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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글] 젊은이들에게 언어란 개념은 무엇인가?
자유게시판 > 상세보기 | 2010-05-06 16:28:49
추천수 0
조회수   477

제목

[잡글] 젊은이들에게 언어란 개념은 무엇인가?

글쓴이

박두호 [가입일자 : 2003-12-10]
내용
p.s 누가바가 700원에서 1000원으로 뛰었군요.

시네마 파라다이소는 아무리 들어도 불멸의 앨범이네요. ㅎㅎ







젊은이들에게 언어란 개념은 무엇인가?









과거의 인간은 자신의 직관적인 생각 이상으로는 어떤 추상적인 생각이 불가능했습니다. 그래서 거기 부여된 사유의 한계성은 결코 인류를 과학적 측면으로써의 발전에 불가결한 층위를 이끌어내지 못하였죠. 그러나 인류는 ‘기록’이라는 새로운 현상학적 재생방식을 발견하면서 <역사>라는 관점을 만들어냅니다. 그리스에서 최초 상형문자가(최소한 사가들이 주장하는 방식에서는) 계발된 이후 언어는 단지 기록이라는 면모를 넘어서 여러가지 중추적인 기능을 담당하는, 아니 그 이상으로 어떤 메타적 범위에서의 함축적인 사고기능을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간이 안 연유로, 이른바 <사변이성>이라는 하나의 새로운 사고방법을 촉발해낸 계기가 됩니다.





그러므로, <사변이성>은 언어로 사유하는, 이제껏 인간이 사고해왔던 사고방식과는 격이 다른 사변적 능력의 아우라를 인간이성에 각인시켜줍니다. 버트런트 러셀이 주장했던 바처럼, 인간은 언어를 주재료[질료]로 추상적인 사유의 장을 구축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2500년 전의 일입니다.





저는 언어학자는 아닙니다만, 언어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정신적으로 물리적인 영향력을 강하게 행사한다고 생각합니다. 언어는 거의 모든 분야를 망라함과 동시에, 실재적인 층위에서의 메타적인 ‘초극성’과 ‘움직이는 힘과 생성’의 논리를 정합적으로 부여한다고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또한 언어학은 지극히 선진적인 학문이지만 지금은 여전히 한계에 부딪혀 있습니다. 이를테면 들뢰즈의 <천개의 고원>에서 그가 주창한 [지층학적 변환의 사유]를 촘스키의 언어학과 비교해서 보자면 그것이 얼마나 늙었는지 깨닫게 합니다. 사실상 언어적 유회 즉 언어적 선진성을 반드시 복잡하고 딱딱한 언어학에서 찾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언어가 반복하는 상이함과 차이성은 비단 ‘문법’에서만 한정돼 있는게 아니라 우리 삶 속의 모습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우리 삶의 기초적인 지층을 에둘러 가장 추상적인 계열에까지 올라가보면, 언어적인 것이 바로 우리가 진정으로 탐색하던 혹은 일회일비하던, 삶의 본질적 방향성을 흐트러뜨리지 않는 제반의미의 일가를 이루고, 인간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부분을 구성하는 편린을 유지하는 기초적 의미의 핵심이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여, 삶 속에 고리타분하게 이어져있는 물리적 실체를 꿰뚫거니와 자신이 계획하고 있는 변모의 계획에 일신하고 싶다면, 항시 언어의 일장일단을 구분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단지 학제적인 구성의식, 즉 학구적인 열정만이 언어정신의 근저를 이루고 있다고 생각한다는 고정관념을 타파함과 더불어, 관념의 종류를 분유하고 그 산출물을 현실에 대입하기 위해서는, 모종의 자족적인 사유의식이 불가결한 실정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반反 비트겐슈타인적 항진명제를 자기 자신에게 제시하여 보십시오. “인류의 상위적 정신의 나아감은 왜 언어라는 기술의 유보를 타진하지 않고서는 왜 불가능한가?”라고 말입니다. 다시 말해, 글쓰기의 예술로 말미암아 언어는 영지주의적인 실존성을 일실하지 않은 채 앞으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이를 주지함으로써 인류는 종래 학계에 통상적으로 유통되던 [실존주의와 구조주의, 논리학, 현상학과 해석학, 마르크시즘]의 압박에서 벗어나, 마침내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명쾌하고 담연하며 보다 강밀한 사유가 가능한 층계에 도달하게 됩니다. 이러한 도달은, 우리가 여태껏 찾을래야 찾을 수 없던 미증유의 문제의식을 선험적으로 변별하는 데 무엇보다 ‘강렬한 의미’를 밀어붙이게되는 원동력을 심어주는 모티프가 됩니다.





따라서 앞서 말한 모든 글의 결론Conclusion은 우리의 순수이성이 사변이성이라는 밑감을 통해 개연적으로 직조되었다고 할 수 있거니와, 순수이성 너머 인간이 탐구해왔던 신적 존재의 [필연적인 존재성]은 명백히 앞서 말한 사변이성의 기투企投적 범주에 종속된다고 봄 직합니다. 하기야 이성이란 인간 실존이 상정하는 관념적 비의의 또다른 실천이며, 가령 점차 미분화되어 가는 ‘글쓰기의 예술’이 배타적으로 지향하는 언어의 동류성을 우리의 마음의 눈으로 하여금, 투사하는 정립의 계기가 될 것입니다. 때로는 들뢰즈가 언급하는 n(차원)-1(일자)=차원의 동질성의 파괴? 혹은 선형적 통일성의 붕괴(필자의 의견으로는)의 공식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것은 다시 말해 다의적인 의의의 무한성에 있습니다. 그럼으로 인해 사변이성은 자명하게 메타적이며 무한합니다. 따라서 현대 학계의 발전과, 학계의 발전으로 하여금 차츰 건설되어가는 문명사회의 발전은 당신 젊은이들의 언어에의 열정에 달렸다는 바를 저는 이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싶었습니다. 젊은이들이여! 힘냅시다. 우리만이 미래를 짊어지는 책임감이며, 무한한 지식의 연장延長이 우리에게 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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