는 가수를 이해하기 위한 글들을 모아보았습니다.





음악적 유토피아로의 고단한 여로

1986년부터 91년까지 세 장의 비범한 포크음반을 발표한 후 종적이 묘현했던 대중가수 김두수. 가요 마니아들에게 ‘꽃묘’‘귀촉도’‘약속의 땅’‘보헤미안’등 신비스런 분위기를 내뿜는 독특한 한국적 포크가락과 고품격의 에고이즘으로 무장한 노랫말로 곽성삼, 이성원과 더불어 80년대 3대 언더포크 가수로 추앙 받는다.

하지만 일반 대중들에게 그의 이름과 모든 노래들은 낯설고 다소 난해할 만큼 진지하다. 그는 사람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노래 가락 외에는 멋들어지게 소개할 ‘거리’가 별로 없다. 자신의 이야기나 음악에 대해 좀처럼 말문을 열지 않고 대중들의 반응이나 인기에도 관심이 없다.

아내와 함께 강원도 대관령 아래 산골짜기의 돔 모양 콘테이너에 묻혀 자연의 소리에 취해 사는 별난 사람이다. 기괴한 도사나 기인처럼 여겨질 법 하지만 실은 강 가나 들에 핀 이름 모를 꽃과 바람에도 정신을 잃는 순수한 영혼의 소유자이다.

몽유병을 앓듯 자신의 음악 유토피아를 노래 가락으로 표현하기 위해 전력을 다해온 김두수. 그가 10여년 만에 네 번째 음반 <자유혼>을 들고 세상에 나타났다.

온통 컴퓨터 음향으로 꾸며진 인공의 소리바다에 자연의 소리를 담아 LP와 CD를 발표, 화제가 되고 있다. 365장 한정판으로 발표된 더블 재킷 LP는 벌써 희귀음반으로 대접 받고 있다. 김두수는 세상 사람들과의 낯설은 대면을 위해 스스로 걸어둔 삶의 빗장을 잠시 열어 제쳤다.

1959년 8월 4일 대구 신천동에서 은행원이었던 부친 지재형과 중학교 교사였던 모친 김미성의 4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난 김두수. 네 살 때 잠시 마산에 살았지만 서울로 유학오기 전 까지 줄곧 대구에 머물렀다.

부친은 ‘노래하는 것은 광대짓’이라며 반대했지만 어머니만은 예쁜 목소리로 노래를 즐겨 불렀다. 김두수는 ‘어머니의 노래는 내 음악의 DNA였다’며 이내 그리움에 잠긴다. 모교인 대구 삼덕초등학교는 한국 야구계의 스타들인 장효조, 양준혁, 이승엽을 배출한 야구명문. 2학년 때 담임 선생이 지도한 음악반에 참여, 동요를 작곡해 주위를 놀라게 했다.

담임 선생이 이 동요를 대필하여 등사로 찍어 작곡집을 발표해 주었다. 음악공부가 재미났다. 어떤 노래건 한번 들으면 계명을 쉽게 그릴 만큼 소질을 보였다. 담임 선생은 김두수의 부모를 찾아가 체계적인 음악 공부를 권유했지만 부친의 반대는 완강했다.

대구 오성 중학교에 진학하자 사춘기가 찾아왔다. 말수가 줄어들고 집이 답답하게 느껴졌다. 가출을 생각할 만큼 증세는 심했다. 노래만이 자유로움을 안겨주었다. 친구들과 그룹을 결성해 여대생 누나에게 통기타를 한달간 배웠다.

당시 집안 분위기는 기타 연습은커녕 숨조차 쉬기 힘들었다. 전축이 있는 친구집에 놀러가 인기 절정이던 존 덴버, 송창식의 노래를 들으며 점점 더 음악에 빠져들었다. 능인 고교에 진학하자 학교가 싫어졌다.

초등 학교 때부터 줄곧 반장을 해온 우등생이었지만 빈둥대다 등교를 했을 만큼 방황의 시절이었다. 음악을 반대하는 부친에 대한 반항은 공부에도 관심을 잃게 했다. 학교 보다는 시냇가에 앉아 햇빛에 반짝이는 강물을 바라보는 이상한 아이로 변해갔다.

1978년 경북대에 진학했지만 견디기 힘들어 자퇴했다. 외진 시골길을 정처 없이 걷는 도보여행을 시작했다. ‘도보여행 때 얻은 정서는 내 음악적 토양이자 밭이다. 세상이 싫어지고 삶에 대한 허무감이 꽉 차 매일 술에 취해 살았다.

1집은 이때의 정서가 고스란히 담겨있다’고 고백한다. 사랑했던 어머니의 죽음은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다. ‘대학은 꼭 졸업해 다오’라는 어머니의 유언은 거역할 수 없었다.

