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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소설] 시내 완성본
자유게시판 > 상세보기 | 2009-03-18 15:4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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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수   959

제목

[자전소설] 시내 완성본

글쓴이

박두호 [가입일자 : 2003-12-10]
내용


추신 : 살을 태반 붙였습니다. 일단 완성 되었습니다. 이제 다듬어야 겠죠.







프롤로그





낡아빠진 목재건물을 향해 햇살은 비친다. 햇살의 여분이 자그마한 창가로 스며들고, 그 베일은 건물의 외관을 사뭇 구수하게 비춘다. 그러나 미상불 스며든 햇살은 공허하게 갈라져 모래와 같이 실내에 흩뿌려진다. 그녀는 커피를 마시며 고적한 바깥을 바라보지만, 햇살은 예외없이 그녀의 영혼을 모종의 돌이킬 수 없어 창조된 상실감과 관조적인 형태의 우수가 섞인 노란색의 부드러운 빛줄기로 적신다. 커피잔의 끝이 흰색의 강한 영광[瑛光]으로 빛나고 있다.



창가의 창문은 오랫동안 청소를 않 했는지 모래의 색깔과 같은 점 자국으로 덕지덕지 붙어있다. 오후 4시의 진한 자조감이 깃들어 있는 햇살이 마치 그녀의 심정을 대변하듯 점차 희미해져 가고 있다. 창밖은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는 아이들로 북적거리고 있다. 일상적이면서 고요한 풍경, 그 외엔 아무것도 아닌......



하늘은 언제나 그렇듯 푸르고 소박하다. 그녀는 천천히 눈을 감고 점점이 떠오르는 회구의 한자락에 감정을 맡긴 채 스쳐지나가는 소중한 장면들에 대해 슬픔으로서 음미하고 있다. 과거 학교에서 만난 인연들, 그리고 추억.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 있을까. 현실은 이미 그 기점을 지나 정신없이 흘럿건만 과거라는 이름의 쇠사슬은 그녀를 놓아주지 않는다. 그녀는 밖을 내다보며 창밖 풍경과 뒤섞인 영원함 그리고 지나가버린 아름다움을 생각하며 멈추어진 그 시간들을 쓸쓸히 바라볼 뿐이다. 아니, 그녀는 그 시간 아래 우뚝 서 있다. 커피잔은 이제 비어 있다. 밖에서 불어대는 청신한 서풍이 그녀가 돌이키고 싶은 시간들을 아스라히 깍아내리며.















- 1장





고통 속에서 어떤 희락을 찾는 일은 분명 어려운 일이다. 희락을 좀 더 엄밀히 분류하자



면 그것은 모종의 우수요, 섬세한 향기이다. 그는 분명 사랑을 원하는 것일까? 지고로 달



콤하고 영원한 사랑의 베일. 그의 정신은 그것을 원하고 있다. 자신을 둘러싼 모든 배경이



분연히 순식간에 봄의 지순함과 아득함으로 온통 적셔지는 느낌이다.







과거는 움직이지 않아 슬픈 것이다. 지금껏 마치 하나의 수채화처럼 멈춰있는, 마치 모



든 생동감으로 충만한 동시성의 한순간의 집약적 고찰로써 멈춰있는 또다른 세계처럼 과거



는 여태껏 움직인 적이 없었다.



과거는 그속에서 헤매면 헤맬수록 수렁에 빠지는 명멸하는 구렁텅이이며, 소리치면 소리



칠수록 꺼져가는 불꽃과 같이 더 이상 찾아오지 않는 아름다움의 실질적 이마주로 그에게



다가왔다.



그에게게 삶은 이미 삶이 아니듯, 과거를 따라, 그 영원한 극점을 따라 움직였던 정신의



여행은 일련의 객기였다. 그는 로맨티스트가 아니라 단지 위선자였고, 가능성이 있다고 생



각한 한 소년에서 이미 움직일 수 없는 모든 걸 소진한 청년으로 변모해 있었다.



자기 기만, 말하자면 선연한 패배스런 로망이 청춘의 끝자락을 타고 점멸해가고 있었는



데, 그는 가만히 눈을 감고 그 마지막을 지켜볼 뿐이었다. 아무 것도 변화 시킬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의 방향의식은 언제나 정신적 내몰림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의 진보적 성향과 그



에 대한 반향으로서의 보수적인 기질, 하나의 특질은 모두 그가 양립적으로 내포한 것이었



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을 관통한 그의 좌표의 자기장적 성향은 '사랑과 미를 향한 열정'



이었다. 그는 예컨데 시인이었다. 그의 섬세함은 요컨데 모든 진정성에의 미학을 추구하는



성격에서 뻗어나오는 일련의 힘이었다. 그는 자기에게서 벗어나고 싶어했다. 그는 모두에



게서 벗어나고자 '모두'가 되고 싶어했다. 그는 주인공이기보다는 배경으로 남고 싶어했으



며, 그 배경은 아주 현란하고 수려한 비경이어야 했다. 그 성립이 그를 그답게 묘사하는



것이었다. 그는 잊지 못할 아름다움만을 사모하는 걸 좌시하지 못하는 한명의 기인이요,



현자였다. 여기서의 현자는 말하자면 미친 사람을 뜻한다. 현자는 따뜻하고 깊이를 측정할



수 없는 아득한 정서를 소유하고 있는 교양가를 뜻한다. 예의 교양은 모든 분야를 아우른



다. 아주 강렬하게 메타적이고 혁혁한, 한줄기 맥락의 '전체'라고 부름 직하다. 그는 그런



교양가였다. 미를 적시하는 적요함과 요원함이 뒤섞인 심약한 투사였다.







그런 그가 사망하지 않고 생존해 있다면, 아니 실존해 있다면 당신은 그걸 인정하겠는가



? 인정이란 자고로 힘겨운 결정의 한 요소이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인정할 줄 아는 사람



이라면 당신에게 다가오는 모든 놀라움은 결국 혁신적인 쾌락으로 변모할 것이다. 환원될



것이다. 그것이 내가 그를 오랫동안 관찰해 오면서 도출한 결론은 당신조차 수긍케 하는



일원론적인 마치 직사하는 빛처럼 그런 종류의 환상, 분수령이다. 내가 하는 이야기를 들



으면서 당신은 모종의 관철에 이를 것이다. 아주 천천히, 그러나 반대로 빠르게. 그, 고독



한 시인인 그와 관련된 이야기가 당신에게 감동의 서막을 제시할 것임에 틀림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예의 그것은 아주 구조적인 부분에서 파란만장한 비애의 서사이다. 나는 이제부



터 그것에 대해 언급하겠다. 그것은 그의 이야기다...



내가 이 일기의 형식을 빌어 k를 표현하고자 필설하는 것은 내 존재 자체를 자각하기 위함이며, 세상 속에서 내가 사라질 것만 같은 충동에서 벗어나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다.

나는 삶이 두렵다. 삶은 언제나, 내 삶은 언제나 개같았다. 씁쓸한 학교생활도 그렇고 지금은 정신병자가 되어 잠 못 이루는 날이 손에 꼽을 수 없을 정도로 많아졌다.





나는 정신질환자이다. 그래서 병원에 다니지만 그렇다할 해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과



연 내 청춘을 내 우울증에 다 바치면서까지 이 생을 살아가야 할까. 루이제 린저의 '삶의



한가운데'를 읽고 난 느꼈다. 사랑에 목말라 있는 건 바로 나 자신이라고. 나는 본래 자각



하기를 좋아하는 인간의 유에 속한지라 내가 읽은 소설과 나를 비교해보는 버릇이 있다.



아니, 정확히 말해선 문학을 거울로 벗삼아서 말이다. 지금 내 서재엔 책들로 꽉 들어차있다.



대부분이 양서들이고 다시 말해 인문학서적들이다. 서재를 더 구축할까 생각하다



금전상의 문제로 그냥 추가적으로 책이 생기면 안 보이는 데 쳐박아 둘까 한다.





불만. 요즘 들어 나는 불만이 크다. 제때 제때 잠을 잘 수 없다는 것이 첫째요, 내 우울



증 치료가 계속 난행을 겪는다고 생각되는 게 둘째요, 가끔씩 화장실에 가서 구토하는 게



셋째다. 솔직히 말해서 나라는 인간은 더러운 인간이다. 표면에선 언제나 활기차고 도덕적



으로 보이려 하지만 그것은 위선배들이나 하는 짓거리다. 그것을 내가 하고 있다. 외피와



내피의 분기점에서 모순이라는 꽃이 피어나면, 그것을 어떻게든 한아름 따서 흩뿌려야 하



는 법이다. 욕구 불만. 삶에 대한 욕망에 대한 열정은 누구나 있는 법이다. 누구나 욕망에



굶주려 있는 사자다. 다만 이 사회라는 체제가 인간의 욕망 즉 리비도를 가로막아 우리는



마치 가면극 같이 사회생활을 영위해나가야 하는 숙명의 인간이다. 뭐라고 해야할까. 불만



에서 벗어나려는 탈출구가 없으면 그 사람은 피폐해지고 삶에 대해 의문을 품는다. 나는



개인적으로 오지랖이 좁은 편이라 많은 사람들의 삶을 봐오진 못했다. 필연적으로 이기주



의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아니, 난 아웃사이더였으니까 그에 걸맞는 생을 누린 것이다.





그러나 매너리즘에 빠져 본 적이 있는가? 매너리즘은 참으로 무서운 인생의 복병 중 하



나이다. 매너리즘이라는 전무후무한 현상계의 감옥에 걸려들면 그 누구도 빠져나오기가 벅



차다. 정말로 그렇다. 더구나 이게 일종의 덫이라는 생각이 든다면 그건 그야말로 '덫'이



다. 한번 덫에 걸리면 결코 벗어날 수 없다. 악순환의 싸이클 만큼 무서운 게 있을까?





나는 삶이 두렵다. 삶이란 게 나에게 요구하는 건 많은데 나는 이 험난하기만 한 길이



너무나 벅차다. 뛰어서라도 이 길에서 벗아나고 싶지만 뛸 수가 없다. 그런 처지가 않된다



. 그렇다. 난 행복한 사람이 되고 싶다. 본질 같은 건 너무 난해한 문제다. 본질을 알아가



는 일련의 기약이 내 안에 영속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힌다.



뭐가 뭔지 모르겠다. 나아가야 하는데 나아갈 수 없는 사람의 처지를 아는가 그대는? 그 괴로움과 끝없는 삶에 대한 역설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역설적인 상황은 아무데서나 들이닥친다. 그리고 그 끝자락엔 잔악한 비애만이 고이 아로새겨져 있을 따름이다. 삶의 두려움은 이런 것이다. 그렇다. 삶의 두려움은 '비애'이다. 비애를 아는 자만이 인생의 의미를 알 수 있다. 그래서 인생이란 독이다. 인생이란 독이다, 독. 또한 그것은 슬픔이요, 우울이다. 물론 진정적으로 사는 사람들은 내 말이 전부 궤변으로 들릴 수 있겠다. 나도 그것을 인정하지 아니하는 건 아니다. 지금 나는 나열가로 변용되었다. 나는 비애의 참 뜻을 모르고 두려움의 참 뜻을 모른다. 나는 단지 어릿광대다. 죽지 못해 사는 한 슬픈 어릿광대.







현시적인 슬픔을 이해하는 데는 많은 감상이 들어간다. 그러나 아름다움을 직접 체현해



보고자 하는 시도에는 마르지 않는 우물의 물처럼 딱 그정도의 감상이 필요하다. 전적으로



어떤 일을 책임지는 역할, 그 역할이 자기를 근본으로 창원한 슬픔에서 발발되었다면 이는



불가피한 일종의 숙명인 것이다.





표현하고자 하는 욕구. 그것은 무엇일까. 왜 저자는 글이란 양식으로써 상대방에게 자신의 합리화된 문장들을 납득시키고 이해시키고 싶은 걸까? 표현이란 죽음의 공포에 대한 하나의 탈출구인가? 아니면 유일한 탈출구인가? 나는 탈출하고 싶다. 누구와는 결코 바꾸기 싫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탈피하고 싶은 내 자아상. 내 흉악한 자아상. 전부, 온통 찟어버리고 싶다. 그래서 모든 걸 무로 환원하고 싶다. 나는 자살하고 싶진 않다. 그러나 그 유혹은 그 무엇보다 강렬하다. 이러한 번뇌에서 탈출하기 위해 나는 k에 대한 이야기를 말하겠다. k는 과연 누구이며 어떤 삶을 좌선했는가? k가 게츠비와 같은 존재였는가 하는 낡은 사실의 반추는 여기서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 2장









시내에서 그는 길을 잃었다. 타성에 의한 것이었다. 타성은 어떤 강한 빛보다도 훨씬 강



렬하게 그를 사로잡았고, 그는 혼란스러움과 더불어 형용할 수 없는 이상야릇한 파생화에



사로잡혔다. 타성에 덧씌어진 비가역성은 비논리적인 것이었으나,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



니었다.







역사적인 한 장면은 k에게 차가운 감회를 가져다주었다. 그러나 만족할 줄 모르는 젊은



이들은 꿈꾸는 듯 발걸음을 그 차양 속에 내딛는다. 햇빛의 고요한 비침이 배경 전체를 투



명한 환희로 가득 메우고, 참을 수 없는 정신의 금색 빛깔은 고매한 매무세로서 성스러운



세계의 요연한 정취를 만족시킨다.



환기하고 싶은 깊은 낮, 이 낮은 건조하게 끈적하면서도 무한히 부드럽다. 사실 이 나직한



낮에 사람들은 모두가 눈을 감고 있다. 슬픔이 겨울 어느 낮의 쌀쌀한 공기로서 내 양심의



코끝을 희미하게 만든다.





때묻지 않은 겸양에 대한 고취는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미덕을 찾아 떠나는 아득한 여



행처럼 우리의 발걸음은 사뭇 조심스러움에도 뜨겁게, 뜨겁게 달아오른다. 그리하여 역사



의 순간적 광채는 새로운 시대의 전체성에 파뭍혀 조그마한 조약한 빛조차 보지 못하고 스



러지는 것이다.









시내의 불빛은 어지럽게 이지러져있었다. 의정부 시내는 비교적 협소했다. 최소한 다른



시내와 비교하자면, 그 규모와 수준 면에서 현격히 떨어지는 편이었다. 그러나 도심의 불



빛은 그 누구도 사로잡히지 않고서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수준이었다. 그래서 거기는 도



시라고 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는 것이었다. 도시의 밀림성이란 그에게 무엇을 숙고하게



하고 종국에 무엇을 상정하게 하는가.







차들이 막힌 도로에 답답하게 서 있었다. 모두 구진 차들이었다. 한마디로 볼품 없는 차



들, 어쩔 수 없이 타고 다니는 차들이었다. 이 공개적인 거리는 서민들의 사계절을 현묘하



게 표현해내고 있었다. 차 뒤에서 나오는 매연은 다만 이시대의 구름과 꼭같이 뿜어져 나



오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도 사람들은 인도에서 빠르게 왔다갔다하고 있었다.







이 사람들은 무엇을 위해 서로를 잡아뜯으면서 살고 있는가? 아니라면 서로를 사랑하는



가? 서로의 육체를? 아니다, 아니다, 그들은 서로를 죽이려 하거나 서로를 확보하려고 든



다. 그들은 권력의 사다리 밑에서 옮겨다니고 옮겨다니며 자신의 위치를 세심히 다듬으려



든다. 그들은 조용한 게임을 위해 법이라는 체계를 만들었다. 또한 보이지 않는 손인 자본



주의는 사실 굉장히 시示적인 이 게임의 핵심적인 룰이다. 자본주의는 항시 폭력단체를 수



반하므로 그 비인간성과 역사의 도도한 흐름도 고려해야 한다. 그렇다면 게임의 참가자들



의 마음과 정서는 그러니까 이들의 1인칭적인 영도零度는 사가들이 다루고자 하는 가외물인가?



그러나 분명 예술은, 즉 인류의 정신은 정서의 총체적인 정방체이거니와 군상 그자체다.



그렇다면 이 시내를 활보하는 사람들은 어떤 정신적 파장을 그러잡기위해 생존하는가? 사



실 원인은 없을 테다. 원인이란 필요하지 않는 편집증적인 인류적 관념이다. 예는 파토스



의 평행선을 따른다. 단지! 단지 결과가 전부다. 결과는 사실이다. 그런 결과론적인 의미



에서 말하자면 인간이란 비정신적인 성적인 존재를 가르킨달까.







그러나 앞서 실재에 대한 얘기에서 사족으로 첨가한 결과론에 대한 얘기를 폐하고 다시



예를 다뤄보자. 방금 시내에서 분류 가능한 행인들의 실체, 실재에의 권력다툼을 다뤘다.



말하자면 의지의 문제의 정반대의 요를 다룬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더러운 현실



에서 벗어난 한 인간이 있었으니 그의 이름은 K였다. K, 한 보잘것 없는 인간. 그 보잘것



없는 인간을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눈썹은 예술가답게 호방히 퍼져있고 코는 둥근게 이



른바 자산가 코다! 입은 약간 두터우며 눈은 큰 편이나 짝눈이다. 짝눈은 천재라 했던가.



왼쪽이 조금 큰 편이다. 아마 우뇌형 인간인 듯 싶다. 그의 이면에서 모종의 부재를 느낄



수 있다. 압생스.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필자 자신도 모른다. 그는 약간 촌스럽고 더러



운 옷, 예를 들자면 무난한 긴 바지와 줄무늬 셔츠를 입고 머리를 감지 않은 채 거리에 우



두커니 서 있다. 거리에 서 있는 이유는 거리가 거기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할 일이 없



어서일 것이다. 이것이 그에 대한 묘사의 전부다.







거리는 답답하게 열려 있었다.





K는 던킨 도넛에 들어가려고 했다. 사방은 온통 시끄러웠다. 짐짓 그는 고개를 들고 주



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한가지 생각이 들었다. 세상의 구조는 생각보다 단순하다는 것



, 시간이 흐르고 공간이 바뀌어도 인간의 진보는 항상 순환적인 정비례 현상을 보이고 있



구나 하는 직관. 그러다가 시간의 원에서 그의 의식은 깨어났다. 지구의 자기장은 역동적



인 성향으로써 규칙적인 흐름의 동향을 그리고 있었다. 그 동태성에서 비롯된 환멸감은 곧



도시의 역겨움을 말하는 것으로 K 역시 이것에 순응하는 한마리 작은 통통한 벌레였다. 그



렇다. 그는 벌레였다. 그렇지만 그는 어린 시절에 공자, 순자, 장자, 맹자, 열자, 노자에



대해 완전히 이해하고 동양의 지고로 비련한 이국적 시들에 대해 개벽할 만한 파악을 하였



고 그의 나이 열일곱에 칸트가 실정한 무아지경-순수이성 밖의 미지의 존재에 대한 고찰 과 일치했다는 추상에 관한 철학적 충만감에 가득 찼다는 것은 경이로운 일이었다. 그리고는 그는 동양철학과 서양철학이 결합한 쇼펜하우어와 불생불멸의 사상가 프로이트, 이름 만으로도 중핵의 위치에 있는 사르트르와 20살에 드디어 목도하여 대적하였고, 왔고 보았고 이겼다. 21살에는 펜을 꺽고 정신분열 증세를 일으켜 랭보처럼 거리를 방랑하다가 교도소 문턱을 밟았고, 그리고 그는 지금의 나이 22살에 물리학자이자 철학자인 마흐와 아인슈타인이라는 두 거성에 대해, 이른바 새로운 분야에 대한 접근을 시도하고자 하려했다.







그의 사고방식의 가장 내밀한 부분의 최종점은, 즉 사생활의 모든 부분은 어쨋거나 프로



이트였다. 그는 프로이트의 정신적 그늘에서 벗어나질 못하였다. 프로이트는 항상 그에게



옳다는 것을 납득시켰고, 거기에서 꽃 핀 일종의 길을 제시하였다. 그에 비해 사르트르는



그에게 그다지 와닿지 않았는데, 그의 철학의 준거형식들의 색채가 너무 인위적이었기 때



문이었다. 실존주의는 인문학적 기의로 볼 때 전체적인 시스템이라기 보단 겉멋과 외면적



기표에 지나치게 의존한 시대물적인 순간적 착상에 지나지 않았다. 그것은 억지스런 자기



본위를 논거점으로서 천착한 나머지 무수한 과오와 역점의 가능성의 실타래를 끌어안고 있



었다. 그가 생각하기에 사르트르는 철학자로선 실패자였다. 그는 칸트같이 학구적으로 위



대한 천재가 아니었다. 비록 대중의 유명세를 타서 그의 문명文名, 하나의 문화권력은 강



력히 구축했지만 말이다.







다만 독자들에게 말하건데, 20세기의 지성의 거대한 축을 이루는 맥락, 즉 두 양대산맥



은 인문계에서의 프로이트와 이공계에서의 아인슈타인, 이 두 거장으로 양분된다고 그는



명명했다. 그리고 어느새 청년으로 자란 그의 욕심은 아인슈타인의 지성의 특질 내지 색깔



까지 궁금해 하고 있었다.







던킨 도넛은 물질주의에 양도된 경도된 많은 사람들, 이르자면 허영심이 많고 자기본위



적인 세련됨을 하나의 지적 스타일로 받아들인 그 모든 사람들이 밀집해 있었다. 그들은



맛에 굶주리기보다는 미국의 생활패턴의 양상의 한 임상적 사례의 편향성에 굶주린 자들이



었다. 즉 그들은 스타일을 원했다. 그들은 섹슈얼리즘을 마음 한끝에서부터 갈구했고 자신



이 부유해보이길 과시하고 싶어했다.







어떤 이들은 탐욕스런 이빨로 던킨 도넛을 씹고, 어떤 이들은 더 탐욕스런 손으로 던킨



도넛을 고르고 있을 때 그가 바bar로 가서 자신이 고른 도넛들을 내밀었다. 이것도 몇명의



줄을 기다린 결과였다. 이상하게도 던킨 도넛은 불황에도 끄덕없다. 하지만 아무렴 그에게



그런 사실은 상관없었다. 그는 도넛을 사가면 그것으로 그의 따분한 무의식에 대한 합목적



성을 충족시킬 수 있었다.







도넛은 계산되었다. 여종업원은 손에 익은 듯 k와 짤막한 대화를 마친 후 k는 도넛을 들



고 나가려 했다. 그러던 찰나 k는 문득 느꼈다. 여종업원의 손은 개인을 향한 게 아니라



공공을 향해 있구나, 하고. 직업에 있어서 감정의 개입은 종업원이나 의사나 카운셀러나



애널리스트나 모두 약간의 필요분이나 자양분이, 융통성의 기지를 발휘해서 자신의 직업적



기저를 완성코자 하는 미약의 노력이 필요한 것같다고 그는 생각했다. 전문직이 기틀을 잡



아가는 시대니 만큼 미분의 작업능력에 부여된 감수성은 충분히 필요조건이지 아니할까.









