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페이지로 시작페이지로
즐겨찾기추가 즐겨찾기추가
로그인 회원가입 | 아이디찾기 | 비밀번호찾기 | 장바구니 모바일모드
홈으로 와싸다닷컴 일반 상세보기

트위터로 보내기 미투데이로 보내기 요즘으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제국의 미래 - 에이미 추아
자유게시판 > 상세보기 | 2010-04-29 17:27:33
추천수 0
조회수   779

제목

제국의 미래 - 에이미 추아

글쓴이

윤양진 [가입일자 : 2001-09-12]
내용
자자에 유대인 관련 글에 댓글을 달았는데 여러분이 그게 사실이냐고 물어보셔서

따로 글을 씁니다.



예전에 여기 게시판에도 소개한 적이 있는데

제국의 미래 - 에이미 추아의 책에 보면 나옵니다.

(좀 오래된 책이지만 상당히 좋은 책이라고 생각됩니다.)



전체를 이해하긴 어렵지만 발췌된 글을 가져오면...(좀 깁니다)



------------------------------------------------------------------------------

1부. 고대 제국의 관용



1장 최초의 패권 국가, 페르시아



다리우스는 왕위에 있는 동안 문화적, 종교적 측면에서의 관용이 아케메네스

왕국의 전통을 존속시키는 데서 한걸음 더 나아갔다.

다리우스는 자신의 제국이 특별하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는 제국의 다언어 문화를 존중했다.[47]



다리우스가 이런 관용적인 정책으로 얻은 이득은 엄청난 것이었다.

그는 피정복민들을 죽이거나 ‘페르시아화’하는데 자원을 낭비하지 않았고,

그들이 가진 다양한 기술과 재능, 자원을 이용했다. 그것이 다리우스가 세계에서

손꼽히는 화려한 제국의 수도들을 건설 할 수 있었던 비결이다.[48]



병사들은 각자의 기술에 맞게 임부를 배정받았다. 예를 들어 숙련된 뱃사람들인

페니키아인들은 페르시아의 강력한 해군력의 원천인 아케메네스 해군에서 요직을

차지했고 페르시아 함대의 핵심을 이루었다. 페르시아인들은 해양 민족은 아니었지만

해상업무를 육성했고, 페니키아 상인들은 아케메네스 왕조의 치세에서 번영했으며,

아케메네스의 통치자들 역시 통행세를 징수함으로써 상당한 이익을 냈다.[49]



아케메네스 왕조 후기가 불관용, 불안, 폭력의 증대라는 특징을 보인 것 여기

틀림없는 사실이다. 이것은 이 책의 기본 논제와 일치하는 것이다.

페르시아통치자들이 불관용성이 강해짐에 따라 방대한 영토내의 정치적 안정을

유지하거나 여러 피정복자들이 장점을 활용하는 것이 어려워졌다.



페르시아 제국은 군사적으로는 통합되었지만, 현대 국가들과 같은 지배적인 정치적

정체성을 지니고 있지 않았다. 급속히 뻗어나가는 제국을 하나로 묶어주는 공통의

종교나 언어, 또는 문화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아케메네스 왕조의 중심에는 강력한 분열의 힘이 자리 잡고 있었다.

페르시아의 관용 정책 덕분에 나름의 정체성을 유지. 강화해왔던 각자의 민족들은

페르시아제국에 대한 반감을 쌓아가다가 결국 제국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제국의 이질적인 민족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강력한 관념 체계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집중되어 있던 권력은 결국 지배력을 잃게 되었다.[59]



일부 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알렉산드로스가 궁극적인 ‘인류의 화합’을 이룰

했는지는 모르겠다. 피터 그린이 쓰고 있듯이, 알렉산드로스의 “가장 뜨거운

야망은 전쟁과 정복이었다. :”가장 뜨거운 야망은 전쟁과 정복이었다.

그가 ‘인류의 화합’을 이루기 위해서 꿈을 꾸었다는 주장은… 근거 없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명예를 위해서 평생을 바쳤고, 전설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그렇지만 그가 자신의 명예를 위해 쌓아 올린 업적에서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은 바로 관용이었다.[65]



알렉산드로스의 정복 덕분에 그리스의 언어, 문학, 미술, 건축, 철학은 지중해를

건너 여러 대륙, 여러 나라로 펴져 나갔다. 이집트부터 인도에 이르기까지

알레산드로스가 건설했던 여러 도시국가에서는 ‘야만인’의 사상이 그리스어로

옮겨져 제국에 흡수 되었고, 이를 통해 혼성 문화가 탄생했다.

헬레니즘이라고 알려진 이 문화는 이후 기독교와 서구 세계에 깊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66]



2장 팍스로마나, 세계인의 탄생 ? 로마



기원전 753년부터 콘스탄디노플이 오스만튀르그에 함락된 서기 1453년까지,

20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로마의 영광’은 지속되었다.



이 시기는 네 황제(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안토니누스 피우스.

