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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왜 꼰대인가?-극복할 수 없는 세대차이에 대한 분열증
자유게시판 > 상세보기 | 2010-06-12 16:45:11
추천수 0
조회수   793

제목

[칼럼] 왜 꼰대인가?-극복할 수 없는 세대차이에 대한 분열증

글쓴이

박두호 [가입일자 : 2003-12-10]
내용
꼰대들이 설치는 세상



꼰대, 대부분의 학생들은 나이가 40살 넘어가는 사람을 이렇게 지칭한다. 왜 중년들이 이런 비하적 주례사로 점철되었는가? 대부분 이런 사람들이 나이 어리거나 젊은 사람들을 배려하지 않고 나이 차로 어떻게 해보려는 심상을 가졌기 때문이다. 이들은 이미 새로운 세기가 도래한 지금에 와서는 하나의 부속물에 지나지 않는다. 이들로 인해 경제적 개방성이 오히려 심각한 패쇄 국면에 도달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엘빈 토플러는 한국 사회가 심각한 세대 차이로 인해 새로운 신국면에 도달했다고 말했다. 사실 말이지 현재의 중년들은 머리에 든 거 없이 어디서 주어들은 정치 얘기에만 급급하다. 왜냐하면 이들은 기계적인 돈벌이에만 평생을 바쳐 왔고, 그러니 이들이 논할 추상은 그나마 정치에 머무르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사실상 이들에게 인문학적 성찰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이들은 벌어먹고 살기 위해 수없이 노력해왔고 요즘의 10대들은 무노동을 지향하면서 자기성찰의 기회를 가질 기회가 수없이 자아에서 교차해 왔을 것이다. 프랑스 지성의 최고봉 장 폴 사르트르는, 노동의 무가치성에 대해 끊임없이 예찬한다. 단순히 사회의 기능으로 남는 게 아니라 연금생활자로써 일하지 않고, 직접적으로 인간 실존을 체현함으로써, 단지 인생의 단적인 면을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내면의 피상적인 것의 반대 편 즉 내(內)상적인 측면을, 그 심층적인 인간 내면의 근저를 경험하는 것, 그것이 바로 진정한 인간의 생이라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많은 10대들이 자기의 본질을 살려고 직장생활을 거부하고 문예나 음악, 그림에 열중하기도 한다. 필자는 벌어먹고 사는 삶, 노동해서 얻으려고 하는 유치하고 치졸한 삶, 다만 사회적 기능의 일부에 편승하거니와 눈뜨면 매일 후덥지근한 지하철에서 몇 시간을 보내는 그런 불쌍한 삶을 경멸하고 경시한다. 그들은 도대체 무엇때문에 사는가? 왜 그들은 단지 세상에 그럭저럭 존속하고자 하는 원숭이적 삶을 지향하는가? 애 낳는 것이 과연 중요한 것인가? 그렇다면 자기본위는, 자아성취는 어디로 흘러가야 하는가? 틀렸다. 많은 이들이 잘못되고 몰상식한 삶을 영위하고 있다. 모두가 자본주의의 병폐에 찌들어 쪽도 못 쓰고 있다. 그렇다면 가난한 아이들은? 부의 정당한 분배문제는? 전쟁의 최후의 종식은 도대체 언제 쯤?



자기 속성·본질·특성·영혼·성격을 간과한 채 자본주의라는 이름의 또다른 공산주의에서 고군분투하려는 사회적 움직임은 실로 병적이다. 꼰대가 왜 꼰대냐? 주변사람들의 눈치를 슬슬 봐가며 자기 개성은 물론이거니와 남의 개성까지 말살하려는 사람을 우리는 꼰대라고 한다. 이들에게 삶은 진정 무엇이란 말인가? 왜 꼰대들은 자신의 길을 유보한 채 사회가 차려놓은 길을 걸어가려고 하는 것일까? 40대들과 50대들은 모두가 정말이지 상이한 구석을 찾을래야 찾아 볼 수가 없는 게, 이들에게는 심각한 동류성의 잔재가 깊이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솔직히 자기 삶과 자아를 견지하지 못함과 동시에 남을 기만하고 자기 실리만 추구하는 데 급급하고, 거짓과 위선이란 가면으로 자기의 얼굴을 가리고 있다.