1981년 고려대 농경제학과에 재입학했지만 휴학을 거듭 졸업까지는 6년이 걸렸다. 휴학 중 삿갓에 고무신을 신고 가야산의 한 암자를 찾았다. 50년 된 대나무 피리를 구해 밤낮으로 호숫가와 산중 바위에서 구성진 우리가락을 벗삼아 세월을 보냈다.

어느날 예쁜 나비 한 마리가 피리 끝에 날아와 앉자 자연과 교감이 느껴지는 큰 감동을 받았다. 이때의 영감은 <나비야>의 노래가락으로 이어졌다. 서울로 돌아온 뒤 82년부터는 생활비 마련을 위해 명동의 PJ살롱, 쉘브르 등에서 무명 통기타 가수로 노래생활을 시작했다.

밤업소에서 지서종이란 본명이 못마땅해 근사한 예명을 요구해 왔다. 감명깊게 읽었던 박경리의 소설 <토지>에 나오는 천하의 악당 <김두수>가 불현듯 떠올랐다. 장난끼가 발동해 정해버린 기막힌 예명이었다.






보헤미안의 향취가 느껴지는 음악세계


김두수 아니 지서종을 기억하는 대학동창생은 아무도 없다. 학교보다는 무명 통기타 가수와 방랑으로 세월을 보냈기 때문이다. 김삿갓 행세를 했던 당시를 김두수는 ‘어설픈 치기였다’며 쓴 웃음을 머금는다.

생활비의 95%가 술값이었을 만큼 삶의 허무감에 비틀거렸던 그에게도 어머니는 늘 그리운 대상이었다. 집에서 15리 길이었던 어머니 묘소를 오가며 품었던 애절한 그리움은 조곡 ‘꽃묘(시오리길2)’로 생명력을 얻었다. 창작의 첫 발자국이었다. 1985년 만든 이 곡은 음악활동을 반대했던 아버지의 마음도 돌려 놓았다. ‘아들이 당신을 위해 만든 곡이라며 어머님 묘 앞에서 녹음기를 틀며 눈물을 흘리던 아버님’을 생각하는

김두수의 눈가에는 어느덧 이슬이 맺혔다.

대학 졸업 후 남미대륙 여행을 꿈꾸며 조양 상선에 입사를 했지만 넥타이를 매자 숨이 막혀와 퇴사했다. 집안에 박혀 시집을 읽던 중 노래 가락들이마구 떠올랐다. 즐겨 마시던 술도 멀리하고 창작의 물꼬를 텄다. 그의 마음을사로잡았던 시는 미당 서정주의 <귀촉도>. 허락을 받으려 미당의 자택을 찾았다.

노래를 들은 서정주는 ‘좋군.부르게’하며 흡족해 했다. 용기가 생겨나자 킹 프로덕션을 찾아가 즉석 오디션을 받았다. <시오리길>의 네 소절만 듣고서 킹 박은 ‘그만 됐다. 판 내자’고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장충동 스튜디오에서 작업 중이던 신중현은 데뷔 앨범녹음에 열심인 김두수를 격려하며 용도폐기 직전의 마틴 기타를 선물로 주었다.녹음을 마치자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러나 온통 시위정국으로 뒤숭숭한 세상은 고려대 출신 가수의 비탄조의 가사가 영 못마땅했다. 심의불가 철퇴가 내려졌다. 대박을 꿈꾸던 킹 박은 발 빠르게 사무실 미스 리의 제안대로 문제 곡 <철탑>을 <작은 새의 꿈>으로 제목을 변경하고 가사도 일부 수정하여 심의를 통과시켰다. 재킷도 내정된 윤해남 화백의 추상화를

김두수 얼굴 사진으로 슬그머니 교체시켜 버렸다. 김두수는 데뷔음반 <김두수.귀촉도

서라벌SBK0059,86년4월>을 보고 절망했다. 또한 미당 서정주의 시 <귀촉도>를 주력 홍보 곡으로 삼으려 하자 시인에게 누가 될까 반항했다. ‘아마도 히트를 시키려는 홍보를 막았던 나를 정신 이상자로 생각했을 것이다. 전량 폐기하고 싶은 음반이 10만원도 넘는 가격에 거래되고 있다니 황당할 뿐’이라며 씁쓸해 한다.

1집은 습작 같은 곡들이었지만 한국적 서정성이 물씬 배여 있는 독특한 가락이었다. 가녀린 듯 떠는 바이브레이션 창법은 폭발적인 반응은 아니었지만 묘한 신비감을 자아내며 비수처럼 듣는 이의 가슴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러나 자취방으로 들이닥친 수사관들의 무차별 방 수색은 노래에 염증을 느끼게 했다.

