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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소설] 시내 1차 퇴고본-꾸지람 달게 받겠습니다.
자유게시판 > 상세보기 | 2009-02-27 00:2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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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수   969

제목

[자전소설] 시내 1차 퇴고본-꾸지람 달게 받겠습니다.

글쓴이

박두호 [가입일자 : 2003-12-10]
내용


이설 : 문학동네가 또 왔습니다. 5년치를 신청했는데 소설 응모하면 메리트가 있겠죠?

문학동네 신인상에 도전하려고 합니다.[아무래도 그 위 단계는 망신만 당할 것같습니다.]

이 작품은 제가 봐도 작품에 축약된 일관성이 떨어집니다. 어떻게 다듬어야 할지 난감하네요. 4월달 말까지 원고를 제출해야 하는데 말입니다. 식견 있는 분들께서 작품의 부족한 부분을 좀 지적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충고 달게 받겠습니다.







- 1장





고통 속에서 어떤 희락을 찾는 일은 분명 어려운 일이다. 희락을 좀 더 엄밀히 분류하자면 그것은 모종의 우수요, 섬세한 향기이다. 그는 분명 사랑을 원하는 것일까? 지고로 달콤하고 영원한 사랑의 베일. 그의 정신은 그것을 원하고 있다. 자신을 둘러싼 모든 배경이 순식간에 봄의 지순함과 아득함으로 온통 적셔지는 느낌이다.





과거는 움직이지 않아 슬픈 것이다. 지금껏 마치 하나의 수채화처럼 멈춰있는, 마치 모든 생동감으로 충만한 동시성의 한순간의 집약적 고찰로써 멈춰있는 또다른 세계처럼 과거는 여태껏 움직인 적이 없었다.



과거는 그속에서 헤매면 헤맬수록 수렁에 빠지는 명멸하는 구렁텅이이며, 소리치면 소리칠수록 꺼져가는 불꽃과 같이 더 이상 찾아오지 않는 아름다움의 실질적 이마주로 그에게 다가왔다.



그에게게 삶은 이미 삶이 아니듯, 과거를 따라, 그 영원한 극점을 따라 움직였던 정신의 여행은 일련의 객기였다. 그는 로맨티스트가 아니라 단지 위선자였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 한 소년에서 이미 움직일 수 없는 모든 걸 소진한 청년으로 변모해 있었다.



자기 기만, 말하자면 선연한 패배스런 로망이 청춘의 끝자락을 타고 점멸해가고 있었는데, 그는 가만히 눈을 감고 그 마지막을 지켜볼 뿐이었다. 아무 것도 변화 시킬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의 방향의식은 언제나 정신적 내몰림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의 진보적 성향과 그에 대한 반향으로서의 보수적인 기질, 하나의 특질은 모두 그가 양립적으로 내포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을 관통한 그의 좌표의 자기장적 성향은 '사랑과 미를 향한 열정'이었다. 그는 예컨데 시인이었다. 그의 섬세함은 요컨데 모든 진정성에의 미학을 추구하는 성격에서 뻗어나오는 일련의 힘이었다. 그는 자기에게서 벗어나고 싶어했다. 그는 모두에게서 벗어나고자 '모두'가 되고 싶어했다. 그는 주인공이기보다는 배경으로 남고 싶어했으며, 그 배경은 아주 현란하고 수려한 비경이어야 했다. 그 성립이 그를 그답게 묘사하는 것이었다. 그는 잊지 못할 아름다움만을 사모하는 걸 좌시하지 못하는 한명의 기인이요, 현자였다. 여기서의 현자는 말하자면 미친 사람을 뜻한다. 현자는 따뜻하고 깊이를 측정할 수 없는 아득한 정서를 소유하고 있는 교양가를 뜻한다. 예의 교양은 모든 분야를 아우른다. 아주 강렬하게 메타적이고 혁혁한, 한줄기 맥락의 '전체'라고 부름 직하다. 그는 그런 교양가였다. 미를 적시하는 적요함과 요원함이 뒤섞인 심약한 투사였다.







그런 그가 사망하지 않고 생존해 있다면, 아니 실존해 있다면 당신은 그걸 인정하겠는가? 인정이란 자고로 힘겨운 결정의 한 요소이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인정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당신에게 다가오는 모든 놀라움은 결국 혁신적인 쾌락으로 변모할 것이다. 환원될 것이다. 그것이 내가 그를 오랫동안 관찰해 오면서 도출한 결론은 당신조차 수긍케 하는 일원론적인 마치 직사하는 빛처럼 그런 종류의 환상, 분수령이다. 내가 하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당신은 모종의 관철에 이를 것이다. 아주 천천히, 그러나 반대로 빠르게. 그, 고독한 시인인 그와 관련된 이야기가 당신에게 감동의 서막을 제시할 것임에 틀림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예의 그것은 아주 구조적인 부분에서 파란만장한 비애의 서사이다. 나는 이제부터 그것에 대해 언급하겠다. 그것은 그의 이야기다...







현시적인 슬픔을 이해하는 데는 많은 감상이 들어간다. 그러나 아름다움을 직접 체현해보고자 하는 시도에는 마르지 않는 우물의 물처럼 딱 그정도의 감상이 필요하다. 전적으로 어떤 일을 책임지는 역할, 그 역할이 자기를 근본으로 창원한 슬픔에서 발발되었다면 이는 불가피한 일종의 숙명인 것이다.

















- 2장









시내에서 그는 길을 잃었다. 타성에 의한 것이었다. 타성은 어떤 강한 빛보다도 훨씬 강렬하게 그를 사로잡았고, 그는 혼란스러움과 더불어 형용할 수 없는 이상야릇한 파생화에 사로잡혔다. 타성에 덧씌어진 비가역성은 비논리적인 것이었으나,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







역사적인 한 장면은 k에게 차가운 감회를 가져다주었다. 그러나 만족할 줄 모르는 젊은이들은 꿈꾸는 듯 발걸음을 그 차양 속에 내딛는다. 햇빛의 고요한 비침이 배경 전체를 투명한 환희로 가득 메우고, 참을 수 없는 정신의 금색 빛깔은 고매한 매무세로서 성스러운 세계의 요연한 정취를 만족시킨다.

환기하고 싶은 깊은 낮, 이 낮은 건조하게 끈적하면서도 무한히 부드럽다. 사실 이 나직한 낮에 사람들은 모두가 눈을 감고 있다. 슬픔이 겨울 어느 낮의 쌀쌀한 공기로서 내 양심의 코끝을 희미하게 만든다.





때묻지 않은 겸양에 대한 고취는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미덕을 찾아 떠나는 아득한 여행처럼 우리의 발걸음은 사뭇 조심스러움에도 뜨겁게, 뜨겁게 달아오른다. 그리하여 역사의 순간적 광채는 새로운 시대의 전체성에 파뭍혀 조그마한 조약한 빛조차 보지 못하고 스러지는 것이다.









시내의 불빛은 어지럽게 이지러져있었다. 의정부 시내는 비교적 협소했다. 최소한 다른 시내와 비교하자면, 그 규모와 수준 면에서 현격히 떨어지는 편이었다. 그러나 도심의 불빛은 그 누구도 사로잡히지 않고서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수준이었다. 그래서 거기는 도시라고 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는 것이었다. 도시의 밀림성이란 그에게 무엇을 숙고하게 하고 종국에 무엇을 상정하게 하는가.







차들이 막힌 도로에 답답하게 서 있었다. 모두 구진 차들이었다. 한마디로 볼품 없는 차들, 어쩔 수 없이 타고 다니는 차들이었다. 이 공개적인 거리는 서민들의 사계절을 현묘하게 표현해내고 있었다. 차 뒤에서 나오는 매연은 다만 이시대의 구름과 꼭같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도 사람들은 인도에서 빠르게 왔다갔다하고 있었다.







이 사람들은 무엇을 위해 서로를 잡아뜯으면서 살고 있는가? 아니라면 서로를 사랑하는가? 서로의 육체를? 아니다, 아니다, 그들은 서로를 죽이려 하거나 서로를 확보하려고 든다. 그들은 권력의 사다리 밑에서 옮겨다니고 옮겨다니며 자신의 위치를 세심히 다듬으려 든다. 그들은 조용한 게임을 위해 법이라는 체계를 만들었다. 또한 보이지 않는 손인 자본주의는 사실 굉장히 시示적인 이 게임의 핵심적인 룰이다. 자본주의는 항시 폭력단체를 수반하므로 그 비인간성과 역사의 도도한 흐름도 고려해야 한다. 그렇다면 게임의 참가자들의 마음과 정서는 그러니까 이들의 1인칭적인 영도는 사가들이 다루고자 하는 가외물인가? 그러나 분명 예술은, 즉 인류의 정신은 정서의 총체적인 정방체이거니와 군상 그자체다. 그렇다면 이 시내를 활보하는 사람들은 어떤 정신적 파장을 그러잡기위해 생존하는가? 사실 원인은 없을 테다. 원인이란 필요하지 않는 편집증적인 인류적 관념이다. 예는 파토스의 평행선을 따른다. 단지! 단지 결과가 전부다. 결과는 사실이다. 그런 결과론적인 의미에서 말하자면 인간이란 비정신적인 성적인 존재를 가르킨달까.







그러나 앞서 실재에 대한 얘기에서 사족으로 첨가한 결과론에 대한 얘기를 폐하고 다시 예를 다뤄보자. 방금 시내에서 분류 가능한 행인들의 실체, 실재에의 권력다툼을 다뤘다. 말하자면 의지의 문제의 정반대의 요를 다룬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더러운 현실에서 벗어난 한 인간이 있었으니 그의 이름은 K였다. K, 한 보잘것 없는 인간. 그 보잘것 없는 인간을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눈썹은 예술가답게 호방히 퍼져있고 코는 둥근게 이른바 자산가 코다! 입은 약간 두터우며 눈은 큰 편이나 짝눈이다. 짝눈은 천재라 했던가. 왼쪽이 조금 큰 편이다. 아마 우뇌형 인간인 듯 싶다. 그의 이면에서 모종의 부재를 느낄 수 있다. 압생스.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필자 자신도 모른다. 그는 약간 촌스럽고 더러운 옷, 예를 들자면 무난한 긴 바지와 줄무늬 셔츠를 입고 머리를 감지 않은 채 거리에 우두커니 서 있다. 거리에 서 있는 이유는 거리가 거기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할 일이 없어서일 것이다. 이것이 그에 대한 묘사의 전부다.







거리는 답답하게 열려 있었다.





K는 던킨 도넛에 들어가려고 했다. 사방은 온통 시끄러웠다. 짐짓 그는 고개를 들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한가지 생각이 들었다. 세상의 구조는 생각보다 단순하다는 것, 시간이 흐르고 공간이 바뀌어도 인간의 진보는 항상 순환적인 정비례 현상을 보이고 있구나 하는 직관. 그러다가 시간의 원에서 그의 의식은 깨어났다. 지구의 자기장은 역동적인 성향으로써 규칙적인 흐름의 동향을 그리고 있었다. 그 동태성에서 비롯된 환멸감은 곧 도시의 역겨움을 말하는 것으로 K 역시 이것에 순응하는 한마리 작은 통통한 벌레였다. 그렇다. 그는 벌레였다. 그렇지만 그는 어린 시절에 공자, 순자, 장자, 맹자, 열자, 노자에 대해 완전히 이해하고 동양의 지고로 비련한 이국적 시들에 대해 개벽할 만한 파악을 하였고 그의 나이 열일곱에 칸트라는 무아지경과 일치했다는 추상에 관한 철학적 충만감에 가득 찼다는 것은 경이로운 일이었다. 그리고는 그는 동양철학과 서양철학이 결합한 쇼펜하우어와 사상가 프로이트, 사르트르와 20살에 드디어 목도하여 대적하였고, 왔고 보았고 이겼다. 21살에는 펜을 꺽고 정신분열 증세를 일으켜 랭보처럼 거리를 방랑하다가 교도소 문턱을 밟았고, 그리고 그는 지금의 나이 22살에 물리학자이자 철학자인 마흐와 아인슈타인이라는 두 거성에 대해, 이른바 새로운 분야에 대한 접근을 시도하고자 하려했다.