마르쿠스아울렐라우스)의 재임기와 얼추 맞아 떨어진다.

이 시기에는 ‘팍스로마나’ 즉 로마의 평화가 이어지고 스코틀랜드 남부에서

서아프리카의 농경 지역에 이르는 로마의 여러 속주들 사이에 활발한 교역이

이루어졌다. 19세게 독일의 역사학자 테오도어 몸젠은 “세계가 이렇게 오래도록

질서정연하게 통치된 적은 없었다.’는 말로 이 시기의 본질을 요약했다.[70]



로마가 관용적인 입장을 택하게 된 데에는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 큰 영향을 미쳤다.

그리스의 편협한 태도와 인종 분리 정책을 분노를 일으켰고, 이것은 대부분

전쟁으로 이어졌다.[72]



로마제국은 관용의 새로운 기준을 만들어냈다.

1790년 미국 헌법의 기초자중 한 사람인 대법원 판사 제임스 윌슨에 따라면,

“로마인들이 자국의 힘을 전 세계로 확장하려 한 것이 아니라, 세계의 시민들이

자진해서 로마로 쏟아져 들어왔다.”고 한다. 윌슨은 로마가 전략적으로 채택했던

관용이야말로 “제국을 확장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고 보았다.[73]



“로마제국이 건설과 로마 시민들의 명성과 관련하여 아주 중요한 사실이 있다.

그것은 바로 로마의 창건자인 로물루스가 사바니 사람들의 사례를 통해 적들을

로마 시민으로 받아들여서라도 나라를 키워야 한다는 것을 가르쳤다는 점이다.

우리의 조상들은 로물루스의 선례를 따라 이방 민족에게 계속 시민권을 내주었다.

[75]



로마는 정복한 적들의 도시를 파괴하거나 약탈하는 대신 평화조약을 제시했으며,

그 조약이 거부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이런 평화조약의 기본적인 틀은 단순했다.



로마는 이런 군사 활동을 펼치는 동안에도 피정복민의 지도자들에게 시민권을

주었으며, 로마 법률에 저항하는 나라는 가혹하게 응징했다. 로마는 건국 후

6세기 만에 작은 도시국가에서 지중해 연안 전체를 아우르는 세계적인 제국으로

성장하여 지중해의 이름을 ‘로마의 호수’로 바꾸어 놓았다.[78]



로마에는 현대적인 그 의미의 인종차별은 존재하지 않았다.

로마인들이 옅은 피부색을 짙으니 피부색보다 우월한 것으로 보았다거나

그 반대로 보았다는 증거는 거의 남아있지 않다.[83]



‘지나친 다양성’은 로마 쇠퇴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았다.

그보다 훨씬 고약한 문제는 전성기가 진난 로마에서 종교적 발개와

인종적 불관용이 심화되었다는 점이다.



둘째, 불관용은 로마쇠퇴의 유일한 원인은 아니었지만, 제국의 분열을 재촉하는

원인 가운데 하나로 작용했다. 기독교는 새롭게 시작된 불관용 정책의 표적이었고

나중에 불관용 정책의 주요한 원천이었다.[100]



뜻밖에도 거대한 로마와 애송이에 불과한 기독교 교회 사이에 싸움에서 승리를

거둔 것을 교회였다.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짧지만 격렬한 왕위 계승 전쟁을 통해서

제위에 올랐고, 서기 312년에 기독교로 개종했다. 그가 개종한 이유는 오늘날까지

전해지지 않고 있지만, 그의 개종과 함께 수백만 명의 기독교들에 대한 로마의

박해는 끝이 나고, 기독교인이 아닌 주민들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었다.[101]



로마 몰락 원인은 로마가 공식적으로 기독교를 국교로 채택하고

치명적인 불관용 정책을 펼침으로써 제국의 다양한 주민들을 성공적으로 통합시켜

왔던 동화 및 통합전략을 훼손시킨 데있다.



다양한 인종, 다양한 종교, 다양한 배경을 가진 민족들을 끌어 모으고, 동화시키고,

보상하고, 통합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었을 때 로마는 번영했다.



로마를 붕괴시킨 야만인들은 로마를 위해서 싸우던 장군이었다.

순혈주의나 불관용은 유능한 장군을 야만인으로 몰았고, 그들에 의해 망했다.



4장 유럽을 삼킨 초원의 지배자 - 몽골



유목 생활을 하던 몽골 사람들에게는 과학도, 공학 기술도, 고유한 문자도 없었다.

그들은 농사를 짓지 않았고 빵을 구울 줄도 몰랐다. 그러나, 바그다드, 베오그라,

부하라, 키예프, 모스크바, 다마스쿠스, 사마르칸트 등 당대의 거대한 도시들을

포함해서 다시 알려져 있던 세상의 절반을 다스렸다.[145]



칭기즈칸은 만인에 대한 종교적 자유를 공표했다. 또한 다양한 인종들을 포용하고

초원지대 사람들을 갈라놓던 부족 간 장벽을 용의주도하에 허물고 피정복민들

가운데 유능하고 재능 있는 사람들을 골라 공직에 임용했다.