던킨 도넛의 현란한 조명은 역시나 도시의 모든 불빛 중에서도 백미였다. 그가 던킨 도



넛을 빠져나가고 충분한 시간이 흐른 후에도 그의 눈에는 하얀 조명이 어른거렸다. 알다시



피 던킨 도넛은 전세계 곳곳에 수만개의 점포를 거느린 거대기업이다. 그러나 던킨 도넛은



더 큰 다국적 기업의 작은 일원, 부분일 뿐이다. 다극화된 오늘날의 체제에서 초자본주의



는 신자유주의라는 아름다운 거대 이념으로 포장되었다. 압도하는 서구문화는 던킨 도넛과



같은 특이한 푸드마켓 구조를 형성하였다. k는 던킨 도넛이 생성된 이 교묘한 메커니즘이



너무나도 마음에 들었다. 이것은 정말이지, 아름다운 사회의 모습이었다. 돈과 스피드는



사나이에게 얼마나 큰 포부와 창발적인 원동력을 제공하는가! 돈이 없는 사회 만큼 재미



없는 사회가 또 어디 있겠는가! 돈은 곧 의지다. 그 의지가 함의하고 있는 놀라울 만한 역



동성이며 신축성은 모두의 내적 저변이 무신론의 세태로 편승됨을 직시하는 종교의 무상성



을 표징한다.







거리는 아까보다 한산했다. 두 사내가 최소 배기량이 600cc가 넘는 오토바이를 타고 질



주하고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이 추운 겨울에 k는 그들이 그야말로 미친놈처럼 보였다.



두 다리가 절단나고 성불능에 두개골이 박살나서 뇌수가 철철 흘러야 정신을 차리는 족속



들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 역시 k에겐 그다지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어짜피 타자들이



아닌가? 타자의 운명 따윈 애당초 k의 재량이 아니었다. k는 자신의 운명만도 상대하기에



벅찼다.





이내 눈이 내렸다.

















- 3장





백설이 세상 모든 더러운 것들을 유린하듯 초절히 나열되는 시내의 정경은 가히 볼만했



다. 아름다웠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모두들 눈을 보지 못하고 지나가는 듯했으나 기어코



눈을 보려는 사람들도 있었다. 겨울의 형언할 수 없는 상쾌함은 모든 이들에게 전복된 눈



부신 무구한 사념이었다. 눈은 빠른 속도로 시내를 뒤덮었고, 시내는 나직이 환상에 사로



잡혔다.





땅은 어느 새 눈으로 뒤덮였는데, 잿빛 하늘과 대조되어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k는 휭



단보도를 건너가면서 어젯 밤에 암중모색했던 아인슈타인의 이론에 대한 비판적 고찰을 다



시 한 번 상기한다. 인파들이 그를 잣대로 하여 모세가 지팡이를 흔들듯 갈라지고 있었다.

k는 어젯 밤 특수상대성이론의 맹점을 발견한 것일까? 주마등처럼 금빛 추상이 쏜살같이



지나간다.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논문 [특수상대성이론]에서 빛의 속도가 우주에서 일어나는 모든



운동에 있어 가능한 최고의 속도라고, 즉 모든 사물을 측정하는 데 있어 일종의 절대적인



기준이 되는 불변의 속도라고 선언했다. 빛은 모든 시공의 객체의 경험적 주관성의 차이



즉 상대성을 배제시키는 절대적인 관찰자다. k는 그러나 여기서, 그런 빛의 속도가 1초에



약 30만km임을 가정할 때 그 유명한 빛에서 시간의 개념이 소거되는 것, 말하자면 빛이 시



간을 따라잡는다면 아인슈타인의 말대로 미래를 볼 수 있는 게 아니라 과거, 현재, 미래가



동시적으로 연결되어 총화로서 눈에 상영된다. 빛은 영속성의 개념에, 그 범주에 등극한다



. 그렇다면 보다 광범위한 층위에서 매질 에테르가 실제한다는 것을 명명백백한 것으로 받



아들인다면, 이것이 인간의 몸까지 투과한다는 현상을 당연시 한다면, 오서독스하게 생각



해 이 공간을 채우는 기류 속에서 빛의 속도가 항시 상대적이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면



, 빛이라는 개념의 무無화는 인류역사의 정태적인 축약체까지 꿰뚫는다는 필요충분조건성



이 성립된다. 따라서 앞의 외연이 일으키는 작용을 일축하여 말하건데, 그것은 나아가 기



억이 기억이 아닌 것이 되면서 개인의 자아가 와해되어 주체는 다다한 기능으로 변질된다



는 것에 있다. 다시 말해 빛이 현상을 상정한다는, 예와는 다른 동연개념이 진리라는 게



여기서의 귀결이라손 치고, 빛이 시간이라는 유한성을 잃어버린다면 하나의 현상 자체가



성립되지 않게 된다. 마찬가지로 현상 자체도 와해되는 것이다. 주관성이라는 개념이 파탄



남에 따라 객관성이라는 개념도 파탄에 이른다. 따라서 동양사상의 무의 정신이 추구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어둠이며, 온갖 삼라만상의 개개의 파멸은 유한성에 대한 종결을 반증한



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우주의 존재는 영원히 유有이다. 왜냐하면 빛이 시간을 따라갈



수 없는 게 '사실'이기 때문이다.



거기에서 k는 약간 부분적인 시야에 입각해 시공의 굴절에 대한 짧은 사상을 주창했다.



'시공연속체로 이루어진 우리의 세계는 그대로 이미지와 본질, 그림자와 본체, 텍스트와 바탕의 관계로 엮인다. 빛은 여기서 그저 이들을 전달해주는 매개체 역할을 할 뿐이다. 빛과 마찬가지로 시공도 굴절현상을 겪는다. 시공 역시 현상적이지만 물리적인 무엇이다.



부연하건데 시간은 그대로 공간성을 띄고, 공간은 그대로 시간성을 가지는데 이 자체는 고정됨이 없이 변화하는 '흐름'이다. 시공은 '나'라는 경계에 의해 안과 밖으로 구분된다. 통상 나의 껍질 또는 의식의 껍질을 기준으로 무릇 '나'라는 자아의식이 하나의 경계이기도 하여 '나'와 타자로 정확히 유별한다. 나라는 자아의식 또한 축적된 시간의 샘인데, 이는 기억의 쌓임 현상으로 굳어진 실체 없는 공간이라 예측된다. 나라는 자아가, 축적된 시간과 공간의 총괄적인 직사를 통해 우주와 일체가 될 수 있는가. 우리가 무엇을 보거나, 듣고 느끼거나, 알때 이는 '나'라는 필터를 통한 것으로서 주관성이라는 성질을 재정한다.

최소적으로 주관은 소우주이다.



고로 모든 객관적인 것은 실은 주관의 필터를 통해 굴절된 시각이라는 것이다. 모든 객관은 실은 주관적인 것, 편파적인 부분들의 공통주제이며 모든 외부는 내부에 의해 굴절된 시야일지도 모른다.



곧 외부는 굴절된 내면이고, 내면은 굴절 되기 전의 순수 내면인 것이다. 이는 순수 주체에 의해 모든 현상계, 즉 모든 시간과 공간이 굴절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렇게 순수 주체에 의한 시각에서는 '나'라는 시간과 공간도 굴절된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의 주관성은 빛 즉 객관성의 합집합에 포함된다.



보편적으로 우리가 무언가를 인지할 때, 그 인지의 도구가 바로 자아이다. 자아라는 축소화된 필터는 시간을 내포함과 함께 내부적 공간을 따로 가지고 있다.



이 나라는 시간이 다른 외부 대상(시간)을 지각할 때 그것은 시간과 시간 사이의 교배이다. 또는 공간이 공간과 교배하는 것이다. 하나의 정신적인 교배.



시공간이 시공간을 지각하는 것 역시 교미이며 '나'라는 시간의 총합인 하나의 역사가 외부의 대상물(다른 역사)을/를 감지하는 것이다. 이때 바로 시공의 굴절과 빛의 굴절이 물리의 원리란 마지노선의 아래에서 일어난다. 고로 엄격히 말해 시간적이고 공간적인 현상은 굴절의 원리에 종속된다고 당당히 말함 직하다.



예를 들어, 시간이 시간을 지각할 때 그 현상 자체를 인식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면 이것은 하나의 굴절이다.



이런 모종의 현상들은 모든 시간을 배경으로 채색하고 배경은 시간도 없는 무한한 공간 으로 남아 여기에서 유가 창조되었으며 모든 시간과 역사가 비롯되었다.





여기에는 말을 붙이면 않되지만 이를 순수시간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순수 시간은 굴절 되기 전의 그대 자신인데, 이는 무시간적 무공간적 특질로 귀결된다. 삶은 시간인데, 껍질을 깨고 보면 무시간적인 것이다. 모름지기 '나'라는 자아의 역사는 영원의 원을 돈다. 니체의 영겁회귀 사상은 얼핏 이와 일치하는 듯하다. 알파가 오메가가 되고 오메가가 알파가 되는 순일한 흐름...



비단 우리가 필터를 깨고 본 실상의 우리 자신으로 돌아올 때, 본래적 자아와 본질을 어찌 바로 나의 바탕이자 근원임과 동시에 나 자신이라 부를 수 있으랴.'





그럼에도 끝없는 철학의 정립과 개진은 언제나 끝이 없는 법이었으니 k는 이런 부분적인 사상에 대해 결론조차 내리지 못하고 까페를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방방곡곡에서 차들이 깨질듯이 신호음을 울린다.









바야흐로 k는 커피집에 당도했다. 눈은 이제 드문드문 내려 가느다랗게 점멸해가고 있었



다. 땅거미가 지면서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했다. k는 자신이 즐겨 이용하는 개인 커피집에



발을 내려놓았다.







커피집의 조명은 던킨 도넛과 맞먹었다. k는 언제나 이러한 조명의 감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 날이 없었던 것 같았다. k는 빛을 사랑했다. 빛이야말로 행복이란 현상을 위한, 천국



의 색채에 입각한 가장 인간생활에 현학적인 매개체 아닌가? 빛이 아리땁게 그만의 세상을



메우고 있었다. 그 빛깔이 그의 지갑을 더욱 더 근질거리게 하는 것 같기도 했다. 순간 그



는 요의를 느꼈다.







"아이스 까페라떼 샷 하나 추가요. 동어반복하고 싶진 않습니다만, 시럽은 알아서 메이



플로..."







이 집은 자바커피를 원두로 써서 아주 마일드한 맛이 특징이었다. 사실 특별히 뛰어난



맛은 아니었지만 인간의 버릇이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그의 발걸음은 항시 여기 머무는



것이었다.







주인이 정성껏 만든 커피를 직접 자기 손으로 테이블에 대령하고서, 그는 도도히 자기



자리로 물러간다. k는 바깥의 밤의 풍경의 한조각 낭만을 느낀다. 커피에서 새어나오는 방



향은 아스라히 그의 코끝을 감싸안는다. 섬세한 향기가 베어든다.









그에게 커피는 자신의 무기와도 같은 것이었다. 무릇 기사들이 검을 자신의 유일한 무기



로 여기듯 그는 커피를 자신의 하나뿐인 지성의 도구로 여겼다. 커피는 그의 생명이었다.



듀피오[더블]로 나온 커피의 향취를 천천히 탐미하자면 그는 이윽고 황홀경에 빠져들었다.



담배를 안 피고 술을 안 먹는 자에게 커피는 하나의 일용할 양식이요, 꺼지지 않는 촛불의



불줄기였다. 더군다나 커피는 지식이라는 세피로트, 일종의 영지주의적 계시를 그에게 내



려주었다. 그에게 커피는 축복이었다.







시간이 아릿한 풍금소리처럼 흘렀고, 커피는 어느덧 바닥을 드러내었다. 그는 천천히 눈



을 감았다. 커피집에는 아무 사람도 없어 고요한 배경음악만 연주되었다. 언뜻 들으니 젊



은 치기가 깃들어 있는 쇼팽의 에튀드인 것 같았다. 정온의 단정한 음이 실내를 따뜻하게



녹아내렸다. 커피의 불멸의 맛과 상반된 이 연주곡이 커피와 일말의 상관성이 있다면 그건



, 그것들의 실루엣에 가만히 깃든 단정함이었다. 이 교양적 하모니의 광휘란 얼마나 본질



스러운 것인가. k는 가만히 자신의 내적인 저 밑의 본능의 공통분모를 응시했다. 수컷의



야수적 본능이 교양이란 여성성에 의해 말도 못할 정도로 잘 잠재워지는지. 그것은 마치



인위적인 어머니였다.







"가보겠습니다, 아저씨." 무뚝뚝하지만 체면치레가 잦은 커피집 아저씨는 그저 고개만



끄덕일 뿐이다. 그 풍모는 마치 오늘도 당신의 본질을 살아가기 위해 저희 집을 이용해주



시군요, 하는 매세지를 흘리고 있는 듯했다.







커피집을 나가면서 그는 지그시 바깥의 내음을 응시했다. 시나브로 차가운 겨울의 유년



스런 감수성이 은은히 순식간에 재편되는 느낌이었다. 코끝에 차가운 사람들의 희망에 대



한 동경심이 스쳐지나갔다. 그들의 희망에 대한 동경심은 k에게 자그마한 경탄을 자아내지



만, 그들에게 어두운 연민의 감정도 선뜻 불러일으킨다. 그들은 속세의 더러운 원에서 벗



어나질 못하는구나, 하는 그런 자조. 그들과 k는 영적으로 분리된, 엄숙히 촘스키의 권력



론이 시사하는 패러다임의 마성적 힘 즉 그 전거수준으로 자성하건데 그들은 언론의 피상



적인 정치노름에 망각되어진 돼지우리안의 돼지요, k는 부르주아들의 위선에 맞서 그들의



비인간적인 눈을 노려보는 남한의 전무후무한 자유인이었다.





커피집을 나오자마자 k의 눈에는 가로수들의 행렬이 펼쳐졌다. 그는 동요하였다.





'자연은 이토록 사람의 감성을 감흥시키는가!'







k는 갑자기 달리기 시작했다.

















- 4장





시내의 역동적인 꿈틀거림, 이를테면 번쩍거리는 신호등이며 지나가는 가족들과 일상에



지친 개인들이며 고리타분한 차의 멍청한 행렬이며, 엔트로피의 뇌관의 각도에서만이 사유



해 볼 가능성이 있는 기하급수적인 도심의 욕망이 그의 눈에서 가시화되었다. 하기야 그들



의 내적인 기저에선 만유인력의 법칙의 끈질긴 개연성에서 벗어날 수 없으니까 상호 간에



섞이려 하고, 생활이란 분자는 필멸적으로 개개인의 프레임의 연속체란 원자로 분해된다.



이 도시란 4차원성의 패러다임은 말그대로 소우주를 상징한다. k의 눈에 투영된 이 도시의



논리는 이런 것이었다.







k는 자신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존명存命할 가치가 있는 좌표계라고 생각되었다. 그러



나, 아니나다를까 세상 모든 이들이 자신이야말로 가장 소중한 좌표계라 사고할 권리 즉



자기의 일인칭성이 우주의 표준이라고 견지할 보편타당한 적법한 자가당착이 있지 않은가!

[자신이 소멸되면 우주도 소멸된다.] 이 명제는 한 생명체의 어쩔 수 없는 물리적 비애였



다. k는 자살시도의 망상에 사로잡힐 때마다 이를 직시했고, 조건반사되어 날아오는 생명



에의 의지가 마치 그의 추억의 흐름 속을 맹렬히 포착하고 또 포착하는 것처럼 그를 사로



잡았다. 그러나 보아라. 우리 모두가 모두 자신만의 갖잖은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있지만



결국 세상의 절대적인 좌표계인 신은, 인문학적으로 엄밀히 말해 우주의 그토록 사소한 각



개의 실재들을 관찰하는 관찰자는, 등방성이라는 객관의 최상단의 극[pole]이라는 이름의



패턴을 일정한 원리의 잣대로 사용하여 우리를 본다. 우리는 거기서 벗어날 수 없다. 몇몇



얼간이들은 자기만족에 빠져 자신의 방향의식의 객관성을 추모하지만 우리 순수이성 밖의



미지의 존재는, 단연코 우리의 기량으로는 결코 인지할 수 없는 미시의 세계를 대변한다.



이 현상계 밖의 초정신적인 기축을 이루는 전인미답의 일단은, 이 인간의 한계성은 그러니



까 인간문명의 유한성에도 한계가 있음을 적시한다. 인류의 진보는 요지부동하지 못하고



마침내 퇴보로 치환될 지도 모른다. 이 두 문명의 관성이 통상적으로 상대적 원리의 경계



에 포함될 때, 비로소 플라톤이 제시하여 소피스트 들뢰즈가 발명시킨 시뮬라크르 관념 게



임이 끝나게 될 터이다.









k는 순간 아스라히 자신의 마음을 내보였던 도서관 사서누나를 떠올리자마자, 그리하여



정보도서관을 향해 열정에 찬 동적인 보행으로 육체의 운을 떼자마자, 또 그럼에도 예의



행위에 대한 양면성의 이면에 지적인 욕구에 관한 오기가 가득 차 있음을 뇌리가 직관적으



로 전유하자마자, 자신의 정신의 파장이 속화俗化의 원에서 벗어나 국소적인 분야에서 심



층적으로 일관됨을 감각의 측면에서 느낄 수 있었는데, 그야말로 보이지 않는 배후의 베일



의 기초를 이루고 있는 자명성의 다차원적인, 마치 물밑에 고요히 내재된 명철한 귀기와도



같았다.









'그래, 가는 거야!'









진취적이지 아니하면 난제를 극복할 수 없는 법이다. 능동적인 태도가 복잡다기한 문제



에 해결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도전의식은 생활의 양상을 바꿔놓는다. 미래에, 자신이 과



거에 시도하지 않은 과제에 대한 손실을 아무리 들여다봐도, 이미 늦은 것이다. 수동적인



태도, 비시도는 최종적으로 후회를 가져온다.















- 5장





하늘은 점점이 초연한 시류로써 변색되었는데, 보기 드물게 무감정한 뉘앙스를 띄었다.

k의 손에서 땀이 나기 시작했다. 손에 나는 땀은 여자의 질에서 나오는 분비액과 비슷한



경향이 있다고 k는 생각했다. 양자 모두 전체적인 의미로서의 리비도[무지한 이들은 리비



도를 단지 성욕의 범위에서만 논증하려 든다. 그러나 그것은 평평한 사고방식이다. 리비도



는 넓은 의미에서 성욕이 아니라 인간 DNA의 원초적인 생명력을 뜻한다고 생각된다.]적인



흥분과 열정에 휩쌓이면 창조되는 것이니까. 남자의 손과 여자의 질은 속성의 관점에서 비



슷한 동일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런 연유로 쌍둥의 그것과도 꼭같은 이 역학관계란, 남자



의 손만이 여자의 질을 흥분시킬 수 있다는 사실이다.









k는 걷는 일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걷는다는 것은 니체가 말했듯이 깨어나는 일이



다. 진정으로 깨어나는 일이다. k의 발은 찌릿찌릿해졌고 곧이어 뇌도 찌릿찌릿해지는 현



상을 그 자신의 육신이 비상치非相馳한다는 만족스러운 현실을 그는 자각하였다. 그러나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니체가 5개 문명국어를 사용하여 자신의 철학을 개진했다는 사실에



있었다. 니체야말로 그가 걸어야 할 길의 전범을 보여주는 인물이었으니 말이다.







나무들이 앙상하게 가지를 드러내며 k의 심금을 시종일관 정묘하게 울렸다. 그는 눈을



감고 길을 잃은 채 앞을 향해 나아갔다. 유년시절의 싱그런 향수의 정수가 불확실하게 펼



쳐져 있는 가로수 길 앞에, 영원을 구성하는 '청정'과 '무위'란 구성 요소들이 마치 황금



빛과 바다의 만남처럼 그렇게 심원함 속으로 녹아드는 듯했다. 그렇다. 그는 우수에 잠긴



것이었다.







"나의 유년 시절, 밑에서 밑으로. 끝도 없는 과거로. 어떠한 방해도, 고통도 없는 시작



의 과거로. 우선 나의 다짐이 있기에 앞서 난 자연 본위의 모습으로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싶어. 태초에 말씀이 있기 전에 그 빌어먹을 말들이 있기 전에 예의 사실을 주지



할 수 있는, 또한 실지적으로 사실의 역사를 주조해 나가는 '내가' 태어났던 거다. 내가



있고, 나의 인식 범위 안에서의 세상이 창조되었어. 그리고 그것은 운명이라는 이름으로,



혹은 과학이라는 힘의 함률적 균형 속에서 내 영혼의 울림에 수많은 개입을 해왔지."







8살 즈음이었을까, 어린 시절 그가 다니던 교회에 그가 사랑하던 소년이 있었다. 사랑이



라... 아니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었다. 그것은 우수 어린 이심전심에의 유년적 정열이었



다. 소년이 소년을 사모하는 것은 약간은 복잡하면서도 흐릿한 애수가 손에 잡히지 않아



눈물을 흘리는 것과도 같다. 남자와 여자가 사랑하는 것보다 더 의미있는 행동이 세상에는



존재하는 법이다. 그것이 바로 유년시절에 영혼의 눈으로 우정을 환상하는 일이다. 교회의



담장은 붉은 벽돌로 여실히 아련함을 환기시켜주었다. 고아함과 단아함이 맞물려 천국의



향기처럼 고색창연한 기류가 아득히 퍼져있는 개천가의 쪽빛과 다름없는 지변을 바라보면



서, 동시에 교교한 푸른 하늘의 정아함에 감명받은 소년은 가만히 물결을 바라보며 아름다



움을 숙고하였다. 그 요지부동의 아름다움에 함축되어 있는 것은 '하얀 눈처럼 빛나는 장



려함'이었다.







눈시린 하얀 구름이 지천에 깔려있어 마치 애틋한 화폭과 같이 유년의 정취를 감싸안는



다. 그 하늘 가없이 펼쳐져, 광막한 저세계로 유랑하고픈 유년스런 동경의 잔향을 서정적



으로 퍼뜨린다.







