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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실의궤 반환을 추진하고 있는 봉선사 혜문스님
자유게시판 > 상세보기 | 2010-03-11 09: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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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수   400

제목

조선왕실의궤 반환을 추진하고 있는 봉선사 혜문스님

글쓴이

심수근 [가입일자 : 2002-10-27]
내용
Related Link: http://www.vop.co.kr/A00000283328.html

방송중 "나라가 식민지되면 이렇게 힘든것이구나" 하면서 하시는 한 말씀하시는 조선왕실의궤 반환을 추진하고 있는 봉선사 혜문스님...





사실대로 말하자면 나와 아사히 신문과의 인터뷰는 그날로 5번째였다. 1번은 2006년 조선 왕조실록 반환운동을 펼칠때였고, 나머지 4번은 조선왕실의궤의 반환과 관련된 것이었다. 아사히 신문 인터뷰, 그리고 기사화는 굉장히 많은 의미를 가진다. 조중동보다 발행부수가 많은 일본의 주류언론임과 동시에 아사히 신문 기사는 한일 양국의 주요 언론에 파급효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나는 경험상 알고 있었다. 아주 신중한, 약간은 격앙된 느낌으로 나는 그날의 인터뷰를 진행했다.





아사히 신문의 서울 특파원과 나는 2007년부터 3번 만났다. 그때마다 나는 아사히 신문 기자와 의궤 반환문제에 대한 심도있는 대화를 나누었다. 그 내용들은 서울특파원의 신중한 검토를 거쳐 2007년과 2008년 2번이나 기사화 되어 일본 사회에 반향을 일으켰다.



그러나 결정적인 언론의 주목을 받는 것은 아니었다. 조선왕실의궤가 일본에 있고, 그것의 반환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한국 민간단체에서 흘러나오는 정도의 반응이었다. 의궤 문제가 수면으로 올라와 부각될 거라고 누구도 주목하지 않던 시절이었고, 심지어 우리나라 언론에서도 그다지 주목하지 않았다.



그런 과정을 통하면서 나는 스스로에게 다음과 같이 다짐하고 있었다. 2010년이 되면 분명히 조선왕실의궤는 이슈로 자리잡을 것이다. 그때까지 묵묵하게 내가 구상한 프로그램을 진행한다면 분명히 주목할 만한 성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생각만큼 쉬운 일은 아니었다. 4년에 걸친 기간 동안 무관심속에서 무언가를 위해 일관된 길을 걷는 것은... 중간에 많은 사람의 비웃음에 시달려야 했다. 불가능하다고 보이는 일을 확신에 차서 걸어가는 것은 자칫 광인의 모습처럼 보이기 십상이었다.



그리고 2010년이 되었다. 나는 1월 1일 법당에 올라 부처님께 기도드리며, 올해는 반드시 조선왕실의궤 문제가 한일양국의 외교현안으로 자리잡기를 진심으로 발원했다. 그리고 며칠뒤 아사히 신문 서울특파원의 이메일을 받았다. 나는 그동안 지속적으로 아사히 신문 서울 특파원과 이메일로 조선왕실의궤의 진행상황을 전달하고 있었다. 기도가 이루어지는 것만 같았다.



1월 15일 나는 밤잠을 설치고 아사히 신문 기자와 만났다. 지나친 긴장탓이었는지 입안이 까끌까끌한 느낌으로 2시간의 인터뷰를 가졌다.



인터뷰가 끝나고 나는 그들을 배웅하면서, 조계사 앞에 있는 우정국 박물관에 가보자고 했다. 거기에는 한일협정으로 반환된 1432점의 반환문화재 중 우정 관련 반환 문화재가 전시되어 있다. 나는 그들에게 우리가 받은 문화재가 어떤 모습인지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야만 왜 한국인들이 문화재 반환에 그렇게 많은 감정을 드러내는지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우정 박물관에 전시된 문화재는 짚신, 우체부 모자, 막도장, 우체국 간판 뭐 이런 것들이었다. 그들은 다소 의아한 듯이 "이것도 문화재라고 받은 거예요?"하고 물었다. 나는 좀 슬픈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색한 침묵이 흐른뒤 먼저 말문을 열은 것은 나였다.



"가야금과 백제의 왕릉 부장물을 빼앗기고 짚신과 우체부 모자를 돌려 받은 것이 1965년 한일협정입니다. 그것으로 문화재 반환이 종결되었다고 말한다는 것은 너무 도리에 맞지 않는 것이 아닐까요? "



서로 할 말이 없었다. 그냥 국적과 민족을 떠난 무언가의 쓸쓸하면서도 어색한 시간들, 사실의 왜곡과 식민지 통치로 씁쓸하게 서있는 한일간의 어떤 사람들의 시간들이 우리를 마구 스쳐갔다.



2주가 지난 1월 31일 , 아사히 신문을 통해 그들이 써 내려간 기사와 나는 마주했다. 그 기사에는 조선왕실의궤 외에도 조선왕실의 도서 660책이 일본 궁내청에 있다는 내용이 담겼다. 그리고 그 문제가 경술국치 100년을 맞아 한일외교 당국자 사이에 논의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아사히 신문의 보도 이후 우리나라의 주류언론이 이어 기사를 내어 보내기 시작했다. 메이저 언론인 조중동 모두 관련된 사설과 칼럼을 써서, 의궤 반환의 당위성을 제기했다. 외교부도 이 문제를 일본 외무성에 전달하겠다는 논평을 냈고, 그 내용은 다시 요미우리, 산케이 신문을 비롯, 32개 일본 언론사를 통해 일본 전역에 보도되었다.



드디어 조선왕실의궤 반환운동은 4년의 시간을 통해 수면위로 부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1월 31일의 아사히 신문 보도가 의궤반환의 결정적 계기를 마련한 사건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물론 수년간 이 사건을 주목해온 아사히 신문의 역량이 낚아 올린 최고의 특종이란 칭찬이 무색할 뿐이다.



한편 씁쓸히 다가오는 것은 왜 이런 결정적 국면의 전환이 아사히 신문을 통해서 이루어져야 하는가의 문제이다. 우리나라의 언론이 스스로 자국의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자국민의 반환운동을 주목할 수 는 없었을까? 아사히가 보도해야만 국내 메이저 언론이 받아적는 이 현실을 경술국치 100년을 맞는 오늘 나는 곰곰이 생각한다. 일본 천황궁이 소장한 조선왕실의궤의 환수운동은 단지 문화재를 찾아오는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뼛속까지 차게 스민다.



<봉선사 혜문 스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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