 

우리네 사교생활에서 자아의 이면의 외부라 할 수 있는 표층 부분은, 대부분 허례의식과 거짓·자기기만에 가득 차 있다. 우리는 쉽사리 자아를 드러내 보이지 않는 존재이며, 자신의 정당성만 해명하려고 부단히 노력하거니와 수없는 거짓들을 ‘참’으로 만들어 내기 위해 또 다른 거짓을 생성하는 존재이다. 비단 나와 너만 그리하는 것이 아니라, 이 사회 내부적으로도 그러한 자기합리화와 법적 방종이 만연한다. 그리하여 이들은 내면, 즉 심층을 잃어버린 채 부유하는 하나의 모순체이며, 따라서 사물의 내부, 심층을 바라보는 눈도 점차 사라지기 마련인 것이다. 우리는 단지 현상의 피상적인 면만 직시할 뿐 그 현상의 이면을 탐색할 수 있는 작업에 착수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렇게 모순성만을 따르는 우리네 인생에 있어 그나마 진실을 가리켜주는 것은 바로 실증과학이므로, 우리가 과학에 착목하여 지나치게 비용을 투자하는 금래의 현실은 결코 이상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미 우리끼리의 소중한 무엇(예컨데 덕목과 사회의 미덕, 사랑과 평화)을 잃어버렸으며, 대다수의 사람들은 실리 추구에 급급하고 세상은 돈에 의거해, 돈을 지향하는 사회적 구조의 분위기만 팽배해진 게 사실이다. 결국 사람들은 ‘진실’이라는 문제를 논하는 것에 지쳐버렸고, 비로소 우리가 당착할 수 있는 몇 가지 현실들은 우리가 단지 ‘밥벌레’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가리킨다.



사르트르의 대저 [구토]에서 연금생활자 로캉탱은 이 밥벌레들을 비난하고 멸시한다. 이들은 돈을 벌려고 일을 하여 자신의 본질을 간과하는 생을 살고, 일하지 않는다는 것이 진정한 내면적 삶이라는 걸 인지하지 못한 이들에게, 만일 삶에 있어 정의(定擬)를 내릴 수 있다면 그것이 본디 삶의 진실된 긍정적인 자세라는 걸 깨달은 자가 로캉탱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무소유 뿐만 아니라 무노동도 인간 존재로 엄존하기 위한 지름길이라는 걸 로캉탱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서구 자본주의에 종속되어, 자본주의의 노예로 평생을 살아간다. 여기서 주어지는 한 가지 명제는 이러하다. “돈을 버느냐 죽느냐(Get rich or die trying)". 이러한 소론을 논구하자면 명실공히 많은 비용히 필요하다. 돈에 의해 선택되느냐 돈 자체를 선택하느냐 하는 문제가 원론이 된 지금, 그 누구도 삶에 대한 문제에 관해 접근하기를 거부하고 또 그것을 말살하려고 혈안이 돼있다. 누구도 인문학적 물음을 제기하려 하지도 않거니와 누구도 문학적인 삶을 원하지도 않는다. 자본주의는 우리를 퇴폐하게 만들었다. 좌절을 강림하게 하였고 또한 우리가 우리 삶의 모든 동태를 단지 ‘동적인 현상’ 문제로써 조감하게 했다. 하기야 얼마나 많은 이들이 대의명분을 위한 희생과, 거대한 부를 위한 보조로서의 ‘기능’ 역할 만으로 퇴락해갔는가? 철학적 이원론이라고 할 수 있는 ‘외면’과 ‘내면’의 분리, 그것은 점차 현상이라는 하나의 일원론으로 접어들 때까지 우리는 어깨 위에 얼마나 무거운 관념의 짐을 져 왔는가? 모든 것이 한 순간에 신(神)의 편으로 미끄러져 갈 때에 우리는 신 역시 존재자라는 사실을 망각한 채. 그를 숭배하며 기도 드린다.