두런두런 불어오는 바람의 선이 유려히 포물선을 그리며 흩어졌다. 갈색 갈대, 연녹색



갈대들이 듬성듬성 비규칙적으로 자라고 있었다. 울창한 풀들이, 자신들이 자라야 하는 키



의 제한량을 잊은 양 정신없이 치솟아 있었다. 소박한 개천가의 숭고한 냄새가 강변의 물



줄기와 결합해, 지속적으로 이어진 푸른 돌들의 방향[芳香]과 뒤섞였을 때에도 개천가는



소자연만이 지닌 부드러운 주홍색 노스텔지어를 더욱 확고히 하는 것 같았다. 개미의 움직



임.





검은색 개미는 돌과 함께 타들어가고 있었다. 소리없이 떨어지는 물줄기에서 그 찰나에



서 느껴지는 거나한 시간의 부재를, 보이지 않는 음영의 잔향을 관철하면서 이 틈새 저 틈



새 할거 없이 공허히 동물들의 곤충들의, 그러므로 개천가의 시간은 무의미하게 이 모든



것을 완성해나가고 있었다.







하늘은 우울하게 타들어가고 있었다. 아침이든 오후든 저녁이든 하늘에서 들려오는 미지



의 은은한 피리소리는 냉엄할 정도로 담담한 하늘의 천평선처럼 이 지상에서의, 그리고 이



작은 개천가에서의 조용한 일그러짐을, 대기마다 연결된 고립된 공기의 분자와 분자사이의



점멸을 부드럽게 유전[流轉]하고 있었다. 주홍빛 태양이 자신을 따라오는 걸 불현듯 소년



은 감지한다. 연약한 두 어깨가 소자연을 목도한 희열로 떨려온다.







소년이 개천가에 박명이 도래할 때까지 기다리고 있자면, 비로소 그는 자신의 고취감을



꿰뚫고 있는, 자기 진선미의 푸른 보은의 일부분인 [심미주의의 최고적 경지]로 자기 사상



체계의 기본을 형성하고 있는 실증주의에의 추구경향에 대해 유화遊化시키는 은화살을 견



조한다. 가차없는 미의 추상에 육박했으므로, 가차없는 환각의 착란 속에 입단했으므로.







하늘의 정경과 그, 가슴이 미어질 정도로 유유자적히 온누리는 시변하고 있었다.







해가 저물어, 빛의 기울기는 또다른 방향의 저변으로 미끌어졌다. 어느 새 하늘은 붉어짐



과 파래짐의 미세한 조화의 극을 아스라히 쫓아가고, 사실상 시간의 역순구조는 변화의 프



롤로그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이미 그것은 시원을 거슬러가는 모종의 어떤 것, 서서히 창



백해지는 햇살의 광대함 속에 숨겨진 쓸쓸함의 그리고 나약함의 관조적 형태였을 따름이었



다. 마치 모든 물자체, 그중 특히나 조형물의 부질함. 그런 연유로 어떤 나약함을 조명해



나가는 차원에서 어떤 암시성의 부조를 서서히 으스러뜨려가는 것, 죽기 전에는 결코 끝나



지 않을 비애의 근원점을 침묵하는 하늘은 그리고 있었다. 일그러진 잿빛의 아스라한 색채



도 마치 인간이 간직하고 있는 두려움 아닌 두려움과 열정 아닌 열정으로 그를 구심으로



하여 온갖 방황이며 향연의 이중나선 구조를 생성해가는 모순에의 궤적을 소진해 가는데도



, 그것은 열렬히 무관심의 비원지성으로만 투사[投射] 하므로. 남은 소립은 끝없는 펼쳐짐



만이.







가만히 앞을 응시하는 소년의 진실된 혜안은 세상 그자체에 유미라는, 인간이 본원적으로



잠재하는 정제된 진리의 시점의 관성이 관조히 깃들어 있다. 소년에겐, 살아있다는 사실이



자연에 대한 유유자적한 자조의 한 형태다. 슬픔도 그에겐 아름다운 만족의 조건이다.







소년은 이따금 새벽이면 눈을 뜨곤 했다. 새벽은 영혼이 진정으로 살아있는 청아하고 은은



한 시간이었다. 괘종시계가 5시를 울리고 그가 잠에서 깨어났을때,







그리고 어느 순간에, 새벽은 다가오고 있었다. 그 여명의 순간의 이전에 하늘은 짙은 시[



視]의 전장으로 내달리고 있었다. 예상치 못하게 어둠이 자잘히 부서지고, 분해된 동결의



심연이 무수한 아름다움의 여백으로 남아, 하늘은 조용한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 갑자기



신선한 자연의 냄새, 아니 고귀하면서도 웅대한 산소 같은 것이 거기에 스며들었다. 무한



하게 넓다랗게 펼쳐진 깨끗한 하늘. 상공의 여명은 이렇게 은하수가 아득히 걸려 있었다.







소년은 은하수를 올려다보면서 자신이 영을 다만 거울을 바라보듯 여린 눈으로 그렇게, 그



렇게 바라보았다. 너무나 눈이 부셔서 푸른 새벽이 조수처럼 밀려왔다.

















- 6장





k는 천천히 눈을 떳다. 과거의 편린이 직조된 수채화였다. 그것은 정말이지 잊을 수 없는



여명의 찬란한 맥락과도 같다고 마치 그는 우물의 가장 밑을 보는 것 같이 아득하게 회구



에, 명상에 잠겨 생각했다. 얼마나 도저하고 한여름의 꿈처럼 명정했던 기억들인가, 비탄



에 잠긴 둔중한 마음에서 의식되는 미열이 살며시 고개를 들어 지나간 현실에 대한 안타까



움 - 일종의 상실감을 도연陶然히, 다만 선험적으로 고취되어 비련히 소생할 수 없는 추억



을 응시한다. 추억은 영원이란 물결 속에 아릿하게 잠재되어 간다.







정숙한 겨울볕에 문득 스웨터는 서글픈 상실감에 젖어들어갔다. 쓸쓸한 기분으로 시내 변



두리의 공원에 앉아 생동하는 봄의 초연스런, 뭍혀져 버린 과오의 짙푸른 공기를 맡는다.



실패한 사랑에서 생성된 기억의 원환은 지금 이대로의 서정에 파묻이고, 공원에는 건조한



채취가 다만 고독함이란 자기연민에 빠진 영혼의 폐부를 쓸어안는다.





잡고 싶어도 잡히지 않는 실연의 꿈에, 시간의 옅은 끝없는 향조의 감정에, 이 고요한 공



원의 풍경에 가슴을 맡긴 채, 깊은 잃어버린 공허에 빠진다. 지금 이 시원에 그 아이는 어



떤 삶을 살고 있을까. 공기의 따스한 푸르름이 안타까움을 자극한다.







비둘기들이 구구거리며 공원을 멍멍하게 두리번거렸다. 저 비둘기들... 그렇다. 지난해에



보았던 바로 그 비둘기들이 아닌가. 1년은 벌써 지나가버린 것, 무의미하게 소모된 것이었



던가. 세월에 대한 막연한 환멸감, 이대로 늙어가고 있다는 비참함, 청춘이 내게 몰고오는



통렬한 수심. k의 마음이 찟어질 듯 저려온다.





비정한 햇살이 k의 기분은 아랑곳하지 않고 삼라만상의 모든 것을 분해하는 기분이었다.



하얗게, 그렇게 세상이 온통 하얗게 변색되었다. 그동안의 추억에 대한 k의 인상은 부드러



운, 보다 자연스럽고 개탄한 비애적 재잘거림이었다. 이렇게 자신의 시름한 영혼에 몰두하



다보면 슬픔이란 생경하고 섬세한 애조에 침잠하게 된다.







k는 자신과 상대적이라 할 수 있는 비아[非我]를 미분화하여 그중 가장 자신에게 소중한



대상, 모든 표상 배후의 현실 가운데 말할 나위 없이 중요한 존재, 즉 외적 세계의 실재성



조차 부정하는 경지에서의 한송이 백합이라 할 수 있는 신비적인 그녀를 자기 안에서 지울



수가 없었다.







k는 학창 시절 자신이 첫사랑에 실패한 사실을 회고했다. 너무나도 안타까워, 마치 폐부가



녹아내려 세상에 융화되는 느낌이 들었다. 그 시절은, 전신을 신비의 하얀 가운에 의탁하



고 있다.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 그는 가슴이 떨려 그녀에게 고백조차 할 수 없었다. 그것



은 만지면 부서져 버릴 것 같은, 그런 소중한 사랑이었기 때문이었다. 졸업한 후 전화라도



걸어 고백하고자 했으나 용기가 없었다. 그는 사념만으로 자신의 청소년기를 탕진했다. 그



는 행동하지 못해 후회를 거듭하는 삶을 살았다. 그가 다른 여자가 생기더라도 이 사랑을



평생 가슴 속에서 몰아내지 못할 것이다. 그녀는 무심히 그의 봄을 독차지했지만, 세상에



엄존하는 악마들의 시샘을 산 듯하다. 그의 짝사랑이 시들어 자신의 마음에서 소침한 자취



를 감추면 형상은 사라질지도 모르지만, 그 고상한 향기만은 여전히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k는 생각했다. 공기 저 너머로, 아마 저 끝엔 누구도 알지 못하는 슬픔이 있을 것



이라고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영원히 자신을 알아주지 않을 것이라고...





시간은 중학교 시절을 지나 고등학교 시절로 거슬러올라간다. 어둠이 세상을 멸망시키는 거대한 파도와 같이 섬멸하여 k는 눈을 감는다.



정신병원의 간호사들이 따분하게 앉아있다. 의정부 성모병원, 그들은 k에게 정신이란 콘테츠를 팔았다. 모든 기억을 잊고 싶었으며 하물며 자살하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 과거의 가슴저리는 고적함을 마음 저변에서 지워버리고 싶었다. k가 한 사람을 생각하고, 그 사람을 위해 아니 다만 k의 기억을 위해, k의 추억의 나날들을 위해, 자기만족이란 이름의 정신적 소명을 이해하기 위해, 회구하고 싶은 기억의 갈무리를 소묘하는 건 옳은 일이라, 그렇게 생각했다.



간호사들은 남자도 있고 여자도 있다. 남자는 대개 보호사이고 여자가 진짜 간호사이다. 그들이 k에게 해준 건 과거를 잊게하는 일이었다. 최소한 그것이 그들의 의무였다. 그러나 그들은 저버렸다. 그들은 k의 상태를 회자시켰으나 희망을 불러일으키진 못했다. 지우고 싶은 건 그저 남아있을 뿐이었다. 슬픔은 언제나 둥둥 부유하며 k에게 생의 가련함을 상기시켰다. 이 역겨운 과거를, 이 역겨운 미래의 근원을, 그 조각들의 복잡다단함을 내가 어찌 이해할 수 있으리. 머리가 아픈 나머지 k는 어느 여자 간호사에게 말했다. "제발 새로 시작할 수 있게 해줘요. 역겨움의 근본을 지울 수 있게 해줘요. 힘이 없어요. 미래가 없어요..." 내가 미래를 찾은 것도 어쩌면 모순의 구조를 유리시키는 모종의 시도였으리라. 패러독스에 관한 이해였으리라. 간호사는 빤히 k를 쳐다봤다.



그녀의 눈에 동정심이 고여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업무였다. 월급을 받으려면 k의 센티멘털리즘을 그녀가 확고부동히 유지시켜줘야 한다. 다리를 덜덜 떨며 무형의 감미로움을 찾으려는 k의 탐미성을 충족시켜줘야 하는 것도 그녀의 업무이리라. 과거의 일.... 그러나.... 차갑게 과거의 이슬이 k의 눈을 촉촉히 적셔간다.







당시 k 나이 18살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 심미적인 우울함에 온 정신이 쏠려있던 나이. 삶을 개척하고 싶었던 근간에 잿빛 로맨스에 온몸을 투영하고 싶은, 내 인생 전부를 바치고 싶었던, 한마디로 적시고 싶었던 나이였다. 혼자 거리를 걸었고 그로 인해 사색하는 하루가 있었다. 유미로운 감각이 k의 느낌의 기저를 이루고 있었던 것, 그것은 k만의 예술성의 형태였다. k는 삶이 어찌 되든 상관없었다. 아름다움을 찾고 싶었다. 최고의, 지고의 고색창연함이며 예민한 심원의 감미로움을 발견하고 싶었다. 아득한 과거의 근원 속에 영원히 있고 싶었다. k는 그저 '있고' 싶었다. 아릿한 기묘함의 타성에 지적인 k의 선정을 맞기고 싶었다. 신이란 관념을 모른 채 인생의 조연이 되고 싶었다. 조연이든 주연이든 유한한 완미적 지성을 지각한다는 게, 그것들로만 일상의 진수를 빨아들이고 싶다는 게 틀린 원칙은 아니지 않는가?



어린 여성성이 k의 성격 전체에서 솟구쳤다. 18살에 공부만 하고 앉아있을 순 없었다. 그림같은 삶을 동경하는 나이, 삶의 시원의 진가를 맛보고 싶은 나이, 삶에 있어 다른 이들을 이기고 싶은 나이, 미지의 광야로 떠나고 싶은 나이였다. k의 나이 18살, 사랑을 하고 싶은 나이였다.



여성과 남성을 구분하는 건 사회성의 에너지라고 치부하고 싶었었다. 사회가 이 두 성을 분절하면서부터 우리의 삶에 로맨스가 다가온다. 놀라울 정도의 문화를 가늠하는 척도로서 성의 구별은 그 특질을 우리 모두에게 일반화 시킨다. 어떤 식으로 우리는 계산 방식, 이를테면 삶의 계산성에 성에서 비롯된 문화를 끼워맞춰야 하는지. 아무것도 헤아릴 수 없는, 마치 검은 물 속에 들어가 그 심연을 맛보며 헤메는 그런 나이였다.



k가 사는 방식은 극히 따분한 일상을 재창조했다. 지루함은 일상의 선을 넘어 삶을 무의미하게 만들었다. 그 '무의미'가 내게서 떠나가는 시간은 하루에 15분, 그 정도면 족했다. 지루한 일상의 경계를 어떻게 허무는가. 일상의 생활방식을 k가 어떻게 깰련지, 그게 중요했다. 매너리즘에 한번 걸려들면 계속해서 마치 노이로제처럼 삶 곳곳으로 스며들어 일종의 버릇이 된다. 마치 작가가 글을 쓸 때 단어수를 헤아리듯, 광적인 커피로스터가 원두알의 갯수를 헤아리듯, 정신병자가 자신의 약의 종류를 파악하듯, 그런 식으로 말이다.





지루함은 언제나 지루한 에너지와 같았다. 그것은 지루한 일련의 관념이었다. 지독한 삶의 관성에서 신의 추적을 벗어나는 거, 어쩌면 k가 바라는 건 그런 건지도 몰랐다. 진절머리가 쳐졌다. 지독하게 이어지는 이 삶에. 자살하고픈 자기파괴 본능이 심장으로부터 용솟음쳐 k가 바라보는 온세상을 녹이는 듯했다. 죽고싶은 나날이 계속되었다. 죽고싶은 나날들, 정말 개같은 나날들, 말하고 싶지 않은 나날들.



고루한 생의 정적을 이겨내려는 k안의 정신적 구도求道의 검토관은 살며시 "도망치라고" 말해줬다. "너 자신에게서 도망쳐라." "현실을 버려라, 그러면 진정한 피안의 평화로 들어갈 수 있다."라고. k는 해결할 수 없는 이 문제에 관해 매 종일 잠을 자는 식으로 대응했다. 잠을 자고, 또 자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무의미의 행동적 종속의 궤에 자기인식하는 k만의 방책, k는 한가지만을 이해해야 했다.



로맨스를 추종하는 게 문제는 아니다. 누구나 인생에 궁극적인 따분함을 벗어날 로맨스를 꿈꾼다. k가 꿈꾸는 건 현실에 의해 감춰진 사랑에 대한 k의 진정성이었다. 위선이 우리네 눈을 사악한 걷치례로 가리고 따라서 우리는 상호협조적인 비진취함을 보이지 않게 추구한다. 다시 말해, 우리의 실재를 우리 사소한 유형적 관념의 기호로서 감춰버린다. 그런 건 언제고 기대하기 싫었다. 제발 실제를 보여줬으면 하고 k는 k의 모든 삶을 통틀어 말하고 싶었다.



오토바이를 타고 적막한 거리를 달렸다. 그러면 모든 게 잊혀졌다. 끝없이 펼쳐진 수풀림이 대로를 기준으로 양옆으로 나눠져 k를, 우리 모두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러면 모든 게 잊혀졌다. 활발하게 나는 오른손을 꺽어 속도를 올리고 시속 80km가 넘어가면서부터 역설적이게도 마음의 평안이 찾아든다. 진실한 마음의 평안이. 겉보기에는 별볼일 없는 인간들도 속은 얼마나 꽉차 거리를 활보하는가! 누군가를 완전히 파악하려거든 수없는 시간이 걸리기 마련이다. 왜냐하면 그자신도 자신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찌 타인이 그를 파악하겠는가.



오토바이는 시속 120km까지 뻗어갔다. 빠른 속도가 시공을 초월한다는 말을 k는 얼핏 들은 적 있었다. 속도라는 건, 참으로 아름답다.



그 시절을 회자해보며 k는 소극적 아름다움의 극치를 발견하곤 한다. 우울한 나날들이었지만 그것은 k나름의 우울이었다. 우울이라는 관념도 의미가 있는 것이다. 우울하다는 것, 삶에 대해 만족하는 자세와는 다르게 , 나름대로 생활상에서 벗어나 우울함을 고찰한다는 것, 예술성에 접목한 우울함을 한때한때 직시하며 살아가는 것, 예술성 있는 삶은 그런 것일테다. 마치 예술을 안다는 사람처럼 말하고 있지만 단지 k의 생각일 뿐이다. 그러나 이것도 '론'이다. k 예술론의 일부인 것이다. 아름다움을 고찰한다는 것....





18살의 k의 삶을 휘감는 주요한 요소는 '권태'였다. 그것의 집요함과 그것과의 사투는 언제나 일종의 전쟁으로 끝이났다. 권태감이 k에게 제시하는 건 자살하느냐 아니면 생존하느냐 하는 양극을 창제하는 이율 배반성에 있었다. 이따금씩 머리를 멍하게 하는 환멸감이 내 전체가 될 때 k는 k 자신에게 기도했다. 사는냐, 죽느냐. 무엇을 선택할까 하고... 그렇게 18살의 여름이 흘러가고 있었다. 전체적인 요소를 일말의 자존심으로 응시하며...



그랬다. 지루함이 지난함 뒤로 하나의 지평으로써 펼쳐졌다. 삶의 사투는 어려운 형태로 다가오기도 하지만 아무것도 아닌 형태로 다가오면, 이상하게도 더욱 극복하기 어려운 법이다. '권태'는 부딪혀 본 사람만이 안다. 그것이 삶에서 어떻게 죽음으로 이끄는지. 그것이 일종의 모방이라해도 우리 삶과 꼭같이 죽음이란 이름의 지옥을 연상케 할 수 있는 힘이 있는지. 어쩔 수 없는 삶의 양태를, 파괴적인 정신의 격정을 이겨내고자 k는 글을 썻다. 의미없는 글이었다. 그렇지만 k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글을 쓰면 그때의 기분은 모든 게 자유로운 고리로서, 알레고리한 기분으로서 심장 깊숙한 내부를 촛불의 은은함으로서 녹인다. 글을 쓴다는 건 그런 것일까. 지금에 와서야 얘기하건데 지난날 글쓰기에 관한 단상을 반추하자면 끝이없다. 밑도 끝도 없다. 그러므로 k는 그것들을 얘기할 순 없다. 망쳐버린 지난날을 얘기한다는 건 마지막에 할 최후의 통첩 같은 거다. 최후를 서론에 접두해야 할 일말의 바보같은 여지 같은 게 k에겐 없다. 단지 슬픔만이 가득할 뿐...



환멸감은 k를 가만히 냅두지 않았다. 때때로 k는 자살 유혹에 빠져든다. 깊고 깊은 감정의 골은 내 자신이 자신에게 투사하는 것이다. 글이 써지지 않는 날, 멍하고 어지러운 날에 자살 유혹은 최고조에 이른다. 왜냐하면 k가 쓸모없는 사람이란 걸 세상이 재론의 여지 없이 들추어내기 때문이다. 들추어냄의 대상은 분명히 '나'이고 k는 갈데없는 비사회인인 것이다.





환멸은 끝나지 않을 저주와 함께 시작되었다. k는 저녁에 태어났고, 저녁이란 건 저주를 의미했다. 저녁은 정적이고 희망과 반대되는 곳, 유령의 생존과 저주를 상징적으로 상정한다. 저녁의 차가움과 고독함은 k의 삶의 질의 색깔을 결정한다. 바로 그것이다. 저녁이 k의 생의 정답을 대변하고 있다. 저녁이 또다른 k를 말하고, 저녁이 k의 전부를 말하고 있다. 저녁의 빛깔이, 그 역겨운 색조가 이 더러운 삶을 낱낱이 예상하고 있다. 저녁이...



기분이 저조하지 않은 날이 있었던가. 기분 따윈 애당초 중요한 게 아니었다. k에게 감정이란 그다지 중요한 요소가 아니었다. 감정이 객관을, 우리가 직시하지 못하는 실재가 어떤 물이라면 거기 거품조차 일게 할 수 없다. 어린 날에는 감정을 중요한 요소로 여기지만 크다 보면, 우리를 둘러싼 현실이란 장벽에 감정의 기복이란 게 얼마나 쓸모없는 건지 깨닫게 된다. k는 그제서야 그것을 알게 되었다.



정답같은 건 없다. 혁명조차도 없다. 그것은 사실이다. 사실이란 건 혁명으로 인해 변경될 사물이 아니다. 사실은 관념이 아니다. 그러므로 종교는 인위적인 행실적 거짓이다. 그것은 문화요, 곧 인류가 재창하는 변질된 신경증에 불과하다. 어떤 이들은 믿음이 세상을 변화시킬 거라고 믿는다. 그러나 집단적인 믿음이 조금이라도 세상에 여유라는 한줄기 빛을 직사할 수 있을까. 감정의 양날의 검은 그런 것이다. 긍정적인 기분은 우리에게 어떤 가능성을 말해 주지만 사실 부정정인 기분이 우리에게 가능성의 여지를 예방하는 것이다. 둘이 비긴 데서 가능성이라는 관념은 시작된다. 긍정도 부정도 없다. 오로지 실체만이 살아서 움직인다. 문명도 인위성도 없다. 오로지 객관만이 살아서 움직인다.



