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들 희망찬 새해 맞으셨겠지요?^^
이번에 랜덤허우스에서 출간된 "랜트"의 서평인데요...
이 절믄옵하~가 쓴 꼬실레이숑 용 후기는 이거에 비하면 이빨도 안 들어가누만요.
어쩌면 이렇게 철저히 분석해서 거침없이 썰(?)을 풀 수 있는지, 부러워라...
저는 개인적으로 척 팔라닉이 천재가 아닐까 싶습니다. 천재가 아니고서는 이런 글을 쓸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근본적인 이유겠으나 그에 앞서 말이죠, 이 냥반이 시전해 보이는 공력이 노력으로 얻어지는 레벨이 아니라는 생각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이 랜트와 유사한 주제의, 그러나 조금은 다른 접근 방식을 택한 사라마구 할아버지의 <눈 먼, 눈 뜬 냥반들의 도시>라는 작품과 비교해봐도 그렇습니다. 그 작품들도 잘 쓴 소설이지요. 이 소설들이 걸작이라는 건 제가 말하지 않아도 노벨 문학상이 그렇다고 그러잖습니까. 그리고 실제로도 재미있고 기발하고요.
하지만 이런 게 있어요. 그 기발함이, 말하자면 곰곰이 생각하면 떠올릴 수도 있는 정도는 된다는 것입니다. 멋진 디자인을 보고 멋진 걸 알았는데 나도 곰곰이 생각하면 그런 디자인을 뽑을 수 있겠다 싶은 그런 감정이랄까요? 남이 한 걸 보고 나서 떠올리는 얍삽한 심리이기는 해도 어쨌든 떠오르는 건 떠오르는 거니까요. 이런 건 말하자면 장기를 두었고 계속 지는 상황에서도 왠지 그 한 수의 실수 때문에 지는 거라 생각이 들어 매우몹시계속 도전하게 되는 심리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실수만 안 하면 이긴다, 뭐 그런 각오로 한 백 판쯤 졌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딜을 하는 상황인지라 프로 갬블러들이 매우 선호하는 방식이기도 하지요.
그런데 말이죠. 그와는 반대로 어이쿠, 이건 내가 죽었다 깨어나도 흉내낼 수 없는 디자인이로구나 혹은 일억 판을 해도 지겠구나 싶은 레벨 차이를 탁, 느끼면 바로 두 손을 들어버리죠. 뭐랄까, 감당할 수 없는 고수의 삘이 빡, 온달까요? 잘못 건들면 디지겠다 싶은 뭐 그런 건데요,
척 팔라닉의 소설이 그렇습니다.
읽으면서도 대단하네 이 냥반, 그런 생각이 불쑥 불쑥 드니까요.
그래서 만약에 <눈 뜬 냥반들의 도시>와 <랜트>가 동시에 신인 문학 공모전에 응모했다 치고, 제가 그곳의 최종 심사위원이라면 랜트를 뽑겠다는 이야기가 되겠습니다. 왜? 난 놈은 난 놈대로 인정해줘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어때, 척, 마음에 들어? 그러니까 난 때리지마.
작가의 사진을 보면 아시겠지만 누굴 좀 잘 때리게 생기셨어요.
그러면 간만에 넘버링질 좀 하겠습니다. 정리해서 썰을 풀지 않으면 난장판이 될 우려가 있다고 생각되거든요.
1.
팔라닉은 확실히 자신만의 타입이 있습니다. 명찰 떼고 읽어봐도
얜, 팔라닉 스타일인데?
그런 게 딱 나와주신다는 얘기이지요. 그리고 이 팔라닉 스타일은 아직까지 팔라닉에게서 밖에 보질 못했습니다.
이 스타일의 특징 중에는 늘, 껌 좀 씹어주시는 불친절이 맨 앞쪽에 도사리고 있는데요, 마치 간만에 나이트에서 몸 좀 풀어보려는데 정문 앞에 기도가,
왜, 너도 놀게?
라고 말하는 느낌이 들어서 살짝 적응기가 좀 필요하다고 여겨집니다. 한동안은 이게 뭔 소리야, 그렇게 이야기가 전개된다는 얘기이지요. 이전 작품들과는 달리 이 소설은 500페이지에 달하기 때문에 이게 뭔 소리야, 기간이 조금 더 길었습니다. 팔라닉의 광팬인 저의 경우도 한 80~90쪽까지 열라게 헤메다가 이거, 이번 꺼는 삑사리가 아닌가 오해도 했었으니까요.
