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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계룡시 엄사리에 있는 어선횟집 주인 '남모'(53)씨의 회 치는 솜씨는 예술 그 자체다. 금방이라도 튀어 오를 것 같은 광어를 같은 크기에 같은 모양으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칼질한다. 남씨는 원양어선 생활 20년 경력의 '물고기 박사'다.
동장군이 기승을 부리던 지난 주말 육군 장성들이 어선횟집을 찾았다. 장성들이 회 두어 점을 고추장에 한껏 담가 먹더니 이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운다. "살살 녹는다"고 칭찬이 자자하다. 분식점을 개조해 만든 아담한 횟집이지만 군인들 사이에선 으뜸이라고 소문난 곳이다.
손님을 응대하느라 남씨의 얼굴에선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하지만 까맣게 그을린 피부와 자글자글 주름진 손등은 그의 반 백 년 인생이 그리 순탄치만은 않았음을 짐작케 한다. 실제 그의 삶은 영화 같았다. 치열하게 살아 왔지만 그의 인생은 영화처럼 해피 엔딩은 아니었다.
망망대해에서 목숨을 걸고 마약 조직원을 물리치고 세상을 구했지만 그는 한국 정부로부터 철저히 버림 받았다. 삶의 터전은 물론 희미하게나마 눈앞에 아른거렸던 희망조차 잃은 그는 나락으로 추락했다. 4년간의 방황과 좌절로 몸부림치던 남씨는 마지막 한 줄기 불빛에 의지해 기적처럼 자신을 곧추세웠다.
조국에게 버림받다
2005년 9월 27일 브라질 정부는 코카인 1,200㎏을 남미 수리남에서 아프리카 세네갈로 운반하던 국제 마약 조직을 적발했다고 발표했다. 4,000만명(1인 1회 흡입량 0.03g)을 중독시킬 수 있는 분량으로 브라질 마약 단속 사상 세 번째로 큰 규모였다.
코카인 운반선이 수사 당국에 붙잡힌 데는 배의 키를 잡았던 남씨가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는 함께 승선한 마약 조직원을 제압한 후 천신만고 끝에 탈출에 성공했다. 승선과 탈출, 신고 과정은 영화처럼 극적이었다.
남미의 오지 수리남에 원양어선 선장으로 8년 동안 머물렀던 그에게 솔깃한 제안이 온 것은 같은 해 9월 초. 정글에서 생산되는 광석을 세네갈까지 실어 주면 수고료를 준다는 것이었다. 고기가 안 잡히는 비수기인 데다 일도 어렵지 않아 선뜻 응했다. 그러나 광물을 받기로 한 브라질 공해상에는 느닷없이 코카인을 실은 쌍발 비행기가 나타났다.
한 번에 4, 5개씩 포장된 물건을 7, 8차례 바다로 떨어뜨리더니 콜롬비아 출신의 마약 조직원들이 나타나 남씨가 탄 배로 물건을 옮겼다. 코카인은 곤란하다고 말하는 남씨에게 그들은 "너도 이제 공범이다. 이대로 수리남에 돌아가도 우리 조직원들에게 살해된다"고 협박했다.
세네갈행 선박에는 키를 잡은 남씨와 재중동포 2명, 콜롬비아 조직원 1명이 승선했다. 15~20마일 뒤에는 감시선이 남씨의 배를 감시하며 따라왔다. 며칠간의 고민 끝에 남씨는 '마약을 운반할 수는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콜롬비아 조직원이 멀미로 구토하는 사이 예정된 항로를 조금씩 이탈했다. 기회를 틈 타 조직원을 제압한 뒤 위성전화를 빼앗아 베네수엘라 한국 대사관에 신고했다. 대사관 지시에 따라 브라질 포르탈레사 항구에 도착했다.