그런 의미에서 경제학과 수학은 우리 삶이 거짓되지 않았다는 걸 투사하는 지표다. 우리가 헛살았다는 걸 미리 방지해 주는 일련의 직설적인 사변이다. 이 둘의 관계가 직접적이고 현재 종교와 문화를 누르고 세상을 움직이는 근본적인 원동력이라고 생각한다면 어려울 것도 없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우리의 느낌을 존중하지 않고 우리 자체의 물리를 존중한다는 데 있어 근대는 시작의 화살을 쏜 것이었다. 물론 이념이 세상을 바꾸긴 했다. 마르크스와 함께 공산당이 들어섰고 곧이어 파시즘이 주조됐다. 유럽이 쑥대밭이 되었고 동양에도 마오쩌둥과 일본의 파시스트들이 활개를 치고 다녔다. 세상이 변절하여 육실거리고 있었다.



그에 비하면 k가 사는 이 세상은 거친 이데올로기의 종말적 세계로써 지나치게 평화롭고 단조롭다. 한때는 이것이 얼마나 큰 축복이며 곧 평화인지 생각해보았지만 결국 정신적인 측면에서는 이시대도 만만치 않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세상의 무게는 어느 시대고 변화되지 않는다는 견각심은 이 삶이, k에게 주어진 삶의 무게가 결코 비동력의 범주에 속하지 않는다는 걸 의미했다. 너무나 힘들었다. 사는 게 너무나 힘들었다. 그걸 들어줄 사람도 없었다. 너무나 힘든 이 삶을...



오토바이를 운전하는 일은 위험함의 가운데 말초적인 쾌락, 마침내 심원한 평화로까지 안내하는, 드라이브 같은 거였다. 얼마나 그 광휘가 k의 몸을 쓸어내리는지 바이크를 운전해 본 사람만이 그것을 안다. 꽉 막힌 길에서는 차와 다름없이 지루하지만 열린 길에서는, 그리고 날씨가 좋은 날에는 그만한 오락도 없다. 물론 오토바이 운전하는 일은 다른 일을 하는 것에 비해 죽을 확률은 엄청 올라간다. 목 내놓고 타고다니는 것, 그것이 오토바이 운전이다. 최소한의 실수가 두 다리를 절단낼 수 있고 사소한 실수가 목을 부러뜨릴 수도 있다. 운전하는 애들도 그건 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애써 무시한다. 오토바이의 안전성을 일반화시켜 주창하고 다닌다. 한심한 일이다. 그런 작태는 모든 분야에 적용된다. 한심한 일이다.



학교에서의 광대놀음도 차차 지겨워졌다. 언제까지 주역을 밑도는 광대가 되야 하는가. k는 외로움이 싫었다. 그래서 자처하고 어릿광대가 됐다. 슬픈 눈의 어릿광대... 그러나 그들은 k를 이해할 것이다. k가 왜 그래야 했는지. k가 품은 큰 고민은 몰랐겠지만 k의 슬픔은 이해할 것이다. k가 왜 그래야 했을까. 슬픔만이 가슴 깊이 가라앉는다.





오늘날의 시인들은 제대로 된 문장을 얘기하지 않는다. 그들이 얘기하는 건 거짓이다. k가 고등학교 때 경험한 거짓의 선행물들은 최소한 세상의 모든 분야를 대표적으로 두루 섭렵하게 해주는 하나의 계기가 되게해주었다. 아이들의 위선은 모든 어른들의 위선을 전형하는 결과물이었다. 역겨움과 거짓, 위선과 팽배함.



어느 수업 시간이었다. 아이들은 따분함에 지쳐 기운은 없고 선생만이 홀로 혈기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었다. k도 그저 조용히 책을 읽고 있었다. 정치에 관한, 미국의 제국주의를 이끈 네오콘을 논하는 책이었다. 두꺼운 책이었지만 당시 k는 자극적인 것을 원했다. 아주 자극적이고 젊은 날의 사상에 심취하게 해주는 그런 것, 현실을 잊을 수 있게 하고 역사적인 느낌으로 몸을 각성시키게끔 하는 것, 그건 그런 책이었다.



책에 흠뻑 빠져있을려니 갑자기 '퍽' 소리가 들리면서 머리가 울려왔다. 고개를 들어 쳐다보는 데 늙은 선생이 한명 있었다. 당시의 일을 k는 두고두고 욕했다. 진정한 공부는 수학 따위가 아니라 이런 인문적인 거라고. 삶의 실체를 배우고자 하는데 수 따위를 알아봤자 무엇해 먹냐고. 그리고 당시에 그러한 행동을 지금에 와서 후회하지도 않는다. k가 공부하는 건 '진정'한 것이었을진저, k는 결심했다. 미래의 근원이 되겠다고. 선생과 같은 쓰레기가 되진 않겠다고. k가 하는 공부는 일말의 기득권적 권위가 소실된 진실된 것이라고. k는 한치의 부끄러움도 없었다.



오토바이로 시골길을 달리는 것만큼 광활하고 유쾌한 것도 없었다. 가슴 속이 시원하게 뻥 뚫리는 쾌감을 경험해 보시라. 이것이야말로 '진짜'라는 표상을 재치있게 깨닫는 즐거움을 심화해 보시라. 그때 k가 느끼는 감정은 그런 것이었다. 때때로 미끄러질 것 같다는 강박관념이 머리를 스치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없었다. 기우였던 것이다.



끝없이 논이 펼쳐진 분지를 달릴 때면, 그 눈부신 햇살이 논에 반사된 벅참이 내면의 뼈 속까지 스며들어 아름다운 장대함을 느끼게 한다. 태양 아래 끝없이 펼쳐진 세상이 모두 하나의 풍경으로 직조되어 전대미문의 고색창연함을 맛보게 해준다. 슬픔 따윈 없고, 그러므로 아무 것도 없는 가운데 기쁨만이 은은히 울린다.



담배같은 건 피지 않았다. 그런 건 바보짓이었다. 다른 얘들은 서로 어울려 담배와 술등을 탐닉했지만 k는 그러지 않았다. 역겨운 짓이었다. 고등학생이란 호기심에 굶주린 늑대와도 같은 것이다. 늙은이들이 동경하는 것보다 더 더러운 존재들이고 그 준거함은 중학생 시절에 있다. 중학생들은 더 더러운 것들이다. 만약 내 말이 틀렸다면 과거를 생각해보시라. 좋은 기억들만 남아있는 과거에 얼마나 더러운 사실들이 뭍혀 있는지, 생생히 생각해보시라. 그것들을 모두 기억해 낸다면 -나쁜 기억들을- 자신이 얼만큼 과오가 밑에 깔린 삶을 사는지 피차 깨닫게 될 것이다. 당신이 만약 과거를 모두 불러 일으킨다면...



낮은 지루했다. 낮에는 활기참은 있었지만 정신의 열기가 없었다. 밤에만이 창조하는 정신적 열기, 그 흰색 수증기를 관찰할 수 있었다. 또한 여름에는 결코 관조할 수 없는 법이며 어느 푸른 가을날에만 인간은 스스로금 성숙해져 관조하는 정신을 가질 수 있다. 그러므로 겨울은 계절적 밤이 된다. 겨울엔 인간 활동에 제한이 생기고 육체의 리비도는 정신을 향한다. 이러한 모든 결과로 보건데 겨울 밤 저녁은, 숭고하고 고매한 정신으로 가득 찬 정적인 열정의 안개로 가득 차 있다. 정적인 열정의 안개.





하기야 k의 삶에 대해서 크게 할 말은 없다. 다만 k의 18살의 저녁은, 온갖 정적인 정념의 한계로까지 치닺었었고, 끝내 그것마저도 저물었지만 이것들이 훌륭한 저녁이라는 공상, 또는 몽상으로 가득 찬 관념적 회구라고 일컫을 수 있다면, 그러면 모든 걸 가질 수 있으리라. 지금에 와서는 모든 게 슬픔으로 변질됐지만 그때 k의 삶은 단지 지루했다, 아무 것도 아니었다.



k가 글쓰기를 시작한 나이가 18살 때였다. 어떤 소설에 착상을 두었는데, 내용은 아버지가 변절한 딸에게 처참히 살해당하는 일종의 복수극이었다. 보수적인 사람에게는 지극히 충격적인 내용이었고 시대적으로 판단해도 하나의 배교에 다름없는 글이었다. 물론 기술적인 접근에서는 첫글이니 만큼 그닥 괜찮지 않았다. 그러나 글에 살아있는 영혼은 18살 몸뚱이 그대로였다. 현재는 그 산문이 소실되어 찾을래야 찾을 수도 없다. 그렇지만 그 글을 씀으로 인해 발견한 창작가에의 재능은 충분히 그 글을 쓸만한 가치가 있게 해주었다. 어린 창작가. 그의 정신은 비뚤어졌지만 학구적인 이마에는 징글징글한 주름이 잡혀있다. 어머니가 비록 그의 능력을 무시한다 한들 그의 문학에의 생환 능력은 어떤 예술가에 비할 바 없이 강렬하다.







어린 창작가...







선생님은 k에게한명의 은사이셨다. k는 항상 그녀를 '나의 선생님'이라 불렀다. k가 학생들 사이에서, 고립의 무원 속에 갇힐 무렵이면 선생님께서는 너그러운 도량과 영원한 특별한 사랑으로 k를 수업에서 빼 주시고, 말 그대로 헌신해 주셨다. 이것은 나만의 착각인가 아니면 진실인가? 내 고등학교 시절에 점철한 선생님의 배려와 사랑을 k는 영원무량히 잊을 수 없다. 고등학교 시절이 빛나는 한가지 이유는 k에겐 그만의 특별하신 선생님이 계셨다는 거다. 그것이 영원토록 k를 행복에 점지해준 하나의 이유이다.



어떻게 k가 선생님을 잊으랴. 선생님의 외모는 다른 선생님들과 달리 출중하셨다. 근데 그런 의미를 넘어 선생님은 인간적인 의미에서 한명의 은자이셨다. 나에게 한없이 베풀어 주셨고, 인내하고 사랑하며, 미증유의 칭찬이며 끝없는 혜안으로써 날 응시하셨다. k는 그것을 안다.



어느 날 점심 이었다. 마침 같이 먹을 친구 한 명이 학교에 나오지 않는 바람에 k는 선생님을 찾으러 다녔다. 어딘가에 있을거야, 그래, 어딘가에 있을 거라고. 선생님은 저기 학교 1층의 화장실을 나오면서 내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선생님 저기 오늘 식사 같이 하실래여?" 이런 식으로 말할라치면 선생님께선 예의바른 얼굴로 대답하신다. 이렇게. "응, 오늘 괜찮아."



그럼 k와 선생님, 둘은 마치 연인처럼 급식을 게걸스럽게 먹는다. 그러나 한줄기 햇살과 같은 은은한 로맨스가 우리[k와 선생님을 지칭]의 공간을 관통한다. 그것이 전제된다.



"애들과도 먹고 그래."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개네들은 쓰레기들이예요. 선생님도 잘 아시자나요."



선생님의 사랑의 느낌을 k가 지각하고, 견각하고, 느끼는 데 일말의 거짓도 없다고 k는 단언한다. 선생님의 k에 관한 사랑의 영원불멸성을 깨뜨리고 싶지도 않다. k는 그것을 사기 그릇 다루듯 조심히 다룰 뿐이다.





한번은 이런 적이 있었다. 체육시간이었는 데 k 혼자 테니스를 칠려니 뻘쭘해서 어쩔 수 없이 선생님께 아프다 그러고 쉬려고 한적이 있었다. k의 삶에 그만큼 그를 걱정해주는 사람은 엄마 말고는 없었다. 그녀는 k의 제 2의 엄마였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아는가.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것은 사랑이다. k는 선생님을 동경하는 것을 너머 일종의 로맨스를 꿈꿔왔다. 그것을 그녀는 모르지만 난 잘 알고있다. 18살의 추억을 점지해주신 분이 바로 그 분이다. 은정 선생님...



그림같이 k의 생이 없어졌다 생성되었다를 반복하는 한 배경이 있다. 그림자가 질질 끌리듯 무의미한 그 배경을 조용히 응시하면 있던 희망도, 그대로 소실된다. 슬픔, 인격자의 한 슬픔, 약자의 한 슬픔. 니체가 말했던가. 약자의 선악의 피안에 진정으로 영원한 영혼이 있다고. 영원한 영혼이...



지금은 너무 늦었다. 그녀는 k에게 잘 해줬다. 고등학교 때 유일한 짝사랑이었다. 가련한 빛은 반딧불이 같이 은은히 떨어진다. 수풀에서 풍겨오는 고아한 냄새가 마치 전 우주에 흩뿌려지는 것같다. 영면하는 가련한 빛, 지나가버린 추억-다시는 되돌아 올 수 없는.



언젠가는 부르리, 나의 사춘기 시절을. 언젠가는 부끄럼 없이 부르리, 나의 사춘기 시절을.



나의 사춘기 시절을...









이윽고 과거의 기개가 k의 머리 위에서 자취를 감춘 순간, 그 아름다운 의식의 흐름이 끝난 순간, 벌써 그는 도서실에 당도해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도서실은 의정부의 풍격을 표상하듯 바람이 강해진 이 시각에도 당당히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 7장





도서실의 공무원들은 설왕설래하였고, 신축된 지 얼마 안 된 건물의 이음새는 마음에 들었



다. 하지만 냄새나는 의정부 서민들의 옷차림은 남루했다. k는 이중적인 관점에서 생각했



다.'그들은 지식을 구하고자 온 것일까 이성의 성기를 핥으려는 최종적인 의중을 비수처럼



가슴에 심은 와중에 별 볼일 없는 정부가 운영하는 이 공공장소를 찾아든 것일까.' 인간은



극히 이중적인 동물이었기 때문이었다.







빈번히 평화로운 서재를 출입하는 여객들을 지켜보면서 k는 자신이 찾던 그 소녀를 발견했



다. 그녀는 노란 티셔츠 사이로 가슴이 봉긋하며 얼굴이 고혹스런 어여쁜 소녀였으며, 며



칠 전부터 k의 유미를 추구하는 시야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힐끗 그



녀를 보다가 그는 외려 엉뚱한 사색의 소용돌이로 빨려들어간다.









상이한 양극의 두 논점이 호각지세를 이루며 용기백배히, 상호 간 원려를 기정 축심으로



방비하여 문호를 전면적으로 개방한 수문장이, 때묻지 않은 독선과 아집의 기라성적 규합



체와 다름없는 땟물을 흘려내며 첨예히 맞물려, 서로의 머리에 총구를 겨누고 있다는 복잡



다단한 사상적 구도의 정세가 k의 도식도에 흉물스럽게 소묘되는 걸 지켜보았다. k는 그같



은 퇴폐적인 정신현상, 인정키 싫은 괘변을 파괴하려 시도했다. 그것은 두둥실한 의자에



앉아 현기증을 응시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사념의 줄기는 마치 괴물처럼 자신의 욕망을 주



체하지 못했다.







'단어에 어떤 상징을 부여하지 마라. 단어는 음계와도 같은 것, 다시 말해 뜻보다는 기표



의 원리, 즉 운치를 받아들여라.







문장의 직조에 필요한 것은 전래 그것의 질 뿐만 아니라 행간의 연결성에 있다. 중요한 것

은 어떤 시작時作에 있어 주제나 제목의 뿌리에서 벗어나지 않고, 시체詩體의 풍격을 한줄기 굵은 이음새의 특성에 자부를 유지한 채 글을 써내려가는 것, 연속적인 문장에서 전제되는 격률의 파죽지세적 자명성에 어긋나지 않음을 최상의 글쓰기 전략으로 여기는 것, 문장의 공과 사를 구분하는 일은 마찬가지로 한 장章이 제시하는 구도構圖의 차원을 따르는 문맥 사이의 서막으로금 이해되야 하는 것, 이들이 주를 이루는 게 중요하다.







언어에는 적정한 패턴이 있다. 그리고 이 패턴을 통찰하는 데 찰나의 순간이면 된다는, 이



르자면 머리가 비상하면 빨리 이해하리라는 망상을 당신이 품고 있다면 그건 크나큰 오산



이다. 글을 쓰는 것과 읽는 것은 무지 다르다. 말하자면 글을 읽는 체계와 글을 쓰는 체계



는 동전의 앞뒷면과 같아서 그 이질성을 이용할 줄 아는 문필가가 진정한 언어의 행위자라



할 만하다. 어쨋거나 미분화된 패턴들 가운데 당신이 십중팔구 자기만의 계열-원칙이라는



보편타당한 우승기략을 선정하여 밀고나간다면 예를 들어 각운과 같은 지엽적인 일들은 회



자되지도 않을 터이다.







언어의 패턴은 의외로 쉽다. 패턴이란 곧 법칙이다. 아닌게아니라 한글의 골자를 생성하는



필법에는 몇 가지 종류의 공식이 있다. 그 첫번째가 문체를 다루는 능력, 그 둘째가 어휘



를 다루는 능력, 그 셋째가 완전한 하나의 문장을 만드는 능력, 그 넷째가 여러 문장들을



교직시키는 능력, 그 다섯째가 그 글의 제목을 정정하는 능력이다. 물론 재론의 여지가 없



이 글을 써내려가는 데는 수많은 곡필의 노선으로 새들어갈 가능성이 면면히 공존한다. 그



러나 위의 다섯 법칙들은 일단 기초와 같은 축대로서 글이라는 심신을 유비무환하기 위한



입언인 것이다.'









그녀의 얼굴과 막 발기한 가슴을 보면서, 즉 그녀의 성性의 진용을 엿보면서 그는 완연하



게 육체미와 정반대인 지적인 착란에 몰입했던 겄일까. 그녀는 이제 막 11살 채 되지 않은



것 같았다.



"젠장할."







도서실의 침묵 속에서 k의 속삭임은 날카롭고 신경질적이었는데, 아무도 그런 그를 신경쓰



지 않았다.



















- 8장





오랜 시간이 흐른 동안 자기 안의 이성론자들의 합의에 의해 도출된 결과의 끝에서, 이런



복잡하고 학술적인 방향으로 자신을 내몰기보다는, k는 그녀에 대해 재밌는 시나리오를 각



색해 내는 것이 좋다고 여겨졌다. 그는 뇌리에 번개가 들어온 듯 영감을 받은 나머지 펜을



들어 빈 종이에 글을 적어 나갔다.





- 그녀, 민혜[가명]에 관한 이야기





의정부 도심에 아파트들이 깔려있다. 이제 막 미국화되어[연쇄살인마까지 미국화되어] 굴



뚝산업을 벗어난 이 도시의 도회적 분위기는 남한이라는 지극히 국소적인 지역을 살아가는



시민들, 빽도 없고 돈도 없는 시민들에게 작은 위안이 되어주었다. 그러나 자크 아탈리가



예언했듯 질적으로는 아시아 최고의 부국이 된다는 이 나라에서, 국가에 대한 자부심만으



로는 살아가기가 어려운 법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욕망이 있다. 그 욕망을 이루기 위해 우



리는 인간성 마저 져 버리고 세상과의 경쟁에서 피 터지게 싸운다. 좌우지간 인간에게 있



어서 가장 원초적인 욕구란 무엇일까? 성욕? 수면욕? 그것도 아니면 증오하는 자들을 겨냥



한 살인욕? 아니다, 의미론적인 최소주의의 최근 흐름에서 볼 때 그것은 오직 하나다. 공



포를 피하고자 하는욕망, 바로 그것이다. 그리하여 그것의 전범이 되는, 민혜가 경험했던



한가지 사건에 관해 여러분에게 들려주고자 한다. 민혜라는 소녀가 체험했던 한 공포의 이



야기는 여러분에게 극히 충격이 될 것이라고 본다. 그녀가 체현했던 아시아적 그로테스크



는 면면히 전례없는 이야기로 남아 여러분의 감정을 충혈시킬 것이다. 자, 그녀가 본 것은



과연 무엇이였을까? 인간의 영혼이 맛볼 수 있는 최악의 공포를 직접 여러분의 눈으로 확



인해보는 것도 자신의 평범한 삶에 대한 소중함을 깨우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될 것이라



필자는 관철하는 바이다. 그녀의 눈엔 과연 어떤 존재가 명멸했던 것일까?









저녁이었다. 어슴푸레하게 안개가 잔연히 흩어졌다. 깜깜한 밤이 스산하게 모든 영혼의 이면을 옥죄어 온다. 깊고 깊은 내면 즉 영의 시원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정신적 고통에 자신의 해후를 내맡긴다. 잠 못 이루는 밤에, 괴리와 회환의 가운데서 영혼 안의 내밀한 시심의 사색을 미처 받아들이지 못한 채 그것은 여물어 간다. 깊이, 깊이 최후의 밤을 갈구한다.





밤에 비견해 보며 우리 자신의 인생의 성질을 모른다고 한없이 외쳐본다. 슬픔은 어떤 상[



狀]인가? 아니면 모종의 형이상인가? 밤만 되면 뭐랄까, 이 어두움의 짓눌림 속에 속절없



이 스러져가는 나라는 이름의 비경을 발견한다. 모든 건 내 자신이 아니라 세상이 주조하



는 게 되어버린다. 그것이 우리의 밤이다.







대기에 맺힌 잊혀진 낮의 상들은 마치 초한할 것 같았지만 언제나 찾아드는 암흑에 짓눌려



의미없이 사라졌다. 단지 희뿌연 사위스러운 잔재만이 마하[摩訶]성을 띄며 다만 혼령처럼



떠돌아 다녔다. 초라한 등불들이 촘촘히 그러나 모종의 영적인 불안함과 우울함이 뒤섞인



채 불을 지펴냈다. 전신주들의 무리가 끝없이 도로를 향해 이어져있고 사람들의 종적은 이



미 끊김과 동시에, 적은 양의 차들만이 무연히 거리를 기웃거렸다. 하늘에는 별 하나 없고



오직 붉은 반달만이 온통 축축히 적셔져 있었다. 점점이 공간의 검은 어둠은, 그자신이 생



성하는 무자비한 어둠의 확장을 단순히 대기의 표면에서 이따금 자연스럽게 그리고 은밀하



게 발산되는 은빛 실랑이의 미묘한 번뜩임과, 외소한 중간에 나홀로 점유된 채 서 있는 앙



상한 나무들의 불안감을 역동적으로 빨아들이고 있었다. 실로 어둠은 망쳐진 어떤 균일한



삶을 조각조각내는 블랙홀의 붉은 심원함에 적조하였다,고 보아도 무방했다. 길거리를 떠



도는 개들이 외로운 제스처인 양 스러지는 세계의 형상처럼 포효하다가 다시 그 의도를 모



르는 길을 걸어간다. 저 개들의 주인은 있는 것일까, 아니라면 개에 대한 '주인'이라는 개



념은 인간의 욕망이 발단시킨 인위적 침잠물일까? 저 들개들과 꼭같이 고독한 정靜의 궤적



을 그리고 있는 길거리 개들은 결국엔 밀폐된 도살장으로 끌려가거나, 이 추운 겨울에 차



에 치여 어김없이 유유자적한 고깃덩어리가 되고 말 터이다.