이 불친절의 형태가 이런 겁니다. 이야기가 앞뒤 없이 툭, 하고 내던져지는 방식으로 시작되어요. 난데없죠. 약간 사차원적이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뒤로 갈수록 점점 이해가 되어가는 구조를 지니고 있습니다. 마치 저 조그만 얼음산이 뭔가 싶어 내려가다보니 엄청난 빙산의 일각임을 깨닫게 되는 것처럼 이 과정은 버텨볼만 합니다. 그만한 보상이 있으니까요.
그러므로
팔라닉의 소설은 읽는 과정에 등장하는 내용들을 여타의 작품보다 조금 더 집중해서 기억해야할 필요가 좀 있습니다.
이건 말하자면 퍼즐 같은 거니까요.
앞에 나왔던 그림을 기억하고 나중에 나오는 모양과 맞추가면서 전체를 그리는 형태 말이죠. 이 과정을 반복하다보면 어느 순간부터 더는 헤어나오지 못하는 경지에 빠져들게 됩니다. 직소 퍼즐 해보셨습니까? 시간 가는 줄 모르죠? 결국 눈과 허리가 아퍼서 일어나면 일어났지 하다가 재미가 없어서 포기하는 경우는 매우 드뭅니다. 이 소설도 직소 퍼즐과 아주 유사한 구조를 가졌습니다. 그러니 팔라닉이 대단히 똑똑한 사람이 아니랄 수 없지요. 소설에다가 퍼즐판을 펼쳐놓는다는 게 이게 말이나 되는 얘기입니까? 이런 공력을 가진 작가는 제가 아는 소설가 중에는 아마도 팔라닉이 유일하지 않을까 싶네요.
그러니 이건 대략, 매력이라기보다 마력에 가깝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모르면 몰라도 알면 빠져나올수 없는 중독성을 지닌 냥반입니다.
2.
퍼즐의 이음새가 딱 맞아 떨어지지 않으면 미세하게라도 틈이 생깁니다. 조금의 차이도 용납하지 않죠. 아무리 모양이 비슷해도, 성질나서 꾸겨 넣고 싶은 심정이 들어도, 아닌 건 안 맞습니다. 그러다가 제 짝에 맞는 조각을 찾으면 가히 하늘을 나는 기분이 드는데 이 소설도 그런 효과가 있습니다. 정말 딱 들어맞죠. 기가 막힙니다.
어느 것 하나 너저분하게 던져놓은 게 없어요. 정말 상관없어 보이는 한 조각이, 뒤로가면 어느 순간에 딱 들어맞는 부분이 등장한다니까요. 놀라운 냥반이야.
그런데 이런 지존의 경지에 가까운 구성력이 사전에 치밀하게 짜여진 결과물이 아니라는 느낌이, 팔라닉이 천재라는 생각을 들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일단 던져놓고 그 다음에 상황을 수습하는 필인데, 그 구라 실력이 장난이 아니라서 어떻게든 맞춰나가는 거죠. 여기서 중요한 점은 그렇게 얘기를 풀어나가는 데도 불구하고 어느 하나 헛점이 잡히질 않으니 이 냥반 이거, 작가가 안 되었으면 교주가 되었거나 교주가 좀 심했다 싶으면 세기의 사기꾼이 되었겠다 싶은 겁니다. 설득력이 장난이 아니죠. 이 냥반의 구라 솜씨면 정말 오천 오백만 남한 국민이 죄다 김일성이 낙엽타고 대동강 건넌 얘기를 믿을 수도 있을 것 같은 지경입니다. 그 정도로 리얼하고 디테일하게 뻥을 쳐요. 이런 식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때 수천명이 죽었지.
라고 말하는 사람보다,
2007년 6월 27일에 육천 사백명이 죽고 여섯 명이 다쳤으며 두 명이 토했어. 어마어마했지.
라고 말한 사람의 말을 더 신뢰하는 심리를 백분 활용해주시는 팔라닉이십니다. 그렇게 하여 2007년 6월27에 죽은 육천 사백명 중에 한 명을 발췌하여 또 다른 사건과 고리를 매듭짓는데 후반부로 갈수록 요게 아다리가 착착, 맞아가니, 읽는 독자가 뿅뿅, 갈 수밖에 없는 겁니다. 치밀하게 구성을 해서 소설을 쓰는 성실한 양반이 아니라 타고난 재주로 써가면서 아다리를 맞추는 듯한 느낌의 프리하면서도 프로스러운 공력이 돋보이는 이유가 바로 그래서입니다. 구라가 워낙 상세하고 리얼하다보면 설사 그게 뻥이었다손 치더라도 믿고야 말겠다는 강한 결심을 불러일으키는 경우가 생기는데 이 경우가 그 경우에 해당한다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맛깔난 이빨맨이라지요.
