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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아더는 우리나라의 영웅이 아니라 일본 우익의 영웅이다
자유게시판 > 상세보기 | 2009-09-24 09:36:04
추천수 0
조회수   1,319

제목

맥아더는 우리나라의 영웅이 아니라 일본 우익의 영웅이다

글쓴이

이명재 [가입일자 : 2002-07-08]
내용
전쟁영웅 맥아더...



사실 미국에서 맥아더의 위치는 그리 높지 않습니다.



악명이 높은 '정치군인'이란 이미지가 강합니다.



오히려 한국에서의 명성이 미국에서 보다 높은데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을 신격화하여 주입식으로 가르쳤던 영향이 아무래도 크게 작용했습니다.



하지만 정작 맥아더라는 인물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정체성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였으며



전쟁승리...



오로지 자국의 전쟁승리를 위해서 싸웠을 뿐입니다.



맥아더의 한국전쟁 전후 행적을 살펴보면



우리가 맥아더를 존경까지 해야하는지...



아니면 그 반대일지 의문이 들게 합니다.





1. 일본 약탈 한국문화재 10만점..맥아더가 반환 반대



일본이 19세기 말부터 2차대전에서 패망하기까지 한반도 곳곳에서 최소한 10만점의 문화재를 약탈해 갔으나 반환은 요원하기만 하다고 미국의 시사 주간지 타임이 보도했다. 타임은 또 2차대전 종전 직후 일본 점령군 사령관이었던 더글러스 맥아더장군이 정치적인 고려에의해 약탈문화재의 반환에 반대했다는 사실이 미 문서보관소기록을 통해 드러났다고 밝혔다.



타임 아시아판 최신호(2월4일자)는 일본의 약탈자들과 관변 고고학자들은 일제 강점기에 왕릉을 파헤쳐 금세공품과 옥장식,청자,돌조각품,탑 등 유물을 약탈해간 것은 물론 사찰에서 값으로 따질 수 없을 만큼 귀한 사리함들을,도서관들에서는 수만점의 서책을 일본으로 실어갔다고 지적했다.



약탈문화재 가운데 청자와 같이 최고의 물품들은 일왕에게 진상됐다고 타임은 설명했다.



2차대전이 끝난 이후 서방 각국의 정부와 박물관들은 나치가 약탈해간 문화재를 반환받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고 있으나 아시아의 옛 일제 식민지,특히 한국에서는 이같은 노력이 상대적으로 미약하다고 이 잡지는 지적했다.



타임이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에서 발굴한 1948년 맥아더 장군의 라디오 연설 녹취록에서 맥아더 장군은 “나는 군사행동과 점령의 결과로 상실되거나 파괴된 문화재의 원상복귀에 관해서는 아주 강력히 반대한다”고 말했다. (뉴욕=연합)



2. 맥아더는 일본 우익의 '대부'

맥아더는 1945년 미주리함에서 일본왕(소위 천황)의 항복문서를 받는 것을 시작으로 1951년 퇴역할 때까지 6년간 일본을 통치했다. 도쿄에 주둔한 점령군 사령관으로서 식민지 총독 이상의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다. '무관의 황제(Uncrowned Emperor)'라고 불릴 정도였다. 그의 전기 제목도 'American Caesar'다.



미 태평양사령부 및 연합군사령부의 총사령관인 맥아더의 주요 임무는 크게 세 가지였다. 첫째, 전범재판 등 전후처리, 둘째 전후 재건 등 일본 통치, 셋째, 대소련 방어태세 구축 등 미국의 동아시아정책 수행이 그것이다. 이 세 가지는 모두 긴밀히 연결된다. 아울러 우리 민족의 명운과 밀접하게 연관된 사안들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중차대한 임무를 수행하면서 맥아더는 대단히 정의롭지 못한 역사의식을 드러내고 만다. 하나하나 짚어보자.



우선 패전국 일본의 전후처리를 관장하면서 맥아더는 제대로 된 '청산'을 회피하고 오히려 전전(戰前) 질서를 온존시켰다. 전후처리의 핵심은 전범재판이다. 한국 중국 등 아시아 여러 나라를 침략해 아우슈비츠 못지 않은 만행을 저지른 책임을 엄중히 묻고 책임자를 처단했어야 했다. 최고 전범은 누구인가. 다름 아닌 일본왕이다. '천황'의 어명으로 전쟁이 수행되었고 '천황 만세'를 외치며 앳된 병사들이 죽어갔다.