마침내 시선은 자연히 소규모 아파트 단지로 옮겨지는데, 아파트의 비교적 네임벨류있는



브랜드인 푸르지오였다. 이 대지에 건설된 아파트의 평수는 68평으로, 그 의미를 상정하자



면 중산층 중에서도 꽤 잘사는 범주에 속한다고 지레 짐작할 수 있다. 이곳은 서울의 어느



곳이지만 민혜 가족의 사적인 보호에 준거하여 지역을 세분히 밝히지는 않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이 직시해야 할 몇 가지 점은 이렇다. 민혜의 아빠는 수도권 법조계에서도



형사사건의 유죄성을 무효로 만들기로 악명이 높은 변호사로 특히 파이프 담배를 즐긴다.



그가 피는 파이프는 800불 이상을 호가하는 비교적 고가의 물건으로, 명품은 아니지만 그



가 생각하기에는 그나마 쓸만한 것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그가 피는 연초는 기분이 꿀꿀할



때면 독일산 순수 레터키아를, 초조해질 때면 아일랜드산 페릭과 버지니아 믹스쳐를, 우울



할 때면 영국산 위스키 향연초였다. 그렇긴 해도 그가 예에서 벗어나는 흡연을 할 경우도



있었는데, 바로 자신에게 성공에 대한 환희가 슬며시 다가올 때 시가를 피워주는 것이었다



. 그것이 그가 가장 좋아하는 흡연형식이었다. 외국에서 박스로 들여오는 시가가 그에게



선택적으로 금전적 부담을 가져오는 건 아니었지만, 그는 자신의 여송연을 자신이 재판을



이긴 순간에만 향유했다.







그가 경기에서 이기는 건 당연한 것이었다. 법조계에서의 판사나 검사, 변호사, 검사보,



검찰청 직무와 관련된 대거의 사람들, 영향력 있는 법무부 관계자를 비롯하여 자극적인 정



보에 굶주린 몇몇 편향된 언론인들 뿐만 아니라 심지어 정계 인사들까지 연계되어 상호간



에 끈끈한 유대 관계를 형성하여 일종의 담합 관계를 형성하였다. 그러니 민혜 아빠가 어



찌 자신의 경기에서 승리하지 않고 베길 수가 있겠는가? 판사들도 훗날 많은 돈을 만져보



기 원했고 변호사로 전환하기 위해 변호사들과의 저녁 만찬에서 불란을 일으킬 순 없었다.



허나 그들은 다만 자신의 의뢰자이자 자신을 부리는 주인인 부르주아들의 더러운 개였다.



법과 정치라는 사회의 틀은 자본가들을 완벽하게 보호해주는 하나의 기능[특히나 한국 같



이 외교적 영향력이 없는 나라에선 대통령이 누가 되든 국가의 시국이 변하지 않는다]이었



다. 민혜 아빠도 자신이 소속된 정당이 있었고 만약 거기서 축출된다면 그에겐 미래가 더



이상 보장되지 않았다. 많은 개업한 변호사들이 영민한 국회의원과 봉건제를 이루고 있었



다. 노조가 갱스터에게 상납을 하고 자신들의 보호권을 지켜나갔듯이 국회의원들은 변호사



들의 밥그릇을 지켜주었다.







불행히도 민혜의 엄마는 현재로선 부재다. 그녀는 민혜가 3살 때 갑자기 안개처럼 증발해



버렸다. 아빠의 말로는 엄마와 사이가 좋았는데 그녀가 갑자기 집을 나간 건 자기로서도



믿기지 않는 일이라고 했다. 그래서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그건 단지 실종이었다고 여겨진



다고 했다. 민혜는 아직도 그 점, 그러니까 엄마가 제 발로 자신을 버리고 갔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은 채 여전히 누군가의 소행으로 엄마가 세상에서 사라져버렸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전자가 사실인자 후자가 사실인지 그 누가 알랴.







아리따운 가운데 이국스럽고 이지적인 외모의 소유자였던 그녀는 피아노를 즐겨 쳤는데,



민혜가 아기 때도 주로 연주하곤 하였다. 민혜 엄마에 대한 설명은 이쯤에서 끝마치고 좀



더 중요한 부분으로 넘어가기로 하자.







알다시피 민혜는 엄마 없이 자란 생을 살았다. 그녀는 자신의 아버지와 자신 이 둘을 세상



에 단 두명으로 여기며 상주해왔다. 그것은 어쩌면 엄마가 있는 삶보다 더 로맨틱한 삶일



지도 몰랐다. 세상에 단 둘이. 그녀를 지켜줄 것은 아버지 뿐이었다.







68평의 아파트먼트는 2명이 살기에 딱 좋은 생활공간이었다. 그녀의 아기자기한 방에서 호



기심 많은 11살 소녀 민혜는 문을 꼭 걸어잠그고 자신의 팬티가 함빡 젖어 보지에 꼭 붙어



도끼자국이 나타날 때까지 자위를 행할 수도 있었고[참고로 여성의 마스터베이션은 빠르면



5살 즈음부터 시작된다. 소년들은 그보다 늦어 아무리 빨라도 8살부터다. 아프리카에선 그



런 측면을 경계하여 클리토리스를 절제하는 할례가 일찍이 성행하였다] 잘생긴 미소년들이



교배를 하는 영상들도 마음껏 즐길 수도 있었다. 아버지가 그런 순간 문을 두들길 때 그녀



는 수치심의 이면에 이상한 쾌감이 잔존한다는 것을 알아챌 수 있었다. 그것은 인간이란



자아의식을 가진, 육신이 전부도 아니고 영혼도 전부가 아닌 양면의 존재가 지양 가능한



야릇한 모순점이었다. 필멸적으로 민혜는 아이였고, 게다가 나약한 여자였다. 다시 말해



민혜는 영속히 여자아이로써 남길 원한다는 말이었다. 그런데 모든 사람들이 소시적엔 다



그렇게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더러운 세상은 그걸 거부한다. 불행한 일이다.









어스름함과 푸르름이 기묘하게 뒤섞인 이색적인 한 밤의 소단지 아파트 안, 민혜의 아빠는



맥주에 취해 거실에서 대형 LCD TV를 보고 있었고 민혜는 자기 방에서 홀로 크리스마스 때



선물 받은 성능이 꽤 쓸만한 독일산 쌍안경으로 밖을 응시했다. 아파트 사이의 블록들이



텅 비어있으며 차들만이 자신이 지켜야 할 자리를 점유하고 있었다. 아무도 다니는 행인이



없었다. 민혜는 그 사실에 막연한 불안감을 느꼈다. 민혜는 인간이 두려움에 일차적으로



저항하는 첫번째의 것, 나름의 오기가 생겨 망원경을 들어 자신이 사는 층과 같은, 자기



집과 평행하는 13층을 쳐다보았다. 그런데 그만, 손에서 망원경이 툭 떨어지고 말았다. 그



집 안이 온통 빨간색이었기 때문이었다. 피처럼 시뻘건 선홍색이 화분에도 직사하고 빨래



들도 언뜻 정육점의 고기들마냥 걸려있는 것처럼 보여주었고, 집 안의 쇼파며 tv며 불길한



달마액자도 피로 적시고 있었다. 그리고 또한 저 안을 저렇게 꾸민 의문의 존재가 숨쉬고



있다고 생각하니... 주저앉은 민혜의 등골에선 소름이 돋아났다.







글을 쓰는 동안 창문을 내려다 보니, 해는 어느덧 중천에 떠올라 있었다.



















- 9장





사실 민혜는 그의 첫사랑의 실명이었다. 그는 무의식 중에 그녀를 자신의 단편소설에 그려



넣은 것이다. 그는 한편으로 민혜를 증오했던 것일까. 사랑은 미움의 시초이고 은덕은 원



한의 근원이라 했던가.





이후 도서관 안을 둘러보다가 k는 문득 자신의 정신적 지주가 생각이 났다. 열정이 순식간



에 꽃피워났다. 그러나 그 열정 안에는 외경심이 아닌 카뮈가 말하는 우정- 나를 따르지



마라, 난 이끌지 않을테니. 나를 이끌지 마라, 난 따라가지 않을 테니, 다만 내 옆에서 걸



어다오.- 이 아로새겨져 있었다.







그는 글을 갈겨쓰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은자이자, 국내에서 자금력이 강한 편인 출판사 문학동네 소속의 전속 번역가



황보석 선생께 보낼 편지를 작성했다. 그는 서울대 불문학과를 졸업하고 박사학위까지 취



득한, 업계에서는 이미 저명했다. 황보석 선생에게 k는 나름대로 그가 관록이 담긴 냉철한



충고를 하면서도 따뜻하게 자신을 감싸안으려는 모습이 인상적이었고, 그는 곧 그를 스승



으로 따르기 시작했다. 플라톤이 소크라테스를 아버지로 따랐듯이, k는 황보석 선생을 자



신의 이상형적 아버지상으로 여기기 시작했다. k의 아버지는 지하철 공무원이었다. 그러나



k는 그런 아버지가 자신의 아버지라고 여태까지 여겨온 적이 없었다. k에게 있어 가령 진



정한 아버지란 지적이면서도 온유하고, 즉 군자의 성품을 갖고 의연하게 처세하는 사람,



에스프레소의 맛을 아는 사람, 소주보다는 와인을 즐길지 알고 궐련보다는 시가를 즐길 줄



아는 예술인,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를 아는 사람, 사소한 이득에 눈이 멀지 않고 큰 것



[Big deal]을 노리는 대범한 그런 사람이였다. 황보석 선생은 확실히 이에 맞는 전례적 인



물이었다.

k는 황보석 선생의 이지가 담긴 정치적 판단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있었다. 그는 플라톤이



었고 황보석 선생은 소크라테스였다.







황보석 선생님께. 선생님은 제가 대면한 지인 중에서 가장 지적으로 탁월하신 분이십니다.



전 '선생님'이라는 존칭으로 함부로 사용하는 얼간이가 아닙니다. 이것은 신사적인 방면에



서만 차용 가능한 그러나 많은 사업가들이 사용하는 양가적인 언어니까요. 선생님께서 책



도 번역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께 제 사견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한국의 현



재 현실의 한계점과 미래상에 대해 언급하고 싶습니다. 제 의견에 관해 황보석 선생님의



정치적 판단을 기다리겠습니다.









한국, 엄밀히 말해 엄청나게 외소한 국가 남한은 세계 유슈의 중진국 중 하나입니다. 남한



은 그러니까 독특한 나라라고 제겐 사려됩니다. 한강의 기적과 더불어 남한은 아프리카의



변방 지역과 거의 흡사한 가난에서 채 벗어난 지 얼마 안 되었고, 1990년 대 아시아의 호



랑이라 불리며 동아시아의 빼어난 중진국으로 거듭날 수 있었습니다. 97년 대 무렵 IMF사



태가 덮치기 이전까지 우리나라는 승승장구하였습니다. 그러나 포괄적인 시점에서 볼 때



1988년부터 2009년 까지 우리나라는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으로 정체 상태에 있었습니다.



잃어버린 21년이라고나 할까요. 우리는 간신히 중진국의 고지에 도달했지만 그 이상의 발



전은 없었습니다. 선진조국은 하나의 신기루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조선이 어떤 나라입니까. 과거에는 거대 중국에게 괄시당하며 제대로 된 나라 취급도 아니



당하며, 일본에겐 오랜 기간동안 식민지 지배까지 당했던 나라입니다. 우리 조상은 일본에



게 강한 반일감정을 갖고 있습니다. 지정학상으로 한국은 작은 땅덩어리에, 인구만 지나치



게 과밀된 감이 없지 않습니다. 요는 이렇습니다. 왜 일본은 역사의 발자취마다 항상 강대



국, 거의 제국 취급을 받으며 세계에서 혁혁한 위상을 점유하였고 우리는 항상 일본의 그



림자 역할 밖에 못하였는가.



그리고 앞으로도 평생 그럴 것인가.







기억하십니까. 일본이 1980년 이미 세계 제2의 경제대국에 들어섰고, 일본의 방향의식은



이미 지극히 합리적이고 신자유주의적인 것으로써 상정되었습니다. 1990년대 초에는 미국



전역에서 가장 지가가 비싼 록펠러 센터와 자본주의의 기념비적인 유물인 호화 골프장들과



고층빌딩들을 인수했습니다. 일본의 거대회사들은 미국의 거대회사들을 제치고 천문학적인



무역흑자를 기록했습니다. <뉴스위크>는 일본이 소련이 무너진 이후로 미국의 최대 위협세



력으로 등극했다고 시민들에게 위기감을 설파했고, 하버드의 어떤 박사는 21세기엔 일본이



세계최강국으로 부상할 것이라고 호언장담했습니다.







그러나 일본은 어쨋든 화려하게 무너졌습니다. 그렇게 잃어버린 25년이 지났고 일본은 현



재 경제력 뿐만 아니라 자기내의 국채를 군사 부분에 엄청나게 할당하고 있습니다. 일본



경기는 어느정도 회복 국면으로 들어섰고, 일본은 다시 범국가적인 야심을 가지고 자신의



계획을 실천 중에 있습니다.







한국의 정치인들은 조선 시대나 오늘날이나 똑같습니다. 세계로 뻗어갈 생각은 안 하고 패



쇄적인 사고방식과 자기 밥그릇 평수나 늘려볼 생각으로 아귀다툼하는 꼴이 꼭 그렇습니다



. 반미감정은 한국을 외톨이로 만들죠. 어떤 중국 현자가 이렇게 말했죠. 천하를 얻으려면



사람을 얻어야 하는 이치인 것과 마찬가지로 히틀러의 처세전략을 보십시요. 그는 정치깡



패에 지나지 않습니다다만 그는 사람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천하를 얻을 수 있는 계기가



그에게 하나의 계시로 떠오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거지 신세에서 독일 수상이 되는 것만



으로는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만의 확고한 사상체계를 가지고 있었고, 그를 바탕



으로 자신의 대독일을 비엔나로 돌려 그곳을 접수하고, 그 다음에는 폴란드를, 그 다음에



는 노르웨이 덴마크 벨기에 체코슬로바키아, 심지어 프랑스까지 침공에 성공하였고 전유럽



을 통일하고자 하는 전체적인 야심에 가득 찼습니다. 말하자면 스케일이 큰 거지요. 평생



남한의 정치인들이 자기 영역 관리나 제대로 했습니까? 그들이 제창하는 민주주의가 이들



의 나치즘이나 파시즘보다 결론적으로 우리 시민들 모두를 평등성의 논리에 재고하게 만들



었습니까? 히틀러는 유태인들을 비롯하여 자신의 숙적들을 암살한 희대의 학살범이지만 그



의 혁명성은 전대미문의 것이었습니다. 히틀러를 긍정적으로 보자면 그는 천재적인 리더이



자 선동가였습니다. 우리시대에는 이런 혁명적인 사람을 필요로 합니다.







사회는 양극화로 치닫고 있습니다. 중산층은 몰락해가고 가난한 자는 평생 가난 속에 헤어



나지 못하며 '개'같은 삶과 범죄로 점철된 생을 삽니다. 부르주아들은 과거의 군주들 만큼



희희낙락한 호화생활을 누립니다. 지옥과 천국이 따로 있습니까? 저 가난하고 권력 없는



자들이 곧 지옥 안의 자들이요, 모든 권위를 갖추고 깨끗하고 넓직한 데서 살며 고급 승용



차를 타고 다니며 비싼 양주를 마시는 사람들 즉 부의 존속 체계를 이어받아 아이 적부터



편안히 살아온 사람들부터 비롯하여 주식시장에서 개미들의 피를 빨아먹는 역겨운 거대 투



기세력들, 일류 대학을 나온 사람들, 기업변호사, 국회의원, 기업 중역, 성공한 닷컴창업



자, 저명한 의사들, 유명 연예인, 부동산 업계의 거물들, 모든 그들의 아들들, 그들이 곧



천국 안의 사람들입니다.









그에 비해 어릴 적부터 교도소에서 인생을 보내는 사람들도 허다합니다. 4평 쪽방에서 14



명이 자신들의 배설물 냄새를 맡으며 돼지처럼 지냅니다. 아파도 병원에 못 갑니다. 온갖



폭력이 난무하고 그들은 인생을 비관하고 새로운 범죄를 생각하며 돈 몇 푼에 평생 교도소



를 들락거리다가 푸른하늘 조차 보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합니다.









저는 이 한국 사회의 저변을 정초하는 거시적인 패턴 변화를, 즉 심층적인 사회 풍토 밑바



닥에 깔려있는 가언적 당위성의 방향성을 인식하고 싶었습니다. 누가 이 남한 사회의 가장



중요한 요인인 '정치'분야에 어떤 혁신적인 분수령으로 등극해 한국 사회를 일약 [한국제



국]이라는 일단까지 끌어올릴 가능성을 제시할 수 있는가. 노무현도, 이명박도 훌륭한 정



치가이긴 하지만 개혁가는 아닙니다. 혁명가가 공화제의 투표로 뽑혀져 나오기에는 시대가



너무 진부해졌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힘과 지력으로 국민들의 뿌리 깊은 민족주의를 자극



할 수 있는 강인하고 지적인 혁명가를 필요로 합니다.









클린턴은 경제호황의 거품을 이용해서 2번이나 정권을 잡았고, 부시는 테러리즘의 위협과



중동 세력을 악의 축으로 지정함으로써 국민들에게 위기의식을 심어주는 걸 이용해 그 역



시 2번이나 정권을 해먹었습니다. 몽매한 시민들은 현시적인 현상만 보며 지도자를 추켜세



울 줄 알지, 거시적인 정세변화를 읽을 능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는 걸 이 사건들이 증명하



고 있습니다.







우리시대에는 새로운 지도자가 필요합니다. 히틀러 만큼 독재적인 아우라를 가진 지도자를



필요로 합니다. 썩은 의회를 폐지해야 합니다. 진정으로 일관적이고 모험적인 자각을 우린



가져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이 정치가입니까 사업가입니까. 지금 우리가 미국이나 영



국, 일본, 프랑스와 같은 [선진국]의 대열에 들어서기 위해서는 북한과의 강제 통일이 시



급합니다. 우리는 일본을 원수처럼 여기고 뒷다마 까기에 바쁘지만 일본은 신경조차 쓰지



않습니다. 일본은 우리를 나라 취급조차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옛날 옛적에 이미 제 2의



대국의 자리를 점유했으니까요.







따라서 직접 행동이 중요합니다. 문필가들은 모두 몇 푼 안되는 꼬질꼬질한 원고료는 집어



치우고 나라의 구조적인 변혁에 관심을 갖고 책을 저술하고, 여론을 선동해야 합니다. 직



접 행동이 중요합니다. 저 건방지고 한심한 북한정권을 더 이상 제멋대로 나두면 안 됩니



다. 미국의 적극적인 군사력을 빌려서라도 모험을 감행해야 합니다. 만약 그럴 수 없다면,



이렇게 주저앉은 삶을 살아가는 대한민국은 영원히 중진국의 궤도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



입니다. 이 나라가 선진국, 제국이 되느냐는 여러분의 이념의식에 달렸습니다. 젋은이들은



꼬질꼬질하게 친구나 만나지 말고 새롭고 절대적인 원칙을 토대로 한 정당을 설립해 정치



투쟁을 시작해야 합니다. 모든 직장인들은 거대한 정치노조를 설립하여 부르주아들을 도도



한 진보적 투쟁에 이용시켜야 합니다. 우리가 북한을 접수하려면 외부의 힘이 필요하고,



내부의 단결이 절대적으로 중요합니다. 필요하다면 일본과도 손을 잡아야 합니다. 우리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리라 꿈도 꾸지 못했습니다. 그 극렬한 냉전 체제 속에서 그 누가 그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했겠습니까?









전 민족주의자는 아닙니다만 최소한의 애국심은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남한, 여기는



제가 사는 세상입니다. 전 이 역겹고 퇴폐한 세상을 표변시키고 싶습니다. 많은 우매한 자



들이 깨달음을 얻고 혁명의식에 고무되었으면 하는 바입니다. 우리나라가 선진국의 대열에



입성하기 위해서는 북한과 통일이 되느냐 안 되느냐에 달렸습니다. 모두가 모험을 해야합



니다. 모험 없이 얻는 것은 없다는 미국 속담이 있습니다. 언제까지나 중진국의 생태만 적



시하며 이 물질적으로 가난하고 외교적 힘도 없어 모든 시민이 낮은 자긍심으로 살아가는



사회에서 유유부단히 살아갈 것입니까? 좀 각성하십시요. 일상이 다 무엇입니까? 우리에겐



좀 더 나은 일상이 필요합니다. 한국 시민에겐 좀 더 고급스런 물질적 풍요와 문명과 넓은



땅이 필요합니다. 평화는 현재로선 죽음이나 진배없습니다. 영원히 중진국의 계열에 머물



수는 없는 일입니다. 우리 조상들이 이루지 못했던 강대국의 꿈을 우리가 실현해야 합니다



. 우리는 한국시민입니다. 우리는 세계에서 가장 지적으로 우수한 민족입니다. 그걸 잊지



마십시요.







p.s 황보석 선생님, 나의 아버지 같은 존재시여. 이주 전 즈음 정신병원에 입원했습니다.



의정부 성모 대학 병원의 9서 병동이었습니다. 입원 경험이 올해로 4번 째로 이 바닥 훤히 꿰뚫고



있는 제게 또 한번의 재입원은 환멸의 극치를 안겨주었습니다. 뭐라고 해야 할까... 선생님께서는



약과 생활상에 대해 너무 크게 대비하여 생각하고 그런 사고방식에 입각하여 약을 선별하려 하지만,



현재의 약학은 환자에게 크나큰 영향을 미치지는 못합니다.





저는 전문가는 아닙니다만 뇌의 메커니즘의 구조와 정신과 약의 내용에 대해선 어느 정도 능통했다고



자신합니다. 그럼에도 저같은 사람들도 패쇄병동에 들어가서 보호사들과 간호사들, 그러고 영악한



주치의들에게 고문당하여 이윽고 정신병원이 감옥이라는 이정표적인 생각이 들었을 때 비로소 입원에



관해 후회를 하기 시작합니다.





현재 먹는 약은 데파코트 1000mg과 자이프렉사 20mg입니다. 병명은 단순한 조울증입니다. 자이프렉사를



제공하는 릴리사는 현재 폭리를 취해 10mg당 4900원의 이문을 챙기고 있습니다. 현 시점에서 올린자핀의



제네릭이 출시된 것은 기뻐 마땅할 처사가 아닐까 싶습니다.



