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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표현이 중요합니다.
자유게시판 > 상세보기 | 2010-05-12 18:19:17
추천수 0
조회수   370

제목

[수필] 표현이 중요합니다.

글쓴이

박두호 [가입일자 : 2003-12-10]
내용




p.s 경어를 쓰지 않아 정말 죄송합니다. 그러나 이 글은 개인적인 자전이 포함된 것이라 예상치 않게 반말을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반말 찍 뱉는 것도 기분나쁠 수도 있겠지만 이 글은 관념을 추구하기 위해 작성된 글이라 예의차리기가 불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예컨데 책을 읽을 때 반말이 나와도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않죠. 책은 아무리 애를 써도 관념적인 원점을 벗어날 수 없는지라[심지어 역사까지도] 반말이 어울립니다. 생각을 존댓말로 하는 사람이 없듯이요.







표현이라는 일종의 기술(技術)은, 책을 읽고 사유를 지속적으로 함으로써 발달해가는 것이다. 데카르트의 저 유명한 명제 ‘나는 사고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에서, 인식들의 결합[표상들의 유동적인 상호관계]이라고 할 수 있는 즉 사고(思考)는 인간의 현존을 담보로 하는 정신적 현상이다. 그렇다면 사고(사유)의 발달이란 다시 말해서 정신적 성숙을 일컫는다. 그런데 보아라. 정신적 성숙을 남에게 표현하고 자랑하고 싶다면 무언가 그것을 대안할 언어가 필요하다. 남에게 수사적인 기교를 부려가면서 자신의 생각을 정치하게, 무엇보다 논리적으로 말하려면 언어를 부리는 능력이 필요불가결하다.



필자는 2년 전만 해도 제대로 된 글을 쓰지 못했다. 다른 사람에게 내뱉는 말도, 문제의 핵심을 짚지 못했다. 그러나 지속적으로 언어의 체계를 확립하면서, 예컨데 글을 쓰고 책을 읽는 반복학습을 통해서 언어의 누각에 그 닻을 내렸다.



나는 어릴 적부터 무척이나 조숙했다. 그리고 그런 아이들이 으레 그러듯 극도로 예민한 감수성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평생 고독했다. 그런 내게 관념이란, 철학함이란 일종의 도피요 안식처였다. 과거에 나는, 얼핏 기억하기로 15살에서 20살까지 산을 그것도 혼자서 매일 4시간 씩 타면서 끊임없는 사유의 과정을 거쳤다. 마치 그것은 마르지 않는 우물과 같이 생각들이 터져 나왔다. 한때는 스님이 될까도 궁리해보았다. 무엇보다 조용하고 담연한 곳에서 묵상하기를 좋아했기 때문에서였다. 그러다가 22살에 서양철학과 사상을 접했다. 온갖 잡동사니며 과거는 차치하더라도, 나는 이게 바로 내 본령의 원천이라고 느꼈고, 또한 내 존재 자체의 불멸을 보장하는 유일한 길임을 직시했다.



철학은 이미 철학이 아니다. 철학은 무수한 언어표현의 가능성이 내재되어 있는 언어유희의 극점이요, 그 어떤 예술보다 더 예술적인 ‘논리’의 예술이다. 허나, 논리만이 전부라고 할 수는 없다. 논리만이 우주 자체에 엄존한다면 거기에 그 어떤 일말의 가치성이 남아있겠는가? 원리에는 가치와 의미의 양립 가능성이 공존해야 한다. 이른바 깨달음, 성찰, 직시, 의미의 인식 등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이렇게 모든 관점을 망라한 무한한 미학의 장(場)을, 예술에 참여하는 행위가 아니라고 감히 누가 논할 수 있겠는가?



65억 인류의 대다수가 힘겨운 노동에 시달리는 것은 소수 부르주아들의 착취요, 일련의 마약제공이다. 돈을 황금목걸이를 흔들듯 흔들어대며 유혹하면서 그들을 자본주의의 노예로 복속시킬 따름이다. 예나 지금이나 귀족들의 횡포는 달라진 게 없다. 가능성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 사람들은 외쳐대지만, 그 방향성이 부(部)로 가야하는 게 아니라 ‘가치 일반’의 문제로 직결되야 함이 올바르다. 그러나 한 가지 부르주아들이 간과하고 있는 핵심적인 개념이 있다. 인생은 물리가 아니라 관념이라는 것, 세상 역시 순수 이성 가외의 공간, 즉 인간조건의 피안[신(神)의 편]을 애써 무시하려고 하며 세상을 관류하는 온갖 선험적 가치들을 왜곡해서 받아들이려고 한다. 부르주아들은 물질적으로는 안락하지만 결코 소유의 속박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죽을 때까지 말이다. 다시 말해서 인생에 주어진 시간을 재산을 탕진하는 데 써버린다. ‘소비’라는 동물적인 욕구에 영원히 갖혀 있는 것이다. 그들은 사후세계의 존재가능성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것을 두려워하는데, 그것은 바로 소유가 곧 범죄라는 당위성이 성립한다는 것을, 그들 자신이 누구보다 먼저 깨닫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대속하지 않는 이상 자명적으로 단죄 받는 다는 건 그 어떤 사실보다도 필연적인 착정이다.