인터폴 수사관과 브라질 연방경찰 10여 명이 마중 나와 공포탄을 쏘아 대며 기뻐했다. 현지의 한국 외교통상부와 국가정보원 직원들도 "대단한 일을 해냈다"며 남씨를 추켜세웠다. 인생에서 가장 뿌듯한 순간이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브라질 당국의 조사를 받은 그는 대책 없이 한국으로 인도됐다.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한 순간 악몽이 시작됐다. 생활 근거지였던 수리남으로는 보복이 두려워 돌아갈 수 없었고, 돈도 없고 연고도 없는 한국은 그에겐 낯설기만 할 뿐이었다. 수리남을 떠날 때 입었던 남루한 옷을 아직도 입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눈물을 펑펑 쏟았다.
스스로 운명을 개척하다
갈 곳 없던 남씨는 인천의 한 부랑인 시설에 수용됐다. 자신이 부랑인이 아니었고, 알코올중독자는 더더욱 아니었지만 한동안 이곳을 떠나기가 두려웠다. 마약 조직원들이 찾아와서 자신을 죽일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시달렸다. 하지만 조만간 한국 정부에서 자신의 공적을 인정해 줄 것이라는 기대감으로 모진 세월을 꿋꿋이 버텼다.
2005년 11월 검찰에서 드디어 남씨를 불렀다. 공적 인정과 보상을 기대했지만 정부는 철저히 남씨를 외면했다. 검찰이 남씨를 부른 이유는 정부가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는 점을 설명하기 위해서였다.
귀국하면 보상이 가능할 것이라는 정부 관계자의 말은 온데간데없었다. 외교부도, 국정원도, 검찰도 그의 노고를 치하했지만 정작 실질적 혜택은 전무했다. 검찰 관계자는 "국외에서 발생한 일이라 보상을 해 줄 수 없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청와대에 진정도 했지만 같은 답변이 돌아왔다.
남씨는 "지금 내 처지를 보면 누가 목숨 내놓고 마약 범죄를 신고하겠냐"며 눈물로 호소했지만 달라진 건 없었다. 4,000만명을 마약중독 위기에서 구한 남씨가 기댈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남씨는 사람들이 왜 자살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입에 풀칠이라도 해야 했기에 2006년 2월 부랑인 시설을 빠져 나와 선박 회사에 취직한 뒤 전국을 돌며 바다 쓰레기를 치우는 잡일을 시작했다. 화물 운송 회사에서 막일도 했다. 잠은 아무데서나 잤다.
한국에서 남씨는 한동안 없는 존재였다. 죄인도 아닌데 죄인처럼 숨어 지냈다. 마약 조직의 보복이 두려워 신분증을 일부러 안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김철수라는 가명으로 세상에 알려지기도 했다. 고향에 계신 팔순 노모가 보고 싶지만 찾아 볼 수도 없었다. 밤마다 흘리는 눈물은 마른 지 오래다.
조국에겐 더 이상 기댈게 없었다. 어차피 헝클어진 인생, 그는 마음을 비우고 죽도록 일에만 매달렸다. 2006년부터 2008년까지 사력을 다해 돈을 모았다. 평생의 반려자를 만나 지난해 초 계룡시에 둥지도 틀었다. 원양어선 경력만 20년이라 생선 요리에 관한 한 자신이 있었던 그는 오랜 시간 꿈꾸던 횟집을 열었다. 굴곡진 그의 인생을 상징하듯 이름은 어선횟집으로 지었다.
테이블은 고작 5개에 불과하지만 길고 긴 유랑의 시간을 끝내고 정착했다는 것만으로도 그의 가슴은 벅찼다. 인생의 변곡점을 지난 셈이었다. 이제는 장군들이 찾는 횟집으로 자리잡을 만큼 입 소문이 났다. 군인들의 성원에 힘입어 남씨는 이달 초 더 큰 가게로 옮길 예정이다.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 전 그는 마음 속으로 정리할 것이 하나 있다. "조국에 대한 원망은 이제 접을 랍니다. 그래도 대한한국 땅에서 밥 벌어 먹고 살고 있지 않습니까." 장고 끝에 최근 신분증을 새로 만든 그는 2010년 1월 김철수라는 가명을 버리고 세상을 향해 자신의 진짜 존재를 처음 드러냈다.
"제 이름은 남성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