그의 사고방식의 가장 내밀한 부분의 최종점은, 즉 사생활의 모든 부분은 어쨋거나 프로이트였다. 그는 프로이트의 정신적 그늘에서 벗어나질 못하였다. 프로이트는 항상 그에게 옳다는 것을 납득시켰고, 거기에서 꽃 핀 일종의 길을 제시하였다. 그에 비해 사르트르는 그에게 그다지 와닿지 않았는데, 그의 철학의 준거형식들의 색채가 너무 인위적이었기 때문이었다. 실존주의는 인문학적 기의로 볼 때 전체적인 시스템이라기 보단 겉멋과 외면적 기표에 지나치게 의존한 시대물적인 순간적 착상에 지나지 않았다. 그것은 억지스런 자기본위를 논거점으로서 천착한 나머지 무수한 과오와 역점의 가능성의 실타래를 끌어안고 있었다. 그가 생각하기에 사르트르는 철학자로선 실패자였다. 그는 칸트같이 학구적으로 위대한 천재가 아니었다. 비록 대중의 유명세를 타서 그의 문명文名, 하나의 문화권력은 강력히 구축했지만 말이다.







다만 독자들에게 말하건데, 20세기의 지성의 거대한 축을 이루는 맥락, 즉 두 양대산맥은 인문계에서의 프로이트와 이공계에서의 아인슈타인, 이 두 거장으로 양분된다고 그는 명명했다. 그리고 어느새 청년으로 자란 그의 욕심은 아인슈타인의 지성의 특질 내지 색깔까지 궁금해 하고 있었다.







던킨 도넛은 물질주의에 양도된 경도된 많은 사람들, 이를테면 허영심이 많고 자기본위적인 세련됨을 하나의 지적 스타일로 받아들인 그 모든 사람들이 밀집해 있었다. 그들은 맛에 굶주리기보다는 미국의 생활패턴의 양상의 한 임상적 사례의 편향성에 굶주린 자들이었다. 즉 그들은 스타일을 원했다. 그들은 섹슈얼리즘을 마음 한끝에서부터 갈구했고 자신이 부유해보이길 과시하고 싶어했다.







어떤 이들은 탐욕스런 이빨로 던킨 도넛을 씹고, 어떤 이들은 더 탐욕스런 손으로 던킨 도넛을 고르고 있을 때 그가 바bar로 가서 자신이 고른 도넛들을 내밀었다. 이것도 몇명의 줄을 기다린 결과였다. 이상하게도 던킨 도넛은 불황에도 끄덕없다. 하지만 아무렴 그에게 그런 사실은 상관없었다. 그는 도넛을 사가면 그것으로 그의 따분한 무의식에 대한 합목적성을 충족시킬 수 있었다.







도넛은 계산되었다. 여종업원은 손에 익은 듯 k와 짤막한 대화를 마친 후 k는 도넛을 들고 나가려 했다. 그러던 찰나 k는 문득 느꼈다. 여종업원의 손은 개인을 향한 게 아니라 공공을 향해 있구나, 하고. 직업에 있어서 감정의 개입은 종업원이나 의사나 카운셀러나 애널리스트나 모두 약간의 필요분이나 자양분이, 융통성의 기지를 발휘해서 자신의 직업적 기저를 완성코자 하는 미약의 노력이 필요한 것같다고 그는 생각했다. 전문직이 기틀을 잡아가는 시대니 만큼 미분의 작업능력에 부여된 감수성은 충분히 필요조건이지 아니할까.









던킨 도넛의 현란한 조명은 역시나 도시의 모든 불빛 중에서도 백미였다. 그가 던킨 도넛을 빠져나가고 충분한 시간이 흐른 후에도 그의 눈에는 하얀 조명이 어른거렸다. 알다시피 던킨 도넛은 전세계 곳곳에 수만개의 점포를 거느린 거대기업이다. 그러나 던킨 도넛은 더 큰 다국적 기업의 작은 일원, 부분일 뿐이다. 다극화된 오늘날의 체제에서 초자본주의는 신자유주의라는 아름다운 거대 이념으로 포장되었다. 압도하는 서구문화는 던킨 도넛과 같은 특이한 푸드마켓 구조를 형성하였다. k는 던킨 도넛이 생성된 이 교묘한 메커니즘이 너무나도 마음에 들었다. 이것은 정말이지, 아름다운 사회의 모습이었다. 돈과 스피드는 사나이에게 얼마나 큰 포부와 창발적인 원동력을 제공하는가! 돈이 없는 사회 만큼 재미 없는 사회가 또 어디 있겠는가! 돈은 곧 의지다. 그 의지가 함의하고 있는 놀라울 만한 역동성이며 신축성은 모두의 내적 저변이 무신론의 세태로 편승됨을 직시하는 종교의 무상성을 표징한다.







거리는 아까보다 한산했다. 두 사내가 최소 배기량이 600cc가 넘는 오토바이를 타고 질주하고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이 추운 겨울에 k는 그들이 그야말로 미친놈처럼 보였다. 두 다리가 절단나고 성불능에 두개골이 박살나서 뇌수가 철철 흘러야 정신을 차리는 족속들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 역시 k에겐 그다지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어짜피 타자들이 아닌가? 타자의 운명 따윈 애당초 k의 재량이 아니었다. k는 자신의 운명만도 상대하기에 벅찼다.





이내 눈이 내렸다.

















- 3장





백설이 세상 모든 더러운 것들을 유린하듯 초절히 나열되는 시내의 정경은 가히 볼만했다. 아름다웠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모두들 눈을 보지 못하고 지나가는 듯했으나 기어코 눈을 보려는 사람들도 있었다. 겨울의 형언할 수 없는 상쾌함은 모든 이들에게 전복된 눈부신 무구한 사념이었다. 눈은 빠른 속도로 시내를 뒤덮었고, 시내는 나직이 환상에 사로잡혔다.





땅은 어느 새 눈으로 뒤덮였는데, 잿빛 하늘과 대조되어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k는 휭단보도를 건너가면서 어젯 밤에 암중모색했던 아인슈타인의 이론에 대한 비판적 고찰을 다시 한 번 상기한다. 인파들이 그를 잣대로 하여 모세가 지팡이를 흔들듯 갈라지고 있었다.

k는 어젯 밤 특수상대성이론의 맹점을 발견한 것일까? 주마등처럼 금빛 추상이 쏜살같이 지나간다.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논문 [특수상대성이론]에서 빛의 속도가 우주에서 일어나는 모든 운동에 있어 가능한 최고의 속도라고, 즉 모든 사물을 측정하는 데 있어 일종의 절대적인 기준이 되는 불변의 속도라고 선언했다. 빛은 모든 시공의 객체의 경험적 주관성의 차이 즉 상대성을 배제시키는 절대적인 관찰자다. k는 그러나 여기서, 그런 빛의 속도가 1초에 약 30만km임을 가정할 때 그 유명한 빛에서 시간의 개념이 소거되는 것, 말하자면 빛이 시간을 따라잡는다면 아인슈타인의 말대로 미래를 볼 수 있는 게 아니라 과거, 현재, 미래가 동시적으로 연결되어 총화로서 눈에 상영된다. 빛은 영속성의 개념에, 그 범주에 등극한다. 그렇다면 보다 광범위한 층위에서 매질 에테르가 실제한다는 것을 명명백백한 것으로 받아들인다면, 이것이 인간의 몸까지 투과한다는 현상을 당연시 한다면, 오서독스하게 생각해 이 공간을 채우는 기류 속에서 빛의 속도가 항시 상대적이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면, 빛이라는 개념의 무無화는 인류역사의 정태적인 축약체까지 꿰뚫는다는 필요충분조건성이 성립된다. 따라서 앞의 외연이 일으키는 작용을 일축하여 말하건데, 그것은 나아가 기억이 기억이 아닌 것이 되면서 개인의 자아가 와해되어 주체는 다다한 기능으로 변질된다는 것에 있다. 다시 말해 빛이 현상을 상정한다는, 예와는 다른 동연개념이 진리라는 게 여기서의 귀결이라손 치고, 빛이 시간이라는 유한성을 잃어버린다면 하나의 현상 자체가 성립되지 않게 된다. 마찬가지로 현상 자체도 와해되는 것이다. 주관성이라는 개념이 파탄남에 따라 객관성이라는 개념도 파탄에 이른다. 따라서 동양사상의 무의 정신이 추구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어둠이며, 온갖 삼라만상의 개개의 파멸은 유한성에 대한 종결을 반증한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우주의 존재는 영원히 유有이다. 왜냐하면 빛이 시간을 따라갈 수 없는 게 '사실'이기 때문이다.









바야흐로 k는 커피집에 당도했다. 눈은 이제 드문드문 내려 가느다랗게 점멸해가고 있었다. 땅거미가 지면서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했다. k는 자신이 즐겨 이용하는 개인 커피집에 발을 내려놓았다.







커피집의 조명은 던킨 도넛과 맞먹었다. k는 언제나 이러한 조명의 감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 날이 없었던 것 같았다. k는 빛을 사랑했다. 빛이야말로 행복이란 현상을 위한, 천국의 색채에 입각한 가장 인간생활에 현학적인 매개체 아닌가? 빛이 아리땁게 그만의 세상을 메우고 있었다. 그 빛깔이 그의 지갑을 더욱 더 근질거리게 하는 것 같기도 했다. 순간 그는 요의를 느꼈다.







"아이스 까페라떼 샷 하나 추가요. 동어반복하고 싶진 않습니다만, 시럽은 알아서 메이플로..."







이 집은 자바커피를 원두로 써서 아주 마일드한 맛이 특징이었다. 사실 특별히 뛰어난 맛은 아니었지만 인간의 버릇이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그의 발걸음은 항시 여기 머무는 것이었다.







주인이 정성껏 만든 커피를 직접 자기 손으로 테이블에 대령하고서, 그는 도도히 자기 자리로 물러간다. k는 바깥의 밤의 풍경의 한조각 낭만을 느낀다. 커피에서 새어나오는 방향은 아스라히 그의 코끝을 감싸안는다. 섬세한 향기가 베어든다.









그에게 커피는 자신의 무기와도 같은 것이었다. 무릇 기사들이 검을 자신의 유일한 무기로 여기듯 그는 커피를 자신의 하나뿐인 지성의 도구로 여겼다. 커피는 그의 생명이었다. 듀피오[더블]로 나온 커피의 향취를 천천히 탐미하자면 그는 이윽고 황홀경에 빠져들었다. 담배를 안 피고 술을 안 먹는 자에게 커피는 하나의 일용할 양식이요, 꺼지지 않는 촛불의 불줄기였다. 더군다나 커피는 지식이라는 세피로트, 일종의 영지주의적 계시를 그에게 내려주었다. 그에게 커피는 축복이었다.







시간이 아릿한 풍금소리처럼 흘렀고, 커피는 어느덧 바닥을 드러내었다. 그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커피집에는 아무 사람도 없어 고요한 배경음악만 연주되었다. 언뜻 들으니 젊은 치기가 깃들어 있는 쇼팽의 에튀드인 것 같았다. 정온의 단정한 음이 실내를 따뜻하게 녹아내렸다. 커피의 불멸의 맛과 상반된 이 연주곡이 커피와 일말의 상관성이 있다면 그건, 그것들의 실루엣에 가만히 깃든 단정함이었다. 이 교양적 하모니의 광휘란 얼마나 본질스러운 것인가. k는 가만히 자신의 내적인 저 밑의 본능의 공통분모를 응시했다. 수컷의 야수적 본능이 교양이란 여성성에 의해 말도 못할 정도로 잘 잠재워지는지. 그것은 마치 인위적인 어머니였다.