그러나 맥아더는 일본왕을 철저히 보호했다. 전범으로 기소하기는커녕 참고인으로 소환하는 것조차 막았다. 소련 중국 등 다른 승전국들은 아예 천황제 폐지를 주장했지만 맥아더는 거부했다. 내건 이유라곤 오로지 "일본을 잘 다스리려면 왕실을 지켜줘야 한다고 들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이것이 미국식 공리주의인가. 역사는 어디 가고, 편리함만 찾는가. 대단히 편의주의적인 사고방식이다.



다른 전범들에 대한 재판 및 처리도 형식적으로 진행됐다. A급 전범 중 7명에게만 사형선고가 내려졌고, 나머지 18명은 모두 석방됐다. 생체실험으로 악명 높은 731부대장 이시이 시로 중장 등 관련자 전원은 아예 기소 면제해주었다. 실험 자료를 미군측에 넘겨주는 댓가였다.



면죄부를 받은 전범들은 그 뒤 정계 등으로 들어가 일본 보수우익 세력의 중추로 활약하게 된다. 대표적인 인물이 기시 노부스케다. 태평양전쟁 당시 군수차관 겸 국무대신으로 군수물자 조달을 담당해 A급 전범으로 기소됐던 그는 맥아더에 의해 석방된 뒤 정계에 진출해 나중에 수상(자민당)이 되었다. 미 CIA는 그에게 비밀리에 정치자금을 지원해준 것으로 밝혀졌다.



3. 과거사 문제에서 일본이 독일과 다를 수밖에 없는 이유

6년간 일본을 통치하면서 맥아더가 가장 힘쓴 것 중 하나는 진보 세력을 억누르고 보수우익 세력을 강화시키는 것이었다. 전후 일본 국민들 사이에선 전전 질서 청산과 새로운 국가 건설에 대한 욕구가 컸다. 전후 처음 실시된 총선에서 사회당이 승리한 것도 그런 여망 때문이었다.



그러나 맥아더 사령부의 정치사회 정책은 그런 일본 국민들의 열망에 찬물을 끼얹으며 분위기를 완전히 바꿔놓았다. 초기에는 노동3권 보장, 농지개혁, 복지제도 도입 등 당시로선 꽤 진보적인 정책을 펴기도 했다. 그러나 1947년 노동탄압 등 이른바 '역코스'(Reverse Course) 정책으로 돌아서면서 보수체제가 더욱 공고화된다. 제국주의 일본의 주류세력이 전후에도 그대로 존속되면서, 자민당과 정통관료 세력, 그리고 전쟁으로 치부한 대기업의 3각동맹 구도가 일본사회의 지배체제로 견고하게 자리잡게 된 것이다. 이러한 틀은 그 이후 지금까지 큰 변화 없이 이어져 오고 있다.



일본의 권력구조가 이렇듯 전후 청산 절차 없이 보수우익 일색으로 이어지다보니, 과거사 문제를 처리하는 데에서도 독일과는 전혀 다를 수밖에 없게 됐다. 독일은 2차대전 후 나찌 관련 세력을 완전히 청산하고 새로운 지배구조를 형성했다. 과거사 문제로부터 자유로우니 사죄와 반성, 배상을 제대로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일본의 경우 지배층의 교체 없이 그대로 이어졌으니 사죄와 반성을 제대로 할 턱이 없는 것이다. 자기 자신 혹은 자신들의 직속 선배, 선조들이 한 일이므로 자랑스러워 하면 했지(망언, 역사왜곡, 신사참배 등),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사죄, 배상 등에 대한 거부). 과거사 문제에 대해 독일과 일본이 차이나는 근본 원인이 바로 이것이다. 그 원인구조를 만든 이가 바로 맥아더이다.







맥아더는 '일본의 우익의 영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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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재 2009-09-24 09:54:25
답글

하나더...맥아더는 처음부터 중국까지 공격해서 한국전쟁을 확대시키려 했던 장본인이고... 심지어 한반도 북부(중국과의 경계)를 방사능지대로 만들생각까지 한 사람입니다. 그의 안중에는 한국은 아에 빠져있었고 자신의 정치적 성공을 위해서 전쟁을 구상한 인물입니다. 인천상륙작전 전 5일간 폭격으로 인해 비교적 손쉽게 작전을 성공시켰지만 그때는 이미 북한군은 빠진 상태였고(기록으로는 군인 사망자는 20명정도라더군요) 가늠할 수 없는 민간인희생을 낳았습

곽영호 2009-09-24 09:54:29
답글

맞군요

심수근 2009-09-24 09:54:57
답글

어딜가나 일본 우익들이 문제군요..

