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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 참사] 경찰, 오산 진압 때만큼만 했으면…
자유게시판 > 상세보기 | 2009-01-23 13:47:08
추천수 0
조회수   649

제목

[용산 참사] 경찰, 오산 진압 때만큼만 했으면…

글쓴이

노일준 [가입일자 : 2004-04-22]
내용
아래 기사를 보면 이번 사태와 크게 다른점을 볼 수 있습니다.



마지막에 아래와 같은 글이 보입니다.

<하지만 이 매뉴얼은 4년이 지난 용산 참사에서 철저하게 무시됐다.>



매뉴얼이 있으면 무엇하나요, 안쓰고 밀어붙이면 그만인데,



그리고 경찰특공대 투입결정은 화염병이 투척되기 전에 이미 결정된 사항입니다.

화염병을 던지기 때문에 진압할 수 밖에 없었다'는 변명에 불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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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철거민연합회 회원 24명과 철거민 등 30명이 대한주택공사에서 시행하는 오산 세교택지개발지구 내 4층 빌라에 진입한 것은 2005년 4월16일. 이들은 이곳에 12m 높이의 망루를 세워놓고 사제총, 시너 280ℓ, 휘발유 300ℓ, LP가스통 10개 등을 쌓아놓은 채 상가분양, 이주택지 제공 등을 요구하며 농성에 들어갔다.



경찰은 농성 첫날 이들을 해산하려던 용역업체 직원 이모(당시 26세)씨가 숨지자 즉각 병력을 동원해 해당 건물 봉쇄에 들어갔다. 사망 사고가 발생한 만큼 영장집행을 위해 이때부터 사실상 강제 진압 작전에 돌입한 셈이다.



하지만 경찰은 시간을 갖고 치밀한 준비에 들어갔다. 먼저 위험물질을 모두 소모 시키기 위해 '거북선'이라는 장비를 만들었다. 철판으로 외부를 감싸고 바퀴를 단 거북선에 4,5명이 들어가 농성장에 접근하면 철거민들이 화염병을 던져댔다. 이 거북선으로 소모시킨 화염병만 450여개에 달했다. 또 골프공과 벽돌조각도 없애기 위해 방염 처리된 이동식 그물도 동원했다.



이 과정에서 경찰이 골프공을 역으로 철거민쪽으로 날린 사건이 알려지면서 화성서장 등 경찰간부 4명이 대기발령 또는 직위해제 되기도 했다.



경찰은 위험물질이 어느 정도 소모됐다고 판단되자 본격적인 진압작전에 착수했다. 작전 책임자는 후임 화성서장으로 온 최원일(50) 현 양주서장.



경찰은 화성 동탄에 농성장과 비슷한 건물을 마련하고 크레인, 컨테이너, 살수차 등을 동원해 실전을 방불케 하는 연습을 수회 실시했다. 컨테이너에 특공대를 태워 진압하는 첫번째 작전인데다 철거민들이 시너, 휘발유 등으로 무장하고 있어 돌발상황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철저한 준비가 필수적이었다.



반복 훈련으로 자신감을 얻은 경찰은 농성장 작전에 대비해 빈 가옥을 철거하는 한편 철거민들과 협상에 나섰다. 협상은 잘 진행돼 한 때 낙관론이 제기되기도 했으나 6월6일 철거민들이 돌연 협상거부를 선언하자 경찰은 이틀 뒤 언론에 진압작전계획을 공개하고 전격 작전에 나섰다.



경찰은 농성 54일만인 8일 새벽 4시30분부터 경찰 25개 중대와 크레인 2대, 소방차 23대, 구급차 6대 등을 배치하고 진압작전에 나섰다. 시너로 인한 화재피해에 대비, 물이 아닌 포말소화액도 준비했다. 경찰은 실제 작전에서도 '돌 다리도 두드려본다'는 심정으로 빈 컨테이너를 매달아 접근시켰고 이 과정에서 철거민들이 사제총을 발사하며 격렬히 저항하자 최루액 살포까지 결정했다.



이날 낮 12시3분 특공대 20명씩을 태운 컨테이너 2대가 건물에 접근하기 시작했고 오후 1시20분 작전은 종료됐다. 30명을 연행하는 과정에서 철거민 2명만이 지병으로 병원으로 후송됐을 만큼 완벽한 작전이었다.



경찰은 세교지구 작전이 성공적이었다고 자평하고 같은 해 7월 실전대응매뉴얼을 발간해 각 경찰서에 배포했다. 경찰은 이 매뉴얼에서 이번 작전의 성공으로 인내력과 ▦철저한 사전훈련 ▦시위용품 소모작전 ▦CCTV를 통한 불법행위 홍보로 작전 공감대 조성 등을 꼽았다.



하지만 이 매뉴얼은 4년이 지난 용산 참사에서 철저하게 무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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