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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설법 제 8장
자유게시판 > 상세보기 | 2009-03-24 17:2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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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수   565

제목

[칼럼] 설법 제 8장

글쓴이

박두호 [가입일자 : 2003-12-10]
내용


논리체계에 의거하여 글을 쓰기. 그러나 탈동시적인 논리의 비합리성을 논외로 칠 수는 없고 일정한 체계의 지루한 나열성을 일차적으로 설명하기도 어렵다. 논리는 대체적으로 문자에 절대의존하여 언어와 항시 역학관계를 가지는데, 그 문명언어의 조어방식의 현란함의 장중웅려함이 더 깊을수록, 예의 언어는 철학적 우월성이 더욱 담보한다.







이미 현대철학은 언어와 불가결한 관계를 맺게 되었으며, 언어를 통과하여 그 탑을 쌓아갔다. 인도와 고대중국의 현인들이 중시했던 선禪의 불립문자사상은 철학계에서 이젠 발자취를 감추었다. 아니 오로지 그것은 요세대의 승려들과 알려지지 않은 범인들-통속컨데 표현의 필요성을 등한시하고 오직 비언어적 사유를 중요시하는 은사와도 같은 인간들-이 추구하는 통례적인 이상이 되었다. 반대로 언어학자들과 논리, 철학자들은 전례의 사상과는 이념적으로 대치된다. 그들은 끊임없이 언어의 유한성을 담지하며 인생의 유한성이 가져오는 개탄함에 쓰라린 가슴을 안고 하루도 쉬지않고 전분야에 걸쳐 두루 연구하는 삶을 산다. 비단 학자와 현자는 지식과 지혜의 양립에서 그 분화됨을 달리 함으로써, 생의 의의에 대한 연구의 방향성이 마치 양극을 가지고 있는 전자와도 같이 대립한다.







문자를 통한 철학을 개진한다는 것은 곧 논리체계의 기념비를 세운다는 뜻이며, 이 기념비는 마치 바벨탑처럼 계속 쌓고 쌓아도 끝이 보이지 않는다. 대다수의 언어학자들은 통상적으로 공자가 설파한 학문의 노고와 쓸모없는 사유의 배격 즉 소스입력행위를 중대시한다. 이들은 수년 끝에 교열한 자기의 저서를 속세에 출판하여 공명을 떨치고자 한다. 반대로 승려들과 술로 세월을 보내는 시인들, 우주의 이치에 대해 깨달은 범속한 사람들은 오직 경험적인 것인 즉슨 실증적인 것이 구현하는 조각들을 소중히 손으로 싸매어 하나의 획일화된 사유체계를 설립한다. 철학자와 승려의 테제는 분명 다름과 동시에 그들이 사용하는 도구도 분명히 다르며, 도구를 아끼는 생각정도도 다르다. 학자들은 언어에 너무 얽매인 나머지 언어가 철학과 삼라만상의 모든 것의 설정을 선행한다는 객관계적 이론을 제시한다. 반대로 승려들은 직관적인 깨달음을 중요시하며 현상계적 체제에 자신의 시각을 중심에 두고 사고한다. 여기까지 얘기하다 보니 필자도 이 장문에 하나의 명징성을 부여하기 위해 , 정신을 엄격하고 열정적으로 다루는 자들을 이분법적 패러다임으로 나눈 나의 동기를 설명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필자가 항상 시달리는 마음의 번뇌는 언어에 입각한 서구철학에의 추구와, 직관적인 깨달음과 무위를 지각하는 직지인심의 철학 즉 동구철학에의 추구이다. 이 두 방면이 내 마음 속에서 마치 두 신이 한 인명을 괴롭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를 괴롭힌다. 서구철학에 빠져들다가도 한순간에 정숙한 처녀처럼 다가오는 동구철학의 표상을 도저히 대체해 나갈 수 없다. 미상불 필자는 작가이므로 언어를 다루는 몹쓸 기인이다. 언급하는 것이 서방세계를 준거로 하여 산문과 그를 바탕으로 하는 작가의식을 개척해나갈 수밖에 없다. 이 양립에서 오는 괴로움은 작가라면 한번쯤 혹은 여러번 다분히 체현해 보았을 그런 딜레마다. 표현의 한계는 아무리 언어가 발달했즉슨 자기만의 감옥을 생성할 따름이며 이 감옥이야말로 우리 작가가 글을 쓰는 원동력 내지는 동기가 될 수도 있다. 이 감옥이 주시하는 표현과 사유의 어긋남이 필자가 이 글을 쓴 동기라고 말할 수 있다.





동기가 어찌되었든 간에 풀어야 할 원결은 반드시 있다. 그런데 현재 제도권 교육이 가르치는 역사와 학문이 전부 다 서구 중심 체제에서 놀아나고 있고, 아직까지 아메리카를 발견한 선지자를 콜럼버스라고 호도하고 있는 불합리한 현실에서 루쉰과 노자는 살았는가 죽었는가. 메이지유신으로부터 발로하는 동양의 서양화는 이미 어제오늘일이 아니다. 그것은 미래에 닥쳐올 육체적 정신적 자산이다. 미래의 계단은 서구의 근대형식 즉 굴뚝사회로부터 발촉되어 왔으며 우리가 그 자산과 맞부딪치고, 곧 그 과거의 자산이 오직 실재라고 가당치 않은 착각에 빠져 자신의 서가에 유럽과 미국, 러시아문학으로만 구성된 세계문학전집을 꽂아놓고 있다면 그것은 가치전도에 다름없을 뿐이다.





현재의 사변들을 대변하는 건 논리철학이다. 곧 논리체계적 글쓰기가 학계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왜 모든 다필가들은 논리에 근거하여 거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가. 그렇다고 소필가들 예컨데 시인들이 논리에서 벗어나 시적 정수를 필설하는 건 아니다. 그러나 산문은 본디 수사적 채용에 너그러우며 양의 많음과 적음이 중요시된다. 다변가를 단순히 기교행위자로 치부할 수 없듯이 소변가의 침묵을 다식임에도 무언하다고 망상할 수도 없다.



고古의 언어들은 잉여되고 금今의 새로운 창조적 언어들이 그들과 결부할 것이다. 논리체계는 더욱 정연하게 인간 삶을 지배할 것이며 언어의 중요성은 날이 갈수록 중대시한 성과를 이룩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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