두 세대가 지난 후 칭기즈칸의 손자인 몽케, 훌라구, 쿠빌라이는 칭기즈칸이 썼던

전략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역사상 가장 넓은 땅을 차지했다. 몽골족이 세계의

패권을 손에 넣고 유지 할 수 있었던 비결은 잔혹함이 아니라

인종적, 종교적 관용이 있었다.[147]



테무친은 승리를 거둘 때마다 늘 똑 같은 기본 전략을 사용했다.

그 패배한 부족 지도자와 대부분의 남자 ‘귀족’들을 죽이고 나머지 사람들은

노예나 동등한 성원으로 자신의 수하에 편입시켰다.[150]



테무친은 측근 가운데 믿음이 가지 않는 ‘혈연’은 주저 없이 몰아 냈다.

몰골의 전통과는 크게 어긋나는 행동이었지만 테무친은 애초부터 사촌들이나

형제들, 혹은 조카들을 군대의 고위직에 앉히지 않았다.

테무친이 혈연관계보다는 공로를 강조한 덕분에 낙타몰이꾼과 소몰이꾼들이

장군이 될 수 있었다.[151]



테무친과 함께 있던 부관들은 지휘관인 테무친과 끝까지 신의를 지킬 것을 맹세했다.

뜻밖에도 스무 명 밖에 되지 않았던 이들은 아홉 부족 출신이었고, 그 가운데에는

테무친과 마찬가지로 영원한 푸른 하늘과 부르칸 칼둔의 신산을 숭배하는

정령신앙을 가진 사람도 있었고 불교도, 기독교도, 이슬람교도도 있었다. [153]



칭기즈칸은 몽골족이 지니지 못한 기술과 지식을 가진 사람들을 열심히 끌어 모았다.

몽골 군대는 전투가 끝날 때마다 포로들을 꼼꼼히 조사하여 기술을 가진 사람을

찾아냈고, 자신해서 투항한 기술자들에게는 후한 보상을 내렸다.

칭기즈칸은 이런 방법으로 수많은 중국인 기술자들을 확보하여 성벽을 두른

난공불락의 도시들을 함락하는데 필요한 강력한 공성장비를 만들 수 있었다.

이런 무기들이 몽골 병기고를 채웠고, 그 무기들을 설계한 중국의 기술자들은

몽골 부대에 편입되었다. 승리를 거듭할 대마다 몽골의 무기는 점점 정교해지고

치명적인 위력을 갖추게 되었다.[159]



칭기즈칸은 유럽에서는 ‘신의 저주’라고 불렸지만, 티베트에서 아랄해에 이르는

동양에서는, 중세 페르시아의 역사가 주바이니의 표현을 빌리면 “주가 베푸신

자비이며 주가 내리신 은총”이자 종교의 옹호자로 알려지게 되었다.[161]



13세기 기독교권인 유럽은 십자군 전쟁, 종파 대립, 반유대주의로 산산조각 난

채 이교도 박해에 열중하고 있었다.



유럽 분열과 불관용은 몽골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몽골족은 전투에서 전인하게 행동하기는 했지만, 종교적 열정이나 편협함

때문에 곤란을 겪은 일이 없었다.



유럽의 숱한 제후들이 숙련된 기술을 가진 비기독교도 주민들을 박해하고 추방하고

있을 때 만족이나 종교를 따지지 않았던 몽골인들은 자유롭게 피정복민들로부터

엄청난 이득을 챙겼다.

서기, 통역사, 건축가, 장인들로 이루어진 새로운 계층은 물론이고,

몽골의 초원에서는 생각할 수 없었던 부를 캐낼 방법을 알고 있는 색스니

출신의 광부들까지 손에 넣었다.[172]



제국이 쇠퇴하면서 몽골이 지배하던 지역 어디에서나 일관된 특징이 나타났다.

그것은 바로 공식적으로는 물론 몽골의 평범한 주민들 사이에도 불관용,

특히 종교적 불관용이 전면적으로 나타났다는 점이다.[188]



몽골의 통치자들은 광대한 제국에 몽골의 정체성을 강요하는 대신 ‘문명화 된’

피지배민들의 문화를 점점 대폭적으로 받아 들였다. 중국에서 쿠빌라이칸은

중국식 호칭을 만들고 중국왕조를 세웠으며 중국의 미술, 음악, 경극에 묻혀 살았다.

중앙아시아에 자리잡은 몽골의 칸들은 이슬람교를 신봉하고 페르시아어를 공식

언어로 채택했다. 날이 갈수록 뿔뿔이 갈라지는 이들 왕국들을 하나로 묶어줄 수

있는 ‘접착제’는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191]



5장 신세계를 향한 최초의 탐험자 - 스페인



중요한 것은 상대적 관용이었다. 끔찍한 폭력사태가 벌어지느니 경우가 있긴

했지만, 14세기와 15세기의 거의 대부분의 시기 동안 스페인은 서유럽의

비기독교도들이 거주하면서 번영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곳이었고,

때로는 유일한 곳이었다.



