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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고통 3부
자유게시판 > 상세보기 | 2009-07-08 11:5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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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수   413

제목

[연재소설] 고통 3부

글쓴이

박두호 [가입일자 : 2003-12-10]
내용








유수(有數)의 사람들이 자신의 개똥철학을 가언적 방향성으로 얼토당토않게 말하곤 한다. 이 개똥철학이 뭐냐고 하면 필자가 지금까지 연재한 사소설의 논지들을 일컫는다고 해야겠다. 필자는 개똥철학의 우수(優秀)자요, 논리는 불분명한데 논제만 정해져 있는, 그런 어설픈 사상을 설파하려고 많은 사람들에게 유포하려고 노력한다. 그리하여, 항상 글을 탈고할 때는 부끄러움을 감추지 못한다.







사르트르는 소설이 문체의 아름다움이나 이데올로기를 전달하는 매체로서의 역할을 할 것이 아니라, 오로지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그 미학이 있다고 <문학이란 무엇인가>에서 언급했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개인적인 지향의식일 뿐이고, 가없는 문학가들은 여전히 미학적 글쓰기·반정부적인 사상의 글쓰기를 문학에 적용하려고 기를 쓴다. 한데, 이들이 글을 쓰는 이유는 필자가 보기에 마치 스님들의 선(禪)행과 비슷한 기질을 나타내는 것같다. 단지 방향의식만 다를 뿐, 스님들은 무(無)에 근본바탕을 둘 뿐이고, 서구지향적 철학자들은 유(有)에 근본바탕을 두고있다. 따라서, 예의 두 리좀은 철저한 정언적 이항대립의 구조를 갖추고 있는 것이다.







많은 이들이 글쓰기라는 도구적 방식을 <구도(舊道)>행위라고 간주한다. 글쓰기는 유를 덧코드화시키는, 즉 변증술의 끊임없는 무한판단적 정립이다. 또한 글쓰기는 선형적인 언어의 방식을 따라갈 수 밖에 없는 운명을 지녔다. 하기야 얼마나 많은 옛 문학가들과 학자들이 현재의 언어체계의 수준에 도달하고자 학문으로 세월을 지새웠는가? 그들의 정신적 희생이 필연적인 항구성으로 우리에게 일깨워주는 건 현대를 사는, 이 시대를 사는 지식인들의 다다익선하면서도 간명한 학문의 다양체를 경험하고 사용케하는 연원이 된 것이다. 무릇 나는 조상들이 다리가 된 것을 보았고, 나 또한 그 다리가 되리라고 자각하고 있다.









과거에 나는 학문 따위는 모르는 <얼간이>었다. 주체의식도 없었거니와 삶의 지향성에 일관성을 투영하지 못하는 고독한 소년이었다. 학교라는 사회 안에서 나는 아이들이 인간관계를 유지하고자 행위하는 위선들을 차례차례 목도하였고, 나는 말 그대로 그런 행위들에 대해 화장실에서 구토하는 걸로 위안을 삼을 수 있었다. 물론 이것은 직장에서도, 그 외의 광범위하게 조망하자면 일반사회에서도 통용되는 하나의 법칙일 것이다. 도처에, 어디를 가나 위선과 자기기만이 팽배해있다. 가령 사람들은 사회라는 거울을 통하여 자신의 자아를 테제하고자 하는데, 이것은 특히 동양의 경우 두드러진 방식이다. 남한의 사람들은 몰개성적이다. 개성이라는 것은 곧 자아의 개별성·차이성을 기본토대로 하여 자기의 형이상(形而上)을 극단까지 뻗어나가는, 이를테면 본질을 사는 것을 말한다.



22세에 이르러서야 나는 학문이 고독함을 몰아내주는 역할을 한다는 걸 알았다. 나는 앎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도 알았다. 가령 무지(無知)와 전지(全知)는 같다고 하지만, 이 두 가지 중 하나를 반드시 선택해야 한다면 나는 전지를 선택하고 싶다. 내가 곧 학문이요, 학문이 곧 내가 되는 것. 나는 그러한 삶을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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