읽으면 읽을수록 점점 맞아들어가는 그림이 그에게 속고 있다는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아드레날린을 증폭시키는데요, 정신적 오르가즘이라면 이런 걸 두고 그렇게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후반부의 절정은 가히 끝내주지요. 맥 라이언의 신음을 재연하고 싶은 심정이 드는 거니까요.
3.
여기서 잠시, 척 팔라닉이 전하는 그의 세상 바라보기에 대해 논해보겠습니다. <파이트 클럽>에서의 타일러 더든이 주장했던 것은 갈아엎자, 였습니다. 먼저 자신을 갈아엎고 자신을 갈아엎은 놈들이 모여 세상을 갈아엎자 그거였지요. 그 작품에서 등장했던 그래야하는 이유가 이 작품 <랜트>에서도 이어집니다. 같은 맥락이라고 보시면 되요.
다만, <파이트 클럽>은 싹 갈아엎고 그 위에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자, 라는 약간은 젊은이스러운 진취한 기상이 바닥에 깔려있었던 반면, 이 작품은 그냥, 까뮈가 그렇게 미친듯이 외쳐댔던 부조리한 사회에 대해 냉소로 얌전히 물러납니다. 첫째,
야이, 멍청이들아. 니들이 그러니까 독재가 존재하는 거야.
라는 식의 대중을 향한 <브이 포 벤데타>스러운 질책이 풍자되지요. 둘째,
종교, 신? 야이, 자식들아, 랜트를 보면 모르겠냐?
라고 말하지요. 실제로 랜트의 작품 전반에는 하나의 인물이 어떻게 신격화 되어가는 가를 순차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마야인이 예언했던 지구 종말의 날 12월 21에 부활을 의미하는 랜트를 창조해서 예수와 동격으로 만들더니 잠시 후엔 결국, 그를 삼위일체의 본체를 만들어버리지요. 그런데 팔라닉은 이 모든 행위들이 다, 니들이 그런 거잖아! 라고 말하는 겁니다.
<어쩌면 그들은 모두 진짜 아무것도 아닌 사람으로 시작했지만 그들의 실체가 없어지는 동안 그들 주위로 새로운 이야기들이 쌓여갔다.>
셋째,
그런 과정에서 역시 대중이 속고 있는 정부의 기만에 대해서도 놓치지 않습니다. 전설의 랜트라는 인물은 단지 어느 한쪽의 필요에 의해서만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는 주장이지요. 정부와 대중, 양쪽 모두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얘기입니다.
정부에서는 국민들을 주간 생활자와 야간 생활자로 구분하고 각각의 영역에 통금 시간까지 지정합니다. 그것을 어기면 벌금이 500달러라나? 그러나 이것은 풍자일 뿐, 정부의 입장에서 순종적인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구분을 팔라닉이 그리 표현한 거라 보시면 됩니다. 말하자면 이노무 말 안 듣는 급진 말썽쟁이들에게 야간 생활자라는 바코드를 찍어주고 구분해놓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 자들이 가만이 있질 않고 전작 <파이트 클럽>에서의 파이트 클럽처럼 자동차 충돌파티라는 문화를 새롭게 만들어 냅니다. 그리고는 정부의 흐름에 계속해서 태클을 거는 행동들을 보여주어 교통이 자꾸 마비되지요.
이에, 정부는
랜트라는 인물을 만들어 냅니다. 치명적 광견병의 숙주이자 모든 독의 근원이자, 슈퍼 전파자. 그래서 이 전염병에 걸린 자들은 법적인 절차나 국민의 권리 따른 절차 없이 바로 격리 수용시켜버리고 영원히 그곳에 가두어두는 장치를 만드는 것이지요. 물론 이것은 작품의 등장 인물이 제시한 하나의 음모론에 해당합니다. 하지만 작품의 말미에 보면 작가는 그 음모론을 지지하고 있음을 보여주지요. 등장 인물을 요악해 놓은 부분에서 대부분의 야간 생활자는 격리 수용되어있는 것으로 나오거든요. 정부에 꼭 필요한 야간 생활자만 격리 수용되지 않았죠. 이는 정부가 랜트를 이용해서 얻고자 하는 효과를 톡톡히 보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며, 결국 그게 결론으로 내려진 것으로 보아, 팔라닉도 어쩔 수 없음을 시인하는 느낌이었습니다.
<파이트 클럽>이 20대를 상징한다면, <랜트>는 50대를 상징한다고 봐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이제 세상 돌아가는 원리를 다 알긴 하지만 그 무엇도 그것을 바꿀수는 없음 또한 알아버린 뭐 그런.
여기서 랜트가 신화가 된 또 다른 시각이 밎물려 소개됩니다. 정부는 그래서 랜트가 필요했다면 이번엔 대중은 도대체 왜 랜트를 신격화 했는가에 대한 이야기지요.