인생을 다시 한 번 생각하자. 돈의 흐름(cash flow)은 언제나 준비하는 자에게로 향한다지만 돈의 가치를 아는 사람은, 인생을 아는 자이여서, 거기에 필수지향적인 완전성에 도달하려면 내면적인 성숙함이 전제되어 있어야 한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필자는 어린 시절 이미 인생을 깨닫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세속에 숨어있는 현자들만이 두루 갖춘 시점적 능력이라 일반인이 그것을 의식하기는 어렵다. 이른바 코드가 다른 것이다. 세상에는 두 가지 유형의 사람이 있다. 동물과 인간. 대부분의 인류는 동물적인 코드 예를 들면 섹스나 탐식, 교만과 시기, 나태와 이기심, 보호본능과 교만에 빠져있다. 예컨데 세상이 자유롭게 돌아가는 것 같지만 모두가 철저한 규제 이를테면 돈과 법, 규칙과 원칙, 고정관념에 빠져 있다는 사실을 간과한다. 이들은 한마디로 천한 인간들이다. 깨어있는 자, 돈을 추구하지 않거니와 예술과 인문학의 고결성을 탐미하는 자만이, 진정으로 ‘존재자’의 범주 안에 존립한다고 할 수 있으며, 올바르게 영혼의 착지를 전향케 하는 말하자면 ‘혁명적인’ 인간임이 분명하고 난 생각한다. 혁명은 결코 돈과 외재적인 측면에서의 전환이 아니다. 혁명은 자기 내면의 모종의 기획, 하나의 지적 전통성을 전승받고 깨어있는 지식인으로써 세상에 대한 비판의식을 가지고, 실천하는 자만이 그러하다. 모든 역사적인 출발점은 분노에서 시작되었는데, 이 분노는 욕망의 규제에 대한 반발로 인해 생겨난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욕망이 기술적 발전과 혁명 이 두 가지의 이항대립을 만족시킨다는 것을 안다. 혹자는 내 글이 졸렬하다고도 생각할 수도 있고, 또는 내 글이 편파적임과 동시에 모순적이라고도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단지 이 글은 개인적인 사변(思辨)에 관한 것이고, 한 개인의 지향적인 가치 내부 판단이라고 여기면 될 것이다. 모든 개인은 사상적으로 대립하기 마련이거니와 특히나 예술가들은 더욱 그러하다. 써내려가면서 서두에 약간 착오가 생겼는데, 이 글의 요지는 표현이라는 일종의 기술이 언어능력과 수사적 기법에 의해 정평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남에게, 내 친구와 내 여자에게 나의 전체적인 생각과, 세상을 보는 눈과 개인적인 의식의 지평의 색깔, 그리고 진실된 취향과 자기지향성을 유려하게 말할 수 없다면, 그것은 곧 인간적으로 외톨이요, 성숙하지 못한 인간의 유형 중 하나라 할 수 있겠다. 책을 읽지 않은 자와 세상에 관해 논하지 마라. 오히려 그런 사례는 커다란 유해성을 가져올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생각 없는 여자와도 사귀지 마라. 그런 성적 짐승들은 이를테면 매춘부나 다만 하나의 성적 요기감에 불과하다. ‘백치미도 물론 여자의 미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이 갖출 만한 미덕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도덕적인 인간은 이익을 위해 도덕을 추구하는 게 아니라 자기영혼에 대한 행복의 관점에서, 쉽게 말해서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 그러니까 진정한 행복을 살기 위해서 순간을 사는 자, 진정으로 의미의 방편으로서 개인주의를 추구하는 자만이 그러하다.



젊은이들은 여러 가지 착오 속에서 살아간다. 그 중 하나가 충동적인 깨달음과 서서히 다가오는 깨달음을 분유하지 못함에 그 핵심적인 이유가 있다. 충동적인 깨달음은 욕망에 관한 것이다. 그것은 생각보다 위험한 인간본능의 방식이다. 직관은 인생을, 왜곡시키고 심각하게는 망치기도 한다. 생각에 생각을 하고 어떤 일에 관해 판단해도 모자를 판에 동물적인 본능에 자기 인생을 맡기는 엉뚱한 결과를 불러일으킨다. 으레 말하듯 인생을 헛산 사람들이 전부가 이 범주에 속한다고 필자는 예상한다. 한마디로 옳다고 느끼는 것은 가만히 생각해보면 결코 옳은 것이 아니라는 걸 뉘우칠 것이다. 젊은이들은 방탕하고 도덕적 고결성이 심히 떨어진다. 이들은 인생에 관해 모른다. 그러나 중년 쯤에 접어들면 자기 인생의 방향에 대해 심층적인 고민에 빠지기도 하는데, 이것이야말로 한 사람의 생을 구원하는 어둠 속의 별과 같은 그런 것이다. 그러나 여기 한 가지 사실이 있다. 언어가 직조하는 고차원적인 예술, 즉 표현은 이 사회 속에서 보다 유쾌하게 살아남기 위해서 정립되어야 하는 기본적 문법이라고. 표현이라는 이름의 수법이 부족하다면, 보다 인간적인 행복을 갈구할 나머지 모색해보는 시도조차 거부하는 터이다.



표현의 농도는, 더불어 살아가는 행복의 차원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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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chas@naver.com 2010-05-12 20:20:04
답글

두호씨~ <br />
문단 나누기, 띄어 쓰기 좀 부탁해요. 글 잘봤어요. ^^

원석희 2010-05-13 21:26:49
답글

저도 잘봤습니다. 뭐랄까 지난글들보다는 점점 발전해나가는것 같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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