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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오디오 생활은 나에게 도대체 무엇인가?
자유게시판 > 상세보기 | 2010-06-03 04: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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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수   383

제목

[칼럼] 오디오 생활은 나에게 도대체 무엇인가?

글쓴이

박두호 [가입일자 : 2003-12-10]
내용
오디오 생활을 하면서 많은 운명적 상황에 착목하게 된다. 내가 이 글에서 논의하는 바가 배리가 될 지 항진명제가 될 지, 나 조차도 확실성을 두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나는 마치 신인 양 떠들어 대지는 않겠다. 어떤 확실성이 내 앞에 조응했을 떄, 바로 그 때에 나는 내 이론의 진실성이 보증됨을 합당화 시킨다. 그러나 예를 들어 내가 생각하는 사고는 분명 앞뒤가 맞지 않고 따로 따로 놀고 있으며, 거기에 대응하여 나는 여러가지 미분화 된 합리화의 방향으로 접어들어감을 번번히 느낄 수 있다. 내 글이 설명하고자 하는 바는 명백히 어떤 자명성에 관한 글이다. 그 자명성은 전전긍긍하며 내재된 내면과 외재된 외양 사이의 반목의 불일치성에서 복잡미묘하게 반응함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이분적 대립이 가져오는 결과는, 그 파장으로 말미암아 모종의 선택성, 이성이 배제된 방향성을 가지게 된다. 따라서, 변증법적인 이성의 착란은 어쩔 수 없이 우스꽝스러운 상황을 야기시키며, 그 상황이 사태라는 울타리 안에서 만족스러운 주체/객체 사이의 아이러니를 종식시키려는 각고의 노력을 행하리라는 것을 실증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하리라. 바야흐로 소멸과 분열의 시대에 접어든 금래에 당도하여, 우리가 인식(견지)할 수 있는 동일자로서의 지적 이해력은 여러모로 '불가능'이라는 벽에 부닺뜨릴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개인이 현상 너머의 존재론적 파악, 즉 의식의 피안, 모든 외면의 배후에 있는 미시적 <미사여구>의 견지는, 우리 각각의 영혼들이, 심미롭고 극도로 아름다운 색체를 얼마나 잘 알고 있느냐 모르고 있느냐에 달려 있다고 본다. 하기야 그 누가 형이상학의 이상(異上)의 도상에서 일종의 자기본위의 당착함을 적시하고 있는가, 라는 질문에 대답하고 결론 내릴 수 있겠는가? 만약 그렇다면, 우리가 정적인 메타적 시스템을 선이해할 때, 정말 그것과 접목했을 때에 우리는 우리가 "내가 바로 존재자다"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으리라. 그리하여 우리는 그로 하여금 더욱 풍족하고 안락한 삶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삶을 일실하지 않고 곧바로 일소에 부칠려면 스스로에게 이른바 정치한 편린의 인지를 괘념치 않아야 할 것이다.



오디오 생활은 내게 하나의 삶의 여유가 되어주었다. 나는 모든 삶의 에너지를 오디오에 쏟아부었고, 오디오는 그 만큼 내게 부흥해 주었다. 오디오가 내게 주는 쾌락과 환희는 그 어떤 카타르시스, 이를테면 육체적 쾌락이나 독서를 하는 쾌락 이상으로 영광의 상징이 되어주었다. 철학적인 글쓰기가 내 자아의 표상이었다면 오디오를 구입하고, 기기를 음미하고, 종국에 이르러 음악을 애청하는 일은 내게는 초현실적이고 미시적인, 오락을 넘어선 궁극적 신의 경지에 이르는 길이었음에 나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정갈하고 압도적인 오디오의 <실음>은 내게 초월적인 의지를 부여하였거니와 오디오의 계명성은 내게 의문의 여지가 전무한 그런 황홀의 상태를 선사하고 또 실로 '실재적인' 사태에 나를 몰아넣었다. 내게 탈출구라거나 메시아주의는 내 인생과 불가분의 관계였다. 나는 언제나 구도적인 도정을 추구 혹은 지향하였는데, 이와 맞물려 내 고통,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전대미문의 고통을 난 오디오의 음을 통해 극복해낼 수 있었다. 그리하여 비로소 내 언어, 내 사상, 내 철학체계의 풍격은 완전무결하게 굳어졌고, 그런 '음의 의식'으로 말미암아 나는 대우주의 저편에 설 수 있는 권리를 보장받았다. 그러나 음의 철학이란 무엇인가?, 음의 절대적인 모티프란 어디서 전격적으로 추출되는가?, 음이 불러일으키는 환영은 어디에서 근거하는가?, 라는 물음들은 도저히 풀리지 않는 미완의 숙제였다. 그렇지만 내가 연상시킬 수 있는 여러 음의 언어들은 이 문제 저 문제 설왕설래하며 모색해 가는 게 아니라, 아닌게 아니라 그런 심층적이고 본질적인 물음들은 일련의 추상이자 혼자서 창조해내야하는 독법이였고, 그걸 풀기 위해 나는 조약한 나르시시즘에 착안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보아라, 이와 마찬가지로 전체적이고 총괄적인 물음들을 해결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난해한 문법체계를 도입하기가 불가결하게 되었다. 따라서, 글을 씀에 있어, 문제를 제기하고 분해(분석)하며 또 그것을 재조립하는 과정에서, 나는 모종의 자가당착에 빠질 수 밖에 없었다. 그것은 바로 이것이다. "문법을 파괴하라, 그리고 거기의 이면의 핵심에 자리잡은 패러독스를 포착하라, 그리고 나서 현기증 날 정도로 어지러운 관념적 실체에 안주하라. 우리는 피장파장 일면적인 사건들을 우회하기 마련이다. 지식인의 삶에서, 리스너의 삶에서 이런 정태적인 우회는 무엇에 의거해 찾아오고 또 우리는 어떤 분별력으로 본격적인 광분을 시도해야 하는가? 그것은 명백히 복잡다기한 현상이며, 우리 삶을 상회하는 하향하는 구조적 문제들의 부정적인 관점에 다름 아니다. 그렇다. 우리는 본래의 본령을 유지해야 하거니와 본질을 살아야만 한다. 우리는 우리를 살아야 한다. 이는 이른바 동일성의 문제이다. 우리가 미제의 문제들을 풀어나가고 거기서 바로 우리 생의 시작점을 점철해야 할 때 우리는 항시 <구조>적인 지적 방기에 도달한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것을 우회하는 것이고, 결론적으로 그것은 도피에 다름 아니다. 진짜로 논해야 할 논점은 무엇인가? 오디오는 그래서 이런 모든 문제를 말끔이 마치 해결사처럼 해결해주고 정답을 제시해주는 하나의 이데아다.



오디오, 그 불멸의 열정, 나는 영원히 그것에 관해 연구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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