"가보겠습니다, 아저씨." 무뚝뚝하지만 체면치레가 잦은 커피집 아저씨는 그저 고개만 끄덕일 뿐이다. 그 풍모는 마치 오늘도 당신의 본질을 살아가기 위해 저희 집을 이용해주시군요, 하는 매세지를 흘리고 있는 듯했다.







커피집을 나가면서 그는 지그시 바깥의 내음을 응시했다. 시나브로 차가운 겨울의 유년스런 감수성이 은은히 순식간에 재편되는 느낌이었다. 코끝에 차가운 사람들의 희망에 대한 동경심이 스쳐지나갔다. 그들의 희망에 대한 동경심은 k에게 자그마한 경탄을 자아내지만, 그들에게 어두운 연민의 감정도 선뜻 불러일으킨다. 그들은 속세의 더러운 원에서 벗어나질 못하는구나, 하는 그런 자조. 그들과 k는 영적으로 분리된, 엄숙히 촘스키의 권력론이 시사하는 패러다임의 마성적 힘 즉 그 전거수준으로 자성하건데 그들은 언론의 피상적인 정치노름에 망각되어진 돼지우리안의 돼지요, k는 부르주아들의 위선에 맞서 그들의 비인간적인 눈을 노려보는 남한의 전무후무한 자유인이었다.





커피집을 나오자마자 k의 눈에는 가로수들의 행렬이 펼쳐졌다. 그는 동요하였다.





'자연은 이토록 사람의 감성을 감흥시키는가!'







k는 갑자기 달리기 시작했다.

















- 4장





시내의 역동적인 꿈틀거림, 이를테면 번쩍거리는 신호등이며 지나가는 가족들과 일상에 지친 개인들이며 고리타분한 차의 멍청한 행렬이며, 엔트로피의 뇌관의 각도에서만이 사유해 볼 가능성이 있는 기하급수적인 도심의 욕망이 그의 눈에서 가시화되었다. 하기야 그들의 내적인 기저에선 만유인력의 법칙의 끈질긴 개연성에서 벗어날 수 없으니까 상호 간에 섞이려 하고, 생활이란 분자는 필멸적으로 개개인의 프레임의 연속체란 원자로 분해된다. 이 도시란 4차원성의 패러다임은 말그대로 소우주를 상징한다. k의 눈에 투영된 이 도시의 논리는 이런 것이었다.







k는 자신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존명存命할 가치가 있는 좌표계라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아니나다를까 세상 모든 이들이 자신이야말로 가장 소중한 좌표계라 사고할 권리 즉 자기의 일인칭성이 우주의 표준이라고 견지할 보편타당한 적법한 자가당착이 있지 않은가!

[자신이 소멸되면 우주도 소멸된다.] 이 명제는 한 생명체의 어쩔 수 없는 물리적 비애였다. k는 자살시도의 망상에 사로잡힐 때마다 이를 직시했고, 조건반사되어 날아오는 생명에의 의지가 마치 그의 추억의 흐름 속을 맹렬히 포착하고 또 포착하는 것처럼 그를 사로잡았다. 그러나 보아라. 우리 모두가 모두 자신만의 갖잖은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있지만 결국 세상의 절대적인 좌표계인 신은, 인문학적으로 엄밀히 말해 우주의 그토록 사소한 각개의 실재들을 관찰하는 관찰자는, 등방성이라는 객관의 최상단의 극[pole]이라는 이름의 패턴을 일정한 원리의 잣대로 사용하여 우리를 본다. 우리는 거기서 벗어날 수 없다. 몇몇 얼간이들은 자기만족에 빠져 자신의 방향의식의 객관성을 추모하지만 우리 순수이성 밖의 미지의 존재는, 단연코 우리의 기량으로는 결코 인지할 수 없는 미시의 세계를 대변한다. 이 현상계 밖의 초정신적인 기축을 이루는 전인미답의 일단은, 이 인간의 한계성은 그러니까 인간문명의 유한성에도 한계가 있음을 적시한다. 인류의 진보는 요지부동하지 못하고 마침내 퇴보로 치환될 지도 모른다. 이 두 문명의 관성이 통상적으로 상대적 원리의 경계에 포함될 때, 비로소 플라톤이 제시하여 소피스트 들뢰즈가 발명시킨 시뮬라크르 관념 게임이 끝나게 될 터이다.









k는 순간 아스라히 자신의 마음을 내보였던 도서관 사서누나를 떠올리자마자, 그리하여 정보도서관을 향해 열정에 찬 동적인 보행으로 육체의 운을 떼자마자, 또 그럼에도 예의 행위에 대한 양면성의 이면에 지적인 욕구에 관한 오기가 가득 차 있음을 뇌리가 직관적으로 전유하자마자, 자신의 정신의 파장이 속화俗化의 원에서 벗어나 국소적인 분야에서 심층적으로 일관됨을 감각의 측면에서 느낄 수 있었는데, 그야말로 보이지 않는 배후의 베일의 기초를 이루고 있는 자명성의 다차원적인, 마치 물밑에 고요히 내재된 명철한 귀기와도 같았다.









'그래, 가는 거야!'









진취적이지 아니하면 난제를 극복할 수 없는 법이다. 능동적인 태도가 복잡다기한 문제에 해결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도전의식은 생활의 양상을 바꿔놓는다. 미래에, 자신이 과거에 시도하지 않은 과제에 대한 손실을 아무리 들여다봐도, 이미 늦은 것이다. 수동적인 태도, 비시도는 최종적으로 후회를 가져온다.















- 5장





하늘은 점점이 초연한 시류로써 변색되었는데, 보기 드물게 무감정한 뉘앙스를 띄었다.

k의 손에서 땀이 나기 시작했다. 손에 나는 땀은 여자의 질에서 나오는 분비액과 비슷한 경향이 있다고 k는 생각했다. 양자 모두 전체적인 의미로서의 리비도[무지한 이들은 리비도를 단지 성욕의 범위에서만 논증하려 든다. 그러나 그것은 평평한 사고방식이다. 리비도는 넓은 의미에서 성욕이 아니라 인간 DNA의 원초적인 생명력을 뜻한다고 생각된다.]적인 흥분과 열정에 휩쌓이면 창조되는 것이니까. 남자의 손과 여자의 질은 속성의 관점에서 비슷한 동일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런 연유로 쌍둥의 그것과도 꼭같은 이 역학관계란, 남자의 손만이 여자의 질을 흥분시킬 수 있다는 사실이다.









k는 걷는 일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걷는다는 것은 니체가 말했듯이 깨어나는 일이다. 진정으로 깨어나는 일이다. k의 발은 찌릿찌릿해졌고 곧이어 뇌도 찌릿찌릿해지는 현상을 그 자신의 육신이 비상치非相馳한다는 만족스러운 현실을 그는 자각하였다. 그러나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니체가 5개 문명국어를 사용하여 자신의 철학을 개진했다는 사실에 있었다. 니체야말로 그가 걸어야 할 길의 전범을 보여주는 인물이었으니 말이다.







나무들이 앙상하게 가지를 드러내며 k의 심금을 시종일관 정묘하게 울렸다. 그는 눈을 감고 길을 잃은 채 앞을 향해 나아갔다. 유년시절의 싱그런 향수의 정수가 불확실하게 펼쳐져 있는 가로수 길 앞에, 영원을 구성하는 '청정'과 '무위'란 구성 요소들이 마치 황금빛과 바다의 만남처럼 그렇게 심원함 속으로 녹아드는 듯했다. 그렇다. 그는 우수에 잠긴 것이었다.







"나의 유년 시절, 밑에서 밑으로. 끝도 없는 과거로. 어떠한 방해도, 고통도 없는 시작의 과거로. 우선 나의 다짐이 있기에 앞서 난 자연 본위의 모습으로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싶어. 태초에 말씀이 있기 전에 그 빌어먹을 말들이 있기 전에 예의 사실을 주지할 수 있는, 또한 실지적으로 사실의 역사를 주조해 나가는 '내가' 태어났던 거다. 내가 있고, 나의 인식 범위 안에서의 세상이 창조되었어. 그리고 그것은 운명이라는 이름으로, 혹은 과학이라는 힘의 함률적 균형 속에서 내 영혼의 울림에 수많은 개입을 해왔지."







8살 즈음이었을까, 어린 시절 그가 다니던 교회에 그가 사랑하던 소년이 있었다. 사랑이라... 아니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었다. 그것은 우수 어린 이심전심에의 유년적 정열이었다. 소년이 소년을 사모하는 것은 약간은 복잡하면서도 흐릿한 애수가 손에 잡히지 않아 눈물을 흘리는 것과도 같다. 남자와 여자가 사랑하는 것보다 더 의미있는 행동이 세상에는 존재하는 법이다. 그것이 바로 유년시절에 영혼의 눈으로 우정을 환상하는 일이다. 교회의 담장은 붉은 벽돌로 여실히 아련함을 환기시켜주었다. 고아함과 단아함이 맞물려 천국의 향기처럼 고색창연한 기류가 아득히 퍼져있는 개천가의 쪽빛과 다름없는 지변을 바라보면서, 동시에 교교한 푸른 하늘의 정아함에 감명받은 소년은 가만히 물결을 바라보며 아름다움을 숙고하였다. 그 요지부동의 아름다움에 함축되어 있는 것은 '하얀 눈처럼 빛나는 장려함'이었다.







눈시린 하얀 구름이 지천에 깔려있어 마치 애틋한 화폭과 같이 유년의 정취를 감싸안는다. 그 하늘 가없이 펼쳐져, 광막한 저세계로 유랑하고픈 유년스런 동경의 잔향을 서정적으로 퍼뜨린다.







두런두런 불어오는 바람의 선이 유려히 포물선을 그리며 흩어졌다. 갈색 갈대, 연녹색 갈대들이 듬성듬성 비규칙적으로 자라고 있었다. 울창한 풀들이, 자신들이 자라야 하는 키의 제한량을 잊은 양 정신없이 치솟아 있었다. 소박한 개천가의 숭고한 냄새가 강변의 물줄기와 결합해, 지속적으로 이어진 푸른 돌들의 방향[芳香]과 뒤섞였을 때에도 개천가는 소자연만이 지닌 부드러운 주홍색 노스텔지어를 더욱 확고히 하는 것 같았다. 개미의 움직임.





검은색 개미는 돌과 함께 타들어가고 있었다. 소리없이 떨어지는 물줄기에서 그 찰나에서 느껴지는 거나한 시간의 부재를, 보이지 않는 음영의 잔향을 관철하면서 이 틈새 저 틈새 할거 없이 공허히 동물들의 곤충들의, 그러므로 개천가의 시간은 무의미하게 이 모든 것을 완성해나가고 있었다.







하늘은 우울하게 타들어가고 있었다. 아침이든 오후든 저녁이든 하늘에서 들려오는 미지의 은은한 피리소리는 냉엄할 정도로 담담한 하늘의 천평선처럼 이 지상에서의, 그리고 이 작은 개천가에서의 조용한 일그러짐을, 대기마다 연결된 고립된 공기의 분자와 분자사이의 점멸을 부드럽게 유전[流轉]하고 있었다. 주홍빛 태양이 자신을 따라오는 걸 불현듯 소년은 감지한다. 연약한 두 어깨가 소자연을 목도한 희열로 떨려온다.







소년이 개천가에 박명이 도래할 때까지 기다리고 있자면, 비로소 그는 자신의 고취감을 꿰뚫고 있는, 자기 진선미의 푸른 보은의 일부분인 [심미주의의 최고적 경지]로 자기 사상체계의 기본을 형성하고 있는 실증주의에의 추구경향에 대해 유화遊化시키는 은화살을 견조한다. 가차없는 미의 추상에 육박했으므로, 가차없는 환각의 착란 속에 입단했으므로.







