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아직 40까지 가려면 4년이 남았습니다만,,,
오늘 마침 사내메일로 어느분께서 퍼왔다고 보내주신 내용인데,
바로 아래에도 마흔 관련 글이라.. 함 올려봅니다~
(어린넘이 제목에 반말 해서 죄송합니다... 저게 제목이라서..)
이런 우스갯소리가 있다.
중학생 딸이 그랬단다. “ 엄마, 나 사춘기니까 건들지마요 ”. 웬만한 부모는 모두 기죽이는 이 대단한 딸내미의 유세 앞에서 엄마가 한마디 한다. “ 니가 사춘기냐? 난 갱년기다, 이 x아". 딸, 바로 꼬리 내렸단다. 질풍노도의 시기라며, 성인이 되기 위한 통과의례라며, 사해동포 하나 되어 떠받들어주는 사춘기조차 단 한 방에 잠재우는 갱년기의 위력이다.
갱년기가 대부분 40대 후반부터 찾아오는 단발성 마음병이라면 마흔을 기점으로 시작되는 것은 어른의 성장통이다. 그런데 왜 마흔일까? 사춘기가 그러하듯 마흔 즈음에 어른은 몸과 마음의 극심한 변화를 경험하기 때문이다.
몸의 변화는 구체적이다. 주름이 늘어나고 피부는 탄력을 잃고 탈모 증상은 심해진다. 소주 두 병을 마셔도 다음날 거뜬하더니 한 병만 마셔도 다음날 하루 종일 숙취로 고생한다. 지구의 까마귀는 혼자 다 잡아먹은 듯이 깜빡깜빡 건망증은 정도가 심해진다. 신문을 보면 건강 관련 기사만 자꾸 눈에 들어온다.
마음의 변화는 불안감이 중심에 선다. 돌이켜보면, 서른의 통과점에서 가슴 시리게 불렀던 김광석의 노래는 그래도 낭만적이었다. 서른과 함께 청춘의 잔치는 끝났다며 청승떨던 그때 그 시절은 지금 와서 생각하면 가소롭기까지 하다. 느닷없이 찾아온 마흔은 흉측한 괴물이다. ‘나에게는 꿈이 있잖아. 마흔 넘으면 다 잘 될 거야’로 위로했던 그 막연한 마흔이 보신각 종소리와 함께 실체로 다가왔을 때 사람들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며 파랗게 절망한다. 아무것도 해놓은 것이 없는데 마흔이라니. 여전히 흔들리고 있는데 불혹(不惑)이라니. 이것이 내 인생의 성적표였어? 이렇게 내 인생은 땡땡땡 종치는거야?
이제 바야흐로 어른의 성장통이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먹기 싫다고 안 먹을 수 없는 것이 나이다. 어차피 내 밥으로 먹은 나이, 받아들이자며 순응의 자세를 취한다. 누군가는 ‘나이는 숫자에 불과한 것’이라며 중얼거리기도 하고, 또 누군가는 ‘평균 수명 100살 운운하는 시대에 마흔은 중반도 안 넘은 나이’라며 여전히 볼멘소리를 하지만 슬그머니 마흔의 옷을 갈아입는다. 그러나 방심하기는 이르다. 몸과 마음의 변화를 인정하고 마흔의 고개를 넘었더니 저 아래 기다리고 있는 또 하나의 복병이 숨어있다. ‘정체성 찾기’라는 이름의 성장통이다.
‘나는 누구인가?’가 실존에 대한 사춘기의 자문이라면, ‘나는 나답게 살고 있는가?’는 정체성에 대한 사추기의 의문이다. 마흔 넘어 이런 의문이 드는 것은 특히나 한국 성인에게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부모가 시키는 대로 해야만 하는 10대, 갑자기 사회 속에 내던져져 갈팡질팡하는 20대, 결혼을 하고 본격적인 밥벌이의 치열함에 몸을 던졌던 30대에는 자신을 중심에 두고 고민해 볼 겨를이 없었다. 그런데 마흔이 되고 나니 비로소 주변에 여유가 생기기 시작한다. 아이도 어느 정도 컸고, 회사에서의 위치도 조금은 자리를 잡았고, 지갑도 살짝 두툼해졌다. 그러면서 과거를 돌아보니, 문득 자신이 꼭두각시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의문이 들어버린다. 남들이 기대하는 내가 아니라, 나 본래의 모습은 무엇이며 더 늙기 전에 내가 찾은 내 모습대로 살고 싶다는 생각도 한다.