올린자핀 20mg먹어도 아침 일찍 눈뜨고 저녁에는 불편 없이 잠듭니다. 항정신용제인 리스페돈, 젤독스,



아빌리파이, 세로켈, 올린자핀, 클로자핀 중 제게 가장 잘 맞는 약은 역시 자이프렉사[올린자핀]입니다.



글쎄, 데파코트는 정신분열환자나 조울증 환자에게 주로 처방되는 약인데 제게는 필요없다고 여겨집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약을 제 임의로 제외시키지는 않습니다. 항상 전문가인 의사의 심중을 읽고, 그와 함께



합의하여 결과를 도출해낸 처방전을 갖고 약을 지으면 그만입니다.



그런나 정신과 의사가 우수하다고 꼭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현재의 대학병원은 썩었습니다. 제네릭을



절대 처방하지 않고 무조건 정품 약만 권합니다. 일종의 담합행위라고나 할까요. 저는 대학병원에 신물이



나서 이제 동네 괜찮은 중견 병원으로 옮길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글을 쓰면서 2주 간의 지옥같았던 병원 생활이 환기됩니다. PR[줄로 환자를 결박하고 마취제를 투여하는 것]만



두 번 당하고 흥분하여 주치의 코를 주먹으로 찍었던 기억도 납니다. 이경욱 교수가 현재 제 주치의이지만



그렇게 좋은 사람이라는 생각은 안 듭니다.



쎄로켈이나 자이프렉사, 리스페돈, 아빌리파이가 가 현재 정신분열과 조울증 업계의 선두에 서 있습니다.



원래는 자이프렉사가 거의 장악했던 그 시장에 다른 약물들도 수면 위로 떠오른 것입니다.



요컨데 결코 정신병원 외래는 다니되 입원하지 마십시요. 정말 힘들고 괴롭습니다. 오히려 감옥이 날 지경입니다



. 대학병원이 이 정도인데 일반 정신병원 병동은 얼마나 거칠지 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약도 강제로 먹이고 전화와



컴퓨터도 못 쓰게 막습니다. 보호자가 마음만 먹으면 합법적으로 감금시킬 수 있는 게 현 정신병원의 실태입니다.













황보석 선생도 출판 업계에서 생존하려다 보니 정신이 많이 피페해진 상태였다. k는 입원이 한 인간에게 가하는 잔인성에 대해 왈가불가했다. 말해야 할 것은 꼭 말해져야 했다.

이어서 그는 자신의 심정을 토로한다. 은사께만 바칠 수 있는 그의 이면들에 대한 간취였다.





그대는 현재 제가 처한 피안적 방황의 세계를 아십니까? 저는 고통스럽습니다. 저는



20살에 철학을 너무나도 사랑했습니다. 아니 제 첫사랑한테 실연당하고 나서부터,



그러니까 짐짓 16살 때부터 저는 그녀를 제가 왜 차지할 수 없는지 그 불가해함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 후로 삶의 의미를 완전히 상실했고 저는 철학의 세계, 예컨데 우주의 섭리와 인간



존재의 필연적 파멸성에 관한 편집증적 망상을 탐닉하기 시작했습니다.



저에게 삶은 의미가 없었습니다. 제가 사랑하는 첫사랑,



그녀가 저를 인정조차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저도 제가 이런 형상으로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게 아닙니다. 여자의 조건을 충분히 만족시켜 주고 싶은 그런 남자의 외피를 갖추



어 창조되고 싶었습니다. 제가 잘생기고 용감했다면 그녀는 제게 반했을 겁니다. 제가 지



적이지 않고, 동시에 소극적이지 않았으면 그녀는 그런 전형적인 제 남성상에 반했을지도



모릅니다.







중 3 시절, 그녀는 제 인생의 전부였습니다. 그녀를 가지면 전 죽어도 좋았습니다. 그 이



후로 보상행위라는 충족 이유율적 법칙에 의거하여, 22살에 이르기까지 많은 여자한테 감



정없이 작업을 걸었지만 번번이 거절당하고 말았습니다. 내가 못생겨서일까요? 내가 여자



의 취향에 맞지 않는 비남성적인 인간이기 때문일까요? 지적인 인간은 여자에게서 결코 인



정받지 못한다는 쇼펜하우어와 토마스 만의 견해에 저는 적극적으로 찬동하는 바입니다.



이제는 돌이킬 수 없습니다. 저는 학문의 고독한 길을 걸어야 합니다. 저는 선비입니다.



으레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저는 가난한 예비 학자입니다. 저는 욕심이 많은 사람이지만



반대로 그 동전의 뒷면에는 지극한 생의 허무감이 새겨져 있습니다. 저는 외롭습니다. 저



는 삶이 두렵습니다. 죽고 싶지만 살고 싶기도 합니다. 저는 평생 고독했습니다. 평생 우



울했습니다. 평생 불안했습니다. 전 언제나 자살을 기도했습니다. 어린 시절에 괴롭힘을



당하며 죽음을 숙고했고, 아버지의 파산으로 인해 죽음을 숙고했습니다. 죽음만이 유일한



탈출구이자 내 본질을 우주에 환원하고 내 영혼을 구원이라는 파노라마로 도달하게 하는



계단이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을까요.







제 인생은 의미없는 하나의 과도기적 연속에 불과할지도 모릅니다. 제 인생은 위선과 가식



, 자기기만으로 점철된 파렴치하고 염치없는 비진정적인 그런 형식적 틀이란 이미지의 끝



없는 사이클에 불과할지도 모릅니다. 다람쥐가 챗바퀴를 돌듯 전 이 더럽고 추한 삶을 돌



아왔습니다. 저는 인간관계를 위해 제 모든 걸 바쳤습니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인간에 대



한 영원불멸한 불신과, 증오였습니다. 저는 고등학교를 마칠 무렵 한명의 개인이 되기로



결심했고, 실존주의의 탕아가 되기를 소망했습니다. 침잠하고 싶었고, 자연을 누구보다 사



랑했으며 고독이 제게 심어주는 참된 예지와, 자기본위의 최종완성을 이루게 해주는 그 유



착관계를 저는 동경했습니다. 저는 몇 년간 산에서 살다시피 했습니다. 산은 제게 계절의



변화에 따른 인생의 의연한 의지와, 제 안에 곧 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불가피하게 깨닫



게 해주었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그녀를 잊고 모든 세속적 욕망과 현세의 족쇄에서 벗어나



저만의 도를 터득했습니다. 그러한 도정은 세상에 대한 한에서 벗어나 불수不愁의 세계에



영원이 영면하는 힘겨운 과정이었습니다.







황보석 스승님, 나의 토마스 만이여, 나의 아버지여, 당신은 당위적으로 군자의 체질을 내



재하고 있으며 자신에게 실로 정직한 사람입니다. 정직한 문인은 드문 법이지요. 그러니



당신의 제자인 제가 마땅히 모럴리스트가 되야 마땅하지만 저는 한명의 배교자일 뿐입니다



. 제가 배교한 이데올로기는 중국의 현자들이 말한 인의입니다. 저는 인의를 깡그리 무시



하고 지식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여기며 젊은 날을 향유하고 있습니다. 저는 사이비 지



식인이며 기회주의자입니다. 저는 솔직히 문필가로써 앞에 놓여있는 가난의 길이 말도 할



수 없게 두렵습니다. 스승님, 전 학문에 소질이 없는 한명의 짐승같은 인간입니다. 제 본



질은 근본적으로 악덕과 증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저는 볼품없는 소인배입니다. 저는 세



속적 지식인의 자가당착이란 그물에서 종횡무진하는 개구리입니다. 저는 돈과 겉치장에 굶



주린, 여색을 탐하는 젊은이입니다. 저는 이 혼잡한 도시가 좋고 서구문화의 황홀경이 이



루 말할 수 없이 선망스럽습니다. 저는 동방의 물질적 비풍요, 채식주의를 경멸합니다. 인



간은 자고로 육질 좋은 소고기를 먹고 커피를 마시지 않고는 힘을 쓸 수 없죠. 저는 서방



세계 지향주의자입니다.







제가 3개월 동안 비교적 풍요로웠던 친척집에 기거하는 동안 전 환상, 지상이 곧 천국이라



는 인식을 괘념했습니다. 미국은 진정으로 광대하고 엄청나게 풍요로운 나라였습니다. 제



가 거주하는 집만해도 400평은 족히 되었습니다. 2층 집이었는데 그 더운 대륙풍 여름의



기후에도 무한정으로 나오는 에어컨은 저를 도취시켰습니다. 저는 하루 2끼는 고급레스토



랑에 가서 양고기, 소고기, 스시, 바닷가재, 킹크랩 등을 맛보았고 고모부의 벤츠를 타며



부러울 게 없는 여행을 즐겼습니다. 프랑스산 하겐다즈 아이스크림이 지천에 널려있었고



한국과 달리 고급시가를 피우는 사람들도 곧곧에 포착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제가 감탄했던



건 시카고의 도심이었습니다. 그 초고층 빌딩들의 숲은 저를 압도했습니다. 빌딩들은 구름



을 넘어 하늘 끝까지 올라가는 바벨탑과 같았습니다. 도처에 대형 리무진들이 들끓는 것도



하나의 진풍경이었습니다. 한국에서는 볼 수 없는 대형 리무진이 미국에서는 일상이었습니



다. 억만장자들이 이끄는 미국의 초자본주의는 신자유주의와 병치하여 미래 세계상의 전모



를 속속히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디즈니 랜드는 가히 환상적이었습니다. 우리는 기다리지도 않고 특별표를 끊고 바로 들어



가 난생 처음보는 최첨단 놀이기구들을 즐겼습니다.





집 밖의 깨끗한 잔디와 거대한 고목들과 그들을 비추는 황금빛 같은 햇살은 이곳이 지상천



국이 아닌가 하는 착각에 빠지게 하였습니다. 저는 코카콜라 클래식을 하루 8캔이나 마셔



댔고 게임기를 하면서 허쉬 초콜릿을 배가 터지도록 쳐먹어댔습니다. 각종 희귀한 과일 주



스들이 있었고, 이름도 모르는 고급치즈들과 베이컨들이 냉장고에 가득 채워져 있었습니다



.





고모부는 그 해 개인요트를 샀습니다. 가족들과 즐기기 위해서였습니다. 고모부는 본래 우



리 집에서도 돈을 꿔 갈 정도로 변변찮은 사람이었는데 빈털털이로 미국으로 이민 가, 사



회의 밑바닥인 웨이터 생활부터 시작해 기회를 잡았습니다. 95년 부터 2000년대 말까지 계



속된 미국의 초호황기에 힘입어 거의 벼락부자가 된 입지전적인 이민자였습니다. 아메리칸



드림을 성취한 부류죠. 그들은 낭비를 일종의 미학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소비를 다른



방식으로서의 자선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과소비는 일상이었습니다. 고가



물건 구입은 생활 미학의 또다른 형태소였습니다.





미국인들은 이타적이고 창의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항상 열정에 넘쳐 있었습니다.



저는 산책길마다 그들에게 되지도 않는 영어로 인사말을 건네면, 그들은 친절하게 화답하



였습니다. 아이들과 어른이 평등한 세상이었습니다. 나이에 따른 권력의 철폐, 동물을 존



중하는 시민들, 사람들마다 개개인의 다양성을 존중하는 사고방식은 저라는 아이를 극도로



매료시켰습니다. 저는 미국이 좋았습니다. 그 집이 좋았습니다. 그러나 학업을 위해 돌아



올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인천공항에 내리며 돌아온 그 순간, 흐릿한 하늘을 위시하



고 있는 후진적인 한국이 제 눈에 들어왔습니다. 38평의 제 집은 개집이나 다름 없었습니



다. 김치와 된장찌개를 보면 구토가 나올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한국에서의 세월이 지나갔고 전 다시 한국의 생활에 적응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내



중학교를 졸업하고 완전무결히 우울증의 세계에 입문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산에 간 것



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저는 그 이후로 물질에 대한 모든 욕망을 소거하기 시작했습니다.



오디오들을 팔아 치웠습니다. 전 무소유라는 생의 방식을 실천하고 싶었습니다. 저는 자연



인이 되고 싶었습니다. 산은 제게 끝없는 세계이거니와, 점증적인 사유를 가능케 해주는



광대무변한 장이었습니다.

















- 10장





이후 그는 펜을 내려놓고 피곤한 듯 고개를 푹 숙이고 잠시 졸으려고 했다. 그러나 그의



신경증은 그가 졸리면서도 잠에 접속하지 못하는 상태를 유지하게 했다. 사람이 졸린데 잠



을 들 수 없다는 현상을 체험하는 것이 얼마나 괴로운 지는 당사자만이 알 수 있다. 그들



은 마치 배고픈 데 밥을 못 먹고 똥이 마려운데 똥을 못 넣는 것처럼, 졸린데 잠을 이루지



못한다. 과학적인 측면에선 중추신경계[CNS]의 이상이다. 그러나 전체적인 입장에서 그는



단지 도를 따르지 못하는 불쌍한 중생에 불과하다.





도서실의 창문에는 어둠이 짙게 깔리고 있었는데, 마치 세계를 잠식할 듯 불안한 어둠이



었다. 그는 가만히 고개를 들어 그 어둠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적 시정을 이해하려고 노력



하고 있었다. 어둠에 견주어 도서실 안은 휘황히 빛나고 있었다. k는 여전히 고독 속에 침



잠해 있었다. 그는 고독을 숙명으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팔자였을까?







그는 앉아있는 창문을 맞은 편으로 바라보며 창문에 차가움이 새겨지는 것을 느꼈다. 건



조하면서도 의미심장한 차가움이었다. 쓸쓸함이 응당 고개를 들어 전적인 자의식을 비추어



준다. 그는 국가에 대해, 민주의 대의에 대해, 따라서 인간이 추구해야 할 생활패턴의 중



용지도에 대해 여물지 않은 수심에 잠긴다. 뭐라고 이 정부의 모순을 규명해야 할까? 남한



정부가 걸어가고자 하는 살얼음판의 연방에서, 그들의 입지는 어디에서부터 구축되는가?







저녁의 훌륭함은 나릇한 향취에서 다가왔다. 저녁의 비현실적인 향기, 저녁의 정감한 사물들, 그런 것들이었다. 저녁은 쏟아지는 비와 같이 비릿하게 지금을 지고의 혁혁한 순간으로 바꿨다. 다정다감하게 사물들이 주위를 두리번 거린 채 산재되어 있으며 밀려오는 어둠의 파도는 그들의 맨머리를 씻게 해 주었다. 비생산적인 작가의 늦은 오후에는 항상 권태가 모여든다. 사춘기라해도 마찬가지다. 권태란 다른 일에 몰두하여 벗어날 있다고 해서 벗어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렇게 깊이없는 감정 아니다, 권태는. 권태란, 오로지 새로운 것과 보다 진보적인 것과 상응하고자 하는 갈구감의 감정, 그것이 권태의 주요 명제다. 하여간 비생산적인 작가란 소년이라 해도 이상할 바는 없다. 이를 데 없이 아름다운 소년, 물론 그랬으면 좋았으려만 k는 못생긴 아저씨같이 생긴 소년이었다. 왜 권태 얘기를 하다 외모 얘기가 주된 화두가 되느냐? 궁금하기도 하겠지만 모든 분야는 서로 거미줄 치며 즐겁게 사는 것이 세상 원리기 때문이다. 그리 이상할 게 없는 거다. 모든 것이. 모든 것이 눈부시게 아름다운 것도 이상할 바 없다. 딴에는 권태로 인해 깊은 역겨움이 내면 깊숙이 배여 있더라도 그걸 관망하지만은 말자. 어쩔 떈 자기와의 협상도 필요하다. 어떤 의미에서 협상이라는 건 삶이란 시스템의 커다란 축이라 해도 무방하다. 예를 들어 k는 모래 알바를 나간다. 이건 피상적인 시스템의 지엽적인 저변이다. 예를 들어 k는 죽고 싶다. 이건 내면에 관한 자기 자신의 에세이의 공간이란 저변이다. 그런 것이다, 협상이란 건. 쉽지 않은 우리들의 게임이다. 그렇다. 삶은 일종의 게임이다. 그런데 그건 재생 불가란 일회성을 내포하고 있다. 또한 우리는 게임에서 표현하고 싶은 행위를 세상에서는, 엄밀히 말해 사회에서는 불법 행위가 되기도 한다. 그런 이유로 이 미묘한 은유는 딱 들어맞지 않는다. 인간 삶은 생각보다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협상은 게임의 한 방법론이다. 한 말단의 부분이다.



삶에 대한 이론적 잣대가 어디까지 성공 여부를 가늠케 하는 지는 k로선 의문이다. 구지 삶을 체계화하여 총체적인 흐름을 만드는 가운데 이론을 정립하고, 마침내 '인생 사상'으로까지 창재해 나갈 필요가 있을까. 의문의 여지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우리가 실재를 움직이고자 하는 남성성적인 욕망으로 인해 철학은 계속하여 끝도없는 진보적인 혁신을 해왔다. 오로지 더 나은 삶을 제시하기 위해서 많은 서구 철학자들이 문학가들이 우리들에게 사상을 전파했다. 그러나 그 사상이 오히려 우릴 더 망치는 경우가 많았고, 인도주의는 저

기 자본주의의 철퇴에 맞아 완전히 전복되어 버렸다. 필자가 유념하고자 하는 건 철학의 [존재이유]이다. 왜 우리는 철학을 하는가. 철학은 때때로 마르크시즘이미 파시즘 같은 극도의 외곬적인 풍토를 불러들였다. 우리 삶을 오히려 더 망치는 것같았고 유럽은 쑥대밭이 되었다. 그리고 현재에 이르러, 이 시대 초자본주의에 이르러 이념은, 그러니까 한때 원시시대의 종교와 마찬가지로 근대를 이끌었던 세상을 변혁시키는 최고의 에너지 철학은 무너져 버렸다. 보편성과 휴머니즘이 다시금 꽃피워 나고 에로티시즘이 전세계를 지배하고 있다. 참으로 골까는 세상으로 변해버린 지금에 와서 철학이 무슨 쓸모가 있고 문학이 무슨 쓸모가 있을까. 그것은 이제 실질적인 힘을 잃은 단지 유희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랭보가 한 말처럼 시 따위로는 세상을 바꿀 수가 없다. 그런 상념이 현실화된게 오늘날 21세기다. 이제는 아무도 시를 읽지 않는다. 문단에는 배굶는 사람이 넘치고 넘친다. 인문학 서적을 나라에서 지원해서 펴내는 식까지 진행되고 있다. 괴팍한 인문학의 현재진 행형. 이제 사람들은 인문학의 하나의 표식인 종교따윈 필요없다. 그들에게 필요한 건 현금, 섹스, 술, 담배, 맥도날드, 스타벅스, 백화점, 헐리웃영화, 연인, 프로작 등이다. 총체적으로 말해 개인의 자유를 가장 큰 가치로 여긴다. 문제가 바로 여기 있다. 그 개인은 책 따위는 들여다 보지 않고 돼지같이 헐리웃영화나 쳐보면서 팝콘을 씹고 있다. 게다가 오른쪽엔 팹시콜라가 꽉 차 있다. 현실이 이렇다. 참으로 한심한 작태이다. 어떻게 이들을 문예적인 인간으로, 감성깊은 몽상의 유희를 누릴 줄 아는 시인으로 만들 것인가? 이런 식으로 갔다간 진정으로 고고했던 우리들의 문화는 파괴될 것이다. 우리들이 먼저 각성하고 혁신해야 한다. 체 게바라가 말했듯 "혁명은 자기 안에서 시작된다.". 그런 생각들이야말로 k에게 있어서 진실이었다. 만약 아포리즘들이 진정으로 진실된 어구들이라면 아포리즘은 그자체로 진실의 광채를 품고 있다. k가 지키려는 문예정신은 그런 사변에 바탕을 두고 있다. 해보랄 때까지 해보라지. k는 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나라 젊은 사람들이 모두가 문학책을 읽을 날을 기약하며 저기 가만히 내리고 있는 달빛을 응시할 것이다. 제발 부탁이니 영지주의가 품어내는 광휘를 한껏 들어마셔보세요.



k는 문득 생각해본다. 왜 난 천민으로 태어난 건가. 왜 이렇게 가련한 운명을 가지고 세상에 피조되었나. 좀더 권력을 가진 인간이 될 수 없었는가. 그러면서 생각한다. 내 우울증은 내 본질의 유지가 파괴된 데서 오는 결과물이라고. 필사적인 문예에 대한 열정은, 능력없지만 욕심있는 마음에서 빚어진 거라고.



빌어먹을 이 삶을 지워버리고 싶다고 때때로 생각한다. 책을 읽어도 해결되지는 않는다. 아버지와 독립하고 이 더러운 양주를 벗어나고 싶은데 그럴 힘이 없다는 게 역겹고, 아버지를 죽일 수 없다는 불가해함이 양주의 쓰레기같은 교통과 함께 찾아든다, 매우자주.



요새 k는 다독가가 되었다. 빨리, 더 빨리 문학을 시작했더라면 뭔가 달랐을 텐데, 지금은 너무 늦어버린 게 아닌가 하고 자문하기도 한다. 사실 그게 정답일 수도 있다. k라는 존재가 독보적이 아니라는 데서 오는, 그 역겨운 시민성에 결부한 동화감에서 오는 구토감이 머리를 가득 채운다. '나는 속인과 다른 범인이다.' 젠장, 이렇게 될 바엔, 그러니까 이렇게 삶을 불행하게 살아왔으니 이제 좀 편히 특수한 대접을 받으며 살아야 하는 거 아닌가? 왜 불행은 불행을 낳는가. 고독한 생활도 이젠 질렸다, 사회에 나가서 뭔가 한자리 차지하고 싶다, 그러나 현실은 그게 아니었다. 세상 모든 역겨움이, 그 서글픈 환멸의 기운이 k의 뇌리 끝자락에 파고들어 나자신을 망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사소설이 명시하는 한가지 요체는 삶은 기본적으로 힘들다는 것이다. 돈 벌 구멍은 없고 더군다나 팔자까지 쌔다면 그의 인생은 더 역겨워 진다. 뭔가 자기만의 탈출구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책을 읽거나 황홀한 음악을 듣거나 글을 쓰거나 수학을 풀거나, 그럼으로써 자기만의 해방구를 모색해야 한다. 세상에서 가장 힘든 게 바로 돈 버는 것이라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우리는 누구나 돈을 추구한다. 돈을 목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삶을 영위하고 있다는 것도 거짓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의 제 1의 목표가 돈은 아니다. 돈이 물론 가장 주요한 우리 삶의 원소이자 에너지이지만, 가만 생각해보면 우린 아무리 기어봤자 중산층에 머물 뿐 평민 삶의 평상적 흐름을 관찰해보자면 그다지 치고박고 할 일도 없다는 말이다. 우리가 몇푼에 치고박고 하는 데 부유층들, 예컨데 상류인사들은 그 수십배 많게는 수억배를 챙기고 유유히 사라진다. 진정한 범죄자들은 그들이다. 마르크시즘이 주창한 사회 재분배, 그가 지금의 초자본주의 사회에 생존하고 있다면 어떻게 이 난국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그때와 꼭 같은 현상, 말하자면 부자는 더 부자가 되고 거지는 평생 거지로 남아야 하는 판에 박힌 인생. 그러므로 긴 노동시간으로 인한 못 가진 자의 삶의 예속을.



k의 아빠를 소개하는 데 있어 이 소설은 더욱 더 사소설의 궤적을 그리게 될 것이다. k의 아빠는 주식중독자에 2억 이상을 날린 인간쓰레기이다. 대개 얼간이들은 자신의 잘못을 후회하고 금방 잊어버리는 데 우리아빠도 같은 부류에 속한다. 이 얼굴 빨간 얼간이는 보통 한 주식만 같고 있지도 않은 돈으로 매수해 며칠 몇날을 기다리는 데 은행이나 대부업체에서 돈을 빌려쓰는 형태가 그 당혹한 도박 시스템의 기초를 이루고 있다. 이 멍청한 개미 한 명은 부자들의 먹잇감이다. 그래서 k는 투기로 벌어먹고 사는 부자들을 싫어한다. 특히 그중에서도 대량의 돈을 투기하는 외국인들을.