이명재 2009-09-24 09:56:07
답글

그 우익들을 처벌하고 독일처럼 나치에 대한 옹호발언이 법적처벌까지 받을 수 있게 할 수 있었던 힘을 가졌던 것이 저 맥아더입니다.

반재용 2009-09-24 10:00:37
답글

어딜가나 미국이 문제군요.

zepps@freechal.com 2009-09-24 10:05:17
답글

태평양전쟁에서도 일본은 미드웨이 해전 이후 사실상 전력을 완전히 상실하여 태평양에서 더 이상 미국과 상대할 상황이 아니었음에도 맥아더는 일본본토에 대한 직접 공격을 미루고 일본이 점령하는 모든 섬들을 하나하나 점령하는 전략을 채택합니다.<br />
<br />
이는 어디까지나 맥아더 자신의 정치적 성공을 위한 승전보를 만들기 위한 것으로 미군은 태평양의 수많은 섬에서 전투를 치르며 막대한 희생을 치르게 됩니다.<br />
<br />

김기홍 2009-09-24 10:05:17
답글

대통령 할라다가 팽 당했지요

이명재 2009-09-24 10:12:09
답글

미국 우익들에게도 우상으로 떠올랐다가 2차대전 당시 전략적 오류들이 들어나자 인기가 급하강했고 그의 참모였던 아이젠하워가 공화당대통령후보로 올랐죠.<br />
<br />
한마디로 독선과 아집으로 뭉친 전쟁광...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안지명 2009-09-24 10:20:38
답글

이때 맥아더에 의해 정치추방령을 받았다가 다시 복권되서 자민당의 발판을 인물들이 고이즈미 순야, 하토야마 이치로죠. 고이즈미 순야는 고이즈미 아버지이고 하토야마 이치로는 이번에 정권교체를 이룬 민주당 하토야마 총재의 조부죠. 둘다 미국이 탄생시킨 '55년체제'의 후손들인데 맥아더는 일본 우익의 아버지가 아니라 전후 일본 정치경제의 큰아버지정도 됩니다. 자국의 금리를 미국이 결정하도록 놔두는 나라가 일본이니 세상에 이럴수가죠... 일본내에서도 진

소준섭 2009-09-24 10:56:19
답글

맥아더는 그저 호전적 군인에 불과했습니다, 전쟁중에는 동맹이었던 소련과의 긴장관계가 새롭게 형성되면서 미국의 정책 자체가 일본,독일 등을 자기편으로 포섭하는 방향으로 급선회하게 됩니다. <br />
독일에서도 나치스 주요 인물에 대한 처벌수위를 낮추기 위해 음으로 양으로 미국이 애를 많이 썼습니다.<br />
당시 미국은 한반도의 땅 이외에는 관심이 없었을 겁니다. 그냥 또 한군데 점령한다 생각하고 들어온<br />
셈이라 봐야 할 겁니다

이준수 2009-09-24 11:16:40
답글

맥아더가 인천상륙작전후에 군인들에게 수고했다는 명목으로..<br />
<br />
군인들을 서울에 풀어 놓았다고 하더군요.. 약탈등등의 이유로...=_=;

김정덕 2009-09-24 12:13:55
답글

그놈이 안내려 왔으면 맥씨도 안왔겠죠....

nobbanss200@naver.com 2009-09-24 13:57:52
답글

정덕님 무슨 말씀을 하시고 싶으신지요?

신석현 2009-09-24 15:59:36
답글

맥아더가 훌륭한 인품과 도덕성이 겸비되고 균형잡힌 세계사 인식이 있어서가 아니라<br />
실제 적화통일을 인천상륙작전을 통해 막아냈다는 그 부분에 대한 공적을 인정할 뿐이죠.<br />
물론 반공으로 독재하던 시절에 인물 자체가 훌륭한 걸로 너무 과대평가된 부분도 있지요.<br />
인천상륙작전이 아니었어도 북한은 그냥 물러났다라고 하는 주장에는 아직 제가 공부가 부족해서 인지<br />
납득할 수가 없네요. 현재 북한의 정치,경제상황

신석현 2009-09-24 16:03:35
답글

아 그리고 전 그 때 맥아더가 아예 중국까지 끝내 밀어부쳤으면 통일이 되었을텐데 하는 아쉬움은<br />
지금도 있습니다. 통일한국이었다면 중국의 파렴치한 동북공정과 분단을 이용하는 외세에 놀아나지<br />
않을텐데 하는 마음 말이죠.

