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지하면 지금도 치를 떠는 중1때 우리 담임...벌써 25년 넘게 지난 일인데도 그 상판떼기는 잊혀지지 않습니다.
당시 반애들이 65명 정도 였는데 절반인 30여명이 넘게 학급 임원 이었습니다. 반장 부반장에 흔히 있는 부장 말고도 무슨 위원장, 무슨 위원 뭐 그런 타이틀을 담임이 만들어 서는 이애 저애 마구 시키는거에요. 나중에 보면 시키는 기준은 그나마 돈봉투를 가져 올수 있을만한 가정형편이 되는가 입니다.
그러면서 매일같이 돌아가며 학부모를 학교로 부릅니다. 학급임원이라는 구실로요. 정말이지 하루에 보통 엄마들이 3분 이상은 오셨습니다. 매일 같이요.
애들에게는 무시무시한 체벌을 가하곤 했는데 학부모가 찾아오는 애들과 아닌 애들 일부러 차이나게 팹니다. 얼마나 호되게 패는지 후환이 두려워 학교 졸업식 때면 출근 않하는 그런 선생이었습니다.
숙직하는 날이면 열흘전부터 자기 숙직한다고 노래를 하며 뻥않치고 학급의 절반이상 학부모들이 학교에 찾아 오게 만듭니다. 믿지 않겠지만 부모님 오실 때까지 학급 임원이라는 애들은 집에 못 갑니다.
담임 숙직날 숙직실에는 통닭부터 시작하여 과일, 온갖 음식 뿐만 아니라 담임 주머니가 한방에 두둑해지는 날이었습니다.
담당과목이 기술이었는데 수업은 전혀 않합니다. 그 시간에 애들이 알아서 교과서 요점정리 하라고 해놓고는 시험기간 직전 요점정리라며 예상문제지를 100문제 정도 추려서 돌립니다. 그리고 거기서 시험 냅니다. 똑같이 냅니다.
수업은 않하고 수업시간에 가끔 전도를 합니다. 지금도 잊어먹지 않습니다. 천국에 가려면 십자가 다리를 건너야 한다던 그 담임의 말을...
그 담임에게 얼마나 시달렸는지 지금도 우리 부모님은 그 선생 이름의 중간자인 '상'을 "썅"이라고 발음해서 부릅니다. 그리고 가끔 티비에서 촌지 얘기가 나오면 어김없이 그 선생 얘기를 하십니다.
그 선생에게 상처 받지 않은 아이들이 정말 없었습니다. 있는 집이든 없는 집이든...
정말 개썅같은 작자 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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