아버지를 비난해 봤자 집안에 침뱉기에 더할 나위 없겠지만 뿌리없는 이 집시같은 집안에 기대할 것도 없다. k는 홀로 커가야 하는 운명이다. 장남으로써 책임만을 떠않기는 싫다. 그러기에 내가 받은 건 아무것도 없었다. k는 집안이 망한 만큼 더 집요히 세상을 살아갈 것이다. 문학상에도 도전해 보고 아르바이트도 해 볼 것이다. 이렇게 거지같이 살 순 없다. 이렇게 형편없이 살 순 없다. 무슨 수를 써서든 이 거지같은 형국에서 벗어나야 한다.



문학가가 되겠다는 k의 꿈은 과거 우리 문학이 얼마나 팔렸는가 하는 지표를 보고 처참히 무너졌다. 우리나라 국민들의 문화 수준을 알 수 있는 계기가 된 것도 이것과 맥락을 같이 한다. 문학시장은 근데 그야말로 엉망인 걸 봐줄 수가 없다. 무라카미 하루키 같은 쓰레기 작가가 거물이 된 거 하며, 저질 일본문학들이 그 유수한 러시아와 라틴아메리카 그리고 아시아 문학을 하늘 가리듯 한 손으로 가려 버리고 당나귀 머리보다 멍청한 소비자들을 매혹하는 행태에 관해, 정말 토가 나올 지경이다. 그러면서, 모든 시대는 그 시대가 그 시대구나 하는 일종의 분별력이 갖춰진다. 모든 시대가 정말로 쓰잘데기 없다, 그러므로 인간의 삶도 결국 쓰잘데기 없구나 하고.



한국의 거장들이 빛도 못보고 세계문학시장에서 뭍혀져 있는 이 상황을 k는 인정할 수가 없다. 왜 자본과 제대로 된 문학이 결탁하기 이리 어려운가, 생각하며 껌을 씹는다. 바야흐로 잡문의 시대다. 진정성 있는 산문이 뭍혀지고 딱 독자 수준에 맞춘 지렁이 같은 글들이 터져나오고 있는 시대다. 이러다간 학술 서적들이, 특히 인문학 관련 학술서적들이 모두 폐기될 날이 올지도 모른다. 지금 현재, 순수히 책의 판매량은 늘어만 가지만 갈수록 논할 가치도 없는 폐기물들이 우리 눈앞에 펼쳐져 있다. 젊은 치기로서 이 서적 모두를 k는 인정할 수 없다. 이 서적들은 모두 폐기되어야 한다. 성공 관련 서적이 전인으로써 살아가는 독자들에겐 필요하지 않다.







억울한 기분도, 울분과 분노며 끓어넘치는 치기도 살아질 무렵에 바야흐로 나긋한 깨달음이 k를 스쳐지나간다. 나긋하면서도 자명성으로 가득 찬, 브로크백 마운틴의 강가보다 더 맑은 깨끗한 깨달음이.







k는 속으로 되뇌었다.



'첫번째 논지로서, 정부는 민심을 잃었다. 예로부터 민심을 잃은 나라 중 그 근본을 지킨 나라는 일찍이 없



었다. 청와대는 언론 조작을 통해 자신이 파생한 각종 실패들을 시민들로 하여금 우회시키



려고 한다. 강호순 사건으로 말미암아 경기도 일대에 경찰력이 쫙 깔렸다. 그 경찰력은 일



시적인 만상이요, 의미없는 겉치례이다. 남한이란 좁은 변방지역은 그 가세를 잃었다.





민주주의의 대의는 어디에 있는가? 부의 양극화 현상을 조장하는 체제를 지향하는 정부



가 어찌 민주주의의 참뜻을 주장할 수 있겠는가? 피상적으로는 자유주의이자 민주주의이다



. 그러나 가만히 주위를 둘러보고 이윽고 자신의 상황을 파악해보면 이것은 내밀하게 속박



되어 있는 또 하나의, 부르주아를 지축으로 상정되는 전제정치적 공산주의다. 해마다 바뀌



는 법이 무슨 설득력이 있으며 누가 언행일치하지 않는 위정자들을 따르겠는가? 강호순이



소수를 즉흥적으로 죽였다면, 우리 시대의 부르주아들과 권세가들은 기생충처럼 다수의 서



민의 등 끝에 붙어 서서히 그들을 도축하고 있다. 그러나 완전히 죽이지는 않는다. 그들은



냉담하다. 강호순처럼 사람을 즉시 처결하지 않고 살려두면서 고문한다. 남한의 서민은 언



제까지 권세가들의 노예로 존재할 것인가? 윗물의 법률과 도덕률이 이미 땅에 떨어졌거늘



아랫물의 형편성도 어찌 맑을 수 있는가? 세상이 탁할진저!





정부가 주축이 되어 이끄는 속세는 더럽다. 속세는 항상 선악과 명리의 상대적 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 한계성을 피력해왔다. 세상은 계속하여 분립되어 왔고, 사물과 체계는



지속적으로 미분화되어왔다. 이 복잡하고 혼란한 급변하는 세상에서 중생은 어디있는가?



그대는 어느 부분을 응시하고 있는가? 그것은 국지적인 것인가, 전체적인 것인가?



창세도 말세도 없다. 오직 공空적만이 우주의 흐름을 설명할 뿐이다. 남한이 무너지고



다른 나라에 편입되더라도, 그리고 그 다른 나라마저 역사의 물줄기 속에서 잊혀져 갈 때,



우리 역시 역사에 기록되지도 아니한 채 한줌의 무기체로 변모할 것이다.



두 번째 논지로서, 생의 무상성을 철퇴하려면 반드시 동기부여가 필요하다. 그러나 그런 유의 도전의식은 꼭 의지와 병립되는 건 아니며, 그렇다고 그들이 따로 다른 방향의 추이를 전개해 나가지도 않는다.

무상함을 인지하는 건 우리의 정신의 감각이고 그것은 나무를 응시하기 보다는 숲을 관망한다. 무상함은 이를테면 전체요, 일체이다. 우주가 지양하는 목표는 끝없는 카오스와 생성의 반복 사이클인데, 우리는 생성에 너무 큰 의미를 두고있다. 의의가 꼭 학문의 중심에 위치할 필요가 없을진저 왜 우리는 체계를 설정함과 동시에 일정한 패턴을 개설하여 거기에 파고드는가? 즉심즉불이라 하였다. 마음이 곧 부처인되 우리는 인위적인 시뮬라크르를 창조한 채 그것만이 철리哲理라고 개명하는가? 구도자는 본색이 유有에 집착하지 않으며 무를 탐구하는 데 오랜 공을 들여야 한다. 평생을 학문에 매달린 어느 현자가 자신은 결국 아무 것도 모른다고 말했듯이 진리를 찾으려 하면 끝이 없고, 진정한 진리는 침묵 속에서 함구된다. 청진한 생활이 곧 믿음이요, 진실하고 최고로 만족스런 생활이다. 욕망을 버리고 자기의 처지에 대해 만족하라. 어떤 처지에 있든 만족하면 그 자리에서 극락불토의 일가를 이룰 수 있다. 자고로 무상함이야말로 지고의 진리가 아닐련지.'











많은 이들이 눈앞의 이익에 현혹되어 원시遠視적인 이익을 창출해내는 하나의 거시성,



전체적인 면을 제창하는 패러다임의 구조를 파악하지 못한다. 그 구조의 기축을 점지하는



실재를 직관적으로 파악하는 자만이 천하를 얻는다. 요컨데 한가지 역설이 있다. 속세와의



인연을 끊는 자만이 속세의 복잡다기한 커넥션을 치밀하게 꿰뚫어 볼 수 있는 법이다. 복



잡다기한 커넥션, 영리 조직과 다른 영리조직간의 규합과 보이지 않는 거래며 결과적인 층



위로 설명할 경우 세상의 급변하는 흐름-인위의 자연성을 면밀히 포착하는 자만이 행위자



로써 이익을 얻을 수 있다.





k가 고개를 들고, 화장실로 건너가는 순간 또 예의 그 어린 소녀가 스쳐지나갔다. k는



기회를 놓치기 싫었다. 이것은 요컨데 찬스였다.



"저기 아가씨." 현숙한 기풍이 외면에서 잔잔히 흘러나오는 그녀. 그녀의 얼굴은 아주



귀여웠고, 그녀는 흰색 티셔츠와 넥타이를 입고 있었다. 소위 사립학교 학생풍의 패션이었



다.



k가 그녀 앞에서 말을 더듬으메, 그러나 그와중에 뜻이 있어 거침없이 말하였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선禪이라고, 음양오행을 내재하는 기의 응집



체와 모든 삼라만상의 혼연 일체의 중심에 위치하는 그것은 가라사대 무주의 본체를 만법



의 자성自性으로 본연하는 대도大道가 카오스를 주재하여 그곳에서부터 물리성을 띄는 유



有를 구성하는 순환적 줄기를 뻗어나가므로 만고의 불생불멸한 현리, 객체계와 현상계를



총괄하는 극치의 무수한 대비며 상대적 원리의 피안에 있는, 응당 관념적으로 유일무이한



자족하는 일종의 무상묘도한 화해체이자 무위의 경지에 안주하는 보이지 않는 핵심, 상서롭지 못한 무명無明과 공명스러움에 넋을 빼앗긴 번뇌들 중 그들을 구원할 유일무이한 계율 즉 빛나는 구도심求道心이라고 생각치 않습니까?"



아차, 문장이 너무 길었나. 어린 소녀는 그녀를 빤히 쳐다보다가 낄낄 웃어대고는 지나



쳤다.



k는 잠깐 생각해보았으며 순수무구한 저 어린 소녀 같은 이들에게 특별한 이론적 설법은



필요없다고 생각되었다. 그 어린 것들은 이미 직관적으로 도를 알고 있고, 그것을 아는 자



에게 해부하여 그 오묘한 이치를 가르치려들여도, 그들에겐 하나의 웃음거리 밖에 안 되는



것이다. 사람이 공기 속에 살지만 공기의 소중함을 자각하지 못하는 것처럼, 그녀가 선을



알아채지 못하는 것은 나름대로 적법한 원리가 있는 것이다.



소녀가 여자의 냄새, 소녀의 냄새를 풍기며 k의 이목의 도안을 방정히 채워넣었다.



어찌해야 할까. k는 갑자기 주눅이 들었다. 아찔했다. k는 단지 시인이자 문장가였다.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는 직장인도 아니고 당당한 사업가도 아니었다. k가 세



속에서 추구했던 것은 입신양명이었다. 최소한 k는 자신의 사회에서의 출세를 물심양면으



로 지지했다. 마음은 그랬다. 왜냐하면 k는 그것이 최상의 길이라고 부모와 친척들에게 배



워왔으며, 그를 이유없이 괴롭히고 험담하고, 그의 용맹함과 자주성을 시기하는 작자들의



목을 쳐 내는 것울 정당한 복수 그럼으로 인해 k의 위신이라는 그릇을 충일한 대의명분으



로 가득 채울 수 있는 유일한 지름길이라고 여겨왔다. k는 집안을 일으켜 세워야했다. 그



리고 언젠가는 여린 그의 마음에 큰 상처를 낸 역겨운 숙적들을 믹서기에 넣고 갈아야 했



다. 그리고 그 고깃핏물을 마셔야했다. 그래도 시원찮았다.



아니다, 아니다. 너는 옜날의 예술가들의 삶을 진정한 모범으로 여기지 않았는가? 부모



의 한계를 깨라, 핵가족의 한계를 깨라. 진시황도 죽었고, 루이 14세도 j.p모건도 죽었고



그들은 모두 우주의 시공에서 다만 공空으로 남아있다. 그들은 자신의 과분한 권좌 아래서



자신의 생을 제대로 즐긴 것인가? 그들은 자기 만족의 최대치를 하늘이 그들에게 주어준



도식으로 하여금 진실되게 이끌어냈는가? 인류가 무한대의 안락함을 경험할지언정 거기에



임하는 감수성의 공허란 언제나 미증유의 얼굴을 들어내는 관세음보살을 자기 방식대로 개



화시킬 수 있는가?



단순했다. k가 두려워하는 건 예술가의 빈곤한 삶이었다. 2000년 전에도 예술가들은 자



기 재능의 사회에서의 무용성을 한탄했다. 고대중국과 고대유럽의 시인들, 예술가들의 재



능은 단순한 기예로 받아들여졌다. 그들은 귀족들의 그림자가 되거나 가난 속에서 극히 빈



곤한 삶을 살았으며 항시 지인들의 도움을 받고 살았다. 당대 최고의 예술가들도 안빈낙도



하지는 못했다. 그 유명한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사상가 마르크스는 구둣장이보다 더한 가



난에서 살았다. 그들 개인은 한마디로 뼈까지 시리는 가난을 제물로 바쳐 자신만의 절대정



신을 확립했다.



지금이라고 다를 바가 없었다. 구도자, 예술가, 학자, 이론가들. 그들은 어느정도 집안



의 부가 충족되지 않으면 늙어 죽을 때까지 추워 떨리는 뼈를 잡고 살아야 한다. 거기에



진리나 심미안이 무슨 가치가 있는가? 인간적인 생활도 영위할 수 없는 현실 속에서!





현시대의 그들은 모두 그러한 딜레마에 봉착해있다. 고상한 정신을 추구하나, 그 이면에



는 피를 토하는 생활에 엄존해야하는 악마적 운명이 숨겨져 있다. 고상한 정신을 버리고



사회생활에 섞이려 해도 그것은 그의 본질에 부당한 일, 의미없는 생지옥이다.







k는 다시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책을 꺼내 읽었다. 이제 달이 떠오르는 저녁이



었다. 집으로 갈 시간이었다. 현세의 미래에 대한 근심과 의문을 모를 공허가 그를 잠식했



다.



창밖은, 새까만 어둠 뿐이었다.





- 11장



존망이 아로새겨져 복잡미묘하게 휘몰아치는 검은 하늘을 보며, 동시에 그 검은 하늘에

서 어떤 마성적 기운의 손이 뻗쳐나와 자신에게 다가온다는 섬뜩한 느낌을 받을 때부터

k는 이 도서실의 외관이 왠지 진부하다고 느껴졌다. 그리고 이곳에서 자신이 무엇을 행하고

무엇을 사유해야할지 자신만의 뚜렷한 전위의식이 서지 않았다. 하여 그는 도서실을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 가져온 작은 가방을 어깨에 짊어매고 오랫만에 주지육림의 화찬 속으

로 입문할 생각을 하니 마음까지 황홀해짐을, 그는 감지했다.



그래, 어차피 예술가들은 제 명에 살지 못한다. 제 명에 살다 죽는다면 그것은 속인에

불과한데 범인들이 왜 그러한 자연의 이치에 따라야 하는가? 항우는 전쟁에 패배하여 용맹하게

자신의 목을 베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늘이 자신을 버렸음을 직시한 그는 그렇게 범

속히 생을 마쳤다. 마찬가지로 현대에는 커트 코베인의 권총 자살이 유명하다. 그가 앓고 있는

정신의 고통이 무엇이었기에, 24시간 마약에 취해 있으면서도 정신줄을 놓지 않는 그의 강건한

의지에 깊이 탄복할 따름이다. 그는 불꽃처럼 화려하고 휘황하게 타들어가다가 꺼져버렸다.



k는 다시 시내의 어두컴컴한 길가를 걸었다. 사람들이 있었고, k의 눈에 그들의 삶은 남루하게

만 보였다. k는 이 소도시가 자신에게 어떤 의무를 부여하고, 또 거기에 합당한 자율적인 의지를

투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k는 철학도였다. 철학은, 최소한 인간의 철학은 언어로부터 상징된다고 정정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k는 항상 환청과도 같은 미혹에 시달려야 했다. 그것은 언어가 철학의 단순한 도구인가 아니면 철학 그 자체인가라는 명제였다. k는 생각했다.



'중국의 고승들은 불립문자라 하여 언어의 전달성에 주목했지, 서양 철학자들과 다르게 언어의 귀추에 주목하지 않았다. 손은 달을 가리키는데 달이 중요한가, 아니면 달을 가리킨 손이 중요한가? 비트겐슈타인 같은 오스트리아의 언어철학자들과 인도와 중국의 철학자들 간에 명확한 차이가 이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로 세계를 구축하려 하였다. 그러나 반대로 동방의 박사들은 언어를 도구로 우주의 섭리를 이해하려 하였다. 언어는 단지 연장에 불과했다. 오스트리아 학파들 그리고 현대철학자들이 선호하는 언어의 철학이 옳은가 아니면 스님들의 불립문자가 옳은가 섣불리 판단할 수 없는 건 내가 부족하기 때문이리라.



언어를 사용하여 일종의 도를 닦는 정진행위를 기사하고 싶었다. 많이 읽는 사람과 많이 생각하는 사람, 이 두가지가 병립할 수 없다는 견해에 대해선 필자도 찬성한다. 나는 후자에 속하고 지금껏 그렇게 살아왔다. 필자는 생각은 많았으나 다독가는 아니었다. 나는 언어를 사랑했으나, 언어의 내막에 있는 다의성까지 에두른다는 생각은 해보지 못했다. 언어의 대대적인 구사란 천재성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는 장대한 작업으로 깊은 수련의 경지에 이르러서야 훌륭한 문장과 사상을 완성시킬 수 있다.



단어의 갯수가 시간이 흐를수록 늘어나고 있다. 갈수록 인간문명은 복잡해지고 거기에 각개의 의의를 부여할려면 가없는 언어가 필요하리라. 언어는 진보하는데 비해 어쩌면 인간의 문화는 저속해져가는 듯하기도 하다. 단어의 갯수가 늘어나면 작가나 저널리스트로서는 더욱 복잡한 게임에 참여하는 게 된다. 그러나 일반인으로서는 큰 부담에 다름 아니다. 일반인들이 사용하는 단어의 갯수가 평상시 남한을 기준으로 5천개라면, 전문 작가나 학자가 사용하는 단어의 갯수는 무려 25만개나 된다. 엄청난 차이다. 그것이 혹여 정신력의 차이라고 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명확한 결론이 떠오르진 않았다. 행여 그러한 결론이 있다고 해도 k는 수줍은 처녀처럼 다소곳이 수긍할 수 없었으리라.



길가는 휭하니 종적이 끊어질 참이었다. k도 정신줄을 놓고 편안한 안정상태에 들고 싶었다. 열반, 심지어 죽음이 진정으로 해탈하는 길이라면 그렇게라도 그것을 얻으리라고 다짐했다. k는 안식을 취하고 싶었다. 너무 오래 산 것 같았다. 이제 정녕 22세이지 않은가? 선사시대였으면 평균수명의 끝자락에 있는 나이인 것이었다. 계속하여 사방에서 옥죄어오는 상념의 벽을 넘어 구원의 길에 경도되고 싶었다. 초탈이 영원이라면 그 영원에 녹아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측백나무들은 소리없이 그의 귀에 알 수 없는 소리를 속삭여댈 뿐이었다.





- 12장



나무들이 정적에 휩쌓여 지적인 자기방기의 모순을 추상적으로 연쇄하고 있었다. 나무들의 흔들림이 그것이었다. 그것들은 자기 존재의 의의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서로 연쇄 작용을 하는 것 뿐이었다. 그러나 k는 뭐든 간에 극치에 이르지 않는 사소한 물리적 또는 영적 작용들은 간과해도 좋다고 판단하였다. 그에게 그런 건 상관없는 나이였기 때문일까.



걸음을 내딛고, 또 한걸음, 두 걸음, 세 걸음, 이렇게 연속적으로 사랑의 고리의 넋을 돌이켜 보는 시간이 이어진다. 한걸음, 두걸음, 세걸음. 내가 부족하여 그녀의 남자가 되지 못하였고, 그러한 나의 패배는 결코 회복되지 않을 터이다. 한걸음, 두걸음, 세걸음.



외모가 떨어지면 여자에게 진실된 사랑을 얻을 수 없다. 섹스어필은 재력과 권력의 힘도 능가한다. 여자는 극히 성적인 동물이다.



알파치노는 말했다. 여자는 삶의 모든 것이라고.



k의 생각에 인간은 번식을 목적으로 자기보존을 추구하는 포유류다. 성욕, 리비도는 인간 인생의 핵심이다. 인간은 자신의 삶을 위해 살아가는 게 아니라 후손을 되도록 많이 생성하고자 하는 노력에 의거해 실존한다. 그런데 인간이 사회란 이름의 무리를 이루고 진보하면서 한 가지 문제점 즉 모순이 생겼다. 인간의 외모 즉 표면적인 성적 능력을 바탕으로 약육강식으로 수컷이 암컷을 취하는 방식이 구조적으로 바뀌었다. 혁신적으로 남자와 여자는 일인이 한명의 이성과 접촉할 수 없다는 제도권의 체제에 수긍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남자의 [지적 능력]은 이성을 선택하는 데 있어 중요한 요인으로 등극하였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k는 22살의 청년이다. 나름대로 굉장히 지적인 청년이라 생각한다. 지적인 게 k의 포인트요, 매력이며 본질이다. k의 외모는 보통이다. 추하지도, 잘생겼지도 않다. 그러나 여자친구가 없다. 이 범박한 사실을 실질로 하여 지금부터 여성의 한심한 성욕에 관한 도식을 형상화하겠다. 그런데 대한민국의 여성들은 근대의 사고방식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게 대한민국이 중진국인 이유다. 요는 한국의 여성들은 남자의 외모 즉 섹스어필에 약하다. 여성도 성적인 존재라는 것에 이의는 없다. 여성도 포유류니까. 그러나! 여자들은 남자의 한시적인 측면의 이익 밖에 보지 못하고 거시적인 성질을 포착못한다. 우리나라 여성은 딱 근대의 여성이다. 머리는 깡통에 남자의 얼굴과 키 밖에 보지 못한다. 요약하자면 남자의 육감적인 관점만을 자신의 성적 욕구의 목적으로 추구한다. 여자의 성적 욕구의 방향성은 더럽다, 멍청하고 추하다.