하늘의 정경과 그, 가슴이 미어질 정도로 유유자적히 온누리는 시변하고 있었다.







해가 저물어, 빛의 기울기는 또다른 방향의 저변으로 미끌어졌다. 어느 새 하늘은 붉어짐과 파래짐의 미세한 조화의 극을 아스라히 쫓아가고, 사실상 시간의 역순구조는 변화의 프롤로그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이미 그것은 시원을 거슬러가는 모종의 어떤 것, 서서히 창백해지는 햇살의 광대함 속에 숨겨진 쓸쓸함의 그리고 나약함의 관조적 형태였을 따름이었다. 마치 모든 물자체, 그중 특히나 조형물의 부질함. 그런 연유로 어떤 나약함을 조명해 나가는 차원에서 어떤 암시성의 부조를 서서히 으스러뜨려가는 것, 죽기 전에는 결코 끝나지 않을 비애의 근원점을 침묵하는 하늘은 그리고 있었다. 일그러진 잿빛의 아스라한 색채도 마치 인간이 간직하고 있는 두려움 아닌 두려움과 열정 아닌 열정으로 그를 구심으로 하여 온갖 방황이며 향연의 이중나선 구조를 생성해가는 모순에의 궤적을 소진해 가는데도, 그것은 열렬히 무관심의 비원지성으로만 투사[投射] 하므로. 남은 소립은 끝없는 펼쳐짐만이.







가만히 앞을 응시하는 소년의 진실된 혜안은 세상 그자체에 유미라는, 인간이 본원적으로 잠재하는 정제된 진리의 시점의 관성이 관조히 깃들어 있다. 소년에겐, 살아있다는 사실이 자연에 대한 유유자적한 자조의 한 형태다. 슬픔도 그에겐 아름다운 만족의 조건이다.







소년은 이따금 새벽이면 눈을 뜨곤 했다. 새벽은 영혼이 진정으로 살아있는 청아하고 은은한 시간이었다. 괘종시계가 5시를 울리고 그가 잠에서 깨어났을때,







그리고 어느 순간에, 새벽은 다가오고 있었다. 그 여명의 순간의 이전에 하늘은 짙은 시[視]의 전장으로 내달리고 있었다. 예상치 못하게 어둠이 자잘히 부서지고, 분해된 동결의 심연이 무수한 아름다움의 여백으로 남아, 하늘은 조용한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 갑자기 신선한 자연의 냄새, 아니 고귀하면서도 웅대한 산소 같은 것이 거기에 스며들었다. 무한하게 넓다랗게 펼쳐진 깨끗한 하늘. 상공의 여명은 이렇게 은하수가 아득히 걸려 있었다.







소년은 은하수를 올려다보면서 자신이 영을 다만 거울을 바라보듯 여린 눈으로 그렇게, 그렇게 바라보았다. 너무나 눈이 부셔서 푸른 새벽이 조수처럼 밀려왔다.

















- 6장





k는 천천히 눈을 떳다. 과거의 편린이 직조된 수채화였다. 그것은 정말이지 잊을 수 없는 여명의 찬란한 맥락과도 같다고 마치 그는 우물의 가장 밑을 보는 것 같이 아득하게 회구에, 명상에 잠겨 생각했다. 얼마나 도저하고 한여름의 꿈처럼 명정했던 기억들인가, 비탄에 잠긴 둔중한 마음에서 의식되는 미열이 살며시 고개를 들어 지나간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 - 일종의 상실감을 도연陶然히, 다만 선험적으로 고취되어 비련히 소생할 수 없는 추억을 응시한다. 추억은 영원이란 물결 속에 아릿하게 잠재되어 간다.







정숙한 겨울볕에 문득 스웨터는 서글픈 상실감에 젖어들어갔다. 쓸쓸한 기분으로 시내 변두리의 공원에 앉아 생동하는 봄의 초연스런, 뭍혀져 버린 과오의 짙푸른 공기를 맡는다. 실패한 사랑에서 생성된 기억의 원환은 지금 이대로의 서정에 파묻이고, 공원에는 건조한 채취가 다만 고독함이란 자기연민에 빠진 영혼의 폐부를 쓸어안는다.





잡고 싶어도 잡히지 않는 실연의 꿈에, 시간의 옅은 끝없는 향조의 감정에, 이 고요한 공원의 풍경에 가슴을 맡긴 채, 깊은 잃어버린 공허에 빠진다. 지금 이 시원에 그 아이는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공기의 따스한 푸르름이 안타까움을 자극한다.







비둘기들이 구구거리며 공원을 멍멍하게 두리번거렸다. 저 비둘기들... 그렇다. 지난해에 보았던 바로 그 비둘기들이 아닌가. 1년은 벌써 지나가버린 것, 무의미하게 소모된 것이었던가. 세월에 대한 막연한 환멸감, 이대로 늙어가고 있다는 비참함, 청춘이 내게 몰고오는 통렬한 수심. k의 마음이 찟어질 듯 저려온다.





비정한 햇살이 k의 기분은 아랑곳하지 않고 삼라만상의 모든 것을 분해하는 기분이었다. 하얗게, 그렇게 세상이 온통 하얗게 변색되었다. 그동안의 추억에 대한 k의 인상은 부드러운, 보다 자연스럽고 개탄한 비애적 재잘거림이었다. 이렇게 자신의 시름한 영혼에 몰두하다보면 슬픔이란 생경하고 섬세한 애조에 침잠하게 된다.







k는 자신과 상대적이라 할 수 있는 비아[非我]를 미분화하여 그중 가장 자신에게 소중한 대상, 모든 표상 배후의 현실 가운데 말할 나위 없이 중요한 존재, 즉 외적 세계의 실재성조차 부정하는 경지에서의 한송이 백합이라 할 수 있는 신비적인 그녀를 자기 안에서 지울 수가 없었다.







k는 학창 시절 자신이 첫사랑에 실패한 사실을 회고했다. 너무나도 안타까워, 마치 폐부가 녹아내려 세상에 융화되는 느낌이 들었다. 그 시절은, 전신을 신비의 하얀 가운에 의탁하고 있다.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 그는 가슴이 떨려 그녀에게 고백조차 할 수 없었다. 그것은 만지면 부서져 버릴 것 같은, 그런 소중한 사랑이었기 때문이었다. 졸업한 후 전화라도 걸어 고백하고자 했으나 용기가 없었다. 그는 사념만으로 자신의 청소년기를 탕진했다. 그는 행동하지 못해 후회를 거듭하는 삶을 살았다. 그가 다른 여자가 생기더라도 이 사랑을 평생 가슴 속에서 몰아내지 못할 것이다. 그녀는 무심히 그의 봄을 독차지했지만, 세상에 엄존하는 악마들의 시샘을 산 듯하다. 그의 짝사랑이 시들어 자신의 마음에서 소침한 자취를 감추면 형상은 사라질지도 모르지만, 그 고상한 향기만은 여전히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k는 생각했다. 공기 저 너머로, 아마 저 끝엔 누구도 알지 못하는 슬픔이 있을 것이라고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영원히 자신을 알아주지 않을 것이라고...











이윽고 그 아름다운 의식의 흐름이 끝난 순간, 벌써 그는 도서실에 당도해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도서실은 의정부의 풍격을 표상하듯 바람이 강해진 이 시각에도 당당히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 7장





도서실의 공무원들은 설왕설래하였고, 신축된 지 얼마 안 된 건물의 이음새는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냄새나는 의정부 서민들의 옷차림은 남루했다. k는 이중적인 관점에서 생각했다.'그들은 지식을 구하고자 온 것일까 이성의 성기를 핥으려는 최종적인 의중을 비수처럼 가슴에 심은 와중에 별 볼일 없는 정부가 운영하는 이 공공장소를 찾아든 것일까.' 인간은 극히 이중적인 동물이었기 때문이었다.







빈번히 평화로운 서재를 출입하는 여객들을 지켜보면서 k는 자신이 찾던 그 소녀를 발견했다. 그녀는 노란 티셔츠 사이로 가슴이 봉긋하며 얼굴이 고혹스런 어여쁜 소녀였으며, 며칠 전부터 k의 유미를 추구하는 시야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힐끗 그녀를 보다가 그는 외려 엉뚱한 사색의 소용돌이로 빨려들어간다.









상이한 양극의 두 논점이 호각지세를 이루며 용기백배히, 상호 간 원려를 기정 축심으로 방비하여 문호를 전면적으로 개방한 수문장이, 때묻지 않은 독선과 아집의 기라성적 규합체와 다름없는 땟물을 흘려내며 첨예히 맞물려, 서로의 머리에 총구를 겨누고 있다는 복잡다단한 사상적 구도의 정세가 k의 도식도에 흉물스럽게 소묘되는 걸 지켜보았다. k는 그같은 퇴폐적인 정신현상, 인정키 싫은 괘변을 파괴하려 시도했다. 그것은 두둥실한 의자에 앉아 현기증을 응시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사념의 줄기는 마치 괴물처럼 자신의 욕망을 주체하지 못했다.







'단어에 어떤 상징을 부여하지 마라. 단어는 음계와도 같은 것, 다시 말해 뜻보다는 기표의 원리, 즉 운치를 받아들여라.







문장의 직조에 필요한 것은 전래 그것의 질 뿐만 아니라 행간의 연결성에 있다. 중요한 것은 어떤 시작時作에 있어 주제나 제목의 뿌리에서 벗어나지 않고, 한줄기 굵은 이음새의 특성을 유지한 채 글을 써내려가는 것, 연속적인 문장에서 전제되는 파죽지세적 자명성에 어긋나지 않음을 최상의 글쓰기 전략으로 여기는 것, 문장의 공과 사를 구분하는 일은 마찬가지로 한 장章이 제시하는 구도構圖의 차원을 따르는 문맥 사이의 서막으로금 이해되야 할 것이다.







언어에는 적정한 패턴이 있다. 그리고 이 패턴을 통찰하는 데 찰나의 순간이면 된다는, 이르자면 머리가 비상하면 빨리 이해하리라는 망상을 당신이 품고 있다면 그건 크나큰 오산이다. 글을 쓰는 것과 읽는 것은 무지 다르다. 말하자면 글을 읽는 체계와 글을 쓰는 체계는 동전의 앞뒷면과 같아서 그 이질성을 이용할 줄 아는 문필가가 진정한 언어의 행위자라 할 만하다. 어쨋거나 미분화된 패턴들 가운데 당신이 십중팔구 자기만의 계열-원칙이라는 보편타당한 우승기략을 선정하여 밀고나간다면 예를 들어 각운과 같은 지엽적인 일들은 회자되지도 않을 터이다.







언어의 패턴은 의외로 쉽다. 패턴이란 곧 법칙이다. 아닌게아니라 한글의 골자를 생성하는 필법에는 몇 가지 종류의 공식이 있다. 그 첫번째가 문체를 다루는 능력, 그 둘째가 어휘를 다루는 능력, 그 셋째가 완전한 하나의 문장을 만드는 능력, 그 넷째가 여러 문장들을 교직시키는 능력, 그 다섯째가 그 글의 제목을 정정하는 능력이다. 물론 재론의 여지가 없이 글을 써내려가는 데는 수많은 곡필의 노선으로 새들어갈 가능성이 면면히 공존한다. 그러나 위의 다섯 법칙들은 일단 기초와 같은 축대로서 글이라는 심신을 유비무환하기 위한 입언인 것이다.'









그녀의 얼굴과 막 발기한 가슴을 보면서, 즉 그녀의 성性의 진용을 엿보면서 그는 완연하게 육체미와 정반대인 지적인 착란에 몰입했던 겄일까. 그녀는 이제 막 11살 채 되지 않은 것 같았다.