스페인이 이슬람교도들 가운데에는 고유의 종교를 믿고 고유의 법률에 의한

통치를 받을 권리를 인정하는 특별한 조약 덕분에 혜택을 보는 사람들이 많았다.

[197]



스페인의 유대교도들은 대단히 광범위한 영역에서 경제활동에 참여했다.



스페인에서 손에 꼽히는 유명한 궁정 천문학자와 철학자, 지도 제작자,

그리고 의사들 가운데에도 유대교도들이 있었다. [198]



상대적인 관용 덕분에 스페인이 거둔 수학은 영토확장과 제국이 성장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스페인은 비기독교도 주민들 덕분에 문화적, 지적인 영역에서

성장했을 뿐만 아니라 노동력과 돈이라는 중요한 이득을 손에 넣었다.[199]



1478년 교황이 교서에 따라 스페인에 이단 심문소가 설치되면서 상대적인 관용의

시대는 막을 내렸다. 도미티크수도회의 주도로 무시무시한 권력을 장악한 교회의

이단 신문소는 이교도들이 사는 나라를 정화하는 역할을 맡았다.

특이하게도 여기서 ‘이교도’들은 유대교나 이슬람교를 공개적으로 신봉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위장한 기독교도들을 이르는 말이다.[200]



새로 터져 나온 종교적 불관용의 스페인 전역에서 들 끊고 있었다.

1590년대에 활동을 멈추었던 이단 심문소는 다시 활동을 개시했다.

라만차의 새내기 기독교도들은 채무자들에 대해 위장한 유대교도로 고발되어 박해,

고문, 처형당했다. ‘순수한 혈통’이 다시 표어로 등장했고, 유대교 혈통을 가진

사람들이 정부와 대학교, 군대와 교회에서 일하는 것을 금지 하는 과거의 법령이

부활했다.[203]



이단 심문소, 추방, ‘순수한 혈통’을 옹호하는 법령 등이 빚어낸 불관용을

스페인에 파멸적인 결과를 안겨 주었다. 당사자들에게 끔찍한 죽음과 고통을

안겨준 것은 차치하고라도 스페인이 종교 박해는 엄청난 자원 낭비를 수반하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스페인은 25만 명에 이르는 모리스코스 공동체를 추방하기

위해서 해군과 민병대 전체를 동원해야 한다. 이단 심문소의 무수한 재판과 고민은

엄청난 비용을 소모 했지만 증오와 편집증만 빚어냈을 뿐 지식이나 부는 일체

창출하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결렬한 광신주의가 고개를 들 때마다 스페인은 인적 자본, 금융자본,

그리고 사회자본이라는 가장 귀중한 자원들을 파괴하거나 몰아냈다.

결국, 스페인의 정화 활동은 농민과 장신, 의사와 과학자, 상인과 금융업자,

그리고 심지어는 가톨릭을 믿는 귀족에 이르기까지 사회의 모든 계층을 파괴 했다.

[205]





6장 자본주의 경제를 제패한 최초의 제국 - 네덜란드



네덜란드연방공화국은 17세기 대부분의 시기 동안 어마어마한 이윤을 남기는

유럽의 ‘사치품 무역을’ 주도했고, 사향은 그 가운데 하나였다.[210]



네덜란드의 국경과 정치적 구성은 세월에 따라서 크게 변해왔기 때문에 명칭에

관련한 문제는 더욱 복잡해졌다. 중세에는 지금의 벨기에, 룩셈부르크, 프랑스

북서부, 그리고 네덜란드를 망라하는 영토를 ‘저지국’이라고 알려져 있었다.[211]



작은 네덜란드연방공화국은 유럽 여러 지역에서 쫓겨난 진취적인 사람들의 피난처

역할을 한 덕분에 17세기에 이르러 세계적인 경제 강국이 되었다.

이것을 가능하게 한 요인은 동시적으로 일어난 몇 가지 사건들이었다.

예컨대 스페인, 영국, 프랑스 사이의 전쟁은 이들 국가들을 전쟁터에 전념하게

하여 재정이 고갈되게 하였을 뿐 아니라 네덜란드사람들이 스페인에 공격에서

벗어날 틈을 주었다. 그러나 네덜란드 사람들이 세계를 제패하게 된 가장 결정적인

요인은 엄청난 경제성장에 있었다. 여기에다 네덜란드연방공화국의 특별한 종교적

관용 정책과 빼 놓을 수 없는 중요한 요소였다.[219]



17세기 유럽 전역에 종교적인 분쟁과 박해, 그리고 광신적인 행위가 퍼져 있었던

것을 고려하면, 네덜란드 주 연합에는 국교를 없었다.[219]



네덜란드의 경제성장에 기름을 부은 것은 대부분 합스부르크 왕조의 스페인에서

박해를 피해 빠져 나온 유대교도들과 개신교도들이었다. 이들은 네덜란드에

공동체를 건설함으로써 네덜란드연방공화국을 세계적인 무역, 산업, 금융의

중심지로 만들었다.[222]



유대교도들은 네덜란드의 경제 번영에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사실 다른 집단과

비교하면 머릿수도 극히 적은데다 기여한 바도 미미했다.

