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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수기적 칼럼 4부
자유게시판 > 상세보기 | 2010-06-28 14:43:49
추천수 0
조회수   509

제목

[칼럼] 수기적 칼럼 4부

글쓴이

박두호 [가입일자 : 2003-12-10]
내용
4. 한도병원에서의 하루

한도병원에서 길고 긴 하루를 보냈다. 거기서 나 자신을 쇄신하고 내 인생의 깨달음을 마음 속 깊은 곳에 반영하였다. 애시당초 한도병원에 오래 있을 생각은 아니었으므로 일주일 만에 퇴원하여 지금 이렇게 글의 논지를 완성하고 있다.



아니다. 모든 극소수의 지식인들이 전부 관념의 연쇄적 환원에만 집중하는 것은 아니다. 결단코 그런 일은 난센스다. 하기야 지식인의 삶에서 어떤 공통개념적인 우회가 필요할 때가 있긴 있으므로, 스피노자의 공통개념이라는 하나의 개념은 명증이 명시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우리 삶을 우회하지 않고 직진할 때, 우리는 하나의 파노라마를 본다. 그 파노라마는 필경 ‘우리는 사랑으로만 모든 걸 해결할 수 있다’라는 명제이자 공통개념을 담고 있다. 그렇다. ‘사랑’이라는 것이 지시체(기의)냐 기표냐에 따른 분기점에 도달함에 따라, 그 한도 끝도 없는 첨점에 도달함에 따라 우리는 제 딴에는 무엇 무엇을 함입했다고, 주입하고 입력/표현했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사랑이라는 것은 그 어떠한 공통개념도, 파노라마의 색깔도 아니다. 사랑은 성욕과 관계된 원숭이적인 최고도의 동물적 도식일 뿐이다. 왜냐하면 성욕은 자아의 꼴림이며, 초자아와는 상극된 하나의 지시체다. 성욕은 의미이며 곧 논리인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인 어떤 논리인가? 바로 인간의, 인간적인 상생의 논리이다. 인생의 질곡이 불어 닥칠 때마다 우리는 꼴림의 지시를 받는다. 우리는 말 그대로 슨다. 이성을 더욱 갈구하고 욕구를 불태우고 섹스에 면모를 일신 하려 한다. 군인들이 그토록 섹스-기계가 되려는 이유가 그 중 하나이다. 따라서 몰적인 것이냐 성욕이냐 하는 이항적 구분은 시종일관 항구적이고 기나긴 연장적 명제 중 하나일 것이다. 이러한 대립의 배치가 곧 전쟁이요, 장대한 외재성의 장 중 하나이다. 외향과 내향의 차이를 분리하기 전에 우리는 모종의 관점에서 시점의 차이와 그에 대한 반복을 읽는다. 하기야 얼마나 많은 공시적인 전향의 움직임에서 얼마나 일희일비하는 생을 나는 살았는가? 나 자신에 봉사하는 나의 에고? 나 자신보다 발달한 나의 초자아? 이런 무의식적 집합의 도식(다이어그램)은 분명 도의적이고 확고한 어떠한 방향성이 존재한다. 내가 한도병원에서 보낸 하루는 그러한 의미에서 결코 기표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도식 안에 구별되는 상이한 파노라마적 색깔이 그 빛깔에 따라 그 지시를 상향하고 하강시키며 내 안에 내밀한 구성체의 성향을 확실히 변이시킨다. 그 변이의 선이 바로 공통개념의 방향의식이다. 비로소 우리가 최고의 정신적 영지주의를 받아들였을 때, 그러한 신학적 논리가 바로 지식인의 삶에서 우회를 시도하게 하고 정밀한 생의 영화, 말하자면 논리적 재미의 장(관념의 모험)을 구축/개설 시켜준다. 제 딴에는 내가 정말 병원에 입원해서 무엇을 깨닫고 왔는지 질의할 수도 있고 의문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병원에서 나는 철학의 연주, 철학적 문학의 정합성으로 말미암아 개화하고 왔으며 그러므로 내 글쓰기의 예술은 한층 발달해 이제는 문장을 이리 비틀고 저리 비틀어 밑도 끝도 없이, 중복되지 않게 써내려 갈 수 있다(문학의 편으로 미끄러져 내려갈 수 있다!) 한도병원, 엄밀히 말해 이 쓰레기 같은 기관 같은 정신병원에서 나는 어떤 할아버지한테 발도 차이고 누가 뒤에서 물병으로 머리를 한 방 갈기고, 그러한 데서 살아남아 한층 성숙하고 정연하고 정치한 산문정신을 함양하고 스스로 금 모든 인생의 질서를 개선해나가고 시정하였다. 그러한 연유로 나는 나 자신의 자의식에 대해 무한한 자부심을 가진다. 내 자의식은 모종의 유기체적 질서와 실존적 자가 판단으로 가득 차 있다. 실존이라고 해서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를 일컫는 것은 아니다. 단지 스피노자적 공통개념을 넘어서, 유의미한 문제설정 아래 파노라마의 도식을 정확히 재고 닦아 실존적 철학의 글쓰기를 시도하고 마침내 확정하는 것이리라. 하기야 내 전반적인 성향, 그토록 공격적이고 파괴적이며 도시적이거니와 전체적으로/총괄적으로 서구적인 그러한 성향이 내 불멸의 사상에 도움이 되긴 되었다. 그렇거니와 마찬가지로 내 이국적인 지향성은 랭보의 그것을 능가하였고 비로소 나는 그와 만나고 작별하고 또다시 해후를 가졌다. 그래서 내 불멸의 사상은 정립되었고 또 재정립되었고 마침내 종합되어서 새로운 선택된 실체가 수면 위로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만의 한도병원에서의 수련은 이렇게 마무리 되었다. 오늘은 곧 바로 청량리 정신병원으로 입원하로 간다. 거기서 직접적으로 내 글쓰기의 마무리에 대해서 스스로 금 논의/논쟁 해 볼 것이다. 왜냐하면 내 글쓰기의 변천, 내 글쓰기의 변용은 가히/명실공히 내양적이었지만 이제는 뚜렷한 직관에 입각하여 제대로 한 방 먹일 것이다. 누구를? 와싸다 지식인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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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희성 2010-06-28 14:56:38
답글

^^

protectwater@hanmail.net 2010-06-28 15:08:05
답글

전 남을 이기는 방법이 내가 잘나는 것이 최고라 생각 합니다.<br />
<br />
세치 혀로 이겨봤자 누가 알아 주나요

mikegkim@dreamwiz.com 2010-06-28 15:09:29
답글

낭중지추라는 말이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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