"젠장할."







도서실의 침묵 속에서 k의 속삭임은 날카롭고 신경질적이었는데, 아무도 그런 그를 신경쓰지 않았다.



















- 8장





오랜 시간이 흐른 동안 자기 안의 이성론자들의 합의에 의해 도출된 결과의 끝에서, 이런 복잡하고 학술적인 방향으로 자신을 내몰기보다는, k는 그녀에 대해 재밌는 시나리오를 각색해 내는 것이 좋다고 여겨졌다. 그는 뇌리에 번개가 들어온 듯 영감을 받은 나머지 펜을 들어 빈 종이에 글을 적어 나갔다.





- 그녀, 민혜[가명]에 관한 이야기





의정부 도심에 아파트들이 깔려있다. 이제 막 미국화되어[연쇄살인마까지 미국화되어] 굴뚝산업을 벗어난 이 도시의 도회적 분위기는 남한이라는 지극히 국소적인 지역을 살아가는 시민들, 빽도 없고 돈도 없는 시민들에게 작은 위안이 되어주었다. 그러나 자크 아탈리가 예언했듯 질적으로는 아시아 최고의 부국이 된다는 이 나라에서, 국가에 대한 자부심만으로는 살아가기가 어려운 법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욕망이 있다. 그 욕망을 이루기 위해 우리는 인간성 마저 져 버리고 세상과의 경쟁에서 피 터지게 싸운다. 좌우지간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원초적인 욕구란 무엇일까? 성욕? 수면욕? 그것도 아니면 증오하는 자들을 겨냥한 살인욕? 아니다, 의미론적인 최소주의의 최근 흐름에서 볼 때 그것은 오직 하나다. 공포를 피하고자 하는욕망, 바로 그것이다. 그리하여 그것의 전범이 되는, 민혜가 경험했던 한가지 사건에 관해 여러분에게 들려주고자 한다. 민혜라는 소녀가 체험했던 한 공포의 이야기는 여러분에게 극히 충격이 될 것이라고 본다. 그녀가 체현했던 아시아적 그로테스크는 면면히 전례없는 이야기로 남아 여러분의 감정을 충혈시킬 것이다. 자, 그녀가 본 것은 과연 무엇이였을까? 인간의 영혼이 맛볼 수 있는 최악의 공포를 직접 여러분의 눈으로 확인해보는 것도 자신의 평범한 삶에 대한 소중함을 깨우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될 것이라 필자는 관철하는 바이다. 그녀의 눈엔 과연 어떤 존재가 명멸했던 것일까?









저녁이었다. 어슴푸레하게 안개가 잔연히 흩어졌다. 깜깜한 밤이 모든 영혼의 이면을 옥죄어 온다. 깊고 깊은 내면 즉 영의 시원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정신적 고통에 자신의 해후를 내맡긴다. 잠 못 이루는 밤에, 괴리와 회환의 가운데서 영혼 안의 내밀한 시심의 사색을 미처 받아들이지 못한 채 그것은 여물어 간다. 깊이, 깊이 최후의 밤을 갈구한다.





밤에 비견해 보며 우리 자신의 인생의 성질을 모른다고 한없이 외쳐본다. 슬픔은 어떤 상[狀]인가? 아니면 모종의 형이상인가? 밤만 되면 뭐랄까, 이 어두움의 짓눌림 속에 속절없이 스러져가는 나라는 이름의 비경을 발견한다. 모든 건 내 자신이 아니라 세상이 주조하는 게 되어버린다. 그것이 우리의 밤이다.







대기에 맺힌 잊혀진 낮의 상들은 마치 초한할 것 같았지만 언제나 찾아드는 암흑에 짓눌려 의미없이 사라졌다. 단지 희뿌연 불상스러운 잔재만이 마하[摩訶]성을 띄며 다만 혼령처럼 떠돌아 다녔다. 초라한 등불들이 촘촘히 그러나 모종의 영적인 불안함과 우울함이 뒤섞인 채 불을 지펴냈다. 전신주들의 무리가 끝없이 도로를 향해 이어져있고 사람들의 종적은 이미 끊김과 동시에, 적은 양의 차들만이 무연히 거리를 기웃거렸다. 하늘에는 별 하나 없고 오직 붉은 반달만이 온통 축축히 적셔져 있었다. 점점이 공간의 검은 어둠은, 그자신이 생성하는 무자비한 어둠의 확장을 단순히 대기의 표면에서 이따금 자연스럽게 그리고 은밀하게 발산되는 은빛 실랑이의 미묘한 번뜩임과, 외소한 중간에 나홀로 점유된 채 서 있는 앙상한 나무들의 불안감을 역동적으로 빨아들이고 있었다. 실로 어둠은 망쳐진 어떤 균일한 삶을 조각조각내는 블랙홀의 붉은 심원함에 적조하였다,고 보아도 무방했다. 길거리를 떠도는 개들이 외로운 제스쳐인 양 스러지는 세계의 형상처럼 포효하다가 다시 그 의도를 모르는 길을 걸어간다. 저 개들의 주인은 있는 것일까, 아니라면 개에 대한 '주인'이라는 개념은 인간의 욕망이 발단시킨 인위적 침잠물일까? 저 들개들과 꼭같이 고독한 정靜의 궤적을 그리고 있는 길거리 개들은 결국엔 밀폐된 도살장으로 끌려가거나, 이 추운 겨울에 차에 치여 어김없이 유유자적한 고깃덩어리가 되고 말 터이다.







마침내 시선은 자연히 소규모 아파트 단지로 옮겨지는데, 아파트의 비교적 네임벨류있는 브랜드인 푸르지오였다. 이 대지에 건설된 아파트의 평수는 68평으로, 그 의미를 상정하자면 중산층 중에서도 꽤 잘사는 범주에 속한다고 지레 짐작할 수 있다. 이곳은 서울의 어느 곳이지만 민혜 가족의 사적인 보호에 준거하여 지역을 세분히 밝히지는 않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이 직시해야 할 몇 가지 점은 이렇다. 민혜의 아빠는 수도권 법조계에서도 형사사건의 유죄성을 무효로 만들기로 악명이 높은 변호사로 특히 파이프 담배를 즐긴다. 그가 피는 파이프는 800불 이상을 호가하는 비교적 고가의 물건으로, 명품은 아니지만 그가 생각하기에는 그나마 쓸만한 것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그가 피는 연초는 기분이 꿀꿀할 때면 독일산 순수 레터키아를, 초조해질 때면 아일랜드산 페릭과 버지니아 믹스쳐를, 우울할 때면 영국산 위스키 향연초였다. 그렇긴 해도 그가 예에서 벗어나는 흡연을 할 경우도 있었는데, 바로 자신에게 성공에 대한 환희가 슬며시 다가올 때 시가를 피워주는 것이었다. 그것이 그가 가장 좋아하는 흡연형식이었다. 외국에서 박스로 들여오는 시가가 그에게 선택적으로 금전적 부담을 가져오는 건 아니었지만, 그는 자신의 여송연을 자신이 재판을 이긴 순간에만 향유했다.







그가 경기에서 이기는 건 당연한 것이었다. 법조계에서의 판사나 검사, 변호사, 검사보, 검찰청 직무와 관련된 대거의 사람들, 영향력 있는 법무부 관계자를 비롯하여 자극적인 정보에 굶주린 몇몇 편향된 언론인들 뿐만 아니라 심지어 정계 인사들까지 연계되어 상호간에 끈끈한 유대 관계를 형성하여 일종의 담합 관계를 형성하였다. 그러니 민혜 아빠가 어찌 자신의 경기에서 승리하지 않고 베길 수가 있겠는가? 판사들도 훗날 많은 돈을 만져보기 원했고 변호사로 전환하기 위해 변호사들과의 저녁 만찬에서 불란을 일으킬 순 없었다. 허나 그들은 다만 자신의 의뢰자이자 자신을 부리는 주인인 부르주아들의 더러운 개였다. 법과 정치라는 사회의 틀은 자본가들을 완벽하게 보호해주는 하나의 기능[특히나 한국 같이 외교적 영향력이 없는 나라에선 대통령이 누가 되든 국가의 시국이 변하지 않는다]이었다. 민혜 아빠도 자신이 소속된 정당이 있었고 만약 거기서 축출된다면 그에겐 미래가 더 이상 보장되지 않았다. 많은 개업한 변호사들이 영민한 국회의원과 봉건제를 이루고 있었다. 노조가 갱스터에게 상납을 하고 자신들의 보호권을 지켜나갔듯이 국회의원들은 변호사들의 밥그릇을 지켜주었다.







불행히도 민혜의 엄마는 현재로선 부재다. 그녀는 민혜가 3살 때 갑자기 안개처럼 증발해버렸다. 아빠의 말로는 엄마와 사이가 좋았는데 그녀가 갑자기 집을 나간 건 자기로서도 믿기지 않는 일이라고 했다. 그래서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그건 단지 실종이었다고 여겨진다고 했다. 민혜는 아직도 그 점, 그러니까 엄마가 제 발로 자신을 버리고 갔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은 채 여전히 누군가의 소행으로 엄마가 세상에서 사라져버렸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전자가 사실인자 후자가 사실인지 그 누가 알랴.







아리따운 가운데 이국스럽고 이지적인 외모의 소유자였던 그녀는 피아노를 즐겨 쳤는데, 민혜가 아기 때도 주로 연주하곤 하였다. 민혜 엄마에 대한 설명은 이쯤에서 끝마치고 좀 더 중요한 부분으로 넘어가기로 하자.







알다시피 민혜는 엄마 없이 자란 생을 살았다. 그녀는 자신의 아버지와 자신 이 둘을 세상에 단 두명으로 여기며 상주해왔다. 그것은 어쩌면 엄마가 있는 삶보다 더 로맨틱한 삶일지도 몰랐다. 세상에 단 둘이. 그녀를 지켜줄 것은 아버지 뿐이었다.







68평의 아파트먼트는 2명이 살기에 딱 좋은 생활공간이었다. 그녀의 아기자기한 방에서 호기심 많은 11살 소녀 민혜는 문을 꼭 걸어잠그고 자신의 팬티가 함빡 젖어 보지에 꼭 붙어 도끼자국이 나타날 때까지 자위를 행할 수도 있었고[참고로 여성의 마스터베이션은 빠르면 5살 즈음부터 시작된다. 소년들은 그보다 늦어 아무리 빨라도 8살부터다. 아프리카에선 그런 측면을 경계하여 클리토리스를 절제하는 할례가 일찍이 성행하였다] 잘생긴 미소년들이 교배를 하는 영상들도 마음껏 즐길 수도 있었다. 아버지가 그런 순간 문을 두들길 때 그녀는 수치심의 이면에 이상한 쾌감이 잔존한다는 것을 알아챌 수 있었다. 그것은 인간이란 자아의식을 가진, 육신이 전부도 아니고 영혼도 전부가 아닌 양면의 존재가 지양 가능한 야릇한 모순점이었다. 필멸적으로 민혜는 아이였고, 게다가 나약한 여자였다. 다시 말해 민혜는 영속히 여자아이로써 남길 원한다는 말이었다. 그런데 모든 사람들이 소시적엔 다 그렇게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더러운 세상은 그걸 거부한다. 불행한 일이다.