어린 여자애들아! 훤칠한 외모의 남자는 너에게 예쁘고 건강한 아기를 나아줄 수 있단다. 그러나 그 남자의 정신의 깊이와 사회적인 상대적 처세, 곧 능력은 너의 인생의 속성을 바꾼단다. 소녀여, 우린 인간이야. 번식을 위한 다리가 아니란 말야! 넌 깨달아야 돼. 남자의 지적능력이 얼마나 광휘롭고 탐미로운 건지. 남자의 진정한 아름다움이며 멋의 미학은 그의 지적능력에 있단다. 그의 학제적인 성향 이를테면 지성이야말로, 그의 현학적인 유머감각이야말로 얼마나 현묘하게 사랑스러우냐. 그대 약한 여자여, 난자로 남자를 보지 말고 두뇌와 심장으로 그를 바라봐. 그럼 정적인 진리, 너의 삶에 대한 진리를 알 수 있을거야. 너의 남자를 통해!





난 모르겠다! 내가 왜 여자친구가 없는 지 이해하지 못하겠다. 이 근대를 극복 못한 한국의 썩은 사회구조는 정말 훌륭하고 난잡하다. k는 고독하다. 평생 고독했다. 나에게는 남자 친구들이 필요없다. 난 내 친구에게 의형제라고 말하면서 술을 마셨지만, 솔직히 남자란 존재는 친구를 협력자 내지 조력자의 관계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것이 정자와 xy염색체의 본성이다. 남자에게 우정이란 없다. 그것은 '사실'이다. 설령 남자의 감수성이 친구를 요구한다고 한들 사회의 편협한 체계는 그를 수용못한다. 단지 남자들의 사교는 일종의 경쟁활동이다. 그런 면에서 남자와 여자의 로맨스는 한줄기 진실된 햇살이다. 이른바 소울메이트가 성립된다.





소녀들이여! 남자의 유기적인 지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한 너희들에게 현대는 없다. 모더니즘의 도도한 흐름은 한국의 문화를 한층 진보시킬 것이다. 한국 여성들에게는 혁신이 필요하다. 섹스어필에 흔들리지 마라! 원나잇 스텐드는 그만! 머리에 든 게 없는, 실재적으로 말하자면 교양이 없는 여자들은 아기를 낳는 기계에 불과하다. 종족을 보존할 수는 있지만 그것 뿐이다. 이미 지구는 인간이 지배했고 모든 종은 멸종했다. 이제는 인간과 인간간의 파워게임이다. 여자여! 그대 약한 여자여! 보지와 유방으로 남자를 보지 말고 보다 우월한 뇌로 남자를 보아라. 만약 아니라면 우리의 성적 문화는 필연적으로 퇴보할 수 없다.



그러나 전적으로 여자는 무죄다. 문제는 인간이라는 역겨운 포유류의 원초적 본능의 역학관계에 있다. 한심한 인간이여...





k는 문득 절에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 13장



시내의 혼잡함과 분방함은 저녁 12시가 지나도 여전하다. k에겐 이러한 것이 생경스럽게 여겨졌다. k는 시내에 나가는 일이 드물었다. 그러니까 이번 시내 기행은 함흥차사 격인 것이었다. k가 보통 하는 일은 집에서 책을 읽고 받아들이메 사유하고, 최종적으로 글을 쓰는 일이었다. 사색이 하루의 모든 시간을 잡아삼키는 경우도 있었고 어쩔 때는 끊임없이 글을 써내려가기도 했다. 특별한 경우도 있었는데, 그것은 벽을 보며 마치 달마대사와도 같이 참선하는 일이었다. 참선은 모든 잡념을 잊고 한가지 뚜렷한 선사상에 초점을 맞추게 해주는 정도正道였다. k는 이 분야에 신참내기가 아니었고 완만하게 자신을 다루는 방법을, 그리고 자신의 정신병을 조절하는 자기만의 방식이 있었다. 허나 약물에 의지하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k는 항우울제 팍실을 무려 87.5mg을 먹고 데파코트도 600mg, 할시온과 암비엔도 먹었다. 자낙스도 먹었으며 이러한 것들이 k의 발작을 어느정도 지켜주었다. k가 가장 두려워 하는 것은 불면증이었으며 k의 할머니도 k와 같이 심한 불면증을 앓고 있었다.





k는 이주 전만 해도 의정부 성모 대학 병원의 9서 병동에 있었다. 입원 경험이 올해로 4번 째로 이 바닥 훤히 꿰뚫고 있는 k에게 또 한번의 재입원은 환멸의 극치를 안겨주었습니다. 뭐라고 해야 할까... 독자분들은 약과 생활상에 대해 너무 크게 대비하여 생각하고 그런 사고방식에 입각하여 약을 선별하려 하지만, 현재의 약은 환자에게 크나큰 영향을 미치지는 못한다고 k는 생각했다.



k는 전문가는 아닙니다만 뇌의 메커니즘의 구조와 정신과 약의 내용에 대해선 어느 정도 능통했다고 자찬한다. 그럼에도 k같은 사람들도 패쇄병동에 들어가서 보호사들과 간호사들, 그러고 영악한 주치의들에게 고문당하여 이윽고 정신병원이 감옥이라는 이정표적인 생각이 들었을 때 비로소 입원에 관해 후회를 하기 시작한다.



k는 약을 임의대로 제외시키지는 않았다. 항상 전문가인 의사의 심중을 읽고, 그와 함께 합의하여 결과를 도출해낸 처방전을 갖고 약을 지었다.



그런나 정신과 의사가 우수하다고 꼭 좋은 것만은 아니듯 k는 자기 안의 딜레마를 극복하지 못했다. 약이냐 현실이냐. 소유냐 존재냐.



또한 현재의 대학병원은 썩어있었다. 제네릭을 절대 처방하지 않고 무조건 정품 약만 권하는 현실은 일견 검은 돈의 냄새를 풍긴다. 일종의 담합행위라고나 할까. k는 대학병원에 신물이 나서 이제 동네 괜찮은 중견 병원으로 옮길까 계획하고 있었다.



2주 간의 지옥같았던 병원 생활이 환기된다. PR[줄로 환자를 결박하고 마취제를 투여하는 것]만 두 번 당하고 흥분하여 주치의 코를 주먹으로 찍었던 기억도 나고... 이경욱 교수가 현재 제 주치의이지만 그렇게 믿을 만한 사람은 아니라 생각된다.



쎄로켈이나 자이프렉사, 리스페돈, 아빌리파이가가 현재 정신분열과 조울증 업계의 선두에 서 있다. 원래는 자이프렉사가 거의 장악했던 그 시장에 다른 약물들도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이었다.



약도 강제로 먹이고 전화와 컴퓨터도 못 쓰게 막으며, 보호자가 마음만 먹으면 합법적으로 감금시킬 수 있는 게 현 정신병원의 실태인저 어찌 입원을 다시금 고려할 수 있으랴.





k는 불면증의 시간 동안 학문을 수련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야말로 합당한 도리였다. 시간을 쪼개고 쪼개도 모자라는 게 우리네가 참인생을 즐기는 길이 아닌가. 불면증 환자라면 그 시간에 어떤 투자라도 해야했다.



k는 긴장감을 자주 타는 성정을 지녔다. 그래서 사소한 일에도 최악의 상황을 연상하고, 조그만 징조에도 불길함을 느껴 제대로 된 인간생활을 영위할 수 없을 정도였다. 길가에선 모든 사람이 자신을 보는 듯한 착각조차 느꼈고, 산다는 것 자체에 대해 심한 공포심을 느끼었다. k의 삶은 고난의 연속이였으며 그것은 외면적으로나 내면적으로나 마찬가지였다.



까페는 아까와 그대로 오색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k는 문을 열고 거기에 들어섰다.





k는 아까 다녀갔던 예의 그 까페에 들어가 설치된 전용 개인 컴퓨터를 키고 자신이 쓴 며칠 전 쓴 의학 산문을 다시 재단해보았다. 내용의 취지는 정신과 약물에 대하여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일깨우려는 것이었다. 내용은 이러했다.







1978년 무렵 유럽에서 시탈프로람이라는 세로토닌제흡수차단제[ssri] 계통의 약이 유럽인들에게 만약통치약으로 군림하고 있었다. 잦은 소화불량, 이유없는 신경성 통증, 만성 우울증, 불안과 초조, 권태, 걱정과 근심, 과잉행동장애, 피해망상증, 사회공포증, 편집증, 분노중독증, 집중력 결핍장애, 노이로제 등을 앓고 있는 대다수의 심약한 사람들에게 이 약은 하나의 센세이션이었다. 이어서 미국에는 제약회사 릴리사가 고혈압약으로 개발한 '프로작'이 우울증 약으로 시판되어 사회의 정초에 직접적으로 개입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80년 대 중반 프로작은 거대한 북미는 물론 케나다까지 아울러서 아스피린과 맞먹는 유행으로 떠오른다. 대부분의 주부들이 자신의 권태감과 우울감을 프로작이라는 희망의 표식에 걸고 정신과 의사들에게 처방받았고, 학생들은 정서불안과 과잉행동, 집중력 결핍이라는 꼬리표를 단 채 부모들에게 이끌려 프로작을 처방받았다. TV광고에서는 연이어 프로작이 게시되었으며, 대거의 언론과 책들은 프로작의 위력에 대해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유행곡들, 소위 팝송들에도 프로작을 복용하고 난 뒤의 도취감에 대한[물론 프로작은 먹는 즉시 도취감을 불러일으키지는 않는다. 그리고 그 느낌을 꼭 도취라는 악스러운 뉘앙스로 표현하기가 꺼려진다. 마약도 아닌 치료제에.] 감언이설을 늘어놓는다.

그에 고무되어 사업가들, 예컨데 기업 중역들이나 세일즈맨까지도 자신의 스트레스를 일종의 장애로 여기게 되고, 혹은 잡지에서 프로작이 스트레스를 완화시켜준다는 논리에 설득당해 아침에 꼭 한 번씩 당시 하나에 한화로 1700원 씩 하는 프로작 3~4캡슐을 복용하게 된다. 그 시대는 완강한 종교인을 제외한 거의 모든 분야의 사람들이 프로작에 손을 대었다.







마침내 릴리는 천문학적인 돈방석에 앉게 되었고, 다국적 기업으로 거듭다게 된다. 그 조그마한 영세기업이 프로작 하나로 워싱턴 정가에 마수를 뻗치는 권력과 동시에 3000억불의 규모의 제국을 건설하게 된다. 그 이후 월스트리트의 금융권은 의학시장에서 항정신시장이 큰물임을 깨닫고 늦은 감이 있지만 돈을 투자하게 된다. 많은 군소업체들이 탄생했고, 91년에 개발되어 한해 북미 총 약제처방순위 2위를 기록한 [졸로푸트]와 92년에 개발되어 프로작에 비해 22배 강력한 세로토닌제흡수차단효과가 있으며 현재 한국 정신과 의사들이 임상에서 최고의 약으로 점철하는 [팍실], 93년에 개발되어 ssri의 개념을 이어 snri라는 약간 다른 개념을 제시한 [이펙사- 그러나 이것 역시 세로토닌 재흡수 작용이 90%라 전문가들은 ssri의 범주에 끼어넣는다] 등이 이어서 출시되었다. 그리고 2000년 드디어 팍실보다도 강력한 약 [렉사프로]가 출시된다. 렉사프로는 현재 미국을 비롯한 전세계에서 리피토[고혈압제] 다음으로 많이 처방되는 약으로 팝송과 미드 등에서도 그 이름이 자주 거론될 정도로 또다른 유행을 일으키고 있다.









SSRI계, 이른바 프로작은 MDMA[마약 엑스터시의 학명. 주로 CNS-중추신경계에서 세로토닌에 강렬한 펌핑 작용을 하면서, 코카인에 비해 도파민을 50배 선택적으로 재흡수차단하고, 노르아드레날린도 폭발적으로 증가시키는 신종마약. 암페타민 변환체로 약한 환각작용이 있는 게 특징]와 달리 세로토닌을 K+와 NA+이온의 기저에서 내성없는 세로토닌 재흡수[reuptake] 작용[inhibitor]을 일으킨다.







오래 전 어떤 박사의 글을 읽은 걸 여기 나열한다.







브룩하이머 박사는 말한다. 우울증이나 불안증, 노이로제 환자 뿐만 아니라 집중력이 좋지 않은 사람이나 매사에 부정적이고 적대적인 사람들, 이를테면 긍정적인 의식이나이 유머감각이 결핍된 일반인들도 SSRI계통의 약들에 이익을 볼 수 있다. 졸로푸트나 프로작은 한 개인을 긍정적으로 만들어 주며, 활기차고 분별있게 재편해준다. 예컨데 뇌의 배선을 합리적으로 재편한다.









필자는 우울증 약과 상호 연관된 연구결과를 많이 지켜보는데, ssri계통 약물이 뉴런을 재생성한다는 소식을 접했다. 한마디로 인간의 뇌를 진화시켜준다는 얘기였다. 원숭이를 실험대상으로 한 거라 그 준거가 명확하지 않다. 글쎄 요즘의 연구결과는 대부분 제약회사에 의해 날조된 게 많은지라...







- 주의 : 강남에선 현재 머리가 좋아지는 약으로 메칠페니데이트[이하 시판명 리탈린, 혹은 콘서타]를 쓰는데 이는 그닥 추천하고 싶지 않은 행동이다. 메칠페니데이트는 커피와 다름없는 중추신경각성제이다. 다만 커피와 달리 직접적으로 뇌를 자극하여 도파민과 노르아드레날린의 양을 끌어올려 순간적으로 지적인 능력이 올라가고 집중력이 향상되는 걸 느끼나, 그것은 각성제에 의한 한시적인 효과이다. 마약이라고 상정할 수는 없지만[왜냐하면 마약 수준까지 강력하지 못하기 때문에, 마약이란 사회에 피해가 가야하며 개인에게 치명타가 되는 수준에 한해야 한다.] 메칠페니데이트에서 한 단계 올라간 각성제 종류인 닥세드린[메칠에 비해 4배강력]과 메스 암페타민[일명 히로뽕, 미국에서는 의료용으로 현재까지 사용 중이다.]은 마약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CODA : 90년대 초엽과 2009년 초까지 의약시장은 닷컴시장이 무너지든 일본의 주가와 지가가 수직으로 하강하든 자동차 업계가 초면에 몰리든 개의치 않고, 마르지 않는 돈의 우물로써 나날이 거대해져만 갔다. 현재 제약시장은 실로 엄청난 규모이다.[항정신약물 업계는 이미 마약 시장의 규모와 비견조차 할 수 없게 되었다. 합법이 불법의 자금원을 능가한 것이다.] 우리 생활에 면면히 뿌리내려 있고 우리 생활에서 약을 피해갈 수 있는 개인이 있을까? 이제는 우리의 뇌까지 약에 맡겨야 할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 앞으로 향후 수십년 내에 우리의 뇌는 약의 지배를 받을 것이다. FDA는 한 정부만큼 규모가 커진 다국적 제약회사들에 점거당해 신약의 허가를 눈뜰 새도 없이 내주고, 소비자들은 신약의 홍수 속에서 발디딜 틈이 없다. 이미 병원은 서비스업이 되었고, 엘빈 토플러 말대로 의사의 권위는 무너졌고-의사는 일종의 마케터가 되었고, 의료 업계는 하나의 시장이 되었다.



그러나 어쨋든 우리는 우리의 생명과 미래를 의료업계에 맞길 수 밖에 없는 운명이 불가피하다. 이제는 노년을 편하게 해주는 차원이 아니라, 우리의 생활력 자체를 향상시켜 주는 데 그들이 힘을 쏟아붓고 있기 때문이다.







글은 이렇게 끝났다. k는 중추신경계 약물에 관심이 있는 정도가 아니라 그 약들이 그에겐 생명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그 약들의 추이의 전개 중의 하나하나가 그에겐 커다란 사건이었고 이렇게 장황히 약물에 관해 객관적으로 일가를 이루는 것에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빨리 신약이 개발되고 들어와야 k가 편안해질 수 있었다. 이제는 전쟁이 신약의 개발의 계기가 되는 게 아니라 자본이 신약의 개발을 빠르게 주도하고 있었다.





k는 밤의 커피를 싫어하여 프랑스산 탄산수를 시켰다. 가격은 3천원 상당이었는데 맛은 꽤 괜찮았다. 레드레몬 맛이었고, k가 문득 상상하기에 레드레몬이 세상에 있으면 얼마나 살맛나는 세상이 될까 반추해보았다.



레드레몬의 향과 과분한 탄산의 자극은 k를 극락의 세계로 인도하고 있었다. 치즈크림을 바른 베이글도 먹어줄만 했다. 젊은 여자들이 종횡무진 자신들이 표면적으로 표방하고 있는 외모예찬에 관한 단적인 거부의 극단을 피하고자 수다를 떨었다. 억지스러운 점이 없지 않았다. k는 그에 신경쓰지도 않고 베이글을 씹고 소다수를 마셨다.



가히 까페의 풍경은 고흐의 그림 [까페 테라스]를 연상시켰다.







- 14장



곧이어 골목길로 접어들었고 거기에는 호혜적인 환상이 침전해 있었다. 사실 이 거리를 걸으며 느낀 거지만 개인적인 사상이나 이론체계들, 거기에 보태어 자신의 모든 소유물들은 그것 앞에 가치가 없었다. 그것이 뭐냐하면 로맨스적인 사랑이었다. 그랬다. 고원高遠한 그가 간직하고 있는 사랑은 그만의 것이었다. 천인합일이라고 그 무엇도 공노할 필요가 없었으되 본디 거대하면 거대했지 값싼 감상은 아니었다. 천천히 도시가 밤이 내리는 가운데 빛을 발하고 있었다. k는 집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러므로 환상에 빠져들었다.



그녀, 그녀가 그저 눈앞에 흔들리는 매화꽃처럼 아련하기만 하다. k가 사랑하는 자는 누구인가? k는 누구를 향해 마음을 열고 있는가, 혹은 주고 있는가. k의 모든 초점을 사로잡는 사람은 그여자, 마지막으로 남은 다른 여자와는 똑같지 않은 사랑, 바로 그의 선생님이었다. 선생님만이 그를 평안의 무지개를 건너게 하고, 무한한 쾌활함의 원천이 된다. 선생님을 놓쳐버리며 다가오는 쓰라린 슬픔을 그 어느것이 해결해주랴. 학창시절이 포함하는 원결을, 폐부가 찟어지는 듯한 그리움의 비명을 선생님은 알고 있을까? 숙세인연에 k와 선생님은 지척으로 맞닿아 있는 것일까? k는 그렇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k가 아리따운 망중한에 빠졌을 때 뒤에서 따라오는 불량배들이 있었으니 이들은 소위 말하는 아리랑 치기를 하려고 k의 뒤를 전시부터 밟고 있었다. k는 뭔가 낌새를 눈치챘으나 그로선 달리는 것 외엔 도리가 없었다. k는 그러나 달리지 않았다. 이것도 뭔가 우주가 자신을 평하는 징조의 하나라 생각했고 말하자면 자신의 운명이라 생각한 것이다.



k는 뒤에서 쫓아오는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선생님의 모습을 도제하고자 했다. 새로운 모습으로 자신의 학창시절을 재단하고, 따라서 과거를 탐닉하지 않은 채 합리적인 사랑의 모순을 자신의 이상으로 함양하는 일이었다.



그러다 갑자기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뒤에서 무언가가 쾅, 하고 결국 사방팔방에서 어지러움의 잔재가 흐물거리다가 의식을 잃고 말았다. 누워있는 k의 머리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고 불량배들은 그의 주머니를 뒤지기 시작했다. 만원짜리 몇장을 쥐어들고 버스카드와 체크카드는 건들지도 않은 채 그를 길가에 버려두고 간다. k의 머리에서 흐르는 피의 풍경을 다른 사람들은 그저 방관할 뿐이었다. 누가 k에게 삶을 권면했으랴. k는 죽어가면서 자신의 갓난아기 시절과 유년기, 학창시절, 그리고 지금의 모습을 누누히 바라보았다. 당연지사 인생 무상하고 무의미한 것이 아니던가. 슬픔만이 한가득 공허의 끝을 메운다. 선생님의 얼굴이 그의 기억 조각조각에 아로새겨져 있다. 드디어 k는 죽음으로써 초탈의 경지에 다가가고자 한다. 그가 세속의 고통을 잊고 열반하고자 하는 열망은 단지 사랑을 기리는 슬픔에 불과한 걸까. 그는 무로 변환되데 시작의 시금석으로 돌아가고자 한다. 이내 죽음이 그에게 강림하였다. 모든 게 없어진다.



도시의 소음이 까마득하게 울려퍼진다. 어둠은 더욱 짙어져 어지러움 속에 어둠이 사뿐이 깃든다.













에필로그



의미없는 하루하루의 일상이 평상이다. 그녀는 무의미 속에서 어떠한 의미도 간취하지 못한다. 오직 무상심만이 삶의 한가운데에서 잔존한다. 그녀가 이태까지 가르쳤던 학생들은 수없었다. 그러나 그녀가 기억하기에 자신을 가장 곤혹스럽게 했던 학생은 유일무이하게 한명의 사춘기 소년이었다. 그녀에게 그는 벅참에 육박하게 만들었고, 그것은 회환으로 변질돼 다가오는 것이었다. 오직 그의 천진난만하게 웃는 모습만을 소중히 간직하고 싶었다.



마지막에 단 한번만 그에게 가르침을 내리고 싶었다. 나는 잘 있다고. 그리하여 과거와 미래의 양상을 구색鉤索하지 말고 현재에 충실하라고. 나는 영원히 너를 기억하겠노라고. 그것이 곧 현재의 진행이며, 그것이야말로 곧 진실이라고. 언제나 너 자신을 믿으라고.





청진한 향기가 공기 중에 베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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