16세기 말 막스베버가 말했던 ‘자본주의 정신’을 네덜란드에 들여오는 데 훨씬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대거 유입된 개신교 상인들과 숙련 노동자들, 그리고

생산업자들이었다.[225]



1598년 스페인의 네덜란드 사람들이 식민지의 생산품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네덜란드 선박의 입항을 금지 했다. 그러나 이것은 치명적인 실수였다.

그 어느 때 보다 많은 투자 자본을 가지고 있던 네덜란드의 유력한 상인들은

자신들이 부의 위협을 느끼자 아예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제쳐 놓고 동인도 제도와

아메리카 대륙으로 직접 자신들이 선박을 보내기로 결정했다. 이렇게 탄생한 것이

연합 동인도 회사와 후일 서인도 회사였다. 이 두 회사가 세워지면서 네덜란드

연방공화국은 세계적인 식민 강국으로 부상하게 되었다.[227]



네덜란드 서인도회사의 설립자들은 동인도회사의 설립자들과 마찬가지로 대부분

상대적인 종교적 관용 때문에 네덜란드연방공화국으로 이주한 부유한

개신교도들이었다. 따라서 서인도회사는 동인도회사에 비해서 호전적인 칼뱅주의적

경향이 훨씬 짙었다. 한편, 유대교도들은 동인도회사에서는 미미한 역할을 했지만,

서인도회사에서는 훨씬 큰 역할을 했다.[232]



17세기 중엽 네덜란드 연방공화국은 사회적, 도덕적, 정치적, 지적인 면에서

지나치게 개방적이라는 소문이 유럽 전역에 퍼져나갔다. 외국인 여행객들은

하인이 주인을 멸시하고, 아내가 남편을 멸시하고, 평민이 귀족을 멸시하는

태도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237]



네덜란드의 관용정책을 사실상 ‘국내’정책이었다. 네덜란드가 국경 내에서

펼쳤던 주목할 만한 종교적 관용 정책을 해외 식민지에서의 인종적 혹은 민족적

관용으로 변형되지 못했다. 네덜란드는 수리남에서 자바, 그리고 아프리카 남부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의 토착민들을 인종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열등하게 여겼으며

노예제, 인종 격리, 그리고 문화 파괴 등으로 특징 지워지는 편협한 식민정책을

실시했다. 다시 말해서 네덜란드 국내에서의 관용 정책과 해외 식민지에 대한

관용 정책 사이에는 모순이 있었다.[245]



8장 세계 최대의 해상국가 - 영국



영국이 부상은 이 책의 논제를 생생하게 입증하는 사례이다.

1689년에 영국이 채택한 특별한 관용정책 덕분에 유대교도, 위그노교도,

그리고 가장 핵심적인 스코틀랜드인, 이 세 개 집단이 어느 때보다 자유롭게

영국 사회에 진입하게 되었다. 이들은 금융혁명과 산업혁명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영국은 이를 토대로 세계적인 패권 국가로 비상했다.[280]



영국은 프랑스보다 훨씬 쉽게 돈을 구할 수 있었다.

17세기 내내, 유럽의 군주들은 급증하는 전쟁 비용을 감당하기 위해서 자원들을

쉴 새 없이 긁어 보았다.



유대교도들은 특히 이런 일에 안성맞춤이었다.

그들은 국제적인 친족 연락망에 의지하여 전 세계로부터 엄청난 자금을 끌어들일

수 있었다.[283]



위그노교도인 시계 제조공들 덕분에 런던은 세계적인 시계 제조 중심지로 변모했고

코드베크라는 프랑스 마을에서 빠져 나와 모자 제조공들 덕분에 영국은 섬세하고

방수성이 강한 펠트 천을 만드는 비법을 개발하여 직접 코트베크 모자를 생산하기

시작했다.[287]



합병조약 이후 영국인들은 스코틀랜드 인들을 안아 일으킬 것인지, 아니면 찍어

누를 것인지 결정해야 했다. 다시 만하면, 그들을 통합시켜 충성심을 이끌어낼

것인지, 아니면 북부의 낳은 사람들이 겁내는 것처럼 그들을 억압할 것인지

결정해야 했다. 영국인들은 전자를 선택했고 그 덕분에 엄청난 이득을 보았다.

[292]



스코틀랜드 인들은 대영제국에 인력을 공급했을 뿐만 아니라 18세기와 19세기

영국의 주도적인 사상가, 저술가, 발명가로 활동했다.[294]



스코틀랜드 인들은 영국이 산업혁명을 추진한 원동력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1830년대에 스코틀랜드는 철강 사업분야에서 세계를 주도했고 스코틀랜드의 조선

기술은 영국 내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295]



유대교도들은 또한 런던주식거래소를 설립하고 영국에서 다이아몬드, 금, 은이

거래되게 했으며 런던을 암스테르담과 맞설 세계적인 금융 중심지로 만들었다.