어스름함과 푸르름이 기묘하게 뒤섞인 이색적인 한 밤의 소단지 아파트 안, 민혜의 아빠는 맥주에 취해 거실에서 대형 LCD TV를 보고 있었고 민혜는 자기 방에서 홀로 크리스마스 때 선물 받은 성능이 꽤 쓸만한 독일산 쌍안경으로 밖을 응시했다. 아파트 사이의 블록들이 텅 비어있으며 차들만이 자신이 지켜야 할 자리를 점유하고 있었다. 아무도 다니는 행인이 없었다. 민혜는 그 사실에 막연한 불안감을 느꼈다. 민혜는 인간이 두려움에 일차적으로 저항하는 첫번째의 것, 나름의 오기가 생겨 망원경을 들어 자신이 사는 층과 같은, 자기 집과 평행하는 13층을 쳐다보았다. 그런데 그만, 손에서 망원경이 툭 떨어지고 말았다. 그 집 안이 온통 빨간색이었기 때문이었다. 피처럼 시뻘건 선홍색이 화분에도 직사하고 빨래들도 언뜻 정육점의 고기들마냥 걸려있는 것처럼 보여주었고, 집 안의 쇼파며 tv며 불길한 달마액자도 피로 적시고 있었다. 그리고 또한 저 안을 저렇게 꾸민 의문의 존재가 숨쉬고 있다고 생각하니... 주저앉은 민혜의 등골에선 소름이 돋아났다.







글을 쓰는 동안 창문을 내려다 보니, 해는 어느덧 중천에 떠올라 있었다.



















- 9장





사실 민혜는 그의 첫사랑의 실명이었다. 그는 무의식 중에 그녀를 자신의 단편소설에 그려넣은 것이다. 그는 한편으로 민혜를 증오했던 것일까. 사랑은 미움의 시초이고 은덕은 원한의 근원이라 했던가.





이후 도서관 안을 둘러보다가 k는 문득 자신의 정신적 지주가 생각이 났다. 열정이 순식간에 꽃피워났다. 그러나 그 열정 안에는 외경심이 아닌 카뮈가 말하는 우정- 나를 따르지 마라, 난 이끌지 않을테니. 나를 이끌지 마라, 난 따라가지 않을 테니, 다만 내 옆에서 걸어다오.- 이 아로새겨져 있었다.







그는 글을 갈겨쓰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은자이자, 국내에서 자금력이 강한 편인 출판사 문학동네 소속의 전속 번역가 황보석 선생께 보낼 편지를 작성했다. 그는 서울대 불문학과를 졸업하고 박사학위까지 취득한, 업계에서는 이미 저명했다. 황보석 선생에게 k는 나름대로 그가 관록이 담긴 냉철한 충고를 하면서도 따뜻하게 자신을 감싸안으려는 모습이 인상적이었고, 그는 곧 그를 스승으로 따르기 시작했다. 플라톤이 소크라테스를 아버지로 따랐듯이, k는 황보석 선생을 자신의 이상형적 아버지상으로 여기기 시작했다. k의 아버지는 지하철 공무원이었다. 그러나 k는 그런 아버지가 자신의 아버지라고 여태까지 여겨온 적이 없었다. k에게 있어 가령 진정한 아버지란 지적이면서도 온유하고, 즉 군자의 성품을 갖고 의연하게 처세하는 사람, 에스프레소의 맛을 아는 사람, 소주보다는 와인을 즐길지 알고 궐련보다는 시가를 즐길 줄 아는 예술인,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를 아는 사람, 사소한 이득에 눈이 멀지 않고 큰 것[Big deal]을 노리는 대범한 그런 사람이였다. 황보석 선생은 확실히 이에 맞는 전례적 인물이었다.

k는 황보석 선생의 이지가 담긴 정치적 판단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있었다. 그는 플라톤이었고 황보석 선생은 소크라테스였다.







황보석 선생님께. 선생님은 제가 대면한 지인 중에서 가장 지적으로 탁월하신 분이십니다. 전 '선생님'이라는 존칭으로 함부로 사용하는 얼간이가 아닙니다. 이것은 신사적인 방면에서만 차용 가능한 그러나 많은 사업가들이 사용하는 양가적인 언어니까요. 선생님께서 책도 번역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께 제 사견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한국의 현재 현실의 한계점과 미래상에 대해 언급하고 싶습니다. 제 의견에 관해 황보석 선생님의 정치적 판단을 기다리겠습니다.









한국, 엄밀히 말해 엄청나게 외소한 국가 남한은 세계 유슈의 중진국 중 하나입니다. 남한은 그러니까 독특한 나라라고 제겐 사려됩니다. 한강의 기적과 더불어 남한은 아프리카의 변방 지역과 거의 흡사한 가난에서 채 벗어난 지 얼마 안 되었고, 1990년 대 아시아의 호랑이라 불리며 동아시아의 빼어난 중진국으로 거듭날 수 있었습니다. 97년 대 무렵 IMF사태가 덮치기 이전까지 우리나라는 승승장구하였습니다. 그러나 포괄적인 시점에서 볼 때 1988년부터 2009년 까지 우리나라는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으로 정체 상태에 있었습니다. 잃어버린 21년이라고나 할까요. 우리는 간신히 중진국의 고지에 도달했지만 그 이상의 발전은 없었습니다. 선진조국은 하나의 신기루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조선이 어떤 나라입니까. 과거에는 거대 중국에게 괄시당하며 제대로 된 나라 취급도 아니 당하며, 일본에겐 오랜 기간동안 식민지 지배까지 당했던 나라입니다. 우리 조상은 일본에게 강한 반일감정을 갖고 있습니다. 지정학상으로 한국은 작은 땅덩어리에, 인구만 지나치게 과밀된 감이 없지 않습니다. 요는 이렇습니다. 왜 일본은 역사의 발자취마다 항상 강대국, 거의 제국 취급을 받으며 세계에서 혁혁한 위상을 점유하였고 우리는 항상 일본의 그림자 역할 밖에 못하였는가.

그리고 앞으로도 평생 그럴 것인가.







기억하십니까. 일본이 1980년 이미 세계 제2의 경제대국에 들어섰고, 일본의 방향의식은 이미 지극히 합리적이고 신자유주의적인 것으로써 상정되었습니다. 1990년대 초에는 미국 전역에서 가장 지가가 비싼 록펠러 센터와 자본주의의 기념비적인 유물인 호화 골프장들과 고층빌딩들을 인수했습니다. 일본의 거대회사들은 미국의 거대회사들을 제치고 천문학적인 무역흑자를 기록했습니다. <뉴스위크>는 일본이 소련이 무너진 이후로 미국의 최대 위협세력으로 등극했다고 시민들에게 위기감을 설파했고, 하버드의 어떤 박사는 21세기엔 일본이 세계최강국으로 부상할 것이라고 호언장담했습니다.







그러나 일본은 어쨋든 화려하게 무너졌습니다. 그렇게 잃어버린 25년이 지났고 일본은 현재 경제력 뿐만 아니라 자기내의 국채를 군사 부분에 엄청나게 할당하고 있습니다. 일본 경기는 어느정도 회복 국면으로 들어섰고, 일본은 다시 범국가적인 야심을 가지고 자신의 계획을 실천 중에 있습니다.







한국의 정치인들은 조선 시대나 오늘날이나 똑같습니다. 세계로 뻗어갈 생각은 안 하고 패쇄적인 사고방식과 자기 밥그릇 평수나 늘려볼 생각으로 아귀다툼하는 꼴이 꼭 그렇습니다. 반미감정은 한국을 외톨이로 만들죠. 어떤 중국 현자가 이렇게 말했죠. 천하를 얻으려면 사람을 얻어야 하는 이치인 것과 마찬가지로 히틀러의 처세전략을 보십시요. 그는 정치깡패에 지나지 않습니다다만 그는 사람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천하를 얻을 수 있는 계기가 그에게 하나의 계시로 떠오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거지 신세에서 독일 수상이 되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만의 확고한 사상체계를 가지고 있었고, 그를 바탕으로 자신의 대독일을 비엔나로 돌려 그곳을 접수하고, 그 다음에는 폴란드를, 그 다음에는 노르웨이 덴마크 벨기에 체코슬로바키아, 심지어 프랑스까지 침공에 성공하였고 전유럽을 통일하고자 하는 전체적인 야심에 가득 찼습니다. 말하자면 스케일이 큰 거지요. 평생 남한의 정치인들이 자기 영역 관리나 제대로 했습니까? 그들이 제창하는 민주주의가 이들의 나치즘이나 파시즘보다 결론적으로 우리 시민들 모두를 평등성의 논리에 재고하게 만들었습니까? 히틀러는 유태인들을 비롯하여 자신의 숙적들을 암살한 희대의 학살범이지만 그의 혁명성은 전대미문의 것이었습니다. 히틀러를 긍정적으로 보자면 그는 천재적인 리더이자 선동가였습니다. 우리시대에는 이런 혁명적인 사람을 필요로 합니다.







사회는 양극화로 치닫고 있습니다. 중산층은 몰락해가고 가난한 자는 평생 가난 속에 헤어나지 못하며 '개'같은 삶과 범죄로 점철된 생을 삽니다. 부르주아들은 과거의 군주들 만큼 희희낙락한 호화생활을 누립니다. 지옥과 천국이 따로 있습니까? 저 가난하고 권력 없는 자들이 곧 지옥 안의 자들이요, 모든 권위를 갖추고 깨끗하고 넓직한 데서 살며 고급 승용차를 타고 다니며 비싼 양주를 마시는 사람들 즉 부의 존속 체계를 이어받아 아이 적부터 편안히 살아온 사람들부터 비롯하여 주식시장에서 개미들의 피를 빨아먹는 역겨운 거대 투기세력들, 일류 대학을 나온 사람들, 기업변호사, 국회의원, 기업 중역, 성공한 닷컴창업자, 저명한 의사들, 유명 연예인, 부동산 업계의 거물들, 모든 그들의 아들들, 그들이 곧 천국 안의 사람들입니다.









그에 비해 어릴 적부터 교도소에서 인생을 보내는 사람들도 허다합니다. 4평 쪽방에서 14명이 자신들의 배설물 냄새를 맡으며 돼지처럼 지냅니다. 아파도 병원에 못 갑니다. 온갖 폭력이 난무하고 그들은 인생을 비관하고 새로운 범죄를 생각하며 돈 몇 푼에 평생 교도소를 들락거리다가 푸른하늘 조차 보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합니다.









저는 이 한국 사회의 저변을 정초하는 거시적인 패턴 변화를, 즉 심층적인 사회 풍토 밑바닥에 깔려있는 가언적 당위성의 방향성을 인식하고 싶었습니다. 누가 이 남한 사회의 가장 중요한 요인인 '정치'분야에 어떤 혁신적인 분수령으로 등극해 한국 사회를 일약 [한국제국]이라는 일단까지 끌어올릴 가능성을 제시할 수 있는가. 노무현도, 이명박도 훌륭한 정치가이긴 하지만 개혁가는 아닙니다. 혁명가가 공화제의 투표로 뽑혀져 나오기에는 시대가 너무 진부해졌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힘과 지력으로 국민들의 뿌리 깊은 민족주의를 자극할 수 있는 강인하고 지적인 혁명가를 필요로 합니다.









클린턴은 경제호황의 거품을 이용해서 2번이나 정권을 잡았고, 부시는 테러리즘의 위협과 중동 세력을 악의 축으로 지정함으로써 국민들에게 위기의식을 심어주는 걸 이용해 그 역시 2번이나 정권을 해먹었습니다. 몽매한 시민들은 현시적인 현상만 보며 지도자를 추켜세울 줄 알지, 거시적인 정세변화를 읽을 능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는 걸 이 사건들이 증명하고 있습니다.







우리시대에는 새로운 지도자가 필요합니다. 히틀러 만큼 독재적인 아우라를 가진 지도자를 필요로 합니다. 썩은 의회를 폐지해야 합니다. 진정으로 일관적이고 모험적인 자각을 우린 가져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이 정치가입니까 사업가입니까. 지금 우리가 미국이나 영국, 일본, 프랑스와 같은 [선진국]의 대열에 들어서기 위해서는 북한과의 강제 통일이 시급합니다. 우리는 일본을 원수처럼 여기고 뒷다마 까기에 바쁘지만 일본은 신경조차 쓰지 않습니다. 일본은 우리를 나라 취급조차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옛날 옛적에 이미 제 2의 대국의 자리를 점유했으니까요.