결론적으로 바람직한 방황이다. ‘윌리엄 새들러’의 <서드 에이지, 마흔 이후 30년>과 같은 중년 대상의 심리서들은 건강한 마흔 이후를 위해 정체성 찾기를 가장 중요하게 강조한다. 분석심리학의 창시자, ‘칼 구스타프 융’은 이것을 ‘개성화(individuation)’ 라고 했다. 타인의 기대대로 살아온 나와 그림자처럼 억눌려 무의식에 갇힌 나를 통합할 때 중년의 위기는 극복된다는 말도 했다. 명문대를 나온 의사가 어느 날 갑자기 지리산에 들어갔다거나, 낮에는 대기업 임원이 밤만 되면 머리에 머플러를 두르고 폭주족이 된다는 이야기는 종종 <인간극장>과 같은 프로그램에서 소개되기도 한다. 이들이 바로 마흔 넘어 극심한 몸살을 통해 자기 정체성을 찾는 주인공들이다.
물론 뉴스에 나올 정도의 극단적인 모습까지는 아니어도 좋다. 다만 자기만의 범위에서, 자기만의 방식으로 이전에 발휘하지 못했던 자기다움을 표현하는 것은 어른의 성장통 치유에 큰 도움이 된다. 착한 여자 콤플렉스를 가진 사람이라면 늘 해왔던 배려보다는 솔직한 이기심도 드러내보고, 지나치게 자기 관리를 잘하는 사람이라면 한두 번쯤 자신을 무장해제 시키는 것도 또 다른 자기를 찾는 방법이자 경험하지 못한 즐거움이다.
그래도 희망적이지 않은가? 어른의 방황을 ‘성장통’이라고 불러준다는 것이? 성장이라는 말은 아직 시간이 많이 남은 대상에게 쓰는 말이다. 성장은 자라는 것이 멈췄거나 퇴행하는 존재에게는 쓰지 않는다. 기억을 상실하는 노인에게는 ‘치매를 앓고 있다’고 하지 ‘ 성장통을 앓고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이제 마라톤의 반을 뛰었을 마흔에게는, 또 다른 반이 남아있다. 비록 전반보다는 느리게 갈지라도, 그 느림에는 자기만의 주법을 찾아낸 자의 여유로움이 있다. 또한 전반에 뒤처진 것을 지구력과 마지막 전력질주를 통해 만회하거나 역전시킬 가능성도 있다. 그러므로 성장통은 기쁘게 맞이하고 당당히 대처해야 할 희망의 통증이다.
늙음은 늙음을 두려워만 하고 있는 사람에게 더 빨리 찾아온다. 그것을 우리는 조로(早老)라고 한다. 그리고 이것이 성장통을 잘 못 겪는 어른이 보이는 가장 최악의 모습이다. 마흔의 눈으로 봤을 때 서른의 조바심이 유치함이었듯이, 예순의 눈에는 시흔이, 시흔의 눈에는 마흔의 성장통이 그저 우스울 수도 있다. ‘나는 서른보다 늙었어’가 아닌, 나는 ‘시흔보다 젊었어’라는 생각이 조로 예방의 자세다. 마치 정희성님의 <태백산행>이라는 시(詩)처럼.
눈이 내린다 기차 타고
태백에 가야겠다
배낭 둘러메고 나서는데
등뒤에서 아내가 구시렁댄다
지가 열 일곱 살이야 열 아홉 살이야
구시렁구시렁 눈이 내리는
산등성 숨차게 올라가는데
칠십 고개 넘어선 노인네들이
여보 젊은이 함께 가지
앞지르는 나를 불러 세워
올해 몇이냐고
쉰 일곱이라고
그 중 한 사람이 말하기를
조오흘 때다
살아 천년 죽어 천년 한다는
태백산 주목이 평생을 그 모양으로
허옇게 눈을 뒤집어쓰고 서서
좋을 때다 좋을 때다
말을 받는다
당골집 귀때기 새파란 그 계집만
괜스레 나를 보고
늙었다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