꼰대들이 모르는 사실이겠지만(사실상 그들에게 자기 철학이라는 것이 없겠지만), 삶은 무상한 것이다. 그러나 삶의 순간적인 것, 일시적인 것에 절대성을 둘 때 삶은 유효적인 것, 지극히 유한한 개체가 된다. 그렇다고 해도 우리의 젊은 시절은 다 어디로 갔는가? 사춘기 시절에 파릇파릇한 여자애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 우리가 삶을 어떤 별도의 것, 보조의 것으로 생각할 때 우리는 의식의 피안으로 나가 사물에 극단적인 객관성을 부여할 자유가 주어진다. 그것은 그러나 유보된 자유이다. 그것은 삶의 방종의 자세이다. 하나의 참미로운 그러면서도 보편적인 무엇에 우리가 주목할 때, 다른 것은 배제하더라도 거기에 베어있는 미덕을 끌어내릴 그 순간에 우리는 우리 의식이 기투의 경지까지 올라간 것을 인식할 수 있다. 그 미덕이야말로 삶의 방종과는 구별되는, 삶의 방종과는 간극에 있는 선험적인 인간 원형의 일종이다.



세상에는 두 가지 종류의 인간이 있다. 자의식이 있는 인간, 자의식이 없는 인간. 꼰대들은 바로 후자에 든다. 인간은 투쟁의 역사에 부딪히면 추상의 세계에 몰입하게 된다. 자의식이 있는 인간, 자의식이 없는 인간. 자의식은 능력과 전혀 비례하지 않는다. 자의식이 없는 대표적인 인간이, 빌게이츠나 워런 버핏과 같은 기업가들이다. 이들은 몰자의적인 기능의 인간들이다. 이들이 대표하는 것은 한마디로 기능이다. 반면, 이들과 상반되는 형태의 경우에는 철학자나 소설가를 들 수 있다. 이와 같은 경우, 추상적이고 감성적이며, 자의적이고 자가적인 성정을 가진다. 철학자들이나 소설가들은 보통 자아의식에 그 중점을 두고 인문을 탐구한다. 이들에게 추상적·철학적 글쓰기는 이들이 가지고 있는 표상의 전격적인 근거이다. 추상을 연구하라, 삶의 체계를 선택하라, 이야기를 구성하라.



자의식이 없는 인간들은 어린 시절부터 그래왔던 것은 아니다. 우리는 사춘기 시절 삶의 양가적인 선택의 통로에 당착하게 된다. 이런 미분적인 생의 길의 선택은 예술가냐, 직업인이냐 하는 이중적인 선택구조를 우리 앞에 제시한다. 왜냐하면 예술가의 길과 직업가의 길은 천명이 아니라 인생길의 일희일비하는 모순율의 하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정적인 길, 정태적인 길은 동적인 길, 동태적인 길과 여러가지 상반성을 함의하고 있다. 예술적인 삶과, 돈을 지향하는 삶의 차이는 바로 이 다다한 이질성에 의거한 일종의 비의이다. “삶을 정갈하게 구체화하라, 삶의 추상적인 개념을 현실적인 개념으로 전향화하라.”



따라서 우리가 자아와 기능을 구분하려면, 어떤 다면적·다의적인 차원을 정확히 목표화해 걸러내야 한다. 거기서부터 사고관념과 추상이 생성된다.



정적인 표현과 시각화에 중점을 둬라. 하여튼 간 우리들이 마지막에 이르는 귀추는, 우리가 초기에 직면하는 근거에 그 바탕을 깔고 있으며, 그 바탕의 색깔은 검정색이라기보단 블루에 가깝다. 블루란 우울을 뜻한다. 그러니까 우리 삶의 상이성은 이 한없이 투명한 블루에서 나온다고 보면 된다. 우리 삶의 근저를 이루는 ‘우울’이라는 특성은 그 누구나 내재하고 있는 파렴치한 색깔이다. “삶에 근거하라, 삶의 양태를 살피고 바람직하게 헤아려라.”



따라서, 한국 사회에 만연하는 이 세대차이는 필연이다. 젊은이들은 영원히 중년들을 꼰대라고 지칭할 것이고 이것은 절대 극복할 수 없는 21세기의 숙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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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kstars@kornet.net 2010-06-12 18:20:00
답글

에효~<br />
준석군, 얼른 마음의 병을 훌훌 털어버렸으면 합니다......<br />

lematin21@yahoo.com 2010-06-12 18:49:57
답글

이분 본명이 준석님이었군요. <br />
준석님 오래간만이네요. 이제 봄도 지나고 여름인데 건강 빨리 회복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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