1년 후 <동아기획>에서 음반제작을 의뢰해 했다. 사지 절단된 <작은 새의 꿈>을 <철탑 위에 앉은 새>로 부활시키고 진흙을 박차고 솟아나는 새순의 이미지를 담은 윤해남의 새로운 그림을 2집 <김두수-서라벌 VIP20055,88년> 재킷으로 삼으며 응어리 졌던 한을 풀었다. 첫 방송 출연도 했다. 당시 최고의 인기가수 박남정 다음 순서였는데 ‘열광하던 소녀 팬들이 왠 이상한 가수가 나왔냐는 표정으로 어찌나 냉랭한 반응을 보이던지...’라며 김두수는 껄껄 웃는다.

오랜 객지생활 때문에 영양실조에 걸렸고 경추 결핵으로 악화되며 김두수를 쓰러뜨렸다. 활동을 중단하고 양평으로 요양을 떠나자 제작사는 허망했지만 조동진은 ‘뛰어난 노래만큼이나 재킷도 세계적’이라는 찬사를 보냈다.

2집의 <약속의 땅>은 자신의 음악적 유토피아를 그려낸 명곡이었다. 이미 결핵 3기로 발전한 몹쓸 병은 3년간 병원 신세를 지게 했다. 비틀거리면서도 3집<김두수-현대HDP159,91년>제작을 마쳤다. 명곡 <보헤미안>이 탄생했다. ‘부산의 한 여성 팬이 이 노래를 듣고 자살을 기도했다’는 소식과 ‘주문진으로 자살하러 갔던 어떤 사람은 우연히 이 노래를 듣고 자살을 포기했다’는 장문의 감사편지를 보내왔다. 극단적인 반응에 음악적 혼란이 느껴지자 강원도 산골 속으로 잠적해 버렸다.

4집<자유혼>은 열성 팬의 사랑으로 탄생했다. 자비를 들여 앨범 제작비를 댄 그의 정성은 10여년 만에 김두수를 세상 밖으로 끌어냈다. 김두수는 음악적으로 모자람을 느껴오던 <보헤미안><나비>를 새롭게 완성시켰다.

김두수는 ‘절망의 끝이 아닌 희망의 메시지를 말하고 싶었다’며 밝은 표정을 짓는다. <추상> 등 새로운 곡들은 고품격으로 심오하게 변신한 그의 새로운 음악세계를 보여준다. 다소 난해한 아방가르드적인 향기가 풍기지만 사랑타령과 편향적인 R&B로만 치닫는 대중가요계에 신선한 충격을 안겨주었다. ‘마음이 어지러울 때 들으면 좋은 음악이 되기를 바란다’는 작은 소망과 더불어 직업가수가 되었음을 처음으로 인정하는 김두수. 그의 음악적 유토피아 탐험은 이제 결실을 맺고 있다.

최규성 가요칼럼니스트 kschoi@hk.co.kr





김두수 4집 '자유혼'

'은둔'이 이룬 놀라운 음악적 성취


나비는 춤을 추듯 하늘하늘 날아 움직인다. '훨훨 하늘을 날아올라' 꽃들 사이를 헤맨다. '눈멀고 귀 먼' 영혼처럼 '그저 흐느껴' 날아다니는 나비. 거기에 속세의 때와 개체의 삶을 옥죄는 구속이 자리할 곳은 없다. 자유로운 작은 존재, 날개의 작은 떨림이 만들어내는 의지와 생명력. 마치 김두수의 음악과도 같다.

김두수는 10여년을 강릉에서 은둔하고 있는 뮤지션이다. 병마에 시달린 동시에 서울 생활에서 못 볼 것들을 보아온 김두수는 물 흐르듯 돌 구르듯 그렇게 은둔 생활을 택했다. 어쩌면 자신의 노래처럼 '나비'나 '보헤미안'이 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일까. 김두수의 음악은 지금껏 보아온 그 어떤 것들보다도 독창적이다. 아니, 한국에서 이런 음반이 나왔다는 것이 기이하게 느껴질 정도다. 이리저리 떠도는 방랑자처럼 독특한 선법을 지닌 가창과 멜로디 감각, 속세를 떠난 사람만이 쓸 수 있을(도가 사상에 가깝고 仙적인 분위기가 강한) 노랫말, 격한 슬픔 대신 체념의 정서, 그리고 목가적이면서 묘한 잔상을 남기는 음악의 심상. 이런 것들은 이제껏 기성 가요에서도, 언더그라운드에서도 보지 못했던 요소들이다. 그렇다고 김두수가 특별히 이런 점들을 고려해가며 음악을 만든 것 같지도 않다.

