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s 내면의 붕괴가 일어나도 글을 쓰는 기능은 여전히 앞으로 나아가네요. 오늘은 정신병원에 입원하는 날입니다. 이번으로 9번 째네요. 저의 건투를 빌어주세요.
5. 미국영화를 즐겨보는 남자
나는 어릴 적부터 미국영화를 시청하는 환경에서 태어났고, 지금껏 접한 영화는 계산에 넣을 수 없다. 그러나 대부분의 일반인들도 나와 마찬가지이다. 대다수가 헐리우드에 노출될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태어난다. 요즘에는 그나마 한국영화의 진보로 그 정도가 약해 졌지만 그래도 여전히 영화의 최고봉은 헐리우드라 할 수 있겠다. 글이 안 써지고 음악이 안 들려올 때마다 나는 영화를 봤고, 나름대로 인문학적 소양에 도움이 되긴 되었다. 시야가 넓어지는 느낌이랄까? 이것은 책과는 여실히 다른 느낌이다. 책이 전문적이라면 영화는 다면적이다. IMDB(세계인의 투표로 영화순위가 정립되는 사이트)와 엠파이어지(왠만한 미국잡지를 능가하는 영화잡지)의 영양가 있는 영화는 장르를 불문하고 전부 망라하였다. 그리고 이제껏 내가 너무나 추한 영화들을 많이 보아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여기에 추산된 영화들의 공통점은 하나같이 휴머니즘을 다룬 영화들이라는 것이다. 마피아 영화나 타락을 주제로 다룬 영화들이라도 그 내양에 자리 잡고 있는 시사점은 휴머니즘이다. 휴머니즘은 사실이지 특별한 장르라고 볼 순 없다. 우리 생활 철학 그 자체가 이른바 ‘휴머니즘’이다. 그래서 따로 생활과 예술을 구분할 필요성을 필자는 느끼지 못한다. 생활을 지반으로 예술이 탄생하는 것이고, 예술은 또 다른 생활의 신호탄이 되어 우리에게 날아온다. 그렇다면 영화는 엔터테이먼트냐, 예술이냐? 이 또한 명확히 구분되어서는 안 되는 이중적 선택성이다. 엔터테이먼트가 예술 이를테면 클래식의 반열에 낄 수 있는 것일 테고, 예술이 추악한 엔터테이먼트로 전락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중적 의문제기는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그 해답이 나온다. 예를 들면 마틴스콜세지의 영화 [택시 드라이버]는 때에 따라서 우스꽝스러운 영웅 영화로 해석될 수도 있고, 쿠폴라의 [대부]는 현대에서는 지루하고 엉성한 마피아 영화로 인식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과 대중은 종국에는 가치평가를 배반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 만큼 정확히 한 예술작품을 평가할 수 있는 시대적 여건이 없으나, 시대가 시대를 극복하면 예술 역시 자가 예술성을 극복하고 새로운 재평가의 국면을 맞는다. 이를 ‘신국면’이라고 한다. 신국면은 시간이라는 요소와 사회라는 요소의 상호작용에 따라 창의적으로 생산된다. 예컨대 글을 쓸 때도 옳고 그름이라는 요소를 간과하고는 절대 좋은 글이 나올 수 없다. 옳고 그름은 이렇게 시간과 사회의 힘으로써 새롭게 수면 위로 떠오르는 것이다. 현재는 과거와 미래의 정합적인 가치판단으로써 재정립된다. 또한 존재는 곧 시간의 연쇄적인 작용이며, 존재에 관한 인식론은 모두가 시간의 연속성에 의거한다. 써놓고 이게 관련된 문장인지 의문이 들지만(?), 중요한 것은 예술작품을 시대에 비추어 판단해서는 결코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판단을 조금 우회할 필요가 있다. 논리의 우회가 결코 생각의 전환은 아닌 것처럼 ‘우회’가 결코 ‘전환’은 아니다. 대부분의 영화 평론가들이 중시하는 것은 스크린에 표현되는 시각적 미학과 음악의 미학에 대해서이다. 이것이 바로 미디어적 미학이요, 영화의 양가적 존립법칙이다. 그렇다고 영화를 현실과 오인해서는 안 된다. 영화에 표현된 대부분의 것들은 허구요, 거짓(픽션)이다. 영화와는 동떨어진 삶을 살아야 하고, 영화와는 분리된 우리네의 지겹고 일상적인 생이 바로 현실인 것이다. 카메라로 못 잡아내는 영상은 없건만, 그것을 곳이 곳대로 사실로써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그러나 영화 같은 삶은 로맨스요, 로망이요, 푸른 하늘 위의 꿈이다. 요즘 영화들은 반복과 차이라는 딜레마에 빠져 허둥대고 기를 못 쓴다. 새로운 것을 탄생시키기 위해서는 새로운 창조의 핵심사물들이 필요한 법이다. 원칙과 법칙을 따져서는 이 새로움의 빛을 직사할 수 없다. 미래의 영화가 갈 길은 현재를 비추는 안목이 아니라 미래를 바라보는 혜안이 될 것으로 예감된다. 내 영화 인생은 비교적 짧지만, 연대기를 대표하는 영화는 빠짐없이 보아왔다는 데서 오는 자부심만은 여전하다. 이 자부심이 당당한 인생을 바치는 주춧돌이 될 것이고 내 모든 이론은 그것에서 원천할 것이다. 이로써 내 개인적인 영화 이론이 막을 내린다. 오늘도 내 칼럼을 읽어주는 독자들에게 마냥 감사할 따름이고, 글을 쓸 수 있는 손과 머리에 감사한다.
-박두호의 칼럼은 4부에서 계속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