이명재 2009-09-24 16:40:19
답글

"인천상륙작전이 아니었어도 북한은 그냥 물러났다라고 하는 주장"이 누구 글/댓글에 있나요?<br />
인천상륙작전은 맥아더가 독창적으로 생각해낸 전술이 아니라 미합참부터 맥아더 참모까지 생각해냈던 겁니다. 맥아더가 아닌 다른 지휘관이라도 그쪽으로 진입할 가능성이 높았고요. 당시 인천쪽은 북한군이 방어에 집중하던 곳도 아니었음에도 5일간 민간인만 거의 대다수 희생된 무차별폭격을 했고 그 상륙선발대도 한국해병대가 맡았습니다(이부분은 우리나라에서

박경구 2009-09-24 19:33:50
답글

하나더, 전쟁후 38선에서 국지전이 계속되자 38선에도 핵폭탄을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지요. 맥아더가 수차례 미국대통령에게 핵폭탄사용을 요청하였으나 끝내 대통령이 이를 거부한것으로 알고 있읍니다...

mutante@hanafos.com 2009-09-24 19:59:36
답글

미군이 철수 안 했다면 그 놈도 못 내려 왔겠죠.

신석현 2009-09-25 01:23:01
답글

댓글은 인천상륙시 북한은 이미 빠진상태라는 글에서 그런 뉘앙스로 느껴졌던거고요.<br />
왜냐하면 어릴적 학교교육에 의한 기억에 의하면 북한군의 뒤통수를 치는 작전이었기에 북한군이 없는건 당연하다 여겼거든요. 이명재님의 글 관심있게 잘 읽었습니다.<br />
맥아더에 대한 책을 안 읽어봐서 제가 논쟁을 할 여지는 없고 다만 인천상륙작전은 우리나라의 운명에 있어한국전쟁의 중요한 전환점이었고 그에 대한 평가로 맥아더를 기억할 뿐입니다. 그러

이명재 2009-09-24 09:54:25
답글

하나더...맥아더는 처음부터 중국까지 공격해서 한국전쟁을 확대시키려 했던 장본인이고... 심지어 한반도 북부(중국과의 경계)를 방사능지대로 만들생각까지 한 사람입니다. 그의 안중에는 한국은 아에 빠져있었고 자신의 정치적 성공을 위해서 전쟁을 구상한 인물입니다. 인천상륙작전 전 5일간 폭격으로 인해 비교적 손쉽게 작전을 성공시켰지만 그때는 이미 북한군은 빠진 상태였고(기록으로는 군인 사망자는 20명정도라더군요) 가늠할 수 없는 민간인희생을 낳았습

곽영호 2009-09-24 09:54:29
답글

맞군요

심수근 2009-09-24 09:54:57
답글

어딜가나 일본 우익들이 문제군요..

이명재 2009-09-24 09:56:07
답글

그 우익들을 처벌하고 독일처럼 나치에 대한 옹호발언이 법적처벌까지 받을 수 있게 할 수 있었던 힘을 가졌던 것이 저 맥아더입니다.

반재용 2009-09-24 10:00:37
답글

어딜가나 미국이 문제군요.

zepps@freechal.com 2009-09-24 10:05:17
답글

태평양전쟁에서도 일본은 미드웨이 해전 이후 사실상 전력을 완전히 상실하여 태평양에서 더 이상 미국과 상대할 상황이 아니었음에도 맥아더는 일본본토에 대한 직접 공격을 미루고 일본이 점령하는 모든 섬들을 하나하나 점령하는 전략을 채택합니다.<br />
<br />
이는 어디까지나 맥아더 자신의 정치적 성공을 위한 승전보를 만들기 위한 것으로 미군은 태평양의 수많은 섬에서 전투를 치르며 막대한 희생을 치르게 됩니다.<br />
<br />

김기홍 2009-09-24 10:05:17
답글

대통령 할라다가 팽 당했지요

이명재 2009-09-24 10:12:09
답글

미국 우익들에게도 우상으로 떠올랐다가 2차대전 당시 전략적 오류들이 들어나자 인기가 급하강했고 그의 참모였던 아이젠하워가 공화당대통령후보로 올랐죠.<br />
<br />
한마디로 독선과 아집으로 뭉친 전쟁광...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안지명 2009-09-24 10:2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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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맥아더에 의해 정치추방령을 받았다가 다시 복권되서 자민당의 발판을 인물들이 고이즈미 순야, 하토야마 이치로죠. 고이즈미 순야는 고이즈미 아버지이고 하토야마 이치로는 이번에 정권교체를 이룬 민주당 하토야마 총재의 조부죠. 둘다 미국이 탄생시킨 '55년체제'의 후손들인데 맥아더는 일본 우익의 아버지가 아니라 전후 일본 정치경제의 큰아버지정도 됩니다. 자국의 금리를 미국이 결정하도록 놔두는 나라가 일본이니 세상에 이럴수가죠... 일본내에서도 진

