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이또 히로부미를 조명하는 일본사학회 국제학술대회를... |
자유게시판 > 상세보기 |
| |
2009-11-27 16:51:30 |
|
|
|
|
제목 |
|
|
이또 히로부미를 조명하는 일본사학회 국제학술대회를... |
글쓴이 |
|
|
임재우 [가입일자 : 2002-12-18] |
내용
|
|
안중근장군님 서거 100주년에 우리나라에서 한다는군요.
이또오 히로부미에 대한 역사적고찰이 주제라고 합니다.
정말 이나라가 싫어집니다.
28일 일본사학회 국제학술대회
(서울=연합뉴스) 김윤구 기자 = 안중근의 하얼빈 의거 100주년을 맞아 한국과 일본 학자들이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1841~1909)를 조명하는 국제학술대회를 마련한다.
이토는 한국에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고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는 등 일본의 한국침략을 진두지휘한 인물로 인식되지만, 일본에서는 메이지 유신 이후 서양문명을 적극적으로 수용해 근대국가를 건설한 최대 공로자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일본사학회가 28일 숙명여대 수련교수회관에서 '일본의 한국지배와 이토 히로부미'를 주제로 개최하는 학술대회에서도 한ㆍ일 학자들의 시각은 대체로 엇갈린다.
사카모토 가즈토 일본 고쿠가쿠인(國學院)대학 교수는 미리 배포한 발표문을 통해 "이토는 한국정치의 최대 문제는 강대한 황제 권력의 남용에 있다고 인식하고 궁중 개혁에 매달려 내각을 정치의 중심으로 세우려 했다"면서 "이완용 내각과 일진회의 대립 등으로 인해 안정적이고 통치능력이 있는 한국 정부를 존속시키는 것이 불가능해지고 민심도 이반하자 통감 정치를 단념하기에 이르렀다"고 주장했다.
그는 "통감기의 내정 통치 주체는 어디까지나 황제를 중심으로 하는 한국 정부에 있었다"면서 "이토는 한국의 정치를 자유롭게 조작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며 항상 한국 정부의 존재 형태에 관심을 두고 근대화 정책을 실행할 수 있는 정치시스템을 구축하는 데 몰두했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방광석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연구교수는 "이토는 식민지배를 전면에서 지휘하기 위해 통감이 돼 한국으로 건너왔으며 보호통치를 시작하는 단계부터 한국병합 가능성을 생각했던 것이 당연하다"고 말했다.
또, "이토는 최초에는 한국의 내부 상황이나 국제정세 등을 고려해 보호통치가 한국지배에 유효하다고 판단했으며 한국에서 식민지배 기반이 정비되고 서양 열강의 승인을 얻는 등 적당한 시기가 되면 병합에 착수하는 것도 가능하다는 생각이었다"면서 "다만 대한(對韓) 강경론을 주장하는 다른 정치세력과 달리 이토는 한국병합에 대해 점진론을 취하고 신중했다고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밖에 '청일전쟁기 이토내각의 대조선 군사ㆍ외교에 대하여'(서민교), '이토 히로부미의 한국통치와 조선사회'(오가와라 히로유키) 등 모두 6편의 논문이 발표되고 개별 및 종합토론이 이어진다.
|
|
|
|
|
|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