[297]



한편 영국은 1830년 대에 수익을 남기건 노예무역을 폐지하여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이처럼 노예무역에 반대하는 운동을 펼침으로써 영국은 중요 경쟁국인

프랑스뿐 아니라 과거 식민지였던 미국에 대해서까지 도덕적 우위를 주장할

수 있었다.[299]



아일랜드의 가톨릭교도는 영국이 19세기에 새로 확립한 ‘관용’ 정책에 전혀

감동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아일랜드인들은 1801년의 합병조약을 포용일 아니라

아일랜드 의회를 없애려는 정치적 음모로 여겼다.[303]



영국이 아일랜드를 상실한 것은 관용 정책의 실패 때문이었다.

19세기 영국은 카톨릭교도 에게 상당 수준의 평등권을 부여했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나 미미하고 너무나 뒤늦은 조치였다.[304]



주목할 만한 사실은 유색인들이 거주하는 영국의 식민지에서도 똑 같은 상황이

전개되었다는 점이다. 개신교가 19세기 영국의 정체성 가운데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점차 줄어들고 제국이 세계적인 규모로 팽창함에 따라 영국인들은 점차 스스로를

식민지 주민들과는 달리 ‘백인’이며 ‘문명화’된 민족이라고 규정하게 되었다.

[305]



사티 금지법은 영국이 인도의 중요한 종교적 관심에 강경하게 개입한 최초의

사건이었다. 동인도 회사 직원들의 우려했던 대로 다수인 힌두교들 사이에는

강력한 분노가 솟아올랐다.[309]



19세기말 영국이 수 많은 보수주의자들은 인종간에 불변한 차이가 있기 때문에

영국인들의 피부색이 검은 인도 주민들을 통치할 수 있는 선전적인 권리를 갖게

된 것이며 아울러 인도 회사 내부의 분열도 인종간의 차이로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313]



이들은 자유주의 행정부가 자신들을 보호해 주던 인종적인 장벽이 허물려고 하지

격분했다. 1883년 자유주의적인 총독이, 인도인 판사가 백인 피고인들을 재판할

수 있게 하는 일버트법을 통과 시키자 인도전역에서 영국출신의 이주민들이

항거했다.[317]



보수주의자들일 권력을 잡았을 때 그들은 정책은 점점 강렬해지고 점점 확대되어가는

인도의 만족주의 운동에 직면해야 했다. 1898년에 총독이 된, 귀족적인 커즌경은

영국식 교육을 받은 인도인 법률가 및 공무원 집단과 정면으로 맞붙었다.[318]



이런 모든 변화들은 영국출신 이주민 공동체에 심각한 위협이 되었다. 멀리 떨어진

본국 정부가 진보적인 인도개혁 정책을 입안하고 있을 때 인도의 영국인 정부는

억압적인 롤래트법을 제정했고 원주민들에게 통행금지법을 내렸으며 시우의 권리를

박탈했고, 전쟁이 끝난 뒤에도 3년 동안 계엄령을 유지 했다.[320]



1920년 간디는 중국정부에 대해 비폭력 불복종 운동을 펼치자는 혁명적인 제안을

내놓았다. 인도 국민회의당은 간디의 의견을 좇았고 수 십 년 동안 이어오던 영국의

인도 통치에 대한 공식적인 지지를 철회했다.[321]



전성기 때 동인도회사는 인도인 기업가들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였고 동맹을 맺었지만

20세기의 영국출신 이주민들은 토착 기업과의 협조를 고집스레 거부했다.

이런 공격적인 불관용 전략은 자멸적인 결과를 초래했다.[323]



9장 최첨단 과학 기술의 개척자 - 미국



미국은 온갖 종교에 대해서 동시대의 그 어느 나라보다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관용적인 태도를 보여왔다. 미국은 1789년 종교와 자유를 인정했으며 더 나아가

국교를 두지 않음을 헌법상의 원칙으로 공표하는 대단한 혁명적인 행동을 했다.

그러나 미국은 대체로 개방적인 이민정책을 펼치면서도 역사상 대부분의 시기 동안

특정한 인종 혹은 민족 집단에 대해서 극단적인 불관용의 태도를 보였다.[332]



상업을 종교적 관용을 촉진하는 강력한 기폭제였다. 유력한 상인들은 배척하는

풍조는 사업에 좋지 않다는 이유에서 종교의 자유를 옹호했다.[335]



건국의 아버지들이 1789년에 채택한 헌법은 대단히 급진적이었다.

열세명의 이주민 대표들은 영국의 관용법에서 한발 더 나아가서 헌법을 종교적인

문서로 만들지 않고 어느 한 종교에 대한 언급이 있는 부분은 종교를 공직 취임의

전제 조건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조항뿐이었다.