소준섭 2009-09-24 10:56:19
답글

맥아더는 그저 호전적 군인에 불과했습니다, 전쟁중에는 동맹이었던 소련과의 긴장관계가 새롭게 형성되면서 미국의 정책 자체가 일본,독일 등을 자기편으로 포섭하는 방향으로 급선회하게 됩니다. <br />
독일에서도 나치스 주요 인물에 대한 처벌수위를 낮추기 위해 음으로 양으로 미국이 애를 많이 썼습니다.<br />
당시 미국은 한반도의 땅 이외에는 관심이 없었을 겁니다. 그냥 또 한군데 점령한다 생각하고 들어온<br />
셈이라 봐야 할 겁니다

이준수 2009-09-24 11:16:40
답글

맥아더가 인천상륙작전후에 군인들에게 수고했다는 명목으로..<br />
<br />
군인들을 서울에 풀어 놓았다고 하더군요.. 약탈등등의 이유로...=_=;

김정덕 2009-09-24 12:13:55
답글

그놈이 안내려 왔으면 맥씨도 안왔겠죠....

nobbanss200@naver.com 2009-09-24 13:57:52
답글

정덕님 무슨 말씀을 하시고 싶으신지요?

신석현 2009-09-24 15:59:36
답글

맥아더가 훌륭한 인품과 도덕성이 겸비되고 균형잡힌 세계사 인식이 있어서가 아니라<br />
실제 적화통일을 인천상륙작전을 통해 막아냈다는 그 부분에 대한 공적을 인정할 뿐이죠.<br />
물론 반공으로 독재하던 시절에 인물 자체가 훌륭한 걸로 너무 과대평가된 부분도 있지요.<br />
인천상륙작전이 아니었어도 북한은 그냥 물러났다라고 하는 주장에는 아직 제가 공부가 부족해서 인지<br />
납득할 수가 없네요. 현재 북한의 정치,경제상황

신석현 2009-09-24 16:03:35
답글

아 그리고 전 그 때 맥아더가 아예 중국까지 끝내 밀어부쳤으면 통일이 되었을텐데 하는 아쉬움은<br />
지금도 있습니다. 통일한국이었다면 중국의 파렴치한 동북공정과 분단을 이용하는 외세에 놀아나지<br />
않을텐데 하는 마음 말이죠.

이명재 2009-09-24 16:40:19
답글

"인천상륙작전이 아니었어도 북한은 그냥 물러났다라고 하는 주장"이 누구 글/댓글에 있나요?<br />
인천상륙작전은 맥아더가 독창적으로 생각해낸 전술이 아니라 미합참부터 맥아더 참모까지 생각해냈던 겁니다. 맥아더가 아닌 다른 지휘관이라도 그쪽으로 진입할 가능성이 높았고요. 당시 인천쪽은 북한군이 방어에 집중하던 곳도 아니었음에도 5일간 민간인만 거의 대다수 희생된 무차별폭격을 했고 그 상륙선발대도 한국해병대가 맡았습니다(이부분은 우리나라에서

박경구 2009-09-24 19:33:50
답글

하나더, 전쟁후 38선에서 국지전이 계속되자 38선에도 핵폭탄을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지요. 맥아더가 수차례 미국대통령에게 핵폭탄사용을 요청하였으나 끝내 대통령이 이를 거부한것으로 알고 있읍니다...

mutante@hanafos.com 2009-09-24 19:59:36
답글

미군이 철수 안 했다면 그 놈도 못 내려 왔겠죠.

신석현 2009-09-25 01:23:01
답글

댓글은 인천상륙시 북한은 이미 빠진상태라는 글에서 그런 뉘앙스로 느껴졌던거고요.<br />
왜냐하면 어릴적 학교교육에 의한 기억에 의하면 북한군의 뒤통수를 치는 작전이었기에 북한군이 없는건 당연하다 여겼거든요. 이명재님의 글 관심있게 잘 읽었습니다.<br />
맥아더에 대한 책을 안 읽어봐서 제가 논쟁을 할 여지는 없고 다만 인천상륙작전은 우리나라의 운명에 있어한국전쟁의 중요한 전환점이었고 그에 대한 평가로 맥아더를 기억할 뿐입니다. 그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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