시작은 어쿠스틱 기타의 독특한 트레몰로 주법과 신경질적인 피리 연주가 어우러지는 <들꽃>이다. 아련한 기타 사운드 틈으로 배어나는 김두수의 목소리는 그야말로 '영혼의 목소리'처럼 들린다. 아마 공안 정국이라면 마약 혐의로 잡혀가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무의식과 의식의 경계에서 유영하는 듯한 목소리이다. 이어지는 <기슭으로 가는 배>와 <나비>까지 들으면 김두수 음악의 개괄적인 특성에 대해 뭔가 할 말을 찾을지도 모르겠다. 우선 온갖 기타 주법이 다양하게 동원된다는 점. 닐 영(Neil Young)이 연상되는 쓰리 핑거 주법부터 해머링, 하모닉스까지 등장하는 김두수의 어쿠스틱 기타 활용은 놀랍다. 피크가드를 손끝으로 탁탁 치는 소리조차도 있는 듯 없는듯한 리듬을 타고 연주의 일부가 되어버린다. 스트러밍과 플러킹을 자유자재로 교차 시키는 대목에서는 절로 탄성이 나올 정도다. 그에 더해 피리, 블루스 기타, 첼로 등 다른 악기들을 반드시 한둘은 조화시키기 때문에 지루하다는 생각도 할 틈이 없다.

전주부에서 어쿠스틱 기타와 다른 악기가 배합되고, 이후 보컬이 등장해 염불하듯 도가적 메시지를 내보내고, 기타 주법이 변동을 겪으며 유유히 흘러가듯 노래는 언제 끝났는지 모르게 마무리된다. 이것만 봐서는 김두수 음악이 무슨 패턴에 기초한 듯 보이지만, 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말 그대로 길 따라 물 따라 흐르는 듯, 음률이나 공식에 의존하지 않는 거의 '최초의' 한국 음반이라는 편이 옳다. 변화무쌍하지만 질서가 있고, 귀기가 서려 있으되 차갑거나 날카롭지는 않다. 이런 부분들은 작심하고 한다고 이루어지는 것들이 아닐 것이다.

3집 음반의 곡을 재수록한 <보헤미안>은 김두수 스스로를 대변하는 듯한 노래다. 쿡쿡 찌르는 듯한 하모니카 선율과 둔중한 기타 스트러밍에 꿈꾸는 듯한 김두수의 보컬이 죽 이어지다가 한이 가득 서린 허밍이 등장하는데, 듣는 내내 한껏 고양된 감각이 어느새 비통함으로 변하는 독특한 체험을 맛볼 수 있다. 이런 청자 감각의 묘한 변이는 이 명곡에서만 나타나는 특징은 아니다. 은 흡사 러시아 Svetlana의 민요를 듣는 듯 목가적인 여유로움과 신비주의적 환각이 함께 어우러진 노래이고, 역시 트레몰로 주법이 돋보이는 <방랑부> 역시 슬픔과 체념의 정서가 공존하는 곡이다. 한없이 처연하지만 비관적이지는 않다. 그것은 아마도 김두수 본인이 생활 면에서나 음악적으로나 '은둔'을 통해서 대안을 모색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문명과 단절된 생활 속에서 보다 큰 만족을 느끼고, 이렇게 음악을 해 왔다는 것은 분명 한국의 현실을 볼 때 놀라운 일이다. 특히 이 음악들의 일관된 정서적 통일성과 개별 곡들의 크리에이티브는 분명 경이적인 성취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김두수가 프로듀서, 사운드 프로듀스 등의 용어를 잘 알지 못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더더욱 이채롭다.)

물론 김두수가 [자유혼]을 통해 제시한 '대안'은 한국 음악계의 현실과 맞물려 생각하면 마음만 아플 뿐이다. 음악계 현실과 동떨어진 곳으로 '은둔'하지 않고서는 독창적인 음악을 펼치는 것은 정녕 꿈에 불과한 일일까. 사회와 세상을 이야기하기보다는 은둔자의 사색을 노래하는 쪽을 택하는 방법밖에는 없었을까. 미사리와 소극장으로 숨어 든 한국 포크의 새로운 '대안'이 메인스트림 안에서 비판 정신을 휘두르는 음악이 아닌, 은둔자의 내면적인 노래라는 사실은 무턱대고 감탄만 하기에는 한숨이 함께 나온다. 그래서 김두수 [자유혼]은 김두수 개인의 음악적 성취로는 기록될 수 있겠지만, 한국 포크 씬에 일종의 무브먼트(Movement)를 이끌어내기에는 아쉬움이 남는 음반이다.


3집과 4집곡은 여기 누르시면 듣을수 있습니다..

문화평론가 신현준의 김두수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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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dachuh@kdacauto.co.kr 2003-08-20 21:39:42
답글

좋은 가수의 인생편력과 노래 철학 잘 읽어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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