따라서 직접 행동이 중요합니다. 문필가들은 모두 몇 푼 안되는 꼬질꼬질한 원고료는 집어치우고 나라의 구조적인 변혁에 관심을 갖고 책을 저술하고, 여론을 선동해야 합니다. 직접 행동이 중요합니다. 저 건방지고 한심한 북한정권을 더 이상 제멋대로 나두면 안 됩니다. 미국의 적극적인 군사력을 빌려서라도 모험을 감행해야 합니다. 만약 그럴 수 없다면, 이렇게 주저앉은 삶을 살아가는 대한민국은 영원히 중진국의 궤도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이 나라가 선진국, 제국이 되느냐는 여러분의 이념의식에 달렸습니다. 젋은이들은 꼬질꼬질하게 친구나 만나지 말고 새롭고 절대적인 원칙을 토대로 한 정당을 설립해 정치투쟁을 시작해야 합니다. 모든 직장인들은 거대한 정치노조를 설립하여 부르주아들을 도도한 진보적 투쟁에 이용시켜야 합니다. 우리가 북한을 접수하려면 외부의 힘이 필요하고, 내부의 단결이 절대적으로 중요합니다. 필요하다면 일본과도 손을 잡아야 합니다. 우리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리라 꿈도 꾸지 못했습니다. 그 극렬한 냉전 체제 속에서 그 누가 그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했겠습니까?









전 민족주의자는 아닙니다만 최소한의 애국심은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남한, 여기는 제가 사는 세상입니다. 전 이 역겹고 퇴폐한 세상을 표변시키고 싶습니다. 많은 우매한 자들이 깨달음을 얻고 혁명의식에 고무되었으면 하는 바입니다. 우리나라가 선진국의 대열에 입성하기 위해서는 북한과 통일이 되느냐 안 되느냐에 달렸습니다. 모두가 모험을 해야합니다. 모험 없이 얻는 것은 없다는 미국 속담이 있습니다. 언제까지나 중진국의 생태만 적시하며 이 물질적으로 가난하고 외교적 힘도 없어 모든 시민이 낮은 자긍심으로 살아가는 사회에서 유유부단히 살아갈 것입니까? 좀 각성하십시요. 일상이 다 무엇입니까? 우리에겐 좀 더 나은 일상이 필요합니다. 한국 시민에겐 좀 더 고급스런 물질적 풍요와 문명과 넓은 땅이 필요합니다. 평화는 현재로선 죽음이나 진배없습니다. 영원히 중진국의 계열에 머물 수는 없는 일입니다. 우리 조상들이 이루지 못했던 강대국의 꿈을 우리가 실현해야 합니다. 우리는 한국시민입니다. 우리는 세계에서 가장 지적으로 우수한 민족입니다. 그걸 잊지 마십시요.







p.s 황보석 선생님, 나의 아버지 같은 존재시여. 그대는 현재 제가 처한 피안적 방황의 세계를 아십니까? 저는 고통스럽습니다. 저는 20살에 철학을 너무나도 사랑했습니다. 아니 제 첫사랑한테 실연당하고 나서부터, 그러니까 짐짓 16살 때부터 저는 그녀를 제가 왜 차지할 수 없는지 그 불가해함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 후로 삶의 의미를 완전히 상실했고 저는 철학의 세계, 예컨데 우주의 섭리와 인간 존재의 필연적 파멸성에 관한 편집증적 망상을 탐닉하기 시작했습니다. 저에게 삶은 의미가 없었습니다. 제가 사랑하는 첫사랑, 그녀가 저를 인정조차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저도 제가 이런 형상으로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게 아닙니다. 여자의 조건을 충분히 만족시켜 주고 싶은 그런 남자의 외피를 갖추어 창조되고 싶었습니다. 제가 잘생기고 용감했다면 그녀는 제게 반했을 겁니다. 제가 지적이지 않고, 동시에 소극적이지 않았으면 그녀는 그런 전형적인 제 남성상에 반했을지도 모릅니다.







중 3 시절, 그녀는 제 인생의 전부였습니다. 그녀를 가지면 전 죽어도 좋았습니다. 그 이후로 보상행위라는 충족 이유율적 법칙에 의거하여, 22살에 이르기까지 많은 여자한테 감정없이 작업을 걸었지만 번번이 거절당하고 말았습니다. 내가 못생겨서일까요? 내가 여자의 취향에 맞지 않는 비남성적인 인간이기 때문일까요? 지적인 인간은 여자에게서 결코 인정받지 못한다는 쇼펜하우어와 토마스 만의 견해에 저는 적극적으로 찬동하는 바입니다. 이제는 돌이킬 수 없습니다. 저는 학문의 고독한 길을 걸어야 합니다. 저는 선비입니다. 으레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저는 가난한 예비 학자입니다. 저는 욕심이 많은 사람이지만 반대로 그 동전의 뒷면에는 지극한 생의 허무감이 새겨져 있습니다. 저는 외롭습니다. 저는 삶이 두렵습니다. 죽고 싶지만 살고 싶기도 합니다. 저는 평생 고독했습니다. 평생 우울했습니다. 평생 불안했습니다. 전 언제나 자살을 기도했습니다. 어린 시절에 괴롭힘을 당하며 죽음을 숙고했고, 아버지의 파산으로 인해 죽음을 숙고했습니다. 죽음만이 유일한 탈출구이자 내 본질을 우주에 환원하고 내 영혼을 구원이라는 파노라마로 도달하게 하는 계단이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을까요.







제 인생은 의미없는 하나의 과도기적 연속에 불과할지도 모릅니다. 제 인생은 위선과 가식, 자기기만으로 점철된 파렴치하고 염치없는 비진정적인 그런 형식적 틀이란 이미지의 끝없는 사이클에 불과할지도 모릅니다. 다람쥐가 챗바퀴를 돌듯 전 이 더럽고 추한 삶을 돌아왔습니다. 저는 인간관계를 위해 제 모든 걸 바쳤습니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인간에 대한 영원불멸한 불신과, 증오였습니다. 저는 고등학교를 마칠 무렵 한명의 개인이 되기로 결심했고, 실존주의의 탕아가 되기를 소망했습니다. 침잠하고 싶었고, 자연을 누구보다 사랑했으며 고독이 제게 심어주는 참된 예지와, 자기본위의 최종완성을 이루게 해주는 그 유착관계를 저는 동경했습니다. 저는 몇 년간 산에서 살다시피 했습니다. 산은 제게 계절의 변화에 따른 인생의 의연한 의지와, 제 안에 곧 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불가피하게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그녀를 잊고 모든 세속적 욕망과 현세의 족쇄에서 벗어나 저만의 도를 터득했습니다. 그러한 도정은 세상에 대한 한에서 벗어나 불수不愁의 세계에 영원이 영면하는 힘겨운 과정이었습니다.







황보석 스승님, 나의 토마스 만이여, 나의 아버지여, 당신은 당위적으로 군자의 체질을 내재하고 있으며 자신에게 실로 정직한 사람입니다. 정직한 문인은 드문 법이지요. 그러니 당신의 제자인 제가 마땅히 모럴리스트가 되야 마땅하지만 저는 한명의 배교자일 뿐입니다. 제가 배교한 이데올로기는 중국의 현자들이 말한 인의입니다. 저는 인의를 깡그리 무시하고 지식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여기며 젊은 날을 향유하고 있습니다. 저는 사이비 지식인이며 기회주의자입니다. 저는 솔직히 문필가로써 앞에 놓여있는 가난의 길이 말도 할 수 없게 두렵습니다. 스승님, 전 학문에 소질이 없는 한명의 짐승같은 인간입니다. 제 본질은 근본적으로 악덕과 증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저는 볼품없는 소인배입니다. 저는 세속적 지식인의 자가당착이란 그물에서 종횡무진하는 개구리입니다. 저는 돈과 겉치장에 굶주린, 여색을 탐하는 젊은이입니다. 저는 이 혼잡한 도시가 좋고 서구문화의 황홀경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선망스럽습니다. 저는 동방의 물질적 비풍요, 채식주의를 경멸합니다. 인간은 자고로 육질 좋은 소고기를 먹고 커피를 마시지 않고는 힘을 쓸 수 없죠. 저는 서방세계 지향주의자입니다.







제가 3개월 동안 비교적 풍요로웠던 친척집에 기거하는 동안 전 환상, 지상이 곧 천국이라는 인식을 괘념했습니다. 미국은 진정으로 광대하고 엄청나게 풍요로운 나라였습니다. 제가 거주하는 집만해도 400평은 족히 되었습니다. 2층 집이었는데 그 더운 대륙풍 여름의 기후에도 무한정으로 나오는 에어컨은 저를 도취시켰습니다. 저는 하루 2끼는 고급레스토랑에 가서 양고기, 소고기, 스시, 바닷가재, 킹크랩 등을 맛보았고 고모부의 벤츠를 타며 부러울 게 없는 여행을 즐겼습니다. 프랑스산 하겐다즈 아이스크림이 지천에 널려있었고 한국과 달리 고급시가를 피우는 사람들도 곧곧에 포착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제가 감탄했던건 시카고의 도심이었습니다. 그 초고층 빌딩들의 숲은 저를 압도했습니다. 빌딩들은 구름을 넘어 하늘 끝까지 올라가는 바벨탑과 같았습니다. 도처에 대형 리무진들이 들끓는 것도 하나의 진풍경이었습니다. 한국에서는 볼 수 없는 대형 리무진이 미국에서는 일상이었습니다. 억만장자들이 이끄는 미국의 초자본주의는 신자유주의와 병치하여 미래 세계상의 전모를 속속히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디즈니 랜드는 가히 환상적이었습니다. 우리는 기다리지도 않고 특별표를 끊고 바로 들어가 난생 처음보는 최첨단 놀이기구들을 즐겼습니다.





집 밖의 깨끗한 잔디와 거대한 고목들과 그들을 비추는 황금빛 같은 햇살은 이곳이 지상천국이 아닌가 하는 착각에 빠지게 하였습니다. 저는 코카콜라 클래식을 하루 8캔이나 마셔댔고 게임기를 하면서 허쉬 초콜릿을 배가 터지도록 쳐먹어댔습니다. 각종 희귀한 과일 주스들이 있었고, 이름도 모르는 고급치즈들과 베이컨들이 냉장고에 가득 채워져 있었습니다.





고모부는 그 해 개인요트를 샀습니다. 가족들과 즐기기 위해서였습니다. 고모부는 본래 우리 집에서도 돈을 꿔 갈 정도로 변변찮은 사람이었는데 빈털털이로 미국으로 이민 가, 사회의 밑바닥인 웨이터 생활부터 시작해 기회를 잡았습니다. 95년 부터 2000년대 말까지 계속된 미국의 초호황기에 힘입어 거의 벼락부자가 된 입지전적인 이민자였습니다. 아메리칸 드림을 성취한 부류죠. 그들은 낭비를 일종의 미학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소비를 다른 방식으로서의 자선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과소비는 일상이었습니다. 고가 물건 구입은 생활 미학의 또다른 형태소였습니다.





