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왕왕 적실한 절대정신을 적출/발굴하고자 자신의 사유체계의 핵심부의 성층에 끊
임없는 공박과 또다른 공박의 이어짐으로써 메꾸려고, 즉 입론이란 결과를 잉태하기 위한
태반의 다기한 의론의 자주함을 지키려고 노력한다. 이는 화용론의 밖으로 급격히 벗어나
비진중하게 즉흥적인 경험칙의 이어짐을 지반으로 변증법적으로 사유의 줄기찬 전화를 마
땅히 받아들이는 마음 씀에 그 까닭이 있다. 혼재하는 논의는 자기 안의 정서와 정서를 일
반적인 등가교환의 법칙에 밀어넣는다. 우리가 전언하고자 하는 생의 발화수반적 논의는
언제고 시공간, 간단히 말해 역사의 필멸성을 예단할 것이 분명하다.
1단계에서 예술, 2단계에서 종교, 최종적인 3단계에서 철학을 가리키는 행실은 현시대에
는 양가적인 역설성을 띈다. 종교는 종교 나름대로 확고한 철학체계를 소유하고 있는 바
진정한 절대자는 아무리 뛰어 인간이라도 순수이성 가외의 초월적인 존재의 우월성을 파악
조차 할 능력도 전무하다. 종교가 가리키는 믿음 그리고 그 대상은 철학의 논의를 넘어 우
리가 경외감을 가지고 대해야 마땅하다. 헤겔은 칸트보다 광범위한 이론을 설립했지만 아
쉽게도 독단적인 몇몇 국소적인 부분들은 자기 스승보다 떨어진다. 언어와 앎이 따로 논다
면 이는 이해하기 어려운 분립작용이다. 최종적인 국면으로써 직관은 다세多世가 흘러도
비필멸하는 곧 불멸하는 절대적인 진리이다. 갓난아기에게 진리를 배우는 것만큼 현명한
이치가 세상에 더 있을까? 언어를 버려라. 눈을 뜬 채 바라보는 실사구시야말로 진실된 그
것이다. 내 설법을 읽어라. 그리고 나를 떠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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