헌법에 종교적인 내용이 들어 있지 않자, 신을 배신하는 사악한 행동이라는 비나니

여러 지역에서 들끓었다. 그러나 건국의 아버지들은 종교와 관련된 자유로운

선택이야말로 다원주의 시회에서 분파 간 충돌을 피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이라고

생각했다.[339]



유럽의 무수한 ‘두뇌 유출’덕분에 19세기의 미국은 기술의 벽지에서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산업국가로 변모하게 되었다. 이런 모든 측면에서 미국의 관용은 필수적인

역할을 했다. 물론 뛰어난 기술과 발명의 재능을 가진 이민자들 가운데 태반은

종교적 혹은 정치적 박해를 피해온 사람들이 아니라, 경제적인 성공을 노리고 온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미국은 기회의 땅으로 만든 주요한 요인은 상대적인 개방성과

다원주의였다. [347]



이것이 선택적인 전략적 관용의 냉혹한 본성이었다. 미국은 유럽 출신의 다양한

대중들은 환영했지만, 아메리카의 토착 원주민들은 학살하고 차단하고 내 쫓았다.

전략적인 관용의 혜택에서 배제 당한 사람들은 원주민들만이 아니었다. 여성들은

투표할 수 없었고 경제적, 정치적으로도 완전히 배제 되어 있었다.[353]



19세기 미국 사회는 다양한 출신 배경을 가진 사람들에게 개방적인 나라로서

세가지 중요한 장점을 지니고 있었다. 첫째, 미국의 종교적 다원주의는 매우

자유분방하여 이주민들은 원하는 종교를 믿을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새로운 종교의

불씨를 피워낼 수 있었다. 둘째, 만주적인 정부제도는 부패했어도 새로운

이주민들의 손에 현실적인 정치적 영향력을 쥐어 주었다. 셋째, 활발한 자유

시장은 노동력을 흡수하고 기술에 보상을 해주었으며 기업심이 왕성한 사람들에게

예상 밖의 기회를 제공했다.[353]



그들의 연구는 원자폭탄과 수소폭탄의 발명으로 이어져서 미국은 세계 최초로

핵무기를 갖게 되었다. 재능 있는 이민자들의 유입이 세상을 바꾸어 놓을 만한

과학적 발전과 군사력의 우위를 변형된 사례는 세계 역사상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359]



20세기의 마지막 10년 동안 그로브를 포함해서 수많은 이민자 출신 성공 사례들이

미국이 부를 긁어 들이고 미국을 어느 누구도 이의를 달 수 없는 세계적인 경제

강국, 기술 강국으로 끌어올렸다.[372]



10장 추축국의 야욕 - 독일, 일본



나치 정권의 본질을 ‘불관용’ 이라고만 규정지을 수는 없다. 나치의 모든

정책에는 인종적 증오가 깊이 스며 있었다.

나치의 주요 공약은 게르만 민족주의를 본질로 했으며 경제 정책은 거의 필요하지

않았다.[380]



나치의 광신적인 행동의 주요 대상은 유대인들만이 아니었다. 집시들, 폴란드인들,

동성애자들, 병자들을 비롯한 다양한 집단들이 제거 대상으로 추려져서 강제 수용,

강제노역, 임의적인 처형의 희생자가 되었다. 나치가 내세우는 핵심적인 주장은

아리아인은 우월하며 ‘지배자 민족’으로서 세계의 통치자가 되어야 마땅하다는

확신이었다.[380]



나치 독일은 ‘유대인’과학을 부인하는 바로 이런 태도 때문에 브리튼 전투에서

연합국이 승리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던 레이더 기술에서 뒤처졌다.

나치는 또한 자국이 과학 분야에게 우월하다는 맹신에 빠져 연합국이 자신들이

암호를 해독할지 모른다는 사실은 생각지도 않는 결정적인 실수를 저질렀다.[382]



일본 사람들은 “지배자 민족”으로서 대동아공영권 안에서 지도력을 행사할

도덕적 권리와 의무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뿐만 아니라 일본 사람들은

‘아시아’를 매우 넓게 정의했다. 일본의 전시 지도 제작자들은 유럽과

아프리카를 아시아 대륙의 일부로 그렸고 일본관리들은 미국을 아시아의

‘동쪽 날개’라고 일컬었다.[386]



일본은 국수주의 사상가들은 일본의 열등한 지위를 뒤집기 위해 신에게 비롯한

황실의 혈통, 일본 사람의 ‘순수성’과 미덕을 강조하는 정교한 신화적 역사를

고안해냈다.[387]



불관용이 영향력은 매우 강력하다. 이슬람교의선정주의 같은 종교적인 근본주의를

제외한다면, 인종주의적 국수주의만큼 강력한 생명력을 제공하고 정체성을

창조하고 전재를 부채질하는 힘은 그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이데올로기들이 이처럼 난폭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게 만든 요소는

곧 그 영향력을 제한하는 요소로도 작용한다.[398]







문제는 미국이 해외에서 군사력을 사용하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그 군사력을

어떻게 사용하느냐 하는 것이다. 우리는 미국이 일반적으로 군사력을 사용하는지,

상대를 제압하려고 선수를 치는지 또는 다른 나라들의 주권이나 국제법에 구애

받지 않고 행동하는지 따져보아야 한다.[447]



그러나 과거에 초강대국들의 경우 관용이 그러했듯이 민족주의 역시 미국에게

한계를 지우는 요소이다. 미국의 제국으로서의 역할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흔히

미국을 로마로 비유한다. 이런 비유는 여러 측면에서 맞아 떨어진다.

