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전에 시계 동호회에 올렸던 글인데,
여기도 올려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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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사회, 학문 등의 영역에서는 나름 개혁 지향적이라 자부해 왔지만,
한편으로 제게 강한 보수성 또한 깃들어 있음을,
시계를 즐기면서, 또, 종교 공부를 하면서
(대학원에서 신학을 전공했음. 종교가 생업은 아니지만요)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지금 밥벌이인 예술 창작을 하면서,
제 자신의 상상력과 구축력의 빈곤을 절감하며,
어줍잖은 변화보다는 보수가 더 가치있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수많은 고급 시계들이 쏟아져 나옵니다만,
감상해 보면, 정말 타당한, 설득력이 깊이 느껴지는 시계가
그다지 많은 것 같지는 않습니다.
비유컨대, 제 느낌은 이러한 것입니다.
우리나라 강남, 신도시들, 깔끔하고 고급스럽게 멋부리려 애쓰는 동네지요.
그러나, 딴에는 그렇게 한 곳들이지만,
마치 값싼 쇠붙이를 잘 광내서,
반짝반짝 얄팍한 도금 올린 느낌입니다.
그 콘크리트 건물들, 비싸다는 아파트들, 고가품 파는 상점들,
예배당, 성당 같은 종교 건축물들조차,
상투적이고 통속적인 모양과 장식들로 휘감고 있어서,
심하게 말해 이게 러브호텔이야, 예배당/성당이야 싶은 느낌에,
눈살이 찌푸려지는 걸 많이 느낍니다.
그 통속적인 몰취미성이란…
그러나, '깊은 맛'과 설득력이란,
갑자기 만들려고 해서 만들었다는 느낌이 아니라,
예전부터 존재해 왔고, 여전히 이렇게 묵직하게 존재할 것이라는,
그 내면에서부터 우러나는 격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격조를, 물화(物化)된 통속성으로 흉내내려 해봤자,
마치 서시 흉내내려고 눈을 찡그리고 다니다가,
추녀 '동시'로 낙인찍혀 비웃음을 샀다는
그런 꼴 밖에 나지 않는 것입니다.
'격조'란, 정신과 역사의 산물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정신'이란, 철학적, 영성(靈性)적인 것만이 아니라,
어떤 디자인이 절제 가운데서 핵심을 간파한 것인지
꿰뚫어 직관하고, 그것을 표현해내는 등의
정신 활동까지 포함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정신적 산물이, 진짜 작품이지요.
영혼이 담긴 작품이 타인의 영혼에게도 공감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시계를 고르고, 건축 설계를 건축가에게 의뢰하는 사람의 안목 또한
이에 준하는 수준이 필요할 것입니다.
저는, 그 사람이 어떤 시계를 즐겨 차는가를,
(시계를 중시하는 사람일 경우)
그 사람의 안목과 취향, 성향 등을 재는 척도로까지 간주합니다.
상투적인 화려함, 고급스러움은, 도리어 품격을 떨어뜨리고, 싸보이게 합니다.
말수 적은 묵묵함 속에 기품을 간직한 시계,
들어섰을 때 옷깃을 여미고 깊은 내면 속으로 침잠할 수 있는 성당,
(지금껏 살면서 그런 성당, 예배당을 별로 보지 못했습니다.
장충동 경동교회, 중곡동성당 정도)
그런 시계, 예술 작품들을 경험하고 싶은 것입니다.
말 많은 상투적 화려함, 빠다 섞인 발음을 일부러 내는 듯한 미국적 세련(?)됨,
이런 것들 속에서 너무 찌들어 살고 있지 않나 싶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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