미국인들은 이타적이고 창의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항상 열정에 넘쳐 있었습니다. 저는 산책길마다 그들에게 되지도 않는 영어로 인사말을 건네면, 그들은 친절하게 화답하였습니다. 아이들과 어른이 평등한 세상이었습니다. 나이에 따른 권력의 철폐, 동물을 존중하는 시민들, 사람들마다 개개인의 다양성을 존중하는 사고방식은 저라는 아이를 극도로 매료시켰습니다. 저는 미국이 좋았습니다. 그 집이 좋았습니다. 그러나 학업을 위해 돌아올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인천공항에 내리며 돌아온 그 순간, 흐릿한 하늘을 위시하고 있는 후진적인 한국이 제 눈에 들어왔습니다. 38평의 제 집은 개집이나 다름 없었습니다. 김치와 된장찌개를 보면 구토가 나올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한국에서의 세월이 지나갔고 전 다시 한국의 생활에 적응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내 중학교를 졸업하고 완전무결히 우울증의 세계에 입문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산에 간 것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저는 그 이후로 물질에 대한 모든 욕망을 소거하기 시작했습니다. 오디오들을 팔아 치웠습니다. 전 무소유라는 생의 방식을 실천하고 싶었습니다. 저는 자연인이 되고 싶었습니다. 산은 제게 끝없는 세계이거니와, 점증적인 사유를 가능케 해주는 광대무변한 장이었습니다.

















- 10장





이후 그는 펜을 내려놓고 피곤한 듯 고개를 푹 숙이고 잠시 졸으려고 했다. 그러나 그의 신경증은 그가 졸리면서도 잠에 접속하지 못하는 상태를 유지하게 했다. 사람이 졸린데 잠을 들 수 없다는 현상을 체험하는 것이 얼마나 괴로운 지는 당사자만이 알 수 있다. 그들은 마치 배고픈 데 밥을 못 먹고 똥이 마려운데 똥을 못 넣는 것처럼, 졸린데 잠을 이루지 못한다. 과학적인 측면에선 중추신경계[CNS]의 이상이다. 그러나 전체적인 입장에서 그는 단지 도를 따르지 못하는 불쌍한 중생에 불과하다.





도서실의 창문에는 어둠이 짙게 깔리고 있었는데, 마치 세계를 잠식할 듯 불안한 어둠이었다. 그는 가만히 고개를 들어 그 어둠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적 시정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어둠에 견주어 도서실 안은 휘황히 빛나고 있었다. k는 여전히 고독 속에 침잠해 있었다. 그는 고독을 숙명으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팔자였을까?







그는 앉아있는 창문을 맞은 편으로 바라보며 창문에 차가움이 새겨지는 것을 느꼈다. 건조하면서도 의미심장한 차가움이었다. 쓸쓸함이 응당 고개를 들어 전적인 자의식을 비추어준다. 그는 국가에 대해, 민주의 대의에 대해, 따라서 인간이 추구해야 할 생활패턴의 중용지도에 대해 여물지 않은 수심에 잠긴다. 뭐라고 이 정부의 모순을 규명해야 할까? 남한 정부가 걸어가고자 하는 살얼음판의 연방에서, 그들의 입지는 어디에서부터 구축되는가?





k는 속으로 되뇌었다.



'정부는 민심을 잃었다. 예로부터 민심을 잃은 나라 중 그 근본을 지킨 나라는 일찍이 없었다. 청와대는 언론 조작을 통해 자신이 파생한 각종 실패들을 시민들로 하여금 우회시키려고 한다. 강호순 사건으로 말미암아 경기도 일대에 경찰력이 쫙 깔렸다. 그 경찰력은 일시적인 만상이요, 의미없는 겉치례이다. 남한이란 좁은 변방지역은 그 가세를 잃었다.





민주주의의 대의는 어디에 있는가? 부의 양극화 현상을 조장하는 체제를 지향하는 정부가 어찌 민주주의의 참뜻을 주장할 수 있겠는가? 피상적으로는 자유주의이자 민주주의이다. 그러나 가만히 주위를 둘러보고 이윽고 자신의 상황을 파악해보면 이것은 내밀하게 속박되어 있는 또 하나의, 부르주아를 지축으로 상정되는 전제정치적 공산주의다. 해마다 바뀌는 법이 무슨 설득력이 있으며 누가 언행일치하지 않는 위정자들을 따르겠는가? 강호순이 소수를 즉흥적으로 죽였다면, 우리 시대의 부르주아들과 권세가들은 기생충처럼 다수의 서민의 등 끝에 붙어 서서히 그들을 도축하고 있다. 그러나 완전히 죽이지는 않는다. 그들은 냉담하다. 강호순처럼 사람을 즉시 처결하지 않고 살려두면서 고문한다. 남한의 서민은 언제까지 권세가들의 노예로 존재할 것인가? 윗물의 법률과 도덕률이 이미 땅에 떨어졌거늘 아랫물의 형편성도 어찌 맑을 수 있는가? 세상이 탁할진저!





정부가 주축이 되어 이끄는 속세는 더럽다. 속세는 항상 선악과 명리의 상대적 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 한계성을 피력해왔다. 세상은 계속하여 분립되어 왔고, 사물과 체계는 지속적으로 미분화되어왔다. 이 복잡하고 혼란한 급변하는 세상에서 중생은 어디있는가? 그대는 어느 부분을 응시하고 있는가? 그것은 국지적인 것인가, 전체적인 것인가?



창세도 말세도 없다. 오직 공空적만이 우주의 흐름을 설명할 뿐이다. 남한이 무너지고 다른 나라에 편입되더라도, 그리고 그 다른 나라마저 역사의 물줄기 속에서 잊혀져 갈 때, 우리 역시 역사에 기록되지도 아니한 채 한줌의 무기체로 변모할 것이다.'











많은 이들이 눈앞의 이익에 현혹되어 원시遠視적인 이익을 창출해내는 하나의 거시성, 전체적인 면을 제창하는 패러다임의 구조를 파악하지 못한다. 그 구조의 기축을 점지하는 실재를 직관적으로 파악하는 자만이 천하를 얻는다. 요컨데 한가지 역설이 있다. 속세와의 인연을 끊는 자만이 속세의 복잡다기한 커넥션을 치밀하게 꿰뚫어 볼 수 있는 법이다. 복잡다기한 커넥션, 영리 조직과 다른 영리조직간의 규합과 보이지 않는 거래며 결과적인 층위로 설명할 경우 세상의 급변하는 흐름-인위의 자연성을 면밀히 포착하는 자만이 행위자로써 이익을 얻을 수 있다.





k가 고개를 들고, 화장실로 건너가는 순간 또 예의 그 어린 소녀가 스쳐지나갔다. k는 기회를 놓치기 싫었다. 이것은 요컨데 찬스였다.



"저기 아가씨." 현숙한 기풍이 외면에서 잔잔히 흘러나오는 그녀. 그녀의 얼굴은 아주 귀여웠고, 그녀는 흰색 티셔츠와 넥타이를 입고 있었다. 소위 사립학교 학생풍의 패션이었다.



k가 그녀 앞에서 말을 더듬으메, 그러나 그와중에 뜻이 있어 거침없이 말하였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선禪이라고, 음양오행을 내재하는 기의 응집체와 모든 삼라만상의 혼연 일체의 중심에 위치하는 그것은 가라사대 무주의 본체를 만법의 자성自性으로 본연하는 대도大道가 카오스를 주재하여 그곳에서부터 물리성을 띄는 유有를 구성하는 순환적 줄기를 뻗어나가므로 만고의 불생불멸한 현리, 객체계와 현상계를 총괄하는 극치의 무수한 대비며 상대적 원리의 피안에 있는, 응당 관념적으로 유일무이한 자족하는 일종의 무상묘도한 화해체이자 무위의 경지에 안주하는 보이지 않는 핵심, 상서롭지 못한 무명無明과 공명스러움에 넋을 빼앗긴 번뇌들 중 그들을 구원할 유일무이한 계율 즉 빛나는 구도심求道心이라고 생각치 않습니까?"



아차, 문장이 너무 길었나. 어린 소녀는 그녀를 빤히 쳐다보다가 낄낄 웃어대고는 지나쳤다.



k는 잠깐 생각해보았으며 순수무구한 저 어린 소녀 같은 이들에게 특별한 이론적 설법은 필요없다고 생각되었다. 그 어린 것들은 이미 직관적으로 도를 알고 있고, 그것을 아는 자에게 해부하여 그 오묘한 이치를 가르치려들여도, 그들에겐 하나의 웃음거리 밖에 안 되는 것이다. 사람이 공기 속에 살지만 공기의 소중함을 자각하지 못하는 것처럼, 그녀가 선을 알아채지 못하는 것은 나름대로 적법한 원리가 있는 것이다.



소녀가 여자의 냄새, 소녀의 냄새를 풍기며 k의 이목의 도안을 방정히 채워넣었다.



어찌해야 할까. k는 갑자기 주눅이 들었다. 아찔했다. k는 단지 시인이자 문장가였다.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는 직장인도 아니고 당당한 사업가도 아니었다. k가 세속에서 추구했던 것은 입신양명이었다. 최소한 k는 자신의 사회에서의 출세를 물심양면으로 지지했다. 마음은 그랬다. 왜냐하면 k는 그것이 최상의 길이라고 부모와 친척들에게 배워왔으며, 그를 이유없이 괴롭히고 험담하고, 그의 용맹함과 자주성을 시기하는 작자들의 목을 쳐 내는 것울 정당한 복수 그럼으로 인해 k의 위신이라는 그릇을 충일한 대의명분으로 가득 채울 수 있는 유일한 지름길이라고 여겨왔다. k는 집안을 일으켜 세워야했다. 그리고 언젠가는 여린 그의 마음에 큰 상처를 낸 역겨운 숙적들을 믹서기에 넣고 갈아야 했다. 그리고 그 고깃핏물을 마셔야했다. 그래도 시원찮았다.



아니다, 아니다. 너는 옜날의 예술가들의 삶을 진정한 모범으로 여기지 않았는가? 부모의 한계를 깨라, 핵가족의 한계를 깨라. 진시황도 죽었고, 루이 14세도 j.p모건도 죽었고 그들은 모두 우주의 시공에서 다만 공空으로 남아있다. 그들은 자신의 과분한 권좌 아래서 자신의 생을 제대로 즐긴 것인가? 그들은 자기 만족의 최대치를 하늘이 그들에게 주어준 도식으로 하여금 진실되게 이끌어냈는가? 인류가 무한대의 안락함을 경험할지언정 거기에 임하는 감수성의 공허란 언제나 미증유의 얼굴을 들어내는 관세음보살을 자기 방식대로 개화시킬 수 있는가?



단순했다. k가 두려워하는 건 예술가의 빈곤한 삶이었다. 2000년 전에도 예술가들은 자기 재능의 사회에서의 무용성을 한탄했다. 고대중국과 고대유럽의 시인들, 예술가들의 재능은 단순한 기예로 받아들여졌다. 그들은 귀족들의 그림자가 되거나 가난 속에서 극히 빈곤한 삶을 살았으며 항시 지인들의 도움을 받고 살았다. 당대 최고의 예술가들도 안빈낙도하지는 못했다. 그 유명한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사상가 마르크스는 구둣장이보다 더한 가난에서 살았다. 그들 개인은 한마디로 뼈까지 시리는 가난을 제물로 바쳐 자신만의 절대정신을 확립했다.



지금이라고 다를 바가 없었다. 구도자, 예술가, 학자, 이론가들. 그들은 어느정도 집안의 부가 충족되지 않으면 늙어 죽을 때까지 추워 떨리는 뼈를 잡고 살아야 한다. 거기에 진리나 심미안이 무슨 가치가 있는가? 인간적인 생활도 영위할 수 없는 현실 속에서!





현시대의 그들은 모두 그러한 딜레마에 봉착해있다. 고상한 정신을 추구하나, 그 이면에는 피를 토하는 생활에 엄존해야하는 악마적 운명이 숨겨져 있다. 고상한 정신을 버리고 사회생활에 섞이려 해도 그것은 그의 본질에 부당한 일, 의미없는 생지옥이다.







k는 다시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책을 꺼내 읽었다. 이제 달이 떠오르는 저녁이었다. 집으로 갈 시간이었다. 현세의 미래에 대한 근심과 의문을 모를 공허가 그를 잠식했다.



창밖은, 새까만 어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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