로마는 그 시대의 군사적, 경제적 거물이었을 뿐 아니라, 굉장히 다문화적인

사회였고 민족적, 종교적인 측면에서 최고의 관용을 베풀었다.



성장하는 강국이 박해 받는 사람들의 피난처로 자극을 개방하고 관용의 제도를

세계 모든 나라에게 본보기로 제시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세계적인 패권국가가 미국 시민권을 외국 주민들에게까지 확장하거나

그들과의 공통의 정치적 정체성을 확립하려는 노력을 하는 대신 세계의 다른 모든

나라들에게 자국의 관용의 제도를 전파하거나 강요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461]



미국 제국을 건설하는 것, 즉 다른 나라들의 정권을 변화시키고 미국식 제도를

강제하는 일에 세계 최고의 군사력을 쓰는 것이다.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고 세계의 패권을 지키겠다는 의도를 공공연히 떠벌리고

다니는 것 또한 다른 사이에서 미국의 입지를 위태롭게 할 뿐이다.[467]



미국이 자국의 주권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자국이 지배하는 전 세계 수십억의

사람들과 공통의 목적의식, 혹은 공통적의 정체성을 창조하고 다를 사람들에게

미국의 성공과 지도력에 더 많이 개입할 수 있는 권리를 줄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은 없는 걸까? 이 집착의 문제는 오늘날 미국정치에서 손에 꼽히는 몇 가지

논쟁점의 근원이면서 결과다.



미국이 이민을 제한할 권리도 있고 그럴 필요도 있다는 것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한없이 많은 외국인들에게 수문을 열어주거나 그들 때문에 국가

안보를 희생시키는 것은 현정한 이민정책이 아니다.



이민자들을 모든 문제의 원흉으로 몰고 가거나 미국의 성공원인을 ‘앵글로색슨과

개신교’의 가치관에서만 찾으려는 시도들은 그릇된 것이고 또한 위험한 것이다

[469].



미국은 로마제국이나 대영제국이 그랬던 것처럼 외국인들에게 존경 받는 행정적,

군사적 직위를 주지는 못하지만, 미국 기업내의 직위를 줌으로써 존경과 수익을

보장 받을 수 있게 한다.



미국은 이런 모든 분야에서 다른 나라들과 조화를 이룬 다각적인 활동을 육성할

방안을 찾아야 하다. 미국은 국제연합의 틀밖에 있으면서도 생각이 비슷한 다른

나라들과 쌍무적 혹은 다각적인 협정을 진행하거나 새로운 국제기구를 창조할 수도

있다. 미국인들은 이러한 새로운 다자주의를 굴복이 아니라 기회로 여겨야 한다.



만일 미국이 스스로 세계적인 문제들에 원인을 제공했음을 인정하고 그 문제들이

해결될 경우 큰 이익을 얻을 수 있음을 깨닫고 국제적으로 주도적인 입장에서

그 문제들에 대차한다면 미국은 더 큰 이익을 얻을 수 있을 뿐 아니라 민주적이

초강대국의 존립에 반드시 필요한 다른 나라들과의 연대감, 즉 결속감과 공동의

목적의식까지 창조할 수 있다.[475]

추천스크랩소스보기 목록
원석희 2010-04-29 19:15:05
답글

제 미니홈피로 좀 퍼갈께요~ 넘 길어서 나중에 천천히 읽어보려구요. 잘보겠습니다. ^^

arising21@hanafos.com 2010-04-29 20:32:59
답글

첫 장 넘기고 ...넘 지루해서...좀 건너뛰고 몽골...미국 부분만 읽었습니다...ㅜ

권기수 2010-04-29 20:54:39
답글

이런 수고로움을... 고맙습니다. ^^

윤양진 2010-04-29 23:01:50
답글

이 책은 초강대국의 조건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br />
<br />
관용...그리고 그 관용과 다양함을 이어주는 접착제.<br />
<br />
로마나 미국이 잘 나갈때 다른 나라 사람들은 그 힘에 복종한 것이 아니고 그 강대국의 시민이 되고 싶어했고 <br />
그 문화를 배우고자 했습니다.<br />
<br />
김구선생이 꿈꾸던 나라죠. 문화의 힘. <br />
힘의 강대국은 그 사회의 다양함과 포용으로 가져오는 부산물

  • 광고문의 결제관련문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