이 과정에서 자동차 충돌파티라는 급진적 사회문화를 만들어낸 랜트라는 지위가 물론 엘비스 프레슬리처럼 하나의 코드가 되었고 그래서 대중이 랜트에게 열광하는 요인 중에 하나였던 것은 분명합니다만, 이들에겐 또하나의 미신. 혹은 무지함의 표현으로 시간 여행이라는 테마가 등장하게 되지요. 시간이 실은 직선이 아니다, 라는 식의 물리학적 구라까지 쳐 주시면서 그럴듯한 뻥을 만들어내주시지요. 문제는 사람들이 그 뻥에 열광한다는 얘기인데요. 쉽게 말해, 마이클 잭슨의 춤을 똑같이 따라하다 보면 어느 순간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이 생긴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종국에는 영원불멸의 존재가 될 수 있다고 믿는 것이지요. 그 랜트 따라잡기 놀이에는 광견병에 걸리자, 라는 표어로 생활하는 여자분들이 대거 등장해주시는 데 우리나라로 치자면 된장녀쯤 된다고 보여지더군요. 뭐가 됐든 일단 유행에 뒤처지면 죽는다고 생각하는 뭐 그런 냥반들 말이죠.
그러니까 팔라닉은 일반 대중에 대해서도 각 부류마다 세밀하게 쪼개어 각개전투로 까 주십니다. 종교인들, 된장녀들, 맹목적으로 미신을 믿는 이들, 캐족보를 가진 가족, 등등 친절하게 신분까지 잘 표기하여 독자에게 전달해주지요. 오만 인간 군상이 이 작품에 다 들어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지경입니다.
3.
산타클로스처럼 거대한 사회적 합의에 의한 구라가 사람들을 길들인다라는 관점은, 말하자면 현 교육제도에서 비롯된 대중의 세뇌 효과를 풍자하는 것인데요, 사람들을 이렇게 어려서부터 길들여놓으면 장차, 정부가 원하는 방식의 권력 행위가 순탄하게 이루어진다는 음모론을 제시하는 셈이지요. 팔라닉의 이 주장은 사라마구 할배가 주장하는 부분과도 상당부분 맥이 닿아있습니다. 단지 사라마구 할배는 사회주의자이시고, 나이가 좀 있으시니까 점잖게 표현했다고 할라치면, 팔라닉은 그보다 좀 더 과격하게 침 좀 뱉어주시는 식으로 그로테스크하게 표현했다고 볼 수 있는 거지요.
그런데 어쩌면 팔라닉이 유독 극단적이고 역겹게 상황을 묘사해나가는 이유가 바로 인간의 본성이 그렇다고 주장하려는 하나의 의지라고도 해석해 볼 수 있겠습니다. 가히 풍자 문학의 대가, 비꼬기 문학의 지존이라고 여겨지는 팔라닉의 진가가, 만약 이 시대에 안 먹힌다면 다음 시대에는 먹힐 것이라 저는 그리 믿사옵니다. 앤디 워홀이나 잭슨 폴락의 작품도 천재적이라고 하는 판에 척 팔라닉이 그렇지 않다는 것은 용납할 수 엄서효!
4.
끝으로 팔라닉의 천재성을 논하는 데 있어 화룡정점이라 할 수 있는 부분을 하나 소개하고 맺겠습니다. 어차피 이 지경까지 왔으면 이미 다들 자리를 뜨고 없으실 거라고 생각은 합니다만 그래도,
나 있어, 이 자식아.
라고 말씀하실 이름 모를 그 한 분을 위해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소설의 서두에서 패턴 차단이라는 용어가 등장합니다. 예기치 않은 말이나 행동으로 상대방과의 관계에 변화를 일으키거나 당연하다고 믿는 것을 생경하게 만들어 새롭게 생각해볼 기회를 주는 일, 이라고 역자가 주를 달았는데요, 이 패턴 차단의 기법이 소설 전체에도 쓰여졌습니다. 그게 팔라닉의 소설을 처음 접하시는 분들이 당황하는 요인이 되기도 하는 것이지요.
말하자면 척 팔라닉의 소설은 지면 위에 인쇄된 글임에도 불구하고 입체적이라는 말쌈이 되겠습니다. 자신이 소설에서 소개한 내용들을 직접 소설을 쓰는 과정에도 사용하는 이 입체적인 개념이야말로 그를, 천재적인 작가로 만들어주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아님 말자.
이렇게까지 리뷰를 썼는데 척 팔라닉이 정말 나는 안 때리겠지?
[출처] [영미소설] 랜트 -척 팔라닉, 황보석 (랜덤하우스 판타스틱 픽션) |작성자 까칠한 비토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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